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생활을 말할 때 12장 3절-13절은 교회생활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리스도인들의 세상 속에서의 생활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당시의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적대적이었습니다. 특히 로마 정부로부터 큰 박해와 시험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12절에서도 “롬12:12.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라고 말씀하는 것도 이런 상황을 염두 해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세상 가운데서 높은 도덕적인 모습으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 사람들은 그들을 박해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아무도 미워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도 이 세상에서 수많은 박해를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 가운데서 예수를 믿는 것 때문에 박해를 받는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에게 1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롬12:14.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여기서 박해를 한다는 것은 한번 두 번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괴롭히는 것을 말합니다. 이에 대해서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도바울이 먼저 한 말이 아닙니다. 마태복음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에 근거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마5: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사도들의 일관된 말씀이었습니다.
벧전3:9.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서도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해야 복을 이어 받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악을 행하는 사람에게 단순히 보복을 하는 정도가 아니라 더 적극적인 선을 행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를 위하여 복을 빌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할 때 우리가 복을 우리가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오늘 본문 17절에서도 같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17.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18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8.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할 수 있거든” 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가능한 할 수 있는 일에 있어서”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주석 책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가능하다면, 믿는 자는 모든 사람들과 평화롭게 지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일이 항상 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이 땅에는 도박하는 사람, 불평하는 사람, 분열을 일으키는 사람, 싸움꾼, 자기 파괴자, 이기적인 지도자, 우상숭배자, 권력추구자, 호전적인 사람 등 계속해서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믿는 자와 평화롭게 지내는 데 관심이 없습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모든 사람들과 화목하라고 해서 무조건 모든 사람과 화목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적어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비추어 볼 때 우리가 가능한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모든 사람과 화목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19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여기서 보시면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라 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히10:30.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20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20.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이것은 “잠25:21.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음식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게 하라 22. 그리 하는 것은 핀 숯을 그의 머리에 놓는 것과 일반이요 여호와께서 네게 갚아 주시리라”을 인용한 말씀입니다.
여기서도 우리가 원수에 보복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 핀 숯을 그 머리위에 놓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여기서 핀 숯을 머리 위에 올려놓는다는 말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를 힘들게 하는 자들에게 우리가 호의와 선을 배품으로 마치 숯불을 머리 위에 올려놓는 것과 같이 그 얼굴을 화끈거리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스스로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할 기회를 주라는 말씀입니다.
두 번째는 이렇게 우리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에게 호의와 선을 베풀어 줌에도 도무지 깨닫지도 못하고 돌이키지도 못한다면 하나님께서 숯불을 그 사람의 머리위에 내리는 것과 같은 진노를 베풀어 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시140편10절에는 “시140:10 뜨거운 숯불이 그들 위에 떨어지게 하시며 불 가운데와 깊은 웅덩이에 그들로 하여금 빠져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하소서”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여기서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앞의 말씀을 볼 때 악에게 지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첫째는, 악을 악으로 갚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시편 37:8.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
여기서 분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여기서 분은 의분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의분 때문에 같이 분을 내고 노를 내면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악을 악으로 갚으려고 하는 것이 악에게 지는 것입니다.
둘째는 내가 악에 대한 심판자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한 주간 동안 로마서 12장을 묵상하면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항상 우리가 지켜야할 자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3절에서 13절까지 교회생활에서도 제일 먼저 강조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이지 머리가 아닙니다. 교회에 대한 모든 판단은 머리이신 주님께 맡겨야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사대로 맡은 자리를 잘 지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14절에서 21절의 말씀에서 제일 강조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심판과 진노는 우리가 할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맡겨야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선으로 악을 이기는 일입니다.
무엇이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입니까?
첫째, 우리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며 축복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 어느 무명 순교자의 기도가 있습니다.
나를 저주하십시오. 당신들이 나를 저주하면 할수록 더욱 나는 당신들을 사랑할 것입니다.
내게 침을 뱉어 보십시오. 그러면 나는 사랑의 숨결을 뿜어 낼 것입니다.
나를 때리십시오. 나는 신음 소리로 사랑을 고백할 것입니다.
나를 찌르십시오. 나는 사랑한다고 절규할 것입니다.
나를 짐승의 먹이로 던지십시오. 나는 사랑의 제물이 될 것입니다.
나를 불태우십시오. 그러면 나는 사랑의 열기로 당신의 증오의 가슴을 녹일 것입니다.
만일 초대교회 성도들이 그들을 핍박하는 로마 정부를 향해서 증오하며 악을 악으로 갚으려고 했다면 기독교는 없어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초대교회 성도들은 절대 악을 악으로 갚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선으로 악을 갚았습니다. 증오를 사랑으로 녹였습니다. 그랬을 때 로마가 기독교에 굴복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 우리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이 있을 때 끝까지 사랑으로 이기며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둘째, 우리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어야합니다.
용서와 화해를 다른 것입니다. 용서하는 하나님 앞에서 나를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 있을 때 내 마음으로 용서하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 번 말씀을 드리지만 사실 우리가 우리 마음 가운데 사람을 용서하지 않으면 사실 기도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와도 하나님에게 집중이 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은혜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용서는 하나님 앞에서 그 사람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사43:25.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용서)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화해는 상방 간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의 잘못을 인정하고 서로 같이 용서해줄 때 화해가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한쪽에서 아무리 마음으로 용서해 주어도 상대방에서 받아주지 않으면 화해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용서는 쉽지만 화해는 어렵습니다. 용서는 당장 가능하지만 화해는 정말 오랜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때 우리는 무조건 화해를 시키려고 할 때가 있습니다. 왜 화해를 하지 않느냐고 다그칠 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면 할수록 오히려 더 감정이 쌓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할 수 밖에 없습니까? 먼저 하나님 앞에서 내 마음으로 상대방을 용서해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이렇기 기도합니다. “시편 109:4. 나는 사랑하나 그들은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 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사람과 화해를 하신 방법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 몸과 사라의 몸을 통해서 아들이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어떻게 했습니까? 아브라함은 기다리지 못해서 여종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창16:16. 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에 아브람이 팔십육 세였더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창 17장 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창17:1.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여기서 보시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99세에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창세기 16장과 17장 사이에 하나님께서는 13년 동안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지 않으셨습니다. 그냥 기다리고 또 기다리셨습니다.
창 17장에서 하나님은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면 말을 듣지 않는 아브라함에게 찾아갔어야 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해서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해야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13년 동안 아무 말씀하지 않으시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99세가 되어 그의 인간적인 모든 힘이 다 빠졌을 때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마음으로 용서는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화해는 쉬운 것이 아닙니다. 또 화해를 강요해서도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할 수 있는 것은 기도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길 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서로 화해하는 역사가 나타나게 될 줄을 믿으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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