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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 신학/스펄전설교

스펄전시편강해(시편9편, 10편)

by 금빛돌 2014. 2. 12.

 

시편 9

[개 요]

주제이 시의 머리말은 다윗의 시, 영장으로 뭇랍벤에 맞춘 노래이다. 이 머리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이것은 윌콕스와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시편을 노래할 때에 따른 곡조를 말할 수도 있고, 당시에는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사용하던 것이지만 이제는 알 수 없는 악기를 말할 수도 있다. 이것은 역대상 15:18에 나오는 것처럼 레위족으로서 노래하는 자인 벤을 말하는지도 모른다. 이 추측이 옳다면 뭇랍벤과 관련된 머리말은 우리에게 특별한 의미는 없고, 단지 다윗이 성전에서 드리는 예배 의식을 질서있게 행하도록 했다는 것만 알려 줄 뿐이다.

이런 머리말에 억지로 의미를 붙여서 이상하게 해석하지 않아도, 여러 학자들의 연구를 참조하면 여러 가지 유익한 교훈들을 받을 수 있다. 이 시는 아들의 죽음에 관한 시이다. 히브리어 성경의 아람어 역본에는 두 진 사이에 나갔던 장군의 죽음에 대해라는 구절이 적혀 있는데, 이는 골리앗이나 다른 블레셋 사람을 가리킬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장수가 죽은 지 수년이 지난 후에 다윗이 여기에 대해 시를 지었다고 생각한다. 이 시를 짓게 된 상황에 대해 수많은 추측들이 있지만, 이 주장이 시의 내용과 일관성이 있어서 설득력 있게 들린다. 이렇게 해석하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악의 대장, 우리 영혼의 원수(6)를 이기신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 시는 승리의 노래이다. 이 시가 악과 투쟁하는 성도들의 믿음을 더욱 강하게 붙들어 주기를 바란다. 또한 소극적이고 마음이 약한 성도들은 이 시에 나오는 정복자, 옷과 다리에 만 왕의 왕, 만 주의 주라고 기록된 그분을 보면서 용기를 얻게 되기를 바란다.

시편의 순서에 대해 보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각 시편이 구성된 순서를 보면 종종 서로 연관이 잘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현재 있는 시편의 순서가 원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진 순서인지, 아니면 에스라와 같은 후기의 편집인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정경 속에 포함시키기로 결정하고 내용과 순서를 모두 조정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다. 여기에 대해 어떤 결론을 내리기 전에, 시편의 순서는 정경이 완성되었던 시기만큼 고대에 이루어졌다는 것을 언급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만일 그렇다면 성령께서는 시편이 현재 배열된 순서를 따라 그대로 우리에게 전해지기를 바라셨다는 것이 명백해진다. 이것을 언급하는 이유는 시 7편의 마지막 절에 이어서 8편이 시작되고, 9편은 8편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

주의 모든 기사를 전하리이다

내가 주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참조. 1:4; 19:7)

지극히 높으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니(9:1, 2).

8편에서는 주의 이름이 아름답다고 찬송했다. 마치 이 노래가 아직도 이스라엘의 노래하는 자의 귓가에 울리는 듯하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주의 이름을 찬송하며 시 9편을 시작한다. 또한 10절에서도 주의 이름을 아는 자가 주를 신뢰한다고 노래하는 것이다.

구성이 시는 노래의 가락이 계속해서 바뀌기 때문에, 시의 구성을 인위적으로 정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구성을 염두에 두면 이 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16절기쁨에 찬 감사의 노래.

712절미래에도 하나님을 신뢰할 것을 계속해서 선포함.

1314절기도로 첫번째 부분을 마침.

1516절과거의 심판에 대한 노래.

1718절미래에 공의가 있을 것에 대한 신뢰를 선포함.

1920절마치는 기도.

이 시를 읽으면서 구세주의 승리를 축하하자.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면 이 얼마나 즐거운 일이겠는가!

[강 해]

1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 주의 모든 기사를 전하리이다

2내가 주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지극히 높으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니

3내 원수들이 물러갈 때에 주의 앞에서 넘어져 망함이니이다

4주께서 나의 의와 송사를 변호하셨으며 보좌에 앉으사 의롭게 심판하셨나이다

5열방을 책하시고 악인을 멸하시며 저희 이름을 영영히 도말하셨나이다

6원수가 끊어져 영영히 멸망하였사오니 주께서 무너뜨린 성읍들을 기억할 수 없나이다

1.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 노래하는 자는 거룩한 결심과 함께 찬양을 시작한다:"주의 모든 기사를 전하리이다." 우리가 원수를 앞에 두고, 원수의 이빨 사이에서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것은 대단한 결심을 요하는 일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침묵하신다고 해도 그분을 찬양하기로 결심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시편 기자는 원수들이 철저하게 멸망당할 것을 본다. 그리고 기쁨 가운데 노래를 부른다. 여호와를 찬양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이 의무를 특권으로 여기고 행하자. 다윗이 오직 여호와만을 찬양한 것에 주의하자. 찬양은 오직 하나님께만 돌려야 한다. 우리가 도움을 받은 자들에게 감사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궁극적으로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내가 전심으로." 마음을 절반만 드리는 것은 온전한 마음이 아니다.

"주의 모든 기사를 전하리이다." 하늘 아버지께서 우리를 어떻게 대하셨는가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데에 참된 찬양이 있다. 이것은 경건한 자가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의 주제이다.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보이신 은혜와 자비를 믿지 않는 사람들과 나누는 것은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는 일이 아니다.

"주의 모든 기사." 하나님께서 베푸신 자비를 한 가지라도 기억하면 다른 수천 가지를 새롭게 기억하게 된다. 은사슬의 고리 하나 하나가 서로 엮어져서 수없이 많은 아름다운 기억들을 불러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영원히 행할 일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사랑은 영원토록 끝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죄인이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기억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 혹은 우리 안에서 행하신 그 모든 일들, 즉 보존, 용서, 회심, 구원, 성화 등과 같은 일들이 놀라운 "기사"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하늘에서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이 은혜는 하늘에 들림을 받는 것만큼이나 우리에게 놀라운 주제가 될 것이다.

