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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 신학/스펄전설교

지각에 뛰어난 평강(빌4:7)스펄전

by 금빛돌 2015. 7. 25.

오늘 밤 우리는 평강의 복음을 듣기 위해 모였습니다. 또한 이 자리에 참석하신 많은 분들은 이후에도 이 평강을 기념하는 이 거룩한 축제의 자리에 나아올 것이며,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큰 평화를 이루는 이 예배당에 계속 찾아올 것입니다. 그러나 이 자리에 참여한 모든 성도들께서 평강 가운데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아마 어떤 분들은 오늘 오후 평안하지 못한 가운데 가족을 떠나 이곳에 오셨을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불화는 사랑하는 마음들 사이에서조차도 생깁니다. 안식일이 때때로 평안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의 악한 기질은 잘 다스려지지 않아 평강을 깨뜨리며, 이 달콤한 안식의 날에도 제멋대로 행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사소한 문제들이 우리의 마음의 평강을 망쳐 버립니다. , 얼마나 사소한 문제로 우리의 마음의 평강이 무너져 버리는지요. 교회의 좌석에 앉기 위해 걸어가는 동안 일어나는 사소한 일이나, 예배가 시작되기를 기다리며 일어나는 시시한 일들이 마치 눈 속의 먼지처럼 큰 고통을 유발하기도 합니다. 온전한 평화와 평강은 매우 예민하고 민감한 것인 까닭에 베니스의 유리보다 더 조심스럽게 다뤄질 필요가 있습니다. 아마 이곳에 계신 성도님들 중 어떤 분들은 하나님과 동행하지 못하시는 것 같습니다. 만약 그러하다면 여러분의 평강은 온전치 못할 것입니다. 지난 한 주 동안 어떤 분은 다시 죄악의 자리에 빠졌을지도 모릅니다. 만약 그렇다면 여러분의 평강은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여러분의 심령에는 괴로움이 쌓였습니다. 비록 여러분이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를 믿기는 하지만 여러분의 내적인 안식은 무너졌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 본문을 기도로 바꾸어 제 자신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믿는 분들을 위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기를 기도합니다. 모든 성도 여러분들이 체험적으로 이 본문을 알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이 말씀을 기록한 저자는 그것을 체험했습니다. 이 말씀을 읽는 우리 역시 그것을 체험해야 할 것입니다. 바울은 감옥의 어둠 속에서도 평강의 햇살을 자주 누렸습니다. 그는 갑작스럽고 잔인한 죽음이 그를 기다리고 있음을 내다보면서도 살아 있는 평강을 체험했습니다. 바울은 평강을 사랑했고, 평강을 설교했으며, 평강 가운데 살았고, 평강 가운데 죽었습니다. 또한 그는 평강의 기쁨 속으로 입성했으며 하나님의 보좌 앞 평강 가운데 거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묵상하며, 어떻게 본문을 접근하는 것이 성도님들의 유익을 위해 가장 좋은 것인가를 고려해 볼 때, 말할 수 없는 특권,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을 먼저 살피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로, 그것과 연관하여 그러한 특권에 이르는 방법에 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왜냐하면 본문 앞에 있는 문장이 그리하면이라는 단어로 오늘의 본문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단어는 단순한 접속사가 아니라 목적을 가지고 거기에 사용되었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4~6절에서 그가 말한 그 명령을 행하면, 그 다음에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 것이라는 의미로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셋째로,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평강의 능력이 하는 역할에 관해 살펴보겠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특권이 작용하는 영역,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는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여기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는 약속이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through)”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in)”가 사용되었음을 주목할 것입니다. 평강의 왕이신 성령께서 우리를 본문 말씀의 핵심과 정수로 인도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

