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들은 지금이 말세라고 생각하십니까? 많은 사람들이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시대를 말세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지금 이 시대가 말세인 증거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전 세계적으로 전쟁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시대가 윤리적으로 너무 타락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시대의 모습을 보면서 “이 세상이 말세다. 그리고 곧 세상에 종말이 오겠다” 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말세의 징조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26. 노아의 때(노아의 심판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종말의 심판 때)에도 그러하리라” 예수님께서는 노아 때에 세상이 심판을 받은 것처럼, 종말의 심판 때도 노아와 때와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노아의 때에 사람들이 어떻게 살다가 심판을 받았습니까?
27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27.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망시켰으며”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보면 “노아 시대의 사람들은 시집가고 장가가고 먹고 마시고 하다가 멸망을 받았다” 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28-30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28. 또 (마지막 종말의 때가)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29.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오듯 하여 그들을 멸망시켰느니라 30. 인자가 나타나는 날(종말의 때)에도 이러하리라”고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보면 롯의 시대 사람들은 노아 시대에서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는 것”이 더 생겼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또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는 일이 잘못된 일입니까? 그것은 분명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도 이 땅에서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지으며 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이 이 말씀에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제일 경계해야 할 삶은 일상성에 빠지는 삶이라는 것 입니다. 특별히 이 말씀은 믿지 않는 사람들을 경계하기 위한 말씀도 되지만 믿는 우리를 위해서 주신 말씀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구약 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의 삶에서 볼 수 있습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타락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는 과정이 있습니다.
첫째는 그들이 출애굽의 사건을 잊어버립니다.
둘째는 세상 속에서 일상적인 일들에 빠집니다.
셋째는 일상적인 일 중에서의 하나가 그들의 삶의 우상이 됩니다.
넷째는 경고가 주어집니다. 그러다가 그들은 심판받습니다. 심판 중에서 제일 큰 심판은 그들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거두어 가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타락이 갑자기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삶이 일상성에 빠지는 데서부터 타락하게 되는 것을 봅니다.
/우리는 이러한 모습을 우리들의 삶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처음 예수를 믿을 때 정말 뜨거운 구원의 감격을 경험합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경험이 필요합니다. 만일 수십 년 교회 생활을 하면서 구원의 확신이나, 감격을 가지지 않았다면 처음부터 신앙생활을 다시 점검해야 합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의 첫 번째 현상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합니다. 또 기도에 배고파하는 삶을 삽니다. 그래서 열심히 말씀을 보고 공부하고 그 말씀에 은혜를 받고 기도하는 삶을 삽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신앙이 자랍니다. 이것을 영적 성장이라 합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삶은 날마다 영적인 성장을 경험하는 삶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한때는 구원의 감격과 말씀의 감격 속에서 살아가던 사람이 취직합니다. 그리고 직장생활에 매여 주일을 한두 번 빠집니다. 처음에는 한 주만 빠져도 죽을 것 같다가 그 생활에 적응을 합니다.
/그러다가 나름대로 자신의 삶에 합리화가 이루어집니다.
“굳이 뭐 교회에 나가는 것만이 신앙인가? 열심히 세상 속에서 잘 살아가는 것도 신앙이 아닌가?” 어떻게 보면 그 말이 맞기도 합니다. 우리가 교회에 잘 나오는 것만이 참된 신앙이 아닙니다. 세상 속에서 하나님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도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세상 속에서의 삶을 주장하는 것은 좋은데, 세상 속에서 일상적인 일들에만 빠져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 속에서의 일상적인 삶을 살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일상성에 빠지는 삶을 경계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무엇이 일상성에 빠지는 삶인가를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또 일상적인 삶을 살아가되 그 일상적인 일들에 빠지지 않는 삶은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먼저 일상성에 빠지는 삶이란 어떤 것입니까?
첫째, 오늘 본문에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일상성에 빠지는 삶이란 일상적인 삶에 빠져서 종말을 의식하지 않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왜 기독교 문화가 발달한 곳에서 무덤이 일상적인 생활을 하는 곳에 있겠습니까? 그 이유는 우리가 일상적인 사는 곳에서 항상 개인의 죽음과 종말을 준비하는 삶을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일상적인 삶 속에서 종말을 잊어버리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노아의 때가 그러했고, 소돔의 때가 그러했습니다. 또 지금 이 시대가 바로 그런 시대입니다. 종말이 닥친다는 말씀을 들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종말을 의식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만일 지금 우리의 삶이 매 순간 종말을 의식하고 있지 않고 살고 있다면 이것이 바로 일상성에 빠져있는 삶입니다.
