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서 1장은 특히 예레미야 선지자의 개인적인 기록과 소명에 관해 기록되어 있는 장이다. 우리는 이 1장의 구성을 내용에 따라 다음과 같이 나누어 볼 수 있다.
1. 1:1-3서론 예레미야의 소재
2. 1:4-10 예레미야의 소명
3. 1:11-16 두 가지 판상
1)11-12절; 살구나무의 판상
2)13-16절; 끓는 가마의 관상
4. 1:17-19 예레미야소명의 재확인
1.서론 -선지자 예레미야의 소개(1:1-3)
대부분 선지서들의 서두에는 그 책들을 쓴 선지자들이 언제,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는가에 대한 간략한 설명들이 나온다. 그런데 예레미야서의 서론에는, 이 책의 저자인 예레미야에 대해 다른 책들보다 비교적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는 것이 특이한 점이다. 우리는 이를 통해 예레미야의 이름, 출생 그리고 그가 소명받은 연대에 대해 비교적 자세히 알 수 있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예레미야서에는 ‘요시야왕의 개혁’(요시야 18년)에 대한 언급이 나오지 않고 있으므로, 예레미야의 활동은 최소한 요시야왕의 개혁 이후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예레미야서 1장에 서술된 예레미야가 활동을 시작한 연대(요시야 13년)는, 너무 일러서 이 연대는 실제 역사와 맞지 않는다고 한다. 따라서 이것은 후대 편찬자의 보충설명이므로 신빙성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1장 1-3절에 나오는 예레미야 개인에 대한 자료에도 그다지 큰 역사적 신빙성을 둘 수 없다고 얘기한다. 그러나 예레미야외 연대에 대해서는-후에 언급하겠지만-이 서론의 기록을 의심할 하등의 이유도 우리에게 없는 것이다.
1) 이름
예레미야란 이름은 히브리어로 두 가지형태로 나타난다. 첫 번째는 약간의 단축형으로 1장 1절 밑에 있는 책 제목과 예레미야서 27장 1절, 28장 5-15절, 29장 1절, 다니엘서 9장 2절, 에스라서 1장 1절에서 ‘이르메야()’란 이름으로 나온다. 두 번째는 온전한 형태로, 위에 언급한 구절들 외에서 ‘이르메야후()’-란 이름으로 나온다. 이 이름의 의미에 대해서 여러 의견들이 있지만, 이것은 이란 어근과 하나님의 이름(야훼의 단축형)이 합성되어 만들어진 이름으로서 ‘야훼께서 (그를) 세우시기를 혹은 높이시기를’이란 뜻을 갖는다는 의견이 비교적 설득력 있다. 이 선지자의 이름은 예레미야서 외에도 역대하 35장 25절, 36장 12절, 21절 이하, 다니엘서 9장 2절, 에스라서 1장 1절에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같은 이름의 인물들이 다른 여러 곳에도 나타나고 있지만 본문의 예레미야 선지자와는 다른 인물로 여겨진다.1
2) 출생
예레미야는 제사장 힐기야의 아들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 힐기야는 요시야왕의 성전 수리 때 율법책을 발견한 대제사장 힐기야와는(왕하22:8) 다른 인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예레미야의 아버지 힐기야는 조그만 마을 아나돗의 제사장 중 하나이며, 예루살렘의 대제사장 힐기야와는 그 위치상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2 예레미야의 출생지는 ‘베냐민의 땅 아나돗’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곳은 제사장인 아론 자손들에게 주어진 13성읍 중의 하나로, 베냐민 지파에서 제공한 성읍이었다(수21:13-19).
즉 이곳은 아론 제사장들에게 주어져 그들이 모여 살던 마을이었다. 아나돗의 위치는 예루살렘에서 북동쪽으로 직선거리 약 5킬로미터 떨어진 곳으로, 이 마을은 현재 ‘아나타(anata)’란 지명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이 및 성읍 아나돗의 위치는 현재까지 정확히 밝혀지지는 않았으나, 고고학자들은 대체로 아나타 가까이 있는 ‘라스 엘 - 하루베(raseI- harrube)로 추정한다.3
예레미야의 아버지 힐기야는 많은 제사장들 중의(원문에는 복수인 ‘제사장들’로 되어 있다)일원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우리는 이로 미루어 아나돗에 제사장 그룹이 존재했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또한 위에서 언급했듯이, 아나돗이 제사장아론의 자손에게 주어진 성읍이며 제사장들이 함께 모여 살던 제사장 마을이었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4 예레미야는 이같이 전통적인 제사장의 마을에서, 제사장가족의 일원으로 태어났던 것이다. 그런데 아나돗 출신으로 아비아달제사장이 있다. 그는 다윗왕 밑에서 제사장을 지냈고, 사독 제사장과는 달리 아도니야편에 서서 그를 왕으로 만들었던 제사장이다. 그래서 그는 솔로몬이 왕이 된 후, 아도니야편에 섰었다는 이유로 고향 아나돗으로 쫓겨났으며 아울러 제사장직분도 박탈당하고 만다(왕하2:26이하).
