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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 신학/설교모음

감사와 소망(애3:19-23)

by 금빛돌 2015. 11. 14.

성경에서 가장 많이 절망을 경험한 사람이 예레미야입니다. 그는 유다와 예루살렘의 멸망을 직접 예언한 선지자였습니다. 또 그것을 직접 경험한 선지자였습니다. 예레미야는 그가 예언한대로 예루살렘이 멸망한 것을 보니까, 기뻐했던 것이 아니라 절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애가 1장과 2장을 보면 그는 눈물을 마치 강같이 흘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2,16절을 읽어보겠습니다.

1:2. 밤에는(밤새도록) 슬피 우니 눈물이 뺨에 흐름이여라고 합니다. 1:16 이로 말미암아 내가 우니 내 눈에 눈물이 물 같이 흘러내림이여라고 합니다.

211절입니다.

2:11. 내 눈이 눈물에 상하며 내 창자가 끊어지며 내 간이 땅에 쏟아졌으니 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레미야의 절망 중에서 가장 큰 절망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느끼는 절망이었습니다. 그것이 3장에 잘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12절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마치 화살을 당겨 예레미야로 과녁을 삼으시는 듯 하다고 합니다

3:12. (하나님께서) 활을 당겨 나를 화살의 과녁으로 삼으심이여

또 예레미야의 절망을 가장 잘 표현한 곳이 18절입니다.

3:18. 스스로 이르기를 나의 힘과 여호와께 대한 내 소망이 끊어졌다 하였도다

예레미야는 이제는 더 이상 하나님께 대한 소망조차도 잃어버렸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어려워도 하나님께 대한 소망을 잃어버리지 말아야합니다. 그런데 지금 예레미야는 그 하나님께 대한 소망조차도 끊어진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19절에서 이렇게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3:19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하나님이여 제발 내 고통과 절망을 하나님께서 기억하여 주셔서 이 절망에서 구원하여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큰 위로를 받습니다. 구약의 선지자 중에서 제일 믿음이 좋고 큰 선지자중의 하나가 예레미야입니다. 그런데 이 예레미야도 하나님 앞에서 절망하는 순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칼빈은 오늘 본문을 주석하면서 신실한 성도라고 해서 절망과 낙심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배워야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겸손을 배워야합니다. 우리는 절대 우리의 신앙에 대해서 자만해서는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말씀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우리가 말씀을 가지고 있어도 흔들릴 수 있습니다. 또 심지어 말씀을 전하고 있어도 전하고 있어도 감당할 수 없는 절망스런 일들을 현실 가운데 닥치면 흔들릴 수 있습니다.

--또 우리는 성공적인 하나님의 일을 해놓고도 이런 절망을 느낄 수 있습니다.

엘리야는 열왕기상 18장에서 바알의 칠천무리들 앞에서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는 엄청난 이적과 승리를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왕상 19장에서 이세벨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때 엘리야는 그 말만 듣고도 겁이 나서 도망하여 로뎀나무 아래서 하나님께 하나님 주님 이제 족하오니 죽여주시옵소서라고 합니다.

--또 바울을 보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능력의 사도입니다. 그런데 그는 고린도 후서18, 9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고후1: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 9 우리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라고 말합니다.

--믿음이 있어도 절망할 수 있습니다. 또 큰 기적과 승리를 경험하고도 절망할 수 있습니다. 능력이 있어도 절망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에 대해서 항상 주님 앞에서 겸손해야합니다.

--“나는 절대 넘어지지 않는다. 나는 절대 절망하지 않는다라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들은 얼마든지 넘어질 수 있습니다. 절망할 수 있습니다.

--그때 왜 나는 이렇게 절망하지라고 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냥 절망할 수밖에 없는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장미가 되고 싶어 합니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장미를 꿈꿉니다. 그리고 한 번도 부러지지 않는 장미의 인생을 꿈꿉니다. 또 나는 절대 쓰러지지 않을 것이라 자만합니다. 그런데 이런 장미와 같은 인생을 추구하는 사람은 한번 꺽어지면 끝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잡초와 같은 인생이 되어야합니다. 초라합니다. 보잘 것 없습니다. 밟힐 수도 있습니다. 실패하기도 합니다. 절망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밟히면서 커가는 것이 잡초입니다.

