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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경연구/마태복음

애통하는 자의 위로(마5:4)

by 금빛돌 2016. 3. 19.

어느 신문의 기자가 쓴 글을 읽어보겠습니다. “최근 5년간 한··일 인터넷 서점 베스트셀러에 나타난 세 나라 국민들의 집단 심리를 분석한 것을 보면 흥미있는 결과가 나온다. 그 나라사람들이 어떤 책을 집는지 보면 그 나라사람들의 마음이 보인다. 2007년 글로벌금융위기 전까지 한국인은 "악착같이 살자"고 독려하는 책을 즐겨 읽었다. 베스트셀러 30위 안에 든 책 가운데 11권이 "하면 된다"고 하는 책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예를들어 이기는 습관'(쌤앤파커스), '바보처럼 공부하고 천재처럼 꿈꿔라'(명진출판사)가 대표적이다. 그런데 2010~2011년에는 성공을 파는 책은 급격히 줄어들었다. 점점 더 많이 팔리고 있는 게 위로·성찰·공감의 메시지를 전하는 책들이다. 작년 8'아프니까 청춘이다'(쌤앤파커스)가 출간 8개월 만에 100만부를 찍었을 때만 해도, 출판계에는 "그 책은 이제 팔릴 만큼 팔렸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수능을 마친 고3과 재수생이 대거 '아프니까 청춘이다' 대열에 합류하면서 새해 들어 150만부도 가뿐히 넘어섰다. 요컨대 한국에선 성공에 대한 열망과 자신감이 쪼그라들고 위로와 공감에 대한 책들이 몸집을 불리고 있다는 기사를 썼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요즘 사람들의 마음이 우울하고 답답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우울하고 답답한 현실 가운데서 무언가에 위로를 얻고 싶고 또한 공감을 얻고 싶어 합니다. 특별히 올해 들어서는 세월호 참사와 월드컵 참패 등으로 우리의 마음이 더 우울하고 답답합니다. 그래서 지금은 우리에게 힘든 삶에 대한 공감과 위로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사람의 위로도 필요하지만 하나님의 위로가 더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애통한다는 것은 탄식한다는 것과 다릅니다. 탄식은 사람들 앞에 우는 것입니다. 그러나 애통은 하나님 앞에서 우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사람들 앞에서 탄식합니다. 사람들 앞에서 탄식하면 원망과 불평이 되고 단순한 분노가 됩니다. 그래서 요즘에는 분노하라는 책도 있습니다. 또 자기 자신 안에서 울면 그것은 우울증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단순히 탄식하라, 분노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애통하라고 하십니다. 울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울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우리가 울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울어야합니까?

하나님은 긍휼의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은 성도가 흘리는 눈물을 싫어하시거나 외면하지 않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22:24. “그는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그의 얼굴을 그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시고 그가 울부짖을 때에 들으셨도다

//또 하나님은 눈물의 기도에 약한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눈물의 기도를 결코 외면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또 이렇게 고백합니다.

55:8.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사오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

우리가 외롭게 방황하고 고통하고 눈물을 흘리는 모든 날 수를 주님께서 계수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나의 눈물을 주님의 병에 담아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눈물의 날들을 계수하고 계시다는 것은 우리의 모든 눈물을 기억하고 계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흘린 눈물들에 대해서 반드시 기억하시고, 보응해주시고, 위로해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흘린 눈물의 양만큼이 아니라 우리가 흘린 눈물의 양 그 이상으로 위로의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그래서 여러분 울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우시기 바랍니다.

//천국에 가면 열두진주문이 있습니다. 진주는 조개의 눈물입니다. 천국은 성도의 눈물이 모여서 보석이 된 곳입니다. 이와 같이 성도의 눈물은 하나님이 보실 때 제일 아름다운 보석입니다.

//하나님은 눈물의 기도를 보기를 원하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눈물의 예배를 보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우는 것은 절대 인간적인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우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해서 억지로 울려고 해서는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안에서의 기쁨도 조장해서는 되지 앉지만, 하나님 앞에서 눈물도 조장해서는 되지 않습니다.

--누가 하나님 앞에서 눈물을 흘릴 수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 은혜를 받은 자만이 하나님 앞에서 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원문으로 보면 복이 있도다 애통하는 자여라고 하고 있는데, 복이란 말은 은혜라는 말도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은혜를 받아야 하나님 앞에서 울 수 있습니다.

//어떤 성도님은 하나님 앞에 나올 때마다 눈물을 흘리는 분이 계십니다.

//기도를 할 때마다 눈물을 흘리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들이 우리 가운데 하나님께 제일 큰 은혜와 복을 받은 성도님이십니다.

//그래서 여러분 이 세상에 그 어떤 복보다 하나님께 눈물을 흘리는 복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위로의 은혜를 허락해주실 것입니다.

/거짓된 희락에는 영적인 메마름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신 애통에는 풍성함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울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울어야하는데, 우리가 무엇을 가지고 울어야합니까?

