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과 다음 장인 49장은 야곱이 죽기 직전에 그의 자녀들에게 축복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야곱은 그동안 오직 자신만이 복을 받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노년의 야곱은 그렇지 않습니다. 바로를 만나서도 그를 축복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의 자녀들을 축복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야곱이 자신의 자녀들을 축복하는 것은 단순히 가정의 자녀들을 축복하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2절에 보시면 야곱을 가리켜 야곱이라고 하지 않고 이스라엘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하는 이름입니다.
그래서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자손들에게 축복을 하는 것은 자신의 자녀들만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다음세대들에게 축복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야곱이 어떤 유언을 하였으며, 어떤 축복을 하였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창49:1. 이 일 후에 어떤 사람이 요셉에게 말하기를 네 아버지가 병들었다 하므로 그가 곧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과 함께 이르니
여기서 “이 일후에”는 야곱이 자신이 죽으면 애굽에 장사를 하지 말고 가나안 땅에 있는 조상의 묘지에 장사를 하라고 말한 후에 라는 말입니다(창47:29,30). 야곱은 지금 147세로 이미 자신이 죽을 것을 예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창47장 29절과 30절에서 자신의 장지를 애굽으로 하지 말고 가나안땅 자신의 조상들이 있는 곳으로 하라고 유언을 했습니다. 이렇게 유언을 하고 난 후에 어떤 사람이 요셉에게 네 아버지가 병 들었다는 소식을 전합니다. 그때 요셉은 자신의 두 아들인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데리고 옵니다.
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2. 어떤 사람이 야곱에게 말하되 네 아들 요셉이 네게 왔다 하매 이스라엘이 힘을 내어 침상에 앉아
여기서 같은 절에서 야곱과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두 이름을 볼 수 있습니다. 야곱은 야곱의 인간적인 이름이고 이스라엘은 하나님 백성의 이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하는 이름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마지막에 죽을 때 인간적인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 유언을 하고 축복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 야곱은 나이가 많아 병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스라엘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나이가 들었고 병이 들었지만 더 힘이 있습니다. 그의 육신의 눈은 어두웠지만 영적인 눈은 더 밝습니다. 그래서 육신의 야곱은 병이 들었지만,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스라엘은 힘을 내어서 침상에 누워있지 않고 앉아서 유언을 하고 축복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고후4장 16절에서 “고후4: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도 나이가 들어 육신은 낡아지지만 영적으로는 날로 더 새로워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고 이제 야곱이 요셉에게 마지막 유언을 합니다.
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3. 요셉에게 이르되 이전에 가나안 땅 루스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사 복을 주시며 야곱은 유언을 제일 먼저 요셉에게 합니다. 그 이유는 요셉은 11번째 아들이지만 야곱은 그를 장자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상5장 1절을 보시면 “대상5:1. -르우벤은 장자라도 그의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혔으므로 장자의 명분이 이스라엘의 아들 요셉의 자손에게로 돌아가서 족보에 장자의 명분대로 기록되지 못하였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5. 내가 애굽으로 와서 네게 이르기 전에 애굽에서 네가 낳은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내 것이라 르우벤과 시므온처럼 내 것이 될 것이요
여기서 보시면 야곱은 요셉에게 네가 애굽에서 낳은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내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르우벤과 시므온처럼 내 아들들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요셉의 두 아들을 야곱에게 입양을 시키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요셉의 두 아들을 르우벤과 시므온과 같이 12형제 가운데 들어오게 하겠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왜 야곱이 죽기 직전에 요셉의 두 아들을 자신의 아들로 입양을 시키겠다고 합니까? 그 이유는 요셉의 두 아들은 모두 애굽 제사장 딸의 아들들이기 때문입니다.
