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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 신학/설교모음

새 시대의 새 믿음(마9:14-17)

by 금빛돌 2015. 9. 26.

1945년 세계 제 2차대전이 끝난 후에도 전쟁이 끝났다는 소식을 듣지 못하여 29년동안 필리핀 루방섬 정글에 은신해 짐승처럼 살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일본군 중위 오노다 히루씨였습니다. 그는 일본군 정보장교로 22세 때 필리핀에 파견되어 29년이 지난 1974년 그의 나이 52세 때 발견되었습니다.

그는 전쟁이 끝났고 일본이 경제적 대국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은 줄 알고 29년씩이나 필리핀의 섬에서 도망자로 살았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새로운 시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옛 시대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세례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그랬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렇게 질문을 합니다.

예수님 지금 우리들과 바리새인들은 금식을 하며 슬퍼하며 애통하고 있는데, 당신과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도 않고, 애통하지도 않고, 왜 그렇게 먹고 마시며, 즐겁고 기쁘게 살아가고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지금 이 시대는 신랑이 와서 기쁘게 잔치할 때이다. 그러니 어떻게 금식하며 슬퍼하며 살아갈 수 있느냐---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때가 있는데, 그때 금식하며 슬퍼해야할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신랑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또 잔치란 하나님나라를 가리킵니다.

즉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이 땅에 잔치 집과 같은 하나님나라가 이미 왔습니다. 그러니까 지금은 애통하며 슬퍼할 수 없고 오히려 기뻐하고 즐거워할 때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단순히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처음 하신 말씀은 회개하라 천국이 이미 왔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천국이 이미 온 증거로 문둥병자를 고쳐주시고, 백부장 종의 병을 고쳐주시고, 베드로 장모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 문둥병자이고, 또 베드로라고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만일 한 평생을 문둥병에 시달려 사람 취급받지 못하던 내가 예수님이 오심으로 깨끗하게 나음을 받았다면 여러분은 슬퍼해야겠습니까? 아니면 기뻐해야겠습니다.

또 내 가족 중에 죽을병이 걸렸는데 예수님이 오심으로 낫게 해주셨다면 여러분은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복음서 초반에 보면 거의 대부분 갖가지의 질병과 고통으로 시달리던 사람이 예수님을 만남으로 치유되어지고, 그래서 참 기쁨을 회복하는 그런 이야기들입니다.

이런 현상을 예수님은 지금은 신랑이 와서 잔치할 때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복음이란 무슨 말입니까? 복음이란 복되고 기쁜 소식입니다.

복음이란 예수님이 오심으로 이 땅에 장차올 하나님나라가 이미 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어서 가는 하나님나라를 현재 이 땅 가운데 미리 맛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는 슬픔이 없습니다. 그 나라에서는 오직 주님과 동행함으로 말할 수 없는 희락의 기쁨이 있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 나라의 기쁨을 미리 우리가 맛볼 수 게 되었습니다.

/또 저 영원한 하나님나라는 모든 질병이 치유되어지고, 우리를 괴롭히는 사탄의 권세가 물러가는 나라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하나님나라에서 이런 것을 완전히 누리게 되지만, 이 땅 가운데서도 미리 맛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현재 임하여진 하나님나라를 가장 압축적으로 표현한 말이 바로 잔치집입니다. 잔치 집에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배가 부릅니다. 그래서 잔치 집은 항상 기쁘고 즐겁습니다. 이것이 바로 현재 임하여진 하나님나라입니다.

/이런 하나님나라가 예수님이 오심으로 이 땅에 벌써 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말은 비록 우리가 이 세상나라에 살지만 현재 임하여진 하나님나라에 들어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우리는 그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되었고, 현재 임하여진 하나님나라를 미리 맛보고 체험할 수 있는 자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교회란 무슨 말입니까?

제가 박영돈 교수님께 교회란 무슨 말입니까? 교회를 정확하게 정의하여 주십시오라고 질문을 했습니다. 그때 교수님이 하신 말씀은 교회란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이 땅 가운데 임하여진 하나님나라를 체험하여, 이 땅 가운데 그 나라를 나타내주고 보여주는 곳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교회에 온다는 것은 매주 잔치 집에 오는 것과 같아야합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기 전에 항상 표정관리를 잘 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울하고 슬프고 힘든 모든 짐 보따리를 주님께 맡겨버리고, 주님과 함께 기뻐하며, 축제와 감격의 예배를 드리고, 또 여러 성도와 함께 기쁨의 교제를 나누어야합니다.

/이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새 시대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 시대는 예수님이 오심으로 그 주님과 함께 하나님나라의 기쁨의 잔치를 벌이는 때이기 때문에 애통하며 슬퍼할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보십시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고, 또 교회 생활하는 것이 이렇게 항상 잔치 집과 같이 기쁘고 즐겁습니까? 물론 그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당하고 있는 현실을 보면 그렇게 마냥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찬송만 하면서 살아갈 수 없는 현실을 보게 됩니다.

