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은 이 땅에 에덴동산을 만들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에덴동산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백성들을 출애굽하신 목적은 에덴성전을 회복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도 에덴성전을 회복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서 에덴성전을 회복하기 위해서 우리의 삶이 예배가 되어야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또 우리가 날마다 하나님의 사랑을 호흡하면서 살아야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의 중심이 하나님이 중심이 되어야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에덴성전을 회복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 가운데서 에덴성전을 회복하기 위해서 제일 중요한 것은 예배입니다.
인간이 범죄 하기 전 에덴동산에서의 예배는 특별한 형식이 없었습니다. 삶 자체가 예배였고, 일자체가 예배였습니다. 또 모든 날 다 다 안식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범죄 한 후에는 이제 특별한 형식을 가진 예배가 등장합니다. 그것이 바로 가인과 아벨의 예배입니다.
먼저 1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1.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여기서 보시면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에 동침하여 임신하여 가인을 낳았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볼 때마다 가인이 아담과 하와가 낳은 첫 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창4:14절을 보시면 “창4:14.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고 합니다. 이 말씀에 보면 가인 외에도 여러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범죄 한 가인이 만나기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이들도 다 아담의 자손들입니다.
그러면 왜 여기서 아담이 하와가 여러 아이들을 낳았는데, 왜 오늘 본문에서는 가인과 아벨만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 창 3장 1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창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이 말씀은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한 후에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하신 최초의 약속입니다.
이 말씀은 먼저 여자의 후손이신 예수님께서 오셔서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하셔서 그를 부수실 것을 약속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장세훈교수님이 말씀을 하는 것처럼 여기서 나오는 여자의 후손은 예수님도 되지만 성경전체를 보면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여기서 나오는 뱀의 후손은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는 사탄의 무리들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지만 과연 사탄의 머리를 부술 여자의 후손이 누구인가를 기대했습니다. 그래서 1절을 다시 보시면 “1.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고 합니다. 가인의 뜻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아담과 하와는 가인이 창 3장 15절에서 말씀하는 여자의 후손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가인이 아니라 아벨이 여자의 후손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김영철 교수님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두 아들은 창 3장 15절에 나오는 인류의 두 계열인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을 대표하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들의 행동을 통해서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인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어떤 특성을 지니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아담과 하와의 자손 중에서 가인과 아벨에 관한 말씀을 하시는 것은 아담과 하와의 자손 중에서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 즉 여자의 후손이란 어떤 사람들이며,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적하는 사람들 즉 뱀의 후손은 어떤 사람들인가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의 예배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 아닌 자들의 예배가 어떤 가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의 예배는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고,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 아닌 자들의 예배는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시는 예배입니다.
그러면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는 어떤 예배입니까?
또 하나님께서 받지 아니하시는 예배는 어떤 예배입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가인의 예배를 받지 아니하셨습니다. 대신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예배만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아벨의 예배만 받으셨습니까? 가인의 예배를 받지 아니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보통 가인의 제사는 짐승을 바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하나님은 짐승을 좋아하신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말씀을 더 자세히 보시기 바랍니다.
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2.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여기서 보시면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라하는 자라고 합니다.
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3절에 세월이 지난 후란 시간이 지나서 추수 때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추수 때가 되어서 가인은 감사의 제사로 땅의 소산을 제물로 드렸습니다. 가인이 땅의 소산을 하나님께 드린 이유는 그는 농부였기 때문입니다.
또 4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아벨이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을 드린 것은 아벨이 양치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짐승만 아니라 곡물로도 제사를 드립니다. 소제의 경우가 곡물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입니다. 그래서 가인이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드렸다고 할 때 그 제물이란 말이 “민하”인데, 이것은 소제의 제물을 말합니다. 우리는 단순히 가인이 짐승을 제물로 바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의 예배를 받지 않으셨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곡물의 제물도 받으십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가인의 예배는 받지 아니하시고, 아벨의 예배만을 받으셨습니까?
그 이유를 오늘 본문 4절과 5절에서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5.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여기서 보시면 하나님께서는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셨다고 합니다. 또 여기서 받으셨다는 말은 우리말로는 기쁘게 받으시다는 뜻인데, 원어로는 “응시하다. 둘러보다”는 뜻입니다(삼하22:42).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보신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보신 것은 제물만이 아니라 그 제물을 드린 사람입니다. 가인이 땅의 소산을 드린 것이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제물만 아니라 제물을 드리는 가인을 하나님께서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가 드리는 예배를 받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벨의 예배를 받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아벨의 제물과 함께 아벨의 삶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벨이 드린 제물과 아벨의 삶을 보시고 그의 예배를 받아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서 출애굽 한 이스라엘백성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내가 보는 것은 단순히 제물만 아니라 너희 삶도 보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출애굽하기 전에 애굽에서도 제사가 있었습니다. 모든 이방나라에도 제사가 있습니다. 이 세상의 나라에서의 제사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어떤 제물을 바치느냐에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삶은 어떻게 되더라도 제물만 잘 바치면 신이 그들의 제사를 받으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에 대해서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서 하나님은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사1: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예배에 있어서 제물과 함께 삶을 보십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태초에 원하셨던 예배는 삶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오늘 이 시간에도 하나님께서는 지금 우리의 무엇을 보고 계십니까?