첫째로, 말로 다할 수 없는 그 특권,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것은 설명하기 어려운 특권들 중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지각에 뛰어난 것이며, 설명을 뛰어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설명보다는 체험을 통해서 쉽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심령의 안식과 하나님의 평강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고, 그 평강을 누리는 구체적인 방법들을 위해서 가장 적절한 표현들을 선택합니다만, 사실 우리는 그 지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간접적으로 전달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것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것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에 관해서는 선교지의 한 소년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 설명하겠습니다. 어느 날 학교에서 선생님이 그 소년에게 설탕 한 조각을 주었습니다. 그 소년은 이전에 그렇게 달콤한 것을 먹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 소년은 집에 돌아가 아버지께 너무나도 달콤한 어떤 것을 먹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의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이 과일만큼 달콤했니?” 그러자 소년은 말했습니다. “그것보다 훨씬 더 달았어요. 하지만 아버지, 저는 설명할 수가 없어요.” 그 소년은 학교로 되돌아가 설탕 한 조각을 얻어 다시 집으로 와 말했습니다. “아버지, 이것 좀 맛을 보세요. 그러면 그것이 얼마나 단지 알 수 있을 거예요.” 조심스럽습니다만 저도 이 예화처럼 하나님의 평강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맛보셔야 합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참으로 그것은 사람과 심지어 천사들의 말로도 설명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평강이란 무엇입니까? 물론 그것은 먼저 하나님과의 화평, 양심의 평화, 속죄의 희생으로 말미암은 지존자와의 실제적인 평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화목, 용서받음, 은혜로의 회복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또 그렇게 된 영혼은 그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의를 믿음으로 인해 얻게 된 칭의를 떠나서 하나님의 평강은 있을 수 없습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인식하는 사람은 자신이 용서받았음을 인식하기 전에는 결코 하나님의 평강을 알 수 없습니다. 용서받음에 관한 의식이 그의 죄에 관한 의식만큼 강하고 생생해질 때, 그는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의 기쁨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믿은 여러분과 하나님 사이에 이제 완전한 평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5:1). 여러분의 죄는 불화의 근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것은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것은 깊은 바닷속에 던져졌습니다. 우리의 거룩한 희생양은 우리의 죄악을 광야로 나르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의 죄악을 그치게 하셨고, 우리의 죄를 끝내셨고, 우리에게 영원한 의를 선사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지셨고 우리 대신 고난을 받으셨고, 훼손된 율법을 온전히 보상하셨고, 하나님의 공의를 충족시키셨습니다. 이제 우리를 향해 하나님의 진노를 촉발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는 사라졌으며 우리의 불의는 깨끗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고 그의 사랑하는 자로 인정되었습니다.

이 실제적인 화목은 우리의 심령에 깊은 평화를 가져옵니다. 여러분 모두가 지금 이 평강을 소유하면 좋겠습니다. 또 그것을 알고 있는 분들은 더 깊이 그것을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만약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여러분 대신에 고난당하시고 여러분을 위해 저주가 되셨다면, 공의는 결코 여러분에게 여러분의 보증인이 지불하신 그 형벌을 요구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형벌을 요구한다는 것은 그의 희생을 아무 효과가 없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으로 그것을 욕되게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여러분의 대속자가 되었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율법을 지키시려 요구하신 것을 담당하셨다면, 여러분은 분명히 모든 형벌에서 벗어나 영원한 구원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어찌하여 대속자를 보내셨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무 효과가 없는 대속을 통해 그저 사람들로 애타게 하기를 원하셨을까요? 그분의 대속의 죽음으로 죄인들을 구원할 수 없다면 예수께서는 결국 무엇을 성취하셨다는 말입니까? 