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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연구/룻기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룻기 2장 1-10절) (변종길교수)

by 금빛돌 2015. 7. 22.

룻과 보아스

      

변 종 길 교수 (고려신학대학원, 신약학)

I. 본문 배경

   룻과 보아스는 성경에서 가장 극적인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한 폭의 정물화를 보듯 안식을 찾아가는 한 이방 여인의 이야기를 감동적으로 펼쳐나가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옛날의 한 시녀와 지주 사이의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 일어난 구속사적이고 교회론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보아스는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룻은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 곧 나 자신을 예표한다는 점에서 깊고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때는 사사 시대 말기인 주전 약 12세기였다. 유다 베들레헴 땅에서 하나님을 믿고 경건하게 살던 나오미의 가정이 모압 땅으로 이사하게 되었다. 경제적으로 좀 더 잘 살아보려고 양식을 따라 간 것이 근본이유였다. 그러나 나오미의 계획은 얼마 가지 않아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사랑하는 남편이 죽었고 두 아들마저 죽었기 때문이다. 나오미는 이방 땅에서 과부가 되었으며 과부 며느리 둘을 데리고 살게 되었다.

   그러다가 나오미는 하나님께서 유대 땅에 양식을 주셨음을 듣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때 며느리 룻이 함께 따라온다. 친정 부모 집으로 돌아가서 다시 결혼해서 살라고 강권하였지만 룻은 기어코 따라왔다. 왜냐하면 그가 알게 된 여호와 하나님을 붙들기 위해서였다.

   아무것도 없이 빈손으로 낯선 땅 베들레헴에 온 룻에게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신다. 놀라운 은혜를 베푸시는데 유력한 자 보아스가 그녀를 아내로 취하고 아들을 낳아 죽은 남편의 이름을 잇게 하셨는데, 이 아들은 나중에 다윗의 조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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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본문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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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본문(2:1-10)은 룻과 보아스가 처음 만나는 장면이 나온다. 유다 베들레헴의 유력한 부호 곧 지주인 보아스가 자기 밭에 이삭 주우러 온 모압 소녀 룻에게 관심을 가지고 한량없는 은혜를 베푼다. 그냥 지나쳐도 될 이방 여인, 하찮은 시녀에게 보아스가 관심을 가지고 이는 누구의 소녀냐?”고 묻는다(5). 그리고는 룻을 쫓아내지 아니하고 자기 밭에 있게 하며 그에게 생수를 공급해 주고 먹을 것을 준다(8-9). 이것은 우리에게 생수를 주시며 풍성하게 채워 주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 준다. 보아스는 능력 있는 자로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보아스란 이름의 뜻이 그 안에 능력이 있다로서 능력 있는 자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이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진 자로서 우리에게 한량없는 은혜를 계속해서 베풀어 주신다.

   이런 보아스의 은혜에 대한 룻의 반응은 감격의 고백이다. 룻은 먼저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였다(12). 이것은 은혜 베푸는 자에 대한 감사와 경배의 표시이다. 그리고 말하였다. “나는 이방 여인어거늘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보시나이까?”(12) 이것은 까닭모를 은혜를 받은 룻이 감격하여 고백한 감사의 절규이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의 은혜에 대해 고백해야 할 말이다. 룻은 교회를 예표한다. , 오늘날 우리의 모습을 대표한다. 말로 다할 수 없는 까닭모를 은혜를 받은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 이런 감사의 고백을 해야 하는 것이다

 

