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신대 김지찬 교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2000년대를 전후로 해서 한국의 점시장이 사상최대의 호황을 맞고 있다고 합니다. 2002년도 초에는 서울 강남과 신촌 일대에 명문대 출신 역술인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으며, 신세대 취향에 맞게 인터넷에도 진출, 한 달에 복채를 3억2000만원이나 버는 사이버 점집도 있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기독교인들도 점집을 드나들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습니다. 또 우리가 확인할 길은 없으나, 어떤 점술가들은 점을 보러 오는 사람들의 절반이 기독교인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앞으로 일어날 일, 미래에 대해서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들은 신이 인간의 앞날을 알고 있으며, 신이 어떤 특별한 사람들을 통해서 자신의 뜻을 계시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에 특별히 미래를 예언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을 찾아갑니다. 이것은 동양이나 서양이나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구약시대에 이스라엘백성들도 미래에 대한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에도 점술가들이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신명기 18장 9-14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18:9.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거든 너는 그 민족들의 가증한 행위를 본받지 말 것이니 10. 그의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나 점쟁이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11.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희 가운데에 용납하지 말라 12. 이런 일을 행하는 모든 자를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나니 이런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시느니라 13.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완전하라 14. 네가 쫓아낼 이 민족들은 길흉을 말하는 자나 점쟁이의 말을 듣거니와 네게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런 일을 용납하지 아니하시느니라
하나님은 이스라엘백성들에게 무당이나 점쟁이의 말을 듣지 말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일들을 절대 용납하지 아니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말씀을 성경에서 계속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레19:26. ○너희는 -- 점을 치지 말며 술법을 행하지 말며 --31. ○너희는 신접한 자(귀신과 접한 자)와 박수를 믿지 말며 그들을 추종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그러면 이런 세상의 무당과 점술가들이 이런 점술을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점술가들이 행하는 예언의 목적은 미래의 일을 알고 싶어 하는 인간의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함으로써 미래의 화를 면하고 복을 얻으려는 이기적이고 기복주의적인 신앙의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고 김지찬 교수님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런 점술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1)점술에는 그 어떤 윤리나 도덕이 없습니다.
무당들은 점술을 통해서 미래를 예언합니다. 그래서 만일 미래에 좋지 않은 일이 있으면, 점술가의 주술적인 의식이나 주문을 통해서 그 일을 막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런 경우에는 점술가들에게 주술적인 의식을 요청하기 위해서 막대한 돈을 지불합니다. 또 무엇보다 미래에 있을 좋지 않은 일을 막기 위해서 점술가들에게 전적으로 의지하게 됩니다. 결국 그 사람은 점술가의 노예가 됩니다.
또 점술가들은 무조건 그 사람에게 좋은 예언만 합니다. 특히 미래가 불안하고 심리적으로 위축되고 의지할 것이 없는 사람에게 찾아가서 당신은 앞으로 이런 사람이 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어렵고 힘든 때에 그 점술가를 더 전적으로 의지할 수밖에 없고, 결국 그 사람은 점술가의 노예가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점술에는 그 어떤 윤리나 도덕이 없습니다. 점술가의 신비한 의식이나 주문이 중요한 것이지 그 어떤 도덕적인 가르침이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짓을 해서라도 미래의 불운을 막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에는 심지어 자신의 미래의 불운을 막기 위해서 점술가의 말에 따라서 자신의 아들을 불태워 죽이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또 어떤 짓을 해서라도 미래에 좋은 일만 생기면 모든 것이 다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점술에는 윤리와 도덕이 없습니다.
2)또 점술은 인간이 자신 스스로 미래를 인간적으로 조작할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점술은 인간이 스스로 자기 인생의 주인노릇하려고 하는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죄가 있습니다.
3)점술의 배후에는 귀신이 있습니다. 물론 모든 점술에 귀신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진짜 점술에는 그 배후에 귀신이 있습니다. 그래서 무당도 단순히 직업적 무당이 있고, 실제 귀신이 내린 강신무가 있습니다. 그 강신무의 배후에는 분명 귀신이 있습니다.
왜 그렇게 똑똑하게 보이는 많은 사람들이 점술에 넘어갑니까? 그 배후에 귀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 언론에서 말하고 있는 최태민이라는 사람은 영매의 소유자입니다. 영매란 귀신과 직접 접촉하는 일을 말합니다. 우리나라 영매의 일인자는 통일교의 문선명입니다. 그는 지금은 죽었지만 실제 귀신과 접신함으로 사람을 꿰뚤어보는 신통력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님도 살아계시지만 귀신도 분명히 있습니다. 귀신도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마4:8.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9.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귀신의 속성이 무엇입니까? 처음에는 모든 소원을 들어주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그 영혼을 멸망시키고, 사람들을 모두 파멸의 길로 인도합니다.
