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의 생애는 애굽의 왕자로서 40년이 있고, 광야에서 나그네로서 40년이 있고, 하나님의 불붙는 사역자로서 40년이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이 모세의 생애가운데 언제가 가장 중요한 때라고 생각하십니까?
80세 이후 불붙는 하나님의 사역자로서 40년입니다.
그런데 붙 붙는 사역자로서 40년이 있기 위해서 광야에서 40년이 있었습니다.
모세의 40년 광야 생활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40년 광야 생활을 미리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또 요한계시록에 보면 이 땅에서의 우리의 삶이 광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계12:6).
그러면 여러분 하나님께서 왜 모세를 왜 광야로 인도하십니까?
그리고 왜 이스라엘을 광야로 인도하셨습니까?
또 왜 우리를 광야로 인도하십니까?
혹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삶이 광야라고 느껴지십니까
하나님께서 내 삶의 주인이라고 하시는데 왜 나를 끝이 보이지 않는 광야로 인도하십니까?
하나님께서 모세를 40년 동안 광야로 인도하신 것을 통하여 왜 우리를 광야로 인도하셨는가를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모세를 광야로 인도하셨습니까?
첫째는 겸손을 훈련시키기 위함입니다.
40살 때의 모세는 그 자신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애굽에서 최고의 왕자교육을 받았습니다. 또 어머니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최고의 신앙교육도 받았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애굽의 왕자 교육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우선 했습니다. 그래서 애굽의 왕자로 있기를 거절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는 삶을 선택했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히브리서에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히11장 24절-26절을 읽어보겠습니다.
“히11: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이와 같이 40살 때의 모세는 우리가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전혀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실 때 문제가 있었습니다. 믿음도 있었습니다. 또 믿음에 따른 용기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구출해야겠다는 비전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겸손하지 않았습니다. 그 자신이 힘으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만입니다. 모든 것이 다 갖추어져도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십니다. 하나님이 물리치시면 그 앞에서 서 있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겸손해질 수 있습니까? 사실 제일 어려운 것이 겸손입니다. 만일 겸손이 공부를 한다고 해서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또 겸손에 관한 설교 한 두 편으로 사람이 겸손해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또 내가 겸손해야겠다고 생각해도 겸손해질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겸손해질 수 있습니까? 사람이 겸손해질 수 있는 것은 광야밖에 없습니다.
40살 때의 모세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그의 생각대로 모든 것이 다 잘 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사람을 죽이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광야로 도망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그러면 그 광야에서 4일이나 4개월 정도만 있어도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40년 광야 생활을 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줍니까?
사람이 겸손하게 되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모세의 경우도 40년이 걸렸습니다.
왜 40년이겠습니까? 모세는 40년 동안 성공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교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성공한 40년의 교만을 꺾어버리기 위해서 실패하는 40년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철저히 겸손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40년이 지난 뒤 모세를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나는 말을 잘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스테반이 어떻게 모세에 대해서 설교합니까?
행7:22.모세가 애굽 사람의 모든 지혜를 배워 그의 말과 하는 일들이 능하더라
그러니까 40세까지 모세가 제일 잘하는 부분이 말이었습니다. 당시에 애굽에서 왕자교육의 첫 번째는 수사학입니다. 당시에 왕들은 백성들을 말로서 움직여서 전장에 나가게 했습니다. 그러니까 40살까지의 모세가 제일 잘하는 것은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광야 40년이 지난 후에 모세는 말을 잘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광야로 인도하십니까? 그것은 내가 인간적으로 제일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부분들을 완전히 부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나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습니다” 했는데 이제는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라고 고백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과거에 광야의 삶을 사셨습니까? 또 지금 광야의 삶을 살고 계십니까?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광야의 삶을 살게 하십니까?
