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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경연구/마태복음

애통과 하나님의 위로(마5:4)

by 금빛돌 2023. 12. 13.

노회 때 목사안수식을 합니다. 그때 보통 시간이 쫒기기 때문에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 잘 모를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저는 아직도 기억이 나는 목사안수식이 있습니다. 대구에서 제일 존경을 받는 목사님이 나오셨는데, 단 한마디였습니다. “저는 하루도 눈물이 없이 목회한 적이 없습니다. 저는 매일 웁니다. 여러분도 이렇게 목회하시기 바랍니다이것이 끝이었습니다.

-어느 청소년집회모임에 가서 이런 우스게 소리를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청소년들이 목사에 대해서 참을 수 없는 것이 두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설교를 길게 하는 것과 또 웃기지도 않는 설교를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참을 수 없는 것은 웃기지도 않으면서 설교를 길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사실 인간적으로 보면 애통한다는 것을 좋은 것이 아닙니다. 요즘 사람들은 가능하면 가볍고, 재미있는 것을 좋아합니다. 누구든지 무겁고 슬픈 이야기는 싫어합니다. 그래서 티브이를 보더라도 재미있지 않으면 채널을 돌립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의 삶이 너무 피곤하고 우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 우울하고 재미없는 이야기를 보기 싫어합니다. 특히 요즘처럼 살기가 어려울 때는 더욱더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는다 하더라도 그때 뿐이지 지나고 나면 또 여전히 답답한 현실이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물론 우리가 삶이 힘이 드니까 항상 힘들다 슬프다 하면서 살아갈 필요는 없지만--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솔직할 필요가 있습니다.

--복음서에 보면 가장 문제가 되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문제와 아픔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안 그런 척 하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속은 마치 무덤처럼 썩고 있는데, 겉으로는 그렇지 않은 척 하는 것이 바로 바리새인들입니다.

--이런 바리새인들에게 하신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원이 필요 없고, 병자에게 의원이 필요하다 나는 스스로 건강하다고 하는 사람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병자를 부르기 위해서 왔다”(9:12,13)고 하셨습니다.

--나는 괜찬다--문제없다--하나님의 위로가 필요 없다고 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위로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 앞에서 주여 나는 하나님의 위로가 필요합니다. 저는 병들었고,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 나는 곤고합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라고 부르짖는 자는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아픔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애통하지 않습니다.

왜 아픔이 있는데 애통하지 않습니까? 이론적으로 보면 당연히 아픔이 있으면 애통해야하지만, 우리 주위를 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를 보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존심과 체면 때문입니다. 한국남자들의 경우 체면문화 때문에 남자는 울지 말아야 된다고 교육을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남자들이 일찍 죽습니다. 여자분들은 잘 웃고 잘 울기 때문에 오래 산다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알량한 자존심과 체면 때문에 울지 못하고-기도하지 못한다면 그것만큼 어리석은 것은 없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이렇게 말햇습니다인간은 누구나 백인이든 흑인이든,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알량한 자존심과 체면에 붙잡혀 불행하게 살아갑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에서 끊어지게 됩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자존심과 체면을 여지없이 무너 뜨려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울면 어떻습니까? 울고 싶으면 울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은 우리에게 부스르기의 은혜라도 받을 수 있습니다.

--또 울어야 할 때 왜 울지못하는가 하면 울음을 잊기 위한 진통제들 때문입니다. 어느 책에 보니까 치과의사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 아스피린이라고 합니다. 이가 문제가 있으면 아파야 합니다. 그런데 아플 때마다 진통제를 먹기 때문에 아프지 않습니다. 이러다 보면 이가 속에서 썩어가고 있습니다.

-특히 요즘 울음을 잊게 하는 진통제들이 너무 많습니다. 거짓된 위로와 평안을 조장하는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특히 티브의 오락 프로나 드라마를 보다보면 모든 것을 다 잊게 합니다. 그러나 잠시 잊어보려 하지만 결국 그 속에 더 큰 상처만 가지게 됩니다.

--또 왜 아픔이 있지만 애통하지 않습니까? 좌절하고 포기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은 좌절이란 너무 고통스러워 눈물조차 나오지 않는 것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왜 애통하지 않습니까? 좌절하고 포기하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실존주의로책에서 빅터 프랑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진정 우리가 극복해 나가야 할 고통은 이 세상에 너무나 많다. 그렇기에 우리들은 약해지려는 순간을 극복하고 흘러내리려는 눈물을 씹어 삼키며 잔득 도사리고 있는 고통과 맛설 필요가 있다. 하지만 눈물을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다. 눈물은 가장 위대한 용기다. 눈물이란 고통을 참고 견딜 수 있는 용기가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다. 지극히 소수의 사람만이 깨달았을 뿐이다. 어떤 사람은 겸연쩍은 얼굴을 하고 종종 자기도 울었다는 사실을 고백하였다. 나의 동료 가운데 한 사람도 눈물을 흘렸다고 고백한 적이 있었다. 그 동료는 한때 부종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부종을 어떻게 이겨 낼 수 있었냐고 물었다. 그때 그는 대답했다. 나는 부종을 실컷 울어서 몸 밖으로 내보냈오

-여러분 답답하십니까? 억울하십니까? 그러면 우시기 바랍니다. 울어야 할 때는 울어야 합니다.

