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생활은 기도하고, 예배하고, 말씀을 보는 것을 내가 원하는 어떤 세상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종교 생활하는 사람에 대해서 디모데전서에서는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참된 신앙생활이 무엇입니까? 내가 왜 그렇게 열심히 기도합니까? 내가 왜 그렇게 열심히 예배를 드립니까? 내가 왜 그렇게 성경을 열심히 읽고 공부합니까?
예수님 닮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내가 누구보다 열심히 기도하고 예배드리고 성경을 보는데, 내 인격과 삶이 더 차가와지고, 더 교만해진다면 그 사람은 단순히 종교생활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을 닮아가는 참된 신앙생활을 하지 않고,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한 종교생활을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 본문 앞 32-33절을 보면 예수님은 자신이 예루살렘으로 가셔서 당시의 최고의 종교인들인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 의해서 십자가에 죽으실 것을 세 번째로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데 이렇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것을 말씀하시는 제자들의 반응은 어떠합니까?
막10:35.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36.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37. 여짜오되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가셔서 십자가에 죽으실 것을 말씀하는데, 예수님의 제자인 야고보와 요한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셔서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시면 우리 형제를 그 나라의 좌의정이 되게 하시고, 우의정이 되게 해 주십시오 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또 이렇게 요청하는 두 제자들을 보면서 다른 열 제자들이 화를 냅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열제자들도 두 제자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모든 제자들이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욕망을 채우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세상적으로 높은 자리를 자지하게 해 달라고 예수님께 요청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제자들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막10:42.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43.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44.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과 비전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막10: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섬기려합니다.
또 더 많은 것을 소유하기 위함이라 아니라 자신의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려 함입니다. 그러니까 무엇이 참된 신앙생활입니까? 높이 되고, 많이 가지려는 내 욕망을 채우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신앙생활은 섬김을 받으려 하지 아니하시고 섬기려 하시고///더 많이 가지려고 하지 아니하시고 목숨까지 나누어 주시는 삶을 살았던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입니다.
그래서 릭 워렌 목사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은 위대함을 그가 가진 권력, 소유물, 명성, 지위의 측면에서 정의합니다. 만약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섬김을 요구할 수 있는 입장이면 인생에서 성공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위대함을 신분이나 지위가 아닌 섬김의 잣대로 측정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위대함을, 다른 사람이 우리를 얼마나 섬기는가가 아니라 우리가 다른 사람을 얼마나 섬겼느냐에 따라 결정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지도자가 되기는 원하면서 정작 종으로 남기는 원치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처럼 되기 위해서는 섬기는 종이 되어야 합니다“고 말했습니다.
특별히 오늘은 각 기관 총회가 있는 날입니다. 우리가 어떤 직책을 맡건 주님을 본받아서 진정으로 섬기는 종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섬기는 종은 어떤 사람입니까?
첫째, 섬기는 종은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무엇을 해 줄 것인가를 생각하기보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이 나를 위한 존재로 생각합니까? 아니면 내가 하나님의 위한 존재로 생각하십니까?
만일 하나님이 나를 위한 존재로만 생각하면 하나님이 내 필요를 채워주지 않으면 하나님을 떠나버립니다. 또 하나님을 나를 위한 존재로만 생각하면 하나님을 내 욕망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만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나를 위한 존재로만 생각하면 그 사람은 교회와 세상, 또 모든 사람조차도 자기 욕망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만 생각합니다.
또 한 가지의 질문을 더 드려보겠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위한 존재로 생각할 때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체험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나를 위한 존재로 생각할 때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체험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오직 나만을 위한 존재로 생각하면 하나님께서 나의 모든 것을 채워주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나를 위한 존재로 생각하면 하나님은 절대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지 않습니다. 반대로 내가 하나님을 위한 존재로 생각할 때 비로소 하나님은 나의 필요를 채워주십니다.
