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자주 초대교회로 돌아가자 라고 합니다. 이때 초대교회는 초대 예루살렘교회입니다.
초대 예루살렘교회는 모든 교회의 모범입니다.
그러면 초대 예루살렘교회는 어떤 교회였습니까?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시작된 교회였습니다.
여러분들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체험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말씀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둘 다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 둘을 갈라놓는 것도 좋지 않습니다.
그런데 초대 예루살렘교회를 생각하면 말씀보다는 성령체험이 더 우선이었습니다.
초대예루살렘교회는 먼저 말씀으로 시작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승천하실 때 주셨던 예수님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으로 교회가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그들 가운데서 성령이 임했습니다. 놀라운 방언이 터졌습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사도들이 복음을 완전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또 구약시대부터 약속하신 성령이 모든 사람들에게 임했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듣고 우리가 어찌할까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구원의 주님을 믿고 세례를 받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 모든 것은 초대교회가 성령을 체험하고 나타난 일들입니다. 이렇게 초대교회가 성령을 체험하고 난 다음에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베드로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여러분들은 과연 성령체험을 하셨습니까? 성령체험이 무엇입니까? 내 머리 속에 있는 하나님을 가슴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어떤 분에게는 불같이 성령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아주 고요하게 성령을 느낄 수 있습니다. 또 어떤 분은 방언을 통해서 성령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또 어떤 분은 말씀을 통해서 성령을 체험할 있습니다. 또 어떤 분은 기도를 통해서 성령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성령을 체험하는 방식이 아닙니다. 내가 불을 받았다 방언을 받았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진정한 성령체험이 있다면 그 이전의 삶과 그 이후의 삶은 완전히 달라야합니다.
저도 정확하게 언제 성령을 통해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는가를 알 수 없습니다. 중학교 때 회심을 경험을 하고 난 다음이라고도 할 수 있고, 또 고3 때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다고도 할 수 있고, 또 신학교 다닐 때 기도실에서 하나님을 만났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성령하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기 전과 만난 후는 삶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성령하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나니까 제일 먼저 나타났던 변화는 마음의 평안이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지금도 제 마음가운데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이 있습니다. 그리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살아졌습니다. 내가 오늘 밤 죽어도 분명히 하나님께로 간다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니까 그 어떤 것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귀신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학교 다닐 때 아이들과 폐가에 들어가서 있기를 했는데, 아이들은 모두 겁이 나서 도망을 갔는데 저는 두렵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기쁨이었습니다. 저는 항상 우울했습니다. 항상 근심과 고민가운데 살았습니다. 그런데 성령하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체험하고 나니까 제 마음가운데 기쁨이 생겼습니다.
마찬가지로 초대예루살렘교회는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을 체험하고 나니까 그들의 삶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러면 예루살렘교회는 어떻게 변화되었습니까? 변화된 초대교회는 어떤 교회였습니까?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교회였습니다.
행2:42.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초대교회는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는 교회였습니다. 여기서 사도란 사도들로 복수형입니다. 또 가르침이란 단수형입니다. 그러니까 초대교회는 사도 베드로만 아니라 여러 사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가르치는 내용은 하나였습니다. 그것은 오직 예수그리스도였습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사해주는 그리스도인 것을 가르쳤습니다. 또 예수그리스도가 온 세상교회의 주이신 것을 가르쳤습니다. 이에 초대교회는 사도들을 통한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초대교회의 어떤 모습을 본 받아야 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는 자기의 말씀을 전해서는 되지 않습니다. 누가 전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해야합니다. 그래서 누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든지, 또 말씀을 전하는 방식은 다르더라도 내용은 같아야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말씀을 전하는 자가 절대 말씀에 자신의 생각을 넣어서는 안 됩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성경 그대로 전해야합니다. 또 이렇게 말씀을 전하는 자가 자신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 그대로 전했을 때 성도들은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야합니다. 이것이 초대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러면 왜 초대교회가 이렇게 사도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겠습니까? 그 비결도 그들이 성령으로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구약시대 때 신약시대를 바라보고 성령하나님의 약속하신 제일 큰 이유는 우리 마음을 부드럽게 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시던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받아들이고 순종하게 하기 위해서 성령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성령이 초대교회에 임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사도들이 어떤 말씀을 하든지 받아들였습니다. 심지어 너희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했을 때 마음이 찔려 회개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교회가 초대교회와 같이 누가 전하던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하고, 또 누가 전하던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을 수 있는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둘째, 초대교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서로 교제하는 교회였습니다.
행2:42.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우리가 에베소서를 통해서 삼위하나님의 하나 되게 하시는 사역을 보고 있습니다. 성부하나님은 만세전부터 하나 됨을 계획하셨습니다. 성자 예수님은 하나 됨을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성령하나님은 하나 됨을 우리에게 적용하시고 체험하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 안에 막힌 담을 다 허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 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우리가 체험적으로 하나 되게 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어떤 역사이겠습니까? 성령의 교통하고 교제하게 하시는 역사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축도를 할 때 마지막에 어떻게 합니까?
