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복 있는 사람
시편 1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의 복된 삶을 증거한다.
[1-2절]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복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첫째로, 복 있는 사람은, 불경건하고 악한 자들을 멀리하는 사람이다. 그는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는 자’로 묘사된다. 악인과 죄인과 오만한 자는 거의 동의어이다. 죄인은 악하고 오만하다. 꾀는 생각을, 길은 행위를, 자리는 교제를 나타낸다. 사람은 누구나 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악인과 어울리면 악의 영향과 본을 받기 쉽다. 그러므로 성도는 악한 자들을 멀리해야 한다. 잠언 13:20은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미련한 자와 사귀면 해를 받느니라”고 말했다.
둘째로, 복 있는 사람은 여호와의 율법을 가까이 하는 사람이다. ‘여호와의 율법’은 모세오경을 가리키든지, 구약성경 전체를 가리킨다. 모세오경의 율법도, 구약성경 전체도 세 가지를 가르친다. 첫째는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이며, 둘째는 구주에 관한 것이며, 셋째는 의롭고 선한 삶에 관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 책의 말씀을 즐거워하고 그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고 의롭고 선한 삶을 살게 된다.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한다는 것은 성경말씀을 규칙적이게 읽고 그 뜻을 항상 음미하는 것을 말한다.
[3절]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본문은 복된 자, 즉 악인을 멀리하고 성경말씀을 가까이 하는 자를 시냇가에 심은 나무에 비유한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는 나무로서 가장 복된 나무이다. 나무에게 필수적인 물이 풍부하기 때문에 나무로서 걱정거리가 없다. 이 물은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과 함께 또 그 말씀 속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의 감동을 상징한다고 본다.
이 나무는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는다. 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나무로서 제구실을 못하는 것이다. 사과나무는 사과를 많이 열어야 하고 포도나무는 포도를 많이 열어야 한다. 예수께서도 포도나무의 비유에서 우리가 많은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할 것을 교훈하셨다(요 15장). 열매는 성도의 좋은 인격과 선한 행실을 가리킨다.
시냇가에 심긴 나무는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않는다. 땅에는 때때로 가뭄이 있다. 땅이 가물면 나무 잎사귀가 마르게 되며 심하면 나무가 죽을 수도 있다. 그러나 시냇가에 뿌리를 박은 나무는 물 부족이 없고 시드는 일도 없을 것이다. 그 시냇가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감동의 시냇가이며 그것은 결코 마르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는 결코 영적 침체가 없다.
또 이렇게 경건한 사람의 계획하고 행하는 일은 다 형통할 것이다. 이것은 이미 레위기 26장과 신명기 28장에 교훈된 바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자는 영육으로 복을 누릴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경건하고 죄짓는 일을 두려워한 요셉과 함께하셨고 그를 형통케 하셨다(창 39:2-3, 23). 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과 연합하여 계명을 지킨 히스기야와 함께하셨고 그를 형통케 하셨다(왕하18:6-7).
[4-5절]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 . . .
본문은 악인 즉 불경건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는 자가 복된 자와 전혀 다르다고 말한다. 즉 악인은 선한 열매를 맺지도 못하고 가뭄을 타고 범사에 형통하지도 못하다는 뜻이다.
본문은 악인이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고 말한다. 이 바람은 세상의 풍조나 환난의 바람 등을 가리킬 것이다. 악인은 세상의 풍조를 따라 이리저리 방황하고 또 환난의 때에 매우 당황할 것이다. 그렇지만, 의인은 하나님의 은혜로 세상 풍조와 환난 앞에서 든든히 설 수 있다. 잠언 10:25, “회리바람이 지나가면 악인은 없어져도 의인은 영원한 기초 같으니라.” 시편 125:1, “여호와를 의뢰하는 자는 시온산이 요동치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
본문은 또 악인이 하나님의 심판을 견디지 못한다고 말한다. 평안한 때에는 악인과 의인이 별차이가 없어보일지도 모른다. 평시에는 악인도 번창하고 형통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일단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되면, 악인은 그 앞에 서지 못하고 그 심판을 감당치 못할 것이다. 잠언 24:16의 말씀대로,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지만,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진다.
본문은 또 악인 곧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한다고 말한다. 악인은 죽음과 저주 아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복과 영생을 가진 의인들의 회중인 참 교회에 들지 못한다. 물고기가 땅 위에서 살 수 없듯이, 악인은 참 교회의 회원이 될 수 없고 장차 영광의 천국에도 들어갈 수 없다. 주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람은 오직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천국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요 3:5). 의인과 악인은 본질상 차이가 있다. 그것은 생명과 죽음, 천국과 지옥의 차이이다.
[6절]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의인의 길을 알고 계신다. ‘인정한다’는 원어(요데아 ['d'e/y, 현재분사)는 ‘알고 있다’는 뜻이다. 길은 행위와 삶을 가리킨다. 의인의 삶은 불경건과 악을 버리고 미워하고 불경건하고 부도덕한 자를 멀리하고 그 대신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고 항상 묵상하고 그 말씀을 믿고 그 말씀대로 사는 삶이다.
하나님께서는 의인의 길을 알고 계신다. 그는 의인의 행위와 삶을 처음부터 또 마음의 깊은 것까지 속속들이 다 아신다(시 139:1-4; 히 4:12-13). 그는 단지 그것을 지식적으로 아시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인정하시고 의인을 사랑하시고 그에게 영생의 복을 주신다. 다윗은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라고 말했다(시 16:11).
그러나 악인의 길은 망할 것이다. 악인의 삶은 하나님을 모르고 그를 두려워하지 않고 그의 뜻을 거슬러 불의와 악을 행하는 삶이다. 그것은 하나님 없이 사는 세상 사람들의 일반적 삶이다. 즉 세상의 유행과 여론과 풍습과 가치관을 따라 사는 세상적인 삶이다.
악인의 길은 망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심판이다. 그 육신은 늙고 병들고 쇠약하여 마침내 죽을 것이다. 그들이 쌓은 부와 재물은 허무하여 독수리처럼 날아갈 것이다(잠 23:5). 그 재물은 남에게로 돌아갈 것이다(눅 12:20). 또 그 영혼은 지옥에 던지울 것이며 마지막 날 부활하여 영원한 불못에 던지울 것이다. 요한복음 5:29,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이와 같이, 의인과 악인의 길은 확실히 다르다. 그 둘의 생활목표가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고 생활방식이 다르고 그 결말이 다르다.
복 있는 자는 악한 자를 멀리하고 성경말씀을 가까이하는 자이다. 우리는 악을 멀리하고 불경건하고 악한 자들과 친근히 하지 말고, 오직 성경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며 그 의로운 교훈대로 살기를 힘쓰자.
복 있는 자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이 계절을 따라 좋은 열매들을 맺고 그 잎이 마르지 않고 그 하는 일들이 다 형통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인이 되지 말고 의인이 되고 의인의 길을 걷자. 우리는 모든 죄악된 일을 멀리하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의만 믿고 의지하고 하나님의 말씀 즉 성경말씀의 교훈대로 순종하여 경건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만 살자. 그것이 복 있는 자의 삶이다.
2편: 아들에게 입맞추라
시편 2편은 메시아 예언시이다. 1-3절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의 심리를 증거하고, 4-6절은 그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을 증거한다.
[1-3절]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버리자 하도다.
‘분노한다’는 원어(라가쉬 vg"r;)는 ‘소란하다, 격분하다’는 뜻이다. 세상의 왕들과 관원들은 서로 꾀하여 여호와 하나님과 그의 기름 부음을 받은 왕을 대적하며 하나님의 통치를 속박으로 여기며 그에게서 벗어나기를 원하였다. 악인들은 당을 지어 악을 행하며(롬 2:8)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을 잘하지만, 그들의 모든 계획은 헛될 것이다.
이 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그대로 이루어졌다. 유대의 종교지도자들과 헤롯 왕과 로마 총독 빌라도는 함께 연합하여 하나님의 보내신 메시아를 십자가에 죽게 하였다. 사도 베드로는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려[거슬러]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라고 말했다(행 4:27-28). 악한 자들은 하나님의 통치를 부정하고 그의 보내신 메시아를 대항하였지만, 그들의 계획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4-6절]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 그때에 분을 발하며 진노하사 저희를 놀래어 이르시기를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 온 땅과 거기 있는 왕들을 통치하시며 심판하시는 하나님께서는 그를 대적하는 자들을 보고 웃으신다. 주님(아도나이 yn;doa})이신 그는 그들을 비웃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때에 분을 발하며 진노하셔서 그들을 놀라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긍휼과 사랑이 풍성하신 자이지만, 또한 그를 대적하고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 분노하시는 자이시다. 그가 노하시면 모든 사람은 다 놀라며 두려워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놀라게 하시며,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고 말씀하실 것이다. 원문에는 ‘내가’라는 말(아니 ynIa})이 강조되어 있다. 그것은 메시아를 거절하고 대적하는 땅의 왕들과 하나님을 대조시킨다. 또 ‘나의 왕’이라는 말은 사람들에 의해서나 사람들의 혈통에 따라서가 아니고, 하나님의 특별한 작정과 뜻에 따라 세움을 받은 왕이라는 뜻이다. 메시아는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일을 행할 왕이시다.
‘내 거룩한 산 시온’은 하나님께서 구별하신 예루살렘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거기에 거하신다. 하나님께서 그의 왕 메시아를 그 곳에 세우신다는 것은 메시아께서 그 곳에 오실 것을 가리킨다. 그는 육체로 그 곳에 오셨고 부활하심으로 자신을 주와 그리스도로 확증하셨고(행 2:36), 그의 복음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땅에 전파될 것이며 장차 재림하심으로 온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다(계 22:3).
[7-9절] 내가 영(令)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내게 구하라.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끝까지 이르리로다. 네가 철장으로 저희를 깨뜨림이여, 질그릇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영’(令, 코크 qjo)은 ‘칙령, 작정(decree)’이라는 뜻이다. 시편 저자는 하나님의 작정을 전한다. 그는 메시아의 예표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전한다. 본문의 내용은 확실히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다. 그것은 세 가지의 내용이다.
첫째로, 메시아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실 것이다.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오늘날’은 언제인가? 하나님께도 우리에게와 같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신 자가 아니신가? 그러므로 하나님께 ‘오늘날’은 영원한 현재라고 표현할 수 있다. 하나님과 그의 아들의 관계는 실상 영원적이다. 그것은 그의 아들의 신성(神性)에서 증거된다. 시간 세계 속에서의 관계라면 아들은 참된 하나님이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창세 전에 아버지와 함께 누렸던 영광에 대해 말씀하셨다(요 17:5). 성경의 증거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신성은 그가 행하신 기적들과 부활로 확증되었다(요 20:30-31; 롬 1:4).
