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개이론이라고 있습니다. 보통 솔개는 수명이 70년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모든 솔개가 다 70년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솔개가 70년을 살기 위해서 혹독한 자기 변화의 시기를 격어야 합니다. 솔개의 나이가 40살이 되면 날카로운 발톱도 무디어져서 길게 늘어져 있고, 또 부리도 기억자로 구부러져있다고 합니다. 이때 솔개는 이대로 살다가 죽을 것인가? 아니면 변화를 해서 다시 30년을 더 살 것인가를 선택해야한다고 합니다. 만일 솔개가 30년을 더 살 것을 선택한다면 6개월 동안 혹독한 자기 변화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암벽을 쪼아서 기억자로 구부러진 부리를 뾰쪽한 부리로 만들어야합니다. 또 늘어진 발톱도 갈아서 새로운 발톱을 만들어야합니다. 또 모든 틀을 새로 뽑아 새로운 틀이 나게 해야 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환골탈태를 해야 합니다. 환골탈태란 뼈를 바꾸고, 태를 벗긴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6개월 동안 환골탈태해서 자기 변화에 성공한 솔개는 70살까지 살수 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모든 생명은 변화를 해야 살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앙생활도 끊임없는 변화를 해야 살 수 있습니다. 만일 힘들다고 변화를 무시한다면 곧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에서 유대종교에 대해서 끊임없는 변화를 요구하셨습니다. 그런데 유대종교는 변화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완전히 무시했습니다. 이렇게 변화에 실패한 예루살렘성전은 결국 멸망하게 됩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먼저 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때에 제자 중 하나가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
막11장 15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성전에 들어가셨습니다. 그 곳에서 여러 가지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예루살렘성전을 나가실 때 제자 중 하나가 예수님에게 “선생님이여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라고 합니다. 이것은 의문문이 아니라 감탄문입니다.
/당시에 예루살렘 성전은 46년 동안 짓고 있었고, 아직 완공하지 않은 건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건물의 크기가 엄청났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크기는 예루살렘 도시의 6분의 1정도가 되었고, 축구장 10배 정도의 크기였다고 합니다. 성전의 모든 자재들을 대리석이었고, 기둥은 장정 세 사람이 둘러쌀 정도였다고 합니다. 또 성전의 지붕은 모두 황금으로 칠해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너무 놀랍고 감탄스러워서 “예수님이 이 크고 웅장한 건물을 보십시오 놀랍지 않습니까” 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은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하시니라
너무나 크고 화려한 예루살렘성전이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그곳에서만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고 계시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절대로 멸망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예루살렘 성전 건물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을 정도도 다 멸망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대략 40년 뒤인 AD70년에 이루어졌습니다. 로마 장군 티토가 와서 예루살렘 성전 건물을 파괴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성전 돌 속에 숨겨놓은 보석이 있나 해서 모든 돌들을 다 파해 쳐서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을 정도로 파괴되었습니다.
또 예루살렘 성전건물만 파괴된 것이 아니라, 당시 유대인 110만 명이 죽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될 때 로마인들은 보급로를 차단하여 유대인들을 굶겨서 죽이는 작전을 폈습니다. 그래서 역사가인 요세푸스에 의하면 당시 마리아라고 하는 어떤 여인은 너무 배가 고파서 자신의 자녀까지 먹는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왜 예루살렘성전이 이렇게 멸망이 되었습니까?
변화를 외쳤던 예수님의 말씀을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에도 기업이든, 정당이든, 가정이든, 개인이든 변화되지 않으면 언제든지 사라질 수 있습니다. 바꾸는 이유는 더 잘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계속 살아남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교회도 성장과 발전을 말하기 전에 이제는 생존을 말해야할 때가 되었습니다. 과연 한국교회가 20, 30년 뒤에도 이대로 살아남아있겠습니까? 이와 같이 지금 한국교회도 변화하지 않으면 앞으로 얼마든지 사라질 수 있다고 생각을 해야 합니다.
