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의 중심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설교합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We preach Christ crucified…., Christ the power of God and the wisdom of God. (고전 1:23- 24, NIV) 이 러한 사도 바울의 고백은 초대교회의 고백이었고, 확신이었다. 초대교회의 설교와 증언의 중심에는 언제나 그리스도가 있었으며, 그분을 증거하는 것이 설교의 목적이었다. 본래 기독교의 설교의 원형은 케리그마의 선포였다. 제자들과 초대교회가 주력하였던 것은 메시아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그의 생애와 십자가의 죽으심, 그리고 부활과 다시 오심을 선포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설교의 핵심에는 언제나 복음이 있었으며,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설교의 목적과 내용은 말씀이신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모든 설교는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시드니 그레이다누스는 “그리스도가 없는 설교는 설교라고 할 수 없다”고까지 주장한다.1 말씀의 능력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되며, 설교의 영광과 능력은 설교가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되고 그분을 선포할 때 나타나게 된다.2 이러한 설교의 본질적인 관점에서 볼 때 오늘날 행해 지는 설교는 그 중심이 바르게 되어 있는가, 설교가 끝나고 난 다음에 예수님이 살아 역사 하시는가에 대해 우리는 검토해야 한다. 만약 그 속에 예수님이 없으면 설교를 다시 써야 한다. 설교에서 예수님을 놓친다면 우리는 설교의 본질을 벗어난 것이며, 거기에서는 말씀의 능력이 나타날 수 없다.3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Logos)를 통해서 성육신 되었으며, 설교(logos)를 통해서 그 말씀이 오늘 성도들의 삶 속에 구현된다. 그래서 찰스 스펄전은 주장하기를, “가장 훌륭한 설교는 그리스도로 충만한 설교이다. 그리스도가 없는 설교는 무시무시하고 끔찍한 것이다. 그것은 물 없는 우물과 비 없는 구름이며, 두 번 죽어 뿌리까지 뽑힌 나무이다”4라고 했다. 기 독교의 설교는 기독론적이어야 한다. 여기에서 기독론적이어야 한다는 말은 설교는 그리스도가 중심을 이루는 설교(Christ-centered preaching)여야 하며, 그 근본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설교(preaching Jesus)여야 함을 의미한다. 또한 그분이 전하시기를 원하셨던 복음이 중심을 이룬다는 의미를 가진다. 이렇게 기독교의 설교는 복음의 선포였고,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이 중심을 이루면서 행해져왔다. 그렇게 될 때 설교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전달 통로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설교의 중심성을 이해하면서 복음서와의 관련 속에서 기독론적 설교가 어떻게 행해질 수 있을지를 살펴보자. 복음서와 예수 그리스도 이렇게 기독교의 설교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며, 그의 복음을 선포하는 것으로 이해해 볼 때 복음서는 현대 설교에 있어서 전형적인 원천이 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복음서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의 설교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며, 어떤 점에서는 그것 자체가 설교의 형식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5 복음서는 예수님의 설교와 함께 시작되어, 제자들에게 주신 설교 명령으로 끝이 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복음서는 그 설교 사역의 본질을 보여 주며, 그 결정체(fruits)를 보여 주고 있다. 마가는 그의 복음서를 기록하면서,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preach)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막 1:14~15)는 예수님의 설교로 문을 열고 있다. 나중에 제자들을 보내시는 장면을 마태는 이렇게 묘사한다: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어 보내시며 명하여 가라사대… 가면서 전파하여(preach) 말하되 천국이 가까왔다 하고…”(마 10:5, 7).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을 보내시는 장면에서도 복음 설교를 위임하셨고(막 16:15, 마 28:19~20) 이 제자들은 이제 복음의 선포자들로 나아간다. 나중에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영구적으로 기록할 필요를 느끼면서 그들의 복음서를 기록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므로 복음서의 기록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기록하여 영구적으로 들리게 하려는 목적으로부터 시작되었으며, 그 목적의 핵심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설교가 있었다(요 20:21). 