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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연구/스바냐

겸손과 공의를 구하라(습2:1-3)

by 금빛돌 2020. 1. 25.

스뱌냐서는 우리가 많이 들어보지 않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 가운데 우리는 스바냐 317절만을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복음 송에 가사에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로 잠잠히 사랑하시며 즐거이 부르며 기뻐 기뻐하시리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이 한 구절만 보면 이 스바냐서는 즐겁고 기뻐하는 것에 대해서만 말씀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스바냐서 전체의 주제는 여호와의 날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먼저 본서의 저자인 스바냐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1:1.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야의 시대에 스바냐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스바냐는 히스기야의 현손이요 아마랴의 증손이요 그다랴의 손자요 구시의 아들이었더라

여기서 보시면 스바냐는 히스기야 왕의 현손이요 아마랴의 증손이고 그다랴의 손자요 구시의 아들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스바냐가 유다 왕족의 후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절에 보시면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아 시대에 스바냐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유다 왕 가운데서 히스기야왕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간 왕입니다. 그런데 그의 아들인 므낫세는 유다 왕 가운데 가장 악한 왕입니다. 므낫세의 악행가운데 가장 큰 것은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히 없게 했습니다. 그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율법을 없게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므낫세 시대에 율법책이 사라졌습니다. 그러니까 므낫세 시대는 우상숭배를 자기 마음대로 했던 시대입니다. 심지어 므낫세는 그의 아들조차도 불에 태워서 우상에게 바쳤던 왕입니다. 그리고 므낫세의 아들이 아몬이고 그 아들이 요시아왕 입니다. 그래서 요시아시대는 유다나라가 므낫세 시대를 이어받아서 여전히 우상을 섬기는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이 요시아는 므낫세 시대에 없앴던 하나님의 율법책을 성전에서 다시 찾았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따라서 개혁을 시도했던 왕입니다. 그런데 이 스바냐서는 요시아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개혁을 하기 전입니다. 그래서 이 시대는 므낫세 시대의 모습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이때에 히스기야 왕의 현손으로 왕족 출신인 스바냐에게 임한 말씀이 스바냐서입니다.

이 스바냐서의 주제는 여호와의 날입니다. 여호와의 날이란 여호와께서 역사가운데서 개입하는 날입니다. 특별히 구약성경에서 여호와의 날이란 여호와께서 역사가운데서 개입하셔서 심판하시는 날입니다.

/여호와의 날은 준비하지 않는 자에게는 심판의 날입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날은 준비하는 자에게는 심판이 숨겨진 날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스바냐의 이름의 뜻이 여호와께 숨김을 얻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스바냐에서는 여호와의 날에 숨김을 얻는 자가 나오고 있습니다.

2:3.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이것이 이 스바냐서의 중심구절입니다.

그러니까 스바냐서는 우리에게 무조건 여호와의 심판의 날을 말하지 않습니다. 여호와의 심판의 날을 말씀하고 있는 것은 그 날에 숨김을 얻게 하기 위함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는 겸손한 자들에게는 여호와의 날은 숨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날은 준비하는 자에게는 숨겨져 있는 날이고, 도리어 축복의 날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신약시대에 여호와의 날은 예수님의 재림의 날입니다. 재림의 날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심판의 날입니다. 그러나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이 숨겨져 있습니다. 도리어 믿는 자에게는 주님의 재림의 날이 축복의 날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있기 전에도 여호와의 날이 이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이십니다.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은 지금도 이 세상을 감찰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일에 인내하시고 기다리시고 참으시는 분이십니다. 쉽게 분노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볼 때 마치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보고 계시지 않는 것처럼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모든 세상을 한 순간도 쉬지 아니하시고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운 눈으로 감찰하고 계십니다. 그러시다가 하나님의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때가 되면 하나님이 역사가운데서 개입하십니다.

/이 여호와의 날이 우리의 개인의 역사가운데 나타날 수 있습니다. 또 우리 민족의 역사가운데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교회의 역사가운데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재림이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여호와의 날은 오지 않는다고 말 할 수 없습니다. 재림의 날이 이르기 전에도 얼마든지 여호와의 날은 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그 어떤 여호와의 날이 이르기 전에 우리는 준비하는 자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준비하는 자들에게 여호와의 날은 축복의 날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바냐서의 메시지를 통해서 여호와의 날을 잘 준비하여 여호와의 날이 심판의 날이 아니라 축복의 날이 될 수 있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먼저 스바냐시대의 사람들에게는 이 여호와의 날이 어떤 날이었는가를 살펴보겠습니다. 스바냐시대에 여호와의 날은 심판의 날이었습니다.

