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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연구/룻기

실패자를 통한 회복의 역사(룻1:1-5)

by 금빛돌 2015. 7. 22.

룻기를 보면 룻이 처해 있는 시기와 지금 우리가 처해 있는 시기가 참으로 비슷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룻이 처해있던 시기는 사시시대였습니다. 룻기1:1에 보면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라고 하고 있습니다. 성경학자들은 이 시기가 사사시대 중간 즈음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룻기는 사사시대 다음이 아니라 사사시대에 속합니다. 사시시대는 세 가지의 암흑기였습니다. 첫째 사사시대는 경제적 암흑기였습니다. 또한 정치적 암흑기였습니다. 또한 영적 암흑기였습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1절에 보면 사사들이 치리하던 시대에 그 땅에 흉년이 들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경제적인 암흑기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런 경제적 암흑이 왜 왔습니까? 그 이유는 정치적인 혼란 때문이었습니다. 룻기 앞에 있는 사사기 마지막에 이스라엘 11지파와 베냐민 지파 동족간의 싸움이 나옵니다. 그래서 나중에 베냐민지파 남자들이 거의 다 죽게 됩니다. 그러면 왜 이런 정치적인 혼란이 일어났습니까? 이런 정치적 혼란은 그 시대의 종교인인 한 레위인의 잘못 때문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오늘날 경제적인 암흑이 오게 된 원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정치적인 문제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런 정치적인 문제가 오게 된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 시대의 레위인이고, 제사장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영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바로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서 이런 질문을 던져 보아야합니다.

그러면 과연 사사시대와 같은 지금 이런 시대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역사하시는가?

-이 부분에 있어서 정말 많은 사람들이 부정적인 전망을 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영적으로 침체하고 있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곧 망할 것이다. 그리고 한국교회가 망하면 이제 우리나라도 언젠가는 망하게 될 것이다는 전망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동의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역사를 우리 눈에 보이는 인간적인 시각에서 볼 것이 아니라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시각에서 보아야합니다.

지금 이 시대가 사사시대와 같다고 한다면, 하나님은 사사시대의 이스라엘을 곧 망하게 하셔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사사시대에 속한 룻기에서는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멸망을 길로 가는 사사시대에 속한 룻기에는 이런 사사시대라도 하나님께서 역사하고 계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는 항상 이것을 기억해야합니다.

여러분 개인적으로 인생의 가장 큰 어두운 밤을 보내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을 인간적인 시각에서 본다면 내 인생은 끝이고 절망이고 이제 곧 망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각에서 본다면 인생의 어두운 밤이 지나면 희망의 새벽이 온다는 사실입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이 시대가 영적 정치적 경제적 암흑기입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런 암흑기가운데서도 역사의 주관자가 되시는 하나님께서는 회복의 역사를 하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먼저 기억해야할 것은 이 시대가 아무리 사사시대와 같은 암흑기라 하더라도 하나님은 지금 우리가운데서 살아계시고, 역사하십니다.

//오히려 이 시대가 더 어렵고, 또 개인적으로 우리의 삶이 더 어렵고 힘든 시기일수록 마치 어두움에 비취는 빛처럼 하나님은 우리와 더 함께 하시고, 우리 가운데 더 역사하고 계십니다. 이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문제는 하나님은 지금 이 시대가운데서도 살아계셔서 역사하고 계시는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시는가를 잘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룻기를 통해서 사사시대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함께 하시고 역사하셨는지를 먼저 살펴보아야겠습니다. 특별히 모든 것이 다 허물어진 사사시대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회복의 역사를 하시는가를 살펴보아야겠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사사시대 가운데서 누구를 통해서 회복의 역사를 일으키십니까?

1절에 보시면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거류하였는데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이름은 엘리멜렉인데, 나의 하나님은 왕이시다는 뜻입니다. 또 그의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인데, 그 뜻은 기쁨이란 뜻입니다.

이것을 쉽게 말씀을 드리면 나의 하나님은 왕이시라고 믿는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자신의 삶의 왕으로 섬겼는데,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격자 교회를 떠나서 세상 속에서 살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1절에 거류는 잠시 머물 생각으로 거류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2절에 보시면 거기에 살더니라고 하는 것은 이제 떠날 생각이 없이 머물러 살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4절에 거주했다는 말은 완전히 정착하여 살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당시 사사시대의 신앙생활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사시대의 신앙은 오직 기복주의적인 신앙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목적은 오직 육신적인 부유함에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섬기다가 어려우면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 속으로 갑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라도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사사시대 사람들의 신앙의 목표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떠나고 교회를 떠나서도 잘 살줄 알았는데 결과가 어떠합니까?

