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은 홍수심판의 물로 잠긴 세상이 어떻게 회복되느냐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심판이 어렵겠습니까? 회복이 어렵겠습니까? 심판보다 회복이 어렵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가축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바람을 땅 위에 불게 하시매 물이 줄어들었고” 합니다.
여기서 보시면 하나님이 라고 합니다. 창세기 6장과 7장에서는 하나님을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심판가운데서 너희들과 함께 하겠다는 언약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라는 이름은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능력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세상을 심판하기도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심판하시더라도 반드시 회복시켜 주십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심판보다 회복보다 더 어렵다 생각합니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천지를 무에서 유로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은 그 어떤 것도 회복시켜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심판의 물로 가득 찬 세상을 회복시켜 주십니까?
1절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1.(전능하신)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가축을 기억하사- 라고 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방주에 있는 노아와 그와 함께 있는 모든 짐승들을 기억하고 계십니다. 여기서 기억하다(자카르)고 하는 것은 잊어버리고 있다가 기억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기억하고 있다고 하는 “자카르”라는 말은 “마음에 새기고 있다”는 말입니다.
/아들이 집을 나갔습니다. 그때 어머니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집 나간 자녀는 그 어머니를 잊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절대 그 아들을 잊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어머니는 항상 그 아들을 마음에 새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430년 동안 애굽에서 종으로 있으면서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왜 그들이 부르짖었겠습니까? 하나님 이토록 오랜 시간동안 우리가 고통을 당하는데 하나님은 왜 우리를 기억하지 않습니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출애굽기 2장 24절에서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출2:24.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25.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고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더라”고 합니다. 여기서 기억하다는 것도 자카르입니다. 이것도 하나님께서 잊고 계시다가 기억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430년 동안 한 순간도 이스라엘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마음에 새기고 계셨습니다. 때가차매 하나님께서 마음에 새기시고 기억하신 대로 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요셉의 생애가운데서 제일 힘든 시기는 28살부터 30살까지 모든 사람들이 그를 기억하지 않고 잊었을 때였습니다. 요셉이 그렇게 믿었던 술 맡은 관원도 요셉을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창40:23.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를 잊었더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한순간도 요셉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요셉을 잊어버리고 있었던 그 2년 동안 하나님은 요셉을 기억하셨습니다. 그래서 바로로 꿈을 꾸게 하시고, 모든 사람들이 그 꿈을 풀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2년 뒤에 다시 요셉을 기억하게 하셔서 애굽의 총리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서 또 하나의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노아를 기억하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노아의 순종을 기억하셨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노아의 의로움을 기억하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노아도 별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노아도 실수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기억하사”라고 하는 것은 노아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노아를 기억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25편 6-7절에서 시편기자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시25:6. 여호와여 주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부터 있었사오니 주여 이것들을 기억하옵소서(자카르) 7. 여호와여 내 젊은 시절의 죄와 허물을 기억하지 마시고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주께서 나를 기억하시되(자카르) 주의 선하심으로 하옵소서”고 합니다.
여기서 시편기자는 무엇 때문에 나를 기억해 달라고 합니까? 자기 자신의 과거가 아닙니다. 또 자신의 의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을 따라서 나를 기억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어떻게 하나님께서 기억해 달라고 할 수 있습니까? 우리의 과거의 모습이 아닙니다. 또 우리의 의로움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을 따라서 우리를 기억해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때 하나님은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사49:15.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그 어떤 절망가운데서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따라 하나님께서 여전히 우리를 잊지 않고 기억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나를 잊어버린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나를 잊지 않고 마음에 기억하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 더 놀라운 것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여기서 기억하심이라는 단어는 단순히 생각만 하고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기억하심이라는 말에 대해서 김지찬 교수님은 구체적인 행동이 수반되는 하나님의 전인격적인 행위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잊지 아니하시고 기억하심으로 지금도 일하고 계심을 믿으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억하심으로 어떻게 일을 하고 계십니까?
1절을 다시 보시면 “--하나님이 바람을 땅 위에 불게 하시매 물이 줄어들었고”고 합니다.