2. "내가 주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하나님의 선하심을 찬미하는 자는 기쁨과 즐거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 새들도 기쁨이 넘치는 곡조로 조물주를 높이고, 가축들도 기쁜 소리로 행복감을 표현하고, 물고기들도 기쁨을 이기지 못해서 수면 위로 뛰어오르며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는가? 몰록을 섬기는 자들은 고통으로 소리 지르며 경배하고, 저거노트(Juggernaut)는 사람의 고통과 탄식 소리를 듣기 좋아하지만, 사랑의 여호와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의 거룩하고 명랑한 웃음, 성화된 기쁨을 좋아하신다. 날마다 기뻐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성품을 빛나게 하며, 하나님의 백성들이 입어야 할 아름다운 의복과 같다. 하나님은 기쁨으로 드리는 예물을 좋아하시는데, 이것은 지갑에서 나오는 예물이든 입술에서 나오는 예물이든 마찬가지다.

"지극히 높으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니." 노래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감사를 표현하기에 적합한 것이다. 우리가 찬송을 아무리 많이 불러도 다함이 없고 여호와께서는 우리의 찬송 소리 듣기를 기뻐하신다. 파워는 이렇게 말했다:"선원들은 닻을 내리며 기뻐 외치고, 농부들은 아침에 밭을 갈면서 휘파람을 불고, 우유 짜는 아가씨는 아침에 일을 나가면서 흥겨운 노래를 부르며, 군인들은 친구들을 뒤에 두고 가정으로 돌아오면서 장송곡이 아니라 빠르고 경쾌한 노래를 부른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들은 이처럼 노래를 불러야 한다. 찬양하는 자들에게는 아름답고 열매 맺는 삶이 열린다. 우리 앞에 어렵고 험한 일이 있을 때, 우리는 찬양하면서 이겨 나갈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이 지치고 피곤해져서 우울한 마음을 갖게 되면 이러한 어려움을 감당할 수 없으며, 이것을 이기기 위해서는 두 배나 더 힘을 쏟게 된다. 사울 안에 있던 악한 영이 다윗의 수금 소리를 듣고 잠잠해졌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를 때에 우리 안에 있는 우울한 영이 우리를 떠나게 된다."

3. "내 원수들이······넘어져 망함이니이다." 하나님께서 임하시면 우리의 원수가 아무리 난폭해도 망할 수밖에는 없다. 여호와께서 손을 드시고 그들에게 심판을 내리시면 그들은 철저하게 망할 수밖에 없다. 도망을 쳐도 소용이 없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추적하시는 날, 그들이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지 못한다. 이때에 우리는 다윗처럼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야 한다. 여호와께서 함께하셨기에 원수들을 이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원수를 이기신 대장께서 기뻐 웃으신다면, 이 구세주의 승리와 기쁨을 우리의 승리와 기쁨으로 삼아야 한다. 구세주의 원수가 철저하게 패배한 것을 보고서, 우리는 구세주와 함께 기뻐해야 한다.

4. "주께서 나의 의와 송사를 변호하셨으며." 어떤 사람은 "내가 그것을 지키리라"를 그들의 좌우명으로 삼는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더 좋고 겸손한 좌우명을 가지고 있다:"주께서 지키셨습니다." 하나님과 나의 송사/권리는 믿음으로 하나가 되었다.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는 한, 나는 내 권리를 결코 잃지 않는다.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의 명예를 지키려 한다면, 우리는 오해와 수치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늘 보좌에 계시고 우리의 마음을 아시는 그분은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고, 우리를 무지하고 무정한 자의 박해에 맡기지 않으실 것이다. 이것을 생각하면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된다.

5. "열방을 책하시고 악인을 멸하시며." 하나님은 멸망시키기 전에 꾸짖으신다. 그러나 그분이 악인에게 심판을 시작하시면 그들을 산산조각을 내기까지 하시며, 악취 나는 찌꺼기를 버리는 것처럼 그들의 이름을 사람들의 기억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하신다. 15절에서 ""라는 말이 얼마나 많이 나타나는지 헤아려 보라. 맑은 날, 제단에서 화제를 드리면 향기로운 연기가 하나님께 올라가듯, 감사가 여호와께 올라가는 것을 보여준다. 나를 구원하셨고, 지금도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께 내 영혼이 감사를 올리는 것이다.

6. "원수가 끊어져 영영히 멸망하였사오니." 이제 시편 기자는 원수가 도말된 것에 대해 뛸 듯이 기뻐한다. 엎드러진 원수를 굽어보면서 그가 뽐내며 자랑하던 힘을 비웃는 것이다. 뽐내며 교만하던 원수들의 입에서 노래를 뽑아 내 그 노래로 원수들을 비웃는다. 의인을 핍박하며 놀리던 원수에게 "네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라고 놀리며, 사망과 무덤에게 "네 승리가 어디 있느냐?"라고 비웃는다. 이제 황폐케 하던 자가 황폐하게 되었으며, 다른 사람을 포로로 잡아가던 자가 이제는 자신이 포로로 끌려간다. 예루살렘의 딸들은 그들의 왕을 맞이하라. 탬버린과 하프로 노래하며 왕께 경배를 드릴지어다.

7여호와께서 영영히 앉으심이여 심판을 위하여 보좌를 예비하셨도다

8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심이여 정직으로 만민에게 판단을 행하시리로다

9여호와는 또 압제를 당하는 자의 산성이시요 환난 때의 산성이시로다

10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

11너희는 시온에 거하신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 행사를 백성 중에 선포할지어다

12피 흘림을 심문하시는 이가 저희를 기억하심이여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을 잊지 아니하시도다

지나간 과거를 돌이켜 보면, 미래가 두렵지 않다. 우리를 구원하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지금도 능력의 보좌에 계시니, 우리는 그분을 의지하고 언제든지 평안한 마음으로 기뻐하며 노래할 수 있다.

