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바울은 빌립보교회가 복음의 신앙을 위해서 서로 하나가 되기를 바랐습니다. 빌립보교회가 서로 하나가 되지 못한 것은 그들에게 겸손한 마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겸손한 마음을 가지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겸손한 마음은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5절에서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본받을 예수님의 마음은 어떤 것입니까?
1)첫번째,우리는 예수님의 성육신의 마음을 본받아야합니다(빌2:6-8)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래서 6절과 7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이것을 성육신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셨습니까?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가지고 이 땅에 오지 아니하시면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를 대신 지실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기 위해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성육신 하신 것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함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가르치고, 훈련시키기 위해서도 예수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인간이 되지 아니시고, 하나님으로 하늘에 계시면서 인간을 가르치실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더 권위 있고, 더 영광스럽고, 더 힘이 있게 가르칠 수 않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왜 예수님은 인간의 몸으로 제자들을 가르쳤습니까?
만일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가르치지 않았다면, 예수님과 우리 사이에는 소통이 되지 않습니다. 또 소통이 잘 되지 않으면 그 사람에게 영향력을 미칠 수 없습니다.
또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면 절대 사람들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 인간들과 소통하기 위해서 인간의 몸을 입고 가르쳤습니다.
이것을 가장 쉽게 말씀을 드리면 예수님은 성육신하심으로 사람들과 눈높이를 맞추셨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씀을 드리면 예수님은 사람들과 눈높이를 맞추시기 위해서 낮아지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예수님처럼 자신을 스스로 낮춤으로 다른 사람과 눈높이를 맞추어야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예수님처럼 우리의 자리에서 다른 사람과 눈높이를 맞출 수 있습니까?
그 비결은 사랑입니다. 사랑하면 눈높이를 낮출 수밖에 없습니다. 어린 아이를 안고 있는 젊은 부인들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한때 처녀시절에는 도도하고 고상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만일 아이를 낳고도 “나는 저 유치하고 더러운 아이가 싫다. 나는 깨끗해”라고 하면 절대 아이를 기를 수 없습니다. 아이를 기르는 어머니들을 보면 어떨 때는 수준이 거의 아이와 같습니다. 그래서 말을 할 때도 똑바로 하지 않습니다. 혀 짧은 소리를 합니다. 왜 그렇게 고상하고 도도한 아가씨들이 엄마가 되어서 아이와 같이 됩니까?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까?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왜 교역자들이 성도들과 눈높이를 같이 해야 합니까?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왜 직분자들이 성도들과 눈높이를 같이 해야 합니까?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면 눈높이를 같이 맞추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본받아야할 예수님의 성육신의 마음입니다.
2)두번째, 우리는 예수님의 동화의 마음을 본받아야합니다.
정치인들이 선거 때마다 하는 일이 있습니다. 선거 때가 되면 시장에 나가서 상인들과 만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이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진정성이 있느냐”고 말합니다.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그냥 몸만 낮은 자리에 내려와서는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진정으로 마음이 서민과 동화되어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야 신뢰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 단순히 몸으로만 인간이 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진정으로 마음으로도 인간과 같이 동화가 되셨습니다.
어느 정도까지 동화가 되셨습니까? 7과 8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은 사람이 되시되 사람 가운데서도 가장 낮은 종의 형체를 가지셨습니다. 그리고 그 종 가운데서 더 자기를 낮추사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셨습니까? 우리 인간의 모든 고통을 가장 낮은 자리에서 이해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어떤 행동을 하실 때 항상 먼저 나오는 단어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음에 민망히 여기사, 통분히 여기사, 긍휼히 여기사”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쳐주십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진정으로 인간과 동화가 되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왜 예수님께서 30살 때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까? 나이 30살이면 인간이 격을 수 있는 모든 것을 격을 나이입니다. 30살 이상이 되면 반복이 됩니다. 예수님도 사춘기를 격었습니다. 예수님도 가난한 가정에서 먹고 사는 걱정을 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청년기의 고민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에 보면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실 때 우리가 격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체휼하셨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죄는 짓지 아니하셨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왜 예수님께서 우리가 격을 수 있는 모든 고통을 몸으로 다 격으셨습니까? 우리의 연약함을 몸으로 이해를 해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우리가 예수님께 나와서 “먹고 살기 힘이 든다”고 할 때 예수님은 “뭘 그것까지고 힘들어하느냐”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나도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먹고 살기 힘든 것을 격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몸이 아파서 괴로워 할 때 “뭘 그것까지고 괴로워하느냐”고 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내가 이 땅에 있을 때 너희들의 육신의 모든 아픔을 십자가에서 다 체휼했다고 말씀하십니다.
