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백성들의 가장 큰 죄는 여로보암의 죄를 따랐다고 합니다(왕하17:22). 여로보암의 죄란 북 왕국 이스라엘에 거짓 제단을 만들어 놓고 거기서 하나님을 섬기게 한 죄였습니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먼저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만일 북왕국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러 남 왕국의 예루살렘으로 가다 보면 결국 북 왕국 이스라엘이 남 왕국 유다에 흡수될 수 있었습니다(왕상12:25-28). 그래서 북 왕국 이스라엘에 거짓 제단을 만들어 놓고 거기서 예배를 드리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여로보암의 죄가 단순히 정치적인 이유만이 아니었습니다. “왕상12:28. 이에 계획하고 두 금송아지를 만들고 무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의 신들이라 하고 29. 하나는 벧엘에 두고 하나는 단에 둔지라 30. 이 일이 죄가 되었으니 이는 백성들이 단까지 가서 그 하나에게 경배함이더라”고 합니다.
여기서 보면 정치적인 이유만 아니라 종교적인 이유가 나옵니다. 그것은 그들은 벧엘과 단에 두 금 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그것을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섬기게 했습니다.
이것은 2계명을 어긴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백성들이 금송아지를 섬긴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을 금 송아지로 만들어 섬겼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백성들이 출애굽 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스라엘백성들도 하나님을 금송아지로 만들어서 섬기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이스라엘백성들이 역사적으로 계속해서 하나님을 금송아지로 만들어서 섬기고 있습니까? 송아지는 주인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는 동물입니다. 또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동물입니다. 당시의 이스라엘백성들은 하나님을 송아지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나를 위해서 송아지처럼 모든 것을 희생하기만 하는 분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아무 말도 못하는 송아지로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나를 위하는 존재로 보십니까? 아니면 내가 하나님을 위한 존재로 보십니까?
물론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희생하면서까지 우리를 위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모든 것을 다 희생하시니까 하나님을 우리 종으로, 우리의 송아지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나를 위해서 희생만 하시되 내게 말씀도 하지 말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우리도 하나님을 금 송아지로 만들어서 섬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오직 나만을 위해서 희생만 하시고, 또 단순히 나의 소원만을 들어 주시고, 내게는 그 어떤 말씀도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을 종교생활이라고 합니다.
/사실 세상의 모든 종교가 이렇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만든 신들은 모두 자신의 욕망을 채워주기 위한 것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만든 신들이 자신의 욕망을 채워주지 않으면 언제든지 바꾸고 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종교생활입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은 그렇지 않습니다.
신앙생활도 제일 먼저 우리를 위하시는 하나님의 희생과 은혜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희생과 은혜를 받은 우리들이 이제는 하나님을 위해서 희생하고 죽어져야 할 존재로 생각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여러분들은 과연 하나님이 나를 위한 존재로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내가 하나님을 위한 존재로 생각하십니까? 여러분들은 과연 인간이 만든 종교생활을 하십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신앙생활을 하십니까?
/여러분 진정으로 여러분들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스라엘백성들처럼 종교생활을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앙생활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더 구체적으로 무엇이 종교생활이고, 무엇이 신앙생활인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 종교생활이란 하나님을 내가 만들어서 섬기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경우에는 하나님을 말하지 못하는 금송아지로 만들어서 섬겼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은 하나님을 지금도 살아계시고, 말씀하시는 인격적인 존재로 섬기는 것입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하나님을 금송아지로 만든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당신은 송아지처럼 우리를 위해서 희생만해 주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에게 황금만을 주십시오, 그리고 송아지와 같이 우리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마십시오” 라는 이유였습니다. 이것은 종교생활입니다.
//그러나 지금 모세는 시내산에서 살아계시고 인격적이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만난 모세의 손에 들려져 있는 것이 무엇이니까? 십계명의 말씀입니다. 이것은 말하지 못하는 금송아지와 대조를 이룹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또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끊임없이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이분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입니다.
/여러분들은 정말 지금도 살아계시고 인격적이신 하나님을 만나셨습니까? 그래서 지금도 살아계신 인격적인 하나님을 만나보고 있습니까? 그리고 그 하나님의 권위와 위엄 아래 떨어본 적이 있습니까? 또 지금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남으로 세상이 알지 못하는 기쁨을 경험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우리가 지금도 살아계시고 인격적이신 하나님을 만나보지도 못하고 교회를 다닌다면 우리는 아직 종교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참된 신앙생활은 우리의 인격과 삶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남에서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만난 자의 첫 번째 특성은 하나님을 경외함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스라엘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금송아지를 하나님을 만들어 놓고 그 앞에서 그 하나님에 대한 두렵고 떨리는 모습이 없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먹고 마시고 뛰놀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난 모세는 그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 앞에서 두렵고 떨었습니다.