저는 오히려 이런 사태를 두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것은 만일 우리가 이 사실을 모르고 지나갔다면 우리나라가 어떻게 될지 모를 뻔 했습니다. 그래서 귀신의 역사를 막아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백성들은 미래를 알 길이 없습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자기 백성들에게 미래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신18:14. 네가 쫓아낼 이 (이방)민족들은 길흉을 말하는 자나 점쟁이의 말을 듣거니와 네게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런 일을 용납하지 아니하시느니라 1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
하나님께서는 절대 점쟁이들을 용납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대신에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일으키시는데, 너희는 그 선지자들의 말을 들으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통해서 미래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 선포한 미래는 인간들이 현재의 도덕적 행동과 상관없이 미리 운명 지어진 미래가 절대 아닙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현재를 밝힘으로 미래를 예언하는 자입니다.
쉽게 말씀을 선지자란 사람들이 현재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미래에 복을 받는다고 예언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현재에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면 미래에 하나님께 저주를 받는다고 예언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니까 예언이 무엇입니까? 예언이란 장차 당신은 이렇게 될 사람으로 영원 전부터 운명되어졌다고 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이것은 무당이 말하는 예언입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예언을 장차 일어날 일을 미리 아는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전에 어머니가 암이었던 어떤 자매가 예언의 은사를 가진 친구 여전도사님에게 예언을 받았다고 하면서 자신의 어머니는 절대 죽지 않을 것이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결국 어머니는 암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하시는 말이 자신의 교회에 예언의 은사를 가진 여전도사님이 있었는데, 아이가 없는 여 집사님에게 한 달 뒤에 아이를 가질 것이라고 예언을 했다고 합니다. 결국 한달 뒤가 되어도 아이를 가지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예언이 무엇입니까? 예언이란 절대 미래에 초점을 둔 것이 아닙니다. 예언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현재를 밝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현재를 밝히게 되면 미래는 당연히 예견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현재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돌이키면 얼마든지 화를 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미래에 하나님의 화를 면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현재에는 어렵고 힘이 든다 하더라도 미래에 반드시 복을 받을 것이라는 것이 예언입니다.
//구약성경에 나단선지자를 보시기 바랍니다. 나단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다윗이 범한 현재적인 죄를 밝혀주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미래에 어떻게 될 것인가를 예언했습니다.
/“삼하12:9. 그러한데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냐 네가 칼로 헷 사람 우리아를 치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도다 10.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서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11. 여호와께서 또 이와 같이 이르시기를 보라 내가 너와 네 집에 재앙을 일으키고 내가 네 눈앞에서 네 아내를 빼앗아 네 이웃들에게 주리니 그 사람들이 네 아내들과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 12. 너는 은밀히 행하였으나 나는 (미래에) 온 이스라엘 앞에서 백주에 이 일을 행하리라 하셨나이다” 고 합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 우리의 미래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입니까? 그것은 절대 미리 정해져 있는 것이 없습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면 하나님께서 절대 여러분들에게 복을 주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여러분들을 복 받게 하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특히 여러분 가운데 자녀의 미래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자녀가 앞으로 잘 될 것인가? 아니면 어렵고 힘든 삶을 살 것인가? 이것도 절대 미리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현재 자녀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있는가를 잘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자녀의 미래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으로 우리나라가 어떻게 될 것입니까? 그것도 절대 미리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현재 지금 우리나라가 정말 하나님의 말씀대로 돌아가고 있는지 잘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나라의 미래를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점술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또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사람은 점쟁이가 아니라 선지자입니다.
이에 대해서 박영돈 교수님이 지난주 고려신학대학원 새벽기도시간에 들려주었던 말씀이 있습니다.
