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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경연구/사도행전

사도행전강해(25)하나님의 역사는 고난을 통해서 나타난다.

by 금빛돌 2022. 8. 10.

 

중랑천에 비가 온 후 비에 젖은 장미

사도행전 8장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는 고난가운데서 나타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스데반의 순교로 초대교회에 큰 박해가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당시 예루살렘교회로서는 큰 고난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떻게 역사하셨습니까? 박해 때문에 사람들이 예루살렘에서 흩어져서 유대와 사마리아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사도행전18절을 이루는 역사였습니다. 18절에서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되리라고했습니다. 그러니까 고난을 통해서 초대교회가 예루살렘만 아니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역사는 고난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또한 성령의 권능도 고난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그래서 행8장에 근거한다면 행18절은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고난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고 해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하나님의 역사가 언제 나타납니까? 고난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성령의 권능이 언제 나타납니까? 고난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고난이 있습니까? 어려움이 있습니까? 절대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고난은 성령의 능력이 나타날 수 있는 기회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있는 고난은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날 수 있는 기회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 고난 없이 평안을 통해서도 하나님이 역사하지 않습니까? 당연히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평안을 통해서도 역사하십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서 역사하십니까? 왜 고난가운데 성령의 권능을 나타내십니까? 그 이유는 평안을 통해서 역사하시면 믿음이 필요 없기 때문입니다.

광야의 이스라엘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왜 고난의 광야로 이스라엘을 인도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 고난의 광야에서 하나님의 권능과 영광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편 63편에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고난의 광야로 인도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권능과 영광을 보여주기 위함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광야의 이스라엘은 고난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원망하고 불평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원망하는 이스라엘백성들에게는 더 이상 가나안 땅에서 권능과 영광을 보여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고난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믿는 여호수아와 갈렙만 가나인 땅에서 하나님의 권능과 영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고난이 있습니까? 어려움이 있습니까? 그 모든 고난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고난은 통해서도 역사하심을 보게 하실 것입니다.

또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성령의 권능을 여러분에게 내려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 고난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본 사람이 나옵니다. 빌립집사입니다. 그는 초대교회 집사입니다. 그는 고난가운데서도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왜 우리에게 이런 고난을 허락하셨는가를 생각했습니다. 18절의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마리아로 갔습니다. 이것은 절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사마리아는 유대인들이 절대 가지 않는 곳입니다. 또 사마리아 사람들도 반기지 않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빌립은 하나님께서 고난 가운데서도 역사하실 줄 믿고 사마리아로 갔습니다. 그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8:5.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6.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을 따르더라 7.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못 걷는 사람이 나으니 8.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고 합니다.

고난 가운데서 믿음으로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고난으로 인한 큰 슬픔을 더 큰 기쁨으로 바꾸어주십니다. 이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빌립은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고난을 통해서 성령의 권능을 체험했습니다.

여러분 그러면 이제 빌립의 앞길에는 이제 그 어떤 고난도 없어야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2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26. 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말하여 이르되 일어나서 남쪽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

여기서 보시면 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주의 사자는 29절에 보면 성령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빌립은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만을 받고 살아갔습니다. 그래서 주의 사자이신 성령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일어나서 남쪽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고 합니다.

여러분 지금 빌립은 사마리아에서 성공적인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서 놀라운 표적과 기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빌립은 사마리아에 있는 것이 더 나아보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적으로는 절대 사마리아를 떠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성령하나님은 빌립에게 사마리아에서 앉아 있지 말고, 일어나서 남쪽으로 향하는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가사라고 하는 곳이 지금으로 말하면 가자입니다. 지금은 팔레스타인 자치 지구가 있는 가자 지구라고 하는 곳이 가사입니다.

가사는 예루살렘에서 아프리카로 가는 길에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그 길은 광야라고 하고 있습니다. 거리는 길이로 예루살렘에서 70키로가 되는 길입니다. 그런데 그 길이 광야의 길입니다.

여기서도 보시기 바랍니다. 사마리아에서 성공적인 사역을 하고 있는 빌립에게 성령이 가라고 하신 곳은 고난의 광야입니다. 우리 같으면 왜 성령하나님께서 우리를 고난의 광야로 인도하십니까? 라고 원망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빌립은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빌립은 고난 가운데서 성령이 역사하신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빌립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고난의 광야로 갔습니다.

그리고 27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27. 일어나 가서 보니(보라)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관리인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여기서 보시면 빌립이 일어나 가서 보니 라고 합니다. 이것을 원문으로 보면 그는 일어났다 갔다. “그리고 보라는 말입니다. “보니는 그냥 보는 것입니다. “보라는 감격스럽게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빌립은 그냥 에디오피아 내시를 그냥 본 것이 아닙니다. 놀랍고 감격스럽게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이 상황은 절대 감격스럽게 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왜 그런가 하면 그가 본 사람이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내시이기 때문입니다.