둘째로, 메시아 왕국은 온 세상 땅끝까지 미칠 것이다. 다윗 왕국의 확장은 메시아 왕국을 예표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세상의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며(마 28:19; 행 1:8)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셀 수 없이 큰 무리가 구원을 얻을 것이다(계 7:9). 이 예언은 오늘날 거의 이루어졌다.
셋째로, 메시아께서는 철장으로 세상을 다스리고 심판하실 것이다. ‘저희를 깨뜨린다’는 원어(테로엠 ![eroT])는 고대 번역들(LXX, Syr, Vg)에서 ‘저희를 다스린다’(티르엠 ![er]Ti)는 말로 읽었다. 그리스도는 다니엘 2:34에서 ‘열방을 부서뜨리는 돌’로 예언되셨고 요한계시록에서는 ‘철장으로 다스리는 자’로 묘사되셨다(계 2:27; 12:5; 19:15). 그의 통치권은 그의 구원 사역에서 이미 이루어지고 있으나, 그는 또한 장차 온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다(행 17:31; 딤후 4:1).
[10-12절] 그런즉 군왕들아, 너희는 지혜를 얻으며 세상의 관원들아, 교훈을 받을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
하나님께서는 대적자들을 패하게 하시고 메시아를 통한 그의 뜻을 이루실 것이기 때문에, 세상의 왕들과 관원들과 온 세상 사람들은 지혜와 교훈을 받아야 한다. 본문은 세 가지의 교훈을 말한다.
첫째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향해 가져야 할 가장 기본적 태도이다(잠 1:7). 우리는 하나님을 인정하고 두려워하고 그 앞에서 떨어야 한다. 그러나 기쁨과 즐거움을 가지고 그렇게 해야 한다. 히브리서 13:28도,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라고 교훈하였다. 경외함 혹은 경건함과 기쁨은 정상적 신앙생활의 덕이다.
둘째로,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주와 중보자이시며 세상의 모든 왕들 중의 왕이시다. 모든 사람은 그를 구주와 주로 고백하고(롬 10:9; 고전 12:3) 그에게 복종하고 그를 사랑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그들의 삶의 길에 속히 임할 것이다. 고린도전서 16:22,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셋째로, 하나님만 의지하라. 세상이나 세상 권세를 의지하지 말고 사람이나 그의 지혜도 의지하지 말고 돈이나 재물도 의지하지 말아야 한다. 사람이 참으로 의지할 자는 만복의 근원이신 하나님뿐이다.
세상은 소란하고 하나님과 그의 뜻을 거역할지라도, 우리는 창조자 섭리자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의 뜻을 거역하지 말고 그의 왕권을 속박으로 여기지 말고 그를 경외하고 섬기며 순종해야 한다.
또 우리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께서 인류의 유일한 구주로 보내신 자이심을 깨닫고 그를 믿으며, 그가 온 세상을 다스리는 주님이시며 그의 나라인 신약교회가 땅끝까지 확장될 것이며 그의 재림 때에 그가 온 세상을 심판하실 것을 알자.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며 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사랑하며 순종하고, 세상의 헛된 부귀 영화 권세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며 살자.
3편: 곤경 중에 부르짖음
[1-2절]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 . . .
다윗은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소이다. 많은 사람이 있어 나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 하나이다(셀라)”라고 말한다. ‘셀라’라는 말은 ‘소리를 높이라’ 혹은 ‘쉬라’는 뜻일 것이라고 한다.
이 시의 표제어에 의하면, 다윗은 그 아들 압살롬을 피할 때 이 시를 썼다. 그 당시에 다윗을 반역하는 일이 커갔고 반역자 압살롬에게로 오는 백성이 많았다고 성경은 증거한다(삼하 15:12).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도 많은 사람들이 ‘그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치며 그를 향해 등을 돌렸다(마 27:22-23). 사도 바울의 전도사역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그를 버리고 그와 입장을 같이하지 않은 적이 있었다. 디모데후서 1:15,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 이 일을 네가 아나니 그 중에 부겔로와 허모게네가 있느니라.” 디모데후서 4:16,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저희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다윗의 대적자들은 그에 대해 ‘저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고 말하였다. 그들의 말은 다윗을 낙심시킬 만했다. 사람들이 그를 대적하는 것도 두려운 일이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지지하시고 도우신다면 걱정할 일이 아니나, 만일 하나님께서 그를 지지하지 않으시고 돕지 않으신다면 큰 일이 아닌가? 그러나 다윗은 그런 어려운 때에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진 자이었다.
[3-4절]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 . . .
다윗은 또 말한다.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니이다.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셀라).”
다윗의 대적자들의 말은 완전히 잘못된 비난이었다. 다윗은 고난 중에도 하나님만 의지하고 바라보는 믿음의 사람이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원수들의 비난과 공격을 막아주실 그의 방패이시며, 그에게 왕의 영광을 주셨고 그것을 끝까지 지켜주실 그의 영광이시며, 그의 머리를 드시는 자, 즉 그로 낙심하거나 수치를 당치 않게 하시고 그에게 힘과 명예 회복을 주시는 자이심을 고백하고 있다.
다윗은 그의 목소리로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했다. 우리는 기도할 때 보통 마음 속으로나 조용한 소리로 기도하지만(느 2:4),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한다. 잡념에 떨어질 수 있는 묵상 기도나, 비성경적 신비주의에 떨어질 수 있는 관상 기도보다는 소리내어 기도하는 것이 더 나은 것 같고, 시시때때로 우리는 부르짖는 기도를 올려야 할 것이다. 예레미야 29:12-13,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부르짖음은 기도하는 이의 간절한 심령을 나타낸다.
기도의 대상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그는 사람의 기도에 응답할 수 없는 우상이나 그를 도울 수 없는 거짓 신이 아니다. 아합 시대에 참 선지자 엘리야와 대결하였던 바알 선지자들은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러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하나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었다(왕상 18:26). 그러나 엘리야의 하나님은 참 하나님이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다’(렘 10:10). 그는 영원 전부터 영원 후까지 살아계셔서 자기 백성의 기도를 들어주신다. 그 하나님을 알고 그에게 나아가 그에게 기도하는 자는 복되다.
우리 하나님은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시는 것은 그가 살아계신 참 하나님이시라는 증거이다. 그는 엘리야의 기도를 들어주셨고 불로 응답하셨다(왕상 18:37-39). 본문은 그가 그 성산에서 응답하신다고 말한다. 그 성산은 하나님께서 계신 천국, 그가 계신 표를 두신 예루살렘, 그리고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몸된 교회를 가리킨다고 본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 안에 기도의 응답이 있다. 그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기도가 응답받는다(요 14:13-14). 기도는 아름다운 말이나 경건한 모양에 그 가치가 있지 않고, 믿음과 진실함에 있고 하나님의 응답하심에 있다.
[5절]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천만인이 나를 둘러치려 하여도 나는 두려워 아니하리이다.
다윗은 또 말한다.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천만인이 나를 둘러치려 하여도 나는 두려워 아니하리이다.”
아들 압살롬의 반란으로 피난 중에 있었던 다윗, 많은 대적자들과 그들의 악한 비난 중에 있었던 그이었지만, 그는 밤에 누워 평안한 잠을 잤다. 그에게 상심함과 두려움이 있었다면 그는 단잠을 잘 수 없었겠지만,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간구했던 그는 편안하게 단잠을 잘 수 있었다. 하나님의 법에 순종치 않는 자의 받는 벌들 중의 하나가 경심증(驚心症)이지만(신 28:28),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들에게 단잠을 주신다(시 127:2).
다윗이 단잠을 잘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붙들어 주시기 때문이었다. ‘나를 붙드신다’는 원어(이스메케니 ynikem]s]y)(미완료시제)는 ‘나를 계속 붙드신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한번만 도우시고 붙드신 것이 아니고 계속 도우시고 붙드셨다. 다윗이 환난 중에서도 평안한 잠을 잘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거기에 있었다.
다윗은 또 그를 대적하여 둘러선 수만명의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겠다고 고백한다. 다윗에게는 대적자들을 두려워하지 않을 담력과 용기가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용기와 담력이다. 사무엘상 30:6, “백성이 각기 자녀들을 위하여 마음이 슬퍼서 다윗을 돌로 치자 하니 다윗이 크게 군급(窘急)하였으나[고통스러웠으나] 그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어 용기를 얻었더라.” 구약시대의 선지자 엘리야나 미가야, 초대교회의 아다나시우스나 종교개혁 때의 루터의 용기와 담력도 그러하였다. 잠언 28:1,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하니라.”
[7-8절]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 . . .
다윗은 또 말한다.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이는]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꺾으셨음이니다].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셀라).”
다윗은 하나님께서 잠잠히 계시지 말고 일어나 행동하시며 아들 압살롬의 반란으로부터, 그 대적자들의 위협으로부터 그를 건져주시기를 기도한다. 그는 큰 곤란 중에 낙심하거나 당황한 채로 있지 않았고 또 단지 인간적 대책을 궁리하거나 의논하지 않았고 먼저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의 도우심과 구원을 요청한 것이다. 이것은 성도의 놀라운 특권이다. 우리에게는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나님이 계시다.
원문에서 7절 중간에 있는 ‘이는[왜냐하면]’이라는 말(키 yKi)은 그가 하나님의 구원과 도움을 요청하는 근거를 보인다. 그의 기도의 근거는 하나님께서 과거에 그의 모든 원수들의 뺨을 치셨다는 사실이다. ‘뺨’이라는 원어(레키 yjil])는 ‘턱, 뺨’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그의 과거의 경험은 고난 중에 그의 현재의 기도의 근거가 된다.
8절 상반절도 그의 기도의 근거를 계속 말한다. 그의 기도의 근거는 구원이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은 성경에 밝히 증거된 하나님의 진리이며(시 37:39; 62:6; 렘 3:23; 욘 2:9; 계 7:10; 19:1) 또 그것은 다윗의 지식과 확신이었다. 그는 블레셋 장수 골리앗과 싸울 때도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고 말했다(삼상 17:47). 구원은 사람들에게나 군대의 힘에나 그 어떤 인간적 수단과 방법에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 있다.
다윗은 끝으로 “주의 복이 주의 백성에게 있게 하소서[혹은 ‘있나이다’]”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복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께 구할 내용이며 그들이 이 땅 위에서 또 영원토록 받아 누릴 내용이다.
시편 3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환난 중에 기도하자. 기도는 성도의 특권이다. 하나님을 믿는 자마다 환난 중에 낙심하지 않고 기도할 것이다. 환난의 날은 우리가 기도할 기회이다. 또 우리는 기도할 때에 시시때때로 소리내어 기도하고 부르짖어 기도하자. 그것은 간절한 기도의 표현이다. 하나님은 인격적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묵상 기도도 좋지만, 잡념들에 떨어지기 쉬운 멍한 명상은 피해야 한다. 우리는 또박또박 소리를 내어 기도하는 것이 좋다고 본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의 방패로 삼자.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고 그에게 피하는 자들에게 방패가 되신다. 시편 18:1-2,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우리는 구원이 오직 하나님께 있음을 알고 하나님의 구원을 확신하고 그 구원을 체험하자. 구원은 단순히 인간적인, 세상적인 방법들에 있지 않고, 오직 주권적 섭리자이신 하나님께 달려 있다.
