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들은 이 세상에서 어떤 단어가 제일중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당연히 사랑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랑보다 더 중요한 단어는 관계입니다.
만일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내가 아무리 그 사람을 사랑해도 그 사람과 관계가 되지 않으면 나의 사랑이 그 사람에게 흘러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관계란 사랑이 흘러가는 통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우리는 행복이 참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다 행복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행복할 수 있습니까? 많은 사람들은 행복을 소유에서 찾고자 합니다. 물론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기 위해서 기본적인 소유가 있어야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소유자체가 우리에게 진정한 행복을 줄 수 없습니다. 행복이라는 것도 결국 관계를 통해서 흘러나옵니다.
또 우리는 복음을 전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복음이 어떻게 증거가 되겠습니까? 복음도 결국 관계를 통해서 증거가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어야 우리가 더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전도도 관계중심의 전도가 되어야합니다.
/이와 같이 관계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관계를 생각하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사실 많은 사람들이 관계를 생각하면 힘들다는 생각이 먼저 듭니다. 선교사님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제일 어려운 것은 현지인들과의 관계가 아니라 선교사들끼리의 관계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제일 어려운 것이 관계입니다. 어떤 일을 하는 것보다 관계가 더 어렵습니다.
/그래서 관계를 하지 않고 살아가고 싶지만 우리는 절대 관계를 떠나서는 살수 없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사람과 관계하기가 싫어서 무인도에서 자연 속에서 산다고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물론 자연 속에서 사람들과 아무 관계없이 살아가는 것이 조금은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무인도에서도 살더라도 결국 관계 때문에 어려움을 격을 수밖에 없습니다.
무인도에서는 자기 자신과의 관계가 어려울 수 있습니다. 또 사람과의 관계가 없으면 나중에 심한 고독과 외로움 때문에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러면 왜 사람이 관계를 떠나서는 살수 없습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도 관계 속에서 존재하시는 분이시고, 또 인간을 만드실 때도 관계 속에서 인간을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창1장 26절에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고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보면 하나님도 혼자 계시지 않고 관계 속에 계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형상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라고 하시는 것은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 성령하나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성부하나님과 성자예수님과 성령하나님이 서로 교통하시고 교제하시는 관계가운데 서로 하나를 이루신 분이십니다.
/또 하나님은 우리 인간과 관계를 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창2장 7절에 “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고 합니다. 여기서 생령이란 영적인 존재라는 말입니다. 사람은 영적인 존재로서 하나님과 교통하고 교제하는 관계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또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누구라는 말입니까? 나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영광스럽고 존귀한 자입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홀로 거하는 것이 좋지 않다고 하시면서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남자와 여자, 부모와 자녀, 형제와 자매, 사람과 사람의 관계 속에서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다스리고 정복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 사람이 만물 즉 자연과의 바른 관계 속에서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이것을 정리하면 하나님은 우리 인간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이루고, 하나님형상으로 나 자신과 바른 관계를 이루고, 또 사람과의 바른 관계를 이루고 만물과 바른 관계를 이루기 위해서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또 이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나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되지 않으면 나 자신과의 관계가 바로 되지 않습니다. 또 나 자신과의 바른 관계가 되지 않으면 이웃과의 바른 관계가 되지 않습니다. 또 이웃 즉 사람과의 바른 관계가 되지 않으면 우리는 만물의 바른 관계가 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또 나 자신과의 관계를 바로 맺고, 사람과 바른 관계를 맺고, 만물과 바른 관계를 맺음으로 행복한 삶을 살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땅에 죄가 들어왔습니다. 그 죄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게 되고, 나 자신과의 관계가 깨어지고, 사람들과의 관계가 깨어지게 되고, 자연 만물과의 관계가 깨어졌습니다.
/그러면 구원이 무엇입니까? 구원이란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나 자신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사람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만물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받은 자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맺고, 나 자신과 바른 관계를 맺고, 사람들과 바른 관계를 맺고, 만물과 바른 관계를 맺음으로 참으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은 관계를 맺고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관계가 중요한데 왜 관계의 문제가 생깁니까?