/로마서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롬11장 21. 하나님이 원 가지(이스라엘)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이방인-교회)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또 요한계시록을 보면 4장 이후에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을 말하기 전에 먼저 교회의 심판과 멸망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영국의 어떤 선교사님은 오랫동안 인도선교를 하고난 후에 영국교회를 돌보니까 “선교를 해주었던 영국이 이제는 선교대상국이 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교회가 어떻게 하면 예루살렘성전과 같이 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유럽의 교회들처럼 되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어떻게 하면 음부의 권세가 침범치 못하는 교회가 될 수 있겠습니까? 더 나아가서 오늘날 교회가 어떻게 하면 초대교회와 같이 다시 부흥할 수 있는 교회가 될 수 있겠습니까?
//이것에 대해서 세상적인 여러 가지 방법을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오늘날의 교회를 분석하면서 제 나름대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다 헛된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멸망한 예루살렘성전처럼 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는 다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으로 돌아가는 길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외에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우리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다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에서 예루살렘 성전이 멸망될 것을 구체적으로 말씀하시기 전에 “왜 예루살렘성전이 멸망할 수밖에 없었는가?” 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왜 예루살렘성전이 멸망할 수밖에 없었는가?” 를 살펴보면서, 어떻게 하면 부흥하는 교회가 될 수 있는가를 살펴보겠습니다.
우리 모두 신년에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임으로 예루살렘성전처럼 멸망하는 교회가 아니라 초대교회처럼 부흥하는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1)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이 멸망한 이유는 먼저 예루살렘성전에는 외식된 종교생활만 있었지 참된 기도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예루살렘성전처럼 멸망하지 않고 부흥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 제일 먼저 외식된 종교생활에서 버리고 바른 기도를 회복해야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성전에 들어가시기 전에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뿌리부터 말라지게 하셨습니다.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는 당시의 예루살렘성전을 가리킵니다. 당시 예루살렘성전은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와 같이 형식적이고 외식적인 종교생활만 있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성전에는 참된 기도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성전에서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막11:17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도 예수님께서는 이 교회에서 무엇을 원하고 계십니까? 형식적이고 외식적인 종교생활이 아닙니다. 교회는 돈벌이를 하는 강도의 소굴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 교회에서 제일 먼저 바라고 계시는 것은 바른 기도입니다. 만일 오늘날 교회가 다른 많은 일을 하고도 바른 기도를 상실한다면 언제든지 그 교회는 언제든지 멸망할 수 있습니다.
//유럽의 교회를 다녀온 목사님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결국 “유럽교회는 크고 화려한 건물은 있었지만, 기도가 없어서 망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교회도 기도의 등불이 끊어지는 교회가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 교회를 세우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이 건물들이 있고, 또 조직들이 있고, 또 여러 가지 행사들이 있는 가장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께 예배하며 기도하는데 있습니다.
그런데 혹시 우리가 여러 가지 분주한 행사와 일들 때문에 하나님께 진정으로 예배하며 기도하는 일에 소홀하지 않습니까?
아무리 아름다운 성전이라 하더라도 그 속에 참된 예배가 없고, 기도의 부르짖음이 없는 교회는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와 같습니다.
그래서 참된 기도가 없는 교회는 예루살렘성전과 같이 언젠가는 무너지고 만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이 우리 교회가 먼저 예배의 생명력을 잃지 말게 하옵소서--기도의 생명력을 잃어버리는 교회가 되지 말게 해주옵소서”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교회에 그래서 계속해서 기도하는 모임이 있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하는 모든 일들의 영적 에너지가 그런 기도의 모임에서 나온다고 믿습니다.