특별히 복음의 말씀은 당시 근동의 특정 교회에 전해진 것이었으며, 복음서 자체도 설교의 형태로 주어진 것이었다. 그러므로 현대 교회 속에서 행해지는 복음서의 설교는 “복음서 자체의 본질적인 확장”6인 셈이다. 이런 점에서 현대 설교자들은 원시 교회가 듣기를 원했고, 복음서 기자들이 생명을 걸고 선포하였던 설교의 원형을 현대 교회 속에 새롭게 들려 주어야 할 책임과 사명을 가진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설교 사역을 위임받아 행하였던 사도들의 설교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였다. 설교의 원형과 발전에 대해 중요한 연구를 제시한 C. H. 다드는 초기 케리그마의 내용에 대한 포괄적인 견해를 제공해 주는데, 사도행전에 나오는 베드로의 네 설교문을 분석하면서 사도적 설교의 내용을 이렇게 정리한다: 첫째, 초대교회의 설교는 하나님의 때가 성취되었음을 알리는 것이었다. 둘째,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죽으심, 부활을 통해서 일어났음을 강조한다. 셋째,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시며 새 이스라엘의 메시아가 되셨음이 강조된다. 넷째, 성령님께서 그리스도의 현재의 능력과 영광의 징표가 되심이 강조된다. 다섯째, 메시아의 시대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머지않아 성취될 것임이 강조된다. 여섯째, 케리그마는 언제나 회개가 강조되고, 죄 용서함과 성령으로 충만케 되어 구원의 선물로 받을 것이 강조되면서 결론을 맺는다.7 이러한 요소들을 통해서 볼 때 초대교회의 설교는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하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에만 초점을 맞추는 좁은 의미도 아니었으며, 삼위 하나님의 두 번째 위격이신 성자(聖子)나 영원한 로고스에 대해서만 강조하는 넓은 의미의 것만 강조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초대교회는 하나님의 옛 언약의 성취이신 나사렛 예수의 출생과 사역, 죽음, 부활과 승천, 그리고 성령님을 통한 그분의 임재, 그리고 그분의 재림을 설교하였다. 그러므로 기독론적인 설교는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의 온전한 발전이라는 맥락 속에서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설교하는 것을 의미하며,8 복음서에 대한 설교학적 접근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복음서와 기독론적 설교의 중심 메시지 그 렇다면 복음서에서 선포하였던 설교의 가장 핵심적인 골자는 무엇이었을까? 복음서에는 수많은 주제들과 내용들이 담겨 있다. 기적과 치유 이야기, 비유, 팔복산에서의 강화(講話), 종말에 대한 강화, 파송과 복음 위임 등 수많은 기록들이 있지만 기독론적인 설교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복음서의 중심 메시지를 몇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 복음서의 가장 중요한 이슈는 하나님나라였다. 이것은 초대 교회의 관심사였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설교의 핵심이었다. 예수님이나 그의 제자들은 하나님나라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취되었음을 선포하였다. 이것은 복음서에 나타나는 설교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그가 전한 복음 메시지는 언제나 하나님나라에 초점이 맞추어 있었고, 모든 가르침과 설교에는 언제나 하나님나라가 있었다. 그의 공생애의 시작과 함께 갈릴리에서 행하셨던 최초 설교의 중심 골자는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기 때문에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예수님의 전체적인 선포의 요약이었으며 방향성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많은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나라를 가르치셨다. 그의 비유는 늘 “하나님나라는 …과 같으니…”라고 시작된다.9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의 모범을 가르쳐 주실 때도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되기를 기도하라고 하셨고, 팔복산에서 전하신 산상수훈도 하나님나라의 약속들을 담고 있다. 공관복음서 기자들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님의 지상 생애 가운데 가장 중심 되는 목적이 하나님나라 설교에 있었다.10 이러한 점 때문에 존 브라이트는 “예수님의 마음속에 있었던 최고의 관심사는 하나님나라”11였다고 주장한다. 불트만 조차도 예수님의 설교의 중심점에는 하나님나라가 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기독론적인 설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셨던 하나님나라의 설교를 계속하는 것이다. 