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국민들이 성원하고 바랬는데, 김연아선수가 금메달을 따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국민들이 생각하는 것은 여전히 김연아가 금메달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실력이나 경기만이 아니었습니다. 김연아선수의 정신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금메달이라는 결과에 연연하지 않았다. 최선을 다했다. 그래서 만족한다. 후회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하하”하고 웃었습니다.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이 이러해야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최악의 상황가운데서도 최선을 다하는 사람입니다. 달란트 비유를 보면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얼마나 많이 남겼느냐 보다 얼마나 최선을 다하였느냐를 가지고 판단하십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사도바울이 처해있는 상황은 인간적으로만 보면 최악의 상황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그런 최악의 상황속에서도 최선을 삶을 살았습니다.
바로 우리에게도 이런 사도바울의 태도와 자세가 필요합니다.
요즘 사람들은 항상 자신의 미래를 전망하면서 모든 것을 최악의 상황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다 비관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제 무엇이든지 “안 된다, 할 수 없다” 고 하는 허무주의과 비관주의가 팽배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러지 말아야합니다.
오늘도 우리가 사도바울처럼 어떤 최악의 상황에 있더라도 그 속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우리 앞이 아무리 상황이 깜깜하고 모든 것이 다 끝이 났다고 하더라도 그 속에서도 솟아날 구멍이 있습니다.
저는 인생을 바라볼 때도 항상 이런 자세로 살아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인생을 먹지에 비유를 합니다. 옛날에 글을 베겨 쓰는 먹지가 있습니다. 그 먹지를 불빛에 비추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전혀 틈이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그 먹지를 태양빛에 더 자세히 비추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렇게 깜깜하게 보이는 그 먹지 속에서도 빛이 보입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이 모든 것이 다 깜깜한 먹지와 같다고 느껴지십니까? 그래서 아무리 봐도 희망의 빛이 보이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의 의의 태양이신 하나님 앞에 나와서 그 하나님의 시각에서--하나님의 말씀의 불빛에서 다시 여러분들의 인생과 지금의 상황을 비추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먹지와 같은 내 인생에도 반드시 희망의 빛이 보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다 깜깜해도 그 희망의 빛을 바라 볼 때 하나님께 우리에게 주신 삶을 최선을 다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바울은 지금 우리와 도무지 비교할 수 없는 최악의 상황에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바울처럼 이런 일들을 당했다면 우리는 낙담하고 원망하면서 주저앉아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그가 당했던 어렵고 힘든 일들도 믿음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1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2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진보)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지금 바울이 당한 일이 무엇입니까?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로마의 감옥에 갇히게 된 일입니다. 이런 상황을 두고 사람들은 어떻게 말하겠습니까? “사도바울은 실패했다. 이제 사도바울은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히게 된 것을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나의 당한 일-즉 복음 때문에 감옥에 갇히게 된 일-“불행이다--실패다”-말하지 않고-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진보라는 말은 옛날에 로마군들이 전쟁을 할 때 보병이 들어가기 전에 포병이 집중 포격을 해서 보병이 들어갈 길을 열어놓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지금 바울이 감옥에 갇히게 된 것은 복음의 진보가 아니라 장애라고 느껴집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그가 지금 당한 그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즉 더 널리 하나님의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은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1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3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시위대 안과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여기서 보면 나의 매임-즉 감옥에 갇힘이 온 시위대안과 기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다고 합니다. 로마시민인 바울이 감옥에 갇힐 때 그를 지키고 있던 시위대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로마의 왕족이나 귀족의 자녀들이었습니다. 그들이 하루 24시간 6시간씩 교대로 바울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복음을 전할 기회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를 지키던 시위대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래서 빌4장 22절에 보면 바울이 인사를 할 때 가이사의 집-즉 황제의 집-에 있는 몇 사람들에게도 인사를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바울이 감옥에 갇히게 된 것이 시위대 중에서 황제나 귀족의 집사람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게 된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가 당한 일이 복음의 진보가 되었습니다.
//또 14절에 보면 바울이 감옥에도 담대히 복음을 전하는 것을 보고 용기를 잃었던 빌립보교인들이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14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으로 말미암아 주 안에서 신뢰함으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게 되었느니라). 그래서 바울이 감옥에 갇히게 된 것이 복음을 전하는 여러 사람에게 용기를 주게 되었고, 결국 복음의 진보가 되었습니다.
