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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경연구/마태복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마6:12)

by 금빛돌 2024. 5. 29.

오늘은 인간을 위한 두 번째 기도제목으로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를 살펴보겠습니다.

여러분들은 마태복음 6장에 나타난 주기도문에서 예수님께서 제일 강조하시는 기도가 어떤 기도라고 생각하십니까? 오늘의 이 기도입니다.

왜냐하면 마태복음 69절부터 나오는 주기도문이 몇 절에서 끝이 납니까? 우리가 외우는 주기도문은 13절까지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에 보면 13절 뒤에 두 절이 더 있습니다.

6:14.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15.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입니다.

그러니까 마태복음에 나타난 주기도문에서 제일 중요한 기도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라는 기도입니다.

즉 우리가 다른 사람의 과실을 용서해야 내가 너희들의 죄를 용서하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우리에게 잘못을 한 사람들의 과실을 용서해 달라는 기도가 이 주기도문에서 제일 중요한 기도입니다.

그러면 먼저 왜 우리가 서로의 잘못을 용서하는 기도를 해야 합니까?

3:13절에서 3:13.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서로 용서하라)”

마태복음 18장에 보면 우리가 일만 달란트의 죄를 주님께로부터 용서받았다고 합니다. 여러분 일만 달란트가 얼마입니까? 금 한 달란트가 18억원 정도가 된다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나라 일만 달라트는 18조원 정도 됩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18장에 보면 일만 달란트를 용서받은 사람이 일백데나리온 빚 진 자를 용서하지 않는 장면이 나옵니다.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입니다. 요즘 노동자의 하루 품삯을 20만원으로 본다면 2000만원 됩니다. 여러분 2000만원도 결코 적은 돈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18조원의 탕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에게 2000만원을 빚진 자를 용서하지 않으면 예수님은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18:35.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그래서 우리가 죄에서 용서받았기에 우리도 서로 용서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용서하라는 말씀을 많이 듣는데 용서가 너무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용서에 대한 오해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1)상대방이 잘못했다고 회개하지 않은 것도 용서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만일 상대방이 잘못했는데, 그것을 회개하지도 않았는데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이것에 대해서 누가복음을 보시기 바랍니다.

17:3.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4.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경고하고 회개하면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네게로 돌아와 회개하노라 하면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만일 어떤 사람이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찾아와서 내가 잘못했다고 회개하면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2)용서에 대한 오해는 용서를 화해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용서와 화해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용서는 하나님 앞에서 내가 일방적으로 용서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화해는 서로가 서로를 용서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화해는 두 사람이 서로 용서를 주고 받음으로 이루어 집니다.

그런데 만일 한쪽에서 용서해 주려고 하는데, 상대방이 받아주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상대방이 용서를 받아주지 않아도 하나님 앞에서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용서를 화해로만 생각합니다. 그래서 상대방이 나의 용서를 받아주지 않는데 왜 내가 용서해야 하는가 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용서란 상대방이 나를 용서 해주지 않아도 내가 하나님 앞에서 그 사람을 일방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화해는 내가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내가 영적으로 살기 위해서라도 하나님 앞에서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3)용서에 대한 오해는 용서란 악을 조장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12장에 보면 12: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고 합니다.

이 말씀 앞에 보면 아무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선한 일을 도모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할 수 있거든 모든 사람과 화목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악을 악으로 갚지 않는 선한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용서입니다. 또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용서입니다.

그런데 용서가 악을 덮는 것입니까? 악을 묵인하는 것입니까? 그래서 악을 조장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용서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모든 악을 갚아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고 합니다. 원수 갚은 것은 하나님에게 있으니 하나님께 갚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여러분 용서는 절대 악을 묵인하는 것도 아닙니다. 악을 조장하는 것도 아닙니다.

악에 대한 모든 심판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믿는다면 그 모든 심판을 하나님께 맡기고 용서해야 합니다.

그런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악을 응징하기 위해서 심판을 선택했습니까? 그렇게 심판을 선택한 결과 더 많은 악이 제거되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래서 심판한다고 하면서 인간들은 그들이 당한 것 이상으로 더 큰 악들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왜 오셨습니까? 죄를 응징하고 없애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죄를 응징하고 없애신 방법이 무엇입니까? 복수가 아니라 용서였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서로를 향해 복수의 칼날들을 던지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내 탓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아무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 모두 내 탓이라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잘못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모든 죄를 덮어쓰시고, 용서해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악을 응징하시고 죄를 없애신 방법입니다.

용서해 주는 것이 결코 죄를 조장하고, 악을 더 키우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만이 죄를 죽이고, 악을 응징하고, 얼었던 심령도 회복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4)용서에 대한 오해는 용서란 상대방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용서하면 내가 손해 볼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용서란 상대방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용서하실 때 제일 먼저 누구를 위하여 우리를 용서하신 줄 아십니까?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 우리를 용서하셨습니다.