유효한 속죄가 아니라면 그 복음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진실로 주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죄가 되셨고, 그분이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분이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여기에서 영혼은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 십자가의 발밑에서 다른 어떤 곳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평화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곳에서 여러분, 온전한 평강을 누리십시오. 왜냐하면 그분의 희생으로 화평의 언약이 이제 여러분과 여러분의 하나님 사이에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속죄의 피로 날인되었습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은 또 다른 교훈을 제공해 줍니다. 곧 하나님의 평강의 결과로 우리의 심령에 평강이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용서받았다는 사실과 우리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때에 우리의 심령은 갑작스럽고 즐거운 변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본질상 우리의 내적인 본성 속에 있는 모든 것은 스스로 불화하는 상태에 있습니다. 우리의 본성은 마치 악한 짐승들이 서로 물고 뜯는 일종의 감옥입니다. 인간은 정상적인 상태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하나님, 우주, 그리고 그 자신에 대해서 정상적인 상태로부터 벗어나 있습니다. 인간이라는 기계는 심각하게 고장 난 상태입니다. 톱니바퀴와 큰 바퀴가 조화롭게 작동되지 않습니다. 접촉도 안 되고 돌아가지도 않습니다. 감정은 이성의 지배를 받는 대신 종종 지배하려 합니다. 또한 이성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진리에 의해 가르침을 받는 대신 타락한 상상력에 지배되어 독립적인 권력이 되고자 하며, 하나님을 판단하려 합니다. 우리 본성의 재능 중에서 하나님을 거스르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결과적으로 우리의 본성의 나머지 부분도 혼란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치열한 내적인 전쟁이 우리의 정신적인 부분과 동물적 본능, 그리고 도덕적 재능 사이에서 일어나고 그 결과 고통과 두려움과 불행이 야기하게 됩니다. 이것에 대한 치료책은 회복시키시는 은혜 외에는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먼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기 전에는 바른 심령을 가질 수 없고, 바른 양심을 가질 수 없으며, 바른 사고를 가질 수 없습니다. 또한 우리는 다양한 재능을 올바르고 조화롭게 사용할 수 없습니다. 왕 되신 그리스도께서 그 왕좌를 차지하셔야 합니다. 그 후에야 우리의 영혼의 상태도 안정이 될 것입니다. 최고의 권위를 지니신 분께서 마땅한 자리를 차지하기 전에는 거역과 소동이 계속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속에 평강을 불어넣으시고,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그 영혼 속에 내주하시기 위해 비둘기처럼 강림하실 때 그곳에 평화가 있게 됩니다. 모든 것이 혼돈되었던 그곳에서 그 사람은 새롭게 거듭나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비록 여전히 거역적인 욕망들이 지배권을 얻으려고 애쓰지만, 이제 지배하는 능력이 있어 그 사람을 지켜 줍니다. 그리고 그 사람 속에는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머물게 됩니다.

또한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을 올바르게 다스리시며, 그 모든 것을 우리의 유익을 위해 하신다는 확신 때문에 모든 외적인 환경과 관련해서도 평강에 이르게 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과 화목한 사람은 외적으로 두려워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가 가난합니까? 그는 그리스도께서 가난한 자를 부요케 하신다는 사실을 기뻐합니다. 그가 번창하고 있습니까? 그는 자신의 번영으로 타락하지 않도록 그를 거룩하게 하시는 은혜가 있음으로 인해 기뻐합니다. 그는 속히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집니까? 부활의 소망은 죽어 가는 자에게 평강을 줍니다. 그는 자기의 구속자가 살아 계신 것을 알며, 그의 육신이 잠시 동안 무덤에 잠자게 될 것에 대해서 만족스러워합니다. 그는 성경을 통해 모든 심령이 밝히 드러날 심판의 날을 생각하고 있습니까? 그는 그 두려운 신비와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일에 대해서 평안을 누립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가 믿었던 분을 알 뿐 아니라 그분이 그 심판의 날에 그를 보호하실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 신자를 놀라게 하거나 근심하게 할 만한 것이 그 무엇이라 해도 그의 영혼 깊은 곳에서는 요동함이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폭풍우를 개의치 않으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그 손으로 키를 잡으시고, 뱃머리에 서 계신 것을 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모든 것이 황량해 보이는 이 시대에 특히 유익합니다. 