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목사님이 교회에 새로 부임을 하셨다고 합니다. 그때 어떤 집사님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목사님 우리 교회에 와서는 절대 헌금설교를 하지 마십시오, 헌금설교는 은혜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목사님이 하시는 설교를 듣고 은혜가 되면 헌금겠습니다”고 했다고 합니다.
어떤 분들은 헌금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그것은 고상하고, 영적이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헌금에 대해서 아주 부정적이며, 인색합니다. 바로 고린도 교회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고후8:7. 오직 너희는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풍성한 것 같이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
고린도교회 사람들은 믿음에 관한 것, 또 말에 관한 것은 방언에 관한 것입니다. 또 지식은 어떤 지식적인 원리를 가리킵니다. 모든 간절함은 신앙의 열정입니다. 또 사랑에 관한 것과 같은 것에 대해서 아주 관심이 많습니다. 또 풍성하며, 칭찬할 만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런 것이 풍성한 것처럼 너희가 이 은혜에 대해서도 풍성하게 되기를 바란다고 합니다. 여기서 은혜란 헌금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고린도 교회 사람들이 믿음과 방언과 간절한 신앙에 대해서는 고상하고 가치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지만, 헌금하는 것에 대해서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요즈음 보면 좀 지식이 있다고 하는 지성적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런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헌금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 아주 기분 나빠 하며, 거부감을 느낍니다. 바로 이 고린도 교회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그래서 이 고린도교회 사람들은 헌금에 대해서 아주 인색했습니다.
이것이 10절과 11절에 있습니다.
“10. 이 일에 관하여 나의 뜻을 알리노니 이 일은 너희에게 유익함이라 너희가 일 년 전에 행하기를 먼저 시작할 뿐 아니라 원하기도 하였은즉
11. 이제는 하던 일을 성취할지니 마음에 원하던 것과 같이 완성하되 있는 대로 하라”
당시 예루살렘교회에 큰 기근이 일어났습니다. 그때 사도 바울은 모든 교회를 독려하여 구제 헌금을 거두고 있었습니다(고전16:1-4). 그 일을 위해 디도와 같은 많은 바울의 동역자들이 동참을 했습니다. 또 많은 교회가 참여했습니다. 특히 마게도냐 지방에 있는 빌립보교인나 또 데살로니가 교인, 그리고 베뢰아 교인들은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행16:11,17:5).
그런데 이 고린도교회만큼은 이런 헌금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 글을 쓰기 일 년 전(BC 54년경)에 헌금에 관한 부탁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때는 헌금을 하겠다고 작정했습니다. 그런데 일 년 동안 아무 반응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일 년 뒤 바울이 다시 이 편지를 쓰면서 헌금을 부탁하고 있습니다. 결국 롬15:25-27절을 보면 바울은 이 고린도 교회까지 포함해서 여러 교회를 통해서 거둔 구제헌금으로 예루살렘교회에 전달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행24:17).
이와 같은 역사적인 배경을 가지고 바울이 헌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헌금에 관한 말씀이 필요합니다. 장로교의 창시자인 칼빈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헌금에 관해서 설교를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헌금에 관해서 성경대로 바르게 설교하지 않은 것이 문제다”고 했습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제일 큰 욕망은 물질에 대한 소유의 욕망입니다. 이것은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헌금이라는 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물질에 대한 소유욕을 어떻게 하나님을 위해 포기할 수 있느냐에 대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오늘 사도 바울의 이 말씀 통해서 각자의 헌금 생활을 한번 돌이켜 보시는 시간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헌금에 대해서 고린도 교회 사람들에게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1절에 보면 바울은 마게도냐 교회들(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사람들에게 주신 은혜에 대해서 말합니다. 1.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그 은혜가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2절입니다. 2.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마게도냐 지방 사람들이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이 하나님께 넘치는 기쁨으로 살았습니다. 또 극심한 가난이 풍성한 헌금을 하게 했습니다. 이것이 마게도냐 사람들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또 4절을 보시면 이 은혜와 성도를 섬기는 일이 무엇입니까? 은혜와 성도를 섬기는 일이 모두 헌금하는 일입니다. 또 5절을 보시면 자신을 주께 드리고, 하나님의 뜻을 쫓아 사도에게 준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도 헌금입니다. 그래서 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 은혜를 그대로 성취하도록 하라고 합니다. 이 은혜가 무엇입니까? 헌금입니다.
이런 바울을 말을 통해서 볼 때 헌금이란 무엇입니까?
1)헌금이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의 표시입니다.
우리는 주일 교회에 나오는 것--그리고 예배를 드리는 일--그리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 또 직분을 맡아 봉사하는 것-또 성도를 섬기는 일-그리고 헌금하는 것을 우리는 부담스런 것과 의무감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 일을 하면서 피곤하다 지쳤다 못 하겠다 라고 하는 분들은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하나님의 모든 일은 부담감과 단순한 의무감이 아닙니다. 정말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해야 합니다.