43:25. (하나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이 말씀에도 보면 하나님께서 누구를 위하여 죄인인 우리를 용서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하나님 자신을 위하여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제일 억울한 사람은 누구인 줄 아십니까? 일방적으로 상처를 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상처받는 것도 억울한데, 내가 그 사람을 용서하지 않아서 내 마음에 더 큰 상처를 받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누구를 위해서 용서해야 합니까? 나 자신을 위해서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사탄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분노하라고 합니다. 또 정죄하라고 합니다. 또 서로 비난하라고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끊임없는 용서의 화살을 사탄의 진지에 날려야 합니다. 그러면 사탄의 그 어떤 시험이 와도 시험에 들지 않고 이길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용서는 나를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나를 사랑하고 나를 위한다면 나를 위해서 내게 상처를 준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5)용서에 대한 오해는 용서를 믿음의 문제로 생각합니다(171-10).

17장에서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용서하기 위해서 더 큰 믿음을 달라는 요청을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용서는 믿음이 커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겨자씨 같은 작은 믿음으로도 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주인과 종에 대해서 말씀하십니까? 용서는 내 삶의 주인이 누구냐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용서란 내가 믿음이 작다 하더라도 내 삶의 주인이신 예수님에게 순종해야 할 문제입니다. 또 종에게는 감정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종은 주인이 명하는 대로 행하는 자입니다. 그래서 용서란 믿음의 문제도 아니고, 감정의 문제도 아니라 순종의 문제입니다.

이와 같이 용서는 믿음이나 감정이 아니라 순종의 문제입니다. 여러분 정말 내 삶의 주인이 예수님이심을 믿는다면 내 감정과는 관계없이 용서에 대해서 순종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순종하여 용서하면 용서의 감정은 따라서 옵니다. 용서는 믿음이나 감정이 아니라 순종입니다.

6)용서에 대한 오해는 용서는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이니까 사람에게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진정한 용서란 하나님 앞에서만 아니라 사람 앞에서도 해야 합니다.

7)용서에 대한 제일 큰 오해는 나의 인간적인 힘으로 용서할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힘으로는 절대 용서할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의 본성으로는 절대 용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용서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영적인 새 생명이 있어야 합니다. 용서는 거듭난 그리스도인만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절대 인간적인 힘으로 용서하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인간적으로 용서하려고 하면 할수록 용서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용서할 수 없는 죄악 된 본성을 인정하시고 예수님의 십자가 앞으로 나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나의 힘이 아니라 오직 성령하나님의 힘으로, 나의 이름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서로 용서해 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용서하는 자에게 어떤 은혜가 주어집니까?

용서란 단어의 뜻은 풀어준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1)용서란 나의 상처에서 나를 풀어줍니다.

왜 내 마음 가운데 상처가 있습니까? 그것은 용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용서하면 내 마음의 상처와 가시는 하나씩 제거가 됩니다. 그래서 용서란 나의 상처에서 나를 풀어줍니다.

2)용서란 나를 과거의 감옥에서 풀어줍니다.

용서는 한 사람의 죄수를 석방시켜 주는 일입니다. 그 한 사람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용서하지 않는 사람은 과거의 감옥에 메여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용서는 나를 과거의 감옥에서 해방시켜 미래에 희망을 가지게 합니다.

3)용서란 하늘에서 잠긴 축복의 문을 풀어줍니다.

땅에서 메일 것이요, 땅에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땅에서 용서하면 하늘의 문이 풀어 열리는 역사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늘의 신령한 은혜를 받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이 땅에서 내게 잘못한 모든 사람들의 과실을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늘의 문이 열립니다.

4)용서란 땅에서 잠긴 축복의 문을 풀어줍니다.

요셉은 형들의 죄를 용서했습니다. 기억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첫 아들 이름을 므낫세 즉 기억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랬을 때 하나님께서는 둘째 아들 에브라임 즉 풍성이라는 자녀를 주셨습니다. 용서할 때 이 땅의 풍성한 축복을 주십니다.

그래서 용서해 줌으로 하나님의 풍성한 축복의 문이 열리기를 바랍니다.

5)용서란 모든 관계를 풀어줍니다.

용서할 때 본문의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나를 용서해 주십니다. 그래서 용서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됩니다. 또 용서할 때 나의 상처에서 치유를 받습니다. 그래서 용서하면 나와의 관계가 회복됩니다. 또 용서할 때 화해의 길이 열립니다. 그래서 용서하면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가 회복됩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죄의 가장 큰 본능은 복수입니다. 그러나 죄에서 용서받은 은혜를 받은 자는 서로의 잘못을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함으로 모든 것이 풀어지는 역사가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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