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우스터 교수가 세계 54개국을 대상으로 어느 나라 사람들이 가장 행복을 느끼는지 행복지수를 조사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인 방글라데시 사람들이 1위였습니다. 54개국 중에서 미국은 46번째입니다. 한국은 23번째입니다. 이 자료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육신적으로 잘 사는 것과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우스터 교수가 또 이런 결론을 내렸습니다. '선진국의 경우 물질적 만족도가 일정수준을 지나면 소득상승이 더 이상 행복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고 했습니다. 즉 잘 사는 나라 사람들은 적당한 수준의 부를 갖기에 어느 정도 수준 이상으로 재물을 쌓으면, 재물이 행복하고는 관계가 별로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예를 들어 강남에 50평짜리 집에서 살던 사람이 옆에 있는 70평집을 사서 옮기면 기분이 좋을지는 모르지만 그것이 행복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미 어떤 수준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 이상은 행복하고는 아무 영향이 없다는 것입니다. 또 우스터 교수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후진국에서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의 경우는 조금만 생활이 나아져도 그것이 삶의 질에 큰 영향을 미친다.' 고 했습니다. 지하에 살다가 1층으로 올라갑니다. 또 월세에서 전세로 갑니다. 포장마차 하던 사람들이 작은 구멍가게라도 냅니다. 이런 사람들이 넉넉한 부자들이 조금의 부를 더 가지는 것보다 더 큰 행복을 느낀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아무리 이런 작은 육신적인 행복을 느낀다 하더라도 그것이 진정한 우리 영혼의 만족과 기쁨은 될 수 없습니다. 김동호 목사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릴 때 오래 동안 집이 없어서 세를 들어 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돈을 모아 집을 쌌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한 며칠 동안은 내 집이라 생각하니 너무 좋아 잠이 오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며칠 간줄 아십니까? 일주일 갔다는 것입니다. 그러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만일 이사하고 한 일 년 동안이나 좋다고 하는 사람은 정신병원에 가야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육신적인 편리함을 쫒아서 살아갑니다. 좋은 집, 좋은 환경만 있으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육신적이고 환경적인 편리함이 진정한 행복과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우리 영혼과 마음의 행복이 이루어져야합니다. 이 산상설교에 나오는 팔복은 우리 영혼과 마음의 행복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육신이 잘되어도 진정한 행복이 올수 없습니다. 지위도 돈도 건강도 진정한 영혼의 만족과 행복을 줄 수 없습니다(내가 그렇습니다).
우리 마음에 천국이 임해야 우리가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 있습니다. 천국이란 죽어서만 가는 곳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얼마든지 체험할 수 있습니다. 천국의 가장 큰 특징 기쁨입니다. 그냥 기쁨이 아니라 세상이 알지 못하는--이 세상이 주지 못하는 최고의 기쁨이 바로 천국입니다. 우리 마음에 이런 천국의 기쁨을 누리게 될 때--비로소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천국의 기쁨을 어떻게 누릴 수 있습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우리 마음이 가난하면 이 천국의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마음의 가난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무조건 육신이 가난하다해서 마음이 가난한 것 아닙니다. 신학대학원3학년 때 저는 무작정 시골로 들어갔습니다. 제 생각에는 시골에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동네에 가면 그 사람들의 마음이 참 가난하여 “하나님만 사모하겠지”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가난하기에 가난한 사람들을 누구보다 더 잘 이해하겠지”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교회에 거지 3명이 찾아왔습니다. 그 중에 한 거지는 실미도 같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자기가 북파공작원인데, 그때 다리를 다쳤다고 하면서 북한에 갔다 온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는 그 사람들을 받아주고, 또 저희 집에서 식사도 같이 했습니다. 저녁까지 같이 교회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골교회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습니다. “우리 강도사님 참 순진하다. 어째 저런 사람들을 받아주나, 저 사람들이 우리에게 나쁜 짓하면 어떻게 하나”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때 깨달았습니다. 육신적으로 가난하다 해서 무조건 영적으로 가난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즉 육신이 가난하면서 마음이 가난하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육신이 부자이면서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육신이 가난하면서 마음도 가난하지 않고 교만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또 육신이 가난하면 마음도 가난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에서는 팔복을 말씀하시면서 그냥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고 했습니다. 대학 다닐 때 아버지께서 실직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께서 제가 있던 방을 빼서 월세로 생활을 한 적이 있습니다. 5식구가 한 방에서 생활했습니다. 문제는 금요일 부산에 학교를 갔다 오면 내가 조용히 앉아서 기도할 장소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집 마루 뒤편에 처마 끝에 뒷간이라고 하는 재래식 화장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화장실 반대편에 한 사람이 겨우 누울 수 있는 공간이 있습니다. 앉아 있을 수도 없고 무릎을 꿇든지 아니면 누워 있어야 합니다. 금요일 오후에 부산에서 오면 토요일 저녁 중등부 기도회까지 거기서 기도하거나 잠이 오면 잠시 잠을 청하며 있었습니다. 그때 제일 많이 부른 찬송이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 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모든 죄 사함 받고 주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주의 얼굴 뵙기 전에 멀리 뵈던 하늘나라 내 맘속에 이뤄지니 날로 날로 가깝도다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모든 죄 사함 받고 주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 나라/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모든 죄 사함받고 주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입니다.
