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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 신학/설교모음

누가 예수님을 죽였는가?(막15:6-15)

by 금빛돌 2016. 3. 23.

여러분 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까? 우리는 제일 먼저 로마의 군병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면 로마 군병들은 어떻게 말하겠습니까? “우리는 책임이 없습니다. 우리는 빌라도 총독이 시켜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면 빌라도 총독은 어떻게 말하겠습니까? “나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가능하면 예수님을 살리려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의 군중들 때문에 나는 어쩔 수 없이 예수님을 죽이라고 했습니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면 또 유대군중들은 어떻게 말하겠습니까? “아닙니다. 종교지도자들이 우리를 충동질해서 예수님을 죽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인 책임은 종교지도자들에게 있습니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면 또 유대인의 종교지도자들은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우리에게 팔아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말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는가? 라고 질문을 하면 사람들은 자신들이 아니고 서로 다른 사람들의 잘못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돌립니다. 그래서 히틀러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고 하면서 유대인 600만 명을 죽였습니다. 또 중세시대 십자군 전쟁에서도 중세그리스도인들은 당시 유대인 3분의 1을 죽였습니다.

얼마 전에도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서 예수님을 죽인 죄가 유대인들 자손들에게 돌아갈 것입니다라고 하는 대사 때문에 유대인들의 큰 시위가 있었습니다.

저는 몇 주째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많은 자료를 참조하고 많은 묵상을 했습니다.

그러면 과연 누가 예수님을 죽였습니까? 예수님을 죽인 책임은 누구에게 있습니까? 바로 우리 모두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바로 내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 는 사실입니다.

성경을 찾아보겠습니다.

3:9.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이 말씀 앞에 보면 종교인들의 죄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이방인들의 죄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유대인들의 죄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롬39절에서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그러면 우리는 종교인들보다 유대인들보다 이방인들 보다 나으냐 결코 아니라 우리 모두가 다 그 죄 아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누구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고 말하지 말아야합니다.

예수님은 바로 우리 모두의 죄 때문에, 나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의 죄가 나에게도 있습니다. 유대종교지도자들의 죄가 나에게도 있습니다. 또 빌라도의 죄가 내 속에도 있습니다. 또 가룟 유다와 예루살렘군중들의 죄가 내 속에도 있습니다.

그러면 과연 인간들의 어떤 죄악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죽인 인간들의 죄 속에 나의 죄와 우리의 죄를 보아야합니다.

1)먼저 우리 안에 유대인들의 죄를 보아야합니다.

유대인들이 왜 예수님을 죽였습니까? 유대인들의 마음 안에는 예수님의 말씀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837절에서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마음 가운데 예수님의 말씀이 들어갈 자리가 없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이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마음 속 에는 항상 육신의 생각으로 가득 차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예수님의 말씀이 들어올 자리가 없을 때가 있습니다.

지난주에 저는 예수님은 어떤 공동체를 원하셨는가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예수님은 나 혼자만 잘 믿는 개인주의적인 신앙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된 공동체를 이루기를 원하신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서로의 연약함과 허물을 덮어주고 용서해주는 공동체를 원하셨다고 했습니다. /또 예수님은 오직 하나님한분만이 아버지가 되는 공동체를 원하셨다고 했습니다. /또 우리는 힘들게 하는 사람에 대해서 보복이 아니라, 기도해주고 축복해주는 공동체를 원하신다고 했습니다. /또 예수님은 어느 한 사람이 아니라 모두 함께 실천하는 공동체를 원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지만, 과연 우리 마음 가운데 그 예수님의 말씀에 들어올 자리가 있습니까?

/예수님은 나보다 우리라고 말씀하시는데, 우리는 여전히 공동체 보다 나 자신만을 위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또 우리 안에 남의 작은 허물과 실수에 대해서 비난하고 비방하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또 우리 안에 내가 이 교회의 주인이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또 내안에 나를 모독하는 사람을 위해서 기도해주고 축복해주기보다는 여전히 보복하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또 서로 함께 실천하기 보다는 모든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도 유대인들과 같이 예수님의 말씀이 들어올 자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유대인들처럼 얼마든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말이 너희 마음에 들어갈 곳이 없음으로 너희가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2)또 우리 안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죄를 보아야합니다.

그러면 유대종교지도자들은 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까?