“개혁교회는 저항하는 교회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와 신자들이 세상에 저항하는 저항 정신을 잃어버리고 불의한 정권과 체제에 대한 선지자의 예언자적인 사명을 저버렸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한 세상 권력에 무기력하게 순응하며 그런 정권을 오히려 비호하고 지원하기까지 했습니다. 권력의 맛이 들린 일부 교회 지도자들이 영적인 분별력을 잃어버리고 귀신과 사술(점술)에 휘둘리는 지도자와 정권을 세우고 지지하는데 앞장섰습니다. 교회가 세상의 권력이 타락하고 부패하는 것을 대항하는 세력이 되지 못하면 이 사회정치 문화 전반에 걸쳐 거대한 악의 축과 사슬이 형성됩니다. 이 나라가 거짓의 왕국, 어두움의 왕국이 됩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주신 권세를 악용하여 하나님의 다스림과 공의에 대적하는 정권과 지도자에 대해 강력한 선지자적인 메시지를 전해야 합니다. 교회는 세상의 권세 잡은 자들, 부한 자들, 기득권층이 국민들, 특별히 이 사회의 약자와 가난한 자들을 교묘히 착취하고 압제하는 모든 불의와 모순을 강하게 질타하는 선지자적인 용기를 회복해야 합니다. 이 사회와 나라가 어떻게 되든 내 영혼의 잘됨과 개인의 영성과 경건에만 몰두하게 하는 가르침과 설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종교개혁자 칼빈이 강조한 신앙은 개인구원과 경건에만 몰두하는 사적 신앙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모든 영역에 하나님의 다스림과 주권이 이루어지며 하나님이 온 세상에서 영광을 받으시게 하는 공적 신앙입니다. 언제부터 개혁교회가 개인 신앙의 속에 갇혀 온 나라와 백성들이 신음하고 고통 받는 현실을 외면하는 교회가 되었나요. 이 민족과 함께 고난 받고 그들을 선도하며 이 땅을 치유하는 교회가 되어야 하지 않나요. 교회는 세상에 회개를 촉구하는 선지자의 사명과 함께 이 민족의 죄를 끌어안고 회개하는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해야 합니다. 정작 회개해야 할 사람은 마음이 완고하여 회개하지 않습니다. 회개는 회개할 것이 상대적으로 적은 거룩한 이들이 참으로 회개해야 할 이들을 위해 대신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이 민족의 죄를 자신의 죄처럼 회개하며 이 땅에 하나님의 긍휼이 임하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이런 혼란한 시대에 선지자의 정신을 따르는 주의 종은 고난의 길을 각오해야 할 것입니다. 명성과 지위는 물론 목숨까지 내놓는 대가를 치러야 할지 모릅니다. 세상의 불의한 세력에 비굴하게 타협하고 굴복하는 주의 종이 아니라 성령의 권능에 사로잡혀 선지자적 정신과 개혁자들의 저항정신을 이어가는 주의 종들 되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와 나라를 다시 하나님의 공의 위에 세우는 종들이 되기 바랍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시대는 선지자들이 요구되는 시대입니다.
그러면 점쟁이와는 다른 선자지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이것에 대해서는 아브라함 조슈아 헤셀의 예언자들이라는 책을 참고로 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선지자들이란 우리의 사소한 일상사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입니다.
/선지자들이 우리에게 도전해 오는 것은 단순히 우리가 머리로 알고 있는 성경적신학과 교리가 아닙니다. 우리가 알고 있고 믿고 있는 성경적신학과 교리가 우리의 일상事속에 어떻게 나타났느냐를 보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경계해야 할 삶은 우리의 삶이 일상성에 빠지는 삶입니다. 그런데 선지자들은 이것보다 한 단계 더 높게 우리가 단순히 일상성에 빠지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적인 삶들 속에 성경적 교리나 신학이 어떻게 나타났느냐를 보고 문제를 삼습니다. 목사가 설교를 할 때 어떻게 사랑과 공의를 외첬느냐 보다는 그 목사가 일상적인 삶속에서 어떻게 했느냐를 가지고 문제를 삼습니다.
선지자는 우리의 예배를 드릴 때의 모습뿐만 아니라, 버스 안에서의 우리의 모습을 봅니다. 또한 가정에서, 길거리에서, 부엌에서의 우리의 모습을 봅니다. 그리고 그 일상적이고 사소한 일들 속에 과연 우리의 신앙이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가를 주시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선지자가 우리에게 관심을 쏟는 것은 우리 주위의 사소한 일상적인 일들에 관심이 있습니다.
/철학자 키케로는 "신들은 큰일에 몰두해 있다. 그들은 작은 일들을 무시한다" 고 주장을 합니다. 그러나 선지자들에게는 인간에게 일어나는 사소한 일들이야말로 가장 크게 관심을 가지는 문제입니다 그들이 믿는 하나님은 혼자 앉아서 영원한 세계를 명상하는 분이 아니라, 사람의 형편에 관심을 가지시고 사람의 형편을 대처하는 분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무속종교에서는 이 시대의 상태를 파악하기 위해서 자연적인 현상을 봅니다. 그래서 갑자기 기상재앙이 있으면 그것을 신의 진노라고 합니다. 그러나 선지자들이 관심해 하는 것은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라, 사람이며 사람들 속에서 일어나는 역사며 사건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저 멀리 강단에서 혼자 떨어져 말만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의 말을 듣는 사람들 속에 함께 고통하며 함께 눈물을 흘리며 그들과 더불어 사는 인간입니다.
//또 선지자들의 생명은 그가 말하는 내용과 그가 말한 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에 따라 살고 죽습니다. 메아리를 일으키는 것은 단순한 그의 말이 아니라, 그의 삶입니다. 선지자는 말로서 비판하는 사람이 아니라, 몸으로 비판하는 사람들입니다.