7. "여호와께서 영영히 앉으심이여." 여호와께서 영원히 계시고, 그분이 영원히 통치하신다. 이것이 우리가 기뻐하는 이유이다. 원수는 결국 '영원히 멸망당할 것'이며, 하나님과 그분의 보좌는 '영원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영원히 주권자가 되신다는 것은 우리에게 한없는 위로가 된다.

"심판을 위하여 보좌를 예비하셨도다." 심판을 위해 예비한 보좌에서는 하나님의 공의가 속히 이루어질 것이다. 하늘의 법정에서는 원고들이 판결을 기다리느라고 지치는 일이 없다. 하늘에 계신 왕의 법정에서는 어느 때고 재판이 열린다. 수천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법정에 몰려와도, 재판장께서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불평할 일이 없다. 그분은 어느 때고 사람들의 진술을 들으시고 공평하게 판결하신다.

8.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심이여." 사람들의 법정이야 어찌 되었든지, 하늘 보좌에서는 공의로 심판한다. 편견이나 특혜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공의로 판단하시는 위대한 왕의 법정에 설 것을 생각하라. 죄를 짓고자 유혹을 받을 때에 삼가게 될 것이고, 압제나 비방을 받을 때는 위로가 될 것이다.

9. "압제를 당하는 자의 산성." 마지막 심판의 날에 악인에게 어떤 기업도 허락지 않으실 그분이 이 땅에서 고난을 받는 의인에게는 보호와 산성이 되신다. 우리에게는 여러 가지의 압제가 있다. 우리는 사람과 사탄에게서 모두 압제를 당한다. 그리고 이 모든 압제 가운데서도 여호와께서는 우리에게 피난처를 제공하신다. 율법 시대에도 도피성이 있었다. 복음의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도피성이 되신다. 바다에 태풍이 일면 배가 항구를 찾아가듯,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압제를 받게 되면 공의롭고 은혜로우신 하나님의 날개 아래 피한다. 그분은 난공불락의 산성이시며, 지옥의 군대가 폭풍으로도 공격할 수 없다. 그리고 높은 곳에 있는 믿음의 사람들은 저 아래에 있는 원수들을 조소하며 바라볼 것이다.

10.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하나님에 대한 무지는 최악의 것이며, 하나님의 이름에 대해 지식을 갖는 것은 최상의 일이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믿음을 갖게 하고,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다. ! 하나님의 성품을 더 알 수만 있다면! 하나님을 아는 자들은 그 빛 가운데서 불신의 악심을 품을 수 없다. 불신이란 마치 밤에만 다니는 올빼미처럼, 위대하고 은혜로운 하나님의 빛 앞에서 사라져 버린다. 이 구절을 문자 그대로 이해한다면, 하나님의 이름에는 영광스럽고 충만한 확신이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설교 힌트'를 보도록 하라. 하나님의 이름을 안다는 것은 또한 하나님의 성품을 체험적으로 안다는 것을 말한다. 이 체험은 영혼의 닻 같아서 시련과 고난의 시간에도 영혼으로 방황하지 않게 한다.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 여호와께서 잠시 동안 그분의 백성들에게서 얼굴을 숨기실 때도 있으나 철저하게, 최종적으로, 진심으로, 분노 가운데서 그분을 찾는 자를 버리신 것은 아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여기서 위로를 받으라. 하나님을 만난 자는 더욱 즐거워하라. 하나님은 그분을 찾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그분의 성실하심을 알게 하신다.

참회하는 자들의 소망이요

겸손한 자들의 기쁨이시네

넘어진 자에게 당신은 얼마나 친절하신지

당신을 찾는 자에게 또 얼마나 좋으신지.

당신을 찾는 자의 기쁨을

말과 글로도 다 표현할 수 없네

예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그분의 사랑을 받은 자만이 안다네.

11. "너희는 시온에 거하신 여호와를 찬송하며." 시편 기자는 감사하는 마음이 가득했다. 그가 하나님을 찬양하겠다고 선언했던 것처럼(12)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권고한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마음은 전염성이 있다. 그래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들은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움직여서 그와 함께 찬송을 드리게 하기까지는 만족함이 없다.

"그 행사를 백성 중에 선포할지어다." 여호와를 영화롭게 하기 위해 찬송하는 것과 말씀을 선포하는 것을 하나로 묶어 놓았다. 복음 사역의 부흥 운동이 일어나는 곳마다 사람들이 찬송을 부르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말씀 중심으로 종교 개혁을 이루었던 루터는 많은 시와 찬미를 썼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의 시와 찬미를 불렀다. 현대의 부흥 운동을 일으켰던 존 웨슬리(John Wesley), 휘트필드(Whitfield), 찰스 웨슬리(Charles Wesley), 케닉 베리지(Cennick Berridge), 토플레디(Toplady), 하트(Hart), 뉴턴(Newton), 그리고 그 외의 많은 사람들도 찬송을 통해 영성을 회복했다. 하나님께서 진리를 선포하시며 나타나시는 은혜스런 봄이 되면, 찬양하는 새들이 노래를 부르는 모습과 너무도 잘 어울린다. 형제들이여, 노래하라. 그리고 말씀을 선포하라. 그리하면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거하신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우리가 시온에 오르면서 기억할 것이 있다. 여호와께서는 성도들 중에 거하시고, 그분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특별한 경배를 받으셔야 한다는 것이다.

12. "피 흘림을 심문하시는 이가 저희를 기억하심이여." 압제하는 자의 피에 대해 하나님께서 심문하실 때, 하나님은 맨 먼저 순교자를 기억하신다. 그분은 당신의 택하신 자들의 신원을 들어주신다. 살아 있는 성도들의 탄원도 들어주신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비난하는 것들에 대해서 결백하다는 증거를 받을 것이고, 하나님께서 가장 격렬한 심판을 행하시는 도중에도 파멸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살륙하는 자가 여호와의 원수들을 치도록 허락을 받기 전에, 먹을 가진 자들은 성도들이 해를 받지 않도록 표를 할 것이다. 겸손한 성도들이 부르짖는 소리는 천둥처럼 울리는 공의의 소리나 저주받은 자의 비명에 묻혀 버리지 않을 것이다.