/두 번째, 일상성에 빠지는 삶이란 일상적인 삶에 빠져서 그리스도인들의 기본적인 경건의 생활조차 잊어버리고 사는 것입니다. 너무 바빠서 하루에 단 10분이라도 기도하지 않습니다. 말씀을 볼 시간도 없습니다. 처음에는 잠시라도 기도하지 않으면 못살던 사람이 이제는 기도하는 것이 어색하고 말씀을 보는 것이 어색한 삶을 살아갑니다.
//정말 요즘 사람들이 바쁘게 살아간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떤 분들은 집에 일찍 나가서 저녁 늦게 들어오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시간상으로 보았을 때 기도하고 성경 볼 수 있는 여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바쁘더라도 중요한 것은 마음입니다.
내 몸이 전혀 기도할 수 없을 정도로 바쁘고 힘들지만,,,,,,,,그의 마음은 세상 속에 빠지지 않고 간절히 하나님을 찾고 ,,,,말씀을 사모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세 번째, 일상성에 빠진 삶이란 물질적인 부요함에 빠져서 우리 영혼의 피폐함을 보지 못하는 삶입니다.
이것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라오디게아 교인들의 삶입니다. 라오디게아는 금이 나오는 도시입니다. 그래서 육신적으로 부요했고, 자부심이 강한 도시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의 관심은 오직 육신적인 부요함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영적으로 보았을 때는 완전히 피폐하고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들의 영적인 피폐함을 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말하기를 “우리는 부자라 조금도 부족할 것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이 시대가 이러한 라오디게아의 길을 걷고 있지 않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또 일상성에 빠지는 삶이란 우리의 교회 생활에도 나타납니다.
교회에 잘 나온다고 해서 일상성에 빠지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에 잘 나오고도 일상성에 빠질 수 있습니다.
예배를 매주 드리지만 예배 가운데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보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그 말씀이 내 마음속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찬양해도 그 찬양이 나의 진정한 삶의 신앙고백이 되지 않습니다.
최대한 빨리 간단히 예배를 드리고 빨리 집에 가서 딴 일을 하고 싶어 합니다.
예배의 제단에 오지만 제단 가운데 계신 하나님을 보지 못합니다. 형식적으로만 교회에 옵니다. 성전 마당만 밟습니다. 이것이 교회 생활에서 일상성에 빠진 신앙생활입니다. 이러다가 이제 하나님 자리에 내 직장이 들어갑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돈이 들어갑니다. 또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들어갑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의 우상입니다.
2.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일상적인 삶들을 살되 이러한 일상성에 빠지지 않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1.매 순간 종말을 의식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어리석은 다섯 처녀의 차이가 무엇인 줄 아십니까?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종말의 주님이 이미 왔다고 생각하고 살아갔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오늘이 마지막이다. 오늘 주님이 오신다” 라고 하면서 매일 매일을 살아 가야합니다. 또 언제든지 오늘이라도 주님이 나를 부르실 수 있다고 생각하고 살아가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오늘 밤에 주님이 오신다고 우리가 장사하는 것, 공부하는 것, 시집 장가가는 일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시집가고 장가가고 장사를 하되 오늘 밤이라도 주님 오실 준비를 하고 살아가야 합니다(고전7:29).
/또 매일 매일 종말을 기억하면서 살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이 주일만이라도 우리는 종말적 신앙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저는 예배를 인도할 때 이 예배의 시간이 바로 종말의 주님 앞에--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 있는 기분으로 예배를 드리려고 노력합니다.
/저는 오늘 이 예배가 있고, 또 그 다음 예배가 있겠지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예배의 시간이 최후의 심판의 시간이다 라는 생각으로 예배를 드리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이런 마음으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될 때 절대 형식적인 예배를 드릴 수 없습니다.
/그러면 오늘 이 하루가 주님이 오시는 날이다 오늘 밤이라도 주님이 나를 부르실 수 있다고 한다면 여러분 종말의 주님께서 우리를 판단하실 때 제일 중요한 기준이 무엇이겠습니까?