여기서 바람은 자연세계의 바람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바람이란 “루아흐”로 성령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또 이것은 창세기 1장 2절에서 “창1:2—하나님의 영(성령)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는 말씀은 연상시켜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태초에 이 세상의 물이 혼돈가운데 있었습니다. 혼돈가운데서 있는 물위에 하나님의 성령이 운행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심판의 물로 온 세상이 혼돈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의 성령이 불어서 물을 마르게 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의 삶이 혼돈가운데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억하심으로 어떻게 우리를 회복시켜주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혼돈의 세상 가운데서 성령으로 함께 하셨듯이 지금도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십니다. 성령의 바람을 지금도 불어주고 계십니다. 그래서 성령의 바람이 불 때 우리가운데 있는 모든 혼돈의 물을 마르게 하심을 믿으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성령의 바람이 불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래서 1절하-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하. -물이 줄어들었고 2. 깊음의 샘과 하늘의 창문이 닫히고 하늘에서 비가 그치매(사가크)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놀라운 것은 “그치매(사가크)”라는 동사가 에스더서에는 왕의 진노가 사라지는 모습을 가리킬 때 사용되었던 단어였습니다. “에2:1—왕의 노가 그치매(사가크)”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령의 바람이 불 때 하나님의 진노가 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에서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롬8: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성령)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8.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분노하는 것입니다. 시기하는 것입니다. 질투하는 것입니다. 미워하는 것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됩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킵니다. 그러나 성령의 생각은 사랑입니다. 희락입니다. 화평입니다. 오래참음입니다. 자비입니다. 양선입니다. 온유입니다. 충성입니다. 절제입니다. 성령의 바람만이 하나님의 모든 진노를 그치게 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 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3. 물이 땅에서 물러가고 점점 물러가서 백오십 일 후에 줄어들고
여기서 “물러가고” 라는 동사는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또 “점점 물러가서”라는 말은 “계속해서 물이 있던 원래 자리로 돌아가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성령의 역사가 무엇입니까? 성령의 역사는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물이 어떻게 산위에 있을 수 있습니까? 물이 어떻게 집안에 들어 올 수 있습니까? 물은 원래 있던 곳에 있어야합니다. 이렇게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지금도 여러분은 성령의 바람을 느끼고 계십니까? 성령의 숨결을 지금도 느끼고 계십니까? 성령하나님은 지금도 어떻게 역사하고 계십니까? 여러분들이 있을 자리로 돌아가게 하십니다. 우리가 있을 자리는 하나님의 자리가 아닙니다. 우리가 있을 자리는 판단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우리가 있을 자리는 모든 판단을 주님께 맡기는 자리입니다. 우리의 모든 염려를 주님께 맡기는 자리입니다. 우리의 모든 걱정을 주님께 맡기는 자리입니다. 성령하나님은 지금도 계속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리가 아니라 우리가 있을 자리로 돌아가게 하십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모든 걱정과 염려를 주님께 맡기고 오직 기도하는 자리로 날마다 계속해서 돌아가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제 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4. 일곱째 달 곧 그 달 열이렛날에 방주가 아라랏 산에 머물렀으며
성경의 학자들은 이 아라랏산이 가장 안전한 곳이라고 합니다. 만일 배가 벼랑위에 걸렸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떨어져 죽을 수도 있습니다. 또 바다가운데 머물렀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헤엄쳐서 나오다가 죽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아라랏산은 가장 안전한 곳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보았듯이 이 배는 키가 없습니다. 노도 없습니다. 또 항해계획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이 배의 선장이십니다. 성령하나님께서 이 배를 운행하셨습니다. 그래서 가장 안전한 곳으로 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의 모든 키를 하나님께 맡기시기 바랍니다. 인간의 모든 동력장치를 다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성령하나님께서 이끄는 대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장 안전한 곳으로 인도해 주실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 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5. 물이 점점 줄어들어 열째 달 곧 그 달 초하룻날에 산들의 봉우리가 보였더라
우리 인생이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 같아도 우리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손안에만 있으면 하나님께서 희망의 산봉우리를 우리에게도 분명히 보여 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홍수의 물이 줄어들어 산들의 봉우리가 보인 것이 노아 600년 10월 1일입니다. 그 후에 노아는 40일을 더 기다렸다가 방주에서 나갈 행동을 시작합니다. 이렇게 노아가 방주에서 나갈 행동을 시작한 날은 노아 600년 11월 10일입니다. 홍수가 시작이 된 날은 노아 600년 2월 17일입니다.
그러니까 노아는 거의 9개월 동안 방주에서 나갈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이제 방주에서 나가기 위한 일을 시작합니다.
/노아가 방주에서 나가기 위해서 첫 번째 한 행동이 무엇입니까?
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6. ○(산봉우리가 보인 후/600년 10월 1일) 사십 일을 지나서 노아가 그 방주에 낸 창문을 열고 7. 까마귀를 내놓으매 까마귀가 물이 땅에서 마르기까지 날아 왕래하였더라 고 합니다.
먼저 노아는 까마귀를 먼저 내 놓았습니다. 그런데 까마귀는 물이 땅에 마르기까지 그냥 날아 다녔습니다. 그리고 이제 비둘기를 내 놓습니다. 비둘기를 세 번 내 놓습니다.
첫 번째 비둘기를 내 놓는 장면이 8절과 9절에 나옵니다.