둘째로, 복음서의 주제이자 기독론적 중심 주제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들 수 있다. 십자가는 초대 교회 증언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를 차지하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었으며, 자랑거리였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 가운데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설교한다(고전 1:23)고 말한 후에, 그 다음 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했다”(2:2)고 강조하고 있다. 이것이 초대교회의 삶과 메시지에 있어서 핵심적인 요소가 되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의 클라이맥스가 십자가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바울의 기독론적 설교가 십자가에만 국한되는 것 같은 다소 협의적인 뉘앙스를 받게 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바울은 십자가 수난에만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그분의 생애, 가르침과 사역들과 결코 나누어질 수 없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십자가는 인간과 창조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보여 주고 있으며, 구속사의 정점으로 다가오고 있다. 이것은 인간의 죄의 깊이와 하나님의 사랑을 입기 위한 조건으로서의 회개에 대해서도 잘 조명해 준다. 이것은 이제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를 향한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의 전환이라는 측면에서 십자가는 인간의 타락과 이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로서의 죽음의 문제가 해결되는 중추적인 지점이며,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해가 가능케 되는 지점이 된다. 그래서 십자가는 성경의 중심적인 교리이며, 다른 모든 진리의 말씀들이 십자가 안에서 성취되며, 필연적으로 그 위에서 발견된다. 셋째로, 복음서와 기독론적 설교의 중심 메시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다. 이것은 십자가와 함께 하나님나라 복음의 성취를 위한 중요한 두 기둥 중의 하나이며, 케리그마의 핵심적인 요소를 이룬다. 부활 사건은 초대교회의 시작의 근거가 되었으며, 증언의 핵심적인 요소였다. 초대교회는 주로 주님의 부활을 중심으로 해서 모인 공동체였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제자들은 깊은 슬픔에 젖어 지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산의 맑은 공기를 타고 들리는 종소리처럼 주일 아침 부활의 놀라운 소식이 들려 온다. 굳게 닫힌 문 뒤에 겁먹은 얼굴로 숨어 있던 그들에게 들려 온 소식은 그의 삶과 신앙 생활에 있어서 극적인 변화를 가져온다. 부활신앙은 “교회를 있게 한 믿음”이었으며 “교회가 거기에 기초를 둔 믿음”이었다.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이 부활하신 날에, 주님의 다시 사심을 경축하기 위해서 한자리에 모였다. 예배 가운데 모인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의 주님을 회상(recapitulation)하고 부활하신 주님의 말씀을 통해 새롭게 그분의 임재를 경험하며 새롭게 세상으로 파송 받아 나아간다. 결국 그들의 삶은 최종적으로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증언하고 선포하는 일에 언제나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그러므로 부활은 단순하게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현존과 통치와 연관을 갖게 된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의 완성이었으며, 약속의 성취였다. 기독교의 설교는 예수의 부활과 함께 탄생되었으며, 초기의 설교자들은 예수의 이 부활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전념하였고, 그것에 그들의 생명을 걸었다. 그래서 리처드 리셔는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셨다는 사실은 오늘의 설교자가 계속해서 “설교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했다.12 물론 이러한 중심적인 메시지들은 단순하게 복음서의 메시지만은 아니며, 복음서가 이것만 언급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이러한 요소들은 기독론적 설교라는 관점에서는 언제나 중심을 이루는 메시지였다. 이러한 사건들은 단일의 사건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 역사라는 틀 안에서 이해되어야 할 내용이기도 하다. 