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 27절에 보면 데라의 족보가 나옵니다. 여기서 족보라는 말이 톨레토트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앞에서 계보 족보라는 이름으로 번역을 한 적이 있습니다. 또 이 말은 역사 또는 이야기라는 뜻도 있다고 했습니다. 창세기에서 톨레토트라는 말이 시작이 될 때 항상 새로운 역사 새로운 이야기가 전개가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데라의 족보는 바벨탑 이후에 하나님께서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시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벨탑은 이 세상나라를 보여준다고 했습니다. 이 세상나라사람들도 모두 하나님의 일반적인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사람들에게도 생명의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생육하고 번성하는 복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 사람들은 이런 은혜를 주신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바벨탑을 쌓고 있습니다. 그 바벨탑을 통해서 인간의 나라 세상의 나라를 만들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제 셈의 후손이고, 데라의 아들인 아브라함을 통해서 하나님나라를 이루시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을 통해서 하나님나라를 이루시는 이야기가 창 12장부터 나오는데 데라의 족보는 그 배경을 이루고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을 통해서 아브라함의 가족들을 알 수 있습니다.
27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27. ○데라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데라는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고 하란은 롯을 낳았으며
여기서 보시면 데라가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고 하란을 롯을 낳았다고 합니다.
언듯보면 아브람이 첫째고 나홀이 둘째고 하란이 셋째라고 보기 쉽습니다.
그러나 첫째가 하란이고, 둘째가 아브람이고, 셋째가 나홀입니다.
유대인의 전승에 아브라함의 가족들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는 본처를 통해서 자녀를 낳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첩을 통해서 자녀를 낳았는데, 그 자녀의 이름이 하란입니다. 그래서 하란이 데라의 첫째 아들입니다.
그 후에 데라가 본처를 통해서 자녀를 낳는데, 본처를 통해서 낳은 아들이 아브람이고, 나홀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아브람의 이름이 먼저 있는 것은 본처를 통해서 낳은 첫째 아들이 아브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첫째 아들인 하란과 아브람의 나이차이가 60세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하란은 아브람을 자신의 아들처럼 사랑하고 아꼈다고 합니다. 특별히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는 갈대아우르에서 우상을 만드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첫째 아들인 하란은 신앙이 좋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란은 노아의 손자인 아르박삿을 통해서 노아의 이야기를 들었다고 합니다. 10. ○셈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셈(노아의 아들)은 백 세 곧 홍수 후 이 년에 아르박삿(노아의 손자)을 낳았고
이때 하란은 항상 아브람을 데리고 아르박삿에게 갔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르박삿을 통해서 노아 홍수전에 세상의 이야기를 들었고,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어떻게 심판했으며, 노아의 가족들이 어떻게 방주에서 살아났는가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노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방주에 들어갔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방주에서 나왔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러다가 아브람이 병에 걸렸다고 합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병이 낫지 않자 하란은 자신의 집에 있는 우상들 때문에 아브람이 병이 걸린 줄 알고 그 모든 우상 드리빔을 태웠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하란이 죽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28절에서 “28. 하란은 그 아비 데라보다 먼저 고향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죽었더라”고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니까 죽은 형 하란의 아들 조카 롯은 아브람에게는 자신의 아들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아브람은 조카 롯을 아들과 같이 끝까지 보살펴 주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가나안 땅에서 땅을 선택할 때도 아브람은 좋은 땅을 선택하도록 합니다. 그리고 롯이 곤경에 처했을 때 가서 롯을 도와줍니다. 그리고 소돔 땅이 심판을 받기 전에 롯을 구출합니다.
그리고 29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29. 아브람과 나홀이 장가 들었으니 아브람의 아내의 이름은 사래며 나홀의 아내의 이름은 밀가니 하란의 딸이요 하란은 밀가의 아버지이며 또 이스가의 아버지더라
큰 형인 하란이 죽고 난 다음이 아브람과 나홀이 장가를 갑니다. 그래서 아브람의 아내 이름은 사래며 나홀의 아내 이름은 밀가인데, 하란의 딸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나홀의 아내가 형인 하란의 딸이라고 합니다. 나홀은 자신의 조카딸과 결혼합니다. 이것도 고대 근동 사회니까 일어나는 일이라고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니까 데라의 첫째 아들인 하란은 아들이 롯이고, 딸이 밀가이 또한 이스가인 것을 오늘 본문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이것을 그림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데라
하란
아브람=사래 나홀= 밀가 이스가 롯
/데라의 첫째 아들인 하란과 둘째 아들인 아브람은 하나님을 잘 섬겼는데, 셋째 아들인 나홀은 그렇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가 하던 우상을 만드는 일을 하였고, 또 더 큰 돈을 벌기 위해서 당시의 무역도시였던 하란으로 미리 이사를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창 24:10. ○이에 종이 그 주인의 낙타 중 열 필을 끌고 떠났는데 곧 그의 주인의 모든 좋은 것을 가지고 떠나 메소보다미아(하란)로 가서 나홀의 성에 이르러
아브라함이 이삭의 아내를 구하기 위해서 종을 하란으로 보내는데 거기서 나홀의 성으로 갑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의 동생인 나홀은 하란에서 큰 성을 이루고 거부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오늘 본문에서 아브람의 아내가 사래라고 합니다. 사래는 아브라함의 이복누이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애굽에 갔을 때 아내 사래를 누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아브라함은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 “창20:12. 또 그는 정말로 나의 이복 누이로서 내 아내가 되었음이니라” 고 하였습니다. 사래라는 이름의 뜻이 공주라고 하는데, 사래의 얼굴이 아주 예쁘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에 의하면 성경에서 얼굴이 예쁜 여인이 사래 라합 아비가일 에스더가 있는데 이 중에서 사래가 제일 예쁘다고 합니다. 다윗의 아내 아비가일도 예쁜데, 사래에 비하면 원숭이와 같다고 합니다. 사래가 127세를 살았는데, 100살 때 사라는 20살과 같았다는 이야기가 유대인들에게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래가 65세 즈음에 애굽에 가서도 아브라함이 사래를 누이라고 하고, 또 사래가 90살 즈음에 그랄에 갔을 때도 누이라고 한 것이 그 만큼 사래가 예쁘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합니다.
