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은 사도베드로가 죽은 다비다를 살려주는 사건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36.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여기서 보시면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 제자가 있습니다. 스데반의 순교로 많은 사람들이 흩어져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래서 욥바에도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욥바는 예루살렘에서 북서쪽으로 50km 정도 떨어진 항구 도시입니다. 솔로몬이 성전 건축을 할 때 이 항구를 통해서 두로 왕 히람이 레바논에서 목재를 실어 왔습니다(대하 2:11-16). 또 요나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도망할 때 배를 타기 위해 거쳤던 항구가 욥바입니다. 그런데 이 곳에도 복음이 전파되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있었습니다. 특히 그 중에서 여자도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여성들에 대한 차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여성이라고 해서 차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많은 여성들 특히 지위가 높은 집안의 많은 여성들이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 중에 욥바에 사는 다비다라는 여제자가 있었습니다. 1세기에는 사람들이 보통 2가지의 이름을 사용했습니다. 사도바울도 유대식 이름은 사울이고, 로마식 이름은 바울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을 주로 상대할 때는 사울이라고 불렀고,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는 로마식 이름인 바울을 사용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다비다는 아람어로 부르는 이름입니다. 그런데 바디다를 헬라식으로 부르면 도르가입니다. 신약성경은 헬라어로 기록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비다를 헬라식으로 번역하면 도르가입니다. 그래서 다비다나 도르가나 같은 이름입니다. 다비다의 뜻은 원래 암사슴입니다. 암사슴은 당시에 아름답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비다는 아름답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이름입니다. 우리가 다비다가 외모가 어떠한 지를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다비다는 삶은 이름처럼 아름다웠습니다. 그래서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았습니다. 여기서 선행과 구제란 오늘 본문에 보면 가난한 과부들을 향한 선행과 구제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39절을 보시면 39. 베드로가 일어나 그들과 함께 가서 이르매 그들이 데리고 다락방에 올라가니 모든 과부가 베드로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보이거늘
다비다가 죽자 모든 과부가 베드로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 즉 다비다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보여줍니다. 다비다가 살아 있을 때 가난한 과부들을 위해서 속옷과 겉옷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죽자 그에게 은혜를 입었던 모든 과부들이 그가 준 속옷과 겉옷을 보여주면서 울고 있습니다.
/1세기 당시에 속옷와 겉옷은 단순히 입는 옷만 아니라 재산의 가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었을 때도 군인들이 속옷을 가지려고 제비를 뽑습니다. 또 겉옷은 외투만 아니라 낯에는 햇빛은 가려주고 밤에는 덮고 자는 이불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당시에 겉옷은 고가에 가치가 있는 물건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다비다는 그가 쓰고 남은 물건을 나누어주는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가난한 과부들에게 필요한 고가의 속옷과 겉옷을 나누어주는 일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살아 있을 동안 했던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았더라고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할 단어는 “심히”입니다. “심히”라는 말은 “플레레스”라는 단어인데 성경에서 이 단어는 충만하다고 할 때 사용됩니다. 그래서 여기서 “심히” 라는 말은 “충만하게”라는 말입니다. 충만이란 가득찬다는 말이 아닙니다. 충만이란 흘러넘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다비다는 가난한 과부들에게 적당한 선행과 구제가 아니라 흘러넘치는 선행과 구제를 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왜 다비다가 적당한 선행과 구제가 아니라 흘러넘치는 선행과 구제를 했겠습니까? 그 이유는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넘치는 은혜와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사랑은 적당한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적당하게 사랑하셨다면 절대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우리를 위해서 주시지 않습니다. 또 주시더라도 죽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절대 적당한 사랑이 아닙니다. 흘러넘치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다비다가 왜 예수님을 따르는 여 제자였습니까? 또 왜 과부들을 위해서 흘러넘치는 선선행과 구제를 하였습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을 부터 적당한 사랑이 아니라 흘러넘치는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예수그리스도로부터 흘러넘치는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다비다는 하나님의 흘러넘치는 하나님의 사랑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흘러넘치는 선행과 구제를 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 구제에 관한 말씀들을 봅니다. 특별히 가난한 자들과 고아와 과부에 대해서 말씀하는 것을 봅니다.
출21:21.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였음이라 22.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23. 네가 만일 그들을 해롭게 하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으리라 24. 나의 노가 맹렬하므로 내가 칼로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의 아내는 과부가 되고 너희 자녀는 고아가 되리라
이 말씀에서도 왜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아야합니까?
그 이유도 우리가 애굽 땅에서 종이고 나그네였는데, 흘러넘치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구원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를 보면 복음 전도와 구제는 절대 떨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행6장에서도 예루살렘교회는 교회 안에 있는 과부들에 대한 구제를 먼저 사도들이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일곱 집사에게 맡긴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가 왜 구제하는 일에 힘을 썼습니까?
