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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경연구/고린도전서

‘그리스도를 본받음’에 관하여(1)(김세윤교수)

by 금빛돌 2014. 12. 12.

 

- 20042월호

 

Imitatio Christi

그리스도를 본받음에 관하여(1)

고린도전서 111절을 중심으로

 

바울은 우상 음식을 논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본받고 있는가(고전 8~10)

 

고린도전서 111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의 모방자라는 사실에 입각해 고린도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신을 본받으라고 요구한다. 그러므로 이 구절에서 바울은 사실상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본받으라고 요구하고 있는 셈이다(참고. 고전 4:16~17; 3:10,17; 살전 1:6). 바울이 그리스도를 독자들이 따라야 할 본보기로 제시할 때도(15:1~3,7; 고후 8:9; 2:5~8) 역시 그와 동일한 개념을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사료된다. 그렇다면 바울 자신은 그리스도의 무엇을 본받았는가? 그는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모방했는가? 바울이 독자들에게 본받으라고 요청한 것은, 그리스도의 어떤 본보기인가?

 

1. 비평적 개신교 학계의 축소주의

바울이 말한 imitatio Christi(그리스도 모방)가 성육신과 죽음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자기 희생만을 염두에 둔 것이지 역사적 예수님의 가르침과 모범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라는 주장이, 지금까지 비평적 개신교 학계가 보여준 경향이었다. 일례로 오토 머크(Otto Merk)는 그의 에세이에서, 바울이 그리스도를 본받으라고 요구한 것은, “아무도 모방할 수 없는 십자가의 사건선재적 존재에 대한 모방예수의 오심이라는 그 사건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가리키는 것이지,” “지상의 예수에 대한 모방, (그리스도의) 언행에 입각한 그의 행동의 모방을 말한 게 아니라고 주장한다(”Nachahmung Christi: Zur ethischen Perspektiven in der paulinischen Theologie,” in Neues Testament und Ethik, 201). 이러한 머크의 견해는 베쯔(H. D. Betz)의 그것과 일치한다. 베쯔에 따르면, “바울이 예수의 생애로부터 끌어내 제시하는 구체적인 요소들은 선재적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에 못 박힘 및 부활에 관한 사실을 가리키는 것이지, 복음서에서 이야기하는 것들과 흡사한, 예수의 삶의 세부적인 편린들을 뜻하는 게 아니며,” 바울에게 있어서 기독 모방은 결코 역사적 예수의 윤리적, 도덕적 모범을 지향하지 않는다고 한다(H. D. Betz, Nachfolge und Nachahmung Jesu Christi im Neuen Testament, 161).

20세기 후반기에 나온 기독모방에 관한 작품들을 검토하면서 머크는, 이 주제와 관련해 역사적 예수님의 가르침과 본보기를 중요하게 보려는 시도들도 존재했음을 지적하지만(E. Larsson, W. de Boer, D. M. Williams, W. G. Kuemmel ), 그 자신은 베쯔(H. D. Betz), (N. H. Dahl), 슈라게(W. Schrage), 퍼니쉬(V. P. Furnish), 콜랑쥐(J. F. Collange), 슐츠(A. Schultz) 등과 같은 노선을 확고히 취한다. 이들 모두는, 본질적으로 다음과 같은 불트만(R. Bultmann)의 명제였던 것을 다소간 되풀이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모델(Vorbild)이 아니다그리스도가 서로에 대한 섬김의 모델이 될 수는 있다. 그러나 시종일관 모델로 있는 이는 선재적 존재이다”(불트만, “Die Bedeutung des geschichtlichen Jesus fur die Theologie des Paulus,” in Glauben und Verstehen 1, 206).

이런 명제에는 종종, 바울이 예수의 가르침 가운데 많은 부분을 몰랐거나 사용하지 않았으며 예수의 역사적 위인(爲人)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주장이 수반되기도 한다. 물론 불트만도 역시 이런 견해를 적극 지지했다. 머크의 주장도 그렇다: “공관복음 전승이 바울의 글에서 명백하게 입증될 수 없다는 게, 그 반대 견해보다는 가일층 안정적인 명제다. 바울의 글에 소수의 헤렌보르테(Herrenworte: 주님의 말씀)가 등장하긴 하지만, 바울은 현재 우리에게 공관복음 전승으로 알려져 있는 흐름을 알지 못했다”(같은 책, 205). 퍼니쉬는, “지상 예수의 가르침이 바울의 구체적인 윤리적 가르침에서 구약성경만큼 핵심적인 역할을, 혹은 적어도 그처럼 분명한 역할을 수행하지 않은 것 같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표하기도 한다(그의 책, Theology and Ethics, 55). 퍼니쉬에 따르면, 헤렌보르테(Herrenworte)를 인용하는 극소수의 사례에서 바울이 이런 말씀들을 예수의 말씀으로 지칭하지 않고 주님의 말씀으로 지칭했다는 사실은 지극히 중대한문제다. 왜냐하면 이것은, “바울이 지상의 선생인 예수의 권위에 호소하는 게 아니라교회의 주님이신, 부활하시고 통치하시는 그리스도의 권위에 호소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같은 책, 56). 나아가 퍼니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이 또한 주목할만하다고 보았다: “그리스도 모방을 말한 구절들(고전 4:16~17; 11:1; 3:17; 살전 1:6~7; 2:14) 가운데 어느 곳에서도 (바울은) 지상(地上) 예수의 특정 특질들을 지적하며 그것들을 흉내내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최종적으로 호소하는 대상은 언제나, 십자가에 못박히고 부활하신 주님의 그 겸손하고 자기 희생적이며 순종적인 사랑이라고 생각된다”(같은 책, 223). 이 마지막 사항에 관해서는 머크도 동의한다: “언급된 구절들 가운데 어느 것도 예수의 말씀(심지어 부활하신 후의 말씀이라도)과 연결되어 있지 않다”(그의 책, 205).