오늘 본문 10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0. 이는 그(빌라도)가 대제사장들이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러라

//당시 최고의 종교지도자인 대제사장들이 무엇 때문에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겨주었습니까?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들에게 칭찬과 존경을 받는 것에 대해서 시기와 질투심을 생겼습니다. 그래서 그 종교지도자들의 시기와 질투심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넘겨주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시기와 질투의 죄가 우리 안에도 있습니다. 어윈 루처의 <목사가 목사에게> 라는 책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탄이 사막에서 살고 있는 성자를 유혹하려고 여러 가지 시도를 했습니다. 각종 유혹이나 의심이나 두려움 앞에서도 그 성자는 끄떡하지 않았습니다. 그 때에 사탄이 네 형제가 알렉산드리아의 주교가 되었어하고 말하자 성자는 시기심으로 인한 못마땅한 얼굴을 나타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탄은 자기의 군대에게 말하기를 시기심이야말로 사탄이 사용할 수 있는 최후의 무기다라고 가르쳐 주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시기심이란 서로 비슷한 사람들 사이에서 생깁니다. 여성이 남자의 근육질을 보고 시기하지 않습니다. 여성은 같은 여성들에게서 시기심이 생깁니다. 또 시기심은 열심히 없는 사람들에게 생기지 않습니다. 시기란 말의 어원을 보면 열심에서 나왔습니다(그래서 영어로 jealously). 그러니까 열심히 없는 사람들에게는 시기심이 없습니다. 무언가 열심히 하나님의 일을 하려는 사람들에게 시기와 질투심이 있습니다. 대체적으로 교회에서 여 성도들이 시기가 많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여 성도님들이 열심히 많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보면 항상 시기라는 말 다음에는 분쟁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분쟁이 있고, 시기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시기가 있기에 분쟁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전33절에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또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은 무엇을 하지 아니하며라고 말씀할 때도 제일 먼저 나오는 말씀이 사랑은 시기하지 아니하며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기 때문에 모든 분쟁이 생깁니다. 시기 때문에 자랑과 교만과 무례히 행함과 성냄과 악한 것을 생각하는 것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래서 잠언서에는 시기는 뼈를 썩게 하느니라(1430).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운데 나와 비슷한 사람이 영광을 받고 잘 되는 것에 대해서 시기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바로 그 시기심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게 했습니다.

3)또 우리 안에 빌라도의 죄를 보아야합니다.

사도신경에 보면 빌라도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사람들의 대표로 고백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매주일 모든 교회가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빌라도가 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사람의 대표가 되었습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15:15. 빌라도가 무리(예루살렘의 군중)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빌라도는 예수님이 죄가 없으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빌라도는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주었습니다.

그러면 왜 빌라도가 왜 이렇게 했겠습니까? 그가 진정으로 국민과 군중의 만족을 위해서 입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대체적으로 정치인들은 항상 국민을 위한다고 합니다. 또 국민들의 만족을 위해서 일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실 정치인들은 그들을 위한 권력을 가지기 위해서 백성을 위한다고 말할 뿐입니다//빌라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빌라도가 무리의 만족을 주고자 한다고 말하지만, 사실 빌라도는 유대국민들에게 아주 무자비한 통치자였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 갈릴리 사람들을 목 베어 죽인 일도 있었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이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백성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직 그의 총독의 자리와 세상 권력에 대한 욕심 때문입니다. 보통 유대총독은 길어도 5년 동안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빌라도는 주후 26-36년까지 10년 동안 유대총독으로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빌라도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서 오직 자신의 총독의 자리와 권력을 유지하는 것에만 힘을 다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자신의 권력의 유지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빌라도는 사마리아 사람을 처형시킨 일 때문에 로마 황제가 그의 총독자리를 빼앗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 결국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우리 안에도 빌라도처럼 하나님보다 눈에 보이는 세상의 힘과 권력, 물질의 힘과 권세를 더 의지하려는 마음이 없습니까? 내 안에 예수님을 희생해서라도 세상에서 잘 되기만 하면 된다고 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바로 우리 안에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는 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했습니다.

4)또 우리 안에 가룟 유다의 죄와 예루살렘 군중들의 죄를 보아야합니다.

가룟 유다가 왜 예수님을 팔았습니까? 예루살렘 군중들이 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 했습니까?

가룟 유다가 단순히 돈 때문에 예수님을 판 것만이 아닙니다. 가룟 유다와 예루살렘의 군중들은 정치적인 메시야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정치적인 메시야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면 힘으로 로마군대를 물리치시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통해서 세상에서 자신들의 모든 욕망들을 다 이루게 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이 자신들의 모든 욕망을 이루어 줄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자 예수님을 팔아 넘겼습니다. 또 예루살렘 군중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했습니다.

//우리 안에도 예수님을 통해서 나의 세상적인 욕망만을 이루려고 하는 욕심들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 안에 세상적인 욕심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이와 같이 누가 예수님을 죽였습니까? 바로 우리가 죽였습니다. 내가 죽였습니다.

