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면서 살아가면 우리의 삶이 무사형통, 즉 그 어떤 어려운 일이 없고 모든 일이 다 잘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분명 내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살았는데, 여전히 내 삶 가운데서 크고 작은 어려운 일들이 계속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출애굽한 이스라엘백성들을 인도하신 과정들에서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인도했는데, 홍해로 인도하십니다. 또 쓴 물이 있는 마라로 인도하십니다. 그리고 엘림으로 인도하셨지만 또 다시 먹을 것이 없는 신광야로 인도하십니다.
/또 오늘 본문에 보면 이스라엘백성들이 하나님의 명령대로 신 광야를 떠나서 시내산으로 가는 길로 갔는데 그 중간에 르비딤에 이르게 됩니다. 그런데 르비딤에 가보니까 그곳에 또 물이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마라로 인도하시고 난 다음 마라의 쓴물이 단물이 되게 하십니다. 또 마라에서 엘림으로 인도하십니다. 또 먹을 것이 없는 신 광야로 인도하시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십니다. 또 오늘 말씀에서도 물이 없는 르비딤으로 인도하시고 나중에 반석에서 물이 나오게 하십니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물이 있는 곳으로 인도하시면 더 좋지 않습니까?
/처음부터 먹을 것을 잔뜩 쌓아놓고 난 다음 그곳으로 인도하면 더 좋지 않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생각할 때 항상 당근을 생각합니다.
여기서 당나귀가 있습니다. 당나귀가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당나귀 앞에 당근을 놓습니다. 그래서 그 당근을 하나씩 먹으며 앞으로 가고자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실 때 이런 당근으로 우리를 인도하시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내가 가는 곳마다 당근을 다 준비해놓고 나를 인도하시를 원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인도하실 때 절대 당근을 쓰지 아니하십니다. 항상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쓴 나물을 먹이십니다. 그리고 그 쓴 나물을 먹고 난 다음에 당근을 주십니다.
요셉의 경우를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애굽의 총리가 되게 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를 처음부터 애굽의 총리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처음에는 보디발의 집에 가정 총무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감옥에 가게 하셨습니다. 나중에는 그는 모든 사람에게 잊혀진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 하나님께서는 그를 애굽의 총리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실 때 처음부터 우리에게 당근을 먹이시지 않습니다.
//항상 하나님은 우리에게 배고픔과 목마름의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우리를 계속해서 이렇게 어렵고 힘든 광야의 길로 인도하십니까?
첫째, 우리를 주리게 하시고 목마르게 하심으로 더 낮추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더 낮아지고 겸손해져서 더욱더 하나님만 의지하는 삶을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예레이야서에서는 이스라엘이 광야에 있을 때를 하나님과 이스라엘백성들의 신혼 때였다고 합니다(렘2:2). 가난한 신혼부부가 있습니다. 두 사람은 신혼 때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이 서로만 보고 살아갑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하나님과 결혼한 것과 같은 이스라엘과 우리를 왜 광야로 인도하십니까? 광야는 신혼 방입니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볼 수밖에 없는 곳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도록 우리를 광야로 인도하십니다.
또 두 번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광야로 인도하신 이유는 홀로서기를 연습하기 위함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백성들에게 아무런 어려움도 없이 안락함만을 주셨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당근만 주셨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호세아서11장에 보면 이스라엘백성의 광야생활을 아이들에게 걸음마를 가르치는 것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호세아를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백성들을 사랑하는 아들을 기르는 것처럼 가르치셨다고 합니다. 호11장3. “호11:3. 그러나 내가 에브라임(이스라엘)에게 걸음을 가르치고 내 팔로 안았음에도 내가 그들을 고치는 줄을 그들은 알지 못하였도다”
-하나님께서 아이에게 걸음마를 가르치듯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의사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이들은 태어나면 발바닥이 아주 민감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발을 땅에 데면 아프게 느껴진다고 합니다. 이것이 크면 없어진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이가 아프다고 발을 땅에 닿게 하지 않으면 그 아이는 영원히 걸을 수 없습니다. 부모는 아이가 아프더라도 발을 땅에 닿게 해야 합니다. 또 넘어지더라도 걷게 해야 합니다. 또 넘어졌을 때는 팔로 안아 주어야합니다. 이렇게 해서 그 아이의 발을 고쳐주어서 걷도록 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광야로 인도하시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이제 스스로 걷는 연습을 시켜 주기 위하밉니다. 독수리로 말하면 공중에 던져서 날개 짓을 하면서 나는 연습을 시켜주는 것과 같습니다.
--만일 어머니가 아들을 사랑한다고 해서 치마폭에 사서 조금도 아프게 하지 않으면 그 아이는 영원히 걸을 수 없습니다.
--독수리가 새끼를 사랑한다고 해서 그를 계속해서 날개로 안아주기면 하면 그 새끼는 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실 때 절대 편하고 안락한 길로만 인도하지 않습니다.