단순히 예배의 형식만을 보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여러분들의 삶을 보고 계십니다. 그래서 아벨과 같이 여러분들의 삶이 하나님께 열납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을 통해서 가인은 어떤 삶이었기에 하나님께서 그의 예배를 받지 않으셨습니까? 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5.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여기서 보시면 가인은 하나님께서 그의 제물을 받지 아니하셔서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했다고합니다. 여기서 “몹시 분하여”는 “크게 진노하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만일 가인이 하나님 앞에서 바른 사람이었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조용히 자신을 돌아보아야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삶이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를 살펴보아야했습니다.
그런데 가인은 하나님께 분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크게 진노하고 있습니다.
이런 가인의 모습은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바로 앞에 3장에서 나오는 선악과를 따먹은 죄악 된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탄은 네가 선악과를 먹음으로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죄가 무엇입니까? 죄란 인간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면 죄란 인간이 하나님보다 더 위에 있어서 하나님조차도 자기 마음대로 통제하고 지배하려는 것입니다.
가인은 이런 죄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대하여도 자기 마음대로 해 주시지 않자 분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6절과 7절에서 말씀하십니다. “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하나님은 너는 죄를 통제하고 다스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가인은 죄의 종노릇하다보니까 죄를 다스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결국 어떻게 합니까?
8.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여기서 보시면 그들이 어디에 있을 때에 가인이 아우 아벨을 죽입니까? 그들이 들에 있을 때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 앞에서는 아벨을 죽이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들에서 죽입니다. 그런데 가인이 생각하지 못한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그 곳에서도 보고 계시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또 9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9.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모든 것을 보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하십니다. 그리니까 그가 하는 말이 내가 알지 못합니다.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인의 예배를 받지 않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가인은 예배에 있어서 열심이었습니다. 그래서 가인은 아벨보다 먼저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가인의 예배를 받지 아니하신 이유는 가인은 아담의 원죄를 가진 죄인으로 예배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이 되어서 예배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은 무조건 내 기도를 들어주셔야 해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도 가만히 두지 않을 거야 라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자신 안에 있는 죄를 통제하지 못하고 죄의 종노릇하는 상태에서 예배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로 하나님께서는 가인의 예배를 받지 아니하셨고, 동생 아벨을 죽이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였기 때문에 죄인이 아니라 그가 죄인이기에 아벨을 죽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가인의 죄악 된 삶 때문에 가인의 예배를 받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요일 3:12. 가인 같이 하지 말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죄의 종노릇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떤 이유로 죽였느냐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의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예배를 받으셨습니까? 히브리서에는 아벨은 믿음으로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렸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히11: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제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그러면 아벨의 믿음이 무엇이겠습니까? 아벨은 어린양을 제물로 드릴 때 그 어린양과 함께 그 자신도 죽었음을 믿었습니다. 구약시대에 제사를 드릴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제물을 드리는 자가 그 제물의 머리에 안수를 합니다. “레1: 4. 그는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할지니 그를 위하여 기쁘게 받으심이 되어 그를 위하여 속죄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안수란 그 제물과 나를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물을 드릴 때 제물만 드리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제물과 함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제물이 죽을 때 그 제물과 함께 내가 죽었음을 믿음으로 드립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죽으실 때 그와 함께 내가 죽었음을 믿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아벨처럼 믿음으로 예배를 드린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아담의 원죄를 가지고 있는 나의 옛 자아가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믿음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된 예배란 내가 죽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옛 자아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음을 믿음으로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예배를 기쁘게 받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이 말씀을 통해서 무엇이 가인의 예배고, 무엇이 아벨의 예배란 어떤 것입니까?
하나님은 어떤 예배는 받으시고, 어떤 예배는 받지 않으십니까?
첫째, 십자가가 있는 것이 아벨의 예배고, 십자가가 없는 것이 가인의 예배입니다.