그러나 슈라게는 이 점에 관해 약간 다른 견해를 제시한다. 그도 역시 다음과 같은 점을 강조하기는 했다: “바울은 기독교적 삶의 구체적인 방향제시를 위해 예수의 역사적 생애와 사역을 거의 끌어대지 않았다. 따라서 예수를 모델로 간주하고 예수의 삶을 복사하거나 모방하고자 하는 시도는 모두 바울의 식()이 아니다.” 하지만 슈라게는 곧장 이렇게 부언한다. 이 모방 구절들이 보여주는 바에 따르면, 성육신 및 십자가 죽음에서 나타난 그리스도의 자기 드림은 어떤 성향을 위한 외형적 자극(Gesinnungsimpuls)을 전달해 주는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기독교적 삶을 위한 모종의 근본 지침을 제시해 준 것이었다”(그의 책, Ethik des Neuen Testaments, 198~199). 나아가 슈라게는 예수님의 말씀들이 바울에게도 중요했다고 역설한다:

 

예수의 삶에 관한 것을, 그의 설교에 그대로 적용해서는 안된다. 우리가 예수의 말씀의 의의에 관해, 지상적 인간으로서 혹은 윤리적 모델로서의 예수의 의의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부정적 판단을 내릴 수는 없다헤렌보르테(Herrenworte)에 관한 직접적 언급은 극히 드물다. 그럼에도 바울이 예수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그리고 거기에 어떤 중요성을 부여하고 있는지를 우리가 간과하면 안 된다.(W. Schrage, Ethik des Neuen Testaments, 199).

 

계속해서 슈라게는, “확실히 바울은 그 말씀의 발언자(예수님)와 그 말씀을 분리시켜 생각하지 않았다고 말하며, 바울이 유전된 헤렌보르테를 지상 예수의 말씀이 아닌 승천하신 주님의 말씀으로 이해했다는 불트만의 주장에 제동을 건다. 슈라게에 의하면 고린도전서 1123절 이하의 말씀은, “바울이 예수의 지상 생활이라는 단순한 외형적 ‘Dass’(사실)에 만족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어떤 이야기, 즉 내러티브 요소들과 특히 예수의 말씀들을 굳게 붙잡았다는 증거다. 슈라게는 말한다: “고린도전서 1123절 이하를 포함해 인용된 헤렌보르테가 모두 그리스도인의 생활 방식과 결부되어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어 슈라게는 바울이 사랑의 명령이라는 관점에서 이 말씀들을 이해했다고 지적하면서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그 만큼 바울의 사고에서는, 예수의 삶의 모범적 성격과 예수의 말씀 간에 심원한 일치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같은 책, 201~202).

그렇다면, 바울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관한 가르침에서 예수의 역사적 삶과 사역에 의존하지 않았다는 불트만 학파의 주장을, 슈라게가 그토록 강력히 지지한 것은 어떻게 된 노릇인가? 필자가 보기에, 슈라게의 이런 양면성은, 바울과 역사적 예수의 상호 관계 문제에 대해 일부 학계에 만연해 있던 신학적 편견의 힘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된다. 이런 편견에 맞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문제들을 연구해볼 필요가 있다: (1)바울은 그리스도 모방(imitatio Christi)에 대한 요구에서 성육신과 십자가상 죽음이라는 그리스도의 자기 내어줌만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가, 아니면 역사적 예수의 모범과 가르침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던가? (2)만일 후자가 사실이라면, 바울은 독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만을 모방하라고 요구했는가, 아니면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에 포함된 기타 일부 요소들까지 본받으라고 요구했는가?

