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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 신학/성경적 교회

SFC와 선교단체(교회병행운동)의 이해(김광석)

by 금빛돌 2017. 1. 7.



김광석 목사(전 SFC간사, 현 서울동부제일교회 담임)



1. 선교단체(교회병행운동)의 필요성


 Para-Church운동(교회병행운동)이라는 말을 하면 교회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일부 선교단체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교회는 Para-Church(교회병행운동)이기 때문에 무언가 기존의 교회에 대해서 대립이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고, 선교단체에서는 또 그런 오해를 받고 있기 때문에 별로 좋아하지 않는 말이다. 그러나 학생신앙운동을 논함에 있어서 Para-Church운동(교회병행운동)이라는 개념을 먼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 Para-Church, 혹은 Para-Church운동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교회의 연약함에 대한 하나님의 역사적 방편이라고 말하고 싶다. 즉 지상의 교회는 그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완전한 모습을 띠고 있지 못하다. 심지어 초대교회조차도 지상교회의 상대적 모범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지상교회의 절대적 모범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이것은 위에서 본 교회의 모습이 아니라, 아래에서 본 교회의 모습이다.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향한 영광스런 구속의 사역의 입장에서 본다면 고린도교회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교회이며 영광스런 교회이다. 이것은 교회를 위에서 본 입장이다. 그런데 이렇게 보았을 때, 거룩하다고 칭해진 교회이지만 실제상에 있어서는 교회는 역사상 항상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가 이렇게 시간세계 속에서 항상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교회의 불완전한 모습을 고착화 시켜도 된다는 말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항상 시대마다 개혁되어져야 하며 개혁되어지지 않는 교회는 참 교회라 할 수 없다. 이러한 교회의 연약성의 입장에서 Para-Church, 혹은 Para-Church운동의 존재 필요성이 생기는 것이다. 즉 Para-Church운동이란 교회의 대립적 개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교회에 대해서 상호보완적 개념이라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것이 Para-Church운동으로서 학생신앙운동이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 밖에 없었던 교회론적 원리이자, 지상교회를 보양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의 방편이라 할 수 있다.


2. 개혁주의적 선교단체로서의 학생신앙운동

  그런데 여기서 좀 더 나아가 왜 많은 Para-Church운동이 있는데, 우리가 학생신앙운동을 고집하느냐 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강령에 나타난 대로 한국에서 유일한 개혁주의를 표방하고 있는 선교단체라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의 선조가 순교의 피를 흘려가며 우리에게 남겨준 귀중한 신앙의 유산이다. 

  선교단체를 신학적 사상을 중심으로 나누면 대체적으로 4가지가 있다. 

   하나는 해방신학, 민중신학 등 현대신학에 근거한 선교단체이다. 또 하나는 요즈음 학원가에 위협이 되고 있는 이단적 사상에 근거한 선교단체이다. 세 번째는 선교단체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단순한 복음주의에 근거한 선교단체이다. 이들은 복음전도와 제자 삼기, 혹은 세계선교에 주력하는 단체이다. 학생신앙운동도 이 부류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렇지 않다고 본다(물론 이러한 것도 포함하고 있으며, 이것들을 결코 간과해서도 되지 않는다고 본다). 학생신앙운동은 철저히 개혁주의 신학에 근거한 선교단체이다. 개혁주의란 단순히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또한 양육을 받아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데서만 머물지 않고, 이 세상과 교회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구속경륜을 이 땅 가운데 펼쳐나가려는 신학사상이다. 이것은 특별히 성경의 중심사상인 하나님나라의 신학에 근거한 것이다. 즉 하나님나라는 단순히 교회에서만 나타나지 않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만물 가운데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하나님의 우주적인 통치를 이 세상 사람들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를 받고 있고도 그것을 거부하고 오히려 바벨탑과 같은 인간의 세상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일명 하나님나라의 은닉성이라 한다. 즉 하나님나라(통치)는 우주적이고 보편적이나 그것이 중생치 않은 사람에게는 이해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통치를 제대로 이해하고 나타낼 수 있는 사람들을 구속경륜을 따라 부르셔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다. 그리고 또한 구속경륜을 따라 하나님자녀들의 공동체인 교회를 이 땅 가운데 세우신 것이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이 교회를 통하여 이 땅 가운데 하나님의 통치와 주권을 드러내게 하시려는 것이다. 현대신학의 잘못은 하나님나라의 은닉성을 간과한 것이다. 즉 교회가 아닌 세상의 단체(중생치 않은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드러내려는 것이다. 