이처럼 아비아달이 솔로몬 치하에서 크게 박해를 받고 제사장직을 수행할 수 없었기 때문에, 아비아달의 후손들 또한 후에 예루살렘에서 제사장의 역할을 하지 못했을 것으로 추론해볼 수 있다.5 그렇다면 만약 아나돗출신의 예레미야가 이 아비아달제사장의 자손이거나 혹은 그와 전통적으로 어떻게든 연결되었다면, 이런 이유로 해서 예레미야는 제사장 집안에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선지자로 활동하게 된 것이 아닌가 추측해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예레미야가 제사장이 되기 위해 제사장직에 대한 어떤 준비를 했다는 기록도 찾아볼 수가 없다.
3)소명의 시기
본문에는 예레미야의 소명과 그가 활동한 시기에 대해 비교적 소상히 언급되어 있다. 본문은 예레미야가 유다왕 요시야가 다스린 지 13년 되던 해에 선지자로 소명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요시야왕이 다스린 연대를 대체로 B.C.639-609년으로 잡는데, 이 연대에 대해서는 약간의 의견 차이만 있을 뿐 대부분 동의하고 있다. 그렇다면 요시야왕의 통치 13년째 되는 해인 B.C.627/26년에 예레미야가 선지자로 소명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몇몇 사람들은 예레미야가 요시야왕의 종교개혁(요시야왕 18년 = BC622/21:왕하22-23장)에 대한 언급을 전혀 하고 있지 않는 것으로 보아, 예레미야의 소명, 즉 그가 선지자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요시야왕의 종교개혁 이후일 것이라는 주장을 한다. 그리고 이에 맞춰 예레미야의 소명시기를 뒤로 늦추는 시도들을 한다. 그러나 사실 우리에게는 본문을 의심할 어떤 확실한 근거도 없다.
그러면 왜 예레미야는 역사상 중요한 요시야왕의 종교개혁에 대해 아무 언급도 하지 않았을까? 사람들은 예레미야가 요시야의 개혁을 알고도 고의로 이에 대해 침묵했던 것으로 추측한다. 이에 대한 이유로는 예레미야가 요시야왕의 개혁에 전적으로 찬동했고, 심지어 그 당시에 그러한 개혁은 하나의 기적과 같은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비판의 소지가될 수 있는 어떤 언급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예레미야는 이 종교개혁이 조용히 그대로 지속되기를 원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레미야가 소명을 받았던 627/26년은 역사적으로 유다에 많은 변화를 가져다준 격동의 시대였다. 그리고 이 격동기의 정황이 바로 예레미야외 소명에 대한 역사적인 필요성을 제공해 준다. 앗시리아 제국의 앗수르바니팔(surbanipal)왕은 니느웨에 큰 도서관을 짓고, 바벨론을 점령하며, 이방의 침입을 성공적으로 막아내는 등 여전히 큰 힘을 발휘하지만, 점점 이웃나라들이 강성해짐에 따라 앗시리아제국은 멸망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그리고 이 시기의 역사기록의 공백으로 인해 앗수르바니팔왕이 언제 죽었는지 정확히 알수는 없지만, 대체로 이 역사적 공백 기간인 630-627년 사이에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늦어도 627년에는 그가 죽은 것으로 우리는 생각할 수 있다. 앗수르바니팔 왕이 죽은 후 앗시리아는 급격히 쇠약해졌고, 그의 속국이었던 바빌로니아는 나보폴라발왕 때에 이르러 급격히 세력을 얻어 신바빌로니아제국을 세우게 된다.
이로 인해 앗시리아는 이 지역에서 절대적인 세력을 잃게 되며, 이것은 그때까지 앗시리아의 속국이었던 유다에게 그로부터 벗어날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하게 된다. 이런 맥락에서 요시야의 종교개혁은 앗시리아를 상징하던 우상들과 제의기구들을 제거하는 등, 정치적으로 앗시리아로부터 독립하려는 의도도 있었던 것이라 추정할수 있다(왕하23:4이하). 한편, 지금까지 강대국으로 군림했던 앗시리아가 무너지는 격동기에 북쪽에서는 새로운 세력들이(킴메르, 메데, 스키티아, 바빌로니아) 등장하게 되며 이들은 유다의 새로운 위협세력으로 작용한다. 이런 때에 예레미야는 처음부터, 북에서 오는 이 위협에 대해 경고하기 위해 여호와께 소명을 받게 된다(렘 1:13이하). 물론 북쪽의 민족이란 말이 어떤 특별한 민족들을 지칭하는 것만은 아니고, 이스라엘을 위협하던 북쪽의 강대국들을 통칭하는 일반적인 말로도 사용이 되었지만, 예레미야가 소명을 받은 이 시기는 북쪽에서 새로운 세력들이 일어났던 격동기로 그의 사역의 목적과 잘 일치된다고 말할 수 있다.