그런데 30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30. 사래는 임신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
오늘 본문에서 제일 강조하는 것이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가 임신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임신하지 못하였다고 하는 것은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당시에는 고대 근동이기 때문에 이것은 가장 큰 결핍이고 고통이었습니다.
요즘에는 일부러 자녀를 낳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당시에는 이것이 가장 큰 아픔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는 아브라함을 하나님나라를 이루는 최초의 사람으로 부르셨습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항상 인간에게 큰 결핍과 고통과 어려움을 주심으로 하나님나라의 역사를 시작하신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결핍이 있습니까? 고통이 있습니까? 어려움이 있습니까? 결핍 고통 어려움이 하나님의 일의 시작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노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노아에게만 큰 은혜를 주셨습니까? 노아도 500살까지 자녀를 낳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500년 동안 어려움을 당하게 하시게 한 다음에 하나님의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이것은 이삭도 마찬가지입니다. 창25:21. 이삭이 그의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의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그의 아내 리브가가 임신하였더니 이삭의 아내 리브가도 임신하지 못하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삭이 기도함으로 하나님께서 그의 간구를 들으심으로 임신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왜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아브라함에게 고통을 주십니까? 그 이유는 그가 속한 하나님나라가 인간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나라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더욱이 하나님께서는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한 자녀도 가질 수 없는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와 같은 많은 자녀를 가지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그래서 창12: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현재 전 세계 인구가 60억 명 즈음 되는데,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녀라고 하는 사람들이 30억명이 됩니다. 유대인들도 아브라함을 자신들의 조상이라고 하고, 이슬람 사람들도 자신들의 조상이 아브라함이라고 합니다. 기독교인들도 믿음의 조상을 아브라함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아브라함은 처음부터 자녀를 가지지 못하는 자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서 큰 민족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여러분에게 항상 인간적인 힘으로는 도무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있습니까? 그 문제 앞에서 절망하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오히려 이제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희망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그때부터 하나님나라의 일을 시작하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자녀가 없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는 어떤 희망을 주십니까? 3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31.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인 그의 손자 롯과 그의 며느리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하였으며
여기서 보시면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가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 롯과 아브라의 아내를 데리고 갈대아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합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7:2. 스데반이 이르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갈대아 우르)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3. 이르시되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가나안 땅)으로 가라 하시니
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그에게 고향과 친척집을 떠나서 가나안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행 7:4.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갈대아 우르)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의 아버지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지금 사는 이 땅(가나안 땅)으로 옮기셨느니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고향을 떠나 가나안땅으로 가라고 하신 말씀을 아브라함이 들었습니다. 그 말을 아브라함은 아버지 데라에게 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 데라가 아들의 말을 듣고 고향을 떠나서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가나안땅으로 가고자 했던 아버지 데라는 하란에서 머물러 거류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데라가 땅으로 가고자 했는데, 하란에 머물렀겠습니까?
하란은 그의 아들 나홀이 먼저 가 있던 곳입니다. 또 하란은 그의 죽은 아들과 이름이 같은 곳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하란은 당시에 교통과 무역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적으로 살기에 좋은 곳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란에서 머뭇거리고 있다가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32. 데라는 나이가 이백오 세가 되어 하란에서 죽었더라
그리고 창세기 12장 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여기서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라고 하는데, 여기서 “이르시되” 는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실 때 창1장 하나님께서 “이르시되”와 같은 말씀입니다.
태초에 세상은 흑암이었고, 무질서 즉 혼돈이었고, 공허였습니다.
마찬가지로 홍수이후 바벨탑을 통하여 보여준 세상은 흑암이었고, 혼돈이었고, 공허였습니다.
예레미야 4장 23절에 예레미야 시대도 “렘4:23.○보라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이 세상에도 인간에는 희망의 빛이 보이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다 무질서하고 혼돈입니다. 무엇보다 공허합니다. 결핍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입니까? 이 세상 사람들은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인간을 통해서 여전히 희망을 가집니다. 그래서 사람이 희망이다 고 합니다. 또 모든 부분이 무질서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무질서한 것이 좋다고 합니다. 또 지금 사람들은 무언가 채워진 것처럼 보입니다. 그들이 공허하고 허무한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에게 무엇을 깨닫게 하십니까?