성자 예수님의 구속과 성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게 하심이라고 축복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매주 고백하는 사도신경에서도 내가 성령을 믿습니다 라고 하면서 성령을 통해서 성도가 서로 교제하는 것을 믿습니다 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을 체험했습니까?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을 체험한 사람은 첫째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을 받습니다. 또한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을 체험한 사람은 절대 고립되지 않습니다. 절대 혼자 있지 않습니다. 성도들에게 가까이 나갑니다. 교제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성도가운데서로 하나를 이룹니다.
왜 이러하겠습니까? 우리 속에 우리를 서로 교제하게 하시는 성령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하나님을 따라서 서로 교통하고 교제함으로 하나를 이루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또 초대교회는 물질로 서로 교통하는 교회였습니다.
“43.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자신의 모든 재산과 소유를 주장하지 않고 서로 나누어주는 사회를 어떤 사회라고 합니까? 공산사회입니다. 그런데 공산주의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자신의 재산과 소유를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고 함께 나누는 것을 인간적인 방법을 통해서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폭력에 의해서 개인의 소유와 재산을 빼앗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사람을 죽이는 독재를 하고 있습니다. 지금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도 결국 공산주의와의 자유주의의 싸움입니다.
/초대교회는 절대 인간적으로 서로 물건을 나누어주라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또 인간적인 방법으로 개인의 재산과 소유를 나누라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왜 초대교회가 서로의 물건을 서로 통용했습니까? 왜 각 재산과 소유를 팔아 나누어주었습니까? 그 이유도 인간의 의식화가 아닌 오직 성령의 역사 때문입니다.
성령의 역사 때문에 성도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직접 체험했습니다. 또 성령의 역사로 서로 교통하고 교제했습니다. 그러니까 초대교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더 물질보다 큰 가치인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또 성령을 통해서 물질보다 더 큰 가치인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만난 하나님 때문에 물질을 나눌 수 있었습니다. 성령으로 만난 사람 때문에 물질을 나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에덴동산에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실 때 인간에게 만물을 다스리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이 범죄 하기 전에는 사람 위에 돈이 없었습니다. 또 사람 위에 사람도 없었습니다. 인간위에는 오직 하나님만 있었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모든 돈 위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범죄 함으로 인간위에 돈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돈이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그 돈의 노예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인간이 원래 있는 자리에 있게 되었습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제일 위에 두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돈을 인간의 발 아래애 놓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돈보다 사람을 더 귀하게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45. 또 (성령으로)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여기서 보시면 왜 성령으로 재산과 소유를 다 팔았습니까? 각 사람의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의 체험이 있으니까 돈보다 사람이 더 크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서 나누어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도 이렇게 자신의 모든 소유를 팔아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하심을 따라서 우리의 작은 음식이라도 서로의 필요에 따라서 나누어 줄 수 있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또 초대교회는 성전신앙이 가정신앙이었고, 또 세상속의 신앙이었습니다.
4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46.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초대교회는 성전에 모이기는 힘쓰는 신앙이었습니다. 그런데 초대교회는 성전에만 모이는 신앙이 아니었습니다. 성전에서만 아니라 가정에서도 성찬의 떡을 떼는 신앙이었습니다. 그리고 가정에서도 하나님을 찬미하는 신앙이었습니다. 그리고 세상에서도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사람들을 사랑하는 신앙이었습니다. 그 결과 세상의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는 교회였습니다. 또 그 결과로 하나님께서 구원 얻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는 교회였습니다.
여러분 왜 초대교회가 성전에서의 신앙과 가정에서의 신앙과 세상에서의 신앙이 같았겠습니까? 그 이유는 성령하나님은 진리의 영이자 진실의 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성령으로 말미암은 진실한 신앙이 되지 않으면 우리의 신앙은 성전 안에서 머무는 신앙입니다. 성전에서는 거룩한데, 가정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또 세상에도 그렇지 않습니다.
왜 오늘날의 교회가 날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받는 자를 더하여 주시지 않습니까?
우리의 신앙이 성전에서만 머물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가정에서, 세상에서도 나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끼리만 거룩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오늘날의 교회가 세상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는 교회가 될 수 있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기 위해서 단순히 세상 사람들에게 맞추는 교회가 되어서는 되지 않습니다. 이것도 결국 성령의 충만을 받는 길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성령을 통해서 진실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령을 통해서 진정으로 사람들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그 모습을 가정에서도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그 모습을 세상에서도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의 진실하고 참된 모습을 보고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칭찬할 것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하나님께서 구원받는 자를 더해주시는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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