/선지자들의 주장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엉거주춤하여 알쏭달쏭한 법이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의 가슴으로부터 쏟아져 나와 인간의 가슴속으로 뚫고 들어가려는 듯 강요하고 앞으로 밀어붙입니다. 선지자들은 핑계를 참지 못하며 겉치레와 외식과 꾸미기를 경멸합니다.
/선지자의 입은 날카로운 칼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화살 통에 꽂아 두신 날카롭게 벼린 화살입니다(사49:2,사32:11). 선지자의 글을 읽으면 감정이 팽팽하게 고조되고 느긋하게 안정을 즐기던 양심이 마구 뒤틀립니다. 그래서 선지자가 되기란 곤혹스런 일입니다. 숱한 인간들이 뭘 좀 아는 체 하면서 평화와 풍요를 예고하고 듣기 좋은 말로 대중 앞에 아첨을 하는 틈바구니에서 예언자는 재앙과 역병, 고통, 파멸을 예고해야 합니다.
/지금까지는 사람들이 모르고 있던 아주 미세한 물체가 갑자가 현미경아래 그 모습을 드러낸 것입니다. 과장이라고 생각되는 것이 다만 보다 깊이 뚫고 들어가 살펴본 것일 수가 있습니다.
/특히 선지자는 겉으로만 거룩하고 신성하며 두려운 모든 것을 부수는 우상 타파자입니다. 선지자는 알고 있습니다. 인간이 만든 종교가 인간에게 내린 하나님의 명령을 오히려 왜곡시킬 수도 있다는 사실을. 사제라는 자들이 거짓 증언을 잉태하고 폭력을 용납하며 증오를 묵인하고 무자비, 거짓, 우상 숭배, 폭력 따위를 분노로 두드려 부수는 대신에 종교의식(儀式)으로 승격시킴으로서 위증죄를 범해 왔다는 사실을. 선지자는 졸지도 자지도 않습니다. 그는 언제나 진지합니다. 경건의 냄새인 성대한 종교의식(儀式)은 인간의 잔인성과 고루 썩여 잠자지 못하는 선지자를 괴롭힐 따름입니다.
그래서 이사야1장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1:11.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14.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15.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16.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17.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선지자의 말은 준엄하고 메마르며 가시가 숨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엄정함 뒤에는 사람에 대한 사랑과 동정심이 있습니다. 실로 그가 모든 미래에 있을 재앙을 예언하는 것은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회개를 권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재앙이 없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를 하나님이 보내신 것은 꾸짖으라고만 보내신 것만이 아닙니다. 늘어진 두 팔에 힘을 주고 휘청거리는 두 무릎을 꼿꼿이 세우게"(사35:3)하려고 보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35장3. 너희는 약한 손을 강하게 하며 떨리는 무릎을 굳게 하며 4. 겁내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복하시며 갚아 주실 것이라 하나님이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거의 모든 선지자들이 처음에는 꾸지람과 징계를 내리면서 나중에는 위로와 약속과 화해의 희망을 덧붙여 주고 있습니다. 선지자는 멸망의 메세지로 시작하여 희망의 메세지로 마칩니다.
/“호6: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2.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우리가 아무리 잘못하고, 죄를 짓더라도, 그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시자와 같이 임하여 우리를 완전히 찢으신다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를 진심으로 뉘우치고,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만 하면 다시 우리를 낫게 하시고 싸매어 주실 것입니다.
“호6:2.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우리가 진심으로 우리 죄를 회개하고--여호와께로 돌아가기만 하면 우리를 하나님의 심판에서 치유하시고 회복시키실 뿐 아니라 나중에는 우리를 심판 받을 때보다 더 높여주시겠다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간다는 것이 무조건 형식적인 예배의 자리로만 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마음대로 신앙생활을 하던 것에서 돌이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무엇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 앞에서 진실과 정직의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여호와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진정으로 여호와께로 돌아간다는 것은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서로 사랑하며 용서하며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와 같이 진실과 사랑의 말씀의 자리로 돌아오는 것이 여호와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미래가 불안한 이 세상에서 우리를 유일하게 안전하게 지켜줄 수 있는 안전책입니다.
--또 무엇보다 우리를 불안한 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게 지켜주실 분은 오직 예수그리스도밖에 없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나와 함께 하시면, 이 세상의 그 어떤 사탄의 영적 세력(사람들)이 나를 해한다하더라도 나는 겁낼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이 세상의 그 어떤 악한 영적 세력보다 뛰어난 분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길만이 세상의 난리를 그치게 하시고,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 줄 수 있는 유일한 피난처 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 오직 예수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 줄 수 있는 유일한 피난처 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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