1. 그 첫 번째, 이유는 내 마음의 문제입니다.
아내는 남편이, 남편은 아내가, 또 형제는 형제끼리, 자매는 자매끼리, 이웃은 이웃끼리 서로 내 마음에 잘 들지 않습니다. 심지어 우리는 하나님도 내 뜻대로 해주시지 않기 때문에 심지어 하나님조차도 내 마음에 잘 들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또 내가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는데, 자기 자신도 내 마음에 잘 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이 세상에 그 어떤 것도 내 마음에 잘 들지 않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왜 우리가 모든 것이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생각하십니까? 그 이유는 결국 내 마음의 문제입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다 마음의 창이 있습니다. 그 마음이 창으로 하나님을 보고 나를 보고 사람을 보고 세상을 봅니다. 그런데 내 마음의 창이 넓어지면 모든 것을 다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러면 관계에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내 마음의 창이 좁으면 모든 것이 다 내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에 관계의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마음의 창을 넓히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 왜 우리가 말씀을 듣습니까? 왜 우리가 기도를 합니까? 그 이유는 내 마음의 창을 넓히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편 4편 1절에서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곤란 즉 내 마음의 좁아진 상태에서 나를 내 마음을 넓혀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또 빌립보서에도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고 하셨습니다(빌4:5).
관용이라는 말은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일 수 있는 넓은 마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누구와 같이 우리 마음의 창을 넓혀야합니까?
예수님과 같은 넓이로 우리 마음의 창을 넓혀야합니다.
저는 자주 하나님의 마음, 예수님의 마음을 바다와 같다고 생각을 합니다. 바다를 가보시기 바랍니다. 바다는 아무리 큰 돌을 던져도 다 받아들입니다. 작은 돌을 던져도 받아들입니다. 심지어 오물을 넣어도 다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마음, 예수님 마음은 바다와 같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좁아진 마음이 어떻게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일 수 있는 넒은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까? 다윗은 시편4편 나의 좁아진 마음을 넓혀달라고 기도하고 난 다음에 하나님이여 나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베풀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시4:1).
/우리 마음이 넓혀지는 것, 그래서 모든 것을 다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절대 인간적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날마다 우리의 심령에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들어오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가 날마다 우리 심령에 폭포수와 같이 넘치게 임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과 같아서 모든 사람을 다 받아들일 수 있는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또 관계가 중요한데 왜 관계의 문제가 생깁니까?
2. 두 번째는 관계하는 대상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원숭이가 물고기를 너무 사랑합니다. 그래서 강에 있는 물고기를 잡아서 나무에 올려놓습니다. 그리고 원숭이가 제일 좋아하는 바나나를 먹으라고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물고기가 죽습니다. 원숭이가 물고기를 미워해서 죽였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원숭이는 물고기를 너무나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입니까? 원숭이는 물고기를 너무 몰랐습니다. 물고기가 물속에서 살아야한다는 것과 물고기는 절대 바나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관계를 잘 하고 싶은데 왜 관계에 문제가 생깁니까? 그것은 관계하는 대상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호세아서를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백성들에게 “내 백성이 지식이 없음으로 망하는도다”고 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백성들은 하나님께 대한 열심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기뻐하시는지, 하나님께 대한 지식이 없이 자신의 종교적인 열심만으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기 위해서무엇보다 열심을 다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알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월 중순부터 “교리와 함께 하는 365가정예배”책을 가지고 나눔을 하는 모임을 하려고 합니다. 특별히 요즘에 교리에 대한 관심이 많습니다. 그래서 그 책을 통해서 하나님께 대한 바른 교리를 통해서 우리 자녀들에게 어떻게 신앙으로 교육할 것인가를 나누게 될 것입니다. 또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른 성품이란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도 같이 공부하고 나눔을 하려고 합니다.
또 빌1장 9절을 보면 사도바울은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성경과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모든 총명(상대방에 대한 이해와 통찰력으로 인한 지식)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라고 기도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사랑이 어떻게 더 풍성하게 될 수 있습니까? 제일 먼저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을 통해서 사랑이 더 풍성하게 될 수 있습니다.