셋째로, 우리는 우리를 해치는 우리의 대적자들을 두려워하지 말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대적자들을 능히 물리치실 수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편이시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선다면 두려워할 것이 없다.
4편: 하나님이 주신 기쁨과 평안
표제어에 ‘영장(伶長)’이라는 원어(메낫체아크 j'Xen"m])는 ‘찬양 지휘자’를 가리키는 것 같다. 시편에 ‘현악’(네기노스 twonygin)에 맞춘 노래라는 표제어를 가진 것은 7개가 있다(4, 6, 54, 55, 61, 67, 76편).
[1절]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곤란 . . . .
다윗은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라고 말한다. 다윗은 하나님을 ‘나의 의(義)의 하나님’이라고 표현한다. 성도의 의는 그의 행위에 있지 않고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의에 있다. 모든 사람은 죄인이지만, 구약시대에는 짐승 제사로, 신약시대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로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나의 의는 이것뿐 예수의 피밖에 없다.” 성도는 그 의를 힘입어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가 기도한다.
또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를 곤란 중에 너그럽게 하셨다고 말한다. ‘너그럽게 하셨다’는 원어(히르카브타 T;b]j'r_hi)는 ‘안심케 하셨다, 건지셨다’는 뜻이다. 과거에 다윗이 어려운 일을 당해 마음에 근심과 걱정, 불안과 초조함이 있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마음의 여유와 안정을 주셨고 그를 건져주셨다. 다윗은 과거에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현재의 고난 중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다.
다윗은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라고 말한다. 실상, 그가 가진 의(義)도 하나님의 긍휼에 근거한 것뿐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며 하나님께서 그가 지금 당한 환난에서도 그에게 마음의 여유와 안정을 주시고 그를 건져주시기를 간구하는 것이다.
[2-3절] 인생들아,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을 변하여 욕되게 하며 허사를 좋아하고 궤휼을 구하겠는고?(셀라)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 . . .
다윗은 또 말한다. “인생들아,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을 변하여 욕되게 하며 허사를 좋아하고 궤휼을 구하겠는고?(셀라)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 너희가 알지어다. 내가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다.”
다윗은 사람들이 여러 날 동안 그의 영광을 변하여 욕되게 한다고 말한다. 그의 영광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왕권의 영광을 가리킬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택하시고 기름을 부으셨고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셨다. 백성들은 그의 왕권의 영광을 인정하고 높이고 그를 존경했어야 했다. 그를 왕으로 세우신 자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의 영광을 변하여 욕되게 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를 비난하고 모욕하고 해치려 하고 있었다.
다윗은 또 그들이 허사를 좋아하고 거짓을 구하고 있다고 말한다. 악인들은 거짓을 구하고 그들의 계획은 다 허사(虛事)이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허락지 않으시며 그것을 무(無)로 돌려버리시기 때문이다. 옛날에 동생 요셉을 종으로 팔아버렸던 형들의 계획이나, 훗날에 왕을 속이고 다니엘을 모함했던 그의 동료 총리들의 계획은 다 허사가 되었다. 악한 자들의 거짓된 계획은 다 허사이다.
하나님께서는 악인들의 계획을 폐하시고 경건한 자들을 택하신다. ‘경건한’이라는 원어(카시드dysij)는 ‘인자함’(케세드 ds;h;)을 가진 자라는 맛을 가진 단어이다. 경건한 자는 하나님의 성품을 본받아 인자할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그의 인자한 성품을 본받는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위해 그런 경건한 자를 택하신다.
또 하나님께서는 이런 자의 기도를 들어주신다. 또 그는 이런 자를 인정하시고 도와 주시고 그의 대적들을 파하신다. 경건한 자에게도 어려운 일들이 있으나 그는 결국 그 모든 일들에서 승리한다.
[4-5절] 너희는 떨며 범죄치 말지어다. 자리에 누워 심중에 . . . .
다윗은 대적자들에게 말한다. “너희는 떨며 범죄치 말지어다.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지어다(셀라). 의의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를 의뢰할지어다.” ‘떨라’는 원어(리게주 Wzg]ri)를 헬라어 70인역은 ‘분노하라’고 번역하였다. 본문은 다윗의 대적자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뜻이거나, 에베소서 4:26의 인용처럼 그들이 다윗을 향해 분노함을 지적하는 뜻일 것이다. 다윗의 대적자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하며 노한 감정을 버리고 범죄치 말아야 할 것이다.
다윗은 또 그들이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하라고 말한다. 사람은 밤에 침상에 누울 때 자신을 반성케 된다. 다윗의 대적자들은 밤에 침상에 누워 자신들을 반성하면서 잘못되고 지나친 말이나 감정이나 행위를 버리고 잠잠해야 할 것이다.
또 다윗은 그들에게 의의 제사를 드리라고 말한다. 구약의 제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의 의를 예표하였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의롭다고 여기시는 은혜의 수단이었다. 참된 제사는 사람의 죄를 씻고 그에게 의를 준다. 물론 성도는 외식적 종교 형식을 버리고 참된 믿음과 진심으로 의로운 제사를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또 다윗은 대적자들에게 하나님을 의뢰하라고 말한다. 아마 그들은 다윗을 대적하기 위해 인간적 생각과 계산, 사람들의 수와 힘을 의지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것들을 다 헛되게 하실 수 있다. 그러므로 다윗은 그들에게 그런 것을 다 버리고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권한다. 우리가 의지할 대상은 하나님뿐이시다.
[6-8절] 여러 사람의 말이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뇨 . . . .
다윗은 말한다. “여러 사람의 말이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뇨 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취소서.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저희의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거하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시니이다.”
많은 사람들은 다윗에게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고 오히려 절망적 전망을 가졌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다윗은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을 앙망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였다. 그것은 그의 진노의 얼굴이 아니고 그의 은혜의 얼굴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마음에 기쁨을 주셨다. 우리 하나님은 기쁨이 충만하신 하나님이시며 그는 우리에게 기쁨을 주신다. 성령의 열매는 기쁨이다(갈 5:22). 하나님의 나라는 기쁨이 충만한 나라이다(롬 14:17). 다윗은 하나님께서 주신 기쁨이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 즉 추수 때의 기쁨보다 더 큰 기쁨이라고 고백하였다.
또 그는 많은 대적자들의 비난과 핍박 속에서도 평안한 잠을 잤고 안전한 삶을 누렸다고 고백한다. 이것은 하나님을 의(義)로 삼고 그를 의지하며 사는 성도가 누리는 복이다. 주께서는 우리에게 평안을 약속하셨고 허락하셨다. 예수께서는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고 말씀하셨다.
이 세상을 사는 동안, 하나님은 우리의 의가 되시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의가 되신다. “나의 의는 이것뿐 예수의 피밖에 없네.”
이 세상에는 곤란한 일들이 많지만, 하나님께서는 과거에도 곤란 중에 안정을 주셨고 지금도 또 미래에도 그러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께 간구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대적자들의 악한 계획을 파하실 것이다.
악한 자들의 대적과 시험이 많은 세상에서, 우리가 항상 주의 얼굴빛을 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큰 기쁨과 평안을 주실 것이다.
5편: 하나님은 죄악을 기뻐하지 않으심
[1-3절] 여호와여,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나의 심사를 . . . .
다윗은 말한다. “여호와여,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나의 심사를 통촉하소서.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 내가 주께 기도하나이다.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본문은 다윗의 기도에 대해 말한다. 첫째로, 다윗의 기도는 마음 중심에서 나오는 기도이었다. ‘심사’(心思)라는 원어(하기그 gygih;)는 ‘중얼거림, 탄식’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말만 많이 늘어놓는 형식적 기도가 아니고 마음 중심에서 나오는 기도, 간절한 탄식의 기도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한다고 말한다. 그의 기도는 마음 중심에서 나오는 간절한 기도이었다.
둘째로, 다윗의 기도는 하나님의 왕권을 인정하며 하는 기도이었다. 그는 하나님을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라고 부른다. 즉 그는 하나님을 그의 왕으로 인정하며 그 앞에 복종하는 마음으로 기도한 것이다. 참된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바른 지식과 믿음을 가질 때 올릴 수 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주권자이시다. 우리의 삶의 주인은 우리 자신이 아니고 바로 하나님이시다. 이것이 올바른 고백이다. 참된 기도는 바로 이런 지식과 믿음으로 드리는 기도이다.
셋째로, 다윗의 기도는 정성스런 기도이었다. 그는 아침에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아침은 하루를 시작하는 첫 시간이며 하루 중 가장 귀한 시간이다. 하루를 시작하는 첫 시간에, 먼저 하나님을 찬송하며 감사하고 그에게 우리의 소원을 아뢰는 것은 가장 합당하다.
[4-6절] 주는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니 악이 주와 함께 . . . .
다윗은 또 말한다. “주는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니 악이 주와 함께 유(留)하지 못하며 오만한 자가 주의 목전에 서지 못하리이다. 주는 모든 행악자를 미워하시며 거짓말하는 자를 멸하시리이다. 여호와께서는 피 흘리기를 즐기고 속이는 자를 싫어하시나이다.”
원문은 ‘왜냐하면’이라는 말(키 yKi)로 시작한다.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의 원수들을 물리치셔야 할 이유는 하나님께서 죄악을 기뻐하지 않으시며 악이 그와 함께 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본질적으로 지극히 거룩하시고 의로우시고 선하시고 진실하시기 때문에 그의 속성에 맞지 않는 것은 기뻐하지 않으시고 그와 함께 있을 수도 없다. 그러므로 다윗은 지금 그를 대적하는 악한 자들에게 위협을 당하고 탄식하는 중에 기도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곧 그들을 물리치실 것을 확신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행악자를 미워하시며, 오만한 자는 하나님의 눈앞에 서지 못할 것이다. ‘오만한 자’라는 원어(홀렐림 !ylil]/h)는 ‘자랑하는 자들’(BDB, NASB)이라는 뜻이다. 또 하나님께서는 거짓말하는 자를 멸하시며 피 흘리기를 즐기고 속이는 자를 미워하신다. 사람은 존귀하게 지음을 받았지만 죄로 더러워지고 악하게 변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버리실 수밖에 없다. 사람도 자기에게 있는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너무 더러워지면 버릴 수밖에 없다.
[7절]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인자를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 . . .