그런데 1년 후에 다시 방을 찾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방을 다시 찾게 된 날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때 어떻게 할까 고민을 했습니다. 기도실에 갈 것인가? 아니면 방에서 잘 것인가? “그래 오늘 하루만 방에서 자자”라고 했습니다. 정말 편안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날 이후로는 단한 번도 그 기도실에 가지 않았습니다.
--이와 같이 육신이 가난하여 우리 마음이 가난하게 될 때 우리는 천국의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앗사시의 성 프란시스가 있습니다. 역사상 삶으로 가장 예수님을 닮은 사람입니다. 그는 어떻게 하면 내가 예수님을 닮을 것인가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때 복음서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처럼 가난하게 사는 것이 가장 예수님을 닮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앗사시의 프란시스는 평생 가난을 아내로 삼으며 살았습니다. 그는 가난과 결혼했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가난을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가난 자체는 절대 축복이 아닙니다. 그는 자발적으로 가난을 선택함으로 예수님을 닮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육신적 가난 속에서 마음의 가난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또 마음의 가난 속에 예수님으로 인한 기쁨을 소유하며 살았습니다. 만일 육신의 가난 속에 마음의 가난이 없고 마음의 가난 속에서 예수님으로 인한 기쁨이 없다면 참된 행복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마음의 가난입니다.
그러면 우리 마음이 가난한다는 것은 어떤 상태를 말합니까? 가난이라는 말은 프토코스(ptokos)인데 상대적 가난이 아니라 절대적 가난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어느 식당에 가서 밥을 먹는데, 옆에 사람이 하는 이야기가 서울에 어느 뷔페음식이 한 끼에 8만원하더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때 느끼는 상대적 가난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가난이란 절대적 가난을 말합니다. 어느 노숙자가 쓴 일기에 내용이 있습니다. “돈도 떨어지고 당장 먹을 게 걱정이 됐다. 생각 끝에 모든 방 침대 밑을 뒤지기 시작했다. 6시간 정도 모든 방을 뒤졌다. 그리고 올린 수확은 4백원. 너무 기뻤다. 곧바로 옆 건물 슈퍼로 가서 우유 한 병을 사 단숨에 들이켰다. 난 감히 말한다. 이 때 마신 우유 한잔은 우유가 아니고 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 아니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만든 가장 맛있는 음식이었다. 이 때 마신 우유 맛을 난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즉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즉 하나님을 악세사리 식으로 있으면 좋고, 없어도 별로 아쉬을 것이 없는 그런 정도의 가난이 아닙니다. ”나는 오늘 하루 한 순간도 하나님 없으면 죽습니다. 난 살수 없습니다“는 마음입니다(주여 내가 그렇습니다-모든 것이 다 있어도 하나님 당신이 없으면 난 죽습니다). 이 마음의 가난은 시편기자가 말하는 사슴이 시냇물을 찾는 마음입니다. 사슴이 물을 찾는 마음은 사슴이 산에 놀러갔다가 간식으로 물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사슴이 산에서 약초를 먹습니다. 그런데 귀한 약초를 먹고 난후 물을 먹어야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물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지금 방금 물을 먹지 않으면 그 산속에 죽을 수밖에 없는 지경입니다. 바로 이런 심정으로 하나님을 찾는 마음이 가난한 마음입니다. 하나님 이 예배시간에 은혜주지 아니하시면 죽습니다. 주여 나를 도와주소서.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 갈급함으로 하나님을 찾고 부르짖는 마음이 가난한 마음입니다.