13여호와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나를 사망의 문에서 일으키시는 주여 미워하는 자에게 받는 나의 곤고를 보소서

14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찬송을 다 전할 것이요 딸 같은 시온의 문에서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지난 과거에 있었던 하나님의 구원을 기억하고, 미래에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실 것을 확신한 성도는 이제 현재 당하는 고난 중에서 자비의 보좌 앞에 나아가 필요한 것을 간구하고 있다. 그는 모든 시간을 찬양과 기도에 전념하고 있다. 어떻게 이보다 더 귀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겠는가?

13. "여호와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그가 드리는 첫번째 기도는 모든 사람이 어떤 경우에 드려도 적합한 기도이다. 이 기도에는 겸손한 마음이 나타나 있고, 자신을 알고 찾아가야 할 분을 찾아가서 드리는 기도이며, 그분의 성품에 근거하여 드리는 기도이다. 이 기도에는 기도의 핵심과 골수가 들어 있다. 그래서 이 기도를 작은 "기도책"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 기도는 작은 것에 많은 것이 들어 있으며, 천사의 칼처럼 위력이 있다. 이 기도의 사다리는 짧은 것처럼 보이지만, 땅에서 하늘까지 다다른다.

"나를 사망의 문에서 일으키시는 주여." 지극히 높으신 분에게 이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찬사인가! 얼마나 영광스러운 구원인가! 우리가 병들었을 때나 죄 가운데 빠졌을 때, 절망 가운데 있을 때나 유혹에 빠졌을 때, 우리는 지극히 깊은 곳으로 떨어졌고 그 깊은 곳에서 사슬에 묶일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우리 밑에는 영원하신 팔이 있었고, 그 팔에 안겨 우리는 하늘의 문에 이르도록 올려졌다. 트랩은 이처럼 말했다:"그분의 팔은 죽은 자를 들어올리기 위한 팔이며, 자신의 무덤을 이야기하는 자들을 구원하는 팔이다."

14.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찬송을 다 전할 것이요." 다윗이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목적을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그는 하나님의 찬송을 전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한다. 성도들은 자신만을 바라보는 이기적인 존재가 아니다. 그들이 자비의 다이아몬드를 바라는 것은, 이 다이아몬드가 빛을 발하고 반짝거려서 이처럼 고귀한 보석을 자신의 사랑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그분을 경배케 하기 위한 것이다.

"딸 같은 시온의 문." 사망의 문과 새 예루살렘의 문은 지극히 대조적이다. 우리가 어떤 곳에서 어떤 상태로 구원받았는지를 기억하고 마음을 다하여 즐거운 노래를 가장 높은 목소리로 하나님께 올려보내자. 이런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그분의 자비를 간구하는 기도를 더욱 간절히, 그리고 아픈 마음으로 드리자. 다윗이 "주의 찬송을 다 전할 것이요"라고 했을 때, 그는 깊은 곳, 즉 사망의 문에 떨어졌던 것과 높은 곳, 즉 시온의 문으로 구원받은 은혜를 높이겠다는 것이다. 우리 찬송가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 구세주의 사랑, 그 깊이와 넓이!

예수여,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요?

당신의 자비는 한없이 높고,

측량할 수 없는 깊이를 내가 체험했네.

여기에서 이 시의 첫번째 부분이 끝난다. 잠시 쉬면서 느끼는 바는 우리가 이 시를 겉만 핥았을 뿐이요, 그 깊이를 파헤치지 못했다는 것이다. 구절 구절마다 교훈이 가득하다. 성령께서 독자들을 축복하셔서 이 시를 읽을 때마다 새로운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되기를 바란다.

15열방은 자기가 판 웅덩이에 빠짐이여 그 숨긴 그물에 자기 발이 걸렸도다

16여호와께서 자기를 알게 하사 심판을 행하셨음이여 악인은 그 손으로 행한 일에 스스로 얽혔도다(힉가욘, 셀라)

15. "열방은 자기가 판 웅덩이에 빠짐이여." 여호와께서는 그분의 원수들을 심판하시되, 철저히 심판하신다. 이 무서운 심판의 장면을 보면서 우리는 정말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것은 우리 말로 번역되지 않은 두 개의 히브리어 단어가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힉가욘, 셀라."

16. "힉가욘, 셀라." 묵상하며, 잠시 멈추라. 생각하며, 악기를 연주하라.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본문의 내용에 부합하는 엄숙한 마음을 갖도록 하자. 우리 모두 겸손한 마음을 갖자.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배우자.

첫째, 하나님의 성품은 죄에 대한 심판을 요구하신다. "여호와께서 자기를 알게 하사 심판을 행하셨음이여." 이 구절에는 그분의 거룩하심, 그리고 죄를 혐오하심이 잘 나타나 있다. 세상의 군주가 악을 좋아했다면, 그의 악이 심판의 날에 드러날 것이다. 반면에 공의롭게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모든 사람들이 보게 되리라. 우리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한, 그분은 범죄자를 용납하지 않으신다. 오직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는 한 가지 예외가 있을 뿐이다. 이는 그분도 의로우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도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다.

둘째, 그분께서 심판하시는 방법은 지혜롭고, 아무도 시비를 걸 수 없이 공의롭다. 그분은 악인이 스스로 자신을 심판하게 하신다. "열방은 자기가 판 웅덩이에 빠짐이여." 교활한 사냥꾼처럼 그들은 경건한 자가 빠지도록 함정을 쳐 놓았으나, 그 함정에 자신들이 빠지고 말았다. 잡으려고 했던 자는 그들의 덫을 벗어났으나, 악인이 만든 함정의 효과는 대단했다. 그 함정은 그것을 만든 자를 덫에 걸리게 했던 것이다. 다른 사람들을 박해하고 압제하는 자들은 자신들의 악의에 찬 계획에 희생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주정뱅이들이 자신을 죽이는 법이다. 탕자는 거렁뱅이가 되게 마련이다." 다투기를 좋아하는 자는 자신을 황폐하게 한다. 사악한 자는 맹렬한 질병에 먹힌다. 질투하는 자는 자신의 마음을 먹어 치운다. 하나님을 저주하는 자는 자신의 영혼을 저주하는 것이다. 이처럼 사람들은 자신이 받는 심판에서 자신의 죄를 발견하는 것이다. 그들은 죄의 씨를 심고, 그 결과 저주의 무르익은 열매를 거둔다.

