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7년 8월호
“내 백성은 나를 알지 못하는 우준한자요 지각이 없는 미련한 자식이라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도다”(렘 4:22)
유다의 죄악은 관영했고 심판은 확정되었다. 예레미야는 그의 사역이 몹시 고통스러운 것임을 알았다. 왜냐하면 유다 백성들이 절대로 선지자의 말을 청종하거나 회개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개관
유다는 하나님의 사랑과 돌봄에도 불구하고 이방의 우상을 좇아서 하나님을 저버렸다(2:1-37). 그런데도, 영적으로 불충성된 유다는 북방으로부터 심판이 이르기 전에(4:1-31),회개하라는 촉구를 받게 되었다(3:1-25). 요시야의 종교개혁을 가지고도 유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었고(5:1-31), 그 대적은 거룩한 성을 멸망시킬 임무를 부여받았다(6:1-16). 예레미야의 경고를 들은 모든 사람들은 갈림길에 서게 되었다. 즉 그들이 어떤 길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그들의 운명이 좌우될 것이었다(6:17-30).
본문 해설
“너의 소년 때의 우의”(렘 2:1-8)
지난 주에 나와 아내는 우리가 처음 만났던 미시간 주의 어느 해변을 거닐 기회를 가졌다. 아주 귀한 시간이었다. 우리는 첫 만남 이후로 우리의 사람이 점점 더 깊어진 것과 하나님께서 우리의 결혼을 계획하신 것을 다시 돌아볼 수 있었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의 첫사랑을 되돌아볼 때 흔히 갖게 되는 경험이다. 물론 그때의 사랑은 우리가 함께 생활해가는 경험을 통해서 변화를 겪게 된다. 그러나 그 변화는 성장과 성숙을 의미한다. 지금의 우리는 첫 사랑 때보다도 더욱 가까워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 사랑을 다시 기억하며 얘기하노라면, 여전히 우리는 즐거운 기억을 되새기면서 웃을 수 있을 뿐 아니라 더 깊은 애정의 눈으로 서로를 바라볼수 있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본문에서 이와는 정반대의 이야기를 발견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유다 백성과의 관계를 되돌아볼 때 처절한 고통을 느끼실 뿐이다. 한때 그를 따랐던 신부의 사랑은 이제 단순히 시들어버린 정도가 아니다. 그 백성에게 쏟아부었던 그 모든 축복에도 불구하고 그의 백성은 더욱 더 그를 떠났고 “무익한 우상들을 쫓아 갔다.”
사랑하는 남편이나 아내로부터 배반을 당해본 사람만이 하나님의 고통, 즉 유다의 죄악을 깊이 있게 이해할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처음 주님을 알게 되었던 때를 되돌아보고 그 분을 향해 가졌던 우리의 첫사랑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물론 우리가 그때에 가졌던 느낌을 지금도 똑같이 느낄 수는 없을 것이며, 그때와 똑같은 방식으로 사랑을 표현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계속적으로 주님과의 관계 속에서 성장해 왔다면 뒤를 되돌아 보고 기억하는 시간을 가짐으로써 나와 아내가 미시간 주에서 경험했던 것과 비슷한 더욱 성숙된 친밀감을 주님과 우리의 관계에서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이러한 회상의 경험이 우리에게 아무런 기쁨도주지 않는다면 이는 하나님의 경고로서,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떠나서 방황하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 자신을 점검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렘 2:10-37)
이 구절은 법정에서 제시되는 고발장의 형태이다. 하나님은 유다 백성들을 향해 두가지의 심각한 죄목을 제기하신다.
하나님의 백성은 “생수의 근원”되시는 하나님을 버렸다. 거룩한 그 땅에 곡식이 생산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유다의 백성들의 번영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다름 아닌 물이었다. 그러므로 그 백성들의 삶에 진정으로 절실히 필요한 것이 바로 하나님이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옛적부터 네 멍에를 겪고 네 결박을 끊으며 말하기를 ‘나는 순복지 아니하리라’”(20절)라고 했다.
유다의 더욱 심각한 죄는 “스스로 웅덩이를 판것인데, 실상 그것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였다.” 웅덩이들은 가뭄에 사용할 물을 땅속에 비축해두는 곳이며, 본문에서는 바로 유다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한 이방신들을 뜻한다.
하나님을 버리고 동시에 이방신들을 따라가기로 선택하는 것은 납득할수 없는 일이다. 이방나라들 중에도 자기 신을 바꾸는 나라는 결코 없었다. 그러나 유다는 하나님을 버렸다. 바로 이 모습이 23절과 24절에 생생히 묘사되어 있다. 유다백성들은 빠른 암약대가 어지러이 달림같이 행동했으며, 광야에 익숙한 암나귀가 그 성욕이 동하므로 헐떡거림같이 날뛰었다. 하나님을 거절할 합당한 이유란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더욱이 그분 바깥에서 다른 도움을 구하는 것은 가당치 않은 일이다.