--이 시대를 보십시오. 우리의 가정을 봅시다. 가정마다 오랜 질병으로 시달리는 분들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또 남들에게 말할 수 없고, 또 인간적으로 해결을 할 수 없는 많은 문제들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지금 여러분들의 삶을 보십시오. imf때보다 경제적으로 더 어렵고 힘이 든다는 말을 모두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런 가운데서 우리가 무조건 즐겁고 기쁘고 희망이 있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막연한 자신의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나의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가? 또 경제적인 위기에 대한 걱정도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개인 각자의 삶을 보았을 때--마냥 기뻐하고만 살수 없는 현실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합니다. 혼자서 찬송을 부르고 말씀을 보고 기도하면, 너무 좋고 기쁘다. 그런데 그렇게 좋다가도 금방-- 현실로 돌아오면 내가 해결할 수 없는 고통의 문제로 시달린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말씀에 보면 이런 현실을 18절부터 나오는 말씀에서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18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을 하실 때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지금은 너희가 슬퍼할 때가 아니라 나와 함께 기뻐할 때라는 말씀을 하실 때를 말합니다.

이렇게 복음의 새 시대가 왔으니 너희가 이제 슬퍼할 때가 아니라 기뻐할 때라고 말씀 하실 그때에 예수님에게 무슨 소식이 들렸습니까? 한 관리, 즉 회당장이 와서 내 딸이 금방 죽었다는 소식을 전합니다. 사랑하는 딸이 죽었다

이것은 그 딸의 아버지에게는 정말 엄청난 슬픔과 고통의 현실입니다.

이런데도 과연 복음의 새 시대가 되었다고 마냥 기뻐할 수 있습니까?

--또 죽은 딸을 살리시려 예수님이 가시는 길에 누구를 만났습니까?

12해를 혈루증 앓던 여인을 만나셨습니다. 한두 해도 아니고 12년씩이나 피가 멈추지 않는 혈루증을 앓던 여인입니다. 이 여인은 그 병 때문에 모든 재산을 다 잃어버리고, 이제 완전히 절망 중에 살던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과연 하나님나라가 왔고, 복음의 새 시대가 왔다고 기뻐하고만 살 수 있습니까? 슬퍼해야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기독교는 아편이다, 현실에 답답하고 괴로운 상황을 순간적으로 잊어버리게 하는 아편과 같다" 말했습니다.

여러분 과연 이 말이 맞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만일 믿음이 없이 그냥 인간적인 눈으로 절망적인 두 사람의 상황만을 바라본다면 기독교는 현실의 슬픔을 무조건 잊으라고 하는 아편과 같다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 두 사람이 처한 상황이 현실적으로 보았을 때-도무지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주님과 함께 천국잔치의 맛을 느낄 수 없고는 상황이지만--이 두 사람은 신앙으로 그 모든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만남으로 그 절망의 한계상황에서 벗어나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이 두 사람이 절망의 상황을 극복하고 천국의 기쁨을 맛볼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입니까? 두 사람의 공통된 특징은 믿음입니다.

회당장은 그의 딸이 죽었지만 주님이 함께 하시면 얼마든지 살아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만일 그 회당장이 믿음을 가지지 않고 그냥 절망하면서 자포자기 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나라의 기쁨을 맛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믿음으로 주님께 나왔고, 믿음으로 절망의 상황을 기쁨으로 바꾸었습니다.

또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녀는 얼마든지 낙심하고 포기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은 낙심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예수님의 옷 가라도 만지면 낫는다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바로 이들의 믿음이 하나님나라의 기쁨을 맛볼 수 있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 나오면 죽은 자가 낫는다는 믿음, 옷 가라도 만지면 낫는다는 이들의 믿음은 과거에 한 번도 경험해 본 일이 없는 창조적인 믿음이었습니다.

또 이들의 믿음은 아주 적극적인 믿음이었습니다. 소극적으로 주님을 기다리지 않고 적극적으로 주님께 찾아가 낫게 해달라고 간청한 믿음이었습니다.

바로 주님은 이 믿음을 보시고--이들에게 하나님나라의 기쁨을 맛보게 해주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우리에게도 이런 새 시대에 맞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지금은 복음의 새 시대입니다. 하나님나라의 잔치가 벌써 베풀어졌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그것을 누리고 체험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이 새 시대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옛 시대의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세례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그렇습니다. 이들은 하나님나라가 그들 곁에 왔지만 누리지 못하고 옛 시대의 사고방식 속에 살아가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아직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아직까지 인간의 율법으로 구원받아보려고 애쓰며 고통 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구원받기 위하여 금식을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운데도 복음의 새 시대가 되었는데, 아직 복음 이전 시대의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바리새인처럼 예수님을 부인하지는 않습니다. 또 구원받으려고 인간적으로 노력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복음의 새 시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천국 복음의 참된 능력과 기쁨을 체험해 보지 못하고, 맛보지 못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이 도무지 신나지 않고 기쁘지 않습니다. 억지로 교회에 나오고 힘들게 신앙생활을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결국 믿음의 문제입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의 믿음이 적은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나라의 기쁨을 맛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복음의 시대에 합당한 창조적 믿음, 적극적인 믿음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바로 새 부대의 의미입니다.