기독론적 설교의 의미 기 독론적 설교라 함은 광의적으로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설교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만약 성구 사전을 찾아보면 신약성경에는 “천국 복음,” “그리스도의 복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자주 사용되고 있는가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용어들에서 우리는 두 가지의 특징을 발견하게 되는데, 기독론적 설교는 인간을 향한 복음의 소식을 전한다는 의미가 있으며,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설교한다는 광의적인 의미를 가진다. 그 나라는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되어 있다. 보다 특별하게 말하면 기독론적 설교는 나사렛 예수의 삶과 인격, 사역, 그리고 가르침의 여러 측면들을 선포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그러한 선포를 통하여 그분을 믿게 하고, 신뢰하게 하며, 사랑하게 하고, 그분에게 복종할 수 있도록 하는 데 목적을 가지는 설교이다.13 첫째로 기독론적 설교는 그리스도의 위격 (person)혹은 정체성(identity)을 설교한다. 조직신학이나 기독론적인 설교에서는 위격과 사역에 대한 구분을 짓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그에 대해서는 언제나 논쟁의 여지가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을 완전히 분리해서 생각할 수 있는 사항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두 요소는 완전히 분리할 수 없을 정도로 서로 얽혀 있기 때문이다. 즉 그분의 위격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분의 사역이 무엇이었는지를 이해할 수 없으며, 바른 관점에서 그의 사역을 보지 않는다면 그분의 위격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시는 그리스도의 위격과 사역을 밝게 드러나게 한다.14 그러나 그러한 구분은 메시아의 분명한 측면을 강조해 주는데 유익을 가진다. 예수님께서도 가이사랴 빌립보 지역에서 제자들에게 던지셨던 질문을 통해 그들이 예수님의 위격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갖기를 원하셨던 것을 알 수 있다. “주는 그리스도(메시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베드로의 대답은 하나님이 드러내시기를 원하셨던 계시와 관련된 내용이었다. 이러한 위격에 대해 바로 아는 것은 제자들로 하여금 그의 사역의 중심 내용인 선포, 치유, 가르치심, 그리고 죽으심과 부활하심과 같은 사역의 복합적인 중요성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 준다. 요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위격에 대한 본질(identity)에 대해 밝히면서 시작하고 있다. 또한 요한은 아무도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 하나님의 품속에 있던 독생자이신 하나님이셨으며, 그분이 이 세상에 나타나셨다고 밝히고 있다(요 1:18). 예수 그리스도의 위격은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을 드러내는 하나님의 계시의 정점에 해당한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보게 되며, 그분은 하나님을 친히 드러내시는 분이시다. 유사하게 히브리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위격에 대한 본질을 밝히면서 시작되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시며 “그 본체의 형상”(히 1:3)이시다. 이렇게 기독론적 설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위격에 대해 바로 소개하고 선포하는 것이다. 둘째로, 기독론적 설교는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해 설교한다. 요한복음은 그리스도의 위격에 대해 분명하게 제시한 다음에 그분이 행하신 사역으로서의 “표적”들에 대해서 언급한다. 그것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이심을 믿게 하고, 그 믿음을 통해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서라고 밝히고 있다(요 20:31). 이렇게 그의 사역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교량을 놓는 화해의 사역이었다. 그의 수난과 죽으심을 통해서 대속하심으로 하나님과 화해하게 하려는 사역이었다. 복음서에는 이러한 화해 사역 외에도 치유 사역에 대한 기록들이 많이 나타나 있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그의 나라의 현존의 표징이었으며, 고통 가운데 있는 인간 존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었다. 인간을 위한 대속적 죽음으로서의 십자가 수난은 그러한 하나님 사랑의 절정이었다. 또한 그의 부활은 죽음에 대한 승리일 뿐만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길을 열어놓으신 하나님 사랑의 완성이었다. 이제 성취된 하나님나라의 왕의 등극하심은 그의 승천을 통해서 나타나며, 재림 예고는 다가오는 하나님나라의 완성으로 이해할 수 있다. 셋 째로, 기독론적 설교는 그리스도의 가르치심에 초점이 맞추어 진다. 