--여러분 혹 지금 내 믿음이 떨어져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예전과 같지 않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래서는 안 되지만 그럴 수도 있다고 여기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나오는 모든 신앙의 인물들도 우리와 같이 낙담하기도 했습니다. 그들도 우리와 같이 절망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을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도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꼿꼿한 삶을 사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이 고난의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시기까지 했습니다. 또 십자가에서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절규하기도 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얼마든지 절망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얼마든지 예레미야와 같이 절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순간적으로 절망할 수 있지만 계속해서 절망하며 낙담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절망의 순간가운데서도 소망의 이유를 발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315에서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레미야도 마음껏 절망하고 내려갈 때까지 내려갔습니다.

--예레미야는 절망의 끝 까지 내려가다가 이제 소망의 이유를 발견합니다. 20-22절을 옛날성경으로 읽어보겠습니다.

20. 내 심령이 그것을(고초와 재난을) 기억하고 낙심이 되오나

21. 중심에 회상한즉 오히려 소망이 있사옴은

22.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여기서 예레미야는 자신이 당한 고초와 재난을 기억하니 낙심이 되었습니다. 절망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절망의 상황 가운데서--중심에 가만히 회상해보니 오히려 소망이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기억이란 눈에 보이는 고난의 현실만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또 머리로만 현실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고난이 있을 때 그 고난의 현실만을 하루 종일 기억하고 묵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더 크게 낙심이 됩니다.

그런데 이제 예레미야는 고난의 현실에 대한 기억이 아니라 중심에 회상을 합니다. 회상이란 머리로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또 눈에 보이는 현실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마음 속 깊이-눈에 보이는 현상 너머에 있는 그 무엇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런 경험을 해 보셨을 것입니다.

밤새 고민합니다. 아무 생각해도 모든 것이 다 깜깜합니다. 그런데 새벽에 조용히 앉아서 생각해봅니다.

도무지 나는 지금 내게 아무 것도 감사 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더 깊이 마음으로 생각해보니까 내게 이미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여전히 내게 있습니다. 그래서 밤에는 죽을 것 같다가도 아침에 일어나 가만히 생각해보니 아직 내게 감사할 것이 남이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감사하며 소망을 가지게 됩니다.

--지금 예레미야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을 보고 이제 끝이다, 그리고 절대 절망이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마음의 중심으로 더 깊이 회상해보니까--이런 절망스런 상황 속에서도 여전히 소망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레미야가 이런 절망의 상황가운데서도 중심에 회상해보니까 소망을 가지게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1.첫째는,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로 말미암아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22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고 말합니다.

애가 1장과 2장에서 예루살렘의 멸망한 모습을 보고 절망합니다. 3장에서는 하나님께서 버리신 것 같아서 절망합니다. 그런데 이런 가운데서 가만히 중심에 회상해보니 이런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하심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아직 예레미야 자신이 살아있다는 사실입니다. 또 비록 포로로 잡혀갔지만 유다백성이 다 죽지 완전히 진멸되지 않고 살아 있다는 사실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아니었다면 유다백성들은 완전히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하심으로 말미암아 아직 죽지 않고 살아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마음 가운데 떠올리게 될 때-그는 낙심과 절망가운데서도 오히려 내가 소망이 있나이다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지난 IMF 때 어떤 아버지가 갑자기 회사에서 명퇴를 당하게 됩니다. 그래도 여전히 이 아버지는 가족들에게 이 사실을 숨기기 위해서 출근을 합니다. 그가 간곳을 지하 주차장입니다. 그는 하루 종일 차속에서 머리를 박고 있다가 저녁이면 집에 돌아옵니다. 아무래도 남편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있는 것 같아서 아내가 따라가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남편이 직장에 가지 않고 차안에서 울고 있었습니다. 그때 아내가 조용히 찾아가 이렇게 위로 합니다. 여보 힘내세요--우리가 있잖아요--당신의 사랑하는 아내가 아직 당신을 사랑하고 있고, 또 지금 자녀들이 이렇게 예쁘게 크고 있잖아요--여보 지금 당신도 이렇게 건강하게 살아 있잖아요-당신은 할 수 있어요힘을 내세요-무엇이든 해보세요-우리가 있잖아요라고 했다고 합니다.