/마치 그런 기도의 모임은 온방을 따뜻하게 해주고--또 온수를 나오게 하는 보일러실과 같습니다. 만일 집을 짓는데--모든 것을 다 잘 지어도 보일러가 돌지 아니하면 그 집은 설렁한 냉기가 도는 집이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교회가 기도하는 것을 우습게 여긴다면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와 같이 참된 생명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무엇보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하며 기도하는 일에 게을리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교회의 생명력은 기도하는 일인데, 어떤 기도가 참으로 예수님께서 원하는 바른 기도이겠습니까?(23절과 24절만 읽을 것)
“막11:20. ○그들이 아침에 지나갈 때에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보고 21.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여짜오되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22.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2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우리가 교회에서 열심히 기도를 해야 하는데, 중요한 것은 믿음으로 의심치 말고 기도해야합니다. 그래서 믿음의 기도를 통하여 이 산이 저리로 옮겨지는 것과 같은 역사가 일어나야합니다. 이것은 실제로 기도할 때 산을 옮기는 기도를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산이 들려서 바다에 옮겨진다는 것은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한 일들을 상징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인간으로 생각할 때 불가능한 일들도 믿음으로 기도하면 가능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우리는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 불가능하다고 싶은 일은 낙심하여 기도하지 않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 가능한 것만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이것은 참된 생명력이 있는 기도가 아닙니다. 무엇이 생명력이 있는 기도입니까?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 도무지 불가능해 보이는 일도 낙심치 않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고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라고 하는 곳은 세상 사람들이 도무지 상상 할 수 없는 일들도 능히 할 수 있는 곳이 곳이어야 합니다. 물론 이것은 절대 인간적으로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또 형식적인 기도로 가능한 것도 아닙니다. 믿음 없이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한다고 해서 가능한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고--그 살아계신 하나님께 도무지 불가능한 일들조차도 손을 들고 울부짖고 기도해야합니다. 그럴 때 산이 옮겨지는 역사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산은 어떤 것입니까? 우리교회는 절대 부흥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우리 자녀는 절대 결혼을 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또 우리 집에 누구는 절대 교회에 오직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이 문제만큼은 절대 해결할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내가 생각하는 어떤 사람은 절대 변화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기도는 간절한 만큼이 아니라 믿음 만큼입니다.
간절히 기도해도 내 자녀는 절대 변회될 수 없다고 믿었던 아버지에게 예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할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하고 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오직 기도외 에는 이런 능력이 나갈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기도할 때만큼은 나의 인간적인 생각, 부정적인 생각 할 수 없다는 모든 생각을 다 버리시기 바랍니다.
/기도하실 때 나는 할 수 없지만,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을 믿음으로만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기도하여 인간적으로 불가능한 것도 가능한 것으로 바뀔 수 있는 역사가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믿음의 기도를 통해서 불가능의 산을 옮기는 기적의 역사가 일어날 때--그 교회가 참으로 살아있는 하나님의 성전이요, 집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 기도할 때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고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바른 믿음으로 기도로 음부의 권세, 즉 지옥과 멸망과 사탄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부흥하는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또 교회가 예루살렘 성전처럼 멸망하지 않기 위해서는 교회에서 예수그리스도의 주되심을 회복해야합니다.
/오늘 본문 앞에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쫓아내시는 것을 보고 성전에 있던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와서 예수님에게 이렇게 질문을 합니다.
막11장 28절에 “당신이 무슨 권위로 이 성전에서 이런 일을 하느냐”고 합니다(막11:28). 이때 예수님께서는 포도원농부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포도원은 이스라엘백성을 가리키고, 또 교회를 가리킵니다. 포도원 농부의 비유에서 포도원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예수님은 그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포도원 즉 이스라엘백성들과 교회의 주인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무슨 권위로 예루살렘 성전에서 채찍으로 장사하는 사람들을 다 몰아셨습니까? 그것은 성전의 주인이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당시 예루살렘성전에서는 그 성전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성전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에 죽였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예수그리스도가 성전의 주인인 것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대신에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이 그 성전의 주인노릇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포도원인 이 교회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지금도 살아계신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이 지상의 그 어떤 교회라 할지라도 예수그리스도가 그 교회의 주인이 되지 못하면 그 교회는 아무리 크고 화려해도 언젠가는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이 교회의 최고의 권위자이십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는 이 교회에서 잘못된 모든 것을 다 허물수도 있습니다. 또 예수그리스도는 잘못된 모든 것을 다 허물고, 또 다시 세울 수도 있는 분입니다.