  단순한 복음주의의 잘못은 하나님나라의 보편성과 교회 중심성을 간과한 것이다.

  즉 하나님의 다스림이 단순히 교회에만 미치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만물 가운데도 미친다는 것이다. 또한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펼칠 수 있는 유일한 기관이 교회라는 것이다. 그래서 학생신앙운동은 바로 이러한 교회를 돕고, 교회를 참된 교회 되게 하기 위한 운동인 것이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가 한 번 더 생각해 볼 것은 우리의 사역의 장이 단순히 학원 속에서의 활동을 어떻게 하느냐에도 초점이 있지만, 그 결과적으로 우리가 교회에서 어떻게 우리의 교회개혁(봉사)의 사명을 감당하느냐에 있다. 그래서 우리가 속해 있는 교회들로 하여금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게 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인 것이다.


3. 교회개혁(봉사)의 사명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그러면 우리가 학생신앙운동원으로 교회개혁(봉사)의 사명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이점을 논함에 있어서 우리는 먼저 이러한 사명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해야 한다. 그것은 한국의 어떤 선교단체도 이러한 것을 사명으로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의 자부심이기도 하지만 또한 우리의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그 이유는 다른 선교단체들은 아예 교회봉사를 포기하고 자기들의 선교단체의 양육과 훈련에 초점을 두고 있는데, 우리는 이 두 가지를 해야 되기 때문에 힘들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계선교단체들의 추세가 이제 선교단체가 단순히 선교단체로만 머물 것이 아니라 교회를 돕는 기관으로서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을 잘 살려 다른 선교단체에 대해 이념적으로 선도할 수 있는 역할을 감당해야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교회가 바르게 되어야 이 나라에 희망이 생긴다). 

 그러면 좀더 구체적으로 우리는 교회봉사의 사명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 것인가?

 이 점에 대해서 우리는 칼빈의 태도를 주시할 필요가 있다.


 칼빈시대에는 두 개의 극단적인 교회가 있었다. 하나는 로마카톨릭이고, 또 하나는 재세례파였다. 로마카톨릭은 말씀과 성례전에 있어서 분명 교회의 참된 모습을 하고 있지 않았다. 칼빈은 이러한 로마카톨릭을 루터보다도 더 철저히 부정을 하고 개혁을 하고자 했다. 그런데 말씀에서는 칼빈과 거의 비슷한 입장들을 가지고 있으면서(그러나 똑같은 것은 아니었다) 교회론에 있어서 완전주의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는 재세례파에 대해서도 칼빈은 분명히 경계를 하고 있다. 즉 재세례파에서는 교회의 연약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교회가 조금이라도 부족한 점이 있을 때, 그것이 교회가 아니라고 하면서 교회를 완전히 부정해 버리고 뛰쳐나가서 자기들의 교회만 참 교회라고 하는 자들이었다. 이 점에 있어서 칼빈은 조금은 부드러운 입장을 가지고 있다. 칼빈은 로마카톨릭과 같은 교회에 대해서는 사단의 무리라고 하면서 분명한 차별성과 변혁의 입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재세례파와는 달리 지상의 교회가 연약할 수밖에 없음도 인정하고 있다. 그래서 칼빈은 이러한 지상교회의 연약함에 대해서 “이들의 연약함과 부족함은 교회를 떠나거나 부정할 조건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그 교회에 대한 사랑과 헌신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고 하고 있다.


 즉 우리는 교회봉사에 대해서 두 가지 입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하나는 말씀에 따른 개혁과 또 하나는 교회의 연약함에 대한 사랑과 헌신이다. 우리가 지금의 교회봉사에 대해서 이 두 가지의 균형 잡힌 입장을 가지지 않는다면 결코 지금의 교회를 새롭게 할 수 없다.


 만일 우리가 교회에 대해서 무턱 댄 사랑만을 부르짖는 것도 교회를 더 완악하게 만들 것이다. 그런데 또한 만일 우리가 우리의 교회에 대해 대안 없는 개혁만을 부르짖는다면 그것도 대책 없는 것이다.


 또한 교회가 어렵다는 것 때문에 교회를 여기저기 돌아다닌다면 그리스도의 남은 바 고난을 내 육체 밖으로 내몰아버리는 것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남은 바 고난(교회의 연약함 때문에 당하는 그리스도께서 내게 남겨 두신 고난/구원과는 상관없음)을 우리의 육체 가운데 채울 때 비로소 우리는 바울의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골2:24).


 우리는 우리의 교회에 대해서 무엇을 개혁해야 할 것이며, 또한 무엇을 위해 헌신해야 할 것인가를 분명히 생각해 봐야 한다.