그런데 애통에 대한 잘못된 생각이 있습니다.

*그런데 또 이런 애통이 탄식과 원망이 되어서는 되지 않습니다.

애통과 탄식은 다릅니다.

애통과 탄식이 어떻게 다릅니까? 애통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것이고, 탄식은 사람앞에 우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울기는 우는데 하나님 앞에서 울지 않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탄식합니다.

이것은 오늘 본문에 말하는 애통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애통이란 하나님 앞에서 우는 것입니다.

오 하나님 당신만이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실 줄 믿습니다 라고 하면서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을 향해 울부짖는 것이 애통입니다(제일 중요하다).

*또 억지로 울려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것을 슬픔주의(새디즘)이라고 합니다. 억지로 울 필요는 없습니다. 진정한 애통이란 눈물을 흘리거나 소리를 내어서는 우는 것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심령이 하나님 앞에서 고요히 애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억지로 울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일부러 소리내어 우는 것도 외식일수 있습니다. 하나님앞에서 마음으로 우시기 바랍니다. 소리가 나지 않고 눈물도 없어도 애통할수 있습니다.

참된 애통은 하나님을 향하여서 애끓는 가슴을 솔직히 내놓는 것입니다.

한나는 그의 애끓는 가슴을 하나님께 내놓았습니다. 그래서 고통이란 높이 계신 하나님과 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애통하는 자를 찾으십니다. 설교를 할 때 가장 아름다운 성도는 멀리서 봐도 그 눈에서 눈물이 보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무리 숨어있어도 애통하는 자를 정확하게 찾아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애통하는 자의 부르짖음을 절대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이분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기도하다가 어떻게 해서 하나님을 찬송하게 되었습니까?

22:24. 그는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그의 얼굴을 그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시고 그가 울부짖을 때에 들으셨도다

하나님은 교만하게 나는 아무렇지도 않습니다라고 하는 자에게는 심판과 공의의 하나님으로 나타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애통하는 자의 부르짖음에는 결코 가만히 있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애통하는 자의 부르짖음을 반드시 들어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여 비노니 나의 기도 들으사 애통하며 회개할마음 충만하게 하소서 회개할 마음 충만하게 하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두고 애통해야 합니까?

1)우리가 인간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답답한 문제들을 가지고 애통해야 합니다.

도무지 그 어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답답한 문제가 있습니까? 혼자 울지 마시고 기도의 자리 나와서 하나님 앞에서 우시기 바랍니다.

또 만일 내게 애통할 문제가 없으면 우리 주위에 애통하는 사람들을 위해 울며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가운데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사람을 봅니다. 정말 그런 사람이 복을 받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하나님의 뜻대로 잘되지 않는 것을 봅니다. 그런 사람을 보면서 속으로 애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정말 저 사람이 복을 받게 하옵소서, 저 사람의 앞길을 열어주시옵소서, 형통하게 하여 주시옵소서그래서 하나님에게 영광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고 하고 있습니다.

또 저는 요즘 들어서 전도 대상자들을 두고 속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스마트폰에 있는 기도느트애 전도대자들을 적어놓고 새벽마다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우울증에 걸린 그 사람과 함께 하여 주시옵소서”, 그 사람이 말씀을 통해서 우울증을 극복하고 하나님께 나올 수 있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답답한 문제들이 있습니까? 그러면 하나님께 나아와 애통하며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때가 되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또 우리는 이 땅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지 않는 것에 대해서 애통해야 합니다.

9장에 다니엘서의 기도가 나옵니다.

9:18. 나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여 들으시며 눈을 떠서 우리의 황폐한 상황과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성을 보옵소서 우리가 주 앞에 간구하옵는 것은 우리의 공의를 의지하여 하는 것이 아니요 주의 큰 긍휼을 의지하여 함이니이다 19.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귀를 기울이시고 행하소서 지체하지 마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 이는 주의 성과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바 됨이니이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 애통하며 기도하는 동기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입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을 드러내야 할 예루살렘이 황폐하게 된 것을 두고 하나님께 애통하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께서 이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는 동기가 무엇입니까?

단순히 우리가 모였기 때문입니까? 이 교회는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을 드러내는 곳입니다.

하나님이여 이 교회가운데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을 나타나지 않는 것을 두고 우리는 울며 애통하며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왜 우리가 우리 가정을 위해서 기도를 합니까? 단순히 우리 가정이 잘 되게 하기 위함입니까? 또 단순히 우리 자녀가 잘되게 하기 위함입니까? 아닙니다. 우리 가정이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을 나타내어야 할 가정이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 자녀도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을 드러낼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을 위해서 울면서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3)또 나의 죄악의 문제를 두고 애통해야합니다.