또 상대방에 대한 지식을 통해서 더 풍성하게 될 수 있습니다.
어떤 여대 앞에서 짝사랑하던 남자학생이 마스크를 끼고 “--야 사랑해”라고 시위를 한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이 남학생이 정말 그 여학생을 사랑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 남학생은 여학생에 대한 지식과 이해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 여학생은 결국 자신의 이름이 노출이 되어서 학교를 다니지 못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관계를 잘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서로에 대한 잘 알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해야합니다. 우리에게는 남성과 여성이라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남성은 여성에 대해서, 여성은 남성에 대한 지식과 이해가 필요합니다. 남자들은 권위에 대한 존중이 필요합니다. 권위가 손상이 되면 남자는 참지 못합니다, 이것을 여성들은 잘 이해해야합니다. 또 여성들은 감정에 대한 존중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여성들은 감정이 손상이 되면 참지 못합니다. 이것을 남자들을 잘 이해해야합니다.
그래서 벧전3장7절에 “○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 사모님이 집에서 물건이 있으면 무조건 옮기는 버릇이 있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목사님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알고 보니 사모님이 어릴 때 빚쟁이들이 와서 물건을 가져가다보니까 이제는 무슨 물건이 있든지 옮기는 버릇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아내가 어릴 때 가졌던 배경에 대해서 알고 또 이해하고 나니까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었고,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나니까 자신도 행복하고, 나중에 아내도 좋게 변하는 것을 보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지식-이해-수용-관계-행복-변화).
/우리가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제일 먼저 상대방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합니다. 우리가 오후에 목장모임을 하고 나눔을 하려는 목적도 서로에 대해서 알기 위해서입니다. 그 다음에 알고 난 다음에 안 그 사실을 가지고 서로 비판하고 정죄해서는 되지 않습니다. “아 그 사람이 이렇구나” 라고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이해를 해야 합니다.
/이때 우리가 생각해야할 것은 항상 서로 다름을 이해를 해야 합니다. 다르다고 하는 것은 절대 틀리거나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항상 모든 관계에서 문제가 생기는 것은 모든 사람들을 내 입장에서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남편은 남편의 입장에서만 생각하고, 아내는 아내의 입장에서만 생각하고, 부모는 부모의 입장에서만 생각하고, 자녀는 자녀의 입장에서만 생각하고, 상사는 상사의 입장에서만 생각하고, 종업원은 종업원의 입장에서만 생각합니다.
/이해라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그 사람 아래 서 있다는 말입니다. 내 입장에서만 아니라 그 상대방의 입장에서 그 사람아래서 그 사람을 생각해보는 것이 이해입니다. 이때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내가 제일 힘든데, 어떻게 저 사람의 입장에까지 설수 있겠습니까? 또 내가 굳이 저 아래 사람의 입장에 설 필요가 있습니까?”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상대방의 입장에 서 보는 것은 성육신이라고 합니다. 지난주에 목자 모임에 성육신에 대해서 공부를 했습니다. 성육신이 무엇입니까? 성육신이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본체이시지만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에 모든 것을 다 아시기에 인간에 대해서 굳이 알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까? 우리 모든 인간을 몸으로 이해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만일 예수님께서 인간으로 오시되 왕으로 오셨다면 일부의 사람들만 이해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 중에서도 가장 낮은 종으로 오셨기에 모든 인간들을 다 이해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낮아지심으로 모든 사람들 이해하시고, 모든 사람을 수용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땅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심지어 죄인들까지 오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이 땅에 모든 사람 아래서 그들을 이해하시시고 수용하시고 나니까 그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가질 수 있게 되었고, 그러니까 예수님인 이 세상에 가장 행복하게 사셨고, 나중에 그 제자들을 변화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왜 상대를 알아야합니까? 왜 상대방의 입장에 서 있어야합니까? 또 상대방의 입장에 서 있기 위해서 왜 굳이 낮아져야합니다. 그 이유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함으로 더 낮아져서 더 잘 이해해주고 더 용납해줄 수 있는 관계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세 번째, 우리가 관계에 문제가 생기는 것은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는 서로의 영역이 있습니다. 