다윗은 또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인자를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경배하리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하나님의 풍성한 인자(仁慈)를 믿고 의지한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풍성한 인자에서 비롯된다. 행위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받을 자는 아무도 없다. 성도는 하나님의 풍성한 긍휼과 사랑으로 택하심과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구원받은 자와 구원받지 못한 자의 차이는 하나님의 긍휼을 입었느냐, 못 입었느냐의 차이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풍성한 인자가 얼마나 귀하고 감사한 것인가!
다윗은 하나님의 풍성한 인자를 힙입어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고 그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경배할 것이라고 고백한다. ‘주의 집’(베세카 *t,ybe)과 ‘성전’(헤칼 코드쉐카 *v]d]q; lk;yhe‘주의 거룩한 전’)은 동의어로 쓰이기도 하지만(시 65:4), 본문에서 성전은 예루살렘에 있는 성막을 가리킬 수도 있고(시 68:29) 하늘 성소를 가리킬 수도 있을 것이다(시 11:4; 18:6). 여하튼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경배하는 것은 성도의 모습이다. 여기에 경건한 성도와 불경건한 악인과의 차이점이 있다.
[8절] 여호와여, 나의 원수들을 인하여 주의 의로 나를 . . . .
다윗은 또 “여호와여, 나의 원수들을 인하여 주의 의로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길을 내 목전에 곧게 하소서”라고 말한다. ‘나의 원수들’(KJV, NASB, NIV)이라는 원어(쇼레라이 yr;r]/v)는 ‘나를 해하려고 엎드려 주목하는 자들’이라는 뜻이다(BDB). 다윗은 하나님을 자신의 의(義)로 삼고 살았을 뿐 아니라(시 4:1), 이제 원수들 앞에서 그의 공의로운 인도와 판단과 처분을 바란다. 성도는 스스로 원수에게 보복할 필요가 없다.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께 있다(신 32:35; 롬 12:19). 그는 곧 공의로운 판단과 처분을 보이실 것이다.
[9절] 저희 입에 신실함이 없고 저희 심중이 심히 악하며 저희 . . . .
다윗은 또 말한다. “[이는] 저희 입에 신실함이 없고 저희 심중이 심히 악하며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 같고 저희 혀로는 아첨하나이다[아첨함이니이다].” 그가 하나님께 공의로운 판단과 처분을 호소한 이유는 그의 원수들이 악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입에는 신실함이 없었다. 악한 자들은 자기의 이익과 불이익을 따라 이 말도 하고 저 말도 한다. 신실함이 없는 말은 일종의 거짓말이다. 진실한 자는 그가 처한 상황이 그에게 이익이 되든지 해가 되든지 관계치 않고 바른 말을 하고 한결 같은 말을 한다.
또 그들의 심중은 심히 악하였다. 악인들은 겉보기는 선량할지라도 마음 속은 심히 악하다. 원죄를 가지고 태어난 모든 사람의 마음이 심히 악하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고 증거하였다(렘 17:9). 예수께서는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라고 말씀하셨다(마 15:19).
또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 같다. 무덤이 열리면 나쁜 악취가 날 것이다. 악인들의 악한 마음에서 악한 말이 나온다. 주께서는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낸다고 말씀하셨다(마 12:35). 중생한 자에게도 악한 본성이 남아 있다. 그러므로 바울은 성도들에게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라”고 교훈하였다(엡 4:31).
또 그들은 혀로 아첨의 말을 했다. 아첨의 말은 남의 비위를 맞추는 말이며 일종의 거짓말이다. 시편 12:2, “저희가 이웃에게 각기 거짓을 말함이여, 아첨하는 입술과 두 마음으로 말하는도다.” 아첨의 말은 상대에게 유익을 주지 못한다. 잠언 29:5, “이웃에게 아첨하는 것은 그의 발 앞에 그물을 치는 것이니라.”
[10절] 하나님이여, 저희를 정죄하사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고 . . . .
다윗은 또 말한다. “하나님이여, 저희를 정죄하사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고 그 많은 허물로 인하여 저희를 쫓아내소서. 저희가 주를 배역함이니이다.” 그는 그의 원수들에 대해 하나님께 말한다. 첫째로, 그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정죄하시기를 구한다. ‘정죄하소서’라는 원어(하아쉬 e!yvia;h')는 ‘유죄(有罪)라고 선언하소서’(BDB), ‘유죄(有罪)라고 여기소서’(NASB), ‘벌하소서,’ ‘멸망시키소서’(KJV, Langen- scheidt)라는 뜻이 있다. 다윗은 원수를 보복하려 하지 않고 하나님께 맡겼다. 하나님께서는 공의로 판단하셔서 그들을 벌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벌은 공의롭고 철저하며 사람의 보복보다 훨씬 더 무섭다.
둘째로, 그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자기 꾀로 인해 넘어지게 하시기를 호소한다. 하나님께서는 공의로우셔서 악인들을 자기 꾀로 인해 넘어지게 하신다. 에스더서에 보면, 하만은 높이가 50규빗이나 되는 나무를 집 뜰에 세우고 의로운 모르드개를 거기 달아 죽이려고 계획하였으나 그 나무에 자기 자신이 달려 죽임을 당했다(에 5:14; 7:10). 다니엘서에 보면, 악한 자들은 선한 다니엘을 사자굴에 던져 죽이려고 한 법령을 제정케 하였으나 그들과 그 처자들이 거기에 던지웠다(단 6:7, 24).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행한 대로, 공의로 보응하신다.
셋째로,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의 원수들을 쫓아내시기를 구한다. 그 이유는 그들이 허물이 많았기 때문이며 또 주 하나님을 배역하였기 때문이다(9절). 하나님의 종 다윗을 대적하는 것은 그를 왕으로 세우신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이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내쫓으시고 징벌하시기를 호소하였다. 그는 원수 갚는 것이 하나님께 있음을 아는 자이었다.
[11-12절] 오직 주에게 피하는 자는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 . . .
다윗은 또 말한다. “오직 주에게 피하는 자는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인하여 영영히 기뻐 외치며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하리이다. [이는] 여호와여, 주는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방패로 함같이 은혜로 저를 호위하시리이다[호위하실 것임이니이다].”
본문은 성도에 대해 몇 가지로 묘사한다. 첫째로, 성도는 하나님께 피하는 자이다. 피하는 것은 환난 중에 하나님을 의지하고 맡기는 것이다. 둘째로, 성도는 하나님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창조자요 섭리자시며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죄와 죽음과 지옥 형벌로부터 구원해주신 자임을 아는 자는 하나님을 사랑할 것이다. 그는 하나님을 세상에서 가장 사랑할 것이다. 셋째로, 성도는 의인이다. 의인은 하나님의 명령을 행하는 자이다.
본문은 또한 성도의 기쁨에 대해 증거한다. 다윗은 원수들의 핍박 속에서도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한다. 그는 자신뿐 아니라, 하나님께 피하는 자가 다 기뻐하며 영영히 기뻐 외치며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할 것이라고 말한다. 신약 성도도 똑같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16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말했고, 빌립보서 4:4에서도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하였다.
본문은 성도의 기쁨의 이유로 11절에 “주의 보호로 인하여”라고 말하고, 12절은 원문에 ‘이는’이라는 말로 시작하여 첫째로 주께서 의인에게 복을 주실 것이기 때문에, 둘째로 주께서 방패로 함같이 은혜로 저를 호위하실 것이기 때문에 기뻐한다고 말한다. 성도들은 원수들의 비난과 핍박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의인을 복 주시며 보호하시기 때문에 기뻐한다. 성도는 환난 중에도 기뻐한다.
우리는 악을 멀리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악을 미워하시고 교만한 자, 거짓말하는 자, 불신실한 자, 더러운 말을 하는 자, 아첨하는 자를 미워하신다. 아무리 훌륭한 자라도 죄를 지으면 버림을 당할 것이다.
우리는 고난과 원수들의 핍박 중에도 하나님의 인자하심만 의지하며 그를 경외하고 참된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의 의,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의만 의지하고 의를 행해야 하고, 또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주권 곧 그가 온 세상의 주인이시며 왕이심을 인정하고 그의 공의의 판단과 처분만 구하며 아침마다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해야 한다.
또 우리는 세상에서 많은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기쁨을 주심을 믿고 체험하자. 우리는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자.
6편: 눈물의 탄식을 들으심
[1-2절] 여호와여, 주의 분으로 나를 견책하지 마옵시며 . . . .
다윗은 말한다. “여호와여, 주의 분으로 나를 견책하지 마옵시며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긍휼히 여기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
다윗은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무서운지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사울 왕을 버리시고 악령으로 고통당하게 하신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나님의 진노는 참으로 무섭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께서 진노하심으로 그를 징계하지 마시기를 구한다.
그는 지금 자신의 몸이 수척하며 쇠약하고 뼈가 떨린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형편을 하나님께 아뢰며 하나님의 긍휼과 치료를 간구한다. 그는 하나님께서 긍휼로 그의 몸의 연약을 치료하시고 그의 건강을 회복시켜 주실 것을 간구하는 것이다. 사람은 부족해서 하나님의 긍휼이 아니고서는 그에게 무엇을 구할 수 없다.
[3-5절] 나의 영혼도 심히 떨리나이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 . . . .
다윗은 또 말한다. “나의 영혼도 심히 떨리나이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주의 인자하심을 인하여 나를 구원하소서. [이는]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함이 없사오니[없음이오니] 음부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
다윗은 자신의 영혼까지도 심히 떨린다고 말한다. 심령의 두려움은 몸의 연약 못지 않게 문제이다. 또 그의 고통은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그래서 그는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라고 말한다.
마치 파선 당한 배의 선원들이 구조 신호를 보내면서 구조 요청을 하듯이, 다윗은 그의 연약 중에서 하나님께 구원을 호소한다. 하나님께서는 본래 다윗과 함께 계셨고 그를 지키시고 도우셨으나 다윗은 지금 하나님께서 자기 곁에 계시지 않다고 느끼고 있다. 그것은 아마 그의 범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잠시 그를 떠나가셨음을 암시하는 것 같다. 그러므로 그는 “여호와여, 돌아오소서”라고 간구한다.
하나님의 구원은 특히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긍휼하심에 근거한다. 하나님의 긍휼 외에는, 그가 우리를 구원하셔야 할 이유가 도무지 없다. 그의 공의뿐이라면 우리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만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긍휼과 자비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의 중단과 마침이 있고 우리의 구원과 회복이 가능하였다. 우리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인 동시에 긍휼의 하나님이시다.
그가 하나님께 구원을 간구한 이유는 그가 죽으면 하나님을 기억할 수 없으며 무덤에서 주께 감사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그의 육신을 두고 한 말이다. 사람이 죽어 몸이 무덤에 묻히면 그 몸은 의식이 없는 시체에 불과하므로 하나님을 기억할 수도, 감사할 수도 없다. 그가 좀더 살기를 원한 것은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에게 감사하기 위해서이었다. 성도의 삶의 목적은 단지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가 아니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감사와 영광을 돌리는 데 있다.