//그런데 이 교회에서 예수그리스도의 최고 권위를 인정하지 못하면 그 교회는 언젠가는 멸망 할 수밖에 없습니다.
//만일 목회자가 그 교회의 주인인 것처럼 자기 마음대로 모든 것을 한다면 그 교회도 오래 가지 못합니다. 또한 교회가 회중들이나 평신도들이 주인인 것처럼 자기 마음대로 한다면 그 교회도 오래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무슨 회의를 하고 결정을 할 때도 최종의 권위자는 예수님이십니다. 그 동안의 관습과 전통이 어떠했느냐 보다 과연 이럴 때 예수님은 어떻게 하실까? 를 생각하고 결정을 해야 합니다. 저는 자주 목사님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는 말을 듣습니다. 저는 이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에서 목사의 뜻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또 어떤 사람의 뜻이 중요한 것도 아닙니다. 교회에서 중요한 것은 교회의 주인이신 예수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교회에서 날마다 죽어야합니다. 목사도 매일 죽어야하고, 직분자도 매일 죽어야하고, 교인들도 매일 죽어야합니다. 지난주에 총신대 문병호교수님의 기독교강요강의를 들었습니다. 목사님은 칼빈에 대해서 공부하시고 난 다음에 한국에 오셔서 대형교회를 마다하시고 “십자가지기”라는 교회를 개척하셨습니다. 여러분 무엇이 칼빈주의입니까? 무엇이 개혁주의입니까? 개혁주의 칼빈주의는 내가 죽고 내 안에 오직 우리의 주 되신 예수님만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내가 십자가에 죽고 예수그리스도가 이 교회의 주인으로 영원히 살아계실 때 음부(즉 지옥과 멸망과 사탄)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가 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3)또 교회가 예루살렘 성전처럼 멸망하지 않기 위해서는 참된 성전이 무엇인지를 잘 알아야합니다. 유대인들은 눈에 보이는 이 건물을 성전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의 몸이 참된 성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2:19-20). 또 고린도전서에는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전 3: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데 보통 성전이고 할 때 성전의 전 지역을 가리키는 말인, “히에론”이라는 단어를 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가리켜 성전이라 하실 때 그 성전은 성전 중에서 제일 중요한 지성소를 가리키는 “나오스”라는 단어를 사용하셨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고린도전서에서 우리가 성전이라고 할 때도 지성소를 가리키는 “나오스”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눈에 보이는 이 건물을 짓는데, 46년이나 걸렸습니다. 그러면서 진짜 성전이신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또한 성전 건물을 짓기 위해서 진짜 성전인 가난한 과부의 돈을 빼앗아갔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무엇이 참된 성전인지를 잘 몰랐기 때문입니다.
//스페인에 가면 1882년도에 착공해서 지금까지 짓고 있는 성당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130년 동안 성당을 짓고 있습니다. 앞으로 70년 안에 그 성당건물을 완공을 한다고 합니다.
//여러분 무엇이 참된 성전입니까? 이 건물입니까? 아니면 사람입니까? 이 건물이 아니라 하님을 모시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이 교회에서 무엇에 돈을 쓰고, 시간을 사용해야합니다. 참된 성전인 사람을 가르치고 양육하는데, 돈을 투자하고 시간을 사용해야합니다.
그런데 참된 성전인 사람을 무시하고, 건물만 서 있다면 그것은 오래가지 못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옆에 있는 성도님들께 이렇게 이야기해주시기 바랍니다.
“당신은 성전에서 제일 귀중한 지성소입니다”
고린도전서에서는 “너희가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인 성전이다”고 말씀하지만, 에베소서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해서 함께 지어져 가야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신분상으로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실제 우리의 삶 가운데 정말 하나님이 거하시는 참된 성전이 되기 위해서 끊임없는 변화가 있어야합니다. 또 변화되기 위해서 끊임없이 말씀으로 훈련받고 양육을 받아야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가 끊임없이 말씀으로 변화하여 하나님께서 더 풍성하게 거하시고 역사하시는 참된 성전으로 더 아름답게 지어갈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초대교회처럼 날마다 더 흥왕하고 부흥하는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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