III. 핵심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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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산한 이방 여인이 이런 보아스와 결혼한다는 것은 상상치도 못할 일이었다. 감히 생각할 수 없는 주제넘은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불균형의 결혼이 일어났다. 성경이 이것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이다. 보아스는 능력 있는 자요 신앙과 인격이 완전한 자로서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이에 반해 파산한 과부 룻은 이 세상에서 죄로 말미암아 파산한 우리 인간을 예표한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바로 파산한 과부요 이방 여인이다. 이런 우리가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맞아들인다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일이며 도무지 격이 맞지 않는 불균형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런 엄청난, 얼토당토않은 일이 일어났다. ,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신랑으로 맞아들인 것이며 그의 신부가 된 것이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이런 은혜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감사와 고백이 되어야 한다. 까닭 없이 베푸시는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찬송이 우리의 마땅한 태도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까닭 없이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까닭 없는 은혜를 받기 위해서이다. 우리에게 무슨 잘난 것이나 공로가 있어서가 아니다. 나의 착함 때문이 아니다. 오직 은혜로 구원 받은 우리는 우리 주님 앞에 절대적으로 겸손하여 전적인 감사와 찬송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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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설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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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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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룻과 보아스의 관계에 있어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보아스입니다. 물론 룻도 나름대로 역할을 하였지만, 지위상으로 보나 능력으로 보나 보아스가 주도적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보아스가 이고 룻은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보통 이 아니라 절대적 약자인 입니다. 이에 반해 보아스는 유력한 자’(2:1) 곧 능력 있는 부호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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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보아스의 까닭 모를 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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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보아스는 룻과의 관계에 있어서 시종일관 은혜를 베푸는 자로 나타납니다. 룻은 보아스의 밭에서 이삭을 줍는데(2:3), 보아스가 그를 쫓아내지 않고 자기 밭에서 이삭을 줍도록 허용합니다(2:8). 뿐만 아니라 일꾼들에게 룻을 책망하지 말고 오히려 곡식 다발에서 이삭을 조금씩 뽑아 버려서 룻으로 하여금 줍게 하라고 명령합니다(2:15-16). 참으로 자상한 배려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보아스는 룻에게 생수(生水)를 공급해 줍니다. “목이 마르거든 그릇에 가서 소년들이 길어온 것을 마실지니라.”(2:9) 여러분, 유대 땅에서 물은 생명처럼 소중한 것입니다. 그런 물, 생수를 무상으로 공급해 주는 보아스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수를 주시는 그리스도(7:37-39)를 나타냅니다. 그리스도는 목마른 우리에게 속에서 영원토록 솟아나는 생수,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공급해 주십니다(4:14). 뿐만 아니라 보아스는 룻에게 빵과 볶은 곡식을 줍니다. 그래서 룻은 배불리 먹고 남았다고 합니다(2:14). 이것은 우리에게 풍성하게 채워 주시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나타냅니다. 그리스도는 자기를 따라온 무리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고 배불리 먹고 남게 하셨습니다(14:20; 15:37). 이것은 예수님께서 수요 예측을 잘못하시거나 능력 조절을 잘못하신 게 아니라 풍성한 은혜를 주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배고픈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그들에게 먹을 것을 공급해 주시는데, 풍성한 은혜를 주셔서 배불리 먹고 남게 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통해 예수님은 단지 육신의 양식만 채워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필요를 넉넉히 채워 주시는 분이심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cf. 4:19; 24:1). 따라서 우리는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어야 합니다(6:31-34; 4:6).

   뿐만 아닙니다. 보아스와 룻의 관계에 있어서 제일 먼저 말을 건넨 사람은 룻이 아니라 보아스였습니다. “내 딸아!” 하면서 먼저 말을 건넨 사람은 보아스였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와 예수님의 관계에 있어서 먼저 찾아오셔서 말씀하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요일 4:10). 하나님이 먼저 독생자를 보내셔서 사랑을 보여 주셨기 때문에, 우리도 이처럼 사랑하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요일 4:11; 13:34).