1)나는 사랑하나 나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는 자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서 울어야합니다.

1094절과 5절에서 다윗은 이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4. 나는 사랑하나 그들은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

우리는 무엇보다 사랑하는 삶을 살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랑하려고 하지만 사람들은 우리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습니다. 도리어 우리는 사랑하지만 사람들은 그 사랑을 도리어 악으로 갚을 때가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 앞에서 울어야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해야합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사랑하나 내 사랑을 받아주지 않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또 이런 상황가운데서 그 사람에 대한 나의 사랑이 식어지지 않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해야합니다. 또한 나의 사랑이 상대적이 되지 않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해야합니다.

//특별히 이런 문제가 부부간에 있을 때가 많습니다. 어떤 부인은 남편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님께 돌아오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남편은 이런 아내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습니다. 도리어 아내의 마음에 더 큰 상처를 줄 때가 있습니다.

이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때 아내는 울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울어야합니다. 남편에게 울분을 토해서는 되지 않습니다.

//또 부모와 자녀 간에 이런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아버지가 자식에게 폭행을 당했습니다. 경찰이 와서 물었습니다. 누가 당신을 폭행했습니까? 그때 아버지는 절대 내 자식이 폭행한 것이 아니다고 말을 했습니다.

//이때 아버지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내가 죽더라도 자녀가 잘 되기를 바라는 것이 아버지의 심정입니다. 그런데 요즘 자녀들은 그런 부모의 사랑을 알아주지 않습니다. 부모가 싫다고 합니다. 이때도 부모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나는 사랑하나 나의 자녀가 나의 사랑을 받아주지 아니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하나님 앞에서 자녀를 위해서 우는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모든 성도님들을 볼 때마다 사랑합니다고 인사를 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그 말이 듣기 싫어서 교회를 옮겼다고 합니다. 그 목사님의 마음이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이때도 그 목사님은 어떻게 하셨겠습니까? 나는 사랑하나 내 사랑을 받아주지 아니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

//나는 사랑하나 나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는 자들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서 울 수 있는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또 내 안에 있는 죄와 연약함을 두고 하나님 앞에서 울어야합니다.

//내 입술은 공의와 정직을 말하면서도 내 안에 사랑이 없습니다//남의 눈에 있는 티끌은 들보와 같이 보면서 내 안에 있는 들보는 보이지 않습니다. //또 내 안에 예수님의 온유가 없습니다. 또 예수님을 닮은 겸손이 없습니다. //무엇보다 내 안에 신앙의 감정이 메말라 있습니다. 주님을 향한 처음 사랑이 식어 있습니다. 하나님과 말씀에 대한 사모함이 식어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정말 깨어 있는 성도라면 날마다 이런 내 안에 죄악을 두고 하나님 앞에서 울 수밖에 없습니다. //내 마음은 원이지만 육신이 연약하여 짓는 모든 죄에 대해서 울 수밖에 없습니다.

3)또 우리는 이 시대를 두고 하나님 앞에서 울어야합니다.

//우리는 이 시대를 두고 하나님 앞에서 울 수밖에 없습니다. 롯을 보시기 바랍니다. 롯은 자신의 가족조차도 구원시키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아내조차도 소돔과 고모라에서 구원시키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롯을 가리켜 베드로후서에서는 의로운 롯이라고 합니다. 자신의 가족조차 구원시키지 못했던 이 롯이 왜 의로운 롯입니까?

벧후2:7.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로 말미암아 고통 당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8. (이는 이 의인이 그들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이 상함이라)

롯은 그 시대의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이 울기라도 했습니다. 이것을 두고 하나님은 롯을 의롭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인간의 관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빛 아래서 이 세상을 보아야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의 빛 아래서 모든 것을 보면 정말 이 시대의 불의와 불법, 공평치 못함 그리고 사랑이 없음을 두고 하나님 앞에서 울 수밖에 없습니다.

//

4)또 우리는 다음세대의 신앙을 위해서 울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자신을 위하여 우는 자들을 보시고 눅23:28절에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요즘 저의 생각과 기도 가운데 한 순간도 빠지지 않는 단어가 다음세대입니다. 그 말은 나이 많으신 세대가 중요하지 않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당연히 연세 드신 아프신 성도님들을 위해서 매일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이 드신 세대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신앙을 버리지 않습니다. 또 하나님중심 성경중심 교회 중심의 신앙이 확고합니다. 그런데 이 다음세대는 그렇지 않습니다. 다음세대는 세상의 문화와 정보에 너무나 많이 노출이 되어 있습니다. 또 그 가운데서 잘못된 신앙사상에 너무나 많이 노출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중심, 성경중심, 교회중심의 신앙을 유지하면서 살아가기가 너무나 어려운 세대입니다. 지난주에도 우리 큰 아이 친구가 베리칩, 666”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친구는 666의 표를 받지 말아야한다고 주장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안타까운 것은 성경을 너무나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 친구만 아닙니다.