/여러분 예배를 드리는 이 시간 지금도 살아계신 엄위하신 하나님 앞에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또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난 자의 특징은 나로 말미암은 기쁨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기쁨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스라엘백성들은 금송아지를 만들고 자신들의 흥에 겨워서 뛰놀고 있습니다. 이것은 종교생활입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기쁨이 있습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마음의 평안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성경과 성령을 통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나를 사랑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고 말씀하십니다. 또 오늘도 “우리에게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가는 것과 같은 새 힘을 주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또 “내가 새 일을 행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날마다 나에게 말씀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날마다 만나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종교생활은 나의 의에서 시작합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시작합니다.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시면 이스라엘백성들이 장신구로 무엇으로 만듭니까?
2. 아론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의 아내와 자녀의 귀에서 금 고리를 빼어 내게로 가져오라
3. 모든 백성이 그 귀에서 금 고리를 빼어 아론에게로 가져가매 4.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금 고리를 받아 부어서 조각칼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하나님)이로다 하는지라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장신구로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것을 하나님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의 장신구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의와 공로를 상징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의 장신구를 가지고 하나님을 만들었다고 하는 것은 자신들의 의와 공로로 하나님을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의와 공로로 하나님을 만들었으니까 하나님은 오직 자기 자신들의 소원만을 들어주고 자신들을 위해서 희생만 하는 분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의 모든 종교생활에서도 나타납니다. 미얀마에는 수백 톤의 금으로 탑을 만들었습니다. 또 우리나라도 지방으로 가면 엄청난 불상들이 많습니다. 모두 자신들의 의와 공로로 불상들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자신들의 공로로 만든 그 우상들이 철저히 오직 자신만을 위해서 모든 것을 해 달라고 빌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도 이렇게 종교 생활을 하지 않습니까? 적어도 내가 교회를 위해서 투자한 것이 많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내가 교회을 위해서 이렇게 희생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랬으니 하나님에게 무언가 받아야겠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종교새활입니다.
신앙생활이 무엇입니까? 내가 교회를 위해서 헌신하고 투자한 것이 신앙생활의 출발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헌신한 것이 신앙생활의 출발이 아닙니다. 또 하나님 앞에서 내가 무언가 잘 났다는 나의 의가 신앙생활의 출발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의 출발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의에서 출발합니다. 그러니까 신앙생활은 나의 의나 공로가 아니라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의와 하나님의 은혜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그래서 인간이 만든 종교생활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백성들에게 모세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십계명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 십계명 서문에서 “나는 너희를 애굽 땅 종 되었던 곳에서 구원한 여호와”라고 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데서 시작합니다.
그래서 1계명에서 4계명은 우리가 어떻게 그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감사할 것인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십계명 중간에 있는 5계명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인간들은 부모의 은혜도 반드시 알아서 공경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6-10계명은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들은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무엇이 종교생활입니까?
나의 의 나의 공로에서 시작해서 내가 이렇게 하나님을 위해서 투자하고 헌신했으니까 하나님 당신은 나를 위해서 모든 것을 무조건 희생만 해 주십시오 라고 하는 것이 종교생활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내 마음대로 해주시지 않으면 얼마든지 하나님도 버리는 것이 종교생활입니다.
그래서 출33장 4절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할 때 어떻게 합니까?
출33:4. 백성이 이 준엄한 말씀을 듣고 슬퍼하여 한 사람도 자기의 몸을 (장신구로) 단장하지 아니하니 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라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한 순간이라도 너희 가운데에 이르면 너희를 진멸하리니 너희는 장신구를 떼어 내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 어떻게 할 것인지 정하겠노라 하셨음이라 6. 이스라엘 자손이 호렙 산에서부터 그들의 장신구를 떼어 내니라
/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장신구를 다 제거하라고 하십니까? 그 장신구들은 모두 자신들의 의와 공로를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종교생활에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들의 모든 공로와 의, 교회를 위해서 헌신하고 희생했던 모든 장신구들을 다 떼어 내시기 바랍니다. 나의 모든 의와 헌신과 인간적인 자랑들을 배설물처럼 여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의 공로와 의의 헌신과는 비교할 수 없는 예수그리스도의 헌신과 그 공로와 그 의만을 붙드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자랑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를 향하신 그 하나님의 그 구속의 은혜를 날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가 내 공로에 따른 보상을 바라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함으로 모든 것을 행하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종교생활은 내가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은 내가 죽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아래 출32장 19절을 보면 종교생활을 하는 이스라엘백성들을 보고 십계명 돌 판을 깨뜨립니다. 그러니까 무엇이 종교생활입니까? 나를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뜨리고 없애는 것이 종교생활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무엇인 참된 신앙생활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위해서 나를 깨뜨리고 없애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여러분 여기 나의 인간적인 생각들이 있습니다. 그 인간적인 생각들은 원수를 갚는 것입니다. 용서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 본성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항상 하나님의 말씀은 내 인간적인 생각들과는 다릅니다. 저는 말씀을 준비할 때마다 “이 말씀은 사람들에게 잘 맞지 않는 말씀이다. 사람들의 본성을 거스르는 말씀이구나?”라고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이때 여러분 제가 인간들을 위해서 그 말씀을 깨뜨리고 없애야 합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오히려 우리가 깨어져야 합니까?