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냥 망한 것이 아니라 철저히 망하고 실패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3절에 보시면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나오미와 그의 두 아들이 남았으며라고 합니다. 보통 집안의 가장이 남편인 여기서 보면 누구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하면 나오미입니다. 그래서 나오미의 남편도 죽고, 두 아들도 죽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인에게 있어서 남편이 죽고, 또 두 아들도 죽었다면 그 인생은 완전히 실패한 인생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놀라운 사실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사사시대 회복의 역사를 누구를 통해서 일으키십니까? 하나님을 떠나고 교회를 떠나서라도 잘 먹고 잘 살아보려고 했지만 철저하게 망하고 실패를 경험한 나오미를 회복의 역사를 일으키셨습니다.

그래서 사사시대와 같은 이 시대의 고난은 하나님의 축복의 선물입니다.

또 사사시대와 같은 이 시대의 실패는 회복의 시작입니다.

왜 이 시대의 고난이 하나님의 축복의 선물입니까? 왜 이 시대의 실패가 회복의 시작입니까? 사사시대와 이 시대에 고난이 없는 축복은 마치 멸망을 내려가는 폭주기관차과 같습니다. 사사시대를 보면 그들이 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했다고 하는데, 그들에게 특별한 하나님의 징계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사사시대에는 모든 일을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행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 가운데는 아무 일이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나오미는 어떠합니까? 조금 어렵다 해서 하나님을 떠났는데, 완전히 망했습니다. 실패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나오미는 불행하다고 생각합니다. 완전한 실패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이 시대 완전히 망하고 실패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회복의 역사를 시작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실패자를 통해서 어떻게 회복의 역사를 일으키십니까?

첫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서 실패자를 통한 회복의 역사를 일으키십니다.

1:6절에 (실패한) 여인이 모압 지방에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돌보시다는 말씀은 방문하다”, “주의를 기울이다”, “계수하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목자가 양떼를 보살피기 위해서 양들을 방문하여 주의 깊게 보살피며 한 마리 양이라도 잃어버린 양이 없는가를 계수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하나님께서는 사사시대 이스라엘백성을 양처럼 돌보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양떼인 사사시대 이스라엘이 지금 어떤 모습을 하고 있습니까? 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도 이사야의 말처럼 우리도 다 그릇행하여 각기 제 갈 길로 가는 어리석은 양들이 아닙니까?(53:6).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어리석은 양인 우리들에게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주의 깊게 살펴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혹 우리가운데서 누구라도 사나운 이리에게 물려가지 않았는가? 지금도 우리를 계수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저는 지난주에 과연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가? 과연 하나님께 정말 나와 함께 하시는가? 나의 모습과 우리의 모습을 보았을 때 하나님이 도무지 함께 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보는 가운데 제 눈이 갑자기 환하게 떠졌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우리를 돌보시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악 되고 못나고 실패한 우리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사사시대와 같은 이 시대 하나님께서 어떻게 회복의 역사를 일으키십니까?

회복의 역사의 출발은 절대 우리의 의가 아닙니다. 우리는 룻기를 볼 때 룻의 지극한 효성에 초점을 둡니다. 그래서 지성이며 감천이라고 우리 인간의 의인 효를 통해서 하나님의 회복의 역사가 나타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참된 복음이 아닙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우리 인간의 의가 아니라 우리의 죄악 됨에도 불구하고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내 인생이 실패했다고 생각하십니까? 내게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돌보시는 이 하나님의 사랑의 소식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여전히 사랑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이 시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를 돌보고 계십니다.

//그래서 나오미처럼 사사시대 가운데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신다는 소식을 듣고, 실패의 자리에서 회복의 자리로 나오시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여전히 돌보시고 사랑하신다는 소식을 듣고 하나님께도 돌아가는 자를 통해서 하나님은 회복의 역사를 일으키십니다.

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6. 그 여인이 모압 지방에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 이에 두 며느리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 하여라고 합니다.

회복은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나오미가 있던 원래의 자리는 모압이 아니었습니다. 베들레헴이었습니다. 나오미가 있던 원래의 자리는 모압지방의 이방신이 아니라 그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품이었습니다.

그래서 룻1:22절에 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그의 며느리 모압 여인 룻과 함께 돌아왔는데 그들이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고 합니다.