그래서 스바냐 114절부터 보시기 바랍니다.

1:14.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깝고도 빠르도다 여호와의 날의 소리로다 용사가 거기서 심히 슬피 우는도다 15. 그날은 분노의 날이요 환난과 고통의 날이요 황폐와 패망의 날이요 캄캄하고 어두운 날이요 구름과 흑암의 날이요 16. 나팔을 불어 경고하며 견고한 성읍들을 치며 높은 망대를 치는 날이로다 17. 내가 사람들에게 고난을 내려 맹인 같이 행하게 하리니 이는 그들이 나 여호와께 범죄하였음이라 또 그들의 피는 쏟아져서 티끌 같이 되며 그들의 살은 분토 같이 될지라 18. 그들의 은과 금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할 것이며 이 온 땅이 여호와의 질투의 불에 삼켜지리니 이는 여호와가 이 땅 모든 주민을 멸절하되 놀랍게 멸절할 것임이라 라고 합니다.

/원래 여호와의 날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역사가운데서 함께 하시는 즐거운 날이었습니다.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쟁에 나가서 싸움을 할 때 그들은 여호와의 날이 임하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날에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셔서 대적들을 물리쳐 주시는 기쁨의 날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오랜 시간 고난과 고통 가운데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는 여호와의 날은 기쁨의 날이었습니다. 그래서 시편의 기자처럼 하나님 어느 때까지 입니까 라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그 기도에 응답하시는 날이 여호와의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스뱌냐시대의 사람들에게는 여호와의 날은 심판의 날입니다. 그 날은 유다백성들에게는 고난의 날이고 모든 것이 다 진멸이 되고 황폐하게 되는 날이었습니다.

/그러면 왜 스뱌냐 시대는 왜 여호와 날이 심판의 날이 되었습니까?

그 이유가 습117절에 나와 있는데,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1:17. (여호와의 날에) 내가 사람들에게 고난을 내려 맹인 같이 행하게 하리니 이는 그들이 나 여호와께 범죄 하였음이라 고 하고 있습니다.

스뱌냐 시대에 여호와의 날이 심판의 날이 되고 고난의 날이 된 이유는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께 범죄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스바냐 시대의 사람들이 하나님께 어떤 범죄를 했습니까?

이 시대는 이미 북 왕국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서 멸망을 당한 후였습니다. 그리고 유다와 예루살렘백성들만 하나님의 백성으로 남아 있을 때였습니다. 그런데 습14절부터 보시면

1:4. 내가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든 주민들 위에 손을 펴서 남아 있는 바알을 그 곳에서 멸절하며 그마림이란 이름과 및 그 제사장들을 아울러 멸절하며 라고 합니다.

여기서 보시면 하나님의 백성인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들이 여호와 하나님만 아니라 바알을 섬기고 있습니다. 또 당시에 하나님만을 섬겨야 하나님의 제사장들이 바알의 제사장이라는 그마림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시대였습니다.

1:5. 또 지붕에서 하늘의 뭇 별에게 경배하는 자들과 경배하며 여호와께 맹세하면서 말감(이방의 신)을 가리켜 맹세하는 자들과

하나님의 백성들이 지붕위에서 하늘의 뭇별에게 경배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하나님을 완전히 버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여호와 하나님께 하나님을 잘 섬기겠다고 맹세하면서도 이방의 신인 말감에게도 맹세하는 자들이었습니다.

1:6. 여호와를 배반하고 따르지 아니한 자들과 여호와를 찾지도 아니하며 구하지도 아니한 자들을 멸절하리라

하나님의 백성들이 여호와를 배반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도 아니합니다. 또 여호와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구하지도 아니하였습니다.

1:12 그 때에 내가 예루살렘에서 찌꺼기 같이 가라앉아서 마음속에 스스로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복도 내리지 아니하시며 화도 내리지 아니하시리라 하는 자를 등불로 두루 찾아 벌하리니

이것을 표준새번역으로 보면 1:12. 그 때가 이르면, 내가 등불을 켜 들고 예루살렘을 뒤지겠다. 마음 속으로 '주는 복도 내리지 않고, 화도 내리지 않는다'고 말하는 술찌꺼기 같은 인간들을 찾아서 벌하겠다.

