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은 제7계명으로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전하는 자나 듣는 자나 다 부담스러울 수 있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말씀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무시무시한 말씀이 있습니다.
계17:6. 또 내가 보매 이 여자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한지라 내가 그 여자를 보고 놀랍게 여기고 크게 놀랍게 여기니
여기서 보면 음녀가 나오는데, 지금도 하나님백성의 피를 빨아 먹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합니다.
/먼저 간음이란 먼저 육체적인 간음이 있습니다. 법적인 부부관계를 떠난 모든 성적 행위는 간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육체적인 간음만을 간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마음에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것도 간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읽어보겠습니다.
마5:27.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8.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우리가 육체적으로 행동에 옮기는 것만 간음이 아닙니다. 내가 만일 조금이라도 음란한 마음으로 이성을 보았다면 그것은 이미 간음한 것입니다.
제가 자주 드리는 말씀이지만 죄란 항상 끝장을 보는 성격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속에 죄의 생각이 들어오면 끝까지 죄를 짓고 나서야 후회를 하게 됩니다. 간음죄는 더욱 그렇습니다. 내 마음속에 음란한 생각이 들어오면 그때부터 간음이 시작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간음죄를 짓고 나서야 나중에 후회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내 마음에 음란한 생각이 들 때부터 호들갑을 떨어야합니다. 그래서 마음의 단계에서부터 철저한 회개가 있어야합니다.
그러니까 간음의 죄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이성을 대할 때 인격적으로 대하지 않고 나의 쾌락이나 즐거움이나 탐욕을 위한 도구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간음의 죄입니다.
아담이 범죄한 이후로 인간들은 이성을 대할 때 순수한 마음으로 대하지 않고 내 탐욕을 위한 도구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창6장에서 “1.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2.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그래서 우리 모두는 그 어느 누구라도 간음죄에 노예가 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예외가 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막의 성자라고 불리는 성 안토니가 35년 동안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 사막에서 수도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수도 생활을 하고 난 다음에 한 말은 “내 마음속에 일어나는 음란의 죄와 35년 동안 싸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모두는 끊임없이 음란의 죄의 유혹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마음에 음란한 죄를 이기며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첫째, 우리가 간음의 죄를 짓기 않기 위해서 간음죄의 비참함을 생각 해 보아야합니다.
두 번째, 간음의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는 간음죄를 지을 수 있는 모든 것을 피해야합니다.
음란의 죄를 이길 수 있는 길은 맛서는 것이 아니라 피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딤후2:22. 또한 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로 이 시대의 음란한 문화에 대해서 즐기는 것이 아니라 애통하는 마음으로 살아야합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은 소돔땅에서 아무도 구원을 시키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가족가운데 한 사람도 구원을 시키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후서에 보면 그런 롯을 가리켜 의로운 롯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소돔땅에서 롯이 의로운 롯이 되었습니까?
벧후 2장 7.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로 말미암아 고통 당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8. (이는 이 의인이 그들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이 상함이라)
롯은 음란한 땅인 소돔땅에서 아무도 구원시키지 못했지만, 그 음란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이 상하였다고 합니다.
여러분들은 이 시대의 음란의 문화를 즐기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음란의 죄에 빠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음란한 문화를 변화시키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매일 그것을 보고 들음으로 우리 심령이 항상 상해있기라도 해야 합니다.
넷째는 만일 우리가 결혼하지 않았다면 믿음의 형제들과 건전한 문화를 즐길 수 있어야합니다.
우리가 음란한 문화에 대해서 무조건 피하거나 애통하는 마음으로만 살수는 없습니다. 성경은 이제 우리가 음란한 것을 피함과 동시에 경건한 형제들과 같이 화평을 즐기면서 살아야합니다.
“딤후2:22. 또한 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우리가 만일 결혼했다면 전도서의 말씀대로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아야합니다.
또 전도서9장 9.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에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네가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그것이 네가 평생에 해 아래에서 수고하고 얻은 네 몫이니라
마지막으로 여러분 가운데 이렇게 생각하실 분이 있습니다. 나는 이미 내 남편이 돌아가셨다 또 내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떠났다 그러면 내가 어떻게 살아란 말인가? 항상 부부세미나를 하면 그런 분들이 마음에 상처를 받습니다.
이런 분들을 위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몇 년 전에 가정사역자가 와서 강의를 하는 것을 들어보았습니다. 그분은 정말 아내를 사랑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말하기를 그렇게 사랑하는 아내가 빨리 죽어도 괜찬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분은 매일 아침마다 사랑을 고백하는 대상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분이 매일 아침마다 사랑을 고백하면서 시를 적는 대상은 예수님이었습니다.
아무리 아내가 사랑스러워도 주님만큼은 못하다는 것입니다.
//어떤 부부가 제일 건강한 부부입니까?
서로를 제일로 사랑하는 부부가 아니라 서로가 주님만을 제일로 사랑하는 부부입니다.
서로에게 영혼의 만족을 누리려는 부부가 아니라 오직 주님에게서 참된 만족을 누리는 부부가 제일 건강한 부부입니다.
--그래서 나의 가장 깊은 영혼의 만족과 기쁨을 오직 주님한분에서 찾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서로를 사랑하며 만족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절대 이성에게서 하나님과 같은 절대적인 만족과 기쁨을 누리려고 해서는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성에게서 하나님과 같은 만족을 찾으려 하면 간음의 죄를 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체스터톤(G. K. Chesterton)이라는 아주 경건하고 보수적인 신학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창가 문을 두드리는 남자는 사실 하나님을 찾고 있다."
왜 많은 사람들이 정상적인 아내를 두고도 사창가를 찾습니까? 그 이면에는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게 될 때 참으로 모든 만족과 기쁨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 한분만으로 만족하며 기뻐하며 살아가시는 성도님들 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음란의 죄를 이길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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