창44장 50절에 보면 “창44:50. 흉년이 들기 전에 요셉에게 두 아들이 나되 곧 온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이 그에게서 낳은지라”고 합니다.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외할아버지는 애굽의 신인 온의 제사장입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그 제사장의 딸입니다. 여러분 신앙은 아버지의 영향이 큽니까? 어머니의 영향이 큽니까? 어머니의 영향이 더 큽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어머니가 유대인이면 아버지가 다른 민족이라도 유대인으로 인정을 해 줍니다. 그러니까 요셉의 두 아들은 잘못하면 애굽의 신을 섬기는 어머니의 신앙을 따라 갈 수 있었습니다. 요셉에게 있어서는 이것이 제일 큰 고민이었습니다. 이것을 알고 야곱은 요셉의 두 아들을 자신의 아들로 삼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하나님 백성인 12지파가운데 들어오게 합니다. 그래서 결국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이스라엘 12지파 가운데 첫 번째와 두 번째 지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8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8. ○이스라엘이 요셉의 아들들을 보고 이르되 이들은 누구냐 고 합니다. 이것은 야곱이 요셉의 아들들을 몰라서 물은 것이 아니라 요셉에게 이 두 아들들은 너에게 어떤 의미가 있느냐고 물은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9절에서 “9. 요셉이 그의 아버지에게 아뢰되 이는 하나님이 여기서 내게 주신 아들들이니이다-”고 합니다. 요셉은 이 두 아들들이 애굽 제사장의 딸을 통해서 낳은 아들이지만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아들들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야곱이 그들을 데리고 내 앞에 나아오라고 합니다. 그리고 요셉의 두 아들에게 축복합니다(9하).
여러분들은 야곱처럼 자녀들에게 어떤 유언을 남기시겠습니까? 여러분들은 야곱처럼 마지막에 자녀들에게 어떤 축복을 하시겠습니까? 무엇보다 여러분들은 교회의 다음세대들에게 어떤 축복을 하시겠습니까?
우리가 본문에 나오는 야곱의 유언과 축복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첫째, 하나님나라는 세상나라와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이 눈이 어두워서 잘 보지 못하기 때문에 야곱의 오른쪽에는 장자인 므낫세를 왼 쪽에는 차남인 에브라임을 둡니다. 그래서 오른 손으로는 장자인 므낫세를 축복하게 하고, 왼손으로 차남인 에브라임을 축복하게 합니다(13).
당시에 유대인들이나 고대근동 사람에게 오른 손은 권위와 능력 그리고 축복과 은혜를 상징합니다. 이것은 당시에 세상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요셉도 장자가 오른손으로 더 큰 복을 받아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14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4. 이스라엘이 오른손을 펴서 차남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고 왼손을 펴서 므낫세의 머리에 얹으니 므낫세는 장자라도 팔을 엇바꾸어 얹었더라
여러분들 손을 펴서 앞으로 해보시기 바랍니다. 손을 앞으로 펴는 것이 더 쉽습니까? 어긋나게 하는 것이 더 쉽습니까? 젊은 분들은 상관이 없지만 나이가 100살이 넘은 분들은 이것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147세의 야곱은 팔을 엇바꾸어 얹습니다.
그러니까 요셉이 어떻게 합니까? 요셉은 아버지 야곱이 오른손으로는 차남인 에브라임을 왼 손으로 장남인 므낫세의 머리에 얹은 것을 보고 기뻐하지 아니하였습니다(17). 그래서 “그의 아버지에게 아버지여 그리 마옵소서 오른손을 장자에게 얹으소서” 라고 합니다(18).