[6-7절]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 . . .
다윗은 또 말한다.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내 눈이 근심을 인하여 쇠하며 내 모든 대적을 인하여 어두웠나이다.”
다윗은 지금 심한 고통의 상태에 처해 있다. 그는 탄식함으로 곤핍하였다. 그의 심령은 답답하고 괴로워 신음하며 한숨지었고 몸도 마음도 피곤하며 지쳤다. 또 그는 밤마다,5) 즉 여러 날을 많은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께 호소하였다. 그의 침상과 요는 밤마다 많은 눈물로 적셔졌다. 그의 고통은 매우 컸다. 또 그의 눈은 근심으로 인해 쇠해졌다. 특히 그의 근심은 그의 많은 대적자들을 인한 것이었다.
다윗의 고통은 성도의 고통의 예이다. 그것은 우리의 부족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가 없으셨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고통을 겪으셨다. 그가 안식일에 38년된 병자를 고쳐주셨을 때 유대인들은 그를 죽이려 하였고(요 5:16, 18), 그가 안식일에 오른손 마른 사람을 고쳐주셨을 때도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분기가 가득하여 저를 죽이고자 했다(마 12:14; 눅 6:11). 또 요한복음에 보면, 그가 성전에서 설교하셨을 때 사람들은 돌을 들어 그를 치려 한 적도 있었고(요 8:59; 10:31), 누가복음에 보면, 그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외식을 책망하는 설교를 하셨을 때 그들은 그에게 맹렬히 달라붙어 그를 비난했다(눅 11:53-54). 마침내,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그를 죽이려고 의논했고 그 일을 이루었다(마 27:1). 그는 이사야의 예언대로 ‘사람들에게 멸시와 미움을 당한 질고를 아는 자’이셨다(사 53:3). 사람이신 예수님의 고통은 참으로 크셨다.
[8-10절] 행악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여호와께서 . . . .
다윗은 또 말한다. “행악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이는] 여호와께서 내 곡성을 들으셨도다[들으셨음이로다].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로다. 내 모든 원수가 부끄러움을 당하고 심히 떪이여, 홀연히 부끄러워 물러가리로다.” 본문은 다윗의 기도를 세 가지의 단어로 말한다. 첫째는 ‘곡성’이다. 다윗은 하나님께 눈물의 기도를 올렸다. 그는 밤마다 눈물로 그의 침상과 요를 적셨다. 둘째는 ‘간구’이다. 그는 자신의 소원을 간절히 하나님께 아뢰었다. 1-4절에는 ‘여호와여’라는 말이 다섯 번 나온다(1, 2, 2, 3, 4절). 다윗은 하나님의 이름을 반복하여 간절히 불렀다. 셋째는 ‘기도’라는 일반적 용어이다.
눈물의 간구를 올린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을 확신한다. 그는 “행악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이는 여호와께서 내 곡성을 들으셨음이로다”(8절)라고 말하고, 또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9절)라고 말한다. ‘들으셨다’는 원어(완료형)는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실 것이라는 확신을 나타낸다. 기도 응답이 아직 나타난 것은 아니겠지만, 그는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의 평안을 통해 하나님의 응답을 확신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또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라고 말한다.
다윗에게 주신 기도 응답의 내용은 그에게 악을 행하던 원수들이 홀연히 부끄러움을 당하고 심히 떨며 그를 떠나가는 것이다. 전에는 교만하고 의기양양했던 그들이 이제는 몸둘 바를 모르게 부끄러워하며 심히 떨고 당황할 것이다. 의인에게는 고난이 많지만 구원과 승리도 있고(시 34:19) 천적(天的)인 평안도 있다(요 14:27).
성도는 때때로 심신의 연약함에 떨어진다. 많은 경우 그것은 자신의 죄와 부족 때문에 온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 긍휼을 구하며 그가 우리의 심신의 연약을 고쳐주시고 회복시켜 주시기를 간구하자.
우리는 고난 중에 하나님께 구원을 호소하자. 오직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을 의지하며 그렇게 하자. 또 우리는 우리의 생명까지도 하나님과 그의 뜻에 맡기며 살아 있는 동안 하나님을 섬기며 그에게 감사하자.
성도에게도 탄식과 눈물과 근심의 심한 고통의 때가 있을 수 있지만, 성도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함으로 승리할 수 있다. 고난 중에 아뢰는 우리의 눈물의 간구와 호소는 반드시, 속히 하나님의 응답을 얻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악을 행하는 원수들도 그의 기이한 방법으로 물리쳐주실 것이다. 기도는 성도의 승리의 비결이다.
7편: 하나님은 의로운 재판장이심
[1-5절]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주께 피하오니 나를 쫓는 모든 . . . .
다윗은 말한다.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주께 피하오니 나를 쫓는 모든 자에게서 나를 구하여 건지소서. 건져낼 자 없으면 저희가 사자같이 나를 찢고 뜯을까 하나이다.” 다윗에게는 그를 쫓고 핍박하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사자같이 그를 찢고 뜯으려고 하고 있었다. 이것은 그가 사울에게 쫓기던 때의 상황과 비슷하다. 그러나 이런 상황 속에서 그는 하나님을 ‘내 하나님’이라고 부르며 하나님께 피하고 그를 의지하며 그의 구원을 간구한다. 하나님을 믿는 자는 환난 중에 그에게 피하고 그의 구원을 간구할 수 있다.
다윗은 또 말한다.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이것을 행하였거나 내 손에 죄악이 있거나 화친한 자를 악으로 갚았거나 내 대적에게 무고히 빼앗았거든, 원수로 나의 영혼을 쫓아 잡아 내 생명을 땅에 짓밟고 내 영광을 진토에 떨어뜨리게 하소서.” “이것을 행했다”는 말은 다음에 나오는 말을 가리킨 것 같다. 그는 그의 손에 죄악이 있거나 그가 자기와 화친한 자를 악으로 갚았다면, 원수들이 그를 쫓아 잡아 그의 생명을 땅에 밟고 그의 영광을 진토에 떨어뜨리게 하시라고 하나님의 공의에 호소하며 담대히 구원을 간구하는 것이다. “내 대적에게 무고히 빼앗았거든”이라는 말씀은 삽입구절로 “나는 무고히 나의 원수된 자를 건져내었도다”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나은 것 같다(KJV). 이 말씀은 그가 사울을 살려준 일에 맞다(삼상 24:7; 26:11). 사도 요한의 말씀대로, 성도는 자기가 자기를 책망할 것이 없을 때, 즉 자기 행위가 양심적으로 결백할 때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하나님께 간구한 바를 얻을 것이다(요일 3:21).
[6-8절] 여호와여, 진노로 일어나사 내 대적들의 노를 . . . .
다윗은 또 말한다. “여호와여, 진노로 일어나사 내 대적들의 노를 막으시며 나를 위하여 깨소서. 주께서 심판을 명하셨나이다.” 그는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간구한다. 하나님은 악인들에게 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진노는 악인들의 분노보다 수십 갑절 더 크고 무섭다. 악인에게 공의로 심판하신다는 것은 율법에 경고된 바이다. 다윗을 대적하고 핍박하는 자들이 분노할 때 그것을 막을 자는 하나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노하시면 대적들의 노함은 저지될 것이다. 세상에서 성도에게 대적자들이 많으나 심판의 하나님께서 일어나시면 그들을 물리쳐 주실 것이다.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께 있다. 성도의 문제 해결은 하나님께 있다. 그러므로 성도는 문제를 가지고 씨름하지 말고 그 문제를 하나님께 가지고 나가야 한다.
다윗은 또 말한다. “민족들의 집회로 주를 두르게 하시고 그 위 높은 자리에 돌아오소서. 여호와께서 만민에게 심판을 행하시오니 여호와여, 나의 의와 내게 있는 성실함을 따라 나를 판단하소서.” ‘민족들’이라는 말(움밈 !yMiau)은 영어성경들처럼 ‘백성들’(peoples)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민족들 혹은 백성들이 주를 둘러 모이고 주께서 그 높은 자리에 앉으심은 위엄 있는 재판관의 모습이다. 하나님은 온 세상의 나라들과 백성들을 심판하시는 재판관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심판하시되 공의로 심판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다윗은 자신의 의와 성실함을 따라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기를 담대히 구한다. ‘성실함’이라는 원어(톰 !To)는 ‘온전함’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대략적 의미의 완전함을 가리킨다. 엄격한 의미에서 하나님 앞에 완전한 자는 아무도 없지만, 하나님을 경외하고 믿고 하나님의 명령과 교훈에 순종하며 사는 자는 의로운 자요 온전한 자이다. 그는 그를 대적하는 악한 원수들과 현저히 구별된다.
[9절] 악인의 악을 끊고 의인을 세우소서. 의로우신 하나님이 . . . .
다윗은 또 말한다. “악인의 악을 끊고 의인을 세우소서. 의로우신 하나님이 사람의 심장을 감찰하시나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악인과 의인을 구별하셔서 악인들의 악을 끝나게 하시고 의인들을 세우시기를 간구한다. 세상에는 악인이 끊임없이 득세하고 활개치고 있다.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이 아니고서는 세상에 완전한 도덕적 질서는 세워질 수 없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을 공의로 심판하실 날을 정하셨고 심판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행위를 정확히 구별하신다. 본문에 사람의 ‘심장’이라는 원어는 ‘마음과 내부(內部)’라는 말인데, ‘내부’라는 원어(켈라요스 twrol;K])는 ‘신장(腎臟), 생각, 감정, 품은 뜻’을 가리킨다. 또 ‘감찰한다’는 원어(바칸 @h'B;)는 ‘시험한다, 검사한다, 판별한다’는 뜻이다. 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과 생각과 감정과 품은 뜻을 다 시험하시고 악인들을 끊고 의인들을 세우실 것이다.
[10절] 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도다.
다윗은 또, “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도다”라고 말한다. ‘마음이 정직한 자’는 ‘의인’과 동의어이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을 순종하며 행하는 자이다. 성도의 특징은 마음의 정직함에 있다. 성도는 거짓과 간사함을 미워한다. 세상은 의인을 몰라주어도 하나님께서는 그를 아시고 그를 악한 자들로부터 지키실 것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나의 방패는 하나님께 있다”고 고백한다. 성도는 악한 대적자들의 핍박을 받을 때 육신의 힘이나 칼이나 세상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의지한다. 육신의 힘이나 칼이나 세상을 의지하는 자는 그것들로 인해 수치를 당할 것이지만, 성도는 하나님으로 인해 승리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악한 자들의 공격으로부터 성도를 보호하시는 방패가 되신다.
[11-13절]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 . . .