4) 예레미야의 사역 기간
본문에는 예레미야가 소명을 받은 요시야왕 13년(627/6)부터 시드기야왕 11년(587)까지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다고 얘기한다. 이 기록에 의하면, 예레미야의 사역은 유다가 바빌로니아에게 멸망할 때까지만으로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예레미야서 40장 이하에는, 예레미야가 포로기 이후에도 선지자로서 활동한 것으로 서술되어 있다. 따라서 예레미야서 1장2-3절에 기록된 예레미야의 사역은 예레미야서 1-39장까지의 사역만 언급하는 듯이 보인다. 그리고 예레미야서 40장 1절에 포로로 끌려가는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다는 서론이 새롭게 나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예레미야서 40장부터는 포로기 이후 예레미야의 새로운 사역을 언급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예레미야가 언제 죽었고, 그의 사역을 마쳤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단지 그는 선지자들 중에서 비교적 오랫동안 살며 활동한 것으로 여겨진다.
2.예레미야의 소명(1:4-10)
예레미야의 소명은 선지서에서 전형적인 형식으로 쓰이는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4절)는 말로 시작된다. 이 말은 이외에도 1장 11, 13절에 반복하여 나타나며 예레미야가 받은 메시지의 특성을 나타내 주고 있다.6 여기서 ‘말씀()’은 단순히 하나님이 예레미야를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예레미야의 신학의 밑바닥을 형성하는 구체적인 메시지를 나타내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부름에 대해 예레미야는 자신의 연소함, 즉 경험이 없음을 고백하나(6절),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구체적인 메시지를 보여주고 확신시켜주심으로써 그를 안심시키신다(11,13절이하). 그리고 이 하나님의 말씀은 필요할때마다 그에게 임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 형식의 말이 예레미야서 전반에 걸쳐 자주 쓰이는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1)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5절)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부르시면서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5절)”고 말씀하신다. 예레미야가 세상에 나오기도 전에 이미 그를 선지자로 택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말씀을 백성에게 선포하시고, 그의 뜻을 실행하시며, 이를 위에 따라 미리 선택되었으며, 그가 필요한 때에 선지자로 부름을 받게 된 것이다. 이길이 우리는 예레미야의 인생이 이미 하나님의 장중에서 계획되어 그의 뜻대로 실현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는 예레미야가 하나님께 완전히 복속되어 단지 그의 뜻을 행하는 하나님의 도구로만 사용되었다는 것도 아울러 깨달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 이같이 그의 종을 미리 예정하여 선택하신다는 이야기는 성경의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 악을 행하여 블레셋 사람의 손에 붙여지고 그들의 압제를 받게 되었을 때에, 아이를 낳지 못하는 마노아의 아내에게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 “이제 네가 아들을 낳을 것인데 그가 이스라엘을 블레셋의 손에서 구원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삿 13:2이하).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이 아이가 곧 삼손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키 위해 필요한 사람을 현존하는 사람 중에 택하지 않고, 그 일을 실행할 사람을 선택하셔서 미래에 태어나게도 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것이 하나님의 전적인 사역임을, 우리는 그분이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을 통하여 이 일을 이루시는 것을 보고 알 수 있다.
이같이 하나님께서 그의 종을 태어나기 전부터 택하셨다는 얘기는 또한 ‘여호와의 종’ 노래에서도 볼수 있다. “여호와께서 내가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나를 부르셨고, 내가 내 어미 복중에서 나옴으로부터 내 이름을 말씀하셨으며”(사49:1), “나를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자기 종을 삼으신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5절하). 사도 바울도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갈 1:15)라고 고백하는데,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미리 택해 사도로 부르셨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창세 전에 그의 종들을 택하신’것이다(엡 1:4). 이같은 하나님의 선택을 깨닫는 자는 그의 모든 사역이 자신의 능력에 달린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달렸다는 것을 또한 깨닫게 된다. 이것을 깨닫는 자는 바울과 같이, 자기가 한 모든 일이 자기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 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이다(고전15:10). 예레미야도 이런 하나님의 선택의 개념을 가졌고, 그로 인해 자기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구로서 오직 그만 의지하는 법도 아울러 배웠다.