우리가 헌금을 하는 것도 단순한 의무감과 부담감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왜 우리가 충성하고 봉사해야 합니까? 우리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왜 우리가 헌금해야 합니까? 그것도 우리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그래서 2절에 마게도냐 성도들이 어떻게 많은 환난과 극심한 가난이 풍성한 헌금을 하게 했습니까?
그 이유는 그들의 극심한 가난,,또는 환난보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이 그것보다 더 넘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그 어떤 환난이나 고난이나 어려움과 가난을 능가하고, 극복할 수 있는 힘이라는 사실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에게 있는 어려움을 하나님께 해결해달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하나도 해결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큰 산이 있었습니다. 그때 그 사람은 꿈에 하나님 저 산을 없애 달라고 없애달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보니까 산이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산이 없어지게 한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산보다 더 강의 물을 부어주셔서 산을 뛰어넘게 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문제가 어려움이 있을 때 그 어려움을 뛰어 넘는 은혜를 달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마게도냐 사람들은 극심한 가난과 환난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더 풍성한 헌금을 할 수 있었던 비결은 그것을 뛰어넘은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그 은혜에 감사한 마음으로, 헌금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왜 내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이렇게 없는가? 라고 불평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누구에게나 동일입니다. 무엇보다 우리에게 가장 영광스러운 구원의 은혜가 있지 않습니까? 이것만 생각해도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내 삶 가운데서 그 어느 것 하나 하나님의 은혜가 없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혹 내가 병이 나고 우리 가족이 아픈 것이 하나님의 징계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그 육신의 질병을 통해서 하나님을 더 간절하게 찾게 되었다면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혹 내게 어떤 육신의 아픔이 있다면 그것도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내게 있는 육신의 아픔을 통해서 내가 하나님께 더 겸손해질 수 있었다면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에게 은혜가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에 감사하지 못한 것이 문제입니다.
감사는 마치 빈 컵에서 공기를 빼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 빈 컵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빈 컵에서 공기를 빼면 공기가 작아질 것 같습니다. 그런데 빈 컵에서 공기를 빼면 뺄 수도록 새로운 공기 더 더 많이 들어갑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 감사를 하면 할수록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가운데 더 감사할 것을 더 풍성히 채워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지난 번 교회에 있을 때 새신자 예배시간에 말씀을 마친 후 헌금시간에 돈을 내지 말고 감사의 쪽지를 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헌금시간에 감사쪽지를 받고 감사의 제목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렇게 감사의 쪽지를 나누는데, 매주 마다 어떤 분이 빠닥빠닥하고 깨끗한 천원짜리 세 장씩을 헌금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새신자부 총무를 하시는 집사님이 광고를 할 때 "여러분 이 시간에는 돈으로 헌금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새신 자들이기 때문에 헌금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니 제발 헌금을 하지 마시고 그냥 감사쪽지만 내주어주시기 바랍니다" 고 광고했습니다,
그런데도 계속해서 삼천 원 헌금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누가 하는가를 알아봤습니다.
그랬더니 교회 주위에 살던 아주 가난한 할머니였습니다. 그 할머니는 교회에 나온 지도 얼마 되지 않는 그런 할머니였습니다. 알고 보니 그 분은 한 달에 생활 보조비로 8-9만원씩 받아서 혼자 살아가시는 가난한 분이었습니다. 그 할머니는 글도 적을 줄 모르는 분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나와 하나님께 감사하는 내용을 서로 나누자고 하니까//글도 모르고, 적을 줄로 모르지만, 그래서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할머니로서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의 표시로 "매주 깨끗한 새 돈 삼천원"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 돈은 어떤 부자의 삼천 만원보다 더 값지고 귀한 헌금이었습니다.
--이와같이 헌금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입니다.
다윗은 성전건축을 위해서 백성들과 함께 헌금을 한 후에 이렇게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올리고 있습니다.
대상29:14. 나와 내 백성이 무엇이기에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이 헌금에 관한 설교를 하려고 할 때 가슴이 찢어지도록 마음이 아픕니다. 그것은 요즘 이렇게 경제가 어렵고 힘들고 또 앞으로 어려울 것이 예상이 되는데, 교회에서 또 돈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하는가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래서 헌금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드려져야 합니다. 이 점에 있어서 얼마나 많은 양을 하나님께 드렸는가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얼마를 하시든, 그 어떤 상황 속에서라도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줄 아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적은 액수라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예물을 드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그것이 참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줄을 믿습니다.
또 사도바울이 헌금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합니까?
2)헌금은 자원하는 마음이되 또한 최선을 다해서 드려야 합니다(3).