흔히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사역의 일부분으로 이해하기도 하지만 기독론적 설교에서 이것이 중요한 장이 되고 있음을 고려할 때 구분하여 설명하는 것이 좋겠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그 가르침 안에 거하면 진정으로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예수님 가르침의 중요성을 강조하신다(요 8:31~32). 또한 이것은 설교자에게 예수님이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위임하심으로 설교 가운데 예수님의 가르치심이 중요한 내용이 되어야 할 것임을 강조하신다(마 28:18~20). 그러므로 예수님이 가르치신 디다케적인 내용들은 설교와 분리될 수 없다. 예수님의 가르치심의 내용은 특별히 예수님 자신(인자, 메시아)에 대한 가르침을 포함할 뿐만 아니라 그의 사명과 다시 오심을 포함한다. 또한 하나님에 대한 가르치심과 하나님나라, 하나님의 언약, 하나님의 율법 등을 담고 있다. 복음서를 통한 기독론적 설교를 위한 성경 읽기의 실제(막 10:46~52) 이 러한 기독론적 설교의 가장 중요한 정형들을 보여 주고 있는 복음서는 설교에 있어서 풍부한 자원이며 원천이다. 복음서는 예수님에 대한 설교를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설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한다는 점에서 특별히 기독론적 설교의 중요한 모체가 되고 있다. 그것이 1세기 교회가 태동되게 했던 요인이었으며, 교회의 예배와 설교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해 왔던 것을 감안하면 특이한 일은 아니다. 성경신학자들도 복음서 연구에 있어서 설교를 핵심에 놓고 있는데, 특별히 복음서의 양식비평 연구를 발전시킨 마틴 디벨리우스(Martin Dibelius)는 설교는 복음서의 내용과 목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열쇠라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태초에 설교가 있었다”라고 주장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실재와 영향력이 설교에서 가장 충실하게 잘 나타나고 있음을 강조한다. 또한 C. H. 다드는 복음서, 특히 마가와 요한은 초기 기독교 케리그마 혹은 설교의 확장이었다고 주장한다.15 이러한 주장들이 정확하고 적절한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중요한 것은 전혀 근거가 없는 내용은 아니라는 것이다. 복음서의 구조는 예수 그리스도의 전기나 역사에 대한 현대적인 개념을 다루고 있다기 보다는 기독론적인 신학과 설교를 바탕으로 하고 있음은 사실이다. 이런 점을 고려해 볼 때 복음서의 설교는 기독론적인 바탕 위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그의 설교의 연속(continuation)이라는 측면을 고려할 때 그의 정체성과 그분이 행하신 사역과 가르침에 초점이 맞추어 져야 할 것이다. 이렇게 복음서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기독론적 설교를 위한 실제적인 접근을 위해 복음서 중 기독론적인 특성이 강하게 부각되고 있는 마가복음에서 한 본문을 취하여 논의의 틀로 삼아 보자. 마가복음 10장 46~52절 말씀은 바디매오의 스토리로 잘 알려진 본문이다. 성서일과에도 첨부된 이 본문은 사순절에 적합한 말씀이다. 마가복음에서 본문은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는가? 마가복음의 서론적인 내용이 1장 1~13절에 나오는데 요한의 설교, 예수님의 세례, 예수님의 시험받으심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그리고 마가의 주제인 하나님의 복음에 대한 내용이 1장 14~15절에 나온다. 마가복음은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첫 번째 부분은 마가복음 1장 16절에서 3장 6절에 해당하는데, 처음 제자들의 부르심으로부터 예수님의 대적자들의 음모에 대한 내용이 언급된다. 두 번째 부분은 열두 제자의 파송과 제자들의 오해에 대한 말씀인데, 마가복음 6장 7절에서 8장 21절이다. 여기에서는 4천명을 먹이신 기적 사건 이후에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21절)라는 말로 그 결론을 맺고 있다. 예수님 주변의 사람들은 예수님이 전해 주시는 말씀도, 여러 사건들과 교훈을 통한 가르침도 이해하지 못한 채로 이제 세 번째 부분으로(8:22~10:52) 넘어가고 있다. 여기에서는 진정한 제자도와 예수님의 길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구체적으로 세 번의 수난을 예고하시는데(8:27~9:1, 9:30~59, 10:32~45) 이렇게 계속되는 수난 예고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여전히 깨닫지 못하는 상태 가운데 놓여 있으며, 오늘의 본문은 이러한 맥락 속에 위치한다. 복음이 선포되고 있으나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을 뒤로하고 예수님은 이제 네 번째 파트에서는 수난의 길을 향해 올라가신다(11:1~13:37). 본문의 말씀은 마가복음의 여러 치유 스토리 가운데 가장 마지막에 해당하는데, 이 치유 스토리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다. 운명적으로 불행을 안고 태어난 사람, 보지 못하는 답답함 가운데 있는 사람을 치유하셔서 제자로 세우시는 모습을 우리는 대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마가복음의 구조 중에 세 번째 부분의 결론과 같은 말씀으로 제자도와 열두 제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길에 대한 말씀의 결론으로 나타난다. 