폭풍을 알리는 깃발이 올라가고 구름이 몰려오고 번갯불이 번쩍이고 천둥소리는 멀리서부터 우리 가까이 들려옵니다. 여러분이 신문을 본다면 전쟁과 전쟁의 소문이 끊이지 않음을 알 것입니다. 여러분의 시선은 기근과 가뭄을 알리는 기사에 머뭅니다. 여기저기 재난과 경기의 침체와 가난과 기근이 있음을 봅니다. 머지않아 어두운 시대가 올 것이요, 그때에 우리의 얼굴은 창백해지고 손은 무거워 질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신자는 그런 경우에도 조금도 당황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하나님께서 하늘에 계시며, 그분의 왕좌를 버리시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목적들은 성취될 것이며, 악으로부터 선을 이끌어 낼 것분입니다. 바로 그때에 하나님께서 왕들의 보좌에 좌정하시고 자신의 섭리와 경륜을 따라 만물을 다스리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버지가 바다로 나가 보호자 없이 집에 남겨진 자녀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14:18)는 말씀을 읽으며, 그 은혜로운 말씀을 믿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아주 가까운 곳에 계시며, 우리는 매우 안전합니다. 비록 우리가 미래를 알 수 없고 우리의 운명의 책의 닫힌 장들을 엿보기를 원치는 않지만 우리는 절대적으로 확신합니다. 과거에 그렇게 명확한 하나님의 신실함을 믿으며 모순되는 것이 아직 열리지 아니한 미래의 페이지 위에 하나도 기록되어 있지 않았음을 믿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의 유익을 위해 모든 것이 움직이고 있음을 우리는 확신합니다. 그러므로 외부적인 모든 환경과 관련해서 우리의 영혼은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에 닻을 내리며 그 평강을 즐거워합니다.

이 평강에 대한 묘사는 얼마나 놀랍습니까! “모든 지각에 뛰어난.” 일반적인 이해로는 알 수 없는 모든 지각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말은 불경건한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다는 뜻이라고 말합니다. 그 진술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표현의 참된 의미의 일부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그 평강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조차도 그것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훨씬 깊고 훨씬 넓고 훨씬 달콤한 것입니다. 그것은 기쁨에 찬 성도가 말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천국에 속한 것입니다. 성도는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런 일이 가능하다니, 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왜냐하면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기쁨은 진실로 제한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이성으로는 그 기쁨을 도저히 알 수 없습니다. 참으로 이 평강은 불경건한 자들과 불신자들의 눈에는 감추어진 것입니다. 이 평강은 그들의 시야보다 훨씬 위에 있는 것이며, 그들의 시야 밖에 있습니다.

지금 세상에는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여러 종류의 평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스스로 무감각 수련을 하던 스토아학파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감정적으로 느끼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무감각한 평강에 도달했습니다. 그들의 평화의 비밀은 쉽게 간파됩니다. 그것은 우리의 지각을 넘어서는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아메리칸 인디언들 역시 가장 위대했던 그런 스토아주의자만큼 무감각해졌었습니다. 아마 스토아주의자를 능가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무감각하게 만들어 화살에 찔리고 불에 타도 신음하지 않게 되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방식으로 자신을 통제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고통을 받거나 받지 않거나 그것에 관해 완전히 무관심한 문제처럼 여겼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우리에게 스토아주의를 가르치지 않으며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독교는 무감각을 연마시키는 것이 아니라 민감성을 개발시킵니다. 기독교의 영향력은 우리를 무감각하게 만들기보다 민감하게 합니다. 또 우리에게 가장 예민한 감정과 일관된 민감한 평강을 줍니다. 기독교는 우리를 무감각하게 만들기보다는 민감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이 아는 것보다 훨씬 더 강한 민감함과 가장 섬세한 감정을 가진 평화를 제공해 줍니다. 