바로 이런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현실을 기억하면 완전히 절망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 더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감사할 것이 남아 있습니다. 또 그 가운데서 내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남은 은혜가 여전히 남아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내게 없는 것, 또 잃어버린 것만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불평합니다. 그러면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잃어버린 가운데 1프로라도 하나님께서 내게 남겨 두신 것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남은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소망이 있습니다.

//개그맨 이동우라고 있습니다. 한때 인기 있는 개그맨이었는데, 지금은 완전한 실명상태에 있습니다. 그는 5년 동안 거의 절망과 우울과 낙담가운데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난 다음에 비로소 그 가운데서 감사할 것을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에는 아름다운 낱말들이 있습니다. 사랑, 행복, 믿음, 소망, 희망, 축복--하지만 이런 말들이 얼마나 소중하고 필요한 것인지 피부로 실감하면서 사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저도 그랬으니까요. 완전하게 잃어버린 사람들, 바닥까지 떨어져 본 그 사람만이 그 소중함을 말합니다. 제가 의도한 것도 아니고 제가 실수한 것도 아니지만 어느 날 병이 찾아왔습니다. 외면하고 싶었지만 감당해야할 저의 몫이었기에 아파할 만큼 아파하고 나니까, 사랑이 뭔지, 희망이 왜 소중한지, 내 주변에 있어나는 일들이 얼마나 감사한 일이지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고 했습니다.

//오프라 윈프리라는 여성이 있습니다. 가장 절망적인 여성에서 미국인이 가장 존경받는 여성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바쁜 사람 중에 한 사람이지만 하루도 빼먹지 않은 일이 있습니다. 날마다 감사의 일기를 쓰는 일입니다. 그녀는 하루 동안 일어난 일들 중 감사한 일 다섯 가지를 찾아 기록한다고 합니다. 감사의 내용은 거창하거나 화려하지 않고 지극히 일상적입니다. 오늘도 거뜬하게 잠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유난히 눈부시고 파란 하늘을 보게 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점심때 맛있는 스파게티를 먹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얄미운 짓을 한 동료에게 화내지 않았던 저의 참을성에 감사합니다. 좋은 책을 읽었는데 그 책을 써준 작가에게 감사합니다”.

저는 요즘 스마트폰의 메모장에 감사의 일기를 쓰고 있습니다. 길을 가다가도 감사의 제목이 떠오르면 감사의 일기는 적습니다.

여러분에게 감사할 제목이 정말 전혀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면 예레미야처럼 아직 내가 살아있다는 것에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살아있다는 것은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뜻입니다. 이런 것을 마음가운데 깊이 묵상함으로 소망을 가지시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또 우리가 절망의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 소망을 가질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2. 아침마다 새로운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는 자신과 유다백성이 살아있다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자신과 유다백성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은 단순히 자신을 살려두신 것에만 그치는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하심은 무한하시고 무궁하십니다(22).

그래서 “23. 이것들이(하나님의 무궁하신 인자와 긍휼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고 합니다. 그래서 스펄전은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은 정체된 저수지가 아니라 매일 흘러나오는 샘물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날마다 하나님께 나갈 때 마다 흘러나오는 샘물과 같은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하심을 풍성히 맛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새로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맛보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제가 쓴 시를 더 읽어보겠습니다.

저 햇살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 햇살 속에 여전히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저 햇살 속에 여전히 하나님의 긍휼이 있습니다. 저 햇살 속에 여전히 하나님의 소망이 있습니다. 저 햇살 속에 여전히 하나님의 일하심이 있습니다. 여전히 이 땅에 어두움이 있지만 하나님의 사랑의 햇살이 이깁니다. 사랑의 햇살이 태양이 되어 비출 것입니다. 그날에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더 힘 있게 노래할 것입니다. 오 주여 오늘도 우리에게 사랑의 햇살을 비추어 주옵소서

/성경에서 하나님의 속성을 가장 잘 드러낸 말은 인자입니다. 인자란 말은 헤세드란 말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말합니다. 그럼에도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포기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사탄의 모든 억압조차도 이기게 하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기필코 우리로 하여금 모든 절망에서 이기게 하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가장 확실하게 드러났습니다. 하나님은 독생자를 십자가에서 죽이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또 하나님의 속성을 가장 잘 드러낸 말이 긍휼입니다. 긍휼이란 자녀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여기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긍휼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긍휼의 아버지이십니다. 11장을 보면 하나님은 나의 긍휼이 불붙듯하도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이 땅에서 당신의 자녀들이 고통을 당할 때 함께 같이 고통을 당하고 계십니다. 이 땅에서 당신의 자녀가 눈물을 흘릴 때 하나님은 저 하늘 위해서 피눈물을 흘리고 계십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신이 우리의 고통에 대해서 함께 고통 하겠습니까?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가 고통을 당할 때 함께 고통하시며 울고 계십니다.