주님이 가시는 길과 그분의 제자됨의 의미를 적절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을 뒤로 하고 이제 고난의 길로 홀로 걸어 가시는 길목에서 만난 그 사람은 이제 “길에서”(on the way) 예수님을 따라 나서고 있다. 이것은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51절)라고 묻는 말씀과 잘 연결을 이루고 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말씀과 회복자로 우리 가운데 거하고 계시나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의 모습은 안타까움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안타까운 사람들은 시각 장애를 안고 비참한 삶을 살고 있는 바디매오가 아니라 제자들이었다. 이것은 단순히 제자들의 문제만이 아니라 죄를 범하여 하나님을 떠난 인류전체의 문제였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들이 영접하지 않았다”는 요한복음의 말씀은 이런 안타까운 인간 군상의 모습을 보여 준다. 이러한 인간 군상들의 믿음과 삶을 치유하시기 위해 예수님은 이제 십자가의 길로 올라가시는 길목에서 표면적이고 외적인 닮은꼴로 예수님께로 돌진해 나아오는 한 사람을 보신다. 이 기적 기사의 결론은 단일 구절로 귀착되는데 52절 말씀이다: “곧 저가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좇으니라.” 보지 못하는 제자들과는 너무나 다르게 앞을 보지 못한 시각 장애인이 예수님을 명확하게 보고 있다는 사실은 이 본문이 보여 주는 신비로움이다. 육신의 눈은 떴으나 영적인 맹인인 사람들, 육신의 눈은 멀었으나 영적으로 바로 보고 있는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부르고 있다. 간절함으로 예수님을 부르는 그 음성은 이제 주님의 부르심으로 응답을 받는다. 여기에서 가장 독창적인 것은 “부르심”이다.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소리쳐 부른다. 그리고 그가 부르는 소리를 들으면서 예수님도 그를 부르고 계신다. 왜냐하면 그 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고백하는 확고한 믿음이 있음을 발견했기 때문이며, 그분의 능력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아름다운 믿음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목에서 모두가 무지 가운데서 보지 못하고 있는 순간에 명확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는 그 사람은 주님을 만날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아름다운 믿음도 용솟음치고 있는 것을 보셨기 때문이다. 여기서 설교자가 본문으로부터 설교작성으로 나아갈 때 유의해야 할 사항이 있다. 이 본문에서 유난히 부각되는 아름다운 믿음의 사람을 보게 된다. 무지와 어두움 속에 서 있던 예수님 주변의 사람들을 생각해 본다면 바디매오는 주님이 인정하실 만한 믿음의 사람임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므로 설교의 중심을 바디매오의 인정받았던 믿음에 초점을 맞추어 설교를 작성할 수도 있겠으나 본문 주해를 바로 한 경우에는 본문이 중점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은 그것이 아님을 발견하게 된다. 여기에서 드러나는 것은 바디매오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identity)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한스 프라이가 지적한 대로 복음서와 그 네러티브 속에 나타나는 특정 장소와 구체적인 이름 등에 대한 서술들은 복음서의 네러티브 속에서 드러나고 있는 독특하면서도 대체할 수 없는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것임16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본문을 가지고 설교문을 작성할 때에 최종적인 강조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과 사역에 맞추어 져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복음서에 대한 설교는 예수의 정체성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찰스 캠벨의 주장은 적절한 것이다. 이것을 그는 “복음서의 귀속 논리”(ascriptive logic)로 이해하면서 복음서의 설교를 이것이 제한하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기독교의 설교가 마땅히 취해야 할 방향성을 제시해 주고 있다고 이해한다.17 나가는 말 말씀이 되어 이 땅에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시기 위해서 오셨고, 교회와 설교자들에게 설교를 위임하셨다. 교회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선포와 해석의 역사였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오늘의 시대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선명하게 들려 주어야 할 책임을 가진다. 