우리의 평강은 무감각의 평강이 아니고 훨씬 고상한 종류의 평강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세상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경박한 평강을 지향했습니다. 그들은 어두운 염려를 몰아내는 것이야말로 가장 지혜로운 일들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무슨 나쁜 일이 일어나든 그것에 대한 생각을 흘려버리고, 그들의 영혼이 비참하게 될 때도 그저 웃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방식으로 인생의 시련을 제거하려 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세상은 신자의 평강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무감각하거나 경망스럽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평강은 어디에서 옵니까? 많은 세상의 사람들은 의기양양하게 , 그것은 어떤 열광적인 망상에서 오지요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진실로 우리는 망상에 젖어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평강의 근거는 합리적이고 논리적입니다. 또 그 근거는 충분하며 상식으로도 합당합니다. 지금까지 부채가 있었고, 지금도 부채가 있는 사람은 평강을 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완전히 마음이 평안한 상태에 있는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만약 그가 내 부채가 다 청산되었기 때문에 편안한 마음을 가질 권리가 있다고 말한다면 누가 그를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그런 주장에 대해서 반박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 치러야 할 것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대신 다 담당하셨다고 믿는 사람이 평강을 누리고 있다는 주장을 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인해 그의 모든 죄악을 사해 주셨는데, 어찌 그가 평강을 누리지 못한다는 말입니까? 참으로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그런 그가 평강을 누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성부 하나님께서 그의 유익을 위해 모든 것을 다스리심을 믿는다면 그가 평강 가운데 머무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영원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그에게 조금도 남아 있지 않다면, 그에게 영광스런 부활이 준비되어 있다면, 그리고 그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한 영광 가운데 빛을 발하게 될 것이라면 왜 그 사람은 평강을 누리지 못하겠습니까?

우리는 망상의 희생물이 아닙니다. 우리는 진리요, 술 취하지 않은 말씀을 말하고 있습니다. 어리석음과 광신주의는 하나님과 영원을 무시하고 죄에 대하여 비웃는 자들과 함께합니다. 따라서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평강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종종 그것을 비웃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것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그리스도인조차도 가끔씩 자기 자신이 소유한 평강으로 인해 깜짝 놀랍니다. 저는 때때로 겪는 영혼의 끔찍한 낙담으로 받는 고통이 무엇인지 압니다. 그러나 생명이 동전 한 푼의 가치도 없다고 여겨졌던 그 순간에, 저는 그것보다 더 큰일들에 관해서도 완전히 평강 가운데 머물렀습니다. (비록) 마음의 표면은 폭풍에 시달렸으나, 가장 내면적인 마음의 동굴은 아주 고요했던 것입니다. 이것을 저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지구상에는 지진이 많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우리의 지구는 그때에도 궤도를 따라 움직입니다. 그 같은 원리가 우리 믿는 자의 세계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가끔씩 그 기쁨을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즐거운 평강에 싸이게 됨을 느낄 것입니다. 그는 심지어 자신의 목소리가 그 평강을 깨뜨릴까 노래하기를 두려워할 지경에 이르기도 합니다. 그 평강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경험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은 그 평강을 알고 있습니까? 이제 저는 처음 말씀으로 되돌아가겠습니다. 그것은 묘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맛보아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둘째로, 이 평강을 얻는 방법에 관해 간략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여기에서 사도는 주 예수님을 믿는 신자들에게만 말씀하고 있다는 사실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그 제한성에 주의하기를 바랍니다. 저는 불신자에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그리스도인들에게만 말씀드립니다. 