8. 그가 또 비둘기를 내놓아 지면에서 물이 줄어들었는지를 알고자 하매 9. 온 지면에 물이 있으므로 비둘기가 발 붙일(안식할)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돌아와 그에게로 오는지라 그가 손을 내밀어 방주 안 자기에게로 받아들이고
노아는 비둘기를 내놓아 땅에 물이 줄어들었는지 알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아직 온 지면에 물이 있어서 비둘기가 발붙일 곳을 찾지 못하여 다시 방주로 돌아옵니다.
여기서 발 붙일이라는 말은 안식한다. 쉼을 얻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비둘기를 방주를 떠나서는 안식할 곳을 찾지 못했습니다. 진정한 쉼을 얻을 곳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앞에서 까마귀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까마귀는 썩은 동물도 먹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마음대로 떠 돌아다녔습니다. 성경에서 까마귀는 부정적인 동물을 상징합니다(레ll:l5,신l4:l4). 그런데 비둘기는 선한 동물을 상징합니다(레l:l4,l2:6).또 호세아서에서는 비둘기는 이스라엘백성을 상징하고 있습니다(호7:11.11:11). 우리는 까마귀와 같이 되지 말아야합니다. 우리는 방주를 떠나서 썩은 고기를 먹는 까마귀 같은 자들이 되지 말아야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손을 떠나서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참된 안식이 없습니다.
비둘기는 방주 밖을 떠나서 안식할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돌아와 노아에게로 옵니다. 흥미로운 것은 노아라는 말뜻이 안식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노아가 예수그리스도를 미리 보여주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안식을 얻지 못하지만 우리가 예수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오면 노아가 손을 내밀어 비둘기를 방주 안으로 받아들이는 것과 같이 예수님께서 손을 내 밀어 우리를 받아주시고 안아 주심을 믿으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고 두 번째 노아가 비둘기를 내 놓습니다. 그것이 10절에 있습니다.
10. 또 칠 일을 기다려 다시 비둘기를 방주에서 내놓으매 라고 합니다.
여기서 여러분 “기다려(훌)”라는 단어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산모가 자녀를 낳기 위해서 고통가운데서 기다리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 가운데서 전혀 희망이 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고통가운데서도 기다리고 인내해야합니다. 억지라도 참고 기다려야합니다. 노아는 처음 비둘기를 내놓았을 때 아무 것도 얻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실망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노아는 억지로 참았습니다. 고통가운데서 7일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면서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또 다시 비둘기를 방주에서 내 놓습니다.
이것이 성경적인 인내, 성경적인 기다림의 모습입니다.
성경적인 인내가 무엇입니까?
먼저는 그 어떤 고통과 고난이 있어도 도망가지 않는 것입니다. 피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모든 고난과 고통 가운데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그냥 참는 것입니다. 노아가 그랬습니다. 노아는 고통가운데서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성경적 인내는 고통가운데서 그냥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고통가운데서 내가 할 일을 하면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노아가 그랬습니다. 노아는 고통가운데서 기다리면서 또 다시 비둘기를 내 놓았습니다.
시편 40:1절에서 시편기자도 이렇게 고백합니다.
시40:1.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여기서도 시편기자는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냥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기도하면서 기다렸습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기다렸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그의 부르짖음을 들으셨습니다.
이렇게 노아는 고통가운데 인내함으로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또 다시 비둘기를 내 놓았습니다. 그때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11. 저녁때에 비둘기가 그에게로 돌아왔는데 그 입에 감람나무 새 잎사귀가 있는지라 이에 노아가 땅에 물이 줄어든 줄을 알았으며
비둘기가 노아에게 돌아와 그 입에 감람나무 새 잎사귀를 물고 왔습니다. 여기서 감람나무 새 잎사귀는 홍수에서 떠내려가든 감람나무에 있던 잎사귀에서 따 온 것이 아닙니다. 감람나무 씨가 땅에 싹을 내어서 나온 새 잎사귀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노아는 땅이 물이 줄어들어 땅이 거의 말라가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1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2. 또 칠 일을 기다려 비둘기를 내놓으매 다시는 그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더라
감람나무 새 잎사귀를 보고 난 다음에 노아는 또 칠일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기다려는 10절에서 “기다려”와 단어가 다릅니다. 10절에서 기다려는 “훌”이라는 단어라도 고통가운데 기다림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기다려”는 “야할”로 소망가운데 기다림입니다. 또 기쁨 가운데 기다립니다.
이것도 또한 성경적인 기다림입니다. 성경적인 기다림이란 고통가운데 기다림도 필요합니다. 그 고통가운데서 내가 할 일을 하면서 기다려야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작은 희망의 감람나무 잎을 보여주십니다. 이때 우리는 이제 소망가운데 기다려야합니다.