젊은 세대들은 드라마, 연예정보, 인터넷 기술, 그 외에도 세상의 여러 가지 사상과 학문에 노출이 되어 있습니다. 또 요즘에 자유주의적인 신학사상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고 따라가고 있습니다. 또 너무나 개인주의적입니다. 그러면서 성경에 대해서 너무 모릅니다. 또 교회 공동체에 대한 의식이 너무 부족합니다.

////서구의 교회가 왜 다 문을 닫고 있습니까? 호주에는 100년 전에 교회당 건물이 가장 음란한 카바레가 되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렇게 된 제일 큰 원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는 자유주의적 신학사상 때문입니다. 이단보다 더 무서운 것은 자유주의적 신학사상입니다. 또 철저하게 개인주의적인 생각들 때문입니다. 이것이 10년 뒤 우리의 현실이 되지 않으리라는 법은 절대 없습니다. 그래서 정말 다음세대를 위해서 하나님 앞에서 울어야합니다.

5)또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의 명예를 위해서 울어야합니다.

여러분 왜 우리가 교회를 위해서 기도해야합니까? 그 교회가 잘되면 목사의 영광이 나타나고, 장로님들의 영광이 나타나기 때문입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이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이 교회가 욕을 얻어먹는 것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의 명예에 손상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 저는 또 기도할때마다 매일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의 명예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 교회를 통해서 드러나야 할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의 명예를 위해서 울 수 있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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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우는 자에게 어떤 하나님의 위로가 주어집니까?

1)제일 먼저 하나님 앞에서 우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곁으로 찾아오시는 위로를 경험하게 됩니다. 위로라는 말이 파라칼레오라는 말로서 곁으로 부르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애통하는 자에게 가장 큰 위로는 애통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친히 곁으로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애통은 저 멀리 계시는 하나님을 내 곁으로 오시게 하는 것입니다. 씨에스 루이스가 말한 것처럼 고통이 없을 때는 하나님의 음성은 작게 들렸는데 고통이 있을 때 하나님의 음성은 확성기와 같이 들립니다.

애통가운데 가장 큰 위로는 하나님께서 더 가까이 오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애통하는 자에게 하나님께 친히 가까이 찾아오셔서 눈물이 변하여 기쁨이 되게 하십니다. 또 탄식이 변하여 찬양이 되게 하십니다. 또 슬픔이 변하여 희락이 되게 하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애통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나에게 더 가까이 오시는 위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2)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우는 자에게 하나님은 위로만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우는 자에게 하나님은 사명을 주십니다.

요즘 들어서 하나님께서 저에게 제일 많이 울게 하시는 것이 다음세대입니다. 수영을 하면서 물속에서 들어갔다 나왔다면서 다음세대를 위해서 웁니다. 물안경을 끼고 물속에 있으니까 아무도 내가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계속 우는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네가 다음세대를 위해서 울고 있다면 내가 네게 사명을 주겠노라//네가 다음세를 위하여 울고 있다면 울지말 말고 다음세대를 찾아가라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라 그리고 그들의 고통 속으로 들어가라 그리고 그들을 위로하라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을 주어라 그리고 다음세대를 위해서 말씀으로 준비하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다음세대를 위해서 울더라도 말씀의 씨를 뿌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설교 후에 특별헌금을 하려는 것도 다음세대를 위해서입니다. 저는 요즘 성도님들의 경제적으로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를 포함해서 장로님들도 가능하면 특별헌금을 하지 아니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15천만을 가지고 3천만원은 갚고 올해 들어 6년째 지나고 있습니다. 이자만 5천만 원을 감당했습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가능하면 경상비를 모아서 감당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 때문에 다음세대를 위한 교육비를 쓰는 것에도 부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렵지만 이번 기회 특별헌금을 작정하려 합니다. 그래서 다음세대를 위한 눈물이 다음세대를 향한 기성세대의 사명으로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가운데서 눈물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 앞에서 우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위로해주십니다. 또한 그 눈물 속에 사명이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서 이 시대를 바라보면서 눈물이 나시는 분들이 있습니까? 사람들 앞에서 분풀이를 하지 마시고 하나님 앞에서 이 시대를 두고 우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이 시대를 위해서 하나님 앞에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사명을 주십니다.

//여러분 가운데서 믿지 않는 가족들과 자녀들, 그리고 사람들을 위한 눈물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눈물 속에 그들을 향하신 영혼구원의 사명이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서 교회를 향하신 안타까운 눈물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 교회를 향한 여러분들의 사명이 있습니다.

--내가 사랑을 해주어도 사랑을 받지 않는 사람들로 인한 눈물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사람에 대한 나의 사명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아프니까 청춘이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들은 아프니까 사랑입니다. 또 예수 믿는 사람들은 울더라도 씨를 뿌려야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애통의 눈물을 흘리는 자에게 놀라운 하나님의 위로와 사명이 있을 줄 믿습니다.

3)위로-구체적인 개입하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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