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에는 소그룹의 필요성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첫째는 소그룹은 성경적이 이유에게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초대교회는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그 다음에는 가정에서 작은 모임으로 모였다고 했습니다. 둘째는, 교회적인 측면에서 소그룹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예배가 제일 중요합니다. 예배는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그리고 소그룹은 성도들끼리의 만남입니다. 그래서 구역소그룹이 필요합니다.
셋째는, 사회적 측면에서 소그룹 모임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우리 사회는 너무 외롭고 고독합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조차도 외로움과 고독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구역소그룹을 통해서 서로에게 위로를 해 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개인적 측면에서 소그룹 모임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어떤 사람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나눔 하는 것만으로 개인적인 치유가 일어납니다. 슬픔은 나눔으로 반으로 줄고, 기쁨은 나눔으로 배가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이 소그룹 모임으로 가능합니다. 또 영적 측면에서 소그룹 모임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소그룹을 통한 하나 됨을 통해 진정한 성령의 역사를 경험 할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소그룹은 하나 되기 더 쉽습니다. 우리가 소그룹에서 서로 하나가 될 때 그때 성령의 충만하심과 임재하심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배와 함께 소그룹으로 모여서 진정한 만남과 교제가 이루어져서 세상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고, 또 소그룹 모임을 통해서 주님께서 날마다 믿는 자를 더해가는 역사가 나타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오늘은 우리가 구역소그룹 모임에 대해서 오해를 하는 것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첫째는 구역소그룹을 단순히 성경공부의 모임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구역모임은 성경공부 모임이 아닙니다. 성경공부란 강사가 일방적으로 성경을 가르치고, 참석한 사람들은 단순히 성경의 지식만을 듣고 가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구역모임은 단순히 성경공부 모임이 아닙니다.
그러면 왜 구역소그룹에 강사가 있습니까? 사실 저는 처음부터 강사대신에 목견이라는 말을 사용하고자 했습니다. 여러분 목견이 무엇입니까? 목견이란 양떼들을 목자에게로 이끌어가는 개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우리를 예수님의 양떼들로 보았을 때 우리의 참된 목자는 누구입니까? 예수님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누구입니까? 우리는 목자이신 예수님께로 양떼를 이끄는 목견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자신에 대해서 어떻게 말을 합니까? 나는 메시야가 아니라,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눅3:3)”라고 했습니다. 소리가 무엇입니까? 소리는 전하는 메시지만 증거하고 자신은 사라지는 존재입니다. 만일 소리가 자신을 드러내면 그 소리는 잡음이 됩니다. 그래서 목사님들의 모임가운데 목견회라는 모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일 훌륭한 목견은 어떤 목견이겠습니까? 양떼들로 하여금 예수님께로 가게 하는 목견입니다. 그리고 목견의 말이 아니라 목자이신 예수님의 말을 잘 듣도록 도와주는 목견입니다. 그런데 목견이라는 말이 너무 생소해서 그냥 강사라고 했는데, 사실상 목견입니다.
/그러니까 목견 즉 강사는 단순히 성경을 잘 가르치는 자가 아닙니다. 가장 훌륭한 목견, 가장 훌륭한 강사는 말을 제일 적게 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사람들로 하여금 최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도록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강사는 좋은 질문을 던지는 자입니다. 매주 구역공과도 주로 질문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강사는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 아니라 들어주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단순히 구역소그룹을 성경공부모임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둘째, 구역소그룹을 단순히 나의 주장을 펼치는 시간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구역소그룹은 자신의 삶을 나누는 시간입니다. 말 그래도 자신의 삶만을 나누면 됩니다. 그런데 잘못하면 자신의 삶을 나누지도 않고,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려고 할 때가 있습니다. 강사도 목견이지 가르치는 자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구역원 중에서도 어느 누구도 가르치는 자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만일 구역원 중에서 누구라도 가르치려는 자가 있으면 그 모임에서는 절대 자신의 삶을 나누지 못합니다. 또 가르치거나 심지어 충고하는 자가 있으면 절대 그 모임에 참석하지 않습니다.
따라하겠습니다.
“구역모임은 나의 주장을 펼치는 시간이 아니라 나의 삶을 나누는 시간입니다”
그러니까 구역모임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경청입니다. 약1:19에서도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어떻게 들을 것인가, 경청에 대해서 더 집중적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경청이 무엇입니까? “아니 왜 그렇지” 가 아니라, “아 그렇구나” 하는 것이 경청입니다.
그래서 구역소그룹이 나의 주장을 펼치는 시간이 아니라, 나의 삶의 나누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 구역소그룹을 단순한 의무적인 행사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구역소그룹 모임을 왜 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많은 사람들이 구역소그룹을 단순히 교회에서 억지로 하게 해서는 의무적인 행사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너무 부담스럽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구역소그룹모임을 하는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입니까?
만남입니다. 그리고 그 만남을 위해서 우리의 삶을 나누는 것입니다.
이 만남을 성경에서는 코이노니아라고 합니다. 또 코이노니아라는 말은 교제 즉 삶을 나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코이노니아란 삶을 나눔으로 서로 만남을 뜻합니다.
그러면 무엇이 만남입니까?