여러분이 비록 항상 평강을 느끼는 기쁨을 누리지 못한다 해도 여러분은 항상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고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러한 사실을 깨닫기 원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본문의 앞 구절은 이것에 대한 해답을 말해 줍니다. 4절에서 바울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말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마음의 평강을 소유하고 싶다면, 하나님을 여러분의 기쁨으로 삼고, 여러분의 모든 기쁨을 하나님께 두십시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기뻐해서는 안 되며, 하나님을 기뻐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환경을 인하여 기뻐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환경은 자주 바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결코 변하시지 않습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십시오.” 만약 여러분이 세상의 것으로 인해 기뻐하고 있다면, 그것에 빠지지 않도록 절제해야 합니다. 그러나 주 안에서 기뻐하는 것은 얼마든지 괜찮습니다. 왜냐하면 사도는 덧붙이기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다시 말해 기뻐하라, 그리고 다시 기뻐하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주 안에서 즐거워하십시오. 누가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 같은 분을 가졌습니까? “그들의 반석이 우리의 반석과 같지 아니하니 우리의 원수들이 스스로 판단하도다”(32:31). 누가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과 같은 그런 친구, 그런 아버지, 그런 구세주, 그런 위로자를 모시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우리의 놀라운 기쁨이라고 깨닫는 것이야말로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5절을 계속 보겠습니다. 사도는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해, 여러분의 모든 기쁨이 하나님께 있을 때 세상의 모든 것을 절제 있게 다루라는 것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여러분을 칭찬하면 우쭐해지지 말며, 반대로 여러분을 비난할 때 침울해지지 않게 하십시오. 만약 여러분이 형통해진다면 하나님께 감사하시고 그것이 계속될 것이라고 자신만만해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형통하다면 그 형통함을 취하십시오. 그러나 그것을 여러분의 보화로 삼거나 마음의 주된 관심사가 되게는 하지 마십시오. 역경으로 고통 중에 있습니까? 도와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합시오. 세상의 위로라는 위험한 바닷속으로 걸어 들어가지 마십시오. 대신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위해 준비하신 좋은 것들을 취하십시오. 세상의 위로에 대해 그저 사라지고 마는 것이라고 말하십시오. 왜냐하면 참으로 그것은 일시적인 필요에 따라 일시적으로 공급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보기에 좋은 것들이 결코 여러분의 신()이 되지 않게 하십시오. 하나님만을 기뻐하십시오. 그 외의 모든 것은 오가는 것이며, 일어서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런 것들을 여러분의 근심거리나 기쁨으로 삼지 마십시오. 삶의 문제들을 고요하고 조용하게 처리하십시오. 그렇게 하신다면 여러분은 평강을 얻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세상의 좋아 보이는 것을 우상시한다면 여러분의 평강은 떠나갈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을 여러분의 발아래에 둔다면, 하나님의 평강이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 것입니다.

사도에 의해 세 가지 원리가 추가되었는데, 여러분은 그것들을 분명히 기억하실 겁니다. 사도는 우리에게 염려하지 말 것과, 모든 일에 대하여 기도할 것, 그리고 무슨 일에든지 감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세 가지 원리를 다른 두 가지와 함께 지킬 수 있는 사람은 평화로운 마음을 갖게 될 것입니다. 먼저,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 다시 말해 여러분의 염려를 하나님께 맡겨 버리라는 말입니다. 만사를 모든 이들 앞에 정직하게 최선을 다하시고, 무슨 일이든지 염려나 근심으로 인해 불안해하지 마십시오. 대신 여러분의 짐을 주님께 맡기십시오. 그리고 모든 일, 곧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슬픈 일이든 기쁜 일이든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여러분의 구할 것을 하나님께 아뢰십시오.” 여러분의 기도 제목이 악한 것이라면, 여러분이 기도함으로 그 악한 것이 뽑혀 버릴 것이요, 선한 것이라면 그것은 거룩해질 것입니다. 