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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연구/이사야

그리스도의 통치와 평화의 나라1(사11:1-3)

by 금빛돌 2020. 10. 11.

여러분 우리가 하는 대화가운데 가장 많은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정치이야기입니다.

왜 사람들이 정치이야기에 합니까? 그 이유는 정치가 바로 되어야 나라가 바로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라가 바로 되고 평안해야 우리 가정도 평안하고, 교회도 평안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이 땅의 나라가 아무리 잘 되어도 그 나라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사야서를 보고 있는데, 이 이사야서에서 계속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구약의 유다나라와 이스라엘나라가 모두 진정한 하나님나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제일 큰 이유는 그 나라의 통치자들이 모두 하나님이 보시기에 바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이 있는 사 11장에서도 왜 갑자기 여기서 메시야가 통치하는 나라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까? 그 이유는 사7장에 나오는 유다 왕 아하스 때문입니다. 그는 위기가운데서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만을 의지하기 보다는 앗수르를 더 의지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네가 하나님보다 더 의지했던 앗수르에 의해서 큰 어려움을 당하게 될 것이다 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말씀하고 난 다음에 또 하나님께서는 그렇다고 해서 앗수르도 무서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 앗수르도 하나님께서 다 물리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너희들은 오직 하나님만 두려워하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유다왕 아하스는 그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유다백성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입니다. 10장에 보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뜻에 위배가 되는 잘못된 법을 만드는 죄를 지었습니다.

그래서 이 이사야서에서 계속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은 이 땅의 나라는 희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오늘 본문에 보면 우리가 바라고 소망해야 할 나라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소망해야할 나라는 어떤 나라입니까? 예수님이 통치하시는 하나님나라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이 다스리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나라를 바라고 소망하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1:1.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여기서 이새의 줄기에 난 싹과 그 뿌리에서 나온 한 가지는 모두 예수그리스도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할 말씀은 이새의 뿌리라고 하는데, 더 정확한 번역은 이새의 그루터기입니다. 그루터기가 무엇입니까? 그루터기는 나무가 다 잘려나고 난 다음에 남은 나무의 밑 부분입니다. 이 말씀에 보면 예수그리스도가 어디에서 나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모든 것이 다 잘려지고 꺾어진 나무의 그루터기 또는 뿌리에서 나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새 즉 다윗의 집안에서 모든 것이 다 잘려지고 꺾어진 그루터기에 예수님이 오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언제 이 땅에 오셨습니까? 구약시대 때 하나님나라라고 했던 이스라엘과 유다나라가 모두 완전히 멸망한 그 그루터기에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이 세상의 모든 왕들과 지도자들이 우리에게 실망을 주어도 우리에게 진정한 왕이신 예수그리스도가 우리와 함께 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이 예수그리스도를 진정한 우리의 왕으로 삼을 때 이 땅 가운데 진정한 평화의 나라가 우리에게 도래하게 됩니다.

그런데 1절을 다시 보시면 예수님이 다윗 왕의 줄기와 뿌리 즉 그루터기라고 하지 않고 왜 이새의 줄기와 뿌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이에 대해서 칼빈은 예수님의 자기 비하라고 합니다. 이새의 고향은 베들레헴입니다. 베들레헴은 이스라엘 중에서 제일 낮고 비천한 동네입니다. 그래서 이새의 집안이라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가운데서 제일 낮은 집안이라는 뜻입니다.

왜 우리의 왕이신 예수님이 이새의 집안에서 오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그 이유는 예수님은 이 땅 가운데서 제일 낮은 모습으로 오신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낮은 모습으로 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이 땅에서 가장 낮고 낮은 자들에게 진정한 소망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91절에서도 9:1.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여기서도 왜 스불론과 납달리 즉 이방 갈릴리에 예수님께서 빛으로 오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스불론과 납달리 즉 이방 갈릴리도 예수님 당시에 가장 낮고 비천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모든 사람들에서 실망할 수 있습니다.