광야로 인도하십니다. 그런데 지금 여러분들 앞에서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광야가 있으면 절대 하나님께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걸음마를 가르치기 위해서 우리에게 광야의 고통을 주심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또 광야에서 걸음마다 우리 아파서 넘어지고 깨어질 때 하나님께서 당신의 크고 안전한 팔로 우리를 안아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힘든 광야에서 혼자 두지 아니고 당신의 팔로 안아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어린 아이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아이도 내가 걸어가다가 넘어지면 어떻게 할까 염려하고 걱정하는 아이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어린아이와 같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광야를 두려워하지 마시기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광야로 인도하셔서 훈련을 시키고 양육시키십니다. 그래서 스스로 걸을 수 있게 하십니다.
셋째,우리를 광야로 인도하시는 이유는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함입니다.
여러분 만일 우리의 삶 가운데서 어떤 시험이 없다면 우리는 절대 우리의 믿음을 확인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만일 여러분의 삶 가운데서 아무 일이 없는 가운데서 하나님을 믿고 있다면 여러분들의 믿음은 거짓 믿음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 믿음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광야의 시험이 있을 때입니다. 갑자기 경제인 어려움을 당할 때입니다. 또 고치기 어려운 질병이 있을 때입니다. 이럴 때 믿음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께 원망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이 과연 나와 함께 하시는가 의심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스라엘백성들은 이 믿음의 시험에서 실패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신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신 후에 시내산으로 가기 전에 그들을 르비딤으로 인도하셨습니다. 르비딤이라는 말은 “원기를 회복시킨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르비딤이 이런 이름을 갖게 된 것은 우기가 되면 원래 그 곳이 물이 흐르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건기라고 물이 완전히 말라 있었습니다. 물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백성들은 또 다시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앞에서 하나님께서는 마라에서 먹을 물이 없는 곳에서 물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백성은 또 같은 시험에 실패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원망하는 정도가 아니라 모세와 더불어 다투기까지 합니다. 심어지 모세가 느낄 때는 나중에는 그들이 모세를 돌로 칠 것 같았습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물을 달라고 합니다.
이것에 대해서 모세는 어떻게 말합니다. “2하.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고 합니다.
지금 그들은 물이 없는 상황가운데서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는가 안 계신가 하면서 하나님을 의심하고 있습니다. 시험하고 있습니다(7. 그가 그 곳 이름을 맛사 또는 므리바라 불렀으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음이요 또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 하였음이더라).
즉 그들은 하나님께서 물을 주시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이고, 물을 주지 아니하시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을 시험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가리켜 적반하장(賊反荷杖)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매를 맞아야 할 도둑이 반대로 매를 든다는 말입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백성들의 믿음을 시험하는데 이스라엘백성들이 하나님을 시험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모세를 원망하고, 또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시는 것조차 의심하는 이스라엘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얼마 전에 마라의 쓴물을 달게 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엘림을 하나님께서 풍성한 물을 주시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또 조금 전 신광야에서 부터는 매일 만나를 체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또 이제 여기서 물이 없다고 모세를 원망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시는 것조차 의심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님을 시험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왜 이스라엘백성들이 이렇게 끊임없이 원망하고 불평하고 있습니까?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의 불신앙입니다. 그들은 당장 눈에 보이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민14장까지 그들은 10번씩이나 원망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들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 다 광야에서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끊임없이 원망하고 불평하는 이유가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여태까지 이스라엘백성들의 여정을 잘 보시면 하나님께서는 육신의 양식으로 그들을 먹이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도 육신의 양식이고, 또 만나도 그렇고 메추라기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렇게 사람들에게 육신의 양식으로 채워 주어도 절대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 말씀에도 보면 이렇게 원망하는 이스라엘백성들에게 반석을 쳐서 물이 나오게 합니다.
시편105편41절 보면 “시105:41. 반석을 여신즉 물이 흘러나와 마른 땅에 강 같이 흘렀으니”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 물은 시냇물이 아니라 강같이 큰 물을 주셨습니다.
그러면 이제 이스라엘백성들이 이것으로 하나님을 믿고, 또 만족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이 사건 후에 민20장에 가며 가데스 바네아에서 이스라엘백성들은 또 물이 없다고 해서 하나님께 원망을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반석을 치라 하지 아니하시고 반석을 가리키라 하십니다. 그런데 모세가 너무 화가 나서 반석을 칩니다. 그런데 나중에 이것 때문에 모세가 가나안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육신의 양식이 필요하다고 하는 이스라엘백성들에게 끊임없이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백성은 그것을 가지고 만족하거나 감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끊임없이 원망하고 불평했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하나님의 백성은 단순히 육신의 양식만으로 만족하거나 완전히 배부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영혼의 만족이 채워져야 하나님의 백성은 모든 것에 만족하며 배부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6. 내가 호렙 산에 있는 그 반석 위 거기서 네 앞에 서리니 너는 그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오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여기서 보면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치라고 하십니까? 단순히 반석이 아닙니다.