어떤 소망입니까? 이제는 심판이 아니라 모든 것이 다 치유되고 회복되는 소망입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하나님께 충만한 복을 받게 되는 소망입니다. 이제 더 이상 미움과 다툼이 아니라 사랑과 용서가 있는 소망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지금 우리에게는 어떤 기다림이 필요합니까? 지금 우리에게도 두 가지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어떨 때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이럴 때는 그냥 고통가운데서도 참고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럴 때에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기도해야합니다.
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작은 감람나무 새 잎을 보여주실 때가 있습니다.
이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뭐 겨우 감람나무 잎 하나야, 이것이 언제 커서 나무가 될 수 있나” 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내게 감람나무 잎 하나만 주신 것도 감사합니다. 하나님 이 작은 감람 잎이 큰 나무를 이루고 숲을 이루게 될 것을 믿고 소망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러분의 삶 가운데서 그 어떤 인간적인 희망이 보지 않은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예수그리스도가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우리의 소망이십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에게 인간적인 아무 희망이 없다하더라도 예수그리스도 한 분만을 인하여 고통가운데서도 소망으로 기다릴 수 있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제 13절과 14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3. ○육백일 년 첫째 달 곧 그 달 초하룻날에 땅 위에서 물이 걷힌지라 노아가 방주 뚜껑을 제치고 본즉 지면에서 물이 걷혔더니 14. 둘째 달 스무이렛날에 땅이 말랐더라
노아 홍수가 시작된 것이 노아 600년 2월 17일입니다(창7:11. 노아가 육백 세 되던 해 둘째 달 곧 그 달 열이렛날이라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문들이 열려).
홍수시작에서 물이 걷힌 기간은 10개월 13일 정도고, 땅이 완전히 말라서 노아가 방주에서 나오게 된 기간은 1년 11일입니다. 학자들은 음력으로 1년이 354일인데, 여기서 11일을 더하면 365일이 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양력으로 대략 1년 정도가 된다고 학자들은 말합니다. 그래서 홍수가 시작하여 땅이 마르기까지 기간이 1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비가 온 것이 1년이라고 한 것은 잘못 말한 것입니다. 비가 온 것은 40일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노아가 방주에 있은 기간을 40일로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노아가 방주에 있는 것은 1년입니다.
여러분 1년 동안 한 가족이 방주라는 공간에서 있을 때 어떠했다고 생각하십니까? 뿐만 아니라 모든 동물들과 같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먹이까지 제공했습니다. 우리 같으면 심각한 우울증에 걸리거나 문제가 생길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노아와 그의 가족들에게 그 어떤 문제가 있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방주에서 나온 후에 노아가 실수를 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노아와 그의 가족들이 방주에서 1년 동안 있을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입니까?
그 비결은 노아와 그의 가족들은 1년 동안 방주에서 오직 하늘의 열린 창을 통해서 하나님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매일 가축들의 소리를 들어도 피곤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또 매일 같은 사람들끼리 만나도 고단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서에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40:28.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29.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30.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3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여호와를 앙망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에게만 향하는 것입니다. 하늘의 열린 창을 통해서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그 어떤 피곤한 가운데서도 새 힘을 얻습니다. 우리의 모든 생각, 시간, 정성, 힘, 지혜, 그 모든 것을 하나로 모아서 하나님에게로만 집중해야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피곤하지 않고 날마다 새 힘을 얻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나이는 숫자에 불과합니다. 나이가 젊어도 피곤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오직 하나님만을 앙망하는 자는 절대 피곤하지 않습니다. 삶의 의욕이 있습니다. 또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환경이란 절대 우리의 삶의 행복의 조건이 될 수 없습니다. 아무리 환경이 어려워도 하나님만을 앙망하는 자는 날마다 새롭고 행복하고 신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의 문제는 그들이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어렵고 힘들다는 데만 있지 않고, 그들이 온전히 하나님을 앙망하지 않는데 있습니다. 하나님께 온전히 집중하지 않기 때문에 지쳐있고, 피곤해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피곤한 이유는 영적인 문제입니다. 우리가 온전히 하나님께만 집중하지 않기 때문에 영육 간에 피곤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하늘의 열린 창으로 오직 하나님을 앙망하며 살아가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구약성경연구 > 창세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창세기강해(18)노아언약과 일반은혜(창9:1-17) (0) | 2021.11.06 |
---|---|
창세기강해(17)누구를 통해서 회복의 역사를 하시는가?(창8장13-22) (0) | 2021.10.29 |
네가 어디 있느냐(창3:1-10) (0) | 2021.10.20 |
창세기강해(15)방주에 있던 자만 남았더라(창7:1-24) (0) | 2021.10.16 |
창세기강해(14)그 방주로 들어가라(창6:9-22) (0) | 2021.10.09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