지난주에 감옥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나타내며 살겠다고 했던 사람이 출소 후 연쇄살인범이 되었다는 기사를 보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러면서 정말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보통 예수를 믿는다고 했을 때 내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나의 죄가 사해졌다는 것만을 믿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내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다는 것만을 믿는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로마서 5장까지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로마서는 5장으로 끝이 나지 않습니다. 믿음에 관한 말씀은 6장까지 이어집니다. 그래서 롬6장에서 세례가 무엇입니까? 세례는 내가 예수님을 믿습니다 고 하는 것을 외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예수님을 믿습니다 고 하면서 세례의 물속에 잠기는 것은 내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나의 옛 자아가 예수님과 함께 죽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또 세례의 물에서 나올 때 내가 예수님의 부활을 믿음으로 이제는 내가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났음일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롬6:3. 무릇 (믿음으로) 그리스도 예수와 (연)합하여 (믿음의 표시로)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연)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 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우리는 그동안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았다는 것만을 복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 보면 무엇도 복음입니까? 내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함께 나의 옛 자아가 죽었음을 믿는 것도 복음입니다. 또 그의 부활을 믿음으로 내가 이제 죄의 종이 아니라 의의 종임을 믿는 것도 복음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아벨과 같은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었음을 믿어야합니다. 그리고 날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었다는 사실을 믿고 날마다 죽은 자로 여기고 살아가야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이 예배시간에 예수님의 십자가와 함께 내가 죽었음을 믿음으로 예배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예배를 기쁘게 받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 미움은 가인의 예배이고, 사랑은 아벨의 예배입니다.
요일3: 10.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여자의 후손)과 마귀의 자녀(뱀의 후손)들이 드러나나니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12. 가인 같이 하지 말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떤 이유로 죽였느냐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의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
여기서 가인의 행위가 악한 것은 무엇입니까? 동생을 사랑하지 않고 미워한 것입니다.
그래서 가인이 아벨을 죽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요일3: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가인이 자기 형제 아벨을 미워하는 것 때문에 아벨을 살인하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미움은 가인의 예배이고, 사랑은 아벨의 예배입니다.
우리가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한다고 해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자라면 반드시 삶의 열매로 나타나야합니다. 구원받은 자의 삶의 열매는 사랑입니다.
요3:14.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그래서 구원받은 자로서 진정한 사랑으로 아벨의 예배를 드릴 수 있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예배를 기쁘게 받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 가장 귀한 것을 드리는 것이 아벨의 예배이고, 형식으로 드리는 것이 가인의 예배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 아벨과 그 제물을 받으셨다고 하는데,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을 드렸습니다. 첫 새끼는 가장 귀한 제물입니다. 또 기름도 가장 귀한 제물입니다. 그러나 가인은 땅의 소산을 드렸다는데, 첫 소산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땅의 소산을 드린 것이 문제가 아니라 가인은 형식적인 제물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우리의 삶만 보시지 우리가 드린 제물은 보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말라기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백성들이 드린 제물을 문제 삼으셨습니다. 그래서 병든 제물로 어떻게 페르시아 총독에게 바치겠느냐고 하십니다. 그래서 그런 제물을 드리는 것은 나를 공경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도 성전에서 헌금 궤 앞에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헌금의 액수를 보신 것이 아닙니다. 과부의 두 렙돈이 가장 귀한 예물이라고 하셨습니다.
예배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입니다. 그런데 또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이 자신과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예물 속에 너희 자신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고후8장 5절에서 헌금은 헌금 속에 자신을 드리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고후8:5-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하나님께서는 예물의 액수를 보시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에 있는 가장 귀한 것을 드렸는가를 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삶과 함께 그가 드린 가장 귀한 예물을 받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님들이 하나님 앞에서 최선을 다해서 드리는 예물을 보고 계십니다. 이에 대해서 빌립보서 4장 18절과 19절에서는 “빌4:18-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19.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리빙스턴이 어릴 때 헌금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는 주머니에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때 그는 “하나님 나 자신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라고 했습니다.
천지창조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예배시간에 우리 자신과 함께 우리의 가장 귀한 것을 하나님께 드리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예배를 기쁘게 받으시는 역사가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구약성경연구 > 창세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창세기강해(12)아담의 족보를 통한 말씀(창5:1-32) (0) | 2021.09.25 |
---|---|
창세기강해(11)가인의 후손 셋의 후손(창4:10-26) (0) | 2021.09.25 |
창세기강해(9)가인과 아벨-누가 여자의 후손이고 뱀의 후손인가?(창4:1-10) (0) | 2019.06.13 |
창세기강해(8)여자의 후손 뱀의 후손-고난과 승리(창3:15) (0) | 2019.06.03 |
창세기강해(7)사탄의 시험과 극복(창3:1-10) (0) | 2015.10.3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