   뿐만 아니라 제일 먼저 관심을 보인 것도 룻이 아니라 보아스였습니다. 룻은 보아스가 누구인지도 알지 못하고 있을 때에 보아스는 먼저 자기 밭에서 이삭을 줍고 있는 룻에게 관심을 가지고 이는 누구의 소녀냐?”고 물었습니다(2:5). 그냥 지나쳐 버려도 될 하찮은 시녀, 이방 여인 룻에게 먼저 관심을 가지고 물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 아무런 생각도 관심도 없을 때에 예수님은 먼저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시고 접근해 오셨습니다. 하찮은, 보잘것없는 존재인 나에게 관심을 가지시고 집요하게 따라오셨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우리의 마음을 열게 하시고 자기와 복된 관계를 맺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사랑이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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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하나님의 섭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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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룻과 보아스의 만남과 결혼에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습니다. 사람의 생각이나 계획으로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룻은 누구 밭인지도 모르고 이삭을 주우러 갔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보아스의 밭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성경은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더라고 말합니다(2:3). 그러나 하나님이 보실 때에 우연’(偶然)이란 없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작정에 의해 일어나며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섭리하신 것입니다(16:33; 16:9). 단지 사람이 알지 못하고 있는데 갑자기 임하기 때문에 우연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그때 마침보아스가 베들레헴에서부터 와서 그 밭에 이르렀다고 합니다(2:4). 여기서 마침이란 것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아스의 발걸음을 인도하셔서 그 날 그 시간에 그 밭에 오게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고 룻의 발걸음과 보아스의 발걸음을 인도하셔서 보아스의 밭에서 만나게 하셨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것도 하나님의 인도요 섭리의 결과입니다.

   그렇다고 아무것이나 다 하나님의 인도요 섭리라고 말하면 안 됩니다. 물론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뜻 가운데 일어난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 가운데에는 우리의 죄와 실수도 많이 있습니다. 따라서 궁극적으로는 다 하나님의 뜻이요 하나님의 섭리라 할지라도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기쁘시고 온전하신 뜻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죄와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기뻐하지 않는 뜻 가운데 일어나는 것들도 많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주관적으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갖다 붙이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건전한 합리적 판단을 무시하고 잘못된 결정을 해 놓고서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할 위험이 큽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을 오용하고 왜곡하는 잘못을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모든 역사 운행에 있어서 하나님의 섭리와 손길을 인정해야만 하며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찾는 것이 중요한데, 객관적 계시인 성경 말씀을 따라 올바른 판단을 하도록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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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룻의 감사와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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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아스가 하찮은 이방 여인 룻에게 관심을 보이고 은혜를 베풀 때에 룻은 사양하지 않고 감사함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까닭 모를 은혜를 베푸는 보아스를 향하여 룻은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면서 말하였습니다. “나는 이방 여인이거늘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보시나이까?”(2:10) 이것은 자신의 처지를 바로 알고 까닭 없이 베푸는 보아스의 은혜에 대한 감격의 부르짖음이었습니다. 자기를 낮추고 마음속에서부터 감사를 표현하였습니다. 이것은 은혜 받을 자격이 없는 우리 인간이 까닭 모를 은혜를 받은 것에 대한 마땅한 반응입니다. 겸손을 가장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사양하는 것은 올바른 겸손이 아니며 오히려 교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이 참된 겸손이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 진정한 겸손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감사하고 찬송하는 것이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태도입니다. 룻이 절규하듯이 외친 나는 이방 여인이거늘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보시나이까?”란 고백은 십자가상에서 예수님이 부르짖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란 외침을 생각나게 합니다. 예수님은 아무 죄도 없이 까닭 모를 형벌을 받으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우리에게 까닭 모를 은혜를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은혜 받을 자격이 없는 우리가 말로 다할 수 없는 풍성한 은혜를 받은 것은 오직 예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까닭 모를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의 어찌하여 ...”란 부르짖음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는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나이까?”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미리 보여 준 것이 바로 보아스의 은혜에 대한 룻의 고백입니다. 까닭 모를 은혜를 베푸는 보아스는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그 앞에 엎드려 고백하는 룻은 오늘날 우리의 모습을 예표합니다. “나는 이방 여인이거늘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니이까?”라는 룻의 고백은 오늘날 우리가 해야 하는 고백입니다. 예수님의 까닭 없는 고난이 있었기에 오늘날 우리에게 까닭 없는 은혜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어찌하여가 있었기에 우리의 어찌하여가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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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메시아의 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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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룻과 보아스의 결혼은 단순히 한 가정의 사건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더욱 중요하고 심오한 의미가 있었으니 그것은 곧 메시아의 계보로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룻과 보아스의 결혼에서 태어난 아들이 오벳(Obeth)인데, 그는 이새의 아버지였으며 다윗의 할아버지였습니다(4:17). 물론 여기서 아버지’, ‘할아버지란 말은 넓은 의미로 이해해야 합니다. 계보에서 중간에 생략된 자가 없다면 직접적인 아버지(부친)와 할아버지(조부)가 되겠지만, 혹 생략된 자가 있다면 그 위 조상이 될 것입니다. 어쨌든 룻과 보아스에게서 난 아들이 다윗의 조상이 되었고 메시아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 룻과 보아스에게서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오시는 영광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룻과 보아스의 이름은 메시아 계보에 당당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1:5; cf. 3:32).