그러니까 야곱이 어떻게 말합니까? 19절에 “19. 그의 아버지가 허락하지 아니하며 이르되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그도 한 족속이 되며 그도 크게 되려니와 그의 아우가 그보다 큰 자가 되고 그의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고 합니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이 손을 엇바꾸어 얹은 것을 연세가 많아서 실수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14절에 “엇바꾸어” 라는 말이 원어로 “식켈”이라는 말인데, 이 뜻은 “신중하다. 지혜롭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야곱이 손을 엇바꾼 것은 나이가 들어서 실수로 한 행동이 아니라 나이가 들어 하나님의 뜻을 신중하게 생각하고 지혜롭게 한 행동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야곱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나라는 세상나라와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세상나라는 장자가 큰 자로서 더 큰 복을 받아야한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나라는 작은 자가 더 큰 복을 받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동안 보았던 것처럼 누가 구원받는 하나님의 자녀의 복을 받습니까? 아브라함의 장남인 이스마엘이 아니라 작은 자인 이삭입니다. 이삭의 장남인 에서가 아니라 작은 인 야곱입니다. 그리고 야곱의 구원받은 열두 형제의 대표도 첫째가 아니라 11번째인 요셉입니다. 그리고 요셉의 두 아들 중에서도 작은 자인 에브라임이 더 큰 복을 받습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에브라임이 이스라엘 가운데서 대표적인 지파가 됩니다.
그래서 야곱이 손을 엇바꾸어 축복하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겨야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야곱은 태어나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어머니 리브가에게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고 하셨습니다. “창25:23. 여호와께서 그(리브가)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고 하셨습니다. 로마서를 보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작은 자인 야곱을 사랑하시고 선택하셔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겠다는 의미가 있습니다(롬8:11-13). 또 이것은 말 그대로 섬기는 자가 큰 자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야곱을 부르신 목적은 섬기는 자가 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의 삶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야곱은 무조건 높은 자가 되고 이기는 자가 되기를 바랐습니다. 이기는 것이 큰 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형도 이기려고 하고 하나님도 이기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야곱이 얍복강에서 만난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야곱에게 져 주실 정도로 낮아지신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야곱의 환도 뼈를 치셨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평생 절름발이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히11장21절에 보면 “히11:21.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 야곱이 침상에 앉아서 요셉의 두 아들에게 축복을 하는데, 히브리서에서는 지팡이 머리에 의지해서 축복하고 경배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을 축복할 때 얍복강에서 하나님께서 환도 뼈를 치신 사건을 생각하면서 침상에 앉았지만 지팡이를 의지해서 축복을 했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야곱이 손을 엇바꾸어 축복하면서 속으로 어떤 말을 했겠습니까?
“애들아 나는 너희들이 나처럼 험악한 세월을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 너희들은 평안하게 잘 살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 애들아 너희들은 절대 나처럼 살지 마라. 나는 무조건 이기려는 자가 되려고 하다가 하나님께 한 대 맞았다. 그래서 나는 지금 지팡이를 의지해서 너희들에게 말한다. 섬기는 자가 큰 자다. 나는 섬기는 자가 큰 자라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그러니 너희들은 섬기는 자가 되라, 그래서 나는 작은 자에게 큰 축복을 주고, 큰 자에게는 작은 축복을 주는 것이다” 는 말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10:42.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세상)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43.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44.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큰 자)이(가)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섬기는 자)이 되어야 하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저 영원한 하나님나라에 가서 우리가 어떻게 살게 됩니까? 우리 모두가 영원히 왕 노릇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나만 왕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다 섬기는 왕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저 영원한 하나님나라에서는 우리 모두가 서로가 서로를 섬기는 왕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저 영원한 하나님나라에게 우리가 죽어서만 가는 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 하나님나라의 자녀로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이 땅에서도 서로가 서로를 섬기는 왕이 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꽃은 전체로 보면 아름답지 않습니다. 