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역사를 얼마나 기다리고 계시고 사모하고 계십니까? 하나님의 역사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직접 우리의 삶 속에서 들어오셔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관념적인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삶 속에서 직접 들어오셔서 역사하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백성들이 고통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직접 찾아오셔서 역사하기를 원하십니다.
느헤미야서를 보면 하나님의 선한 손이 느헤미야를 도우셨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느헤미야 2장 8절에 “느2:8.-내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시므로 왕이 허락하고-”고 합니다. 또 느2장 18절에 “느2:18. 또 그들에게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신 일-을 전하였더니-”라고 합니다.
여러분 어떻게 페르시아 왕이 마음을 열어서 느헤미야가 성벽을 건설하는 것을 허락하였습니까? 하나님의 선한 손이 도와주셨기 때문입니다.
또 수십 년 동안 중단되었던 예루살렘 성벽 건설을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습니까? 느헤미야가 하나님의 선한 손이 그를 도우신 일을 사람들에게 전했을 때입니다.
이사야 59장 1절에 보면 “사59:1.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삶 속에서 하나님의 선한 손이 여러분들과 함께 하시는 것을 경험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출애굽기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가장 잘 보여주는 책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가 어떻게 우리의 삶 속에 이루어집니까?
첫째, 인생의 끝에서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이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가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순간마다 나타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역사는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순간마다 나타나는 것이 아닌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 우리의 삶을 보더라도 하나님의 역사가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순간마다 나타나는 것이 아닌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목사님은 일 년을 52주로 한다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 가운데서 직접 나타나셔서 역사하시는 것은 1주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대부분 많은 시간들을 보면 하나님은 우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그러시다가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결정적인 때가 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가운데 나타나셔서 역사하십니다.
그러면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보시다가 우리의 삶 속에서 나타나셔서 역사하시는 때는 언제입니까? 그때는 우리 인생이 끝이라고 할 때입니다. 우리 인생이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으면 이제는 더 이상 살아갈 수 없을 때입니다. 인간적인 노력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입니다.
여러분 제자들이 언제 풍랑이는 바다 위를 걸어오신 예수님을 만나볼 수 있었습니까? 밤 사경 때입니다. 그러면 밤 사경이 되기 전에 예수님은 무엇을 하고 계셨습니까? 산에서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그때 제자들이 풍랑이는 바다에서 죽을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그들이 고통당하고 계시는 것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기도하시다가 상황이 더 좋지 않자 뭍으로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보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당장 오지 않았습니다. 언제 오셨습니까? 밤 사경입니다(막6:47,48). 밤 사경이 언제입니까? 제자들이 인간적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하였을 때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인간적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입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애굽 왕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억압하고 압제했습니다. 이것은 사탄이 하나님의 백성을 억압하고 압제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번성했습니다. 그러자 바로는 산파들에게 남자아이를 다 죽이라고 했습니다. 그래도 산파들은 하나님의 두려워함으로 남자아이들을 살려주었습니다. 그래서 이스엘은 더 번성했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바로가 어떻게 합니까? 출1:22. 그러므로 바로가 그의 모든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아들이 태어나거든 너희는 그를 나일 강에 던지고 딸이거든 살려두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21절까지는 그래도 산파들의 도움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어떤 사람의 도움도 없을 때입니다. 그래서 아들이 태어나면 부모가 아들을 직접 죽여야 하는 때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부모가 아들이 태어나자 죽일 수 있습니까?
그래서 인간적으로 말하면 왼전한 절망의 때입니다
이때가 얼마나 절망의 때인가하는 것을 1-3절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 본문을 자세히 보시면 모세의 아버지가 무엇을 합니까? 레위 여자에게 장가를 간 일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일을 모세의 어머니만 일하고 있습니다. 갈대상자를 만들어서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하고 아이를 갈대상자에 담아 갈대 사이에 담아두는 모든 일을 모세의 어머니만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위기의 때에 누가 나서서 일을 합니까?