4. 21세기 한국교회와 학생신앙운동의 전망

 (1) 교회연합운동과 학생신앙운동

 21세기는 우리나라의 통일을 바라보는 세기이다. 이렇게 우리나라의 통일을 바라보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한국교회의 통일성, 혹은 연합성의 문제이다. 이제까지의 한국교회가 개교회주의로 성장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이런 개교회주의가 이 사회 속에서 하나의 개체이기주의를 창출해내고 있지 않은가 생각한다. 한국교회가 전체의 통일된 모습으로 이 사회에 영향을 미치지 못할 뿐 아니라, 개체교회간에도 성장지향적인 경쟁의식들을 나타내고 있다. 이것은 결코 교회의 바람직한 모습이 아니다. 박도호 교수는 한국교회 개혁의 1차적 요건은 교회의 통일성의 회복이라고 했다.

 

 이렇게 된 원인은 한국교회의 성경적 교회론이 부족한 것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우주적 연합을 이루었다는 것은 요17장 뿐 아니라, 에베소서 등에서 크게 강조하고 있는 바이다. 심지어 에베소서에서는 성부 하나님의 구속경륜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이라고 하고 있다(엡1:10). 그 하나님의 하나되게 하시려는 구속경륜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셨고(엡2장), 성령께서는 이러한 성부와 성자의 사역을 우리에게 실재화시키기 위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으로 계시하고 있다. 이러한 차원에서 앞으로의 21세기의 한국교회는 교회연합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교회연합운동의 중추적 역할을 SFC가 담당하여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우리는 교회연합운동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먼저 거부감이 생긴다. 왜냐하면 이것이 WCC와 같은 에큐메니칼운동을 말하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히 그것은 아니다. 에큐메니칼운동은 교회의 신앙고백은 무시한 채 교회의 제도적 하나됨만을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 왜냐하면 교회는 신앙고백적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연합운동이란 신앙고백 일치운동이 되어야 한다. 한국교회가 가장 약한 것이 신앙고백이다. 즉 성경적 바른 진리에 대한 고백없이 단순한 종교적 열정만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에는 여러 교파가 있지만 교파간의 실질적인 차이가 별로 없다.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신학의 내용은 차이가 있을지 모르나, 개체교회 안에서의 실질적인 신앙 행태는 천차만별이다. 이렇게 되다가 한국교회가 무속종교화 되지 않을까 염려가 된다. 교회는 베드로가 고백한 주 예수에 대한 고백에서부터 시작하여 시대마다 하나님 말씀의 진리에 대한 일치된 신앙고백이 그 기초가 되어 왔다.



 이러한 차원에서 배움의 도상에 있는 학생들에게 바른 신앙고백을 가르치는 것이 학생신앙운동의 제일 중요한 사명이라 생각한다. 우리에게는 SFC강령이 있다. 또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있다. 그래서 동, 하기 수련회로 모일 때마다 이러한 강령과 신앙고백을 기초로 교육을 하고 있다. 이러한 강령에 나타난 신앙고백적 일치가 일어날 때 비로소 교회의 하나됨이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좀더 가르쳐 주어야 할 것은 개혁주의적 이념에 대한 구체적 내용이다. 즉 개혁주의적 관점에서 모든 세상과 교회를 바라보는 시각을 SFC가 바르게 가르쳐 주어야 한다. 이것을 위해 앞으로 SFC가 해야 될 일은 개혁주의에 대한 이념적 연구가 절실히 요청된다. 이와 같이 교회연합운동은 신앙고백적 일치운동을 통해서, 또한 개혁주의 정신을 심어줌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두 번째로 교회연합운동은 SFC가 교회를 전문적으로 돕는 것으로 가능하다고 본다. 앞으로의 연합운동은 SFC를 통해서 사람을 모으는 것 뿐만 아니라, SFC가 교회를 통하여 교회가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역이 되어야 한다. 특히 SFC가 당장 교회를 도울 수 있는 사역이라면 교회 대학부를 돕는 사역이다. 왜냐하면 SFC가 가지고 있는 자료의 대부분은 대학부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즉 학원에서 적용되었던 것을 이제는 교회에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SFC의 전문화가 절실히 요청된다. 예를 들어 교회가 성경공부에 대한 자료나 교재를 원하고 있다면 SFC는 그것을 충분히 제공해 줄 수 있을 만큼 자료나 역량이 있어야 한다. 특히 개체교회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전문적인 자료가 공급되어져야 한다. 예를 들어 신앙과 전공에 관한 자료가 필요하다. 또한 구체적인 직업관과 세계관에 관한 전문적인 자료가 공급되어져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교회의 소그룹이나 리더에 대한 훈련프로그램이 충분히 개발되어지고 제공되어야 한다. 만일 교회가 감당하지 못하는 전문성을 SFC가 확보하지 않는다면 SFC는 Para-Church로서의 존재가치를 상실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또한 무엇보다도 간사들의 전문화가 필요하다고 본다. 각 분야별로 간사의 전문화를 살려 공동체적 팀웍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SFC가 이렇게 할 때, SFC는 교회를 하나로 묶어 줄 수 있는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고 본다.