 

2. 고린도전서 81절에서 111절에 대한 관찰

성육신과 죽음을 통한 그리스도의 자기 내어줌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까지도

111절에서 바울은 1033절에 진술한 자신의 모범을 본받으라고 고린도 교인들에게 요구한다: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 그가 보인 모범은 사실 그리스도를 본받은 결과다(11:1 하반,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그러므로 1033절에 진술된 모범은 결국 그리스도의 모범이다. 그렇다면, 이 문장(33)에서 바울은, 예수님의 삶과 죽음이 타인들을 위한 희생이었다고 묘사하고 있는 것인가? 이 구절은 판타(”모든 사람을”)와 폴론(”많은 사람의”)을 공히 가지고 있고 대조법(~이 아니라 ~이다)의 문장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마가복음 1045(20:28. 또한 딤전 2:5~6도 보라)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을 아주 분명하게 연상시킨다. 후자도 그런 특성들을 가지고 있다. 양자 간의 긴밀한 평행성에 주목하라:

고전 10:33 모든 사람을(판타)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NOT BUT)

많은 사람의(폴론)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모든 사람/ 많은 사람]로 구원을 얻게 하라.

 

10:45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NOT BUT)

섬기려 하고

[10:44, 모든 사람의, 판톤 종이 되어야]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폴론)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고린도전서 919~22절과 1032~33절 사이에도 긴밀한 평행성이 존재한다. 이 양자간의 평행성은 고린도전서 1033절과 마가복음 1045절간의 평행성에 관한 우리의 관찰에 힘을 보태준다. 고린도전서 919절과 마가복음 1044~45절 사이에도 긴밀한 유사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고전 9:19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10:44~45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섬기려 하고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이 두 군데서 동일한 개념과 어휘가 사용되었음에 유의하라: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모든 사람의 종이 됨)

 

이와 같이, 퍼니쉬나 머크의 주장과 달리 바울의 글은 지상 예수님의 말씀(10:44~45)을 반향하고 있으며 그리스도 모방을 말하는 문맥에서 그리스도의 삶의 어떤 특질을 인유(引喩)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논하는 현안과 관련해 이것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는 무엇인가? 무엇보다도 그것은, 슈라게가 주장하듯, 고린도전서 111절에서 바울이 예수님이 아닌 그리스도를 본받으라고 언급한 이상 그가 지상 예수님을 모방의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는 뜻이다. 나아가, 우리는 바울이 마가복음 1044~45절의 말씀을 지상 예수님의 말씀이 아닌 부활하신 주님의 말씀으로 이해했다고 생각하기도 어렵다. 설사 바울이 부활하신 주님을 역사적 예수와 분리시켜 생각했다는 비현실적 견해가 다소간 용납된다 하더라도, 바울이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자기 목숨을 주신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메아리로 되울리면서, 자기 목숨을 죽음에 내어준 역사적 예수를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부활하신 주님만을 생각했다고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면, 바울은 여기에서 성육신과 죽음을 통한 그리스도의 자기 내어줌 만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가? 두말할 나위 없이 바울은 주로 이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바울이 예수님의 인생의 두 순간, 성육신과 죽음만이 아니라 역사적 예수의 기타 요소들도 염두에 두었다는 시사점들도 있는 것이다.

 

자기 내어줌에 관한 말씀뿐만 아니라 거치는 것(Stumbling Block)에 관한 말씀까지도 고린도전서 1032절에서 바울은 독자들에게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라”(아프로스코포이기네스쎄)고 권면한다. 이 구절은 사실, 33절의 긍정적 진술에 대한 부정적 서술이다. 그러므로 이 두 절을 합하면 사실상 다음과 같은 말이 된다: “누구에게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라.” 이 충고의 앞 문맥에 유의하라. 이 말씀은, 고린도전서 8~10장의, 우상 음식 먹는 문제에 관한 주의 깊은 긴 논의 끝에 나온다. 그러므로 32~33절은 이 논의의 첫 단계 결론부에 나오는 그의 진술을 곧장 연상시킨다(8:13): “그러므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스칸달리제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스칸달리소).” 바울이 자신의 이런 모범을 제시한 것은,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프로스콤마)이 되는 방향으로 자기 권리와 자유를 사용하지 말라는, 고린도교회의 지식 과시자들(knowledge-boasters)에게 준 충고를 강화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분명한 것은, 바울이 프로스콤마/프로스콥테인과 스칸달론/스칸달리제인을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은 로마서 1413절에 의해 확증된다: “부딪힐 것(프로스콤마)이나 거칠 것(스칸달론)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하라”(또한 롬 14:20-21도 보라). 스칸달론/스칸달리제인이 성경 헬라어(70인역본과 신약성경) 밖에서 드물게 나타나지만 예수님 전승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개념들이 긴밀하게 상응한다는 이유뿐만 아니라 이런 이유 때문에도, 고린도전서 813절과 1032절은 물론 로마서 1413절 역시, “이 소자들(호이 미크로이) 중 하나라도 실족케 하지(스칸달리제인) 말라, 제자들에게 준 예수님의 준엄한 경고를 반향(反響)하고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9:42~50, 18:6~9, 17:1~2; 참조. 17:24~27). 바울은 아마 고린도전서 8~10장과 로마서 14~15장의 약한그리스도인들과, 예수님의 말씀에 나타난 소자들(호이 미크로이)을 동일시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 본받기에 대해 이야기하는 문맥에서 바울이, 예수님의 자기 내어줌(10:44~45과 그 평행절)에 관한 말씀뿐 아니라 약한신자들을 실족시키지 말아야 한다는(9:42~50과 그 평행절) 예수님의 가르침까지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이 분명하게 암시하는 바는, 바울이 남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을 내어주신 예수님만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 책임 있는 주의 깊은 처신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예수님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 모방에 관한 바울의 말은, 성육신과 죽음을 통한 그리스도의 자기 드림 행위뿐만 아니라 타인들을 위해 책임 있게 행동할 것에 대한 그리스도의 가르침까지도 염두에 둔 것이었다. 즉 바울의 말은, 그리스도의 자기 내어주기 행위를 따르는 것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도 그리스도 본받기에 내포되어 있다는 뜻이었다.