심지어 스바냐 시대 유다백성들은 이제 하나님은 복도 내리지 아니시고 벌도 내리지 아니하신다고 하는 술찌꺼기와 같은 인간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런 유다백성들을 향해서 내가 등불로 찾아서 벌을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왜 스바냐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인 유다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도 따르지도 않고,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이방의 신들을 경배하고 섬겼습니까?

또 심지어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은 복도 내리지도 않고 화도 내리지도 않는다고 말하는 술찌꺼기와 같은 인간들이 되었습니까?

/지금 스바냐서를 기록한 당시에는 요시아가 왕으로 있었지만, 아직 성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발견하지 않은 때였습니다. 그러니까 스바냐 시대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믿고 있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없이 자기 마음대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또 당시에 앗수르가 북 왕국 이스라엘을 무너뜨린 것을 보면서 여호와 하나님보다 이방의 신이 더 크고 위대한 신이라고 생각해서 여호와도 섬겼지만, 이방의신을 하나님보다 더 경배하며 섬겼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하나님을 섬기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도 않고, 하나님보다 이방의 신을 더 경배하고 섬기는 유다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 1절부터 보시기 바랍니다.

2:1. 수치를 모르는 백성아 모일지어다 모일지어다

우리가 하나님의 앞에서 죄를 지으면 제일 먼저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을 가져야합니다. 이런 부끄러움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회개의 자리로 이끌게 합니다. 그런데 스바냐 시대에 사람들은 수치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음에도 불구하고 수치를 모르는 자들에게 회개하기 위하여 모일지어다 모일지어다고 하고 있습니다.

또 습2:2절에 2:2. 명령이 시행되어 날이 겨 같이 지나가기 전,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내리기 전, 여호와의 분노의 날이 너희에게 이르기 전에 그리할지어다

여기서 명령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명령입니다. 즉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명령이 이르기 전, 심판의 날이 겨같이 빨리 지나기 전에, 여호와의 분노의 날이 너희에게 이르기 전에, 수치를 모르는 백성아 하나님 앞에 회개하기 위해서 모일지어다라고 합니다.

그리고 2:3. 여호와의 규례(말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고 합니다.

왜 스바냐 시대 사람들이 수치를 모르는 백성이 되었습니까? 그 이유는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본문 3절에 보시면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겸손한 자들아 라고 합니다.

여기서 보시면 무엇이 겸손입니까? 여호와 규례와 말씀을 지키는 것이 겸손입니다. 그러니까 겸손이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우리가 잘못한 것이 있을 때 부끄러움을 느낄 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부끄러움에 대해서 회개하고 다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순종하는 자리에 나아가는 것이 겸손입니다.

/스뱌냐와 같이 사역을 했던 예레미야도 렘1315절에도 13:15 너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귀를 기울일지어다, 교만하지 말지어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음이라

/교만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습니다. 교만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에게 주는 말씀으로 듣지 않습니다.

/또 습2:15절에 보시면 2:15. 이는 기쁜 성이라 염려 없이 거주하며 마음속에 이르기를 오직 나만 있고 나 외에는 다른 이가 없다 하더니 어찌 이와 같이 황폐하여 들짐승이 엎드릴 곳이 되었는고 지나가는 자마다 비웃으며 손을 흔들리로다고 합니다.

/여기서 보시면 교만한 자는 자기를 지켜주는 성을 의지합니다. 그래서 그 성에서 기뻐하며 염려 없이 거주합니다. 그러면서 마음속으로 오직 나만 있고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다고 합니다. 이것이 교만입니다.

//그러나 겸손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에게 주는 말씀으로 듣고 순종합니다. 그리고 겸손한 자를 자기를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합니다.

그래서 겸손한 자들아 여호와를 찾으며 또한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숨김을 얻으리라고 합니다. 우리는 겸손이라고 하면 불의에 대해서도 가만히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는 그렇게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겸손한 자들아 여호와를 찾으며 또한 하나님의 공의를 구하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공의를 구하되 동시에 하나님 앞에서 겸손도 구하라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공의를 찾다보면 잘못하면 겸손을 잃어버리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먼저 공의를 구해야합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하나님께 겸손을 구해야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여호와의 심판의 날에 우리가 어떻게 그 심판에 숨김을 얻는 자가 될 수 있습니까? 도리어 그 여호와의 날이 어떻게 우리에게 심판의 날이 아니라 축복의 날이고 기쁨의 날이고 즐거운 날이 될 수 있습니까?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겸손한 자들이 되어야합니다. 또 겸손한 자로서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해야합니다. 그러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공의와 겸손 이 두 가지를 구해야합니다.