그래서 데이비드 버트릭은 “어떤 점에서 그리스도는 언제나 신비로운 상징적인 인물(mysterious symbolic figure)”18이라고 규정한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오늘의 시대 속에 영원한 하나님의 신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새롭게 해석하여 들려 주어야 할 책임이 있다. 그러므로 현대 교회는 설교에 있어서 기독론적 특성을 회복하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설교는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서 말할 뿐만 아니라 오늘의 회중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하심을 알게 하고 경험하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 기 독론적 설교의 가장 중요한 표지인 성육신의 특성을 이해하고, 이렇게 오늘의 삶 속에 그분의 정체성과 임재를 선포하는 것이야말로 오늘의 청중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이 현존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될 것이다. 주註 1. Sidney Greidanus, Preaching Christ from the Old Testament: A Contemporary Hermeneutical Method (Grand Rapids: Eerdmans, 1999), 2. 2. Bryan Chapell, Christ-Centered Preaching: Redeeming the Expository Preaching (Grand Rapids: Baker Books, 1994), 19~22. 3. 류영모, 「꿈대로 되는 교회」 (서울: 나침반사, 2000), 265~66. 4. Charles Spurgeon, Metropolitan Tabernacle Pulpit, vol. 14 (Pasadena, TX: Philgrim, 1984), 467. 5. Sidney Greidanus, “Preaching in the Gospels,” in Handbook of Contemporary Preaching: A Wealth of Counsel for Creative and Effective Proclamation, ed. Michael, Duduit (Nashville: Broadman Press, 1992), 329. 6. 위의 책. 7. C. H. Dodd, The Apostolic Preaching and Its Development (London: Hodder & Stoughton, 1936), 38~43. 8. Greidanus, Preaching Christ from the Old Testament, 4. 9. 하나님나라와 예수님의 설교, 그리고 오늘의 설교와의 관계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을 위해서는 김운용, “하나님나라의 선포로서의 설교,” 서정운 명예총장 은퇴 기념 출판위원회 편, 「하나님나라와 선교」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1), 413~36쪽을 참조하라. 10. 마 4:12~17, 4:23, 9:35, 막 1:14~15, 눅 4:43, 8:1, 9:11; 공관복음에 나타나는 하나님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선포, 가르침, 논쟁의 범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1. John Bright, The Kingdom of God: The Biblical Concept and Its Meaning for the Church (New York: Abingdon-Cokesbury Press, 1953), 17. 12. Richard Lischer, A Theology of Preaching: The Dynamics of the Gospel, rev. ed. (Durham: The Labyrinth Press, 1992), 16~17. 13. Greidanus, Preaching Christ from the Old Testament, 8. 14. Gerrit C. Berkouwer, The Person of Christ, trans. John Vriend (Grand Rapids: Eerdmans, 1955), 101~106. Greidanus, Preaching Christ from the Old Testament, 8쪽에서 재인용. 15. Dodd, The Apostolic Preaching and Its Development; Martin Dibelius, From Tradition to Gospel, trans. Bertram Lee Woolf (New York: Scribner’s, 1935). 16. Hans Frei, The Identity of Jesus Christ: The Hermeneutical Base of Dogmatic Theology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75), 131~38. 17. Charles L. Campbell, Preaching Jesus: New Directions for Homiletics in Hans Frei’s Postliberal Theology (Grand Rapids: Eerdmans, 1997), 190~193. 18. David G. Buttrick, Preaching Jesus Christ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88), 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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