아브라함의 예를 들겠습니다. 창22장 전 아브라함과 그 이후의 아브라함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창22장 전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내게 무엇을 해줄 것인가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가나안땅에서 기근이 드니까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또 거기서 자기 아내를 누이로 속이면서까지 그가 하나님께서 부터 받을 것만을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창22장에서 아브라함은 이제 하나님이 그를 위해서 무엇을 해줄 것인가에 대한 생각보다 그가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해줄 것인가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가장 귀한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자기를 위해서 무엇을 해줄 것인가에 대한 생각해보다 자신이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해줄 것인가를 먼저 생각하고, 그것을 삶으로 옮겼을 때 어떻게 되었습니까? “창22:16.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나를 위하여)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17.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삼하 7장에서 하나님께서 왜 다윗의 집에 축복을 해주셨습니까? “삼하7:5. 가서 내 종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내가 살 집을 건축하겠느냐 ---8. 그러므로 이제 내 종 다윗에게 이와 같이 말하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위하여) 목장 곧 양을 따르는 데에서 데려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고 9. 네가 가는 모든 곳에서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원수를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땅에서 위대한 자들의 이름 같이 네 이름을 위대하게 만들어 주리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께 무언가 얻기 위해서 하나님을 위해서는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심으로 하나님을 위할 때 하나님은 그 진심을 보시고 우리를 위해서 일을 하십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종이라면 이제는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무엇을 해 줄 것인가를 생각하시기 전에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먼저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모든 것을 다 해 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 섬기는 종은 자신보다 다른 사람의 필요를 돌아보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섬기는 종이냐 아니냐를 판가름 할 수 있는 제일 좋은 기준은 “나 중심이냐” 아니면 “다른 사람 중심이냐”라고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3장에 “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몇 시간 뒤에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완전하신 하나님이시자 완전하신 인간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완전하신 하나님으로 몇 시간 뒤에 당하실 십자가의 고통을 미리 다 아셨습니다. 또 완전하신 인간이시기에 그 고통이 어떤가를 너무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우리 같으면 내가 몇 시간 뒤에 죽는 문제가 있는데, 다른 사람들을 돌아 볼 여유가 전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에게 죽음의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에 대한 생각이 더 앞서 있었습니다.
/우리는 항상 나 개인의 문제에만 메 달린다면 영원히 그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내게 문제가 있더라도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돌아보다 보면 내 문제는 어느새 해결된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섬김의 가장 큰 유익입니다. 저도 정말 힘이 들면 오히려 나보다 더 힘든 사람에게 찾아가서 위로합니다. 그러면 내가 더 큰 힘을 얻고 돌아올 때가 있습니다. 천국과 지옥에 관한 예화가 있습니다. 지옥에 가니까 모두 말라 있었다고 합니다. 왜 그런가 보니 지옥에는 사람의 손보다 긴 숟가락이 있는데, 모두 그 숟가락으로 자신만 먼저 먹으려고 하니 밥 한 숟가락도 먹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천국에 가니 상황은 같았습니다. 그런데 천국에서는 긴 숟가락으로 서로 먹여주니 모두 배불러 있다는 예화입니다.
/우리 가운데 어느 누구도 섬김과 위로를 받지 않을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모두 나만 섬겨달라고 한다면 지옥과 같은 세상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처럼 나에게도 문제가 있지만, 서로 남을 더 섬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서로 위로해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가 있는 곳은 천국과 같이 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 섬기는 종은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사람이 아닙니다.
주님이 말씀하실 때 나는 내 집에 이런 일이 있고, 또 저런 일이 있어서 할 수 없다고 하면 그것은 진정으로 섬기는 종이 아닙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생활에 억메이는 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딤후 2:44. 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병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섬기는 종이냐 아니냐 기준은 우리가 과연 우리의 생활 중심이냐 아니면 하나님의 명령 중심이냐에 있습니다. 주님의 명령이라면 우리의 삶 가운데서 어떤 일이 있어도 그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섬기는 종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모든 것이 내 생활중심이 아닙니까?
넷째, 섬기는 종은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하는 사람입니다.
섬기는 종은 핑계를 대거나 뒤로 미루거나 환경이 나아지기를 기다리지 않습니다. 언젠가, 또는 상황이 나아지면 한다는 말은 하지 않습니다. 섬기는 종은 해야 할 일을 즉시 행합니다. 완벽한 상황을 기다리면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불완전한 섬김이 최선의 의도보다 낫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최상의 것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최상의 것이 되지 않을 때 아무 것도 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어느 건물의 작은 부분을 수리해야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합니다. 그것만이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도 해야 합니다. 또 저것도 해야 합니다. 또 말합니다. 아니 그렇게 하면 되지 않습니다. 전체를 가지고 최상의 것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그 최상의 것을 하기에 부족합니다. 그래서 처음 말했던 작은 부분에 손도 대지 못합니다. 물론 우리는 언제나 최상의 것을 생각해야합니다. 그런데 최상의 것이 되지 않기 때문에 아무 것도 하지 않을 바에는 부족하지만 작은 것부터 하나씩 최선을 다해 시작해해야합니다.