17악인이 음부로 돌아감이여 하나님을 잊어버린 모든 열방이 그리하리로다

18궁핍한 자가 항상 잊어버림을 보지 아니함이여 가난한 자가 영영히 실망치 아니하리로다

17. "악인이 음부로 돌아감이여." 악인을 심판하고 의인을 보존하는 하나님의 공의는 항상 변함이 없다. 그러므로 미래에도 인과응보의 법칙은 틀림없이 이루어질 것이다. 17절의 말씀은 얼마나 엄숙한 진리를 가르치고 있는지! 하나님을 잊어버린 사람들에 대한 경고는 특히 그러하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모든 열방이 그리하리로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나 도덕적인 사람, 기도하지 않으나 정직한 사람, 하나님을 믿지 않으나 은혜를 베푸는 사람, 아직 회심하지 않았으나 친절한 사람, 이들은 마귀와 그의 부리는 영들을 위해 준비한 지옥에서 공공연하게 악을 행하던 자들과 함께 지내게 될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세상에는 많이 있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자들이 불경스럽고 방탕한 자들보다 많다. 히브리어 성경의 강력한 표현을 따라 말한다면, 지옥 맨 밑바닥에 이들이 모두 곤두박질하며 떨어질 것이다. 잊어버린다는 것은 작은 죄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이렇게 살다가 죽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가 임하게 한다.

18. "궁핍한 자가 항상 잊어버림을 보지 아니함이여." 하나님께서는 변함없이 공의를 행하시는 것처럼, 또한 자비를 행하신다. 궁핍한 영혼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잊어버리지 않았나 하고 두려워한다. 이런 염려로 슬퍼했다면, 이제 즐거워하라. 하나님은 결코 그들을 잊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사탄은 가난하여 떠는 자들에게 그들의 소망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가 영영히 실망치 아니하리로다"라고 약속하셨다. "여호와의 백성은 겸손한 자들이며, 고난을 받고, 자신의 것을 빼앗기고,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는 자들이다. 그래서 하나님께 매일 나아오고, 그분께 매일 간구하며, 약속된 것을 얻고자 하는 소망 가운데서 살아가는 자들이다." 이런 자들은 인내하며 기다려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기다림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19여호와여 일어나사 인생으로 승리를 얻지 못하게 하시며 열방으로 주의 목전에 심판을 받게 하소서

20여호와여 저희로 두렵게 하시며 열방으로 자기는 인생뿐인 줄 알게 하소서(셀라)

19. "여호와여 일어나사." 기도는 성도들이 영적 전쟁을 수행하는 무기이다. 전투가 너무 치열하고 우리가 도저히 이길 수 없을 때면, 우리는 든든한 우군에게 구조를 요청한다. 우군은 우리가 믿음으로 "여호와여, 일어나소서!"라고 부르짖으며 신호를 보낼 때까지 매복하여 숨어 있다. 우리가 전투에서 완패를 당했다 해도, 전능하신 자가 자리를 떨치고 일어나면 곧 승리할 수 있다.

"인생으로 승리를 얻지 못하게 하시며." 하나님은 부르짖는 기도를 기뻐하신다. 그리고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며 하나님을 멸시하던 자들을 용서하지 않으시고, 일어나셔서 자신의 영광을 취하는 자들을 심판하신다. 하나님의 목전에서 악인은 심판을 당하고, 은혜의 기간 동안 회개의 눈물을 보이지 않았던 자들은 하나님의 자비를 받지 못할 것이다.

20. "열방으로 자기는 인생뿐인 줄 알게 하소서." 사람들은 아무리 교만해진다 해도 자신이 인간이라는 것을 부정할 정도로 허황되지는 않을 것이다. 따라서 이 기도는 오직 소수의 교만한 사람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왕관을 쓴 자들도 결국에는 인생으로 죽는다. 학식이 많은 자들도 결국은 인생들이다. 세상을 정복한 용맹스런 장군들도 인생뿐인 자신의 존재를 더 이상 높이지 못한다. 크로수스(Crosus)의 부, 솔로몬의 지혜, 알렉산더의 권세, 데모스테네스(Demosthenes)의 유창한 언변, 이것들을 모두 모아서 한 사람에게 준다고 해도 그는 사람에 불과한 존재이다. 우리는 이것을 기억하자. 그래서 본문에 나온 자처럼 여호와께서 두렵게 하시는 자가 되지 말자.

이 시를 마치기 전에 구세주의 승리의 노래로 이 시를 다시 읽어 보라. 그분이 승리를 얻고 이 영광을 아버지의 발 아래 가져오는 것을 상상해 보라. 영혼의 유익이 있을 것이다. 그분의 기쁨에 동참하여 우리도 기뻐하자. 우리의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

[주해와 설명들]

9편 전체. 이 노래는 우리를 변호하시며 중보자 되신 그리스도의 언어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분은 "교회 중에 거하시면서 하나님께 감사하시고" 우리의 평화를 위협하는 모든 원수들에 대해 최후의 승리를 거두실 것을 우리가 믿음으로 바라보도록 가르치시며, 그분의 거룩한 산 시온에서 왕으로 다스리실 것을 말씀하신다. 4절에 나오는 원수들에 대한 승리는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된 것을 가리키고, 마침내 재판정에 앉으신 의로우신 심판주께서 베푸실 것임을 나타낸다. 이것은 전능자의 보좌에서 행하신 것은 바로 다른 분이 아니라 멜기세덱의 입술에서 시작된 것임을 확실히 밝힌다. 존 프라이, B.A.(1842).

1.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 술잔의 향기로 그 안에 무슨 술이 담겨 있는지 알 수 있듯이, 우리의 입술은 우리의 마음으로 새롭게 느끼는 하나님의 자비를 향기롭게 뿜어 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비의 그릇이라고 불리우기 때문이다. 윌리엄 카우퍼(1612).