또 바울이 감옥에 갇히게 되었을 때 바울은 에베소서, 빌립보서, 빌레몬서, 골로새서와 같은 주옥같은 글들을 썼습니다. 특별히 이 빌립보서와 에베소서는 너무나 아름답고 놀라운 복음의 진수를 담은 글입니다. 이렇게 바울이 감옥에 갇히게 됨으로 복음이 위축된 것이 아니라 복음이 더 널리 전하여지게 된 기회가 되었습니다.
--오늘 이 시간 여러분들은 지금 어떤 일들을 당하고 계십니까? 또 어떤 일들 때문에 힘들어하고 계십니까? 그것이 어떤 일이건 그 일 때문에 절대 낙심하거나 위축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절대 사람보거나 세상보거나 또 자신을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지금 당하고 있는 일들을 통해서 어떻게 하나님의 복음의 진보가 이루어질 것인가? 또 영적인 진보가 이루어질 것인가를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실패하게 하시고 넘어뜨리게도 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완전히 넘어져서 못 일어나게 하시는 법은 절대 없습니다.
시37편23“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의 길을 기뻐하시나니, 24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걸음을 정하시고 인도하시는데도 우리가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자녀는 절대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는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이 우리를 붙들어주셔서 어떻게 해서든 우리에게 살아갈 길을 열어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또 우리가 감당할 시험만을 허락해주십니다(고전10:13) 그 어떤 일을 당해도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우리에게 피할 길을 열어놓으십니다. 그것이 육신적으로 우리가 먹고 살아갈 길도 될 수 있습니다. 또 영적인 진보의 길도 될 수 있습니다. 또 복음의 진보의 길도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절대 낙심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말은 잘못된 말입니다. 아무리 세상의 모든 것이 이 깜깜하고 무너져도 절대 하늘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늘의 하나님을 바라 볼 때 우리에게는 반드시 솟아날 구멍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사도바울이 이렇게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았던 비결이 어디에 있었겠습니까?
1)첫째는 빌립보서 1장 6절에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고 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지금 그가 하고 있는 일들과 빌립보교인들이 하고 있는 그 모든 일들을 절대 그 자신이 시작한 일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이 모든 일들을 하나님이 하신 일들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또 이 모든 일들을 지금도 이루고 계시는 분도 하나님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들을 마지막 날까지 완성하고 이루실 분도 하나님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이 지금 감옥에 있어도 지금도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심을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감옥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일하심을 바라보고 그를 지키던 시위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믿음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내가 힘들고 어렵고, 또 주위에 사람들이 힘들어서 쓰러지면------우리는--하나님조차도 일하지 아니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낙심하여 다 쓰러지고 넘어져도 하나님 한분만이라도 남아서----끝까지 당신의 일들을 진행하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그래서 우리에게 그 어떤 최악의 상황이라도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시기에 우리는 절대 낙심할 수 없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가정에 어렵고 힘들이 일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속에서도 분명히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습니다. 또 지금도 그 상황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최악의 상황에서도 하나님 앞에서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또 개인적으로 어렵고 힘든 일이 있습니까? 절대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모든 일들을 시작하신이가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끝까지 포기하지 마시고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또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절대 이 교회를 사람의 교회로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교회는 목사의 교회도 아니고, 장로의 교회도 아니고, 아니고 집사의 교회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의 교회를 하나님께서 다 책임져주시고 이루어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고, 끝까지 충성하시고,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에 최선을 다 하는 일입니다. 그러면 내가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실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지금도 일하심을 바라볼 때 우리도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2. 또 사도바울이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 수 있었던 두 번째 비결은 사도바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중심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20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지금 사도바울은 물질적으로 아주 어려운 상황에 있습니다. 그를 도와주던 모든 후원교회가 다 끊어졌고 이제 빌립보 교회 밖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만일 사도바울이 물질을 중심으로 살았다면 어떻게 말을 했겠습니까? 내가 이렇게 열심히 살았는데 “나는 왜 이렇게 가난한가? 왜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지 않는가?” 라고 하면서 낙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절대 물질 중심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내가 물질적으로 풍부에 처할 때고 있었고, 지금은 궁핍에 처해있다. 그런데 내가 물질적으로 어떠한 형편에 처하든지 자족하는 비결을 배웠고, 또 예수님한분만으로 만족하며 기뻐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에게 아무 것이 없어도 예수님한분만으로 만족하며 기뻐할 수 있는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또 만일 사도바울은 자신의 자존심을 중심으로 살았다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15-17절에 보면 빌립보교회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사도바울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고 사도바울을 괴롭게 하려는 목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만일 사도바울이 자존심을 중심으로 살았다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아니 너희들이 그럴 수 있느냐--내가 나가면 반드시 너희들을 처단할 것이다”고 하든지, 아니면 감옥 속에서도 그런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하나님 정말 그럴 수 있습니까 정말 속상합니다” 라고 하면서 사람들을 원망하면서 지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어떻게 말합니까?