--또 많은 사람들이 섬기지 않는 가장 이유는 자신에 섬기기에 부족하다고 느껴지고, 또 두렵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수퍼스타만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는 거짓말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교회는 최상을 그들의 우상으로 만들어 놓고 교회를 섬기기 때문에 보통 달란트를 가지고 봉사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잘하지 않으려면 하지도 말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한 번도 하신 말이 아닙니다. 부족해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부족하니까 오히려 더 섬겨야합니다. 그리고 그 부족가운데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이것이 섬김의 제일 중요한 원리입니다. 섬김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가지고 하지 않고, 나의 연약을 하나님의 능력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발 여러분 “내가 부족하니까 나는 못합니다. 또 아직 완전한 여건이 되지 않기에 하지 못합니다”는 말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겸손이 아니라 불순종입니다.
/소수의 엘리트에 의해서 운영되는 완벽하게 보이는 교회보다는 수많은 보통 사람들이 참여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다섯째, 섬기는 종은 어린 아이와 같은 작은 자를 섬기는 사람입니다.
오늘 말씀에 앞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너희 중에서 첫째가 되고자 하면 섬기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시고, 어린 아이 하나를 제자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막9:37.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왜 예수님은 서로 섬기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시고, 어린 아이를 영접하고 그 어린 아이를 예수님을 영접하고 섬기듯이 섬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당시에 어린 아이들은 작은 자의 상징입니다. 특별히 유대인의 입장에서는 어린아이와 같은 작은 자를 섬긴다는 것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크고 위대한 일을 통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작은 자를 섬기는 것이 참된 섬김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심지어 이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자이고, 이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하나님을 영접하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건강하지 못하고 화석화된 증거는 어린 아이들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들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을 어떻게 영접하고 섬길 것인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이런 교회에는 예수님도 없습니다. 하나님도 없는 교회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어린아이들을 영접하는 것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너무도 자주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찾고자합니다. 그래서 작고 하찮은 일에 대해서는 무관심합니다. 그런데 나는 작고 하찮은 일을 하기에는 자신이 너무 중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 어떤 하나님을 일도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정말 위대하고 크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크고 위대하신 예수님은 이 세상에 계실 때 다른 사람들이 하기를 싫어하는 하찮고 작은 일을 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기, 어린아이들을 품으시고 돌보시기, 또 부활하신 후 아침식사 만드시기, 당시 모든 사람들이 꺼려하든 문둥병자 고치시기와 같은 일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섬기는 종이 되기를 원한다면 위를 바라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위를 바라보면 높이 되기 위한 좁고 끊임없는 욕망의 경쟁만 있습니다. 섬기는 종이 되기 위해서는 아래를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아무도 하기를 싫어하는 일들이 경쟁 없이 널려 있습니다. 쓰레기 줍기, 주일학교 봉사하기, 성가대 봉사하기, 복음 전도 하기에는 아무도 욕망으로 경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십니다. 이 하찮고 작은 일을 섬기는 것이 예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섬기는 종으로 어린아이와 같이 작은 자, 눈에 뛰지 않는 자를 섬길 수 있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여섯째, 섬기는 종은 절대 내 주위에 일 할 사람이 없다고 하지 않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 앞에서 “나만 남았으니”라고 말합니다. 그때 하나님은 “왕상19:15.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도망가던) 네 길을 돌이켜 광야를 통하여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의 왕이 되게 하고 16--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고 또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어서 말씀하시기를 “18.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항상 일할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항상 이제 나만 남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래도 너는 한 사람 한 사람 찾아가서 네게 주어진 사명에 집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모두가 다 떠났다 하더라도 내가 아직 남겨둔 자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섬기는 종은 나만 남았다고 하지 않습니다. 섬기는 종은 나만 남았더라도 내게 맡겨준 한 사람에게 집중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내게 남은 자를 붙여주십니다. 나만 남았더라도 끝까지 섬기는 종으로 충성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일곱째, 섬기는 종은 끝까지 사역을 감당합니다. 중간에 중단하거나 포기하는 일이 없습니다.
종은 일을 주님이 맡기신 일을 중단할 권리가 없습니다. 주님의 종은 일을 하다가 낙심하여 주저앉을 권리가 없습니다. 주님의 종은 일을 하다가 포기할 권리가 없습니다.
단지 주님의 종은 끝까지 충성할 뿐입니다. 직분이나 직업에는 은퇴가 있지만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는 은퇴가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일에 은퇴하는 날은 천국 가는 날입니다.
/우리의 직분은 은퇴를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일은 중단 없이 포기 없이 끝까지 잘 감당할 수 있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여덟째, 섬기는 종은 자신의 일에만 집중합니다.