우리의 결핍을 깨닫게 하십니다. 우리의 공허를 깨닫게 하십니까? 우리의 희망없음을 깨닫게 하십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그렇게 하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자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자식을 없게 하셨습니다. 그로 결핍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에게만 희망을 갖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이 희망을 갖게 한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이르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갈대아 우르에서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하란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고향 친척 아버지 집을 떠나라는 말씀입니다. 또 내가 내게 지시할 가나안땅으로 가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나라와는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나라를 너와 네 자손들에게 주겠다는 말씀입니다.
//저는 지난 한 주간 동안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큰 힘을 얻었습니다.
여러분의 삶에 희망이 없어 보입니까? 여러분의 삶이 혼돈스러워 보입니까? 공허해보입니까?
무엇보다 나의 인간적인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있습니까?
/그렇지만 하나님의 말씀만이 여러분의 희망이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여러분들의 모든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먼저 우리에게 떠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아브라함에게 고향 친척 아버지 집을 떠나라는 말씀은 우리가 실재로 우리의 가족들을 버리고 떠나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서 안정감을 주는 것에서 떠나라는 말씀입니다.
또 우리의 삶 가운데서 하나님처럼 믿고 신뢰하는 것들에서 떠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에게서만 안정감을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삶에 안정감을 주고 신뢰감을 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지식입니까? 삶의 경험입니까? 또 내가 믿고 의지했던 사람들입니까? 아니면 나 자신입니까? 또는 나의 신념입니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에게 안정감과 신뢰감을 주는 곳에서 떠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안정감과 신뢰감을 주는 것에서 떠나서 어떻게 하라고 말씀하십니까?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만 희망을 가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말씀입니까? 2절에서 3절의 말씀입니다.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이에 4절에 보시면 “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이재철목님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현찰을 주지 아시하시고 약속어음을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만일 어떤 사람이 10억을 현찰로 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사람에게 대한 믿음이 필요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사람보다 눈에 보이는 돈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약속어음을 100억을 줍니다. 그리고 기한도 없습니다. 이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 사람에 대한 믿음입니다. 만일 그 사람을 믿지 않으면 그 약속어음은 우리에게 휴지조각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사람에게 대한 믿음이 있으면 그 약속어음은 우리에게 희망이 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가나안땅을 주겠다는 약속어음을 주십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지금 가나안땅에 땅 한 평도 없습니다. 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너로 큰 민족을 이루어주겠다고 하나님은 약속어음을 주십니다. 그런데 지금 아브라함은 자녀가 한명도 없고, 아내 사래는 자녀를 낳을 수도 없습니다. 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겠다는 약속어음을 주십니다. 그런데 지금 아브라함은 세상에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자였습니다. 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내가 너로 복의 통로가 되게 하겠다는 약속어음을 주십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지금 자녀가 없어서 박복의 대명사가 되어 있습니다. 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해주겠다는 약속어음을 주십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남에게 복을 주기는커녕 자신도 그 어떤 복도 받지 못한 상태에 있습니다.
/우리 같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나님 이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 지금 내게 이 중에 단 하나라도 눈으로 보여주시면 믿겠습니다 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좋은 점이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무조건 말씀만 따라갑니다. 갈대아 우르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무조건 아버지를 설득해서 고향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경제적으로 안정감이 있고, 동생 나홀이 안정된 기반을 잡고 있는 하란에서도 하나님께서 떠나라고 하시니까 무조건 떠납니다.
아브라함은 나중에 두 번씩이나 자신의 아내를 누이라고만 하고 속입니다. 아브라함도 부족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무조건 말씀을 따라갔습니다.
그래서 독자 이삭을 바치라고 하셨을 때도 한순간도 고민하지 않습니다. 말씀을 따라서 무조건 순종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아브라함이 믿은 것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실 복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은 것은 하나님 자신이었습니다.
그래서 사실 아브라함은 그에게 말씀하신 그 복들이 어떤 것들인지 잘 알지 못했습니다. 또 구체적으로 알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에 믿은 것은 천지만물을 지으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었습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었습니다.
노아를 홍수에서 건지신 하나님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브박삿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았습니다.
왜 인간이 불행하게 되었는가를 알았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알았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면 망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만 따라가면 하나님께서 내 삶을 책임지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눈에 보이는 것이 없고 손에 잡히는 것이 아무 곳도 없었지만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따라갔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의 나이가 75세입니다. 절대 적은 나이가 아닙니다. 인간적으로 더 이상 새로운 것에 희망을 가질 나이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나라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합니다. 나이가 젊어도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그 인생은 희망이 없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많아도 하나님의말씀만 붙잡고 있으면 희망이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늦지 않았습니다. 우리교회도 결코 늦지 않았습니다.
우리 가정도 절대 늦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믿고 신뢰하는 모든 것을 다 버리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아가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고 말씀하신 아브라함의 모든 복을 다 받아 누리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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