다윗은 또,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라고 말한다. 온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도덕적 하나님이시다. 그는 의로운 재판장이시다. 그는 악인들의 악을 조금이라도 용납하지 않으신다. 만일 그가 악을 눈감아 주신다면, 그는 불의한 재판관이실 것이다. 그는 악인들에게 평강과 복을 주지 않으신다(사 48:22; 57:21). 그는 악인들의 악에 대해 매일 분노하신다. 악인들은 매일 하나님의 진노의 위험 속에서 살고 있다.
다윗은 또 말한다. “사람이 회개치 아니하면 저가 그 칼을 갈으심이여, 그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 죽일 기계를 또한 예비하심이여, 그 만든 살은 화전(火箭)이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죄를 회개하라고 명하셨다(마 4:17; 눅 13:3). 사도행전 17:30,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회개는 사람의 의무이다.
그러나 악인들은 회개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하며 거절하고 그의 진노를 쌓고 있다. 로마서 2:5,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회개치 않는 자들을 위해 벌을 준비하셨다. 그것은 매우 치명적 벌이다. 본문은 그것을 그의 칼, 그의 활, 그의 화살 등으로 표현하며 또 ‘죽일 기계’라고 표현한다. 하나님께서는 특등 궁수(弓手)이시다. 그의 불화살은 악인들의 심장에 명중할 것이며 그들에게 치명적일 것이다.
[14-17절] 악인이 죄악을 해산함이여, 잔해(殘害)를 잉태하며 . . . .
다윗은 또 말한다. “악인이 죄악을 해산함이여, 잔해(殘害)를 잉태하며 궤휼을 낳았도다. 저가 웅덩이를 파 만듦이여, 제가 만든 함정에 빠졌도다. 그 잔해는 자기 머리로 돌아오고 그 포학은 자기 정수리에 내리리로다. 내가 여호와의 의를 따라 감사함이여, 지극히 높으신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리로다.” 악인들은 악한 일들을 위하여 애쓰며 남을 해치는 일들을 은밀히 계획하고 거짓된 일들을 행한다. ‘해산한다’는 원어(예캅벨 lB],j'y_)는 ‘(해산을 위해) 진통한다’는 말이다. 악인은 악행을 수고로이 계획하고, 은밀하게 그리고 거짓되게 수행한다. 그는 정정당당하지 못하게 행한다.
그러나 사람의 심장을 감찰하시는(9절) 하나님께서는 악인에게 공의로 보응하신다. 악인은 의인을 해하려고 웅덩이를 파 만들지만 자신이 거기 빠지며 그를 해하려고 계획한 그것이 자기에게 돌아오고 그의 포학함이 자기 머리에 떨어진다.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의 보응이다. 시편 다른 곳에도 비슷한 말씀이 있다(시 9:15; 57:6).
성도는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사자같이 우리를 해하려는 원수들의 핍박을 예상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말하였다(딤후 3:12).
성도는 원수들의 핍박을 당할 때 하나님께 피하고 하나님께 호소하고 기도할 수 있다. 시편 18:2,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재판장이시기 때문에 공의로 심판하셔서 악인들을 벌하신다. 악인들은 자기가 판 웅덩이에 자신이 빠진다. 시편 1:6,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성도는 평소에 경건하고 의롭고 선하게 살아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께 담대히 기도할 수 있고 또 하나님의 응답을 기대할 수 있다. 요한일서 3:21-22,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8편: 사람을 존귀케 하심
[1절]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 . . .
다윗은 말한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을 하늘 위에 두셨나이다.” ‘여호와’라는 명칭은 ‘스스로 계신 자’라는 뜻이고, ‘주’라는 명칭은 소유권과 통치권을 나타낸다. 하나님은 영원자존자, 즉 영원 전부터 스스로 계신 자이시며 온 세상의 주인이시며 왕이시다. ‘아름답다’는 원어(앗디르 ryDia)는 ‘엄위하다’는 뜻이다(BDB, NASB, NIV). 주 여호와 하나님의 엄위하심과 영광이 온 천지만물에 가득하다.
[2절]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 . . .
다윗은 또 말한다.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와 보수자(報讐者)로 잠잠케 하려 하심이니이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대적자들이 많다. 그들은 마귀와 악령들이며 악한 자들, 즉 악한 정치가들, 무신론적인 지식인들, 이단자들, 양심을 저버린 부도덕한 자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어린아이들의 입술의 고백을 통해 그 대적자들을 잠잠케 하실 것이다. ‘어린아이’라는 원어(올렐 lle/[)는 ‘어린아이 또는 소년’이라는 뜻이다. 소년 다윗은 블레셋 장수 골리앗에게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고 증거하며(삼상 17:45, 47) 그와 싸워 이겼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새 시대가 오면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하나님을 알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렘 31:34). 마태복음 11:25에 보면,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진리가 지혜로운 자들에게는 숨겨졌고 어린아이들에게는 계시되었다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을 때에 거기에는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외치는 아이들이 있었다(마 21:15). 하나님께서는 순진한 어린아이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고 고백케 하신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세상의 약한 것을 택하셔서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신다고 말하였다(고전 1:27-29). 이런 일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증거한다.
[3절]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 . . .
다윗은 또,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본다”고 말한다. ‘주의 손가락’은 신인동형적(神人同形的) 표현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영이시지만, 마치 사람의 몸을 가진 존재처럼 묘사하는 것이다. 사람의 손가락이 물건을 만들 수도 있고 집을 지을 수도 있는 자동기계와 같듯이, 하나님의 손가락은 공사장 중장비 이상의 탁월한 기계와 같으시다. 그는 뛰어난 발명가이시며 장인이시며 과학자이시며 미술가이시다. 온 세상과 그 안의 만물들은 그의 창조의 작품들이다. 하늘과 달과 별들은 다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다. 그것들은 우연히 된 것이거나 영원히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시작이 있다. 창조가 바로 그것들의 시작이다. 또 하늘은 광대하고 신비하며 달과 별들은 오묘막측하다. 사람들은 인류 역사 약 6천년에 겨우 달이나 화성 등에 로켓을 보내어 탐험을 시작한 정도이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는 심히 크다.
[4절]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眷顧)하시나이까?
다윗은 또, “[그런데]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眷顧)하시나이까?”라고 말한다. “사람이 무엇이관대”라는 표현은 사람이 광대한 우주와 비교할 때 너무 미미한 존재임을 나타낸다. 광대한 우주에 비해 지구는 한 작은 공이며 사람은 그 공 위에 보이지 않는 작은 점에 불과하다. 광대한 우주에 비교하면 사람은 무(無)와 같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무가치해 보이는 사람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지셨다. 그는 사람을 생각하시며 돌보신다. ‘권고한다’는 원어(파카드 dq'P)는 ‘돌본다, 관심을 가진다’는 뜻이다. 피조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일차적 관심은 단순히 우주나 지구가 아니고 지구 위에 사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그는 첫 사람 아담과 하와를 자기 형상대로 창조하셨고 그들의 자손인 인류를 다스리시고 복과 벌을 내리시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하신다. 사람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이렇게 놀랍게도 하나님의 사랑과 관심의 대상이 되었는가?
[5-9절]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 . . . .
다윗은 또 말한다.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 아래 두셨으니 곧 모든 우양(牛羊)과 들짐승이며 공중의 새와 바다의 어족과 해로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잠시 천사보다 못하게 하셨다. ‘천사보다’라는 원어(메엘로힘 !yhil~a>me)는 ‘하나님보다’라고 번역할 수도 있지만(NASB), 고대의 번역들(LXX, Syr, Targ)처럼 ‘천사보다’라고 번역하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KJV). 왜냐하면 사람은 하나님보다 조금 못한 존재가 아니라 무한히 못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또 만일 다윗이 ‘하나님보다’라고 말하려 했다면 ‘당신보다’라고 표현했을 것 같다. 또 시편에 ‘하나님’이라는 원어(엘로힘 !yhiOla)가 ‘천사들’을 가리키는 것 같은 구절이 또 있다(시 97:7). 또 신약성경 히브리서 2장은 이 본문을 인용하면서 천사로 읽었다. ‘조금’이라는 원어(메아트 f['m])는 ‘조금’ 혹은 ‘잠시’라는 뜻이다. 사람은 본래 천사보다 못한 존재가 아니지만, 범죄함으로 인해 잠시 천사보다 못한 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다. 사람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아 존귀하고 영광스런 존재이었으나 범죄함으로 그 영광과 존귀를 잃어버렸다(롬 3:23; 시 49:12).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한 대속제물로 십자가에 죽으셨을 때 잠시 천사보다 낮아지셨으나 삼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영화와 존귀를 얻으셨고 또 그를 통해 구원받은 성도들은 장차 영화와 존귀를 얻을 것이다(롬 8:30; 빌 3:21). 구원의 결과는 영광이다.
또한 사람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어 모든 생물을 다스리는 임무를 받았지만(창 1:26, 28) 범죄함으로 어리석은 우상숭배에 떨어졌다. 그러나 이제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고전 15:45, 47) 구원받은 성도들은 바른 지식으로 사람의 임무를 완수하여 피조물들의 종이 되지 말고 그것들을 다스려야 한다.
시편 8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온 세상에 나타난 하나님의 엄위하심과 영광을 찬송하자.
둘째로, 우리는 교만을 버리고 어린아이같이 겸손한 자가 되어 하나님을 알고 섬기자. 마태복음 11:25-26, “그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마태복음 18:3,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셋째로, 우리는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람으로 태어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를 주시고 만물을 다스리게 하셨다.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난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자.
넷째로, 우리는 사람의 의무를 다하자. 사람의 의무는 하나님을 찬송하고 섬기며 그의 명령을 지키고 만물을 다스리는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의 물질이나 돈이나 육신의 쾌락에 종노릇해서는 안 된다.
9편: 공의로 심판하심
[1-3절]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 주의 모든 . . . .
다윗은 말한다.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 주의 모든 기사(奇事)를 전하리이다. 내가 주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지극히 높으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니 내 원수들이 물러갈 때에 주의 앞에서 넘어져 망함이니이다[망하나이다].” ‘감사한다’는 원어(야다 hd:y:)는 ‘찬송한다’는 뜻도 있다. 감사와 찬송은 성경에서 거의 동의어로 쓰인다(대상 25:3; 시 92:1-3; 95:2; 100:4 등).
다윗은 전심으로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의 모든 기사를 전하며 기쁨과 즐거움으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겠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를 보호하시고 도우시며 그의 대적자들을 징벌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다윗의 원수들은 지금 다윗을 공격하고 비난하지만 그들이 물러갈 때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넘어져 망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도우시고 그의 대적들을 징벌하실 것이다. 다윗의 하나님은 오늘 우리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의 원수들을 물리쳐 주실 것이다.
[4-6절] 주께서 나의 의와 송사를 변호하셨으며 보좌에 앉으사 . . . .