 

주로 예수님의 가르침과 예수님의 사랑 행위

물론 고린도전서 1032~33절에서 바울이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은 주로 타인 사랑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위였다. 바울의 말인즉, 고린도교인들이 바울 자신이 그러하듯,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을 내어주신 예수님의 사랑 행위를 본받아야 하고, 타인을 사랑할 것(넘어지게 하지 말고)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은, 바울이 고린도전서 1032~33절에서 제공하는 본보기가, 고린도전서 919~22절에서 제시한 그 자신의 사도적 본보기에 대한 요약적 재진술이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이 두 단락을 함께 취합해 보면, 바울의 말이 다음과 같은 뜻임을 알 수 있다: 유대인들 혹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거치는 자가 되지 않고 그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바울 자신은 유대인 같이혹은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되었으며, 헬라인들 혹은 율법 없는 자들에게 거치는 자가 되지 않고 그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율법 없는 자들에게 율법 없는 자같이 되었고, 나아가 하나님의 교회에 혹은 교회의 약한지체들에게 거치는 자가 되지 않고 그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약한 자들에게 약한 자가 되었다. 이 모든 행위는,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이익을 희생시키는 행동이었다. 즉 자신의 자유를 희생시키고 자신을 모든 사람의 종으로 만드는 행위였다. 그가 이런 온갖 일을 행한 것은, 그들을 얻기위해서, 구원하기위해서였다. 두 군데 구절들 간의 이런 긴밀한 상응에 의거해, 우리는 921절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율법1033절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모범 간에도 상응이 존재함을 알아야 한다: 즉 바울이 자신을 적응시켜가며 자신의 유대인 청중과 헬라인 청중, “약한그리스도인 청중을 기쁘게 하고자 한 것은,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르는 행위 혹은 그리스도의 율법을 준수하는 행위였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율법에 관한 언급(고전 9:19~22)에서 바울은 분명 사랑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듯이, 그 구절들과 그 평행절들인 1032~33절은 예수님의 대속물에 관한 말씀(10:45과 그 평행절)과 실족케 함에 관한 말씀(9:42~50과 그 평행절)을 반향하고 있다. 그리고 이 두 종류의 예수님 말씀은 타인들을 향한 사랑을 주된 요점으로 담고 있다. 갈라디아서 62절에서 바울이 말한 그리스도의 법개념도 역시 예수님의 사랑 명령(12:28~31과 그 평행절)을 염두에 둔 것이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는 바울의 권면(6:2)은 그 이전에 나온,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다”(5:14)는 진술과 병행해 이해돼야 하기 때문이다(참조. 13:8~10). 그렇다면 고린도전서 919~22절에서 바울이 말한 그리스도의 율법개념도 역시, 대속물 및 실족케 함에 관한 말씀에 내포된 예수님의 사랑 교훈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 명령 그 자체를 염두에 둔 것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고린도전서 1023절에서 111절까지 내용은 분명, 고린도전서 8~10장의 논증에 대한 요약이자 결론부일 것이다. 사실 여기에서 요약한 요점들은 주로 8~9장에서 진술한 내용이다. 이런 사실에 입각해 우리는, 고린도전서 8-10장에 나타난 바울의 주된 관심사가 고린도교회의 지식 과시자들에게 연약한 형제자매들의 유익을 위해 에이돌로쒸타(”우상의 제물”)를 먹을 권리와 자유를 포기하도록 권면하는 것이었다고 이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고린도전서 101~22절이 에이돌로쒸타를 삼가야 할 것에 관한 추가적 논증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참조. Horrell, “Theological Principle,” 100~102).