또 우리가 이 땅 가운데서 가장 낮고 낮은 자리에 처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가 절대 실망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 계실 때가 가장 낮은 자들과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살아계신 예수님은 낮은 자들과 함께 하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들과 함께 하심으로 그들을 붙들어 주시고, 올려주시고, 세워주심을 믿으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2.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예수님 위에서 여호와의 영 즉 성령이 강림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실제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실 때 성령이 임하신 것을 예언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에게 임하신 여호와의 성령은 어떤 분이십니까? 지혜와 총명의 영이십니다. 모략과 재능의 영이십니다. 그리고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성령하나님에 대해서 제일 강조하시는 무엇입니까?

여기서 성령하나님에 대해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여호와를 경외하게 하는 영입니다. 그래서 표준새번역과 공동번역에서는 여호와를 경외하게 하는 영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충만이라고 하면 방언을 하거나 특별한 은사를 나타내는 것이라고만 생각합니다. 물론 방언도 성령충만의 결과일 수 있습니다. 또 병고침과 같은 은사도 성령충만의 결과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에게 임하신 성령은 여호와 하나님만을 경외하게 하는 영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령을 통해서 지혜와 총명을 가지게 되는 결과가 무엇입니까? 지혜와 총명을 가짐으로 더욱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외하게 됩니다.

또 우리에게 성령이 주시는 모략과 재능을 가지게 되는 결과가 무엇입니까? 성령을 통해서 더 큰 모략과 재능을 가짐으로 더욱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외하게 됩니다.

그리고 성령하나님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은 아는 지식을 가지게 되는 결과가 무엇입니까? 성령하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감으로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하고 경외하게 됩니다.

교회사를 보면 성령을 체험한 분들의 첫 번째 반응이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령을 체험하자 하나님에 대하여 두렵고 떨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성령하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는데, 그 두려움은 절대 공포가 아닙니다. 귀신을 본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귀신을 두려워합니다. 그런데 귀신을 보고 두려워하면서 그것을 즐거움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귀신을 보고 두려워하는 사람은 귀신을 보기를 즐거워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3.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

예수님에게 성령이 임함으로 예수님은 여호와를 두려워함으로 즐거움을 삼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령하나님과 함께 함으로 매일 매일 하나님을 만나는 것을 즐거워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이렇게 우리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성령이 임하심으로 우리를 지금도 통치하고 계시는데, 어떻게 우리를 다스리시고 통치하십니까?

3절 중반 절에 보면 그는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시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 충만하신 예수님은 절대 눈으로 보이는 외모로 우리를 심판하거나 판단하지 않으십니다. 또 단순하게 귀에 들리는 대로 우리는 판단하지 아니하십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눈에 보이는 대로 사람을 판단하셨다면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제일 경건하고 의롭게 보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그들을 향해 외식하는 자들아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반대로 세리와 죄인들이 그들의 죄를 가지고 회개함으로 예수님께서 나왔을 때 예수님은 절대 그들의 겉모습만을 보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의 중심을 보였습니다. 그리고 죄 사함을 받으라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겠으니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 고 하셨습니다.

/성령 충만하지 않은 사람은 항상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사람을 판단합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하지 않은 사람은 항상 외식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 우리가 어느 한 순간도 사람에게 보이려고 이 자리에 있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의 마음의 중심을 보고 계십니다.

눈에 보이는 대로 우리를 판단하지 아니하십니다.

사람들이 우리에 대해서 그 어떤 이야기를 해도 귀에 들리는 대로 우리를 판단하지 아니하십니다.

예수님은 지금 이 시간 우리 마음 깊숙한 곳에 있는 모든 두려움들을 보고 계십니다.

누구에게 말하지 못하는 모든 근심들을 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듣고 계십니다.

이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사정들을 마음으로 다 아뢸 수 있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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