이 당시 유대인들은 에디오피아 사람들을 구스인이라고 불렀습니다. 구스인이란 구약성경에서 함의 자손으로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아프리카 이방인입니다. 또 유대인들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내시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얼마든지 이 상황에서도 그는 하나님께 원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내가 이렇게 어렵게 광야 길을 걸어왔는데 내 앞에 내시가 있습니까? 저주 받은 구스인이 있습니까? 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빌립은 하나님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그는 성령의 음성을 듣고 일어나서 가서 그냥 보는 것이 아니라 너무 감격해서 보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빌립은 이 모든 상황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30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30. 빌립이 달려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 읽는 것을 듣고 말하되 읽는 것을 깨닫느냐

성령하나님은 일어나서 가라고만 했습니다. 그런데 빌립은 달려갔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하실 놀랍게 역사하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에게 고난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 고난을 통해서 놀랍게 역사하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고난 가운데서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고난 가운데서 주저앉아 있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낙심과 절망의 자리에서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께 놀랍게 역사하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와 같이 빌립은 고난의 상황가운데서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에디오피아 내시를 만나서 그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27절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27. 일어나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관리인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에디오피아 내시는 이방인이지만 하나님을 믿는 자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먼 아프리카에서 예루살렘으로 예배하러 왔다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28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28. 돌아가는데 수레를 타고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더라

에디오피아 내시는 아프리카로 돌아가는 길에 수레를 타고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읽더라는 큰 소리로 계속해서 읽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빌립은 수레에서 내시가 이사야 성경을 읽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구약성경은 히브리어인데, 이때 내시가 읽은 성경은 70인 역 성경으로 헬라어로 기록된 성경입니다.

이때 29절에 “29.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수레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30절에 “30. 빌립이 달려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 읽는 것을 듣고 말하되 읽는 것을 깨닫느냐

우리가 성경을 읽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그 읽은 말씀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빌립은 읽는 것을 깨닫느냐 고 질문합니다.

그러니까 31절에 “31. 대답하되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냐 하고 빌립을 청하여 수레에 올라 같이 앉으라 하니라고 합니다.

그리고 32절부터 보겠습니다.

“32. 읽는 성경 구절은 이것이니 일렀으되 그가 도살자에게로 가는 양과 같이 끌려갔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이 조용함과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33. 그가 굴욕을 당했을 때 공정한 재판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그의 세대를 말하리요 그의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 하였거늘고 합니다. 이것은 이사야 53장을 70인 역으로 읽은 것입니다.

그리고 34절에 내시가 성경에 대해서 질문합니다.

34. 그 내시가 빌립에게 말하되 청컨대 내가 묻노니 선지자가 이 말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이냐 자기를 가리킴이냐 타인을 가리킴이냐고 합니다.

내시는 이사야 53장에 도살자에 끌려가는 어린 양이 이사야를 가리키느냐 아니면 누구를 가리키느냐고 질문합니다.

그러니까 빌립이 35절에서 “35.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라고 합니다.

이사야 53장은 구약성경에서 복음을 제일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사야 53장에 도살자에게 끌려가는 어린양은 예수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신데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이 어떻게 이사야 53장을 통해서 복음을 전했겠습니까?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공의 앞에서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다 죄인입니다. 그리고 그 죄의 결과는 사망 곧 죽음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의로는 절대 완전하게 하나님의 공의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어린 양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분은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를 위해서 대신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3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의롭다하심을 받습니다.

형제님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당신이 구스인이라고 괜찮습니다. 당신이 내시라도 괜찮습니다. 당신이 아프리카 이방이라도 괜찮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죄 사함을 받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의롭다 하심을 받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영생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러니 형제님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신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라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니까 내시가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구원을 주심으로 영접했습니다.

그리고 36절에 “36. 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그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냐고 합니다.

그리고 38절에 “38. 이에 명하여 수레를 멈추고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세례를 베풀고라고 합니다.

이제 이디오피아 내시는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는 비록 내시지만 에디오디피아 국고를 맡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를 통해서 수많은 에디오피아 사람들이 복음을 믿고 예수님께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믿음의 눈으로 보면 고난의 광야에서도 하나님의 역사를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도 고난의 광야에서도 하나님의 역사를 볼 수 있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고 이제 39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39. 둘이 물에서 올라올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간지라 내시는 기쁘게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니라

지금까지 빌립은 오직 성령에 이끌려서 살아갔습니다. 성공적인 사역을 하였던 사마리아를 떠나서 광야로 간 것도 성령의 이끄심이었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음성을 듣고 에디오피아 내시를 만나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40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40. 빌립은 아소도에 나타나 여러 성을 지나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가이사랴에 이르니라

빌립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이제 광야를 떠나서 아소도와 여러 성을 지나다니면 복음을 전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그가 이른 곳은 가이사랴 입니다. 이 가이사랴에서는 빌립이 계속해서 거주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안정된 생활을 합니다. 그리고 행 21장에 보면 30년이 지난 후에 가이사랴에 있는 빌립을 볼 수 있습니다.

218절을 보면 21:8. (바울이) 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머무르니라고 합니다.

그리고 9절에 보면 21:9. 9. 그에게 딸 넷이 있으니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30년이 지난 후 빌립은 안정된 가정을 이루어 딸이 넷이 있습니다.

이때 바울이 여러 날을 가이사랴에 있는 빌립의 집에 머무는데, 아가보라고 하는 선지자가 와서 성령이 말씀하시기를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면 유대인들에게 결박을 당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지리라는 예언을 합니다(21:10,11).

그러니까 빌립이 어떻게 말합니까?

21:12.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빌립과 딸들)과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라고 합니다.

지금 보면 빌립이 변했습니다. 30년 전에는 빌립은 성령의 인도하심이라고 하면 고난의 광야라도 갔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빌립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도바울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 고 합니다. 이에 대해서 행2113절에 21:13.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고 합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빌립은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의 역사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빌립은 30년이 지난 후 고난이 없이 안정된 생활을 하니까 이제는 더 이상 하나님의 역사를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바울이 고난 받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것을 막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더 이상 빌립은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지 못합니다.

고난이 없으면 하나님의 역사도 없습니다. 고난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에게 있는 그 어떤 고난에 대해서 하나님께 원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또 피해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고난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며 살아가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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