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종교개혁기념주일입니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1517년에 휘텐 베르크 교회 앞에 95개조 반박문을 붙였습니다. 그리고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놀라운 진리를 선포했습니다. 그런데 그 후 30년이 지난 후에 루터는 큰 어려움에 격었습니다. 그것은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자기 마음대로 살아갔습니다. 특히 휘텐 베르크 시 전체가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고 하니까 자기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고 생각하고 윤리적 방종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래서 한때 루터는 설교를 중단하고 그 도시를 떠나려고 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진리는 우리의 행위로 구원을 받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또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진리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말씀을 잘못 오해해서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으니까 자기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어떤 잘못을 해도 나는 구원을 받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날의 복음은 참된 복음이 되지 않고 값싼 복음이 되었습니다. 미국인의 94%는 하나님을 믿고 있으며 74%는 예수 그리스도께 헌신했다고 대답한 갤럽 조사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중생을 고백한 34%가 각종 범죄와 중독 등에 빠져있다는 통계가 나와 있습니다. 이것은 미국 뿐 아니라 한때 4분의 일이 기독교라고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된 것은 복음의 핵심이 되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오해 때문에 나온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우리에게 구원을 주는 공짜 영화 티켓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여기 구원이라는 극장이 있습니다. 우리는 구원이라는 극장에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십자가의 은혜로 들어갑니다. 그래서 구원이라는 극장에 들어갈 때 십자가의 티켓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십자가 때문에 공짜로 구원이라는 극장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어떻게 합니까? 내가 공짜로 구원을 얻었으니 내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찬송을 부르면서 옆에 사람을 내 마음대로 때리고 칩니다.
-과연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에게 공짜 구원을 주고 난 다음 우리가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는 의미입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죄를 사하고, 우리가 공짜로 구원을 얻게 함과 동시에 그 십
자가는 --예수님만 아니라--그를 믿는 나의 죽음을 뜻합니다.
성경을 찾아보겠습니다.
고린도 후서5장 14절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예수님)이 (그를 믿는) 모든 사람을 대신(대표)하여 (십자가에) 죽었은즉 (그를 믿는)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고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보면 분명 한 사람 예수님이 모든 사람을 대신해서(대표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그를 믿는 “모든 사람이 그 십자가와 함께 죽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앞에서 말씀드린 비유를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가 구원이라는 극장에 들어가려고 합니다. 그때 천사가 가로 막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십자가의 티켓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의 티켓을 보여주고 난 다음 그냥 구원의 극장에 들어가려고 합니다. 그때 다시 천사가 가로 막습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예 십자가”입니다. 그래 십자가가 무슨 뜻이냐 라고 묻습니다. “예 십자가는 예수님이 나를 대신해서 죽은 십자가입니다”. 그렇게 말하니까 천사가 말합니다. “넌 그것밖에 모르구나” 내가 분명히 십자가의 의미를 말해주겠다. 그 십자가는 예수님의 죽음만을 이야기가 하지 않고, 그를 믿는 너의 죽음을 뜻한다“. 그렇게 말해놓고 목을 내 밀어라하고 십자가의 작두로 머리를 자릅니다. 그래서 옛 자아를 죽입니다. 그리고 이제 십자가에서 죽은 자로 구원이라는 극장에 들어가게 합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로서 구원이라는 극장에 들어가서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이제 우리는 내 뜻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야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에서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당시에도 오직 은혜로,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하니까 “자기 마음대로 죄 짖고 살아도 된다” 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1절과 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라고 합니다.
초대교회 당시에도 영지주의 라는 이단이 있어서 영이 구원을 받으면 우리 육신은 어떤 죄를 지어도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죄를 지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더 크게 느낄 수 있다”고 하는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3절과 4절에 사도바울이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죽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새로운 피조물)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세례는 밥티조란 말로서 “물에 잠기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에 세례는 요단강에서 침례를 주었습니다. 물에 잠긴다는 뜻은 죽음을 나타냅니다.
--고후10장1절에 보면 이스라엘백성도 모세와 함께 홍해에서 세레를 받았다 고 합니다. 고대 근동에서 물속에 들어간다는 것은 죽음을 뜻합니다.