2)예레미야의 고백(6절)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예레미야는 매우 당황해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6절). 우리는 예레미야의 이러한 반응을 보면서 바로 모세를 떠올리게 된다. 모세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소극적인 자세를 보이며,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출3:11)라고 얘기한다. 그는 하나님의 부름에 거부하는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심지어는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자라…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출4:10)라고 하며, 언변의 무능을 이유로 소명을 거부하려 했다.
모세와 같이 최고의 교육을 받고, 또 동족이 학대받는 것을 참지 못해 스스로 고난의 길을 택했던 정의감이 강한 사람도, 하나님의 부름 앞에서는 아주 작은 자가 되어 소극적인 자세를 가졌던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는 또한 기드온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나는 내 아비 집에서 가장 작은 자니이다”(삿6:15)라고 하며 하나님의 소명을 감당하기에는 연약하다고 고백하면서 그것을 피하려 했던 것을 본다.
이들과 같이 예레미야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기쁨과 감사로 “할렐루야”를 외치며 받아들이지 않고, 두려움과 걱정에 싸여 그의 소명을 사양하려고 했던 것이다. 모세가 언변의 무능력, 기드온이 연약함을 그 이유로 들고 있다면, 예레미야는 자신의 연소함7,즉 선지자가 되기에는 충분한 나이가되지 못해 연륜이 부족하다는 것을 그 이유로 들고 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 자신의 임무이다. 여기서 예레미야가 “말할 줄 모른다”고 고백한 것은, 그의 언변이 단순히 수준이하기 때문이 아니라 선지자의 임무를 감당하기에는 그의 말의 연륜이 미치지 못하겠기 때문이었다.
이런 여러 신앙의 인물들을 볼 때 하나님의 부르심에 즉각 응하는 것이 우리의 자세이지만, 실제로 우리가 부름을 받았을 때 그 사명의 중요성에 압도되어 우선은 피하려는 소극적인 자세를 갖는 것이 자연스러울지도 모르는 일이다. 반면에 하나님의 소명이 확실치 않음에도, 그의 일을 하겠다고 찾아나서는 것이 과연 적극적인 태도라고 칭찬만할 수 있는 것인지 또한 생각해 볼 일이다. 하나님이 부르실 때, 인간이기에 두려움과 무능을 느끼는 것이 오히려 우리의 본성에 맞는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르는 것이다
3)하나님의 위로(7-8절)
여호와께서는 두려움으로 주저하는 예레미야에게 위로의 말씀으로 용기를 주신다. “너는 내가 택한 선지자니 두려워할 이유가 전혀 없다. 너는 내가 가라는 데로 가고, 명하는 대로 말을 하면 된다. 누구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내가 항상 너와 함께하여 너를 구원하리라”고 하신다(7-8절). 하나님의 종은 어떻게 그 길을 감당해야 할 것인가를 스스로 걱정할 필요가 없다. 단지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따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도 네가 무슨 일을 해야할지, 어떤 말을 해야할지 스스로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가 행할 일과 말할 것을 다 가르쳐주시며, 또 항상 같이하고 보호해주시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이, 하나님께서 그의 종을 통해 말씀을 전하시고 그의 일을 행하시는 방법이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시며,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마 10:19-20)고 하시면서 제자들을 안심시켰던 것을 볼수 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사람들은 염려하며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들이 하나님의 일을 행할때 모든 할 말을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부름받은 자들은 단지 그를 믿고 순종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편에서 볼 때, 말이 어눌하다고 연소하다고 능력이 없다고 변명하면서 소명을 피하는 것은 어불성설인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 사람의 능력과 재능을 보고 그를 택하시는 것이 아니며, 또 사람의 능력을 기초로 해서 일을 하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일은 다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다.
단지 사람은 그에 순종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따라서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소명에 응답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그것을 할 만한 준비를 갖추었다든지 아니면 어느 정도 그 일을 감당할 자신이 생겼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 순종할 자세가 되어 있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4) 예레미야를 선지자로 세우심(9-10절)
예레미야에게 위로의 말로 용기를 북돋워주신 하나님은, 이제 그의 입에 직접 손을 갖다 대시며 그를 만국 위에 선지자로 세우신다. 앞 절에서 말할 줄 모른다고 두려워하던 예레미야에게 무슨 말을 할지 걱정 말라고 말씀으로 위로하신 하나님께서, 이제는 더 나아가 행동으로 예레미야의 두려움을 덜어주시는 것이다. 그는 손을 내밀어 예레미야의 입에 대시며,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9절)고 하신다. 이 행동은 이제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통해 예레미야는 ‘여호와의 입’(렘 15:順)이 된 것이다.