그 영역을 침범했을 때 관계의 문제가 생깁니다.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는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선악 간에 판단하는 모든 주권이 하나님에게 있음을 알게 하기 위해서 선악과를 두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했습니다. 그랬을 때 하나님께서도 진노하시고,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깨어지게 되었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의 영역이 있고 자녀의 영역이 있습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공경 받아야 하는 영역이 있습니다. 그런데 자녀가 부모의 영역을 침범해서 공경하지 않았을 때 부모는 진노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녀에게 자녀들아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셨습니다. 자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도 존중받아야할 영역이 있습니다. 그런데 부모가 너무 일방적으로 자녀의 영역을 침범하면 자녀도 진노하고 낙심합니다. 그래서 골3장21절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마치 차선과 같습니다. 우리가 차를 타고 할 때 언제 문제가 생깁니까? 내 차선을 넘어서 끼어들기를 할 때입니다. 끼어들기를 할 때 깜빡이를 넣고 그 사람이 알게 하고 난 다음에 천천히 끼어들기를 하면 문제가 생기지 않습니다. 그런데 깜빡이도 없이 갑자기 끼어들기를 합니다. 그러면 문제가 생기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에베소서에는 남편과 아내와 관계,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 상전과 종과의 관계를 말씀하기 전에 먼저 “엡5:21.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복종이란 서로 존중한다는 뜻도 있습니다.
왜 우리가 서로를 존중해 주어야합니까? 그 이유는 우리가 서 있는 이 자리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리이고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차선을 잘 지키듯이 우리가 서로의 영역을 잘 지키고, 다른 사람들의 영역을 존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어떻게 사람들과의 관계를 잘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단순히 사람들과의 관계를 잘 하기 위해서 단순히 어떻게 인간관계를 잘 할 것인가? 라고 하는 것만을 생각해서는 되지 않습니다.
사람들과의 관계를 하나님과의 관계의 결과입니다.
성경의 제일 마지막장은 요한복음 21장입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은 모든 성경에 쓰여 지고 난 뒤 20년 뒤에 제일 마지막에 쓰여 졌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제일 마지막인 요한복음 21장에서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고 먼저 말씀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21장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네가 이 모든 사람들, 이 모든 것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왜 3번씩이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하십니까? 그 이유는 내가 아무리 이 세상의 모든 것보다 주님을 더 사랑한다고 해도 그것이 진실이 아닐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세 번만이 아니라 천번 만번이나 진실한 대답을 원하십니다.
여러분은 진실로 이 세상의 모든 것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십니까?
그러면 우리가 진정으로 이 세상의 모든 것보다 주님을 사랑한다면 그 주님을 사랑하는 증거가 무엇이어야 합니까? 우리가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사람들이 양으로 보여야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네가 진정으로 나를 사랑한다면 내 양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요21장에 내 양을 먹이라고 하셨을 때 첫 번째 양은 우리보다 높은 위치의 사람입니다. 우리는 우리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배가 아파하고 깍아 내려고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한다면 우리보다 잘 되어 있는 사람들도 우리가 돌아보아야할 양으로 보아야합니다. 또 두 번째 양은 우리와 같은 수준의 사람입니다. 우리는 우리와 같은 수준의 사람들과 반드시 경쟁하고 싸워서 이기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한다면 나와 비슷한 수준의 사람들을 경쟁의 대상이 아니라 그도 내가 돌아보아야할 양으로 보아야합니다. 세 번째 양은 우리보다 낮은 위치의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우리보다 낮은 위치의 사람들을 깔보거나 무시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한다면 우리보단 낮은 위치의 사람들을 우리가 더 돌아보아야할 양으로 보여야합니다.
주님을 이 세상의 모든 것보다 더 사랑함으로 다른 사람들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는 은혜와 축복이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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