위기의 때에는 여자들이 나서서 일을 합니다. 그래서 출1장과 2장에 보면 여자들이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여성들이 등장한다는 것은 이 때가 이스라엘 남자들이 아무 힘도 쓸 수 없는 때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칼빈은 이때를 남편이 너무 상심이 되어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낙심의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아내가 혼자서 일을 할 수밖에 없었던 때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때 주님의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여러분 지금이 바로 이런 때가 아닙니까? 코로나 때문에 3년 동안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도 인간적으로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하는 때가 아닙니까?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의 역사가 언제 우리의 삶 속에 나타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인간적으로 완전히 절망할 때입니다. 이 때가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이 될 때라는 사실을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사야서에서도 우리 인생의 끝에서 내가 너를 붙들고, 우리를 부르시고 말씀하겠다고 하십니다. 사41:9. 내가 땅 끝(인생의 끝)에서부터 너를 붙들며 땅 모퉁이(인생의 끝)에서부터 너를 부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나의 종(것)이라 내가 너를 택하고 싫어하여 버리지 아니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여러분 지금이 혹시 내 인생이 완전히 끝이라고 생각이 되십니까? 내 인생이 더 이상 인간적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라고 느껴지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 인생의 끝이 도리어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될 때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더 구체적으로 어떻게 우리 인생의 끝에서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까?
둘째. 오늘 본문에 보면 갈대 상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본문 2절과 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2. 그 여자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잘 생긴 것(토브)을 보고 석 달 동안 그를 숨겼으나 3. 더 숨길 수 없게 되매 그를 위하여 갈대 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하고 아기를 거기 담아 나일 강 가 갈대 사이에 두고 라고 합니다.
여기서 보시면 왜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이 바로의 명령대로 아이를 나일강에 버리지 않고 갈대 상자에 넣어 둡니까? 2절을 보시면 아이가 잘생긴 것을 보고 석달 동안 숨겼다고 합니다.
어머니 요게벳이 볼 때 아이가 장동건처럼 어릴 때부터 외모가 너무 잘 생겼기 때문에 숨겼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서 잘 생겼다는 말은 토브라는 말로서 아름답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7장에 보면 “행7:20.그 때에 모세가 났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토브) 그의 아버지의 집에서 석 달 동안 길리더니” 라고 합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실 때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는데, 그때도 “토브”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단순히 외모가 잘생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답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어머니 요게벳은 단순한 모성애가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으로 아들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아들을 보니까 너무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너무 좋게 보였습니다. 또 “토브”란 선하다는 뜻도 있습니다. 그리고 선하다는 것은 희망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갈대상자에 아이를 넣으면서 어머니 요게벳은 아이에게 어떻게 말을 했겠습니까?
“내 사랑하는 아이야 비록 너는 강에 버려져 죽을 수밖에 없는 아이지만 너는 하나님이 내게 주신 아이란다. 내가 너를 하나님의 마음으로 보니까 너무 아름답구나, 아기야 현실은 절망이지만 하나님의 눈으로 보니 너는 희망이 있어, 너는 절대 죽지 않고 반드시 살거야” 라고 말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를 보면 “히11:23.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아니하였으며”라고 합니다.
어떻게 모세의 부모가 아이를 살려 줄 수 있었습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여러분들의 아이들이 희망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 교회 아이들에게 희망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은 여러분들에게 희망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것은 현실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 마음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믿음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하나님의 마음으로 나와 우리 자녀들을 보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비록 나와 우리 자녀들이 부족하지만 아름답게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믿음의 눈으로 나와 우리 자녀들을 보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나와 우리 자녀들에게 희망이 있습니다.
오늘도 바로와 같이 사탄은 우리 아이들을 입시지옥이라는 죽음의 강에 던져서 죽이라고 합니다. 또 우리 아이들에게 희망이 없다고 합니다. 또 너도 먹고 살기 힘든데 죽으라고 합니다. 그리고 희망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자신과 우리아이들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에게도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자녀들에게도 희망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어머니 요게벳은 하나님의 마음으로 모세를 보니까 이 아이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갈대 상자를 만들어서 그 속에 넣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갈대 상자라고 하는데, 이 상자라는 말은 “테바”라는 말로서 노아가 방주를 만들었을 때 그때도 같은 “테바”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갈대 상자라고 하는 것을 더 정확하게 번역을 하면 갈대 방주입니다. 모세는 자신이 탄 그 상자를 노아 방주와 같은 방주 즉 테바라고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습니까? 우리가 노아 방주에서 보았듯이 노아 방주에는 키가 없습니다. 모든 것을 다 하나님의 주권에 맡깁니다.
그래서 어머니 요게벳이 갈대로 만든 방주에 이 아이를 둔 것은 어떤 뜻이 있습니까? 이 아이에 대한 모든 주권을 하나님께 맡기는 뜻입니다. 하나님 더 이상 이제 내가 이 아이의 부모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 아이의 부모입니다. 내가 이 아이의 주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 아이의 주인입니다. 이 아이를 하나님께 다 맡깁니다. 그래서 이 아이를 하나님의 뜻대로 주관하여 달라는 뜻에서 갈대로 만든 방주에 두었습니다.