그러나 호렐(Horrell)의 다음과 같은 진술은 지나치게 멀리 나아간 것이다: “이 결론 단락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101~22절에 대한 재언급이 없다는 것이다. 모든 되풀이와 반복은 8장 및 9장과 관련되어 있다.” 사실은 1031절이 101~22절의 관심사에 대한 요약으로 사료된다. 우상숭배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행위인 이상, 바울이 우상숭배에 대해 길게 경고한(10:1~22) 후 이런 사고를 1031절에서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 할 의무에 관한 진술과 결부시키지 않았으리라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우리는 바울이 1031절에서 고린도 그리스도인들에게, 음식을 먹을 경우 연약한 형제자매들의 관심을 적절히 존중함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뿐만 아니라 우상숭배의 상황에서 에이돌로쒸타를 먹지 않음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권유하고 있다고 이해해야 한다. 그렇다면 1031절은, 예수님의 이중적 사랑 명령 가운데 첫 번째 요소에 대한 메아리를 울려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네 존재 전체를 다해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12:30과 그 평행절; 참조. 고전 8:6). 마찬가지로 같은 이 문맥에서(고전 10:28, 32~33; 참조. 9:19~22) 우리는 사랑 계명의 두 번째 요소(이웃 사랑; 12:31과 그 평행절)에서 울려오는 메아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해석은, 1031~33절의 결론적 요약이 81~3절에 나오는 바울의 명제 진술과, 수미쌍관(inclusio, 혹은, 괄호법)의 이중적인 전후대칭(chiastic) 구조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로 강력한 뒷받침을 받는다. 사랑은 덕을 세운다는(오이코도메이, 8:1) 말씀과 아무도 걸려 넘어지게(아포스코포이) 하지 않는 자기희생적 사랑에 대한 요구(10:32~33) 사이에 상응이 존재하고, 83절의 하나님을 사랑하기와 1031절의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간에 상응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유의하라. 바울은, 81~3절의 개시 단락에서 에이돌로쒸타 문제와 관련해 참으로 중요한 것은 지식이 아니라 사랑, 즉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라는 명제를 진술한 후, 1031~33절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요구와 함께 장문(長文)의 논의를 종결시킨다.

따라서 1031절과 32~33절에는 예수님의 이중적 사랑 계명의 두 요소가 나란히 나타나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1031~33절의 평행 구절인 919~22절에서 그리스도의 율법을 말할 때 바울은 예수님의 이중적 사랑 계명의 두 요소를 공히 염두에 두고 있었다고 우리가 추론할 수 있다.

부연하면, 1023절에서 111절은 8~9장의 주된 관심사를 강조하면서, 8~10장 전체를 요약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 결론적 요약의 구조는 다음과 같다:

 

* 10:23~30, 8~9장의 요약: 아디아포라(adiaphora) 문제에 관한 그리스도인의 자유, 그러나 이웃 사랑을 위해 그 자유를 희생해야 할 의무.

* 10:31, 10:1~22의 요약: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 우상 숭배를 피하라(특히 10:14) ~ 8:3과 수미쌍관.

* 10:32~33, 8~9장 요약의 되풀이(특히 9:19~22을 연상시킴): 타인들을 위해 자신의 유익을 희생시켜야 함 ~ 8:1과 수미쌍관.

* 11:1, 10:32~33의 요약 및 전체에 대한 총요약: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그리스도인의 자유.

 

8:1~310:31~33을 결부시킨, 이중적 수미쌍관의 전후 대칭 구조는 다음과 같다:

 

A 8:1

B 8:2~3

B' 10:31

A' 10:32~33

 

음식법/결례(潔禮)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까지도

 

한편, ‘그리스도의 율법이라는 개념 속에는 사랑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 이상의 것이 내포되어 있다고 사료된다. 바울이 이 개념을 모세의 율법과 상호 대비시키고 있는 고린도전서 919~22절에서 이 점이 엿보인다. 바울은 자신이 더 이상 “(모세의) 율법 아래있지 않고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어떤 면에서 그리스도의 율법은 모세의 율법과 다른가(그러나 P. J. Tomson은 양자간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본다)? 사랑의 계명 하나만을 가지고 본다면 두 율법 간에는 대조적 차이가 없을 것이다. 모세의 율법도 역시 사랑의 명령, 즉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세의) 율법 아래 있지 않은 자로서,” 그러나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자로서, 자신을 헬라인들(“율법 없는 자들”)에게 순응시킨다는 바울의 말은, 그리스도의 율법이 그러한 순응을 허용하는 반면 모세의 율법은 허용하지 않는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바울의 이 진술을 담고 있는 문맥, 즉 에이돌로쒸타를 먹는 문제에 관한 논의를 고려해 볼 때 우리는 바울이 여기에서 이웃 사랑을 넘어서서 음식법/결례 문제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다고 추정해야 할 것이다. 만일 바울이 바리새인 시절에 했듯이 다양한 음식법/결례를 담고 있는 모세의 율법을 지키기 원했다면, 지금 하고 있는 것처럼 자신을 이방인들에게 적응시킬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모세의 율법에 매여 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율법은 음식법/결례 문제에서 이방인들에 대한 적응을 금하는 게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율법에서 무엇이 바울에게 모세 율법의 음식법/결례를 무시하도록 허용했는가? 오로지 이웃 사랑의 원리(즉 이방인을 기쁘게 하고 구원하기 위한 이방인에 대한 사랑) 그 자체만을 가지고 바울이 이방인들에 대해 아노모스(율법 없는) 자로 처신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즉 이웃 사랑 그 자체만으로 이방인들을 위해 음식법/결례를 무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바리새적인 결례 이해를 견지한다면 그가 더 높은 원칙(즉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위해 모세의 율법에 규정된 하나님의 정결 규례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추론의 노선이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가? 바울은, ‘그리스도의 율법이 사랑의 계명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모세 율법의 음식법/결례를 불필요하게 만든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율법에 관한 바울의 언급 속에는, 사랑의 명령에 관한 강조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음식법/결례를 무시하셨다는 사실까지도 내포되어 있다. 그런 의미가 있었기 때문에 바울은 그리스도의 율법에 따라, “율법 없는 자 같이되어, 즉 모세 율법의 음식법/결례를 무시하며, 자신을 이방인들에게 적응시킬 수 있었다. 이런 결론은 음식법/결례에 관한 예수님의 판결과 일치한다(7:15, 15:11). 예수님의 이 비유 말씀에 내포된 의도를 마가는 정확하게 해석한다: “하심으로 모든 식물을 깨끗하다 하셨느니라”(7:19).