        (2) 대안적 교회와 학생신앙운동



        하워드 A. 스나이더는 21세기 교회의 전망에서 21세기의 교회는 제도적 전통주의에서 하나님나라의 신학으로 변모할 것이라고 했다. 즉 이제는 하나님의 다스림의 영역이 단순히 제도적 교회 안에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성경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일관되게 펼쳐진 성경의 중요한 사상이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나라의 신학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하다고 본다. 그것은 자유주의 신학에서는 하나님나라의 세계적 보편성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종교다원주의, 또는 세속화의 길로 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고찰해 보면 하나님의 다스림은 우주적이고 보편적이되 중생치 못한 세상 사람들에게는 이해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는 교회의 현실참여에 대한 바른 이해와 필요성을 심어준다고 본다. 즉 중생치 못한 자들을 통하여 하나님나라를 구현하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교회만이 이 지상에서 유일하게 하나님나라를 드러낼 수 있는 기관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가 세상에 대해서 초월대립적 관계이거나 아니면 동화적 관계가 아니라, 세상에 대해서 하나님나라를 가시적인 형태로 보여줄 수 있는 변혁적 관계, 또는 대안적 관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그들 속에서는 직접 맛볼 수 없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있는 교회공동체의 모습을 통해서 맛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위해서 교회는 우선적으로 세상의 공동체에 대한 대조사회로서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즉 이제 교회가 세상의 제도들에게서 볼 수 없는 하나님의 왕 되심을 인정한 철저한 섬김의 공동체의 모습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기계문명과 비인격적 문명으로 치닫는 이 세상의 공동체와 철저히 대조를 이루는 것이다. 또한 더 적극적으로 나아가 교회는 대안적 공동체가 되어야 된다는 것이다. 이제 교회는 노아 언약의 규례를 따라 환경문제와 문화보존의 사역에도 동참해야 한다.


        또한 화란 개혁주의교회처럼 교회가 정치에 대한 구체적인 대안도 제안할 수 있어야 된다고 본다. 특히 구원받은(출애굽한) 하나님백성이라는 우리의 정체성을 따라 약자의 편에서 약자들을 돌아보는 일들도 교회가 구체적으로 해 나가야 한다. 이렇게 하려는 것은 결코 이 세상이 영원하다든가, 아니면 이러한 세상봉사의 사역들이 저 영원한 하나님나라까지 이어진다는 낙관론은 결코 아니다. 단지 너희들은 이 세상의 빛과 소금의 공동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고백하는 모습으로 행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21세기의 교회가 감당해야 할 모습이라고 본다.


        이러한 21세기의 교회를 바라보면서 학생신앙운동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사실상 위와 같은 이야기는 그동안 하나님의 주권을 이 땅 위에 라는 이름으로 학생신앙운동이 꾸준히 제기해 왔던 문제이다. 그런데 이제는 이것이 단순히 구호로만 그칠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전문적인, 또는 교회가 이해할 수 있는 대안들을 학생신앙운동이 제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짧은 간사로서의 사역을 하면서 한계에 부딪히는 점도 바로 이것이다. 원론은 알겠는데, 구체적 대안이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보았을 때도 절실히 요청되는 것이 간사의 장기적 사역과 전문화인 것이다. 이것을 위해 학생신앙운동본부와 교회가 전문적 간사를 배출할 수 있는 재정적인 여건과 배려들을 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5. 결론


        21세기의 한국교회와 학생신앙운동을 전망하면서 사6장에서 이사야가 바라본 광경을 우리도 바라볼 수 있어야 된다. 그것은 하나님이 이 온 우주의 주인과 주권자이심과 우리의 교회의 주인이시라는 광경(환상이 아닌 사실)이다. 21세기는 세상과 교회의 실질적인 주권자이신 하나님에게 달려 있고, 그것을 인정하고 바라볼 뿐 아니라, 그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하기 위해 고난이라도 감당할 줄 아는 자들에게 열려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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