만일 인간들을 위해서 말씀을 깨뜨리고, 없앤다면 그것이 바로 종교생활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21장 44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21:44.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돌은 말씀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날마다 말씀의 돌 위에서 스스로 깨어져야합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날마다 나의 본성을 거스르는 말씀을 들을 때마다 그 말씀에서 자신 깨뜨리고 죽여야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자신의 본성을 거스르는 말씀을 전하는 선자자들을 모두 죽였습니다. 말씀 자체이신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이렇게 나를 위해서 말씀을 깨뜨리고 없애고 죽이면 어떻게 됩니까?
나중에 말씀이 심판의 돌이 되어 나에게 날라 와서 나를 완전히 가루로 만들어 흩어버리겠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와 같이 무엇이 종교생활이고. 신앙생활입니까?
--모든 것이 나 중심입니다. 하나님도 오직 나를 위한 존재합니다. 말씀도 오직 나를 위한 말씀입니다. 다른 모든 사람들도 오직 나를 위해서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종교생활입니다.
그러나 참된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날마다 자신은 부인하고 죽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참된 신앙생활은 나 중심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중심입니다.
무엇이 참된 신앙생활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이제는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무엇을 해줄 것인가 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사람들이 나를 위해서 무엇을 해줄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다른 사람을 위해서 무엇을 해줄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 주에 간사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가 이 세상의 돈의 힘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순수한 마음으로 오직 하나님과 공동체를 위해서 헌신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오직 나만을 위한 하나님, 나만을 위한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살아가는 참된 신앙생활을 하시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 종교생활은 결국 사람을 죽입니다. 그러나 참된 신앙생활은 사람을 살립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5. 아론이 보고 그 앞에 제단을 쌓고 이에 아론이 공포하여 이르되 내일은 여호와의 절일이니라 하니 6. 이튿날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 번제를 드리며 화목제를 드리고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더라”
여기서 보면 종교생활을 하는 이스라엘백성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내일은 여호와의 절 일이라 하고 금송아지 앞에서 하나님께 드릴 번제와 화목제물을 드립니다. 번제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 내가 죽어 없어지고 완전히 하나님을 위해서 헌신하겠다는 뜻입니다. 또 화목제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또 사람들과 화목하게 지내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백성들은 진정한 번제와 화목제가 아니라 종교적인 형식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이런 형식적인 종교생활은 결국 하나님의 진노로 사람들을 죽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형식적인 종교생활이 예수님당시에도 있었습니다.
안식일에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잘라 먹었습니다.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이 왜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아무 일도 하지 말아야 하는데, 왜 밀 이삭을 잘라 먹는 일을 하느냐고 합니다. 또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든 자를 고치시니까, 왜 안식일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아야 하는데, 왜 병자를 고치는 일을 하느냐고 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율법적 규칙에 안식일에 양이 구덩이에 빠지면 건져주라고 하지 않느냐, 양의 생명이 귀하냐, 사람의 생명이 귀하냐, 사람이 양보다 더 귀하지 아니하냐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이 이 일로 예수님을 죽이려 합니다(마12:14).
여러분에게 질문을 해보겠습니까?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까?
막2장 27절에 이것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막2:27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원래 안식일 또는 주일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참된 안식을 누리는 날입니다. 또 사람들과의 바른 관계들을 통해서 참된 안식을 누리는 날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하던 육신적인 일을 중단해야 합니다. 우리가 일주일 동안 먹고 살기 바빠서 하나님 앞에 나와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참된 안식을 잘 누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내가 하던 육신의 모든 일을 내려놓고 주일예배시간에 나와서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참된 안식을 누려야 합니다. 또한 예배 후에 성도 간의 교제를 통해서 참된 안식을 누려야 합니다. 저는 이것이 구역모임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예배를 통해서는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에서 참된 안식을 누려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 구역모임을 통해서 사람들과의 수평적인 관계를 통해서 참된 안식을 누려야 합니다. 이것이 안식일 또는 주일의 참된 의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과연 이 예배 시간에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참된 안식을 누리고 있습니까?
저는 진심으로 여러분들이 이 시간에 형식적이고 의무적인 종교행사 이 자리에 앉아 있지 않기를 바랍니다. 정말로 지금도 살아계셔서 여러분들의 모든 삶의 짐을 대신 져주시고, 여러분들에게 세상이 알지 못하는 참된 안식안을 주시는 하나님을 기쁨으로 만나는 이 시간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또 구역모임을 통해서 서로 간의 깊이 있게 교제함으로 이 땅에서 모든 즐거움은 이 교회의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시16:3).
/주일은 절대 우리를 죽이는 날이 아닙니다. 만일 주일이 죽이는 날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단순히 형식적인 종교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참된 안식만 아니라, 사람과의 교제를 통해서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있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다윗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시16:2b--주 밖에는 나의 (행)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3. 땅에 있는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이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
옆에 성도님들에게 다윗처럼 이렇게 고백하겠습니다.
“주 밖에는 나의 행복이 없습니다. 당신은 너무나 존귀한 분입니다. 나의 모든 즐거움이 당신에게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처럼 형식적이고 외식적인 종교생활로 사람을 죽이는 주일 되지 말고, 생명을 살리는 주일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낙심하고 피곤하여 절망 가운데 있던 사람들을 위로하여 살리는 주일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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