이 장면은 이사야가 소명받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이사야는 성전에서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땅에 충만하도다”라고 찬양하는 스랍들에 둘러싸인 채 높은 보좌에 계시는 하나님을 보게 된다. 이때에 땅이 흔들리고 성전 안에는 연기가 가득하여, 이사야는 두려움을 느끼면서 입술이 부정한자로서 하나님을 뵈었으니 망하게 되었노라고 한다. 이때 스랍중의 하나가 벌겋게 편 숯을 가져다 그의 입술에 댄다. 그러면서 그는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고 말한다(사6:1-7).
여기서 입술에 대는 행동은 이사야와 같지만, 그 의미가 예레미야와는 다른 것을 볼수 있다. 예레미야에게서는 그 의미가 하나님의 말씀을 입에 두어 선지자로 세운다는 것이라면, 이사야에게서는 입을 정결케 하여 그를 선지자로 세운다는 의미를 가진다. 여기서 우리는 선지자로 세우시는 하나님의 방법이 서로 다른 것을 볼수 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는 친근한 대화 속에서 위로와 용기를 주면서 선지자로 세우신 반면에, 이사야는 거룩하고 엄위한 분위기 속에서 선지자로 세우셨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처음에는 회피하는 태도를 보이지만, 이사야는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고 묻는 하나님께 주저없이 처음부터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8절)라며 부르심에 즉각 응답한다. 이 두가지 상이한 부르심은 우리에게도 해당될 수 있을 것이다. 성격이 소극적이고 주저하는 사람에게는 예레미야같이, 반면에 고집이 세고 자신감이 강한 사람에게는 이사야같이 하나님의 소명이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열방 위에’()선지자로 세우셨다. 여기서 열방이란 말을 단순히 ‘이방인(민족)’이라는 말로 이해하면 안된다. 그러면 예레미야가 단순히 이방민족의 ‘선교사’로 이해되기 때문이다(사 42:1절과 같이). 물론 선지자들이 이방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기도 했지만, 여기서는 이스라엘을 포함한 ‘온 민족’이란 말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 말은 ‘세상 전체’란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열방 위에’란 말은 ‘열방에 관하여’란 말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예레미야의 메시지가 전해지는 영토적 범위가 아니라, 그의 메시지의 내용적 특성을 나타내는 말이다. 예레미야 당시는 유대, 앗시리아, 애굽, 바빌로니아 등이 서로 밀접하게 정치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서로의 상황이 맞물려 돌아가던 시대이다. 이런 때에 예레미야의 메시지의 내용은 유다라는 한민족에 국한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런 예레미야의 메시지의 특성은 오늘날에도 그 의미가 크다. 남북이 갈려 서로 대치되고, 강대국의 이익이 서로 맞물려 돌아가는 오늘날, 그리고 민족의 통일이라는 과업을 둔 우리의 현실에서, 하나님의 메시지는 더 이상 우리가 살고 있는 우리 사회에만 연관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의 메시지는 이런 국제적인 상황모두에 관련되어야하는 것이다.
더군다나 북한의 동포들이 굶주림과 독재에 시달리는 현 상황 속에서, 우리의 메시지도 내용이나 그 대상에 있어서 좀더 폭을 넓혀야 할 것이다. 이런 면에서 교회의 메시지도 국제화되어야하지 않을까 한다. 예레미야가 세상에 전하는 메시지의 내용은 간단히 요약해 ‘재앙과 구원’ 두가지이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뽑으며, 파괴하며, 파멸하며, 넘어뜨리는’ 메시지와, ‘건설하고, 심는’ 메시지를 함께 주신다고 하셨다(10절). 예레미야의 메시지는 경고와 책망과 재앙만을 전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메시지에는 그와 더불어 새로운 소망과 구원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의 재앙의 메시지는 단순한 경고로 그친 것이 아니었다. 그가 선포한 재앙은 587년에 유다가 망함으로써 역사 속에 실제로 이루어졌다.
마찬가지로 그의 구원의 메시지도 역사 속에서 실제로 성취되는 것이다. ‘건설하고, 심는 것’은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집을 짓고 나무를 심는 것은 한번만 하는 일이다. 집은 한 채만 짓지 자꾸 짓지 않는다. 나무도 한번 심으면 그 나무를 계속 가꾸는 일만 남는다. 이같이 ‘짓고 심는다’는 것은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는 것이다.8 예레미야는 멸망하여 나라를 뺏기고, 삶의 근거를 잃을 이스라엘인들이 ‘새 삶을 세울 것이라는 메시지도아울러 전하게 되는 것이다.
