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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경연구/베드로전서

베드로전서강해④십자가 삶의 축복(벧전2:19-25)

by 금빛돌 2013. 3. 26.

베드로전서는 고난가운데 있는 성도들에게 주신 편지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먼저 고난가운서도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뻐하고 했습니다. 그리고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고난 가운데서도 거룩하라고 했습니다. 거룩이란 고난 가운데서도 변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고난가운데서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 식어질 수 있습니다. 또한 형제에 대한 사랑이 식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고난가운데서 거룩하라는 말씀은 고난가운데서도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형제에 대한 사랑이 변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벧전222절에--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말씀은 당시에 예수를 믿는 종들이 까다로운 주인의 부당한 대우로 인해서 고난을 받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18.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여기서 까다로운 자들이란 예수 믿는 종들에게 부당한 대우를 하는 주인들입니다. 사도바울은 그런 자들에 대해서도 순종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19절에서 “19. (까다로운 주인에게)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0절에 “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두 가지의 고난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죄 때문에 고난당하는 삶입니다. 20절에 보시면 “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고 합니다.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1절에 보시면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라고 합니다. 즉 우리가 원을 받은 것은 죄를 지어 고난 받는 삶이 아니라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삶입니다.

그리고 선을 위하여 고난 받는 삶으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삶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21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21. 이를 위하여(선을 위하여 고난을 받기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신 것은 우리가 그 십자가의 길을 따라오게 하시기 위합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제일 큰 문제는 십자가를 걸어놓기만 하고 십자가의 삶을 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예수님의 십자가를 본 받는 삶을 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십자가의 삶은 어떤 것입니까?

첫째는,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참는 삶입니다.

19절에 보시면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이것은 당시에 종이 당시에 악한 주인에게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는 것이 아름답고 은혜롭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십자가의 삶이 바로 이런 삶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가 없으시지만 부당하게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부당한 고난가운데서 슬픔을 참으셨습니다. 왜 그러셨겠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을 생각하심으로 그 고난가운데 참으셨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 제일 분노하시고 흥분하실 분이 누구이겠습니까?

하늘위에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어떻게 감히 인간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다는 말입니까? 당장 하늘에서 진노의 불을 내릴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오래 참으셨습니다. 왜 그러셨습니까? 이것만이 우리를 구원하실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보다 더 괴롭고 슬프고 흥분이 상황가운데서 참으신 하나님을 생각하심으로 부당한 고난 가운데서 참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본받아야 할 십자가의 삶입니다.

--초대교회 당시에 예수를 믿는 종들이 믿지 않는 상관들에게 정말 부당하고 억울한 많은 일을 당하였습니다.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하고, 또 예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는 것이 아름다운 삶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와 같이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이 땅에서 억울하고 부당한 일을 당하느냐? 그때 이 세상에 대하여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을 생각하고 오래 참으라. 또 십자가에서 부당한 고난가운데서도 참으신 예수님을 생각함으로 참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본 받는 삶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십자가의 삶은 어떤 것입니까?

두 번째는 맞대응하지 아니하는 삶입니다.

23절에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욕을 당하시되란 말은 계속해서 욕을 당하시는 동안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헤롯에게 욕을 당하셨습니다. 또 로마 군병들에게 욕을 당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런 부당한 욕을 당하시는 가운데서 단 한 번도 맞받아 욕을 하지 아니하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그에게 고난을 주는 자를 위협하시거나 협박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억울하게 욕을 당하시고, 그에게 고난을 주는 자들을 위협하지 아니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오직 공의로 심판하실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 대한 모든 심판을 모두 하나님께 맡기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세 번째는, 끝까지 그들을 사랑하는 삶입니다.

24절에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예수님은 그를 욕하고, 그에게 고난을 주는 자들에 대해서 맞대응하지 아니하시고, 모든 것을 다 하나님께 맡기고, 오직 그들을 사랑하시는 일만을 하셨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죄에서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십자가의 삶입니다. 십자가의 삶이란 단순히 고난을 주는 자에게 슬픔을 참는 삶만 아닙니다. 또 같이 욕하고 맞대응하지 않는 삶만 아닙니다. 이것은 소극적인 십자가의 삶입니다. 적극적인 십자가의 삶이란 자신을 버려 끝까지 그에게 고난을 주는 사람을 사랑하는 삶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본받아야할 십자가의 삶입니다.

네 번째는, 고난가운데서 복을 비는 삶입니다.

/벧전39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벧전3:9.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서 욕이란 2장에서 예수님께서 벧전2:23.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란 단어와 같은 단어입니다(로미도리안). 그래서 우리도 예수님을 본받아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어야합니다.

이렇게 십자가의 삶을 살 때 우리가 어떤 복을 받을 수 있습니까?

첫째, 생명과 좋은 날의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벧전3:10.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서로 욕하는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거짓을 말하지 말고 11.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며 그것을 따르라

둘째, 기도를 들으시는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벧전3:12. 주의 눈은 의인(십자가의 삶을 사는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의인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얼굴은 악행하는 자들을 (심판과 진노)로 대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

여러분 죽음의 삶이 아니라 생명의 삶, 영생의 삶을 원하십니까? 또 여러분의 삶에 정말 좋은 날을 보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1)십자가의 삶이란 부당한 일을 당해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는 삶입니다.

2)또 같이 욕하거나 악으로 대응하지 않는 삶입니다.

3)또 적극적으로 사랑하며 복을 빌어주는 삶입니다.

이런 십자가의 삶을 살아갈 때 생명과 좋은 날이 오게 될 것 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는 삶을 살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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