그 이유도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흘러넘치는 사랑 때문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우리를 향하신 흘러넘치는 사랑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의 흘러넘치는 사랑을 받아 과부들 흘러넘치는 선행과 구제를 행한 다비다가 병들어 죽었습니다. 그래서 37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37. 그 때에 병들어 죽으매 시체를 씻어 다락에 누이니라
다비다가 병들어 죽으매 시체를 씻어서 다락에 누입니다. 보통 사람이 죽으면 시체를 씻고 향유를 붓습니다. 그런데 향유를 붓지 않고 그냥 다락에 누입니다. 또 보통 당시의 관례대로 한다면 시체를 1층에 누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와서 조문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시체를 가지고 나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죽은 사람에게 사용하는 향유도 붓지 않고, 1층이 아닌 다락에 누이겠습니까?
그 이유는 다비다를 다시 살리기 위함입니다.
구약성경에서도 사르밧과부의 아들이 죽었을 때 어떻게 합니까?
왕상 17:19. 엘리야가 그에게 그의 아들을 달라 하여 그를 그 여인의 품에서 받아 안고 자기가 거처하는 다락에 올라가서 자기 침상에 누이고
여기서도 엘리야는 죽은 과부의 아들을 살리기 위해서 다락에 누입니다. 그리고 여호와께 부르짖어 살려달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그를 살려주셨습니다.
그래서 욥바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다시 살려주실 것을 믿음으로 엘리야와 같이 다락에 다비다의 시체를 누였습니다.
그리고 38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38. 룻다가 욥바에서 가까운지라 제자들이 베드로가 거기 있음을 듣고 두 사람을 보내어 지체 말고 와 달라고 간청하여
룻다가 욥바에서 가깝습니다. 그래서 룻다에 베드로가 있음을 듣고 두 사람을 보내어 지체 말고 와 달라고 간청합니다.
특별히 왜 룻다에 있는 베드로를 청했겠습니까? 오늘 본문 앞 32-34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행9:32. ○그 때에 베드로가 사방으로 두루 다니다가 룻다에 사는 성도들에게도 내려갔더니
33. 거기서 애니아라 하는 사람을 만나매 그는 중풍병으로 침상 위에 누운 지 여덟 해라
34. 베드로가 이르되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한대 곧 일어나니 35. 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오니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룻다에 있는 애니아라는 사람이 중풍병으로 침상이 누운 지 8년이 되었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애니야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라고 했습니다. 그때 8년 동안 중풍병을 앓아서 누운 애니야가 일어났습니다. 그로 인해서 룻다와 그 옆에 있던 사론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주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이 소식을 룻다와 가까운 곳에 있던 욥바에 사는 그리스도인들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룻다로 사람을 보내어 베드로를 오게 했습니다.
그리고 39절에 “39. 베드로가 일어나 그들과 함께 가서 이르매 그들이 데리고 다락방에 올라가니 모든 과부가 베드로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보이거늘”이라고 합니다.
베드로는 죽은 다비다를 위해서 우는 과부들을 보면서 다비다가 어떤 사람인지 알았습니다. 그가 살아 있을 동안 얼마나 많은 과부들을 도와주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얼마나 필요한 사람이었는가를 알았습니다.
그래서 40절에 “40.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이르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고 합니다.
베드로는 다락에 있는 사람들을 다 내보냅니다. 여기서 내보다는 강제적으로 내보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장의 죽을 딸을 살리려고 했을 때도 사람들을 강제적으로 내보냈습니다.
이것은 베드로가 사람들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당시에는 기도할 때 서서 합니다. 그런데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항복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나는 이 시신 앞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나는 이 시신 앞에서 무능이고 절망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은 나에게 없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 내가 주님 앞에 항복하오니 하나님이여 내 기도를 들어 주시옵소서”라는 마음으로 무릎을 꿇었습니다.
/이렇게 무릎을 꿇고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하고 난 다음에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다비다야 일어나라”고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죽은 야이로의 딸을 살리실 때 했던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리실 때도 “달리다 쿰” 이라고 했습니다. “소녀야 일어나라”는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베드로는 “다비다 쿰” “다비다야 일어나라”고 합니다.
다른 번역본에서는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다바다야 일어나라”고 합니다. 여기서 일어나라는 것은 단순한 바람이 아닙니다. 여기서 일어나라는 것은 명령형입니다.
내 이름이나 내 능력이 아닌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일어나라”고 명령했습니다.
마 10장 7절과 8절을 보면 예수님은 “마10:7.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하고 8.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복음을 전하면서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을 때 입으로만 전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에게 병자를 고쳐주는 능력을 주십니다.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을 주십니다. 또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을 주십니다. 그리고 이 모든 능력을 내가 거저 주었느니 거저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베드로는 예수님의 이 말씀대로 예수님으로부터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을 거저 받았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주신 능력으로 일어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죽은 다비다가 일어났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능력이 필요합니다.