3. 두 가지 환상(1:11-16)
1) 살구나무의 환상(11-12절)
- 하나님의 말씀은 그대로 이루어짐
이 살구나무 환상은 예레미야가 선지자로 소명 받은 날에 동시에 일어난 사건은 아닌 것 같다. 그렇지만 아마도 이 환상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간에 일어난 사건으로 여겨진다. 이 환상이 나오는 구절도 전형적인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니라’(11절상)라는 말로 시작된다. 아마 예레미야가 얼마 후, 선지자로 세움받은 일에 대해 다시 의심하고 확신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다시 임한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이 환상은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선지자의 소명에 대해 더욱 확신을 주기 위하여 보여주시는 것 같다.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기 위해 부름 받았던 모세는 하나님의 능력의 이적을 체험하고서야 비로소 담대하게 부름에 답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기드온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백성의 지도자로서 그들을 구원해야 했던 이들과는 달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하는 선지자에게는 어떤 능력의 체험보다 그가 전해야 하는 메시지의 내용에 대한 확신이 더욱 필요했다.
이것은 예레미야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예레미야도 자기가 전해야하는 (재앙과 구원의)메시지에 대한 확신이 부족했던 듯싶다. 즉 자신의 메시지가 그대로 이루어질까하는 의심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에 하나님은 살구나무 환상을 통해 자신의 말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을 확신시켜주시는 것이다. 이 살구나무 환상에서 재미있는 말의 유희를 통해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그 내용을 강조하고 계시다. 우선 하나님은 그에게 “무엇을 보느냐?”고 물으신다. 하나님이 선지자에게 환상을 통해 깨닫게 하실때, 이같은 질문 형식이 많이 사용되고 있다(예-렘 24:3; 암7:8,8:2: 슥4:2,5:2 등). 물론 이것은 예레미야 앞에 놓여 있는 사물을 통해 하나님께서 현장교육을 시키시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이 예레미야가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가를 물으시는 것이 아니고, 그가 보여주는 것이 무엇인지 예레미야에게 확인하는 질문인 것이다.
예레미야는 이같은 하나님의 질문에 “내가 살구나무(l?)가지를 보나이다”라고 대답한다. 이에 하나님은 “네가 잘 보았도다. 이는 내가 내 말을 지켜9 그대로 이루려함이니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살구나무’와 ‘지켜’란 말은 히브리어로 발음이 거의 같다. 즉 이 환상에서 ‘살구나무=지킴’이라는 등식이 성립하게 된다. 하나님은 살구나무의 환상에서 이런 말의 유희를 통해 예레미야가 전하는 메시지(곧 하나님의 말씀)가 그대로 이루어지도록 자신이 직접 지킬 것을 강조하시는 것이다.10
2) 끓는 가마의 환상(13-16)
- 북방민족의 예루살렘 침입
살구나무 환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면을 강조하고 있다면, 끊는 가마의 환상에서는 예레미야가 전할 메시지의 구체적인 내용이 언급되어 있다. 이 구절도 역시 “여호와의 말씀이 다시 내게 임하니라”(13절상)는 말로 시작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확신을 가지도록 이적이나 환상을 반복하시는 경우가 종종 있다. 모세도 지팡이가 뱀이 되고, 손에 문둥병이 발하는 이적을 연달아 경험함으로써 소명의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출4장).
그러나 예레미야에게는. 그의 소명에 대한 확신을 주려는 의도뿐 아니라 그의 메시지의 내용에 대해서도 확신을 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두번째 환상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무엇을 보느냐고 질문받은 예레미야는 남쪽으로 그 면이 기울어진 끓는 가마를 본다고 대답한다(13절). 여기서도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교훈을 주는 것으로 생각하기보다는, 예레미야의 눈에 하나님께서 환상을 보여주시고 그것을 통해 메시지를 주시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북에서 남으로 기울어진 가마는 재앙이 북으로부터 오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씀하신다(14절). 그리고 이어서 북으로부터 오는 재앙에 대해 좀더 자세히 설명해주신다(15절이하). 그것은 북방민족들이 쳐들어와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유다의 모든 성읍을 치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북방민족이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지 않다. 예레미야 시대에는 그 민족이 누구인지 말 안해도 너무나 자명하여 언급할 필요가 없었는지, 아니면 비밀이었는지, 알 수가 없다.11
그런데 이 북방 민족에 대한 언급은 이후에도 자주 나오고 있다(4:6, 6:1, 6:22, 10:22, 13:20, 25:9,26). 하여튼 이 예언은 후에 바빌로니아의 느부갓네살왕에 의해 완전하게 실현된다. 여기서 북방민족이 쳐들어와서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하나님께서 시키신 일이며, 따라서 하나님의 징계라고 설명되어 있다(15절). 그것은 유다가 이방신을 섬기고 우상에 절한죄 때문이었다(절).