/또 다윗처럼 “시28:1.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니 나의 반석이여 내게 귀를 막지 마소서 주께서 내게 잠잠하시면 내가 무덤에 내려가는 자와 같을까 하나이다”라는 마음이 가난한 마음입니다.
또 가난한 마음이란 자신의 마음이 아무 것도 자랑할 것이 없이 완전히 비워진 상태를 말합니다. 또 자기 자신에게 있어서 아무 것도 의지할 것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또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의라고는 전혀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만을 자랑하고 의지할 수밖에 없는 마음 상태를 말합니다. 또 자신의 의가 아니라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만을 가지고 있는 마음 상태를 말합니다.
그래서 C.S. 루이스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 자신이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좀 더 선하다, 좀 더 낫다, 좀 더 거룩하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지배를 받는 사람이 아니고 악마의 지배를 받고서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마음의 태도는 영적으로 교만이라고 하나님이 선언하셨고, 그런 교만한 자를 하나님이 대적하신다“ 고 했습니다. 즉 우리 마음에 조금이라도 내가 남보다 낫다고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 나가면 그 마음이 바로 교만한 마음입니다.
왜 사람들이 하나님말씀에 대한 사모함이 없습니까? 왜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사모함이 없습니까? 왜 사람들이 신령한 것에 대한 사모함이 없습니까? 왜 사람들이 영혼의 건강에 대한 사모함이 없습니까? 왜 사람들이 예배에 대한 간절함과 사모함이 없습니까? 그 이유는 한마디로 하나님께 대하여 마음에 답답할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 없이도, 은혜 없이도, 영혼의 부요함 없이도 얼마든지 육신적으로 의지할 것이 있고, 자랑할 것이 있고, 자신이 내세울 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기지 않습니다.
아무리 아름답고 거룩한 예배를 드려도 그저 성전의 마당만 밟고 왔다 갔다 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아무리 신앙생활을 오래해도 자기 의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또 자신의 의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입니다--이런 사람은 예배시간에 눈물을 흘리면서 말씀을 들어본 기억조차 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이런 자에게 은혜를 주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결코 천국의 기쁨이라곤 찾아 볼 수 없습니다. 교회생활이란 그저 일이며, 습관이며, 또한 종교적 의무감에 불과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의 얼굴만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 얼굴에 하늘나라의 평안이 없습니다. 기쁨도 없습니다.
여러분 혹 내가 이런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만일 그렇다면 여러분은 사실상 마음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목사님 난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라고 하는 사람은 실상은 마음이 교만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이 되지 말아야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 마음이 가난하게 될 수 있습니까?
첫째는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은혜를 주셔야 가난하게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는 인간은 교만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위로부터 내려주시는 은혜를 주셔야 우리마음이 가난하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가난한 마음은 인간적으로 될 수 없는 마음입니다. “내 마음을 비워야지, 내 마음을 가난하게 해야지” 한다고 해서 마음이 가난하게 되지 않습니다. 오직 위로부터 내려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내 마음에 아침이슬처럼 내려질 때 내 마음이 가난하게 됩니다. 이런 차원에서 부자도 하나님의 은혜가 있으면 마음이 가난해질 수가 있습니다. 제가 아는 어느 의사부인이 있습니다. 제가 아무리 봐도 인간적으로 아쉬울 것이 없는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정말 말씀을 들을 때마다 눈에서 시꺼먼 눈물이 나오는 것을 봅니다. 저는 처음 그것이 무엇인줄 몰랐습니다. 그런데 정말 하나님말씀을 사모하여 흘리는 눈물이었습니다. 정말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모로 보나 육신적으로 어느 하나 부족한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분은 말씀을 들을 때 마다 한 번도 눈물 없이는 듣지 못하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가장 무서워해야하고 두려워해야할 것이 무엇입니까? 은혜가 떨어진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무섭습니다. 은혜가 떨어지면 모든 것이 다 끝이 납니다. 능력이 없어도 괜찮습니다. 일을 잘못해도 괜찮습니다. 돈이 없어도 괜찮습니다. 나이가 들어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은혜가 떨어지면 정말 문제가 됩니다.