나오미가 하나님의 사랑의 소식을 듣고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을 때 그때가 보리추수를 시작 할 때였습니다. 보리추수를 시작할 때란 아무 것도 먹을 것이 없을 때, 보리추수가 시작됨으로 작지만 먹을 것이 시작되는 때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그동안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영적은 어두움의 시기가 끝을 보고, 이제 회복이 시작될 때가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회복은 다시 돌아오는데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많은 사람들이 나오미와 같은 실패를 겪으면 낙심하여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나오미와 같이 되면 하나님이 없다고 하면서 이제 더 완전히 세상 속으로 더 들어갑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항상 그들의 경제적인 형편들이 회복되고 육신적인 문제가 해결이 되면 이제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네가 피투성이가 되었어도 하나님 앞으로 나아오라고 말씀하십니다.

네가 실패자가 되어서 사람들 앞에서 얼굴을 들고 나오기 힘들어도 하나님 앞으로 나아오라고 말씀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늘 이 시대는 사사시대와 같은 영적인 암흑기이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이 시대의 교회가운데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 고 하면서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교회를 나오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 물론 무조건 교회에 나오는 것이 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시대 교회가운데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고 하면서 교회에 나오지 않는 것도 불신앙이고 교만입니다. 만일 이 시대의 교회가 서구 교회처럼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하고 부인하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한다면, 우리는 오늘날의 교회에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신다고도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교회가 비록 연약하고 부족하지만, 십자가의 복음을 붙들고 있고,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온전히 믿고 고백하고 있다면, 지금도 이 교회가운데서 하나님이 함께 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것은 먼저 하나님의 교회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또 한 가지 기억해야할 것은 무조건 교회에 나온다고 해서 우리가 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나오는 목적이 과연 어디에 있습니까?

교회를 단순히 일과 사업으로 온다고 한다면 그것은 성전의 마당만 밟고 다니는 것입니다.

또 예배시간에 앉아 있지만, 몸만 앉아 있고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다면 그것도 성전의 마당만 밟고 다니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전마당만 밟고 다니는 사람의 경우에 요한계시록에 보면, 하나님의 심판의 때에 그를 절대 보호해주지 않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이 시간 여러분이 예배의 자리에 오신 것은 단순히 어떤 사람을 보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닙니다. 이 자리에서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날 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 자리에서 진정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만나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나오미가 돌아간 베들레헴은 다윗의 고향이자,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곳입니다. 그래서 나오미가 베들레헴으로 돌아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곳으로 돌아갔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실패의 자리에서 우리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시는 하나님과 예수그리스도께로 돌아감으로 진정한 회복을 맛볼 수 있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세 번째, 하나님께로 돌아가 하나님께 대한 바른 신앙고백을 하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회복의 역사를 일으키십니다.

이렇게 나오미가 베들레헴으로 돌아갔을 때 고향사람들이 “--1:19.이이가 나오미가 아니냐고 합니다. 나오미란 기쁨이란 뜻이라고 했습니다. 그때 1:20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기쁨)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슬픔)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21.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부르느냐 하니라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나오미의 놀라운 신앙고백을 보게 됩니다.

나오미는 그를 기쁨의 여인에서 슬픔의 여인이 되게 하신 분을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사사시대의 사람들이었다면, 나오미와 같은 슬픔을 당하면 하나님은 더 이상 살아계시지 않는다고 하거나 아니면 살아계시더라도 나와 함께 않는 분이라고 하나님을 부인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오미는 그를 기쁨의 여인에서 슬픔의 여인이 되게 하신 분을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내 뜻대로 내 욕망대로 모든 것을 다 이루어주시는 하나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나오미가 고백한 전능하신 하나님은 나오미가 하나님을 떠나서 자기 마음대로 살려고 했을 때 가만히 버려두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나오미에게 있는 모든 것을 따 빼앗아 가서라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도록 하신 하나님을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잘못을 해도 무조건 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을 했을 때 사랑의 채찍으로 우리를 징벌하시고 괴롭게 하시는 하나님을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나오미는 고백하고 있습니다.

정말 놀라운 신앙고백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여기서 전능자로 기록된 말은 헬라어 70인역에서는 히카노스로 번역을 하고 있는데, 그 뜻은 만족자, 충분하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고린도후서 35절에 “--우리의 만족(히카노스)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하고 있는데, 거기서 만족이라는 단어가 히카노스란 말입니다.

그래서 나오미는 그를 완전히 비어 돌아오게 하신 하나님을 히카노스 즉 만족자 충분하신 분 전능하신 분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지금 나에게는 남편도 없고 아들도 없고 내게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지만 나는 하나님한분만으로 만족한다는 뜻입니다. 나에게 남편이 없고 아들도 없고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지만 나는 하나님 한분만으로 충분하다는 뜻입니다.