다윗은 또 말한다. “주께서 나의 의와 송사를 변호하셨으며 보좌에 앉으사 의롭게 심판하셨나이다. 열방을 책하시고 악인을 멸하시며 저희 이름을 영영히 도말하셨나이다. 원수가 끊어져 영영히 멸망하였사오니 주께서 무너뜨린 성읍들을 기억할 수 없나이다.” 본절은 원문에서 ‘왜냐하면’이라는 말(키 yKi)로 시작된다.
다윗의 원수들이 넘어져 망하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판단과 의, 그리고 그의 송사를 지지하시고 변호하신다. 그는 보좌에 앉으셔서 세상의 모든 나라들과 거기 사는 모든 사람들을 의롭게 심판하신다. 이 사실은 참으로 감사하다. 사람의 양심은 선과 진실이 인정을 받는 도덕적 세계를 원하며 세상 사람들도 입으로는 그런 세계를 인정할 것이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 불의와 악을 행하며 또 그런 것과 타협한다.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 살려는 자는 오히려 고난을 당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공의로 심판하실 것이다. 하나님과 그의 율법을 무시하는 악한 이방 나라들은 영원히 멸망하여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질 것이다.
[7-8절] 여호와께서 영영히 앉으심이여, 심판을 위하여 보좌를 . . . .
다윗은 또 말한다. “여호와께서 영영히 앉으심이여, 심판을 위하여 보좌를 예비하셨도다.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심이여, 정직으로 만민에게 판단을 행하시리로다.” 영원하신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위해 보좌를 예비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의 주인이시요 심판자이시다. 그는 인류 역사 속에서 자주 심판을 행하셨다. 마지막 날에도 그는 모든 사람에게 심판을 행하실 것이다(벧후 3:7; 계 20:11-15). 그는 공의와 정직으로 심판하실 것이다. 그는 의로우신 재판장이시다(시 7:11). 로마서 2:6, 16,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곧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
[9-10절] 여호와는 또 압제를 당하는 자의 산성이시요 환난 . . . .
다윗은 또 말한다. “여호와는 또 압제를 당하는 자의 산성이시요 환난 때의 산성이시로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
인간의 삶의 여정에는 다른 사람들의 압제도 있고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이 있다. 어떤 때는 그것이 하나님의 징벌로 오지만, 어떤 때는 세상의 헛됨을 깨닫고 하나님만 소망케 하는 훈련 과정으로 온다(시 39:6-7).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압제 당하는 자에게 산성이시요 환난 때의 산성이 되신다. 산성은 요새와 피난처를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원수들의 교묘하고 집요한 공격과 핍박으로부터 안전하게 피신할 곳이 되신다. 하나님께서는 긍휼로 의인들을 보호하시고 변호하시며 악인들을 징벌하신다. 인생의 어려운 문제들의 해결은 살아계신 하나님께 피하는 데 있다.
하나님의 이름을 안다는 것은 그를 체험한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않으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을 아는 자들은 그를 의지할 것이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찾는 자들은 그의 말씀을 붙들고 그에게 기도하며 그의 돌보심과 도우심을 체험할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하나님을 더 의지하게 될 것이다. 믿음은 경건 생활로 나타나고 그 둘은 같이 자라간다.
[11-12절] 너희는 시온에 거하신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 행사를 . . . .
다윗은 또 말한다. “너희는 시온에 거하신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 행사를 백성 중에 선포할지어다. 피 흘림을 심문하시는 이가 저희를 기억하심이여,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을 잊지 아니하시도다.”
‘시온’은 구약시대에 성막과 성전이 있었던 예루살렘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 하늘 위에 계시며(왕상 8:30) 세상을 초월해 계시며(왕상 8:27) 온 우주에 충만하시지만(렘 23:24), 그는 또한 시온에 특히 성막과 성전에 계셔서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셨다. 그는 오늘날에는 교회 즉 성도들 안에 계신다(고전 3:16).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셔서 이스라엘 백성의 억울한 일들을 갚아주셨다. 다윗은 하나님을 찬송하고 그의 행한 일들, 곧 그의 공의의 심판을 백성 중에 선포하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행하신 의롭고 선한 일들을 체험하는 자마다 그를 찬송하며 그의 일들을 증거할 수 있을 것이다.
12절은 원문에서 ‘왜냐하면’이라는 말로 시작되며 찬송과 전도의 이유를 말한다. ‘심문하신다’는 원어(다라쉬 vr'D;)는 ‘심사한다’는 뜻 외에 ‘갚는다’는 뜻도 있다. ‘가난한 자’라는 원어는 ‘핍박당하는 자’라는 뜻이다. 성도가 하나님을 찬송하고 증거해야 할 이유는 하나님께서 의인들의 피흘림당함을 갚으셨고 그들을 기억하시고 핍박당하는 자들의 부르짖음을 잊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13-14절] 여호와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나를 사망의 . . . .
다윗은 또 말한다. “여호와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나를 사망의 문에서 일으키시는 주여, 미워하는 자에게 받는 나의 곤고를 보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찬송을 다 전할 것이요 딸 같은 시온의 문에서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다윗에게는 그를 미워하는 자들이 많았고 그가 그들에게서 받는 고난과 곤고함은 컸다. ‘사망의 문’은 사람이 그 문을 열고 들어가면 죽는다는 뜻이다. 다윗은 지금 원수들로 인해 곤고함이 심하여 죽을 지경에 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어려운 환경과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였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문에서 일으키시는 자, 즉 그를 들어올려 건져내시고 피하게 하시는 자임을 믿었다. 그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믿었고 하나님께서 그를 긍휼히 여기시고 그를 돌아보시고 그를 도우시기를 기도한다. 또 그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체험하면 시온의 문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찬송하고 증거하며 주의 구원을 기뻐하겠다고 말한다.
[15-16절] 열방은 자기가 판 웅덩이에 빠짐이여, 그 숨긴 . . . .
다윗은 또 말한다. “열방은 자기가 판 웅덩이에 빠짐이여, 그 숨긴 그물에 자기 발이 걸렸도다. 여호와께서 자기를 알게 하사 심판을 행하셨음이여, 악인은 그 손으로 행한 일에 스스로 얽혔도다(힉가욘. 셀라).” 힉가욘(@/yg;hI)은 ‘울리게 부르라’는 음악적 용어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는 이방 나라 사람들은 경건한 사람들을 빠뜨리려고 웅덩이를 파고 그들의 발로 걸리게 하려고 몰래 그물을 쳤다. 악인들은 경건한 자들이 그들과 동류가 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악을 지적하고 책망하기 때문에 그들을 미워한다(요 7:7).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셔서 공의로 심판하심으로 자신을 알리신다(시 7:11; 9:4).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통해 자신이 살아계시며 악인들을 미워하시는 공의의 심판자이심을 알리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결과로, 경건하고 선한 자들을 해치려던 이방 나라들은 자기가 판 웅덩이에 빠졌고 자기가 숨긴 그물에 자기 발이 걸렸고 자기의 손으로 행한 일에 스스로 얽혔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로운 처분이며 악인들로 하여금 자신의 무지하고 악함을 깨닫게 하시는 일이다. 불경건한 악인들의 악한 계획은 자신들만 해롭게 할 것이다(에 6-7장; 단 6장).
[17-18절] 악인이 음부로 돌아감이여, 하나님을 잊어버린 모든 . . . .
다윗은 또 말한다. “악인이 음부로 돌아감이여, 하나님을 잊어버린 모든 열방이 그리하리로다. 궁핍한 자가 항상 잊어버림을 보지 아니함이여, 가난한 자가 영영히 실망치 아니하리로다.” ‘음부’(쉐올 l/av])는 지옥을 가리킨다. 궁핍한 자와 가난한 자는 성도를 가리킨다. 불경건하고 부도덕한 악인들과 하나님을 잊어버린 모든 열방은 지옥의 판결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18절은 원문에 ‘왜냐하면’이라는 말로 시작되며 그것은 불경건한 악인들이 지옥에 들어가는 이유를 보인다. 성도는 세상에서 악인들에게 미움과 핍박을 당하며 때때로 잊혀진 것 같으나 실상 잊혀진 것이 아니며 그의 소망도 없어진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고통을 기억하시며 그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시며 악인들을 공의로 보응하실 것이다.
[19-20절] 여호와여, 일어나사 인생으로 승리를 얻지 못하게 . . . .
다윗은 또 말한다. “여호와여, 일어나사 인생으로 승리를 얻지 못하게 하시며 열방으로 주의 목전에 심판을 받게 하소서. 여호와여, 저희로 두렵게 하시며 열방으로 자기는 인생뿐인 줄 알게 하소서(셀라).” 하나님이 일어나신다는 것은 그가 일어나 행동하신다는 뜻이다. 다윗의 기도는 악인이 대적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하나님께서 악인을 미워하시고 벌하심을 증거하시기 위해서 또 그로 인해 성도가 보호와 위로를 얻기 위해서이다. 하나님께서는 일어나 공의로운 심판을 시행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심판을 시행하시면, 사람들은 두려움을 가지고 자신들이 무력하고 보잘것없는 인생뿐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인생’이라는 원어(에노쉬 v/na>)는 ‘병약한’(아누쉬 vWna;) 존재라는 뉘앙스를 가지는 말이다. 지금 악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들을 핍박하고 해치려 하지만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무력하게 엎드러질 것이다.
시편 9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신다. 그는 심판을 위해 보좌를 예비하셨다(7-8절).
둘째로, 하나님의 원수들은 반드시 멸망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악한 원수들을 영영히 멸하실 것이다. 열방은 자기가 판 웅덩이에 빠질 것이다(15절). 악인들은 다 지옥에 들어갈 것이다(17절).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일어나셔서 악인들을 심판하시기를 간구할 수 있다.
셋째로, 성도들은 고난 중에서라도 구원을 얻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의를 변호하실 것이다(4절). 그는 압제 당하는 자의 산성이 되시며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을 잊지 않으실 것이다(12절).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자(13절).
넷째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을 기뻐하며 찬송하고 감사하며 그의 하신 일들을 항상 전파하자(1-2, 11, 14절). 우리는 하나님께서 악인들을 벌하시고 우리를 고난에서 건지심을 체험할 때 더욱 그러할 수 있다.
10편: 악인에 대한 심판을 호소함
[1-2절]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 . . .
시편 저자는 말한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 악한 자가 교만하여 가련한 자를 심히 군박(窘迫)하오니 저희로 자기의 베푼 꾀에 빠지게 하소서.”
