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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연구/창세기

창세기강해(19)덮어줌의 은혜(창9:18-29)

by 금빛돌 2021. 12. 3.

오늘 본문은 노아 홍수 이후에 노아의 세 아들들에 관한 말씀입니다. 홍수 이후에 노아의 세 아들들로부터 새로운 인류가 시작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19절에 보면 “19. 노아의 이 세 아들로부터 사람들이 온 땅에 퍼지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의 인류는 모두 노아의 후손들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노아의 세 아들이 모두 하나님의 복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셈과 야벳의 자손들은 하나님의 복을 받는 가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함의 자손들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 가문이 되었습니다.

/같은 노아의 후손인데, 두 가문은 복의 가문이 되고, 한 가문은 저주의 가문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셈과 야벳은 복의 가문이 되었고, 함은 저주의 가문이 되었습니까?

그것은 덮어줌의 은혜를 아느냐 모르느냐의 차이였습니다.

오늘 본문 20절을 보면 노아는 방주에서 나온 후에 농사를 지었습니다. 농사를 지으면서 포도나무를 심었습니다. 그리고 그 포도나무에서 포도주를 만들어서 취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장막에 벌거벗은 채로 있었습니다.

이 노아가 어떤 인물입니까?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믿지 않는 가운데 유일하게 하나님의 심판을 믿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마른하늘에서 심판을 준비하여 방주를 지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방주에서 하늘만을 바라보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노아를 당대의 의인이었다고 합니다. 이런 노아가 술에 취하여 하체를 드러내는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이런 노아의 실수에 대해서 함은 어떻게 반응을 합니까?

22.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그의 두 형제에게 알리매 라고 합니다.

여기서 “보고”라는 말은 그냥 실수로 본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보고라는 말은 자세히 관찰하여 보고라는 말입니다. 심지어 어떤 주석가는 함은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즐겼다고 합니다. 또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알렸다고 하는데, 여기서 알렸다는 말은 단순히 알리는 정도가 아니라 해설하듯이 자세히 설명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었던 셈과 야벳은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질해서 들어가서 아버지의 하체를 덮습니다. 그리고 얼굴을 돌이켜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않았습니다.

23. 셈과 야벳이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노아는 술이 깬 후에 함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실수를 드러내었던 함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25. 이에 이르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하고 고 합니다.

반대로 아버지의 실수를 덮었던 셈과 야벳에 대해서는 축복을 합니다.

“26. 또 이르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27.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하게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그리고 이 노아의 축복과 저주가 역사가운데 그대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먼저 함의 가문을 보시기 바랍니다.

창세기 10장 6절부터 20절까지를 보면 함의 자손들이 나옵니다.

창10장9절에 보면 함의 자손가운데 니므롯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니므롯은 10:9. 여호와 앞에서 용감한 사냥꾼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여호와 앞에서란 “여호와를 대항하는, 여호와를 대적하는 용감한 사냥꾼”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노아의 실수를 공개하고 드러내기를 좋아했던 함의 자손가운데,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을 대항하는 자손들이 나왔습니다.

또 함의 자손가운데서 10절에 보면 바벨론이 나오고, 12절에 보면 앗수르가 나옵니다. 또 13절에 보면 블레셋이 나옵니다. 바벨론과 앗수르는 모두 하나님의 백성인 유다와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멸망시킨 나라들입니다. 또 블레셋도 하나님의 백성들을 괴롭히고 대적했던 족속입니다.

또 출애굽기에 보면 이스라엘백성들을 압제하고 억압했던 요셉을 알지 못했던 애굽왕 바로도 함의 자손입니다(출1:8).

또 함의 넷째 아들의 이름이 가나안입니다. 창10장 15절에서 20절에 보면 가나안에게서 가나안의 족속들이 나옵니다(창10:15-20). 창15장16절에 보면 가나안 족속들의 죄악이 가득 차 있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함의 아들 가나안은 죄악으로 가득 찬 이 세상 사람들의 대표가 됩니다.

이와 같이 함의 자손들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손들이 되었습니다. 또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적하는 자손들이 되었습니다. 또 죄악으로 가득 세상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멸망당하는 자손들이 되었습니다.

반대로 셈의 가문은 어떠합니까?

하나님은 셈의 하나님이 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셈의 가문은 하나님의 백성의 가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셈의 자손가운데서 아브라함이 나왔고, 이삭이 나왔고, 이스라엘이 나왔습니다.

또 하나님은 셈의 자손인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복의 근원이 되게 하셨습니다.

또 셈의 후손인 이스라엘을 통해서 축복의 통로인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같은 노아의 후손이지만, 함은 저주받는 가문이 되었고, 셈은 축복받는 가문이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셈의 가문에서 인류의 구원자이신 예수님께서 나오셨습니다.