로마서 1414절과 20절에서 바울이 예수님의 이 재정(裁定)을 인유(引喩)하고 있다는 것은 널리 인정되는 사실이다. 무엇이든 먹는 강한자와 채소만 먹는 연약한자 간에 일어난 로마교회의 논쟁을 다루면서(14:2,21)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준 바와 매우 유사한 조언을 로마 교인들에게 전해주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고린도전서 1032절에서와 마찬가지로(참조. 또한 8:13) 로마서 1413절에서도 바울은 로마인들에게 부딪힐 것(프로스콤마)이나 거칠 것(스칸달론)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하라고 권한다. 고린도전서 87~13; 919~22; 1025~33절에서 고린도의 지식 과시자들에게 연약한형제들을 파멸시키지 않도록 혹은 그들이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에이돌로쒸타를 먹을 수 있는 자유와 권리를 희생하라고 충고했듯이, 로마서 1413~23절에서도 바울은 로마 교회의 강한자들에게 연약한형제들을 파멸시키지 않도록 혹은 그들이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무엇이든 먹을 수 있는 권리와 자유를 희생하라고 충고한다. 고린도의 지식 과시자들에게 에이돌로쒸타를 먹을 수 있는 권리”(엑수시아, 고전 8:9, 참조. 10:23) 혹은 자유”(엘류쎄리아, 참조. 고전 9:1,19)가 있음을 인정하듯이 바울은 로마의 강한자들에게도 무엇이든 먹을 수 있는 권리와 자유가 있다고 상정한다. 그들이 이런 자유와 권리를 희생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위해 죽으신 형제자매들에 대한 사랑의 발로다(14:15; 고전 8:11). 로마서 14장에서 바울은 이런 입장의 근거를 제시한다: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만물이 다 정하되”(14, 20).

존 바클레이(John Barclay)는 이 선언의 위대한 의의를 깊이 인식하고 있다: “이것은 바로, 유대 율법의 가장 민감한 차원들 가운데 한 가지에 대한 근본적인 거부이다.” 바클레이는 바울이 이를 어떤 식으로 거부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도 주의를 요구한다: “여기에서 관찰해야 할 중요한 점은, 바울이 율법의 보다 높은 원리에 의거하거나 율법에 대한 우의적(寓意的) 해석에 입각해 판단을 내리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바클레이에 따르면, “바울이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표명하면서 보이는 확신과 솔직함은 소스라칠 정도로 놀랍다”(그의 글, “’Do We Undermine the Law?’ A Study of Romans 14.1~15.6,” in Paul and the Masaic Law, 300~301). 로마서 1414, 20절의 진술이 혁명적 내용을 담고 있으며 그 진술이 깜짝 놀랄 만한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바클레이의 예리한 관찰은 찬사를 받아 마땅하다. 율법에 대해 특히 음식과 정결 규례에 대해(참조. 7:1~5과 그 평행구절들!) 열성적이었던 옛 바리새인의 입에서(1:13~14; 3:5~6) 이런 진술이 나왔다는 사실을 고려해 볼 때, 그 진술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드(C. H. Dodd)처럼 이렇게 물어야 마땅하다: “도대체 (바울은) 무슨 근거로 이런 원칙을 천명하는가?” 바클레이에 따르면, 마가복음 715~19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이 그 배후에 놓여 있을 가능성이 있지만 바울은 여기에서 예수님을 율법의 해석자로서 제시하려 하지 않았다”(같은 면). 그러나 다드에 의하면,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한다”(14:14)는 바울의 문장은, 자신의 이 선언이 마가복음 715~23절과 같은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에 입각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지적한 것이다. 바울이 여기에서 예수님의 말씀과 긴밀하게 상응하는 놀라운 진술을 하면서 주 예수를 들먹인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다드의 해석은 일리가 있다.