주님이 오시면 우리가 얼마나 많은 재산을 모았느냐를 보지 않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느냐를 보지 않습니다. 종말의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은 거룩입니다(벧후3:10). 거룩이란 형식적인 거룩이 아니라 세상과 다르게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오늘 밤이라도 주님이 오신다고 생각하면서 살아간다면, 이 땅에서의 성공보다 세상과 다른 삶을 추구하며 살아가시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또 일상성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일상적인 삶 속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에녹의 삶을 보시기 바랍니다. 히브리서에 보면 에녹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가 어떻게 살았기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 수 있었습니까?
창세기에 에녹은 삼백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에녹이 그 어떤 세상일도 하지 않고, 산속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에녹은 자녀를 낳으면서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여기서 자녀를 낳으면서 라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자녀를 낳기 위해 결혼을 해야 합니다. 또 낳은 후에 자녀를 기르기 위해 돈을 벌어야 합니다. 또 자녀가 자라면 시집 장가를 보내야 합니다. 그런데 에녹은 이런 삶을 살면서 단순히 아이를 낳고 기르는 일만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일상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본받아야 할 삶입니다.
--우리는 열심히 직장생활하고 우리의 생업에 충실해야 합니다. 열심히 자녀를 양육하고 길러야 합니다. 누구보다 열심히 세상 속에서 우리가 맡겨준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삶이 에녹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 어떻게 하는 것이 일상적인 삶 속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겠습니까?
아모스 3장 3절에 “암3:3. 두 사람이 뜻이 같지 않은데 어찌 동행하겠으며”라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매 순간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삶입니다,
하나님 내가 직장생활을 하는데,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입니까?
돈을 벌어야 하는데,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까? 그래서 매 순간 나를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구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삶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여러분들의 일상적이고 바쁜 삶 가운데서도 항상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일상적인 삶 속에서도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살아가시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일상성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일상적인 삶 속에서 우리의 신앙이 나타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왜 노아 시대와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이 멸망했습니까?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들고,,또 사고 파는 일상적인 일들에만 메여서 멸망했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런 일들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도 일상적인 삶을 무시해서는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일상적인 삶 속에서 과연 우리의 신앙이 그 속에 나타나느냐 하는 것입니다. 요즘 언론에 나오고 있는 대기업 회장이 종교적인 신념으로 부인이 아닌 다른 여자 사이에 낳은 혼외자와 같이 살기로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회장이 기독교인이라고 합니다. 무늬만 기독교인입니다.
--- 바로 선지자들이 문제를 삼았던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너무나도 화려하고 거창한 예배를 드리고, 많은 예물을 가지고 왔는데, 그들은 이웃집의 과부 된 사람들을 무시하며 살아갑니다.
그때 선지자는 무엇을 두고, 어떻게 책망합니까?
너희가 아무리 내게 많은 예물을 가지고 내게로 오지만, 너희 손이 네 주위의 고아와 과부를 무시하고 학대한 손이라면 내가 어떤 재물이라도 받지 않겠다. 오히려 너희가 고아와 과부를 무시한 손을 가지고 내게로 오면 내가 너희 재물이 역겨워서 도저히 못 참겠다고 주님은 말씀을 하십니다.
그때 아주 경건한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내 이웃에 있는 과부를 돌아보는 삶은 너무 일상적이고 사소한 삶이 아닙니까?
주님 저는 그런 사람들에게 대한 관심보다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에 더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런 시시한 일에는 보다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일을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고 합니다.
그때 주님은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네가 시시하게 여기고 사소하게 여기는 과부와 나는 함께 하고 있다. 나는 고아와 과부의 하나님이다. 그런데 너는 그 과부를 돌아보지도 못하고, 그들에게 상처를 주면서 어떻게 이 예배의 자리에 나와서 나를 섬긴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 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그렇습니다.
예배가 중요하지 않다, 또 하나님께 기도하는 경건의 삶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누구보다 이 예배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이 예배를 경건하고 엄숙하게 드려야합니다.
그러나 예배가 중요한 만큼 --똑 같은 비중으로--우리가 일상적인 삶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는 것도 그만큼 중요합니다.