또 이 고백은 나를 기쁨의 여인에서 슬픔의 여인이 되게 하신 하나님은 전능하셔서 능히 나를 다시 기쁨의 여인이 되게 하실 것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나와 내 가정을 완전히 망하게 하신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셔서 언젠가는 모든 것을 회복시켜 주실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혹시 여러분 내 마음대로 살다가 실패하셨습니까? 그렇다면 나를 망하게 하신 하신 분도 전능하신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 내게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나는 아무 것도 없지만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한분만으로 만족하고 충분하다고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기쁨을 빼앗아 가시고 슬픔을 주셨습니까? 그렇다면 나의 슬픔을 변화시켜 주셔서 기쁨이 되게 하실 분은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 한분밖에 없음을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또 나를 완전히 망하게 하고 실패하게 하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언젠가는 나를 다시 흥하게 하시고, 회복시켜 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회복의 역사는 작은 일에서부터 시작합니다.

20:1,2을 보면 이에 모든 이스라엘 자손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와 길르앗 땅에서 나와서 그 회중이 일제히 미스바에서 여호와 앞에 모였으니 2. 온 백성의 어른 곧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어른들은 하나님 백성의 총회에 섰고 칼을 빼는 보병은 사십만 명이었으며고 합니다.

여기서 보면 사사시대 이스라엘백성들이 미스바에 모여서 구국대성회를 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이스라엘백성의 모든 어른들과 장정이 다 모였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미스바 구국대성회를 모여서 한 일을 자신의 형제인 베냐민 지파를 죽여서 없애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하고 사사기 마지막에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21:25)”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사시대를 회복하시기 위해서 큰 자를 사용하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 많은 사람들이 동원된 집회를 통해서 회복의 역사를 하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룻기를 보면 하나님은 큰 자가 아니라 작은 자를 통해서 회복의 역사를 일으키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 하나님은 많은 사람들이 모인 큰 집회를 통해서 회복이 역사를 일으키시는 것이 아니라 작은 자의 작은 일을 통해서 회복의 역사를 일으키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나오미를 따라온 룻의 이삭줍기입니다.

사사기를 통해서 보았듯이 하나님께서는 큰 사람, 많은 사람들이 모인 집회를 통해서 사사시대를 바꾸는 회복의 역사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놀라운 신앙고백을 하는 나오미를 따라온 룻을 통해서 회복의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룻이 나오미를 따라온 것이 나오미의 신앙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오미의 신앙을 본받은 룻은 과부의 몸으로, 시모를 섬기기 위해 이삭줍기를 했습니다. 이삭을 줍다가 우연히 보아스를 만납니다. 그 보아스를 통해서 다윗의 할아버지인 오벳을 낳습니다. 그리고 그 후손인로 다윗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정치적인 문제가 회복이 됩니다. 또 그 후손으로 예수님이 나오심으로 영적인 문제가 회복이 됩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해주고 있습니까?

우리는 대형교회가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사사시대를 회복시키는 역사를 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또 우리는 이 세상에서 성공한 큰 자가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은 절대 우리를 통해서 사사시대를 회복시키는 역사를 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 잘못되었습니다. 하나님은 큰 자, 세상에서 성공한 자, 큰 일이 아니라 작은 자, 세상에서 실패한 자, 그리고 그 실패한 자의 작은 일을 통해서 오늘도 회복의 역사를 일으키고 계십니다. 이 세상은 부모님들이 연세가 많으시다고 돌아보지도 않는데,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 연로하신 부모님을 지극정성으로 섬기는 그 작은 일을 통해서 회복의 역사를 일으키고 계십니다. 교회에서 큰 직분은 아니더라도 작은 교사의 직분을 맡아서 어린 한 영혼이라도 예수님께서 돌아오기를 눈물로 기도하는 그 작은 일을 통해서 지금도 회복의 역사를 일으키고 계십니다. 교회에서 큰 일이 아니더라도 작은 휴지조각이라도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줍는 그 작은 일을 통해서 하나님은 지금도 회복의 역사를 일으키고 계십니다.

내 안에 복음의 열정이 있어서 단 한 사람에게라도 이 복음의 열정을 심어주고 심어서 단 한 사람만이라도 붙들고 말씀을 전하는 그 작은 일을 통해서 하나님은 지금도 회복의 역사를 일으키고 계십니다. 특별히 하나님은 오늘도 실패자를 찾고 계십니다. 실패했지만 하나님을 전능하신 분으로 믿고 고백하는 자를 찾고 계십니다. 그리고 실패했지만 하나님을 믿음으로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맡겨주신 작은 일에 충성하는 자를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작은 자의 작은 일을 통해서 회복의 역사를 일으키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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