바울이 로마서와 고린도전서에서 본질적으로 동일한 음식 문제에 관해 기본적으로 동일한 조언을 주면서, 예수님의 말씀(7:15)을 인유(引喩)한 의의는 무엇인가? 두 서신에서 제기한 문제들이 상호 유사하고 이 문제들에 대한 바울의 논의가 양 서신 간에 유사하다는 사실 외에도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로마서가 고린도전서 기록 2년 후에 고린도로부터 발송되었다는 점이다. 이런 사실들은, 바울이 로마서 14~15장에서와 마찬가지로 고린도전서 8~10장을 기록할 때도 마가복음 715절의 예수님 말씀을 지침으로 삼았다는 암시일 것이다. 앞에서 이미 보았듯이, 고린도전서 919~22절과 1032~33절을 면밀히 관찰해보면 마가복음 715절 같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바울이 염두에 두고 있었음이 드러난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8~10장에서 바울은 자신이 예수님의 가르침(7:15)에 의존하고 있음을 묵시적으로 보인 후, 로마서 14~15장에서 이를 명백히 보여주었다고 우리가 추론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물론, 예수님은 마가복음 715~23절에서 표현된 바와 같은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세리들,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실 수 있었다(2:15~17과 평행절; 11:19/7:34; 15:1~2; 19:1~10; 참조. 21:31~32; 7:29). 하나님의 나라를 잔치의 은유로 자주 설명하면서(8:11/7:19; 22:1~10/14:16~24; 15:11~32; 기타) 주님은 하나님나라에로의 초대를 받아들인 죄인들과 직접 잔치를 즐김으로써 자신의 사역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예기적(豫期的)으로 실현되었음을 실증하셨다. 마가복음 715절에 나타난 음식법/결례에 대한 예수님의 재정(裁定)을 바울이 알고 있었다면 분명 그는 그런 재정의 직접적 시범이었던 예수님의 이 색다른, 악명 높은 거동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음식법/결례 문제에 관한 그리스도의 자유도 본받으라

사실이 그렇다면, 고린도전서 8~10장에서 에이돌로쒸타(“우상의 제물”) 문제를 다루면서 바울은 예수님의 이중적 사랑 계명뿐 아니라 음식법/결례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도 따랐다고, 그리고 그리스도를 본받는다는 개념에서 그는 타인에 대한 그리스도의 자기희생적 사랑뿐 아니라 음식/정결 규례에 대한 예수님의 얽매임 없는 자유로운 입장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다고 우리는 결론을 내려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본받되, 그의 가르침(10:45와 평행절; 9:42~50과 평행절; 12:28~34와 평행절) 및 자기 내어줌의 본보기(죽음)와 아울러, 음식/정결 율법으로부터의 해방에 대한 그리스도의 가르침 및 본보기(죄인들과의 연회)까지도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음식물과 정결 예법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셨던 그리스도의 모범을 본받았으므로 고린도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고전 10:25), 또한 이교도 이웃의 초청을 받아들일 때 너희 앞에 무엇이든지 차려 놓은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고전 10:27) 말할 수 있었다. 고린도 시장에서 팔리는 음식물의 대부분은 아니라 하더라도 일부는 에이돌로쒸타일 가능성이 있었으며 또한 이교도 이웃의 식탁에 차려진 음식물 가운데 적어도 일부는 에이돌로쒸타일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므로 이 조언은 모든 음식이 즉 에이돌로쒸타까지도 깨끗하다는(참조. 14:14,20) 시각과, 그리스도인들이 더럽혀짐을 염려하지 않고 불신자들과 함께 자유로이 교제해도 좋다는(참조. 고전 7:12~14) 시각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런 시각들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바울은, 고린도의 지식 과시자들에게 우상의 신전에서도 즉 (아마) 이교도 신전에서 열린 사적인 잔치 자리에서도(두말할 필요 없이 에이돌로쒸타를) 먹을 권리가 있음을 인정할 수 있었다. 물론 그런 행위가 연약한형제들을 걸려 넘어지게 할 것이라는(고전 8:10) 근거 하에 그들의 이 권리 행사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지만 말이다. 깜짝 놀랄 정도로 자유로운”(liberal) 이 가르침을 베풀며 바울은, 음식법/결례 문제에서 모세의 율법과 입장이 다른 그리스도의 율법에 간접적으로 호소하며(고전 9:20),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모범에 호소한다(고전 11:1).

 