반 위에 누가 서 계십니까? 반석 위에 여호와 하나님이 서 계십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반석을 치라는 것은 단순히 반석을 치는 것이 아니라 반석 위에 계신 여호와 하나님을 치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반석을 칩니다.
사실 오늘 말씀에 맞아야 할 대상이 누구입니까? 끊임없이 원망하고 불평하는 이스라엘백성입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맞아야 할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대신해서 반석에 서 계시고, 그들을 대신해서 맞아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아더 핑크는 6절 말씀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예표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고전 10장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전10:1.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2.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홍해사건) 3. 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만나사건) 4.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므리바사건)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이스라엘백성들에 홍해를 통과한 것을 바울은 세례를 받은 것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만나를 먹은 것을 신령한 음식을 먹은 것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오늘 본문에서 반석에서 물을 마신 것은 신령한 음료를 마신 것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반석을 치라 했는데 그 반석이 곧 그리스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또 다시 우리에게는 육신의 양식이 필요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분명 우리에게 육신의 일용할 양식도 주십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말씀이 우리에게 이야기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육신의 양식으로는 절대 우리가 완전하게 배부르며 만족할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해주시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육신의 양식만 아니라 이제 신령한 영적인 양식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정말 우리 영혼에 필요한 참된 양식과 음료는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4장에서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요4:1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우물가의 여인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 여인은 한 남자와 더불어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남자와 더불어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또 지금 다른 한 남자와 더불어 삽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합니다. 이런 여인에게 예수님은 말씀했습니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하니까 이 여인은 말하기를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라고 말합니다. 그 말은 그녀에게 남자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자신의 영혼을 채워 줄 남자가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 인간들에게 이성에 대한 욕구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한 남자 한 여자로 만족하며 살아가라고 고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무리 이성에 대한 욕구가 채워줘도 인간이란 그것으로 절대 만족하지 못합니다.
//우리 인간들은 물질에 대한 욕구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일용할 양식으로 주십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이 주어지고, 또 그 이상의 재물이 주어져도 인간은 절대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합니다.
/성도님들 가운데서 경제적인 문제를 가지고 기도를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분명 그 문제를 가지고 기도하면 하나님께 들어주십니다. 그런데 이것을 반드시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물질이 주어져도 우리는 절대 그것만을 가지고 만족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물질에 만족하지 못하며 원망불평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이 본문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줍니까?
우리 영혼의 영원한 생수이신 예수그리스도로 한 분만으로 만족하며 감사하는 삶을 살지 못하면, 우리는 항상 원망하고 불평하는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배불리 먹어도 예수그리스도가 아니면 그 영혼은 그 어떤 것으로도 만족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가 우리와 함께 하시면 우리는 모든 일에 자족하며 살아 갈 수 있습니다.
//어떤 가정사역자가 한 말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어떤 부부가 참으로 서로 만족할 수 있는 부부인가? 말하면서 자신은 아내가 죽어도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비록 자신이 아내를 사랑하지만 아내를 통해서 영혼의 완전한 만족을 얻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오직 자신의 영혼의 만족은 예수그리스도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매일 아침마다 새벽기도를 예수님께 사랑의 시를 가득히 쓰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주님 한분만으로 만족하니까 자신의 아내를 만족히 느끼면서 끝까지 사랑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물질을 어느 정도 주셔야지 우리가 그 물질로 만족하면 살아갈수 있겠습니까? 월세에서 전세, 전세에서 아파트, 또 아파트도 끊임없이 늘려야합니다.
그런데 평생 그렇게 하나님께서 늘려주신대 해도 인간은 만족할 수 없습니다. 끊임없이 원망 불평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바울이 빌립보서에서 어떻게 말했습니까? 내가 육신적으로 비천에 처하기도, 풍부에 처하기도 했는데 그 모든 일에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합니다. 그것은 무조건 부자가 되는 비결이 아닙니다. 그 모든 일에 일체 비결입니까? 내가 육신적으로 어떤 형편에 처하든지 주안에서 항상 자족하며 만족하며 기뻐하며 살아갈 수 있는 비결입니다.
//아무리 사막이라도 생수가 있으면 그 사막은 옥토가 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의 삶이 광야와 같습니까? 사막과 같습니까? 내 삶에 희망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까? 또 나 자신이 너무 무가치한 존재라고 느껴지십니까? 그렇다면 우리 영혼의 생수의 강이신 예수님을 만나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마음의 주인으로 날마다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여러분의 마음의 문밖에 세워놓지 마시기 바랍니다. 날마다 나는 죽고 내 안에 예수님이 살아계시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요7:1누구든지 목 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들은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여러분들에게 생명을 얻되 더 풍성히 얻게 하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반석에서 물이 강같이 흐름과 같이 여러분의 심령 속에도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생수의 강이 흘러서 넘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영혼의 생수이신 예수님으로 인해서 여러분들의 모든 삶이 더욱더 풍성한 삶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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