아마도 본문은 이러한 탄식의 메시지일 것이다. 인간은 본래 결정을 내림에 있어서 “합리적”이지 못하다. 오히려 우리는 종종 죄의 노예가 되어서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본성적으로 배척하고 그 대신 거짓된 다른 것들을 애타게 추구하게 된다.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만이 우리 속에 있는 이러한 죄의 세력들에서 우리를 보호할 수 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만 우리가 그의 은택들을 깨달을수 있으며, 하나님을 행복의 유일한 원천으로 찬양할수 있게 된다.
“네가 창녀의 낯을 가졌으므로”(렘 3:1-13)
예레미야서의 이 초반부 메시지는 경건한 왕인 요시야에 의해 진행된 종교 부흥의 기간 동안에 주어진 것이다. 이 개혁은 역대하 34-35장에 기록되어 있다. 요시야는 성전을 수리하고 그곳의 예배를 재정립했다. 잃어버렸던 구약을 법책이 다시 발견되자 요시야는 민족적인 회개를 촉구했다. 그는 유월절 예배를 열어서 백성들이 즐거이 참여하게 했으며 이방제사의 장소들을 정결케 하고 우상숭배를 제거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본장에 나타나는 것처럼 그의 모든 노력들은 유다 백성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는 실패했다.
예레미야는 구체적으로 구약 율법을 언급하면서 그들의 실패를 묘사한다. 한사람이 그 아내와 이혼한 뒤에는 다시 결혼할수 있었는데, 그러나 본인이나 부인 중에 누구라도 그 사이에 다른 누군가와 결혼했다면 처음 부인과는 결코 다시 결혼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유다는 불성실한 부인처럼 그 남편을 버리고서 한사람이 아닌 여러 연인들과 행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불성실한 유다를 다시 데려오기를 원하셨다. 그리고 유다는 되돌아올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유다 백성은 결국 경박하게 처신했다. 마치 그들의 영적 불성실이 아무문제도 아닌 것처럼 유다는 뻔뻔스럽게 웃으면서, “나의 아버지여, 아버지는 나의 소시의 애호자시오니”라고 말한다. 이러한 말들은 원래나이 어린 부인이 나이 많은 남편에게 흔히 쓰는 말이었다. 이것은 유다가 말할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마치 그들이 여전히 순결해서 주님을 버리고 우상을 좇지 않기라도 한 것처럼 착각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서, “네가 창녀의 낯을 가졌으므로 수치를 알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은혜는 언제나 놀라운 것이다. 우리가 그 분께 성실하지 못한 뒤에도 그분은 우리를 다시 받아들이고자하신다. 그러나 우리는 자기 죄를 깊이 깨닫고 통회하면서 수치심에 머리를 숙여야만 한다. 하나님께 대한 불성실이 아무렇지도 않은 일인 것처럼 뻔뻔스럽고 경박하게 처신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보소서 우리가 주께 왔사오니”(렘 3:14-25)
예레미야의 당대 사람들은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선지자는 앞을 내다보면서 하나님의 백성이 그에게로 다시 돌아올 날을 예고했던 것이다. 이 구절들에는 참된 회개와 복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서술한다. 거기에는 하나님께 돌아오는 결단이 있어야 하며(22절 하반절). 지난 일들의 무익함을 새롭게 통찰함이 있어야한다(23-24절). 그리고 과거의 죄들에 대한 깊은 아픔과 수치심이 있어야한다(25절).
“온 땅이 황폐할 것이나”(렘 4:1-31)
마음으로부터 악을 씻어내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에도 불구하고 유다 백성들은 청종하기를 거부했다. 이제 예레미야는 “네 길과 행사”를 인하여 피할수 없이 임박한 심판을 선포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을 이유없이 벌하지 아니하신다. 실상우리에게 재앙을 부르는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행사이다.
“그들이 여호와께 대하여 거짓을 말하며”(렘 5:1-17)
예레미야가 특별히 주목하는 유다 백성의 거짓말은 하나님의 공의와 능력에 도전하는 것이었다. 유다는 하나님께 “전혀 불성실”했다. 그들의 영적 간음은 도덕적 타락과 결합된 것이었다. 그들은 도덕을 버렸고 “살찌고 두루 다니는 수말같이 각기 이웃의 아내를 따라” 부르짖었다(8절). 그들은 또한 정의를 버렸는데, 예레미야는 “공의를 행하고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도 찾을 수 없었다고 말한다(1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다는 스스로 자위하며 이르기를,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않을 것이요”라고 했다(12절). 이것이 바로 예레미야가지적한 거짓말이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아무 일도행치 아니하실 것이다’고 말했던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류의 도덕적 심판자이심을 결코 잊지 말아야한다. 그는 죄를 심판하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집행하는 분이시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자”(렘 5:18-31)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두려움 가운데 그분을 모시는 것을 의미한다. 곧 그분을 진지하게 대하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은 유다에게 그분의 위대하심을 상기시키신다. 그는 바다와 땅의 경계를 정하신 분이시다. “너희가 내 앞에서 떨지 아니하겠느냐?”