그러면 은혜가 무엇입니까?
지난주에 모 교회에서 설교를 하고 나니까 사람들이 저에게 말씀에 은혜가 되었습니다는 말을 했습니다. 저는 그 말을 들었을 때 참으로 부끄러웠습니다. 그리고 빨리 그 자리를 떠나고 싶었습니다. 여러분 은혜란 절대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대개 설교에 은혜를 받았다는 말을 할 때 내가 좋아하는 말씀을 들었을 때 은혜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내게 부담스러운 말씀을 들으면 은혜를 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실 은혜란 절대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은혜란 오직 예수그리스도에서만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성령하나님을 통해서만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란 무엇보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남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서 아들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 예수그리스도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하나님을 통해서 그 은혜가 우리 마음에 부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서 그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사랑이 우리 마음이 부어질 때 비로소 우리의 마음이 가난해 질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나의 의는 다 더러운 옷과 같습니다. 하나님 저는 오직 죄뿐입니다. 하나님 저는 하나님 앞에서 정말 아무 것도 아닙니다” 라고 하면서 살아 갈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돈보다 다 건강보다 지위보다 날마다 우리의 마음을 가난하게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며 사시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 우리는 인생 광야의 경험을 통해 마음이 가난하게 될 수 있습니다. 모세의 40년 광야생활을 통해서 “나는 별수 없는 자라”는 가난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인생광야의 경험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오랜 질병으로 시달리고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경제적인 인생광야를 경험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심리적 광야를 경험합니다. 많은 신앙의 거인들이 우울적 기질이 있다고 합니다. 그 우울적 기질로 말마임아 심령이 가난하게 되어 하나님을 찾게 된다고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사람에게 괴롭힘을 당함으로 하나님은 우리 마음을 가난하게 만드십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마음이 마치 속이 텅텅빈 고목나무와 같다고-겉으론 멀쩡하지만 내 속에는 완전히 비워있고 썩어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인생광야의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주리게 하시고 낮추게 하셔서--우리가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가 아니면 도무지 살아갈 수 없는 인간이 되게 만드십니다(신8장).
셋째는 기도의 광야를 통해서 우리 마음이 가난해 질수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이 가난해지기 위해서 일부러 재산을 버린다든지, 일부러 고난 속에서 살 필요가 없습니다. 기도의 야성을 가지면 마음의 가난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지 아니하면 인간은 교만할 수밖에 없습니다. 기도의 광야로 나아가십시오. 기도는 고독한 자리입니다. 광야의 자리입니다. 자신의 모든 잘남과 의를 다 비우는 자리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만 구하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혹 기도가 자신의 의가 되면 되지 않습니다. 기도하면 할수록 내 무능과 가난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저는 특히 오래 기도하고 나면 항상 살핍니다. 왜냐하면 누가 나를 보지 않을까 하는 마음입니다. 보면 부끄럽습니다. 왜냐하면 기도를 많이 한 것이 자랑이 아닙니다. 보십시오. “나 이렇게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교만한 사람이예요”라는 것입니다. 기도하면 영적으로 가난해 집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영적으로 교만해 집니다. 그래서 인간적 힘으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기도하면 할수록 나는 아무 것도 아니며, 모든 것을 하나님이 다 해주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단순히 행복하게 해주세요, 천국을 경험하게 해 주세요 라고 해서는 되지 않습니다.
행복, 천국의 기쁨, 위로부터 내려오는 하늘의 은혜, 이런 것은 마음이 가난한 자의 결과입니다. 오 주여 우리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로 가난하게 해 주옵소서. 그래서 마음이 가난함으로 영적으로 행복하며 부요하게 해 주옵소서 라고 기도하시며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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