그래서 본문 4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4. 그의 누이가 어떻게 되는지를 알려고 멀리 섰더니
여기서 그의 누이는 모세의 누이 미리암입니다. 왜 그의 누이가 어떻게 되는지를 알려고 멀리서 서서 보았겠습니까? 모세의 어머니와 누이는 절대 이 아이를 버린 것이 아닙니다. 버렸다면 더 이상 보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의 어머니와 누이는 이 아이를 하나님의 손에 맡겼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 아이를 선하게 인도하실까 하는 것을 알려고 멀리 서서 보고 있었습니다.
그때 어떤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났습니까? 4절과 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5. 바로의 딸이 목욕하러 나일 강으로 내려오고 시녀들은 나일 강 가를 거닐 때에 그가 갈대 사이의 상자를 보고 시녀를 보내어 가져다가 6. 열고 그 아기를 보니 아기가 우는지라 그가 그를 불쌍히 여겨 이르되 이는 히브리 사람의 아기로다
여러분 여기서 바로의 딸이 우는 아이를 보았을 때 그가 히브리 사람의 아기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아버지 바로 왕의 명령이 있기 때문에 당장 버렸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바로의 딸은 우는 아이를 볼 때 불쌍히 여겼습니다.
여기서 불쌍히 여겼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의 딸의 마음에 이 아이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고는 인간적으로는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또 어떤 하나님의 역사가 있었습니까?
7절에서 모세의 누이가 히브리인 여인 중에 유모를 소개하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8절에서 모세의 누이는 모세의 어머니를 유모로 불러옵니다. 그리고 9절에 보면 바로의 딸은 모세의 어머니에게 모세의 젖을 먹이라고 하면서 돈까지 줍니다. 여러분 죽을 수밖에 없는 아들이 살아났습니다. 또 이 아들에게 젖을 먹이면서 돈까지 받습니다. 그것만이겠습니까? 어머니 요게벳은 이 아이에게 젓만 먹였겠습니까? 친 어머니이자 유모로서 모세에게 신앙교육을 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아들들이 죽는 가운데서 모세는 바로의 왕궁에서 왕자교육을 받으며 자랄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어떻게 이런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었습니까?
갈대로 만든 방주에 아이를 넣었기 때문입니다. 그랬을 때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여러분 갈대로 만든 방주에 있는 이 아이가 누구입니까?
이 아이는 모세이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 지금 이스라엘입니다. 그래서 모세를 갈대로 만든 방주를 통해서 건져내신 것은 앞으로 이스라엘백성들도 건져내실 것을 미리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 이 아이는 코로나 이후에 절망 가운데 있는 우리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에스겔서에 보면 우리는 마치 태어나자 피투성이가 된 채 버려진 아이와 같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절망 가운데 있는 우리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날 수 있습니까?
방주에 그 어떤 키도 없듯이 여러분들의 모든 삶의 주권을 하나님께 다 맡기시기 바랍니다.
방주에는 오직 하늘로 열린 창만 있듯이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방주에 그 어떤 인간적인 동력장치도 없듯이 여러분들의 모든 인간적인 힘을 다 하나님께 내려 놓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여러분들의 모든 삶을 다 맡기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시23편).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 가운데서도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가 있을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 어떻게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까?
셋째, 출2장 23-25절을 보시면 하나님의 백성들의 부르짖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출2:23-25).
2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23.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된지라 여러분 여기서 이스라엘자손들이 왜 탄식하며 부르짖겠습니까? 단순히 고된 노동 때문만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백성들에게 내가 너희들과 함께 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께 탄식하며 부르짖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십니까? 24절입니다. 24.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부르짖는 그 고통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우신 언약을 기억하셨습니다. 하나님께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우리들에게 내가 너희들과 함께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는 그 약속이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우리의 부르짖음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애끓는 고통소리를 들으시고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그 언약을 기억하십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십니까? 25.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고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더라 하나님은 우리의 부르짖음을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하나님의 자녀들을 돌보십니다. 하나님의 돌보심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속에 직접 들어오셔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들과 함께 하신다고 하시는데, 그것이 여러분의 삶 가운데서 전혀 느껴지지 않습니까? 반대로 이스라엘백성들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하시는데, 우리의 삶은 정반대가 아닙니까? 이때 이스라엘백성들처럼 하나님께 부르짖고 부르짖고 또 부르짖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될 때까지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반드시 있을 줄 믿으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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