여기서 예루살렘의 멸망이 강대국의 왕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징계라는 사실은, 오히려 이스라엘에게 희망이 아직 남아 있으며 그 희망은 결국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하나님의 징계의 원인은 하나님을 떠나 이방신을 섬겼다는 데 있다. 즉 제1계명을 어긴 데 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이방신을 버리고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 이스라엘 민족은 다시 세움을 입게 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예레미야는, 여호와의 선지자로서 나라의 운명을 꿰뚫어보고 그의 운명에 대해 예언했으며 그 원인과 해결을 또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찾았다. 이것이 예레미야가 처음 받은 메시지의 내용이며, 이 메시지에 기초해서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동족에게 전했던 것이다.
4.예레미야에게 소명을 다시 확신시킴(1:17-19)
예레미야에게 두 가지의 환상을 통해 그가 전할 메시지를 확신시켜주신 하나님은 이제 엄숙하게 예레미야에게 명하신다. “그러므로 너는 네 허리를 동이고 일어나 내가 네게 명한 바를 다 그들에게 고하라"(17절상). 이 말은 앞7절의 내용을 다시 반복하는 말씀이다. 이 명령을 내리시면서 동시에 하나님은 아직도 두려워 떠는 예레미야에게 다시 한번 용기와 위로의 말씀을 주신다. “두려워 말라.” 그러면서 하나님은 “네가 계속 두려워하면 내가 너로 그들 앞에서 두려움을 당하게 할까 두렵다”고 말씀하신다(17절하). 즉 이 말은 네가 계속 두려워하면 사람들 앞에서(즉 공적으로) 네가 두려움에 사로잡힌 겁쟁이로 여겨질까 걱정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모든 사람들이 너를 대적해도 내가 너를 견고한 성읍같이 만들어, 항상 너와 같이하여 구원하리니 두려워 말라는 위로의 말씀을 하신다(18-19절). 이 말은 앞8절 내용의 반복이다. 하나님은 1장에서 소명과 위로의 말씀을 각각 두번 반복하신다(7-10,17-19). 이것은 예레미야가 상당히 소극적인 성격으로 두려워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확신을 주시려는 것이다. 하나님은 예레미야가 그의 소명에 확신을 가지도록 세심히 배려하고 계신다.
맺는 말
결론적으로 우리는 예레미야 1장의 구조를 다음과 같이 생각해볼 수 있다. 1장 1-3절은 독립적으로 1장의 서론인데 예레미야서 전체의 서론 역할을 한다. 그러나 여기서 언급된 예레미야의 사역의 범위는 유다의 멸망까지, 즉 예레미야서 1-39장에 해당된다. 그 외 나머지는 예레미야의 소명에 대해 서술하는 부분으로서, 이 소명은 두번 반복하여 서술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예레미야가두 번 소명받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의 소명에 좀더 확신을 주시기 위해 반복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의 소명을 ‘말씀과 환상’이라는 두가지 방법을 통해 확신시키고 계시며, 그때마다 그에게 위로와 용기의 말씀을 함께 주고 계신다. 이같은 1장의 구조를 간략히 도표로 그리면 다음과 같다.
주(駐)
1. 왕하 23:31; 렘 35:3,52:1; 대상 5:24,12:5,11,14; 느 1:3,12:1,12,34
2. 예레미야가 솔로몬에게 추방되어 아나돗에 온 아비아달 제사장의 후손이라면, 이들은 당연히 사독 제사장 계열보다 낮은 위치에 있었을 것이고 따라서 예레미야의 아비 힐기야를 예루살렘 성전 사독 계열의 대제사장과 동일 인물로 보기는 더욱 어려운 것이다.
3 A.Alt가 PJ(=Palustinajahrbuch des Deutschen evangelischen Instituts fur Altertums- wissenschaft des Heiligen Landes in Jerusalem),22(1926), 23쪽 이하에서 결정적인 제안을 한 이래로 많은 사람들이 이를 따르고 있다.
그러나 1982년에 이스라엘의 고고학자 Avraham Biran이 아나타에서 동쪽으로 약 1.5킬로미터 떨어진 한 폐허지 der es-sidd를 발굴했는데 그는 이곳이 아나돗이었을 가능성이 많다고 얘기한다. 아나돗의 위치에 대한 좀더 자세한 고고학적 주장들을 위해서는, S.Herrmann, Jeremia, BK(1986), pp.15-17를 참고하라.