세례를 왜 받습니까?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을 믿는 사람이 믿음의 공적인 표시로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습니다” 라는 말은 “그 십자가를 통한 죄사함을 믿는 것”과 동시에 “내가 예수님의 십자가와 함께 죽었음을 믿습니다” 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물에 잠김으로 “나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함께 죽은 자입니다”라고 하는 것을 극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세례의식입니다.
--그래서 어떤 목사님은 예배당 앞에 십자가가 관을 앞에 두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모든 성도들이 다 나오라 해놓고, 한 사람씩 그 속을 들여다보라고 했습니다. 한 사람씩 보고 가서 눈물을 흘리며 울기를 시작했습니다. 알고 보니 그 관속에 거울이 있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에 당신이 죽었다는 것을 알게 해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단순히 구원을 주는 공짜 영화 티켓으로 생각합니다. 또 십자가를 장식품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내가 주님과 함께 죽었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정말 여러분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습니까?
그렇다면 그 십자가에 나도 함께 죽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지난주에도 전도를 하는데, 어떤 분이 교회를 다니다가 교인들에게 상처를 받아서 지금은 교회도 다니지 않고, 신앙생활도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왜 사람들은 예수님은 좋은데, 교회가 싫다고 합니까? 오늘날 왜 우리가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데, 왜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고 있지 않습니까? 그 이유는 그 이유는 십자가의 복음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 십자가를 전하는 우리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은 자로서 복음을 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내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자로서 예수님을 증거 할 수 있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 내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하는데, 구체적으로 나의 무엇이 죽었다는 말입니까?
첫째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함께 나는 죄에 대하여 죽었습니다.
오늘본문 11절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고 합니다.
그래서 날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하여 죽은 자로 여기면서 살아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다고 하서 아직 내 옛 자아가 살아있어서 아직 죄에 종노릇을 하면서 살아간다면 그것은 정말 예수님을 십자가에 다시 못을 박는 행위입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이 어렵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말씀이 어려운 말씀이 절대 아닙니다. 내 마음이 강퍅해서 내가 주님과 함께 죽기 싫어서 이 말씀이 어렵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 말씀은 절대 어렵지 않습니다. 내가 예수님과 함께 나는 죽었다고 인정하고 정말 죽은 자로 살아가면 이 말씀은 너무 쉽습니다.
--처음 수영을 할 때 배영을 하고 싶은데 배영이 너무 어려웠습니다. 배영을 배우다가 머리를 박고 수영을 그만 두기도 했습니다. 그때 제가 제일 많이 들었던 이야기는 힘을 빼라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을 완전히 죽이고 힘을 주지 말고 그냥 물에 몸을 맡기면 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절대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내가 힘을 주지 않으면 가라앉을 것 같았습니다.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배영이 제일 쉽습니다. 몇 시간이라도 물에 가만히 누워 있으라 하면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가능했겠습니까? 물이 나를 완전히 믿기고, 힘을 완전히 빼면 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동안 여러분들은 계속해서 원수까지라도 사랑하는 말씀을 수도 없이 들었습니다. 용서하라는 말씀을 계속해서 들었습니다. 그 말씀대로 살면 나도 살고 우리 모두가 살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여전히 내 마음 가운데서는 아직 완전히 사랑하는 마음이 없습니까? 왜 완전히 용서하는 마음이 없습니까? 왜 여전히 우리는 마음으로 여러 가지 죄 메여서 살고 있습니까? 이 모든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내가 주님과 함께 죽으면 됩니다. 내가 죽으면 정말 원수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내 자아가 죽으면 모든 문제는 해결이 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내가 내 인간적인 힘으로 내 자아를 억지로 죽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내가 주님과 함께 죽었다는 사실을 믿고 날마다 죽은 자로 여기면서 살아가면 됩니다.
그런데 왜 죽는 것이 어렵습니까? 우리가 온전히 예수님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에 내 온 몸을 완전히 맡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속으로 이런 생각이 드실 것입니다.