/간사 시절 매일 11시,12시에 집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주일마다 20-30명씩 청년들을 집에 데려와 밥을 먹고 밤늦게 까지 집에 청년들이 있었습니다. 그랬더니 어느 날 아내가 제게 불평을 털어놓았습니다. 제발 집안 일 좀 도와주었으면 좋겠다, 너무 힘들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제가 말했습니다. “뭐 내가 세상적인 일로 돌아다니는 것이 아니지 않느냐. 그리고 나는 거룩한 하나님나라의 일을 하고 있다. 그러니 방청소하고 설거지 하는 그런 자질구레하고 사소한 일들을 내게 시키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아브라함 조슈아 헤셀의 예언자들이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선지자들은 자질구레한 일상적이고, 사소한 일에 관심을 두고 있다. 그 사소하고 일상적인 일속에 신학과 신앙이 나타나지 않음을 두고 책망한다”는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저는 그 책을 보고 하나님 앞에서 크게 회개했습니다.
“아 그렇구나 내가 나가서 말씀을 전하고 강의를 하는 것만큼 집에서 아내를 도와 방청소를 하고, 설거지를 도와주는 것도 하나님의 일이구나, 그 속에 내 신앙과 신학이 나타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교회 안에서 어떻게 살아가는 것도 보시지만, 지하철 안에서 노약자를 보았을 때 어떻게 자리를 비워주느냐를 지금도 지켜보고 계십니다.
/또 주님은 우리가 교회의 법을 지키려고 노력하듯이 우리가 교통법규도 어떻게 지키느냐를 보고 계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교회 안에서 사람들끼리 인사를 하고 예의를 갖추는 것도 보시지만, 길거리에서 우리 이웃들에게 어떻게 인사를 하느냐를 보고 계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교회에서 어떻게 밥을 먹느냐고 보고 계시지만, 우리가 식당에서 식당 종사자들에게 어떻게 하느냐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교회에서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느냐도 보시지만, 우리 아파트에서 일하시는 분들을 어떻게 대하는지도 지켜보고 계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전도지를 돌리는 것도 보시지만, 길거리에 쓰레기를 줍고 있는 것도 지켜 보고 계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도 보시지만, 가정에서 자녀들을 어떻게 인격적으로 대하느냐고 지켜보고 계십니다.
/다니엘서에 보면 다니엘은 세상의 학문도 최고로 잘했습니다. 그런데 그러면서 그는 거기에 더하여 “환상과 몽조”를 깨달았다고 합니다(단1:17). 그 환상과 몽조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가 이상한 환상과 꿈을 꾸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다니엘은 정치인으로서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뜻과 경륜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다니엘은 가장 세속적인 세상 정치 한 복판에서 하나님의 뜻을 펼치며 살아가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와 같이 일상성에 빠지지 말라는 것은 일상적인 일을 도피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tv도 보지 말고, 신문도 보지 말고, 영화도 보지 말고, 오직 교회에 나와서 기도만 하고 성경만 보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tv를 봅니다. 뉴스를 봅니다. 드라마를 봅니다. 영화를 봅니다. 그런데 그 속에서 아무 생각 없이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담겨진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하면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장사를 하는 사람도 단순히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벌 것인가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장사 속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단순히 시집가고 장가가기 위해서 연애하고 사람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왜 결혼하라고 하셨는가? 왜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로 만나게 하셨는가? 가정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경륜이 무엇인가를 잘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연을 보더라도 거기에 빠져서 사신 것이 아니라 그 자연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하시면서 사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땅을 보시면서 부동산투기를 생각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마음 밭이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를 보셨습니다. 공중의 새와 들의 풀을 보시면서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입히시고 먹이시는 하나님을 보셨습니다. 그러시면서 그 만물을 먹이시고 입히시는 하나님께서 하물며 택하신 자녀들을 먹이고 입히지 않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천국에 가면 노동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천국에서도 노동이 있습니다. 인간이 범죄 하기 전에도 노동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노동이 예배였습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 아담으로 땅을 경작하게 하셨다고 하는데, 경작이 예배였습니다(창2:15).
어떤 분은 매일 청소하는 일을 하시면서 그 곳을 교회 강대상으로 생각하시고 청소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또 어떤 분은 화장실 변기 청소를 하시면서 그 일을 마치 주님께 하듯 한다고 하셨습니다. 집에서 청소하는 것도 하나님의 일입니다. 설거지를 하는 것도 하나님의 일입니다.
/우리의 일상적이고 사소한 삶이 예배가 되고, 하나님의 일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이 곳에서만 아니라 일상의 삶 속에서도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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