3.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과부는 두 렙돈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두 렙돈은 우리 돈으로 1500정도라고 합니다. 과부의 두 렙돈은 과부의 전 재산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은 것을 하나님께 드렸다고 말씀하십니다(눅21:3). 마게도냐 사람들은 그들이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이 지나도록 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리되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3)또 헌금은 성도들을 섬기는 마음으로 드려야 합니다(4).
4. 이 은혜(헌금)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헌금은 은혜이자 성도를 섬기는 일입니다. 성도를 사랑하는 일입니다.
왜 이번에 우리가 헌금을 작정합니까? 성도를 섬기고 사랑하는 일에 함께 참여하기 위함입니다.
평생 환자를 돌보았던 90살 된 의사가 한 말이 있습니다. 평생 죽음 직전의 환자를 돌보면서 그분들이 3가지 공통된 후회가 있었다고 합니다. 첫째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였습니다. 둘째는 맺혔던 것을 풀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고 했습니다. 셋째는 내게 있는 것을 더 나누지 못하고 베풀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돈을 많이 가져도 그것을 가지고 저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땅에 영원하지 않은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특별히 육신이 연약한 성도님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성도를 섬기는 일에 함께 참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4)5절에 보면 이렇게 헌금하는 것은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행위"입니다.
5. 우리가 바라던 것뿐 아니라 그들이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주었도다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했을 때, 입으로만 감사할 때가 많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과 입술로 감사하는 제사도 받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의 마음과 입술로 감사한다고 하는 것이 너무 관념적이거나, 또 정말 우리의 모든 것을 드리지 않고, 그냥 입술로만 감사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감사는 입술만 아니라, 우리의 온 몸의 감사를 받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헌금입니다. 헌금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온 몸을 하나님께 드리며 감사하는 행위입니다. 물질이 있는 그곳에 내 마음이 있습니다. 그 물질을 하나님께 드림으로 내 마음과 몸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5)헌금은 순간적인 감정이 아니라 준비하고 드려야 합니다(10-11).
10절과 11절을 보시면 “10. --너희에게 유익함이라 너희가 일 년 전에 (헌금을) 행하기를 먼저 시작할 뿐 아니라 원하기도 하였은즉 11. 이제는 하던 일(헌금을 작정한 일)을 성취할지니 마음에 원하던 것과 같이 완성하되 있는 대로 하라”고 합니다.
여기서 보시면 고린도 교회 사람들은 일 년 전에 자원하는 마음으로 헌금을 하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러니까 헌금은 순간적인 감정이 아니라 준비하고 드려야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혹시 여러분 가운데 오늘 헌금을 작정하는 것이 마음에 준비가 되지 않았다면 하나님께 더 기도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마음이 준비가 되시면 하나님께 작정하시기 바랍니다. 또 바울은 헌금을 작정했다면 작정한 일을 성취하라고 합니다. 이것을 6절에서는 “이 은혜를 성취하게 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헌금을 작정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또 작정한 것을 성취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이 은혜를 성취할 수 있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6)헌금은 사람을 보고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보고 드려야 합니다(엡 6:18-20).
작년에 어떤 권사님이 암에 걸렸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전화를 드리고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권사님이 목사님 제가 얼마나 살겠습니까? 그러니 제가 내년에 교회 공사를 위해서 헌금을 하겠습니다 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절대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 돈을 치료비에 쓰시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날 또 전화가 왔습니다. 목사님이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님께 드려야겠습니다 고 했습니다. 그래도 절대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날 권사님께서 은행에서 돈을 찾아서 직접 저에게 가져다 주셨습니다. 그때 저는 순간적으로 움찔했지만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권사님의 마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권사님 이 돈은 저에게 주는 돈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돈입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 주일에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빌립보 교인들은 바울이 옥에 갇혔을 때 물질도 도와준 유일한 성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드린 헌금이 사람에게 드린 헌금이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께 드린 예물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빌4:18.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가 준 것(헌금)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고 합니다.
우리는 헌금을 사람을 보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누구에게 헌금을 주어도 그것은 하나님을 향하여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바브로디도에게 헌금을 받은 것이 자신에게 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준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 헌금이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구약시대에 하나님께 제물을 드릴 때 사용했던 표현입니다. 그래서 “출29:18. 그 숫양 전부를 제단 위에 불사르라 이는 여호와께 드리는 번제요 이는 향기로운 냄새니 여호와께 드리는 화제니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드리는 예물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려지는 향기로운 제물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19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9.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하나님은 흘러넘치실 정도로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시50:10. 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뭇 산의 가축이 다 내 것이며 11. 산의 모든 새들도 내가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12.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아니할 것은 세계와 거기에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풍성하심대로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의 모든 쓸 것을 채워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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