여러분은 오늘 옆에 계신 성도님을 만났습니까? 정말 만났다고 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단순히 서로 눈으로 보았다고 만났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또 단순히 악수를 했다고 서로 만났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또 단순히 일상적인 대화를 했다고 해서 서로 만났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또 단순히 일을 같이 했다고 해서 서로 만났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진정한 만남 즉 코이노니아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속에 있는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만남에서 제일 문제가 되는 것은 외식입니다.
“안 그런 채” 하는 것입니다. “나는 전혀 문제가 없는 채” 하는 것입니다. “나는 전혀 아프지 않으 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안 그런 채” 하면 우리가 서로 만났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소그룹시간에 우리의 속에 있는 진실 된 이야기를 솔직히 말 할 수 있어야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신 속에 있는 솔직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중요한데, 그 말을 듣는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잘 경청해야합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이 그 어떤 이야기라도 잘 들어주고 이해해주고 용납해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만일 그 사람의 솔직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용납하지 못한다면 서로 만났다고 말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구역소그룹 모임이 단순한 행사가 억지 모임이 아니라 서로 솔직하게 삶을 나누고, 그 모든 이야기를 잘 듣고 용납하여 진정한 마음의 만남이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런 만남을 위해서 구역소그룹 모임에는 자신의 모든 계급장을 따 떼어야합니다.
이 자리에서 만큼은 나는 교회에서 “—인데” 하는 것을 다 버려야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삶을 온전히 나눔으로 진정한 만남이 있는 구역소그룹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넷째, 마지막으로 소그룹에 대한 오해는 이 소그룹모임을 단순히 인간적인 사교의 모임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잘 보시기 바랍니다.
“요일1: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교제-우리의 교제 -코이노니아)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교제-우리의 교제-코이노니아)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교제-하나님과 예수님과 교제-코이노니아)이라”
여기서 보면 사도요한이 이 글을 적는 목적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 교제 즉 코이노니아가 있게 하려 함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도요한이 이 글을 적는 목적은 우리가 서로 만나서 교제하기 위함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서로 만나서 교제하는데, 단순히 우리 인간들끼리만 모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진정한 만남과 교제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 각자가 하나님을 만나야합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교제해야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디에서 서로 하나로 만나서 교제할 수 있습니까?
인간들끼리가 아닙니다. 하나님 안에서 만나야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만나야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서로 하나님 안에 있을 때, 예수님 안에 있을 때, 비로소 하나님과 예수님 안에서 우리의 진정한 만남과 교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을 그림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여기 삼각형이 있습니다. 삼각형 아래에 나와 당신이 있습니다. 그리고 삼각형 꼭지점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우리의 만남과 교제는 단순히 인간들끼리 나와 당신의 만남이 아닙니다. 나도 하나님 앞에 나아갑니다. 또 당신도 하나님 앞에 나아갑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디에서 만납니까?
하나님 안에서 예수님 안에서 우리가 하나로 만날 수 있습니다.
/지난주일 저녁에 옛날에 가르쳤던 청년부부 2가정이 집에 놀러왔습니다. 한 가정은 본지 10이 넘었고, 또한 가정도 본지 5년 넘은 부부였습니다. 저녁에 집에 있던 라면을 먹으면서 시간가는 줄 몰랐습니다. 한 가정은 미국에서의 7년 생활을 이야기를 했고, 또 다른 가정은 그동안 살아왔던 삶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시간에 성경책을 펼치거나 제가 무엇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냥 살았던 삶을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몇 년 만이 만났는데, 마치 어제 본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무엇보다 그렇게 오랜 만이었는데, 예전에 느꼈던 하나 됨을 느끼는 시간이었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서로 삶을 나누었지만, 그 나누는 삶에 대한 이야기가운데 하나님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서로 그동안 그들의 삶 가운데 함께 하셨던 하나님에 대해서 서로 나누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오랜만이었지만, 단순히 인간들끼리가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서로 하나 됨을 느끼고 돌아갔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구역모임시간에 삶을 나누는 것이 세상에서의 삶을 나누는 모임과 무엇이 다릅니까? 똑 같이 지나온 삶을 나누는데, 우리는 삶 가운데 함께 하신 하나님을 나눔니다.
그런데 믿지 않는 사람들의 모임에는 하나님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나눔에는 하나님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역소그룹모임은 절대 인간적인 삶을 나누는 모임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함께 하셨던 하나님을 나누는 모임입니다. 지난주에 내 삶 가운데 가장 기뻤던 일을 나눌 때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이렇게 기쁘게 되었다고 나누셨을 것입니다. 또 내 삶 가운데 가장 슬펐던 일을 나눌 때도 가장 슬펐던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더 큰 위로가 되었다고 나누셨을 것입니다.
오늘도 내가 그 동안 살아왔던 삶을 말하면서 단순히 우연히 이렇게 내가 살아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렇게 인도하셔서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을 나누게 될 것입니다.
구역소그룹을 통해서 우리끼리 서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서로 만나시기 바랍니다. 또 내 삶을 나누면서, 내 삶 가운데 함께 하셨던 하나님을 서로 나누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구역소그룹을 통해서 하나님 안에서 서로 하나 될 수 있는 시간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본문을 읽고 마치겠습니다.
“요일1: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4.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구역소그룹을 통해서 만남을 통한 이 기쁨이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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