여러분은 새 술은 새 부대에라는 말씀이 어떤 말씀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새 술은 새 부대에라는 말씀을 새 시대가 되었으니 새 시대에 합당한 새 사람으로 바뀌고, 또 제도도 새롭게 바꾸어야한다고 말씀으로 이해를 합니다. 그래서 요즈음은 인적청산과 제도개혁이라는 두 말이 이 시대의 화두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새 시대에 맞는 새 부대라고 합니다. 이 말도 맞는 말입니다. 새 시대가 되었으니 사람도 바꾸고 제도도 바꾸어야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새 부대에 라는 말이 단순히 새로운 사람, 또 새로운 제도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도 복음의 새 시대가 되었기에 새 시대에 맞는 사람으로 바뀌어 지고, 또 새로운 제도로 바뀌어져야합니다. 그러나 단순히 사람을 바꾸고 제도와 형식을 바꾼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복음의 새 시대에 합당한 우리의 믿음의 그릇이 바뀌어야합니다.

우리가 가진 옛 시대의 믿음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이런 옛 시대의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누가 뭐래도 절대 안 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안돼, -절대 안돼, 그 사람은 안 돼 절대 변화될 수 없어, 내 아이는 안 돼 내가 몇 십년이나 지켜봤는데 절대 변화되지 않을거야난 그것을 한 번도 경험하거나 체험해보지 않았어 그러니까 절대 그런 기적은 없을거야/ 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우리는 운명론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이렇게 슬프게 비참하게 살도록 운명지어졌어 그래서 난 불행한 사람이야--그러니 나는 내 운명에 순응하여 그냥 그렇게 살 수밖에 없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새로운 시대에 합당한 새로운 믿음은 어떤 것입니까?

우리는 백부장처럼 내가 과거에 한 번도 경험해 본 일이 없지만, 주님이 말씀하시면 그것이 얼마든지 말씀대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또 우리는 문둥병자처럼 비록 나는 아무것도 아니고 할 수 없지만--주님이 원하시면 얼마든지 내가 깨끗하게 될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회당장처럼 인간이 보기에 도무지 불가능한 일들이지만 주님 앞에 나오면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12해를 혈루증을 앓던 여인처럼 12년동안 그렇게 피곤하고 낙심하고 지쳐있지만, 절대 낙심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주님께 나올 수 있는 믿음입니다.

또 소경 바디메오처럼 주위의 방해와 위협에도 불구하고 결코 기죽지 않고 힘들면 힘들수록 더욱 더욱 간절히 주님께 의지하고 기도할 수 있는 믿음입니다.

중풍병자의 친구들처럼 친구가 중풍 병에 걸려 걸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붕을 뜯어서라도 그 친구를 주님께 인도할 수 있는 이런 적극적인 믿음입니다.

이와 같이 비록 인간의 힘으로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는 능치 못하실 일이 없다는 믿음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내가 전에 한번도 겅험해 보지 않았던 것들도 주님이 함께하시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또 아무리 사탄과 음부의 권세가 아무리 세더라도 주님이 함께 하시면 얼마든지 이길 수 있다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새 시대에 필요한 믿음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정말 우리에게 이런 믿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조그만 일에도 낙심하고 실망하고 좌절합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에 보면 사도들의 기도가 나옵니다.

--오 주여 우리에게 믿음이 부족하오니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옵소서--

--우리가 정말 슬퍼하고 애통해할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결코 어떤 절망적인 상황이 아닙니다. 힘든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주님조자도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또 그 주님께 대한 구원의 감격이 없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또 영적으로 무감각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만일 지금 내 신앙의 상황이 이렇다면 우리가 이것을 두고 슬퍼하고---또 애통하며 금식하며 기도해야합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예수님은 우리에게 금식이 필요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도무지 주님이 느껴지지 않을 때 그때 우리는 금식하며 애통하여 기도해야합니다.

그래서 무엇보다 우리의 신앙을 회복해야합니다.

그래서 참된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내 상황 가운데 하나님이 전혀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 않는 절망의 상황 속에서도 주님이 나와 함께 있음을 믿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도바울도 고린도후서 마지막에 너희가 믿음이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너희가 믿음이 있다면 그리스도께서 네 안에 계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새 술이 새 부대에 담기지 않으면 새 술은 흘러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있는 복음이란 어떤 것입니까? 복음은 단순한 이론이 아닙니다. 마치 새 술이 발효되는 가운데서 부풀어 오르듯이 복음은 가만히 있지 않는 생명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의 새 시대에 맞는 새로운 믿음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회당장과 같이 죽은 자도 살수 있다는 창조적인 믿음과 12해 혈루증 여인과 같이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 적극적인 믿음으로 절망을 이기고 승리하며 살아가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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