오늘날 하나님에 대해서 아무런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이것은 진실로 비극이다. 그러나 이 중에서도 가장 큰 비극이 예레미야에 의해 묘사된다. “이 땅에 기괴하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현대 생활의 세속적 흐름에 영향을 끼치기 위해서 우리가 할수 있는 일이 거의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 자신의 경외심을 잘 유지하고 그의 임재와 능력을 진지하게 대하는 것이다. 유다 백성이 말하기를 거부했던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자”는 고백을 우리는 스스로 끊임없이 해야한다.
“이는 벌 받을 성이라”(렘 6:1-15)
유다는 하나님의 말씀 듣기를 거부했다. 그러므로 이제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만국위에 그에게 주신 권위를 사용해서 바벨론으로 하여금 거룩한 도시를 공격할 임무를 부여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유다 백성을 공격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제 “그 성은 벌을 받아야만했다.”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렘 6:16-30)
여기 이 초청은 심사숙고하라는 부르심이다. “옛적 길”은 하나님의 율법에 정해진 길을 나타낸다. 이는 선한 길로서 사람이 그 안에 행하면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을” 길이었다.
예레미야는 이제 남아 있는 다른 한가지선택이 가져올 결과를 약술한다. 사람은 반드시 옛적 길로 행하거나 아니면 스스로의 새 길을 찾아야만 한다. 그런데 새 길은 아무에게도 평강을 주지 못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내는 새 길이란 대체로 자신의 욕심을 따른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러한 큰 길을 관찰하는 중에 예레미야처럼 우리는 멀리서 행군하는 무리들이 일으키는 먼지 구름을 보게된다. 태양이 창들의 끝에 부딪혀 빛나는 것과 기마대가 전장에서 일으키는 말발굽소리의 진동을 목격하게 된다. 그때 우리는 갑작스런 두려움에 휩싸이게 된다. 그길을 따라서 심판이 우리에게로 급히 달려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옛 길 곧 선한길을 선택하고 그 안에서 행한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해야 할 일인지 모른다.
더 깊은 묵상
긍휼로 (렘 3-4장)
다른 사람들의 죄를 보면서 자기 의에 빠지는 것은 쉬운 일이다. 불의와 사악함으로 인해서 격분할 수도 있다. 또한 그러면서 우리는 남을 정죄할 수도 있다.
예레미야의 초기 설교를 요약하는 이 두장을 읽는 가운데 우리는 의로운 분노가 끓어 오르는 것을 느낄 수가 있다. 선지자는 너무나도 정직했다. 반면에 이스라엘과 유다는 믿음을 저버렸다. 범죄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뻔뻔스러웠고 수치를 몰랐다. 그들이 섬긴 우상들은 가증스러웠으며, 백성들은 사악하게도 악한 궤계들을 용납하고 있었다. 그러나 선지자는 그자신의 완전히 대조적인 모습에도 불구하고 분노의 말들을 아픈 가슴으로 선포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 자신의 심각한 아픔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슬프고 아프다 내 마음속이 아프고 내 마음이 답답하여 잠잠할수 없으니 이는 나의 심령 네가 나팔소리와 전쟁의 경보를 들음이로다(렘4:19)
선지자를 움직인 것은 단순히 의에 대한 관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자신들의 악한선택으로 말미암아 멸망을 자초한 백성들을 향한 사랑으로 인해서 그의 마음이 움직이게 되었다. 하나님과 그의 선지자가 함께 유다가 회개하기를 얼마나 간절히 열망했었는가. 그들 중에 누구도 의를 세우는 일에 대해서 기쁨을 누릴 수가 없었다. 유다백성들의 죄로 인해서 그들이 마땅히 당해야 할 심판을 보면서 만족을 느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고통과 아픔이 있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사악한 행위들로 인해서 다른 사람들과 맞서야만 할때가 있다. 죄에 대해 단호한 입장을 취해야 할때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순간에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조심스럽게 살펴보아야 한다. 그 순간에 일말의 영적 자만이라도 있어선 안된다. 악한 자들이 하나님의 때에 당할 그들의 몫을 보면서 어떠한 흡족함을 느끼는 일은 합당치 않다. 오히려 우리는 예레미야처럼 죄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죄인에게 주어지는 필연적인 심판으로 인해서 하나님이 가지시는 그 고통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다가오는 심판을 선포하면서도 사랑을 품을수 있다면, 사람들이 우리의 말속에서 하나님이 진정으로 전하시고자 하는 바를 느낄 수 있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진정으로 소원하시는 것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이다. 정죄가 아닌 속죄이다. 거절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으로 인해서 용서받은 죄인들을 집으로 환영해 들이는 것이다.
:: 필자 정보 - 로렌스리차드/휘튼대학원교수
로렌스 리차드(Lawrence 0. Richards)/미시간 대학(B A.)과 달라스 신학교(Th.M), 노쓰웨스턴 대학교(Ph.D)등에서 공부했고, 지금은 휘튼 대학원에서 신학과 성경을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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