1.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 주의 모든 기사를 전하리이다." "전심으로"라는 말은 시편 기자를 구원하신 그 구원이 위대하다는 것을 가리킨다. 또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입술로만 노래하는 천박한 자의 찬양과는 구별된 찬양이다. 어떤 사람들은 절반의 마음만으로 찬양한다. 말로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셨다고 하면서도 속으로는 자신이 스스로 구원한 것으로 간주하는데 이 시편 기자는 전심으로 하나님께 찬양을 돌린다.

"주의 모든 기사." 이것은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총의 표증이다. 시편 기자는 그분이 보여주신 모든 기사들이 위대한 일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사람들이 이것을 인정할 때에 여호와께서는 그들이 전심으로 드리는 찬양을 받으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격하시키는 자들은 반쪽 마음으로 찬양을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 곳은 사람의 마음이며, 입은 그 도구에 불과한 것이다. 헹스텐버그.

1. "주의 모든 기사를 전하리이다." 우리가 여호와께로서 특별히 좋은 것을 받았을 때는 기회 있는 대로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 좋다. 여인이 열 개의 은전 중에서 하나를 잃었다가 다시 찾았을 때, 그녀는 이웃과 친구들을 부르고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았노라"(15:9)고 소리쳤다. 우리도 이와 같이 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친구와 친척들을 불러서 우리가 이런 저런 축복들을 받았는데, 이것들은 모두 하나님의 손에서 받은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왜 우리는 이렇게 하지 않는 것인가? 그것들을 하나님께로서 받았다는 것에 의혹이 있어서인가, 아니면 그 말을 듣고서 사람들이 비웃을 것을 의식하고 그들 앞에서 부끄러워하는 것인가? 하나님께서 행하신 놀라우신 일들을 그의 백성들만큼 아는 자들이 어디 있는가? 하나님의 백성들이 침묵한다면, 세상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어떻게 알겠는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그분이 행하신 것들에 대해 이미 알고 느끼는 바를 사람들에게 알리자.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분이 행하신 것들을 분명히 말하자. 하나님께 찬양을 돌릴 일들이 우리에게 일어나고, 그것을 말할 기회가 있다는 것을 기뻐하자.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자를 하나님은 또한 존중히 여기신다. 그분이 행하신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기를 원한다면, 그분은 또한 우리에게 할 말이 충분하도록 선한 일을 베푸실 것이다. 파워, 'I Wills' of the Psalms.

1, 2.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 시편 기자는 홍수처럼 쏟아지는 지극한 애정과 환희 가운데 "감사하오며", "전하리이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찬송하리니"라고 말한다. 그는 단순히 "감사하오며"라고 말하지 않고 "전심으로" 감사하겠다고 했다. 그는 주의 ""이라고 하지 않고 주의 "기사"라고 했으며, 또한 "모든" 기사라고 했다. 이처럼 그의 영은, 어머니 뱃속에서 성령이 충만하여 뛰놀았던 요한처럼, 자신을 위해 위대한 일을 행하시고 그 모든 기사를 행하신 구세주 하나님을 기뻐하며 즐거워한다. 이러한 표현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기사를 노래하겠다는 이 시의 주제가 잘 나타나 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 왜 놀라운가? 그분은 아무것도 아닌 자들을 사용하셔서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을 돌이키시고, 세상에 대해서는 죽은 자요 잘 알려져 있지는 않으나 믿음이 있는 사람들을 사용하여 세상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영광 가운데 사는 자들을 겸손하게 하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이러한 일들을 이루시기 위해 어떠한 군대나 무기도 사용하지 않고, 단지 십자가의 보혈만으로 이루신다. 그러나 그가 "모든" 기사를 전한다고 했는데, 이것은 욥기에 나오는 "측량할 수 없는 큰 일을, 셀 수 없는 기이한 일을 행하시느니라"(9:10)는 구절과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 누가 하나님께서 행하신 모든 기사를 보일 수 있단 말인가? 그러므로 우리는 시편 기자가 넘치는 감정으로 이렇게 표현했다고 말할 수 있다:"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6:6). 그는 하나님의 기사를 전하고자 하는 욕망으로 가득 차서, 실제로는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의 "모든" 기사를 전하고자 소원하는 것이다. 이처럼 사랑에는 어떤 제한도, 끝도 없는 것이다. 바울은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7)고 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과 영혼을 바라보시기에, 사랑은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또 모든 것을 행하는 것이다. 마르틴 루터.

3. "내 원수들이 물러갈 때에." 이 구절은 원수들이 돌아섰고, 패배를 당했으며, 도망갔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것을 우리 성경의 번역처럼 현재 시제로 번역하면 적합하지 않다. 그렇게 하면 일관성이 없어지고, 뜻이 애매해진다. 그래서 에인즈워스는 이것을 "내 원수들이 물러갔을 때에"라고 과거 시제로 번역했다.

"주의 앞에서." 이것은 주의 분노를 당한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임재나 하나님의 얼굴은 그분을 섬기고 경외하는 자에게는 은총을 나타내고, 그분을 대적하는 악한 자에게는 그분의 분노를 뜻하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얼굴은 행악하는 자를 대하사 저희의 자취를 땅에서 끊으려 하시는도다"(34:16). 부스로이드(Boothroyd, 1824).

3. "주의 앞에서 넘어져 망함이니이다." 원수들이 행진 가운데 기진하거나 전투 중에 부상을 입거나 도망가다가 우연히 넘어져서 다리를 절게 되고,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되며, 그래서 엎드러지고, 뒤에서 추격해 오는 자들에게 붙잡히고, 모두 넘어져서 망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헨리 해먼드.

5. "열방을 책하시고." 어거스틴은 이 구절을 1절에 나오는 "주의 모든 기사"와 연결시키며 영적으로 해석했다. 영적 원수인 마귀를 물러가게 하는 것처럼 놀라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예수께서도 "사탄아, 내 뒤로 물러서라"고 하지 않으셨는가? 또한 우리가 새 사람을 입기 위해 벗어 버린 옛 사람이 물러가는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겠는가? 존 메이어.