하나님 앞에서 나를 완전히 절망시키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완전히 완전히 절망한 나를 들어서 쓰시기 위해서 지독한 실패의 광야로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언제 우리에게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보여주십니까? 그것은 광야의 삶 속에서 겸손의 시험에 합격할 때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겸손한 사람입니까? 사도바울은 겸손한 사람은 나보다도 남을 낫게 여기는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다른 사람들에게서 배울 것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없다고 생각하십니가? 겸손한 사람은 모든 사람들에게서 배울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나보다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얼마나 다른 사람들에게서 배우려 하십니까? 나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에게도 배울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입니다.
또 어떤 사람이 겸손한 사람입니까? 겸손한 사람은 낙심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내가 부족한 사람이라는 것 때문에 낙심하는 사람은 교만한 사람입니다. 내가 부족하다는 것 때문에 낙심하다는 것은 내가 그만큼 대단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겸손한 사람은 내가 부족한 것이 너무나 당연하기에 자신의 부족 때문에 낙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겸손한 사람은 실패하여 넘어져도 자신 때문에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을 더 의지함으로 일어서는 사람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기에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절대 자신을 스스로 높이려 하지 않습니다. 또 누가 나를 왜 알아주지 않는가 하지 않습니다. 또 하나님을 향해서도 왜 나를 높여주지 않습니까? 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숨어 있는 겸손한 자를 정확하게 찾아내십니다. 또 겸손한 사람은 높은 데가 아니라 항상 더 낮은 곳에 마음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겸손한 사람은 연약하고 힘이 없는 사람들에게 더 관심을 가지는 사람입니다.
또 겸손한 사람은 아무 것도 염려하지 않고 모든 것을 다 하나님께 맡기는 사람입니다.
또 겸손한 사람은 분별은 하지만 내가 판단을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무엇보다 겸손하면 인생의 광야가 먼저 보이지 않고, 그 광야 가운데서 함께 하시고 안아주는 하나님만 보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미디안 광야 40년을 보내고 난 다음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한 40년의 광야를 어떻게 고백했습니까?
“신1: 31.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 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 겸손의 시험에 통과하여 내 인생의 광야에서도 환경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품어주시고 안아주시는 하나님이 보일 수 있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또 왜 하나님께서 40살 때의 모세를 광야로 인도하셨습니까?
두 번째는 온유의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민수기12장에 보시면 모세가 구스여자를 취하였으므로 모세의 누이 미리암과 모세의 형인 아론이 모세를 비방합니다. 또 그들은 하나님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하나님께서 우리와도 말씀하시지 않았느냐고 합니다. 그런데 이에 대해서 모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모세의 권위를 세워주십니다.
이런 모세에 대해서 민수기 12장3절에서 “민12:3.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고 합니다.
그러면 모세가 원래 온유한 사람이었습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40세의 모세는 애굽사람을 죽일 정도로 성격이 불같은 사람이었습니다. 또 급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모세가 어떻게 이 땅의 모든 시람보다 온유한 사람이 되었습니까? 그것은 광야 40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믿음이 있고, 또 하나님을 향한 바른 비전이 있더라도 우리가 인간적인 혈기를 가지고 있다면 절대 우리를 사용하시지 않습니다.
온유가 무엇입니까? 온유란 절대 약한 것이 아닙니다. 온유란 힘이 있지만 사랑을 인하여 그 힘을 절제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온유란 할 수 있는 말이 있어도 말을 절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온유란 자기의 때에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때를 잠잠히 기다릴 줄 아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다른 사람이 나에 대해서 말을 할 때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흥분하십니까? 낙심하십니까? 온유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말에 대하여 흥분하거나 낙심하지 않고 그것을 자신의 영적성장의 도구로 사용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무엇보다 온유란 하나님 앞에서 큰 일을 도모하기 전이 묵묵히 작은 일을 잘 감당할 줄 아는 것입니다.