꽃은 가을 햇살에 하나 하나로 보면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하찮은 꽃은 하나도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를 보실 때 전체로도 보시지만 하나 하나로 보십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우리는 다 꽃보다 아름답습니다. 그래서 우리가운데 하찮은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나만 왕이다 나만 꽃이라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다 왕입니다. 꽃입니다. 그래서 나만 섬겨달라고 하지 마시고 우리 모두가 다같이 서로가 서로를 섬기는 왕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럴 때 이 땅에서 하나님나라가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축복합니다. 여러분들은 이 땅을 사실 때 힘들게 살지 마시고 모두 평안하게 살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또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복을 받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시는 모든 일들이 다 잘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 이 세상과는 반대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높이 되려고 하지 마시고 더 낮게 되기를 바랍니다. 섬김을 받으려하지 마시고 더 섬기시기를 바랍니다. 큰 자가 되려고 하지마시고 작은 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작은 자에 주시는 하나님의 큰 복을 받으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둘째, 또 우리는 야곱의 유언과 축복을 통하여 우리가 자녀들에게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유산으로 남겨주어야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전에 고신대총장이었던 김성수교수님의 아버지께서 마지막 돌아가시기 전에 쪽지를 남겨주셨습니다. 그 쪽지에 글자 하나가 적혀 있었습니다. 하나님입니다. 총장님의 아버지는 큰 재산이 아니라 하나님을 유산으로 남겨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야곱은 입양한 두 아들에게 큰 물질을 유산으로 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하나님을 유산으로 남겨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하나님입니까? 15절과 16절을 보시면 아브라함과 이삭이 섬기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섬기던 하나님이라는 말은 더 정확하게 번역하면 동행하던 하나님입니다. 그러니까 야곱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동행하시던 하나님을 유산으로 주었습니다. 또 내가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나의 목자가 되어주셔서 나를 기르시던 하나님을 유산으로 주었습니다. 또 환난 가운데 건져주신 하나님을 유산으로 주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말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함께 늘 동행하시던 하나님께서 너에게 복을 주실 것이다. 거친 내 삶에 목자가 되어주셔서 나를 지금까지 길러주신 하나님께서 너에게 복을 주실 것이다. 나를 환난가운데서 건지신 하나님께서 너에게 복을 주실 것이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하실 것이라고 축복하였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자녀들에게 물려줄 가장 큰 재산이 무엇입니까? 여러분들이 섬겨왔던 하나님, 여러분들과 동행하셨던 그 하나님을 신앙의 유산으로 물려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의 삶의 목자가 되셔서 지금까지 여러분들과 함께 하시며 길러주셨던 그 하나님을 신앙의 유산을 물려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을 모든 환난 가운데서 그때마다 건져주신 그 하나님을 신앙의 유산을 물려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의 자녀들이 모두 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모든 삶이 형통케 되는 놀라운 일이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셋째, 야곱의 유언을 통해서 우리가 자녀들에게 희망을 주어야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1절을 보시면 야곱은 요셉에게 내가 죽지만 하나님께서 너희와 함께 계셔서 너희를 인도하여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게 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22절을 보시면 “22. 내가 네게 네 형제보다 세겜 땅을 더 주었나니 이는 내가 내 칼과 활로 아모리 족속의 손에서 빼앗은 것이니라”고 합니다. 여기서 보시면 야곱은 네가 네게 형제보다 가나안에 있는 세겜 땅을 더 주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이미 이루어진 완료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스라엘백성들이 가나안땅을 차지하게 되는 것은 적어도 430년 뒤입니다. 광야의 시간을 포함하면 적어도 470년 후에 일어날 일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말합니다. 앞으로 470년 뒤에 일어날 일들이 이미 너희들에게 이루어졌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기근으로 애굽으로 피하여 왔습니다. 가나안 땅을 차지하는 것은 멀고도 먼 미래의 일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마지막 죽을 때 그 일이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 우리가 자녀들에게, 또 교회 다음세대들에게 무엇을 마지막에 무엇을 유산으로 남겨주어야겠습니까? 그것은 희망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것은 단순히 인간적이고 맹목적인 희망이 아닙니다. 이것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하셨던 그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 인한 희망입니다.
여러분 지금 젊은 세대들이 미래를 두고 여러 가지고 염려하고 있습니다. 근심하고 있습니다.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이때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너 근심 걱정 말아라 주 너를 지켜주시리 주 날개 밑에 거하라 주 너를 지켜주실 것이라” 고 축복해줄 수 있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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