//어떤 사람들이 나를 괴롭게 하려고 복음을 전해도---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 인해서 기뻐하고 기뻐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18절).
-//사도바울은 누구에게 그 어떤 비난을 들어도--예수님만 증거 되고 나타난다면 기뻐하고 기뻐 할 수 있었습니다.
또 만일 사도바울이 신분을 중심이었다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대 사도인 내가 죄수의 신분이라니 이럴 수 없다” 라고 하면서 감옥에서 풀려나기만 바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어떻게 했습니까? 내가 사도의 신분이냐 죄수의 신분이냐를 따지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사도바울은 자신이 죄수의 신분이라도 그것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하고 기뻐했습니다.
--/교회가 타락하고 세속화 되면 될수록 예수님을 증거하고 나타내는 것보다 직분을 가지는 것이 중심이 되고 목표가 됩니다.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가 이 교회에서 어떤 직분을 가지느냐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마지막 날에 우리가 어떤 직분을 가졌느냐 보다 너희가 과연 그 직분을 가지고 얼마나 예수그리스도를 나타내었느냐를 가지고 판단하실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그가 어떤 신분을 가졌던지 예수님만 증거가 되고 나타나면 그것으로 만족하며 기뻐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최악의 상황에서도 최선의 삶을 살 수 있었던 비결입니다.
------우리도 물질중심이 아니라, 또 내 자존심이 아니라, 또 어떤 자리든 오직 예수그리스도 중심적인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어떤 상황 속에서도 예수님 때문에 낙망하지 않고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3)또 마지막으로 사도바울이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최선을 다할 수 있었던 비결은 사도바울은 그 어떤 일이 있어도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기쁨을 잃어버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이 최악의 상황 속에도 최선을 볼 수 있었던 것은 단순하게 사도바울이 인간적으로 낙관적이고 긍정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사도바울은 그 어떤 일이 있어도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기쁨이 있기에 그 어떤 일이 있어도 낙심하지 않고, 또 그 어떤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빌3:1“ 1 종말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만일 우리가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는 삶을 살지 못한다면 그것은 절대 안전하지 못한 삶이 됩니다. 우리가 주님으로 말미암은 기쁨을 잃어버린다면 죄의 유혹에 빠지기가 더 쉽습니다. 또 만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기쁨을 잃어버린다면 우리는 비관적이되어, 최선의 상황속에서도 최악만을 보면서 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안에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기쁨이 있을 때, 우리는 쓰러저도 절대 완전히 넘어지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예수그릿도로 말미암은 기쁨이 있을때 우리는 그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기쁨이 있을 때 모두가 절망하여 안된다고 해도 우리는 날마다 내게 힘주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습니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으니라”
여기서 말하는 능력이 무엇입니까? 어떤 상황속에서 주안에서 자족하고, 만족하고, 주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우리에게도 제일 필요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주 안에서 있는 이 기쁨이 있으면 우리는 절대 절망하지 않습니다. 사람 때문에 실망하지 않습니다. 상황보고 낙망하지 않습니다. 걸림돌 때문에 주저앉지 않습니다.
--심해어가 어떻게 어두운 바다에서 살 수 있겠습니까? 심해어는 작은 빛도 감지할 수 있는 큰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조그마한 진동도 감지할 수 있는 측선기관이 있습니다. 또 도무지 빛이 없으면 그 자신 안에 가지고 있는 발광체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도 이것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의 상황이 심해처럼 깜깜하고 어두운 상황입니까? 그렇다면 작은 희망의 빛이라고 발견할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눈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또 조그마한 하나님의 임재도 느낄 수 있는 영적인 민감함을 가지기를 바랍니다. 또한 도무지 희망의 빛이 없으면-----내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희망의 빛을 소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세상이 아무리 어두워도--사람들이 아무리 우리에게 실망을 주어도--우리 앞에 모든 것아 다 막혀있는 것 같아도----우리 안에 희망의 빛이신 예수님 때문에 희망이 없는 세상가운데 희망의 빛을 밝혀갈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빛이되시고 기쁨이 되시고 소망이 되시고 생명이 되신 예수그리스로 말미암은 그 어떤 최악의 상황속에서도 최선을 다하여 살아가시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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