//200만 명을 출애굽 시키려던 모세를 하나님은 광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모세 앞에 어려움을 당하는 연약한 여인들과 양떼를 보게 하셨습니다. 그 여인들은 양떼들에게 물을 주려고 했는데 악한 목자들에게 쫓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출2장 17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출2:17. 목자들이 와서 그들을 쫓는지라 모세가 일어나 그들을 도와 그 양 떼에게 먹이니라”
//하나님은 200만명을 돕는 자가 되기 전에 몇 명이 되지 않은 연약한 여인들을 도우는 일을 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3장 1절에 보면 “1. 모세가 그의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 떼를 치더니”라고 합니다. 여기서 보면 모세는 40년 동안 광야에서 자신의 양 떼도 아니고 장인의 양 떼를 치고 있습니다. 목자는 중동지방에서 가장 천한 직업입니다. 그래서 목자는 법정에서 어떤 말도 증언으로 채택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모세는 많은 사람들 돕기를 바랐는데, 하나님은 적은 자를 돕게 하셨습니다. 모세는 더 큰 일을 하기를 원했는데 하나님은 작은 일을 하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큰 일 하려는 자가 먼저 작은 일에도 충성할 수 있는 것을 온유입니다.
//이와같이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광야로 인도하십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더 겸손하고, 사람 앞에서 더 온유한 자가 되기 위함입니다.
이 겸손의 시험과 온유의 시험과 훈련에 잘 통과할 수 있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모세와 같이 마음껏 쓰시고, 또 하나님께서 축복해줄 수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셋째, 하나님께서 모세를 광야로 인도하신 이유는 불꽃과 같은 인생을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여러분은 촛불과 등불의 차이가 무엇인 줄 아십니까? 촛불은 스스로를 태웁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다 타면 없어집니다. 그러나 등불은 자기 스스로를 태우지 않습니다. 기름으로 탑니다. 그래서 기름이 계속 공급이 되는 한 그 불꽃은 꺼지지 않습니다.
불교에서는 촛불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성소에서는 등불을 사용합니다.
많은 분들이 불꽃과 같은 인생을 살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불꽃인생에는 촛불인생이 있고, 등불 인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인생은 촛불인생이 아니라 등불 인생입니다.
자신이 스스로 타서 없어지는 촛불과 같은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기름으로 영원히 타는 등불 같은 인생이 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성소에는 촛불이 아니라 등불이 있습니다. 모세는 40세까지는 촛불인생으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40세가 되었을 때 그 자신의 힘으로 동족을 구원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애굽사람을 죽였습니다.
//이것이 40세 모세의 촛불 인생입니다.
이것은 마치 오늘 본문에 나오는 떨기나무와 같습니다. 떨기나무는 사막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나무입니다. 이 떨기나무는 촛불처럼 불이 붙었다가 나중에는 다 타면 금방 없어집니다.
40살 때의 모세는 불이 붙었다가 사라지는 떨기나무와 같았습니다.
우리 모든 인생은 떨기나무와 같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불이 붙었다가 다 타고나면 더 이상 불이 타지 않는 떨기나무와 같습니다.
여러분 혹 지금의 모습이 한때는 불이 붙었는데 지금은 타다가 연기만 남은 떨기나무와 같지 않습니까? 이제는 연기도 나지 않고 재만 남은 떨기나무와 같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십니까? 떨기나무와 같이 타서 없어질 수밖에 없는 나무가 아니라 떨기나무 가운데서도 불이 꺼지지 않는 불꽃과 같은 인생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3. 이에 모세가 이르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니
--여기서 모세가 왜 불붙는 떨기나무를 주목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떨기나무가 불이 붙었지만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왜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지만 타지 않는가 하여 가까이 가서 보았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떨기나무 불꽃가운데 계시며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어떤 뜻을 가지고 있습니까?
“모세야 그동안 너는 이 떨기나무와 같이 살았다. 그래서 네 열정과 힘으로 불타는 삶을 살았다. 그런데 이제 어떻게 되었나 이제 너는 마치 불이 붙었다가 이제 완전히 다 타버린 떨기나무와 같지 않으냐. 그런데 이제 떨기나무와 같은 너와 함께 주겠다. 이제 네 스스로 타다가 없어지는 불꽃이 아니라 내가 붙여줌으로 꺼지지 않은 불꽃인생이 되게 해주겠다”는 뜻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를 광야로 인도하십니까? 왜 우리로 하여금 타다가 재가 되어버린 떨기나무와 같게 하십니까? 왜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이제 더 이상 탈것도 없는 떨기나무가 되게 하셨습니까? 왜 하나님께서 우리로 절망케 하십니까? 왜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무능케 하셨습니까? 왜 우리가 정말 아무 것도 아닌 자가 되게 하셨습니까?