공의란 내가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대로 옳음을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옳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선지서에는 공의와 함께 정의를 구하라고 계속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정의란 약자에 대해서도 공평에게 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하나님 앞에서 공의를 구하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무엇이 하나님의 공의인지를 분별하고 깨닫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합니다. 이렇게 공의를 구하면서도 혹시 내가 하나님 앞에서 교만하지 않을까 자신을 돌아보아야합니다. 자칫 공의를 구하다 보면 교만해지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공의와 함께 겸손을 구해야합니다. 그러면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고 합니다.

/여기서 혹시란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혹시란 확실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잘못했음에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교만한 자들이 가득한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의 공의를 구하고 겸손을 구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분노와 심판의 날에 확실하게 숨김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공의와 겸손을 구함으로 하나님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받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과연 스바냐 시대의 유다백성들이 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습31절부터 보시기 바랍니다.

3:1. 패역하고 더러운 곳, 포학한 그 성읍(유다와 예루살렘)이 화 있을진저 2. 그가 명령(말씀)을 듣지 아니하며 교훈(말씀)을 받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의뢰하지 아니하며 자기 하나님에게 가까이 나아가지 아니하였도다 고 합니다.,

또 습37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3:7. 내가 이르기를 너는 오직 나를 경외하고 교훈을 받으라 그리하면 내가 형벌을 내리기로 정하기는 하였지만 너의 거처가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나 그들이 부지런히 그들의 모든 행위를 더럽게 하였느니라

하나님은 여호와의 심판의 날을 정하여 두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언제든지 돌이켜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여 주시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당시 스바냐 시대의 사람들은 그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여전히 부지런히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3:8.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일어나 벌할 날까지 너희는 나를 기다리라 내가 뜻을 정하고 나의 분노와 모든 진노를 쏟으려고 여러 나라를 소집하며 왕국들을 모으리라 온 땅이 나의 질투의 불에 소멸되리라고 합니다.

결국 스바냐 시대의 유다백성들은 이 스바냐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래서 결국 여호와의 진노의 날이 임하여 바벨론에 의해서 완전히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가운데서 놀라운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남겨 두신 사람들이 있습니다.

312 내가 곤고하고 가난한 백성을 네 가운데에 남겨 두리니 그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의탁하여 보호를 받을지라 13. 이스라엘의 남은 자는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거짓을 말하지 아니하며 입에 거짓된 혀가 없으며 먹고 누울지라도 그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라

이렇게 하나님께서 심판가운데서도 남겨두신 자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3:14. 시온의 딸아 노래할지어다 이스라엘아 기쁘게 부를지어다 예루살렘 딸아 전심으로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15. 여호와가 네 형벌을 제거하였고 네 원수를 쫓아냈으며 이스라엘 왕 여호와가 네 가운데 계시니 네가 다시는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라

16. 그 날(여호와의 날)에 사람이 예루살렘에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시온아 네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 17.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이와 같이 여호와의 날은 하나님의 심판의 날도 될 수 있고, 축복의 날도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여호와의 날이 나에게는 심판의 날입니까? 아니면 축복의 날입니까?

이 스바냐서를 받고 있는 유다백성들은 그들에게 여호와의 날은 무조건 축복의 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스바냐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스바냐 시대 유다백성들에게 여호와의 날은 심판의 날이었습니다.

그러면 누가 진정으로 여호와의 날이 심판의 날이 아니라 축복의 날이 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앞에서 겸손한 자들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여호와의 날이 축복의 날이 되기 위해서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자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누가 진정으로 겸손한 자들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그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언제든지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잘 받아들이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날이 여러분 모든 성도님들에게 참으로 기쁨의 날이고 축복의 날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또 겸손한 자로서 하나님의 공의를 구하며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의 공의란 내 뜻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만을 구하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겸손하신 예수님처럼 날마다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날마다 하나님의 뜻대로 내 삶을 인도해 달라고 간구하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의 삶 속에서 개입하여서 우리 모든 형벌을 제거하여 가실 것입니다. 또 모든 화를 제하여 가실 것입니다. 또 여러분들의 모든 삶 가운데서 어려운 모든 문제들을 해결하여 주실 것입니다. 무엇보다 여러분들을 보시며 기쁨을 이기지 못할 정도로 사랑하여 주실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여러분들로 말미암아 즐거워하시고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날에 이런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으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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