“죽으면 되, 그런데 죽으면 내가 바보가 되잖아, 남들이 나를 깔보면 어떻게 하지, 이렇게 마냥 죽다가 나중에 사람들에게 이용하면 어떻게 하지” 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나를 죽이려 하다가도 또 살아납니다.
이때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합니까? 이때는 부활을 믿어야합니다.
부활이라는 뜻이 단순히 죽어서 부활하는 것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그와 함께 죽었음을 믿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그와 함께 살리라) 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었으면 또한 (부활하신)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 말씀에 보면 우리가 주님과 함께 죽었음을 믿는다면 또한 그의 부활과 함께 살줄을 믿는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내가 죽어서 바보가 되어도 또 다른 사람들이 나의 모든 자존심을 짓밟아도 언젠가를 하나님께서 나를 일으켜 주시고 높여 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의 신앙입니다.
/어떤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서 들었던 이야기입니다.
“어느 시골에 사랑이 많으신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과부가 찾아와서 제발 내 아이를 맡아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너무 그 과부가 불쌍해서 그 아이를 맡았습니다. 그런데 동네에서 그 아이가 목사님과 과부사이에서난 아이라고 소문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목사님은 교회를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그 목사님은 그 동네를 떠나지 않고 그 아이를 제 자식처럼 잘 키웠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더욱더 목사님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느 정도 세월이 흐른 후에 그 과부 엄마가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자초지종을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때 모든 동네사람과 교인들이 오해라는 사실을 그때야 알았습니다. 그 일 이후로 예수를 믿지 않던 모든 동네사람들도 그 목사님이 참 성자와 같다고 하면서 다 예수를 믿게 되었고, 목사님은 다시 그 교회로 돌아 와서 목회를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목사님이 믿은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내가 죽으면 언젠가는 살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의 신앙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내가 죽어도 하나님께서 반드시 나를 살려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세상에서 우리의 옛 자아와 정욕을 죽이고 살아간다는 것이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이기기 힘든 상대가 누구인줄 아십니까? 예 바로 자신입니다.
그런데 내가 죽으면 되는데 내 마음대로 잘 되지 않습니다. 이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여러 가지 고난을 허락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내가 주님과 함께 완전히 죽은 자인 것을 깨닫게 하게 위해서 우리의 삶의 십자가를 주십니다.
--삶의 십자가는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에게 다 있습니다. 저는 단언하건데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단 한 사람도 예외가 없이 삶의 십자가를 주셨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주님과 함께 완전히 죽은 자인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어떨 때는 극심한 경제적인 십자가를 주십니다. 또 어떨 때는 나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의 십자가를 주십니다. 또 질병의 십자가를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 삶의 십자가를 통해서 완전히 나를 갈고 갈아서 완전히 없어지게 만드십니다. 칼빈이 말했듯이 마치 맷돌에 콩가루 갈듯이 나를 완전히 갈아버리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 해놓고 왜 우리에게 죽음과 같은 십자가의 고통을 주시는 줄 아십니까?
그 이유는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와 함께 완전히 죽었음을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 자아를 진짜 완전히 죽이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자아가 완전히 죽어서 하나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시든지 순종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여러분 정말 성령 충만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어떤 자에게 성령이 충만히 역사합니까?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완전히 못 박은 사람입니다.
여러분 만일 자신을 십자가에 완전히 못 박지 않고 성령 충만을 구하면 어떻게 되는 줄 아십니까? 욕망 충만이 됩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5장 22절과 23절에서 성령을 아홉 가지 열매를 말하고 난 다음에 어떻게 말씀합니까? “갈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심슨박사는 “성령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정하신 장소, 즉 그리스도의 무덤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위대한 장의사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성령을 따라서 여러분 자신을 죄에 대하여 죽은 자로 여기면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두번째, 예수님의 십자가와 함께 나는 세상에 대하여 죽었습니다.
갈6:14절입니다“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이 말씀을 쉬운성경에서는“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세상은 나에 대해서 죽었고, 나는 세상에 대해서 죽었습니다”고 말합니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내 안에 세상적인 모든 것이 다 죽었습니다“라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서 살아가라는 말이 아닙니다. 또 이 말씀은 우리가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하여 금욕주의적으로 살아가라는 말도 아닙니다.