   룻과 보아스에게서 메시아의 조상이 태어난다는 것은 룻기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중요한 주제입니다. 룻에게서 메시아의 조상이 태어날 것이라는 사실은 성읍 사람들이 보아스의 결혼을 축하한 말에도 암시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네 집에 들어가는 여인으로 이스라엘의 집을 세운 라헬과 레아 두 사람과 같게 하시고, 네가 에브랏에서 유력하고 베들레헴에서 유명하게 하시기를 원하며, 여호와께서 이 젊은 여자로 말미암아 네게 상속자를 주사 네 집이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준 베레스의 집과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4:11-12)

   그래서 보아스는 기업 무를 자’(고엘)로 나타나며, 나오미는 잃어버린 기업과 생명을 회복한 자로 나타납니다(4:15). 룻은 파산한 젊은 과부요 은혜 받을 자격 없는 이방 여인이었지만 보아스에게서 까닭 모를 은혜를 받아 복된 가정을 회복하였습니다. 이런 점에서 나오미와 룻은 죄로 말미암아 파산 상태에 있던 우리 인간을 대표하며, 그리스도의 은혜로 회복된 그리스도인들을 대표합니다. 그 주도권은 능력 있는 자 보아스에게 있었으며, 나오미와 룻은 오직 믿음으로 순종하였습니다. 참된 회개와 믿음, 겸손과 감사와 순종은 오늘날 우리 모두가 따라야 할 모범이며 모든 그리스도인이 갖추어야 할 덕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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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 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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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룻과 보아스의 관계에서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를 보게 됩니다. , 나 자신과 그리스도의 관계를 보게 됩니다. 아무 자격 없는 나를 주님이 사랑하시고 은혜 베푸신 것을 생각할 때 참으로 감사하며 머리가 숙여집니다. 이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인 나를, 그냥 지나쳐 버려도 될 나를 기어이 관심을 가지시고 찾아오신 우리 예수님, 그리고 풍성한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계속해서 은혜 베푸시는 우리 주 예수님 앞에 우리가 무엇으로 보답하겠습니까? “나는 이방 여인이거늘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나이까?”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까닭 모를 은혜에 대한 감사와 찬송이 우리가 취해야 할 마땅한 태도입니다. 이 은혜는 한 평생 감사하고 찬송해도 다 갚지 못할 은혜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 전체가 우리 주 예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찬송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날마다 이 사랑을 생각하며 다른 사람에게 따뜻한 말과 친절을 베풀고, 불쌍한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삶을 사는 것, 소외된 사람에게 먼저 관심을 보이고 다가가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결혼한 부부는 상대방에게서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지는 맙시다. 보아스와 같은 신랑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우리 예수님밖에 그런 신랑은 없습니다. 우리는 남편이든 아내든 다 파산한 룻과 같은 존재입니다. 실패한 나오미와 같은 존재입니다. 예수님의 은혜가 아니면 회복될 수 없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보아스와 같은 예수님을 가정의 주인으로 모시고 그 앞에 경배하며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할 때 부족한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시고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룻과 보아스와 같은 믿음의 가정을 이루어 겸손히 하나님을 섬기고 감사하며 사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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