여러분이 기도하는 환난은 비록 기뻐할 만한 것으로 바뀌지 않을지라도 견딜 만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아무 일에든지 감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은 모든 일에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감사는 평강을 증진시킵니다. 그것은 안식의 어머니요, 유모입니다. 의심할 바 없이 우리의 평강이 종종 깨지기도 합니다. 이는 감사 없이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들을 받기 때문입니다. 찬양을 소홀히 하는 것은 경계해야 하는 신호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감사의 향긋한 향기로 예배할 때, 우리는 우리의 영혼 속에 하나님의 달콤한 평강이 가득 차게 됨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의 앞에 있는 그 다섯 가지 원리들을 적용하십시오. 여러분의 모든 기쁨을 하나님의 거룩한 창고에 쌓으시고 주님 안에서 기뻐하십시오. 또한 할 수 있는 한 세상의 것들은 그대로 내버려 두시고, 무시해 버리십시오. 그런 후 기도하시고, 아무것도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나님께 찬양을 돌리십시오. 귀한 꽃들과 과일들이 햇빛이 비치는 하늘 아래 물이 잘 드는 정원에서 만발하고 여물어 가듯 평강 또한 그런 환경 속에서 자라게 될 것입니다. 성령께서 이런 일들을 우리 안에 행하시고 우리로 안식하게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마음과 생각을 지키는 평강

셋째, 이 축복된 특권이 우리의 심령에 미치는 역할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지킨다는 뜻의 헬라어 프루레오는 수비대가 무엇을 지키듯이 호위한다는 뜻입니다. 곧 하나님의 평강이 완전하고도 효과적인 방식으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킨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지켜질 필요가 있습니다. 침체되지 않도록 지켜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연약한 영혼은 작은 시련에서도 쉽게 약해지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의 영혼은 방황하지 않도록 지켜질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영혼은 너무나 쉽게 기만당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지켜져야 하며, 또한 바르게 지켜져야 합니다. 본문에 따르면 마음을 지키는 길은 그 마음을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평온하며 고요하며, 쉼이 있으며, 기쁨에 찬 영혼은 침체하거나 방황하는 법이 없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평강이 여러분 속에 있다면, 무엇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근심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바닷가에 떠 있는 거대한 부표와 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가라앉지 않습니다. 폭풍우가 밀려와도 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항상 물 위에 떠 있습니다. 평강에 단단히 묶인 채 떠 있는 우리의 영혼은 확고한 부표 같아서 다른 사람 역시 그것을 통해 길을 알게 됩니다. 더구나 마음에 평강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은 방황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내가 왜 방황해야 하는가? 주님 안에서 경험했던 그와 같은 감미로움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는가? 내가 어찌 다른 곳을 찾겠는가?”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을 여러분의 사역에 머물러 있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가 머물러 있을 만한 가치를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여러분의 집에 오래 머물게 하는 방법은 그로 하여금 그럴 가치가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가 느끼기에 이 이상 좋을 수가 없다고 느낄 정도로 즐겁고 만족스럽다면 여러분은 그 사람을 오랫동안 붙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이 평강이 우리의 마음뿐 아니라 우리의 생각도 지킬 것이라고 부연하여 말씀합니다. 모든 시대를 통하여 그리스도인의 생각이 혼란 속에 빠지거나 생명의 진리에 대하여 끝없는 논쟁을 벌여 왔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저는 이 시대야말로 오류 때문에 세상이 어두워진 가장 나쁜 시대라고 가끔씩 생각합니다. 교회의 강단에서 계속 설교하면서도 성경의 영감설을 부인하며 우리가 귀하게 여기는 모든 교리들의 근원을 위협하는 목사들, 또한 그리스도를 믿고 고백하는 목사들의 변절을 볼 때 저는 근심에 싸이며 큰 실망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지난 역사를 회고해 볼 때, 그런 일은 항상 있었습니다. 가룟 유다의 시대로부터 지금까지 배도자들은 계속 있어 왔습니다. 또한 빼어난 연설과 교묘한 사상들을 사용하여 복음에 대한 단순한 마음을 갖지 못하도록 하는 사람들 역시 항상 있어 왔습니다. 그러나 어찌해서 택한 자들은 (그런 사람들에게) 속지 않습니까? 