히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체휼)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래서 어떤 직분자가 가장 훌륭한 직분자입니까? 성도들과 같이 울어 줄 수 있는 직분자입니다. 성도들의 아픔을 자신의 아름으로 느낄 줄 아는 직분자입니다. 또 그렇게 함으로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줄 수 있는 직분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과 눈높이를 갈이하고, 동화하되 같이 죄를 지어서는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인간과 완전히 동화가 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간과 같이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인간이 되시되 하나님으로서 품위를 지켰습니다.
이것도 참으로 중요합니다. 극단적인 두 가지의 사람이 있습니다.
저 높은 위치에서 자기 자리를 지키며 사람들을 가르치려고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을 지식으로 가르치지만 하지 절대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사람들과 같이 눈높이를 맞추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동화가 됩니다. 그러면서 같이 죄를 짓습니다. 이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구역소그룹에서 같이 연말에 술집에 가서 교회에서 큰 문제가 된 적이 있다고 합니다. 성육신이 되고 동화가 되되 절대 죄를 짓거나 죄를 용납해서는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처럼 그 사람의 낮은 곳까지 동화하되 죄는 짓지 않는 예수님의 마음을 본받아야합니다.
3)세 번째 예수님의 이해의 마음을 본받아야합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기까지 낮아지심은 먼저 성육신하기 위함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또 우리 인간과 동화되기 위함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낮아지셨던 이유는 우리를 이해하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을 만나기도 전에 그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또 니고데모가 구원받지 못한 것도 잘 아셨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거듭남에 대해서 이야기하셨습니다.
그래서 무엇이 생명력입니까? 많은 지식이 있고, 많은 말을 한다고 해서 생명력이 잇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력이 있다는 말은 상대방에 대한 정확한 이해력이 있어야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어떤 상태에 있는가를 잘 이해하고 말을 하면 적은 말을 해도 생명력이 있는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무슨 말을 하기 전에 그 사람에 대해서 잘 알아야합니다. 그 사람의 과거를 먼저 잘 알아야합니다. 그리고 또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현재의 상태를 잘 알아야합니다. 그 사람이 지난주에 아주 좋은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이번 주는 그렇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훌륭한 교역자, 직분자가 되기 위해서 항상 사람들은 상태가 어떤지를 잘 알아야합니다. 또 이렇게 잘 알아가는 것은 절대로 비판하고 판단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 사람이 있는 그대로 이해하기 위함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에 대해서 잘 이해할 때 비로소 그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이해의 마음을 잘 본받을 수 있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이렇게 우리가 예수님처럼 성육신의 마음을 가지고, 동화의 마음을 가지고, 이해의 마음을 가지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십니까?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부활,승천,우편에 앉으심,주되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여기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높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낮아지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를 지극히 높여주셨습니다.
여러분 여기서 지극히 높여주셨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시켜주셨습니다. 또 승천하게 하셨습니다. 또 하나님의 보좌우편에 앉게 하셨습니다. 또한 10절과 11절에 보시면 예수님을 하늘과 땅의 주가 되게 해 주셨습니다.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의 부활 경험할 수 있습니까? 물론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현재에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죽기까지 낮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빌립보서 3장 10절과 11절에서 “빌3: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고 합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부활은 죽은 자의 부활도 되고, 이 땅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높여주시는 것도 됩니다.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죽기까지 낮아져서 현재에도 하나님께서 높여주시는 부활을 경험할 수 있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신약성경연구 > 빌립보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빌립보서강해(11)너희 안에 행하시는 하나님(빌2:13) (0) | 2021.09.25 |
---|---|
빌립보서강해(10)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빌2:12-13) (0) | 2021.09.25 |
빌립보강해(8)겸손한 마음(빌2:1-9) (0) | 2021.09.05 |
빌립보서강해(7)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빌1:27-30) (0) | 2021.08.28 |
빌립보서강해(7)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빌1:20-26) (0) | 2021.08.28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