하나님 우리에게 병자를 고쳐주는 능력을 주옵소서,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을 주옵소서,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을 주옵소라 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이 능력은 우리의 능력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능력입니다.
특히 우리에게 죽음을 이기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실재로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육신의 죽음보다 더 무서운 영적인 죽음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오지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영적인 죽음이 있습니다.
우리 자녀들이 영적으로 죽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 가족들이 영적으로 죽어 있을 수 있습니다.
또 내가 영적으로 죽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때 우리에게 죽음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다비다야 일어나”고 한 것처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영적으로 죽은 자리에서 날마다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고 41절과 42을 보시기 바랍니다.
“41.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일으키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 들여 그가 살아난 것을 보이니
42.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은 사람이 주를 믿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룻다에서도 베드로가 애니아의 중풍병을 고쳐주었을 때 룻다에 많은 사람들이 주를 믿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죽은 다비다가 살아난 것을 보고 온 욥바 사람들이 주님을 믿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와 같이 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을 주신 목적은 예수님을 믿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입니다.
물론 지금 우리에게 죽은 자를 살리는 역사는 없습니다. 이것은 초대교회 때만 특별히 일어났던 기적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에게 영적으로 죽었던 자가 살아나는 기적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내게 영적으로 죽었다가 살아가는 기적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내가 예수의 이름으로 영적으로 살아나는 기적이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나를 통해서 주님을 믿는 역사가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런데 마지막 본문 4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43. 베드로가 욥바에 여러 날 있어 시몬이라 하는 무두장이의 집에서 머무니라
베드로가 죽은 다비다를 살려주고 여러 날 욥바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있었던 곳이 무두장이 시몬의 집이었습니다. 무두장이란 가죽수선공입니다. 지금은 가죽수선공이 전문직입니다. 그런데 당시에 구두수선공은 사람들이 절대 접촉하지 않는 부정한 사람이었습니다. 특히 유대인들은 죽은 동물의 시체를 만지는 것만으로 부정하게 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가죽을 만들려면 동물을 죽여야 합니다. 그러면 동물의 시체를 만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무두장이는 유대인의 입장에서는 부정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베드로가 욥바에 여러 날을 머문다면 살려준 다비다의 집에 머물렀어야하지 않습니까? 또 베드로가 죽은 다비다를 살려주었기에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집에 머물기를 바랬겠습니까? 그런데 왜 베드로가 사람들이 가까이 하지 않는 무두장이의 집에 머물렀습니까? 죽은 자를 살려주었던 베드로가 자신을 나타내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공생애 시절의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제자들과 베드로를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이신 이후에 사람들이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으려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십니까? 제자들을 강제적으로 재촉하셔서 그 곳을 떠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그곳을 떠나서 다시 산에 혼자 올라가셨습니다.
왜 이렇게 하셨겠습니까? 만일 그 자리에 계속 있으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고 제자들도 높은 자리를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또 굳이 자리는 아니라 할지라도 예수님과 제자들이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능력으로 오천 명을 먹이셨지만, 자신도 영광을 받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의 인기를 얻는 자리보다 혼자 하나님에 서 있는 것을 더 좋아하셨습니다. 또 제자들도 절대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는 자리에 오래 머물러 있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만일 예수님의 공생애 시절에 베드로라면 절대 무두장이의 집에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내가 죽은 자를 살려주었다고 하면서 그 집에 계속 머물러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베드로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이 능력이 자신에게서 나오지 않았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빨리 그 장소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가까이 할 수 없는 무두장이의 집에 머물렀습니다.
그 이유는 오직 예수님에게만 이 모든 영광을 돌리기 위함입니다. 또 죽은 자를 살리는 것보다 그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 돌아온 것만으로 만족하기 때문입니다.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멸시 천대 십자가는 제가 지고 가오리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다”
베드로는 이런 마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죽은 자가 살아난 것보다 더 큰 기적이 무엇입니까?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어서 주님께로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죽은 자가 살아나도 다시 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지 않고 죽은 자는 영원한 심판을 받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자도 죽어도 괜찮습니다. 왜냐하면 그 속에 영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이 땅에 죽은 자가 살아난 기적보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이 최고의 기적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구원의 은혜에 늘 감사하면 찬송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신약성경연구 > 사도행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도행전강해(29)차별하지 말라(행10:9-22) (1) | 2022.09.23 |
---|---|
사도행전강해(28)하나님께 상달되는 기도(행10:1-4) (0) | 2022.08.26 |
사도행전강해(26)회심의 출발은 나를 아는 것입니다(행9:1-11) (0) | 2022.08.12 |
사도행전강해(25)하나님의 역사는 고난을 통해서 나타난다. (0) | 2022.08.10 |
사도행전강해(24)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행8:9-24) (0) | 2022.08.05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