우리가 온유를 말하지만 아직 우리 안에 온유가 없습니다. 우리가 사랑을 말하지만 우리 안에 사랑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런 우리 자신을 두고 하나님께 울어야 합니다. 애통해야합니다. 내 안에 내 의지로 해결하지 못하는 습관적이고 반복적인 죄에 대해서 하나님에게서 울고 회개해야합니다. 오주여 나를 위해 회개의 눈물을 강같이 흘리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해야합니다.

3)또 우리는 다음세대를 위해서 애통의 눈물을 흘려야합니다.

소돔 고모라시대와 호세아 아모스시대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육신적으로 가장 부요하고 번성할 때였습니다. 그런데 문화적으로는 가장 음란하고 타락할 때였습니다.

지금이 바로 그런 때입니다. 아이들이 즐겨보는 티브 연예프로에 사랑하는 연인에게 줄 최고의 선물이 무엇입니까라고 하니까 1위로 나온 것이 순결이라고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도 여성 응답자들에게 이런 대답이 나왔습니다. 아름답게 포장된 문화적 매체를 통해서 동성애라는 것이 더 이상 우리에게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이 우리 현실입니다. 사람은 문화가 바뀌면 의식이 바뀌고-결국 의식이 점령되면 삶은 따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우리는 다음세대들을 둘러싸고 있는 문화적 현실을 두고 울어야 할 때입니다.

--특히 우리 자녀들 신앙 문제는 우리 힘으로 되지 않습니다. 아이들의 신앙은 분명 부모를 닮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부모가 신앙의 본을 보인다 하더라도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이기에 부모의 신앙대로 되지 않습니다. 오래 전에 박영돈 목사님께 전화를 걸어보니까 그날 온 가족이 그 집에 아이를 위해 금식하고 계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누구도 내 아이는 괜찮다 장담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합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처럼 우리 자녀를 위해 울어야 합니다. 이것밖에 없습니다.

--저는 주일학교를 다니면서 제일 기억이 나는 교사가 있습니다. 저는 그분 이름도 모릅니다. 또 내가 무엇을 배웠는지 모릅니다. 한 가지 기억나는 것은 그분이 아이들을 위해 우는 교사였습니다. 정말 우리 아이들을 위해 우는 부모가 되고 교사가 되기를 바랍니다.

-롯을 보십시오. 롯은 자신의 시대나 가족이나 심지어 아내도 변화시키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베드로후서에는 어떻게 말합니까?

베드로 후서 278벧후2:7,8 무법한 자의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하는(애통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이 의인이 저희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희의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이 상하니라”.

비록 우리가 이 시대를 거창하게 변화시키지 못하고, 내 가족도 변화시키지 못할지라도 우리는 주님 앞에서 울기만이라도 하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이렇게 애통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입니까? 통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에 보면 하나님은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우리에게 고난이 넘친 것만큼 위로도 넘치게 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애통하는 만큼의 위로가 주어집니다. 애통한 양만큼 만큼 하나님은 위로의 양도 넘치게 해주십니다. 이것이 애통하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눈물을 흘린 만큼 위로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의 눈물만큼 응답하시고 위로해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껏 실컷 더 많이 하나님 앞에서 우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위로는 단순히 심리적 인위안만 아닙니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위로하심은 단순히 심리적인 면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지금 내가 고통당하는 이 삶의 현장 속에서 들어오셔서 그 안타까운 문제들을 해결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16장에서 보면 하갈이 이스마엘을 잉태하고 사라의 미움을 받아 광야로 쫒겨 나게 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자를 보내어 하나님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다(이스마엘)”고 하갈을 위로 합니다. 그리고 다시 하갈은 다시 집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때 하갈이 자기를 위로 하신 그 하나님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감찰하시는 하나님이란 말은 애통하는 인간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하갈은 그를 위로하시는 하나님을 만났던 그 곳을 브헬라헤로이라고 합니다. 브헬라헤로이라는 말은살아계셔서 나를 지켜보신 자의 우물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살면서 어렵고 힘들어, 내 삶 가운데 하나님의 위로가 필요할 때 브헬라헤로이의 하나님 브헬라헤로이의 하나님이렇게 기도합니다. 그러면 얼마 후 하나님께서 제 삶 속에 구체적으로 찾아오셔서 그 문제들을 해결해주시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하나님이 불택 자인 하갈도 위로하셨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택하신 자녀들의 밤낮 부르지는 기도를 절대 외면하지 아니하시겠습니까?

-복음송에 하나님게로 더 가까이 갑니다 고통 가운데 계신 주님 변함없는 주님의 크신 사랑 영원히 주님만을 섬기리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울더라도 씨를 뿌려야 합니다. 울기만 하면 되지 않습니다. 울더라도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눈문을 흘리며 씨를 뿌려야 합니다. 그러면 영광과 기쁨의 단을 가져오게 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년에 특별히 다음 세대를 위해서 눈물을 흘리며 말씀의 씨를 뿌리려고 합니다.

/열매는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열매를 거두게 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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