--그것은 우리로 하나님의 불꽃을 붙여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만일 여러분이 지금 내 인생에 가장 밑바닥이다- 절망이다-더 이상 내 안에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그때부터 희망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내 인생의 전반전이 다 타서 없어지더라도 내 인생의 후반전에는 이제 하나님의 불로 나를 태워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모세를 보십시기 바랍니다. 모세는 이미 전반전을 지나고 후반전도 다 지난 연장전의 인생이었습니다. 저는 모세를 볼 때마다 모세의 지팡이를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 모세의 지팡이가 능력의 지팡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홍해를 가르고 반석에서 물이 나오게 한 지팡이입니다. 그런데 이 모세의 지팡이는 모세의 연약을 나타납니다. 그래서 모세는 80세의 노인으로 지팡이를 의지해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연약의 지팡이에 불을 붙여주셔서 능력의 지팡이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내가 나이가 들어서 지팡이를 의지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가지고 절대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의 연약의 지팡이에 불을 붙여서 능력의 지팡이로 사용해 주실 것을 믿으시기바랍니다. 그래서 인생의 전반전, 후반전을 지나 연장전이 되어도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불꽃과 같이 되게 하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디
//우리도 이런 비전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나를 낮추신 만큼 높여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내가 실패한 만큼 성공하게 하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내가 무능을 겪은 만큼 하나님의 불붙는 능력을 입게 하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 무엇이 불꽃 인생입니까?
1) 그것은 가만히 서서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보는 인생입니다.
모세의 경우 앞을 봐도 홍해가 있습니다. 뒤를 봐도 그를 죽이려는 바로의 군대가 있습니다. 또 하나님의 백성들도 우왕좌왕하고 모세를 비난하고 있습니다.
그때 무엇이 불꽃인생입니까? 출14장 13.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14.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여러분 우리의 가장 큰 문제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아무 것도 하지 않음이 문제가 아니라 아직 우리 힘으로 무언가를 하고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힘이 빠질 때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의 힘이 빠지지 않으면 절대 하나님은 역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모든 힘을 다 빼고 온전히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가만히 있는 것입니다. 물론 가만히 있는 것만이 아닙니다. 가만히 있는 중에 하나님이 일하시도록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그래서 나는 이제 아무 것도 할 것이 없어서 기도만 했는데, 하나님의 일하시는 것을 볼 수 있는 불꽃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둘째, 불꽃인생은 우리의 힘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살아가는 인생입니다. 오직 말씀만이면 불타지 않은 장작개비와 같습니다. 오직 성령만이만 불쏘시개가 없는 불과 같습니다. 그래서 말씀의 장작개비 위에 성령의 불꽃이 붙여져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부흥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아볼로의 제자들에게 너희가 믿을 때 성령을 받았느냐 고 합니다(행19:2).
행19:2. 이르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르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
로이드존스 목사님은 믿을 때를 믿은 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볼로의 제자들은 말씀의 지식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성령의 불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너희가 믿은 후에 성령을 받았느냐고 바울이 말한 후에 그들에게 성령의 불이 임했습니다. 그랬을 때 그들은 성령의 불붙는 사역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말씀 위에 성령의 불이 붙어서 우리의 인생이 성령의 불로 불타오르는 불꽃 인생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셋째, 불꽃 인생이란 나의 인간적인 사랑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불붙는 사랑으로 살아가는 인생입니다. 사도바울도 한 때는 하나님을 너무 사랑해서 스테반을 돌로 쳐서 죽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말합니까? 고후5:14.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여러분 지금 낙심하셨습니까?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불이 식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불로 다시 불을 붙이시기 바랍니다.
호11:8.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사랑)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하나님의 절대 꺼지지 않는 사랑의 불로 꺼지지 않는 불꽃으로 살아가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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