/여기서 세상이라고 하는 것은 요한일서를 보면 “요일2: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세상이란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는데 가지는 육신의 헛된 욕망들입니다. 또 이 세상에 대한 자랑들입니다. 또 육신의 눈에 화려하게 보이는 것들만을 추구하는 마음입니다.
/또 마13장22절에 보면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라고 합니다.
여기서 세상이란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가지는 염려의 가시들을 말합니다.
또 딤후1장 7절에 “하나님이 주신 마음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라 사랑과 능력과 절제하는 마음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아닌 이 세상이 우리에게 주는 마음은 두려워하는 마음입니다. 또 할 수 없다고 낙심하는 마음입니다. 또 절제하지 못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이라는 것은 육신의 헛된 욕망, 이생의 자랑, 눈에 보이는 화려한 것들 추구하는 것, 또 염려하며 살아가는 것, 두려워하는 것, 낙심하는 것, 절제하지 못하는 것들이 우리 안에 있는 세상의 것들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지금 여러분이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하며 살아가는 세상의 모든 것들이 십자가에 이미 못 박혔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 내 안에 세상이 주는 두려움, 그리고 내가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낙심의 마음, 절제하지 못하는 모든 마음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에 이미 못 박혔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내 안에 육신의 헛된 욕망과 이 세상의 자랑과 눈에 보이는 화려한 것들을 추구하는 세상의 마음들이 십자가에 이미 못 박혔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렇게 내 안에 있는 세상의 모든 것들이 십자가에 못 박혔음을 믿고, 이제 구체적으로 나를 쳐서 죽이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이것은 마치 이와 같습니다. 술을 도무지 끊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지방에 있는 술공장을 완전히 다 파괴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술공장을 파괴했다고 해서 이 사람이 술을 완전히 끊은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술공장이 파괴되었음음 믿고, 날마다 술을 먹고 싶은 자신을 쳐서 복종하고 죽이는 삶을 살아야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9장27절에 사도바울은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 했습니다.
//내 안에 끊임없이 일어나는 육신의 헛된 욕망과 이 세상의 자랑, 눈에 보이는 화려한 것을 추구하려는 안목의 정욕들을 쳐서 복종시키고 죽이는 싸움을 해야 합니다.
/저는 목사로 세상적인 욕망은 없습니다. 그런데 내 안에 종교적인 명성을 얻어야겠다는 종교적인 욕망이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내가 아주 멋있는 설교를 하고, 누구에게나 칭찬받는 그런 목사가 되려는 욕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도 날마다 십자가에서 나를 죽이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여러분에게도 내가 십자가와 함께 구체적으로 죽어야 할 세상적인 것들은 없습니까?
십자가는 단순한 장식품이 아닙니다. 내 안에 있는 세상 것들의 죽음입니다. 또한 세상의 것들을 추구하는 나의 죽음이 십자가입니다.
/찬송가 191장에 “세상 모든 욕망과 나의 모든 정욕은 십자가에 이미 못을 박았네 어둔 밤이 지나고 무거운 짐 벗으니 주의 영이 함께 함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죽은 자로서 세상 속에 있지만, 세상에 메이지 않는 참된 자유의 삶을 사시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나의 이기심은 완전히 죽었습니다.
“고후5:14--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그를 믿는)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15.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이기심이)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이기적으로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딤후3장에 말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만을 사랑하고”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말세의 가장 큰 징조는 자기만을 사랑하는 이기주의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는 바로 우리 안에 있는 이기심의 죽음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진정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으십니까? 그리고 그 십자가에서 내가 죽었음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우리 자신만을 위해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이제는 우리는 우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살아나신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아야합니다.
또한 나 중심의 삶이 아니라 철저히 남을 위한 삶을 살아야합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썩어서 없어집니다.
그러나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십자가에서 내가 죽어지는 삶을 살아서 열매가 더 풍성한 삶을 사시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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