사랑의 우선성

한편, 바울은 고린도전서 8~10장에서,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모범에 입각한 그리스도인의 자유보다, 그리스도인의 사랑 의무를 더욱 강조했다. 바울이 이 의무를 요구했던 것은 분명, 자기 권리와 자유에 대한 고린도교회 내 지식 과시자들의 공격적인 요구와, ‘연약한신자들의 방어적 입장을 고려했기 때문일 것이다(참조. 고전 8:1~3,7~13). 지식 과시자들은 이교도 신전에서 에이돌로쒸타를 먹을 권리와 자유가 있지만 이를 희생시켜, ‘연약한형제들이 거기에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해야 했다(고전 8:9~12). 자신의 모범적 결심을 들어(고전 8:13) 이 충고를 뒷받침한 후 바울은 계속해서, 여러 가지 사도적 권리 행사의 자제에 관한 자신의 모범을 예시한다. 즉 복음으로 생계를 유지할 권리가 있지만 이를 자제한다든가, 유대인과 이방인, ‘연약한그리스도인들을 섬겨 그들을 신앙과 구원에로 인도하고자, 자기 청중의 요망에 맞춰 자신의 자유를 희생시키는 것 등이 그런 모범이었다(9:1~27). 종결부에서 음식 문제에 관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확언하면서도 바울은 즉시로 고린도인들에게, 그 자유의 행사가 이웃을 걸려 넘어지게 할 가능성이 있을 때 그 자유를 희생하라고 요구한다(고전 10:23~30). 이어, 타인들을 위해 우리 자신의 유익을 희생해야 한다고 설파하고 그리스도의 모범에 따른 자신의 본보기를 제시함으로써(10:32~11:1), 에이돌로쒸타 먹는 문제에 관한 주의 깊은 긴 논의를 마무리한다. 앞에서 보았듯이 마가복음 942~50절과 그 평행구절, 1045절과 그 평행 구절 같은 예수님의 말씀들을 되울리면서 바울은, 사랑이 자유에 우선한다는 자신의 가르침이 예수님의 가르침 및 자기희생 모범에 의거하고 있음을 뚜렷하게 시사한다.

요컨대 바울이 고린도전서 8~10장에서 에이돌로쒸타 먹는 문제를 논할 때 지침으로 삼은 두 가지 원칙은 하나님과 타인을 사랑해야 한다는 절대적 요구, 그리고 음식법/결례에 관한 그리스도인의 자유였다고 우리가 말할 수 있다. 만일 이중적 사랑 계명을 분리시켜 각각 하나의 원칙으로 삼는다면 원칙은 세 가지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교회의 하나됨과 건덕(建德, edification)에 관한 염려를 또 하나의 원칙으로 상정할 수도 있다. 단일신론이 여기의 근본적 전제라는 것은(고전 8:4~6) 두말할 나위가 없다.

분명코 바울은 이런 원칙들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배웠을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을 절대적인 것으로 간주하신(12:28~35과 그 평행절) 반면, 음식/정결 규례를 아디아포라(adiaphora) 문제로 보셨던 것이다(7:15~23과 그 평행절). 예수님의 가르침과 모범을 본받고있는, 고린도전서 8~10장의 에이돌로쒸타(”우상의 제물”)에 관한 가르침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우상 음식에 관한 바울의 가르침(고전 8~10)

바울은 이 면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본받고있는가

 

1. 명제: 두 가지 근본 원칙 (8:1~3)

. 이웃 사랑 (8:1) - 10:32~33(뒤의 6번 나)과의 수미쌍관

. 하나님에 대한 사랑 (8:3) - 10:31(6)과의 수미쌍관

2. 네 가지 명령 (참조. 10:14,23~33의 요약)

. 우상 숭배를 피하라: 이교도 신전의 식탁 교제에 참여하지 말라(10:1~22, 특히 14~22).

. 시장에서 파는 음식은 양심을 위해 의심하지 말고 먹으라.

. 이교도 이웃의 초대를 받을 때 의심하지 말고 차린 음식을 먹으라.

. 그러나 먹는 행위가 연약한형제들(혹은, 이교도 친구의 그리스도인에 대한 도덕적 기대?)을 걸려 넘어지게 할 수 있을 때는 먹지 말라.

3. 세 가지 원칙

. 우상숭배 반대(위의 2. .)

. 그리스도인의 자유(2. . + 2. .)

. 이웃 사랑(2. .)

4. 예수님의 가르침과 일치함

. 예수님은 유대인의 음식/정결 율법을 무시함(7:15,19과 평행절; 14:14,20)(= 2. . + 2. .; 3. .)

. 예수님의 이중적 사랑 계명 (12:28~34과 그 평행절)

(1) 존재 전체를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 - 그 반대는 우상숭배 (= 2. .; 3. .)

(2)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라 (= 2. .; 3. .)

5. 바울은 이것들을 그 자신의 사도적 태도에 적용한다 (바울은 예수님을 본받는다,” 혹은 그리스도의 율법을 준수한다) - 9:19~22

. 아디아포라 문제에 관한 그의 선교적 자세를 청중에 따라 조정함

(1) 유대인들과 연약한 자들 가운데서는 음식법/결례를 준수함 (= 4. . 2. - 이웃 사랑)

(2) 이방인들과 강한 자들 가운데서는 음식법/결례를 무시함 (= 4. . + 4. . 2. -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이웃 사랑)

. 하지만 하나님의 율법”/“그리스도의 율법에 복종함 (= 4. . + 4. .)

6. 요약적 진술과 요구 (이중적 사랑 계명)

.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라(10:31) (= 4. . 1.) - 8:3(1)과의 수미쌍관

. 그리고 이웃 사랑으로 행하라 (10:32~33) (= 4. . 2.) - 8:1(1)와의 수미쌍관

7. 최종적 요약과 요구: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11:1).

 

:: 필자 정보 - 김세윤

김세윤/ 미국 풀러신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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