4. 레위 제사장들이 포로기 이후에도 아나돗에 모여 살았던 것을 우리는 느 11:25-36에서 엿볼수 있다. 여기에는 아나돗에 베냐민 사람들이 살았는데, 그들과 레위 사람들이 서로 합하여 살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5. S.Herrmann은 Jeremia. Der Prophet und das Buch, Darmstadt, 1990, pp.2-3에서, 솔로몬이 아비아달의 제시장직을 박탈했기 때문에 그의 자손은 더 이상 제사장직을 수행 못했으며, 따라서 아나돗에 있던 제사장들은 아비아달의 후손이 아니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722/21년에 북방 이스라엘이 망했을때 남방유다의 예루살렘으로 많은 이스라엘의 제사장들이 내려와 거주하게 되었는데, 그중 일부가 예루살렘과 가까운 아나돗에 자리를 잡게 되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그는 예레미야가 아비아달의 후손이 아니라, 이스라엘에서 내려와 아나돗에 자리잡게 된 제사장들의 후손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이유로 그는 예레미야가 북방 이스라엘의 선지자인 호세아와 그 메시지가 비슷한 면이 있으며, 북방 이스라엘의 전통에 호의적인 반면에 예루살렘 성전에는 비판적인 태도를(특히 렘 7장과 26장) 취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6. 이 말은 선지서에서 자주 점하게 되는 형식이다
(예: 렘 13:3, 18:5, 28:12, 32:6, 33:1, 34:12, 36:27, 37:6, 42:7; 겔 3:16, 6:1, 7:1, 11:14등등)
7. 예레미야는 자신을 ‘아이’라 칭하고 있다. 이 단어가 어느 정도의 연령을 표시하는가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수 없다. 왜냐하면 이 말은 아주 다양한 연령층에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석달된 모세가 ‘아이’라 불리우고(출2:1이하), 유다는 아직 부모의 보호아래 있는 막내동생 베냐민을 ‘아이’부르며(창43:8,44:22,30-34), 성장중에 있던 소년기의 에서와 야곱도 이 단어로 불리우고(창25:27), 디나를 취해 그녀와 결혼을 하려던 성년기의 세겜도 ‘아이’로 불리우고 인다(창24:9). 이외에도 다른 여러 용례들을 볼때 이 단어는 어떤 절대적인 연령보다 상대적인 연령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수 있다. 따라서 이 단어는 우리말의 ‘남녀노소’ 에서 ‘소’에 해당하는 말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말은 광범위한 의미에서의 청소년층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대체로 이 연령층을 20세(출30:14; 민 1:3, 18, 14:29, 26:2, 32:11; 대하25:5 등), 25세(민 8:24), 혹은 30세까지(민 43,23; 대상23:3)로 잡는다. 이런 이유로 주석가들은 예레미야가 약BC 650-6년경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한다(왜냐하면 그가 627/26년에 소명을 받았기 때문).참조 H.F.Fuhs, TWAT'5권,pp.507-518.
8. 신 20:5-7에 보면 얼마 전에 집을 지었거나, 포도원을 만들었거나, 약혼만 자, 즉 새로운 삶을 시작한 자들은 병역에 제외시켰다. 또 예레미야는 포로로 끌려간 동포들에게 포로생활이 길어질 것이니 “집을 짓고 전원을 만들고 아내를 취하라”고 즉 새로운 삶을 시작하라고 권고하고 있다(렘 29:6). 따라서 ‘짓고 심는 것’은 새 삶을 시작한다는 의미로 해석할수 있다.
9. 단9:14에서 다니엘은 ‘하나님이 악을 (끝까지) 지켜보시다가 우리가 그의 말을 계속 청종치 않자, 우리(이스라엘 백성)에게 재앙이 임하게 하셨다'고 고백하고 있다. 따라서 이 말은 하나님께서 끝까지 지켜보시면서 그 지켜보는 일이 꼭 이루어지도록 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10. 이런 환상을 통한 말의 유희는 암8:1 이하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여기서 하나님은 여름 실과의 환상을 아모스에게 보여주시면서, 이스라엘의 끝이 올 것을 말의 유희를 통해 강조하고 있다. 즉 ‘여름 실과= 끝' 이라는 등식이 성립되는 것이다.
11. 그러나 민족의 이름을 확실히 언급하면서 한 예언들도 있다(사 10:5 합 1:6)[object HTMLTextAreaElement]
:: 필자 정보 - 이태훈/개혁신대구약학교수
이태훈/개혁신학원(M. Div)과 아세아 연합신학교와 합동신학교 그리고 독일 Munster대학(Th.D)에서 공부했다. 지금은 개혁신대구약학 교수이다.
'구약성경연구 > 예레미야' 카테고리의 다른 글
통곡할지어다(렘7:29-34) (0) | 2020.07.30 |
---|---|
거짓 평안과 참된 회복(렘14:13-22) (0) | 2020.07.17 |
성전설교문(렘7:1-15) (0) | 2014.10.31 |
유다의 죄(예레미야 2-6장) (0) | 2014.10.31 |
예레미야1장강해노트(김철원교수) (0) | 2014.10.17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