시편 저자는 지금 큰 환난 가운데 있다. 그는 자신을 ‘가련한 자’라고 표현한다. 그는 악한 자가 교만하여 가련한 자를 심히 핍박한다고 말한다. ‘가난한’ 혹은 ‘가련한’이라는 원어들(아니 ynI[; 혹은 아나우 wn;[;)은 ‘가난한, 가련한, 겸손한, 고난당하는, 핍박당하는’이라는 뜻을 가진 동의어(同義語)들이다. 이 말은 성도를 묘사하는 말로 쓰인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악하고 교만하지만, 성도는 심령이 가난하고 겸손하며 때때로 고난과 핍박을 당한다.
시편 저자는 환난 중에 하나님께서 그를 도와주시지 않고 멀리 서 계시다고 느끼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그의 깊으시고 높으신 뜻 가운데 성도를 환난에 버려두신다(시 13:1; 35:22; 38:21). 하나님께서 환난 때에 우리의 산성이시요 피난처시며 큰 도움이시지만(시 9:9; 46:1), 성도는 때때로 하나님의 즉각적 도우심을 경험치 못한다.
그러므로 시편 저자는 악인이 자기가 베푼 꾀에 빠지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호소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호소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간구를 들으실 것이다. 그 어렵고 답답한 시간은 그에게 결코 손해가 아니고 영적인 큰 유익이 될 것이다. 그 시간은 그의 믿음을 더 순수하고 강하게 만들 것이다.
[3-4절] 악인은 그 마음의 소욕을 자랑하며 탐리하는 자는 . . . .
시편 저자는 또 말한다. “악인은 그 마음의 소욕을 자랑하며 탐리하는 자는 여호와를 배반하여 멸시하나이다. 악인은 그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치 아니하신다 하며 그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 다시 번역하면, “이는 악인이 마음의 소욕을 자랑하며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탐욕자들을 축복함이니이다. 악인은 그 얼굴의 교만으로 하나님을 찾지 않으며 그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나이다”(KJV). 이 본문은 악인으로 자기가 베푼 꾀에 빠지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호소한 간구의 이유를 나타낸다.
악인은 세상적 욕심을 자랑한다. 성경은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라고 말한다(요일 2:16). 또 악인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탐욕자들, 즉 불의의 이익을 취하는 자들을 축복한다. 악인은 세상을 사랑하고 또 세상에 속한 자들을 사랑한다. 세상의 부귀와 영광이 그의 삶의 목표요 가치 기준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에게 탐심은 우상숭배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우리는 한 주인을 선택해야 했으며 하나님을 유일한 주인으로 선택하였다. 성도는 그 정(情)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은 자이다(갈 5:24). 우리 가운데 아직도 돈을 사랑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헛된 신앙의 건설자이다.
악인은 또한 교만하며 무신론적이다. 그는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 그의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그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였다면 모든 악을 회개했을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악을 떠날 수 있다. 잠언 16:6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인하여 악에서 떠나게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교만하고 하나님을 찾지 않는 자는 악을 버리지 못하며 돈 사랑과 육신의 쾌락 사랑을 버리지 못할 것이다.
[5-7절] 저의 길은 언제든지 견고하고 주의 심판은 높아서 . . . .
시편 저자는 또 말한다. “저의 길은 언제든지 견고하고 주의 심판은 높아서 저의 안력(眼力)이 미치지 못하오며 저는 그 모든 대적을 멸시하며 그 마음에 이르기를 나는 요동치 아니하며 대대로 환난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나이다. 그 입에는 저주와 궤휼과 포학이 충만하며 혀 밑에는 잔해와 죄악이 있나이다.”
악인의 길은 때때로 견고해 보인다. 성경도 그것을 말한다. 욥은 악인이 장수하고 세력이 강하며 형통함을 말했다(욥 21:7-13). 시편 73편의 저자도 악인이 형통하고 건강하고 평안함을 말했다(3-12절). 선지자 예레미야도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패역한 자가 다 안락함은 무슨 연고니이까?”고 말했다(렘 12:1). 더욱이 하나님의 심판은 높아서 악인의 눈에 미치지 못한다. 악인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느끼지 못하고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악인은 또 모든 대적자를 멸시하고 자신의 평안과 형통을 확신한다. 그는 자신의 실패나 고난에 대해 생각지 않는다. 이것은 놀라운 패기와 용기같이 보이지만, 실상 헛된 자만심에 불과하다.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는 자신의 미래를 자신하는 것은 어리석은 태도일 뿐이다.
또 악인의 입에는 저주와 궤휼과 포학이 충만하며 혀 밑에는 잔해와 죄악이 있다. ‘죄악’이라는 원어(아웬 @w<a:)는 ‘허탄함’(KJV)이나 ‘사악함’(NASB)이라는 뜻이다. 말은 사람의 인격을 나타낸다. 선한 사람은 선한 말을 하지만, 악한 사람은 악한 말을 한다. 주께서는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고 말씀하셨다(마 12:34-35). 악인은 남을 저주하고 속이고 포학하고 해치고 헛되고 사악한 말을 한다.
[8-11절] 저가 향촌 유벽한 곳에 앉으며 그 은밀한 곳에서 . . . .
시편 저자는 또 말한다. “저가 향촌 유벽한 곳에 앉으며 그 은밀한 곳에서 무죄한 자를 죽이며 그 눈은 외로운 자를 엿보나이다. 사자가 그 굴혈에 엎드림같이 저가 은밀한 곳에 엎드려 가련한 자를 잡으려고 기다리며 자기 그물을 끌어 가련한 자를 잡나이다. 저가 구푸려 엎드리니 그 강포로 인하여 외로운 자가 넘어지나이다. 저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잊으셨고 그 얼굴을 가리우셨으니 영원히 보지 아니하시리라 하나이다.”
시편에서 성도는 ‘무죄한 자’ ‘외로운 자’ ‘가련한 자’ ‘가난한 자’ ‘겸손한 자’ 등으로 묘사된다. 악인은 이런 성도를 해치려 한다. 악인은 한적한 곳에 앉으며 은밀한 곳에서 성도를 엿본다. 그는 사자가 그 굴혈에 엎드림같이 은밀한 곳에 엎드린다. 악인이 공공연히 악을 행치 못하고 은밀히 하는 것은 양심 때문일 것이다. 악인은 또 의인을 향해 강포하다. ‘강포’라는 원어(아춤 !Wx[;)는 ‘강한 수족(手足)’이라는 뜻이다. 악인은 폭력적이다. 세상에서 의인들은 핍박과 고난을 당한다. 사도 바울은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말했다(딤후 3:12).
악인은 또 무신론적이다. 그는 하나님을 부정하는 무신론적 사고 때문에 악을 담대히 행한다. 시편 14:1은,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라고 말하였다.
[12-15절] 여호와여, 일어나옵소서. 하나님이여, 손을 드옵소서. . . .
시편 저자는 또 말한다. “여호와여, 일어나옵소서. 하나님이여, 손을 드옵소서. 가난한 자를 잊지 마옵소서. 어찌하여 악인이 하나님을 멸시하여 그 마음에 이르기를 주는 감찰치 아니하리라 하나이까? 주께서는 보셨나이다. 잔해와 원한을 감찰하시고 주의 손으로 갚으려 하시오니 외로운 자가 주를 의지하나이다. 주는 벌써부터 고아를 도우시는 자니이다. 악인의 팔을 꺾으소서. 악한 자의 악을 없기까지 찾으소서.”
악인은 하나님을 멸시하며 하나님이 감찰치 않으신다고 생각한다. 실상 그는 무신론자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악인의 잔해와 원한을 다 보셨고 감찰하셨다. ‘원한’이라는 원어(카아스 s['K')는 ‘괴롭힘, 분노’ 등의 뜻이다. 하나님은 악인이 무시한다고 무시를 당하는 분이 아니시다. 그는 오히려 모든 일을 다 감찰하시고 판단하시며 그 손으로 악인의 악행에 대해 갚으신다. 하나님의 공의의 보응은 성경이 밝히 증거하는 근본 진리이다.
또 하나님께서는 악인을 징벌하심으로 성도를 도우시고 돌보신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신원하시는’ 자(신 10:18)이시며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시 68:5)이시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긍휼이 많으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롭고 선하게 살지만 이 세상에서 악한 자 때문에 핍박을 당하여 외롭고 가련하기까지 한 성도는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기도해야 한다. 시편 저자는 그러므로 “외로운 자가 주를 의지하나이다”라고 말한다. 기도는 믿음의 자연스런 표현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일어나시고 손을 드시고 가난한 자를 잊지 마시고 악인에게 합당한 징벌을 내리시기를 구하였다.
[16-18절] 여호와께서는 영원무궁토록 왕이시니 열방이 주의 . . . .
시편 저자는 말한다. “여호와께서는 영원무궁토록 왕이시니 열방이 주의 땅에서 멸망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으니 저희 마음을 예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고아와 압박당하는 자를 위하여 심판하사 세상에 속한 자로 다시는 위협지 못하게 하시리이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왕, 곧 세상의 영원한 통치자이시며 심판자이시다. 그는 성도의 호소를 들으신다. 17절의 ‘겸손한 자’라는 원어(아나임 !yyin;['i)는 ‘가난한 자, 핍박당하는 자’라는 뜻으로 성도 자신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핍박당하는 성도의 간구를 들으신다. 또 그는 성도의 마음을 준비시키신다. 그는 성도가 악을 버리고 의와 선에 굳게 서도록 준비시키신다. 그는 특히 억울하게 고통당하는 자의 간구에 귀를 기울이신다. 하나님을 모르고 부도덕한 이방인들은 그의 땅 곧 이 세상으로부터 멸망을 당할 것이다(16절). 악인은 성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성밖에 있을 것이다(계 21:27; 22:15).
시편 10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세상은 악하다. 세상 사람들은 교만하여 순진한 자들을 핍박한다. 그들은 이익을 탐하고 하나님을 멸시하며 부정한다. 그들의 입에는 저주와 거짓과 포학이 가득하다. 우리는 이런 세상의 현실을 바로 보고 세상을 본받지 말아야 한다.
둘째로, 세상에서 성도들은 고통을 당한다. 성도는 세상에서 고난을 당한다. 그들은 가련한 자(2, 9절), 외로운 자(9, 10, 14절), 가난한 자(12절), 겸손한 자(17절)라고 표현된다. 악한 세상은 성도를 미워할 것이다. 사도 바울은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말하였다(딤후 3:12).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의 왕이시며 통치자시요 심판자이시다. 온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그 온 세상을 홀로 통치하신다. 16절, “여호와께서는 영원무궁토록 왕이시니.”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일들을 다 보시고 감찰하시고 판단하시고 공의로 보응하신다.
넷째로, 성도는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께 모든 문제를 아뢰어야 한다. 시편에는 고난 중에서 하나님께 부르짖는 내용, 특히 악인들의 악행에 대해 하나님의 공의로운 판단과 보응을 호소하는 내용이 많다. 12절, “여호와여, 일어나옵소서. 하나님이여, 손을 드옵소서.” 14절, “외로운 자가 주를 의지하나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기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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