이렇게 같은 노아의 후손임에도 불구하고 축복과 저주로 갈라지게 된 원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덮어줌의 은혜를 아느냐 모르느냐에 있습니다. 함은 덮어줌의 은혜를 모르고 아버지의 실수를 드러내고 공개했습니다. 그래서 저주의 가문이 되었습니다.

반대로 셈은 덮어줌의 은혜를 알아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축복의 가문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셈이 어떻게 해서 아버지의 허물과 실수를 덮어줄 수 있었습니까?

6:8.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9.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노아가 어떻게 당대의 의인이 될 수 있었습니까? 노아가 어떻게 홍수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까? 그것은 노아의 잘남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은혜를 입었더라”. 노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은 자였습니다. 그래서 노아가 구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노아가 술에 취에서 하체를 드러낸 것은 잘못이지만, 셈은 그것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구나 우리 아버지도 별수 없구나 역시 우리 아버지나 나나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어쩔 수 없는 죄인이구나?” 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실수를 덮어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성도님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서로의 허물과 부족을 덮어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모든 성도님들이 셈과 같은 축복받는 가정, 자손대대로 축복받는 가문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덮어줌에는 어떤 은혜가 있습니까?

첫째로, 덮어줌에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은혜가 있습니다.

구약시대 법궤는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장소였습니다. 법궤 속에는 십계명이 있습니다. 이 십계명은 우리의 죄를 공개하고 드러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십계명을 보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수 없는 자인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십계명이 있는 그 법궤위에 무엇이 있습니까? 법궤의 뚜껑인 시은소(施恩所)가 있습니다. 시은소란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는 장소라는 뜻입니다. 또 시은소는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장소입니다.

원래 찬송 209장이 원래는 “209:1. 이세상풍파심하고 또환난질고많으나 나편히쉬게될곳은 주예비하신시은소 2. 그향기로운기름을 주내게부어주셔서 내기쁨더해주는곳 주피로사신시은소3. 주믿는형제자매들 그몸은떠나있으나 주앞에기도드릴곳 다함께모일시은소4. 내손과혀가굳어도 내몸의피가식어도 나영영잊지못할곳 은혜의보좌시은소 아멘입니다.

그런데 잘 보시기 바랍니다. 십계명을 통해서 우리가 죄인인 것이 드러납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 십계명이 있는 법궤위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실 수 있습니까? 그 이유는 법궤의 뚜껑인 시은소위에 피가 덮여져있기 때문입니다(카파르-덮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시은소위에 덮여져 있는 피로 인해서 우리와 함께 하시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 죄인인 우리와 어떻게 함께 하시게 되었습니까? 우리의 죄악 된 모습으로는 도무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위에 예수님의 피가 덮여져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위에 덮여져 있는 그 예수님의 피를 인해서 우리와 함께 하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셈은 아버지의 허물과 실수를 덮어주었습니다. 그랬을 때 하나님은 셈과 그 자손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서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까?

제일 먼저 예수님의 피로 여러분들을 덮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를 덮고 있는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또한 우리가 서로의 허물과 부족, 실수를 서로 덮어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셈과 함께 하셨듯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만일 우리가정에서 가족들끼리 서로의 허물과 실수를 드러내고 공개하기를 즐겨한다면 하나님은 그 가정과 함께 하시지 않습니다.

또 교회에서도 우리가 서로의 허물과 실수에 대해서 공개하고 드러내기를 즐겨한다면 하나님은 그 교회와 함께 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가정에 서로의 허물과 부족에 대해서 서로 덮어준다면 하나님께서는 셈의 가정과 같이 우리 가정과 늘 함께 하십니다.

또한 교회에서도 서로의 허물과 부족에 대해서 서로 덮어준다면 하나님께서 영원토록 우리교회와 함께 하십니다.

서로의 허물을 덮어주는 가정과 교회가 되어 하나님께서 늘 함께 하시는 가정과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또 덮어줌에는 사랑의 은혜가 있습니다.

잠언 17장 9절에는 “17:9.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고 하고 있습니다.

또 베드로전서에는 베드로전서4장8절에 “벧전4:8.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그의 피로 덮어주심으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무엇이 참 사랑입니까? 서로의 허물을 공개하기를 즐겨하며, 서로의 허물을 거듭해서 말하는 것은 참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습니다. 서로의 허물과 부족을 덮어주는 것이 참 사랑입니다.