8.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심이여." 이 심판이 시작되면, 눈물을 흘려도 아무 소용이 없으며, 기도를 올려도 듣지 않으시며, 어떤 약속도 받지 않으시고, 회개해도 이미 늦었다. 세상의 부도, 존귀한 이름도, 왕권도, 면류관도 아무 쓸모가 없다. 이때에는 죄에 대한 심문은 철저하여 회개하지 않았던 것은 어떤 사소한 생각이라도, 잘못 내뱉은 말도 그대로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농담이 아니고 진정으로 이렇게 말씀하신다:"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12:36). !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마치 보지도 못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무나 돌로 만들어진 우상을 섬기는 자처럼 즐거워하며, 그리고 얼마나 탐욕스럽게 죄를 짓는가! 그러나 그날이 오면 이들은 놀라고, 부끄러워하고, 잠잠히 침묵할 것이다! 너의 환희와 웃음의 날이 끝나면, 그대는 영원한 암흑 가운데 던져지리라. 그리고 즐기던 쾌락 대신 영원한 고통을 당하게 되리라. 토머스 타임.

8.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심이여." 바울은 이 시편이 기록된 후, 천 년의 세월이 흘러서 아덴의 사람들에게 심판의 날에 대해 외치게 되었다. 그러나 심판의 날에 대한 교리를 가르치는 데 이 구절보다 더 적합한 구절을 찾지 못했다. 윌리엄 플러머.

8.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심이여." 죄의식을 해결하지 못한 자들은 이 심판의 날을 견딜 수 없다. 양을 붙잡으면, 양은 울지 않는다. 그래서 원하는 대로 붙잡아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양은 여기에 순복할 것이다. 그러나 돼지를 붙잡으면, 돼지는 도살당하기 전에는 붙잡힌 적이 없으므로 꽥꽥거리며 울어 댈 것이다. 이처럼 죄의식을 가진 자들은 이날을 견디지 못한다. 그들이 이날에 대해 듣는 것은 자신의 심판과 저주에 대해 듣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이 심판의 날이 없다면, 탐욕스러운 재판관들은 뇌물을 마음껏 거둘 것이고, 교활한 법률가들도 자신의 이익을 챙길 것이며, 고리대금업자는 이익을 두 배나 남길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얻은 재물로는 우리 죄를 대신할 수 없고, 재판관은 자신이 받은 뇌물이 어찌된 것인지 해명해야 할 것이며, 돈을 가진 자들은 그 돈을 어떻게 벌었는지 설명해야 할 것이며, 모든 사람들에게 공정한 심판이 있을 것이다. 그때에는 죄인들은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만 결코 죽지는 않을 것이며, 영원히 불 가운데 있지만 결코 소멸되지는 않을 것이다. 헨리 스미스.

9. "여호와는 또 압제를 당하는 자의 산성이시요 환난 때의 산성이시로다." 이집트 사람들은 벌레에 물려 잠을 이룰 수 없을 때에는 높은 곳에 있는 탑으로 올라가서 잠을 잔다고 한다. 그러면 벌레들은 높이 날 수가 없기 때문에 그들은 무는 벌레들로부터 자유롭게 된다고 한다. 우리도 염려와 두려움으로 물릴 때면, 하나님의 산성으로 도망하여 그분의 도우심을 확신하는 가운데 평안히 쉬자. 존 트랩.

10.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믿음이란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은총으로 주어진 지성이다. 믿음이 없는 지식은 있을 수 있지만, 지식이 없는 믿음이란 있을 수 없다. 지식은 믿음에 앞서서 횃불을 밝혀야 한다.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딤후 1: 12). 바울이 회심할 때에 빛이 하늘로서 그의 주위를 비추었듯이(9:3), 믿음이 생기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먼저 사람들이 이해하도록 빛을 비추신다. 맹목적인 믿음은 죽은 믿음처럼 나쁜 것이다. 보지 못하는 눈을 좋다고 말한다면, 지식 없는 믿음도 좋다고 할 수 있다. 무지한 가운데 보이는 열심은 저주를 받는다. 무지 가운데서도 종교를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던 로마 교회는 저주를 받은 것이다. 그 결과, 알지 못하는 신에게 제단을 쌓게 된다. 그들은 무지는 헌신의 어머니라고 했다. 그러나 지식이 있을 때 사랑과 헌신이 따르는 것이다. 믿음에는 지식이 따라야 한다. 그래서 성경은 때로 믿음을 지식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하기도 한다:"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53:11). 토머스 왓슨.

10.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 불신의 어머니는 하나님과 그분의 성실하심, 자비, 그리고 능력에 대한 무지이다. 여호와를 아는 자는 여호와를 의지한다. 바울도, 아브라함도, 사라도 지식을 따른 믿음의 사람들이었다.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딤후 1:12).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10:23; 참조. 11:11).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4:21). 여호와께서 값없이 약속하신 것은 확실한 것이고, 그분의 계명은 옳고 선하며, 그분의 상은 수천의 금이나 은보다 더 값진 것이다. , 내 영혼아! 그러므로 여호와를 의뢰하고, 그분을 따르라!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는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약속하셨다. 그분은 당신이 생각할 수도 없는 그것을 약속하셨다. 그분은 약속하신 것보다 늘 더 많은 것을 행하셨다. 그분은 악인에게도 선하게 대하시고 복을 내려 주시는 분이시다. 당신이 그분의 일을 하니, 그분은 결단코 당신을 축복하시리라. 당신에게는 영광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다. 그분의 말씀을 붙잡으라. 결코 그 말씀에서 떨어지지 말라. 하나님께서 당신을 죽이려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분의 약속을 믿고 안식하라. 당신의 육체가 욕망을 탐하고, 세상이 당신을 유혹하고, 마귀가 아첨과 위협으로 당신을 시험한다 해도, 그분의 약속 위에서 안식하라. 존 볼(John Ball, 1632).

10.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하나님의 아름다운 성품을 아는 자, 그의 백성을 향하신 그 고귀한 손길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어떤 사람을 알기까지는 결코 그를 신뢰하지 않는다. 우리는 악한 사람을 결코 신뢰할 수 없다. 그러나 여호와는 우리가 신뢰할 만한 분이시다. 사람들은 그분께 기름을 붓고, 그분을 사랑하고 경외하며, 그분 안에서 즐거워하고 안식을 누린다. 존 트랩.