내 안에 예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마음이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내 안에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이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내 안에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는 마음이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내 안에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고자 하는 세상적인 욕심들이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우리가 2000년 그 자리에 있지 않았을 뿐 우리도 그 자리에 있었으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른 누구의 죄가 아니라, 우리의 죄, 나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이런 사실을 하나님 앞에서 인정하시고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금까지는 인간의 죄악의 관점에서 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는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관점에서 누가 예수님을 십자가 못 박았습니까?

바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계획 가운데 당신의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당신의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까?

그것은 우리를 향하신 크고 놀랍고 말로 다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저는 몇 주 동안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계속 제 마음에 눌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는가를 생각하면서, 우리들의 죄가 생각이 났습니다. 또 내 안에 있는 죄가 생각이 났습니다. 그래서 정말 이 설교를 하는 것이 너무 부담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이 설교를 하지 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 설교를 하게 된 결정적인 동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원수 같은 우리조차도 하나님은 사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원수 같은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로마서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5: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이 세상에 의인이 죽을 때 그를 변호하면서 같이 죽은 자가 쉽지 않습니다. 없다는 말입니다. 또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다는 말씀에서 용감히라는 말은 아무 생각 없이, 어떨 결에라는 말입니다. 혹 지하철에서 어떤 사람이 떨어졌을 때 용감하게 구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에게 어떻게 구조하게 되었는가를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 순간 아무 생각 없이, 순간적으로, 어떨 결에 뛰어내렸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깊이 생각하고 오래 생각했으면 절대 뛰어내리지 못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언제부터 우리를 사랑하셨습니까?

//이 세상을 창조하기 전부터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사랑은 얼떨결에, 아무 생각 없이 순간적으로 계획 없이이루어진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오랫동안 계획되었던 사랑이었습니다.

//또 우리가 어떨 때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의 의롭게 살아갈 때가 아닙니다.

우리가 연약할 때입니다. 또 우리가 아직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입니다. 우리가 죄인 었을 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죽이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5:8).

//더 나아가서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죽이심으로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5:10).

//이와 같이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찔러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우리도 사랑하십니다. 나도 사랑하십니다. 이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 내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죄인이라도 여전히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할 때 우리는 그 어떤 절망과 좌절과 낙담과 죄책감 가운데서도 일어설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죄가 여러분을 누르고 있습니까? 정죄하고 있습니까? 그래도 그 죄를 능가하시고 이기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1. 예수 사랑하심은 성경에서 배웠네 우리들은 연약하나 예수권세 많도다-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성경에 쓰였네2. 나를 사랑하시고 나의 죄(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죄)를 다 씻어 하늘 문을 여시고 들어가게 하시네,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성경에 쓰였네 3. 내가 연약할수록 더욱 귀히 여기서 높은 보좌위에서 낮은 자를 보시네,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성경에 쓰였네 4. 세상 사는 동안에 나와 함께 하시고, 세상떠나 가는 날 천국가게 하소서,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성경에 쓰였네

/얼마전에 아빠와 흑진주라는 인간극장에 나왔던 아버지가 생활고로 인해서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아프리카 흑인여성과 결혼해서 세 자녀를 낳았는데 부인이 일찍 죽었습니다. 그래도 그 아버지는 정말 흑진주와 같은 그 자녀들을 잘 기르고 있다는 인간극장의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가 지난주에 생활고에 시달려 자살했다는 보도가 나왔습니다.

저는 그 보도를 보면서 고린도 후서6장의 말씀을 생각했습니다.

고후 6:4.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속이 상하는 것)() 환난과 궁핍(경제적 궁핍)과 고난과 5. 매 맞음과 갇힘(운신할 수 없는 지경)과 난동과 수고로움(육체의 탈진과 피곤함)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극심한 가난) 가운데서도 (이런 고난가운데 다음과 같은 것들을 지켜나갔다). 6. 깨끗함과 지식(하나님의 사랑에 과한 지식)과 오래 참음(그 사랑 아래 거함)과 자비함(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감화(성령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마음에 부은 바 됨)와 거짓이 없는 사랑(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반응)7. 진리의 말씀(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모든 고난을 이기게 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능력)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믿음으로 말미암은 의)

9.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8: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어떤 친구가 부서질 만큼 사랑을 받고 싶다는 책을 읽고 싶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정말 내가 부서질 만큼 사랑을 받고 싶습니까? 그러면 예수님의 십자가 앞으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그 십자가를 통해서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래도 나는 너를 사랑한다. 네가 나를 찔러도 나는 너를 사랑한다. 네가 부서질 정도로 나는 너를 사랑한다

이 하나님의 사랑사랑 앞에서 날마다 내가 부서질 정도의 사랑을 받으시면서 살아가시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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