섬기는 종은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거나 비판하거나, 원망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사역을 하기에도 너무 정신없기 때문입니다. 섬기는 일로 바쁘다 보면 다른 사람을 비판할 시간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비판할 시간이 있으면 그 시간에 더 섬겨야합니다.
아홉째, 섬기는 종은 다른 사람들의 평가와 비난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향유 옥합을 깨뜨렸을 때 그것이 “낭비”라고 제일 먼저 비난한 사람들이 제자들이었습니다. 만일 그 여인이 그 비난 때문에 옥합을 깨뜨리지 않았다면 주님의 장례는 준비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주님의 일 때문에 비난받는 것에 대해서 “좋은 일”이라고 칭찬해주셨습니다. 주님을 섬길 때 항상 비판받을 것을 예상해야합니다. 또 비판에 대해서 방어하는 것도 우리의 일이 아니라 주님의 일입니다. 우리는 주의 일에 구경꾼이 되지 말고 일꾼이 되어야합니다.
또 섬기는 종은 자신을 분별하되 너무 자신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내가 나를 판단해서 잘하면 교만해지기 쉽고, 못하면 낙심에 빠지기 쉽습니다. 우리를 판단하실 이는 오직 주님이시고, 그 날은 주님이 오시는 종말의 날입니다. 우리가 아무 것도 아니며 실패했다 판단해도 주님이 오셔서 잘 했다 판단하실 수 있습니다. 또 우리가 잘했다 판단해도 주님이 오셔서 아무 것도 아니라고 판단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섬기는 종은 아무 것도 판단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에 최선을 다해서 충성만 합니다.
또 섬기는 종은 자신을 선전하거나 다른 사람들로부터 주의를 끌려고 하지 않습니다. 누군가 사역을 인정해줄 때 겸손하게 받아들이지만, 그것 때문에 나를 높이려 할 때 부끄러워 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또 섬기는 종은 눈가림으로 사람에게 보이려고 일하지 않습니다. 사람 앞에 하는 사소한 일도 하나님 앞에 하는 존귀한 일로 여깁니다.
섬기는 종은 절대 화려한 조명 아래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들은 가능하면 그 자리를 피하려 하고 음지에서 조용히 섬기는 일에 만족합니다.
/이 땅에서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섬긴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가장 큰 천국의 상급을 주실 것입니다. 그 상급이란 천국에서 가장 주님을 닮은 자로서 주님가까이 서 있을 영광을 말합니다.
또 섬기는 종은 죽이는 자이 아니라 죽은 자도 살리는 종입니다.
또 섬기는 종은 사역을 의무와 부담감으로 생각하지 않고 기쁨으로 생각합니다.
왜 다른 사람을 섬기는 삶이 부담이 아니라 기쁨입니까? 그것은 그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이 주님을 섬기는 것이고,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것이고, 그 섬김이야 말로 우리의 삶을 가장 의미 있게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이고, 또 하나님이 상 주신다는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히6:10. 하나님은 불의하지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고 있는 것을 (결코)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
--어떤 목사님의 간증을 들었습니다. 그분은 평생 시골교회를 목회하면서 많은 어려움을 당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목사님에게 한 가지 깨닫게 하신 말씀이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그를 지켜 주시고 축복하신 것은 그 아버지 다윗이 하나님을 섬긴 것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내가 아무리 섬겨도 하나님이 내게 아무 것도 주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언젠가를 자녀를 통해서라도 갚아 주실 것을 믿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의 일들은 역사가 지나면 끝이 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은밀히 섬긴 일 들은 반드시 갚아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은 생물학적인 것만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 있어서 내가 지금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죽는 날은 그 사명이 다하는 날입니다. 주님은 마지막 날 “너는 나를 위해서 무엇을 했느냐”고 말씀하십니다. “너는 아직 부족하기 때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고 하는데 내가 얼마나 너와 함께 해 주어야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너는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 때가 언제이냐”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부족해도. 힘이 빠져도, 주위에 아무도 없어도, 또 네게 당장 아무 것이 돌아오는 것이 없다 해도 예수님을 본받아 끝까지 최선을 다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판단하지 말고 충성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내가 반드시 갚아주리라” 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마지막 날 주님 앞에 설 때 썩어서 없어지는 자가 아니라 달아서 없어지는 자로 서야합니다. 그래야 부활의 날에 우리가 부끄러움 없이 주님 앞에 설수 있을 것입니다. 아낌없이 남김없이 후회 없이 부끄러울 것이 없이 부족함이 없이 주님과 교회를 섬기는 종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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