그 이유는 대체로 택한 믿는 자들은 그들이 배웠던 진리 속에서 완전한 평강을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미혹자들은 헛되이 애쓸 뿐입니다. 안식을 누리는 그 신자는 이렇게 소리칩니다. “, 나는 복음을 버릴 수 없다. 그것은 나의 생명이요, 나의 힘이요, 나의 위로이며, 나의 전부이다. 그것은 임종 시 나의 어머니에게 위로가 되었고, 나의 늙으신 아버지께서 가장 의지하던 것이었다. 그 진리는 나를 구세주의 발아래로 인도하였고, 그 곳에 머물 수 있는 은혜를 주었다. 그것은 시련의 시기에 계속적으로 나를 도와주었다. 나는 그 진리의 위로를 원한다. 그러므로 나는 결코 그 진리와 결별할 수 없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성령님이 우리의 영혼 속에 가르쳐 주신 그 진리로부터 단 1인치도 움직여서는 안 됩니다. 그 진리만이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을 마음속에 가져다줍니다. 주님께서 그분의 능력으로 자신의 진리를 가르치시고 그 달콤한 향기를 우리 전체에 퍼지게 하시며, 말로 다할 수 없는 기쁨과 평강으로 우리의 심령이 가득 찰 때까지, 그리고 그 진리를 우리에게 주시고 마시게 하실 때 우리는 그 진리로부터 떠날 수 없습니다. 사람을 통해 배운 진리는 잊어버릴 수 있습니다만, 성령께서 우리의 가슴 깊은 속에 새겨 주신 진리로부터 우리는 결별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시여, 우리를 도우소서. 우리는 그 진리로 인해 죽는 한이 있어도 그것을 지켜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역사하는 평강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평강이 역사하는 영역에 대하여 살펴봅시다. 본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이 말씀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거룩한 인격과 연합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머리요, 우리는 그의 지체들입니다. 그분은 모퉁잇돌이요, 우리는 그 위에 지어져 있습니다. 우리에게 그분을 떠나서는 생각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평강 안에 거하고 있다면 우리는 계속 우리 주 예수님을 생각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이 그분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밖에서는 어떤 평강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잊는다면 그 어떤 평강도 우리의 마음을 위로할 수 없습니다. 그는 우리의 평강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평강을 얻기 위해 율법이나 여러분 자신의 경험이나 여러분의 과거의 업적들 혹은 심지어 여러분의 믿음에게조차도 나아가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모든 평강은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그분을 사랑하고 또 사랑받는 마음을 가지십시오. 뿐만 아니라 그분을 믿고 신뢰하는 생각을 가지십시오. 그리고 그 모든 재능들 또한 그를 위해 사용해야 합니다. 모든 것이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이것에 관해 나누면서 저의 설교를 마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 평강을 얻기 위해 그리고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 곧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다스리시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그분을 항상 묵상하십시오. 그분의 식탁이 이제 차려졌습니다. 그분과 교제하기 위해 이리로 오십시오. 여러분의 주인과 함께하고, 여러분의 주인을 뵙고, 그분의 식탁에서 영적인 방식으로 그분의 살을 먹고 그분의 피를 마십시오. 우리 주님을 모르는 분들에게 말씀드립니다. 저는 여러분께서 그분을 알게 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그리스도를 모시기 전에 여러분은 결코 평강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오늘 밤 그리스도를 찾으신다면, 여러분의 영혼은 참으로 복된 안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분을 찾기 위해 너무 멀리 갈 필요가 없습니다. 그분은 여러분들 중 그 누구와도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습니다. 눈을 감으시고 기도의 숨을 그분을 향해 내쉬십시오. “구세주여, 저는 평강을 원합니다. 제가 주님을 찾을 때까지 결코 평강을 가질 수 없습니다. 보소서 제가 주를 믿나이다. 이 순간 저를 만나 주시고 저의 영혼에 나는 너의 구원이다라고 말씀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여러분이 그렇게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은 다른 일들에서 소위 제일 좋은 것을 추구하기에 아주 열심입니다. 그러나 가장 엄숙한 관심사, 가장 큰 축복, 가장 순수한 행복을 얻을 수 있게 될 때, 그들은 너무나 어리석어 주 예수님보다도 그 외의 다른 것들에 눈길을 돌립니다. 주께서 무한한 자비를 베푸셔서 여러분 모두를 구원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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