/이런 무궁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하심을 우리는 날마다 아침마다 새롭게 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밤에는 절망이었는데, 아침에 눈을 떠 이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하심을 마음 가운데 묵상할 때 우리에게는 날마다 새로운 소망이 있습니다.

3)또 우리가 절망 속에서도 하나님께 소망을 가질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3.고난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유다백성들에게 고난을 주셨습니까? 그 이유는 그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유다백성들을 사랑하지 않으셨다면 그들의 죄악 됨에도 불구하고 무조건 잘되게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누구보다 유다백성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사랑의 채찍을 내리셨습니다.

그래서 시편 89편을 보시기 바랍니다.

89:32. 내가 회초리로 그들의 죄를 다스리며 채찍으로 그들의 죄악을 벌하리로다

33. 그러나 나의 인자함을 그에게서 다 거두지는 아니하며 나의 성실함도 폐하지 아니하며

34. 내 언약을 깨뜨리지 아니하고 내 입술에서 낸 것은 변하지 아니하리로다

//여기서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회초리로 죄를 다스리며 채찍으로 죄악을 벌하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거두거나 성실하심을 폐하지 않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들과 함께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언약을 깨뜨리지 아니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또 히브리서에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12: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징계가)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9.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 11.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그래서 오늘 본문을 보시기 바랍니다.

27. 사람은 젊었을 때에 (고난의) 멍에를 메는 것이 좋으니 28. 혼자 앉아서 잠잠할 것은 주께서 그것을(고난의 멍에) 그에게 메우셨음이라 30. 자기를 치는 자에게 뺨을 돌려대어 치욕(고난)으로 배불릴지어다 31. 이는 주께서 영원하도록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며 32. 그가 비록 (고난으로) 근심하게 하시나 그의 풍부한 인자하심에 따라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27절에서 왜 젊었을 때 고난을 받는 것이 좋다고 말씀하십니까? 30절에서 왜 자신을 치는 자에게 뺨을 맞으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왜 고난으로 배를 불릴지어다고 하십니까?

그 이유는 우리에게 어떤 수치스러운 고난 있더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절대 버리지 아니하시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은 고난으로 우리를 잠시 근심하게 하시니 그 풍성한 사랑에 따라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고난 속에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집에서 엄마가 어린 자녀를 때렸다고 합니다. 때리는 가운데 자녀만 아픈 것이 아니라 엄마의 마음도 아팠습니다. 그리고 자녀에게 물었습니다. “너 그래도 엄마 사랑하니하니까 그래도 엄마 사랑해라고 했다고 합니다. 우리를 치시는 하나님의 고난속에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난 속에서 절대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고난 속에서라도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는 고난가운데서도 소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4)또 우리가 절망 속에서도 하나님께 소망을 가질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넷째, 우리로 고생하게 하심이 하나님의 본심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 애가 333절을 보겠습니다.

3:33.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고난을 주심은 하나님의 본심이 아닙니다. 그 고난을 통해서 더 낮추시고 회개하게 하시고 난 다음에는 분명 우리에게 더 좋은 것을 주기를 원하십니다. 아직 내게 이런 고난과 어려움을 주시는 것은 내게 아직 버려야할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또 내 안에 내가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 고집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 내 안에 교만의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 내 안에 하나님을 완전히 믿지 못하는 불신앙의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의지하는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모든 죄를 철저히 회개하고, 그 모든 고난의 시간을 인내로 다 통과하면--정금과 같이 나오게 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 성도가 당하는 모든 고난은 반드시 모든 것이 합력에서 선이 되게 하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 가운데서 고난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실 것을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소망의 이유를 묻는 사람들에게 절망가운데서도 우리가 소망을 가지는 이유를 말할 있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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