/이번에 다니엘 기도회 때 김희아집사님의 간증이 있었습니다. 집사님은 한쪽 얼굴이 태어날 때부터 붉은 반점이 있었는데, 거기에다가 다른 쪽 얼굴에도 암이 생겼습니다. 집사님은 처음에는 하나님께서 왜 나의 아픈 곳을 또 때리십니까? 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호선이라는 친구가 그 아픈 곳을 스카프로 가려주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병원에 갈 때 그 아픈 곳을 가리고 갈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친구는 밥 잘 챙겨 먹으라고 하지 않고, 함께 같이 밥을 먹는 친구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 친구의 모습이 예수님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모습이 마치 아픈 곳에 또 상처가 생긴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부끄러워 아파할 때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피로 우리의 죄로 물든 상처를 가려주셨습니다. 덮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죄가 없다고 칭하여 주셨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친구라고 불러주셨습니다.

/왜 그 친구가 친구의 상처를 가려주었겠습니까? 사랑 때문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피로 우리를 가려주셨습니까? 사랑 때문입니다.

/눈썹이 없는 어떤 자매가 있었습니다. 그 자매는 눈썹이 없는 것을 숨기고 결혼을 했습니다. 당시에는 눈썹 문신이라는 것도 없어서 남편 몰래 매일 눈썹을 그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남편의 사업이 망해서 부부는 연탄을 배달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남편이 앞에서 끌고 아내가 뒤에서 미는데 바람이 불었습니다. 그래서 연탄재가 아내의 얼굴에 묻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남편이 다가와서 아내의 얼굴을 닦아 주었습니다. 그때 아내는 혹시 남편이 자신이 그린 눈썹을 닦으면 어떻게 하나 걱정했습니다. 그런데 남편은 아내의 눈썹만 빼고 모든 것을 닦아주었습니다. 알고 보니 남편은 처음부터 아내의 눈썹이 없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 사실을 안 아내는 주루룩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때 남편은 아내의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서로의 허물과 부족과 실수를 덮어주는데 사랑의 은혜가 있습니다.

셋째로, 덮어줌에는 용서의 은혜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셈이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다고 하는데, “덮다”(갓싸)라는 단어는 “죄를 덮어서 용서하다” 라는 의미로 성경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시32:1).

그래서 시편 32편 1절에 “32:1. 허물의 사함(용서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덮어진 자)는 복이 있도다”고 합니다.

그래서 셈과 야벳이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다는 말은 아버지의 실수를 용서했다는 말입니다.

자녀가 실수하면 부모가 그 실수를 용서해 주어야합니다. 또한 부모가 실수하면 그 자녀가 용서해 주어야합니다.

제가 자주 말씀을 드리지만 용서는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용서는 용서받는 자보다 용서하는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진정으로 나 자신을 위하는 사람이면 서로의 허물을 끝까지 찾아내며 공개하는 자가 아니라 덮어주고 용서해주는 자가 되어야합니다.

/그래서 서로 허물을 덮어줌으로 서로 용서해주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넷째로 덮어줌에는 땅을 차지하는 은혜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노아의 아들 함은 그냥 함이라고 하지 않고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라고 합니다. 18.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은 셈과 함과 야벳이며 함은 가나안의 아버지라

22.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그의 두 형제에게 알리매

여러분 모세가 왜 함을 그냥 함이라고 하지 않고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라고 하고 있습니까?

그 이유는 창세기는 원래 가나안땅을 들어가려는 이스라엘백성들을 위해서 쓴 책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왜 이스라엘백성들이 가나안땅을 들어가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 창세기가 쓰여 졌습니다.

/이스라엘이 왜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노아를 통해서 미리 약속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25절과 26절을 보시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25. 이에 이르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하고 26. 또 이르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이와 같이 왜 이스라엘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덮어줌의 은혜를 모르는 행동을 했기 때문입니다.

왜 이스라엘백성들이 축복의 땅인 가나안땅을 차지할 수 있습니까?

이스라엘의 조상인 셈이 덮어줌의 은혜를 아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가나안 땅을 축복의 상징입니다.

그래서 누가 지금도 축복의 땅인 가나안 땅을 차지할 수 있습니까?

덮어줌의 은혜를 아는 자가 축복의 땅인 가나안 땅을 차지할 수 있습니다.

또 성경에서 가나안 땅은 천국을 상징하기고 합니다.

그래서 누가 저 영원한 가나안 땅인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덮어줌의 은혜를 아는 자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덮어줌의 상징인 법궤를 들고 나갔을 때 요단강이 갈라졌습니다. 또 여리고성을 무너뜨릴 때도 덮어줌의 상징인 법궤를 들고 갔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의 삶에 인간의 힘으로는 건널 수 없는 요단강이 열리기를 바라고 계십니까?

또 여러분의 삶의 무너질 것 같지 않은 여리고성이 무너지기를 바라고 계십니까?

그래서 여러분의 살에 가나안으로 가는 길이 열리기를 바라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덮어줌의 은혜를 알아야합니다.

덮어주는 자가 축복의 땅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서로의 허물과 부족을 서로 덮어주며 살아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예비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 갈 수 있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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