12. "피 흘림을 심문하시는 이가 저희를 기억하심이여."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린 것에 대해 하나님께서 심문하시는 때가 있다. "심문하시는"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다라쉬'에서 유래한 "도레쉬"(vrd)인데 단순히 찾아내는 것을 말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열심히 묻고 찾는 것을 말한다. !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박해하고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린 자들에 대해 철저하게 조사하시고 심문하실 때가 올 것이다. 그때가 되면, 박해자들과 폭군들은 물이 땅에 쏟아지듯 쏟아질 것이다. 스페인의 비밀 종교 재판소에서 은밀하고 철저하게 열심을 다해 조사를 했던 것보다 더욱 철저하게, 엄격하고 엄중하게 피 흘린 자들에 대한 심문이 있을 것이다. , 박해자들이여! 하나님께서 후퍼(Hooper), 브래드퍼드(Bradford), 테일러(Taylor), 리들리(Ridley) 등과 같은 순교자들의 피를 흘린 데에 대해 심문하시는 때가 있을 것이다. 사역자들의 입을 틀어막고 그 직책을 빼앗은 자들, 그리스도의 영광을 선포하고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빛을 비추던 사람들을 투옥하고 추방했던 자들에 대해 하나님께서 심문하실 때가 이를 것이다. 여호와의 종들을 벌주던 종교 재판소에서 일어났던 모든 행동에 대해 여호와께서 철저히 조사하시고, 당신의 백성을 핍박하던 박해자들을 심판하실 때가 이를 것이다. 토머스 브룩스.

12. "피 흘림을 심문하시는 이가 저희를 기억하심이여." 피가 부르짖는 소리가 있다. 그런데도 "귀를 만드신 자가 듣지 아니하시랴"(94:9).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물로 심판하셨다. 이 땅은 잔혹함으로 가득 찼다. 쏟아진 피가 땅에서 부르짖고, 하늘에서는 이 소리를 들으시고 창문을 열고 이 땅에 분노와 심판을 쏟아부으신다. 에드워드 마베리(Edward Marbury, 1649).

12. "피 흘림을 심문하시는 이가." 하나님께서 난폭한 자의 악행을 용납하시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들이 흘렸던 무죄한 피와 온유하고 겸손한 자를 부당하고 무자비하게 대한 것에 대해 엄격히 보응하시는 때가 이를 것이다. 하나님께서 의인의 부르짖음에 답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들의 부르짖음을 결코 잊지 아니하시고, 박해자들을 심판하실 적합한 때를 기다리신다. 사이먼 패트릭(Symon Patrick, D.D., 16261707).

12. "피 흘림을 심문하시는 이가." 여호와께서는 몸을 떨치고 일어나셔서, 이 피비린내 나는 주홍빛 죄를 처음으로 생각해 냈던 자, 기안했던 자, 그리고 임무를 수행했던 자들을 색출하시고, 그들이 흘린 피에 대해 보수하실 것이다. 윌리엄 그린힐.

12.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을 잊지 아니하시도다." 기도는 파선된 배에게는 항구가 되고, 파도에 휩쓸리는 배에게는 닻이 되며, 다리를 절며 비틀거리는 자에게는 지팡이가, 가난한 자에게는 보석의 광산이, 그리고 병든 자에게는 의원이 되어 건강을 지켜 준다. 기도는 우리로 축복을 받게 하고, 우리를 덮치는 재난의 구름을 흩어 버린다. ! 기도하는 자는 얼마나 복된 자인가! 그는 인간의 재난을 끊임없이 정복하는 정복자요, 행복의 확실한 기초를 세우는 자요, 끝없는 기쁨의 원천이며, 철학의 어머니와도 같다. 진정으로 기도하는 자는 비록 극한 가난 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 부유하고, 결코 무릎을 꿇고 기도하지 않는 자는 비록 모든 나라들을 다스리는 왕권을 가졌다 할지라도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 빈곤한 자이다. 크리소스톰.

14.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찬송을 다 전할 것이요." 하나님의 찬송을 전한다는 것은 열심히 일을 하는 것과도 같다. 어쩌다 생각이 날 때 "하나님,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풍성한 은혜를 지속적으로, 영원히 받는 자로서 적합한 행동이 아니다. 윌리엄 플러머.

15. "열방은 자기가 판 웅덩이에 빠짐이여."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웅덩이를 팠으나, 이것은 그들 자신의 무덤을 판 것과 같다. 그들은 계교를 부리고 악행을 일삼으며 이 땅의 재물을 모았다. !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파멸을 부를 음모를 꾸몄으며, 그들 머리 위에 무너질 바벨탑을 쌓고 있었다. 그들이 아무리 교묘하게 음모를 꾸민다 할지라도 음모가 중의 음모가요, 그 음모를 교묘하게 수행하는 사탄을 이길 수는 없을 것이다. 사탄과 그를 따르는 무리들이 이 땅에서 얻는 영광을 부러워하지 말라. 그들은 이 땅에서 자랑하고자 하지만, 원하는 대로 하게 내버려 두라. 시온의 딸들이 웃으며 그들을 경멸할 때가 다가온다. "딸 시온이여 일어나서 칠지어다"(4:13)라고 말할 때가 올 것이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구원을 받는 때는 그들의 원수들이 파멸에 이르는 때이다. 사울의 죽음과 함께 다윗은 구원을 받았고,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았을 때 애굽 사람들은 물에 빠져 죽음을 당했다. 교회와 교회를 대적하는 자들은 저울의 양팔과도 같다. 한 쪽이 올라가면 다른 한 쪽은 내려간다. 리처드 십스.

1517. 심판을 받는 자들은, 그들이 버리지 못할 잔혹성에 비례하여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들이 심판을 통해 상실하게 될 것이 너무 크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그리고 그들의 잔혹성이 너무 크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그들이 땅에서 누렸던 쾌락과 즐거움을 기억에서 지워 버릴 수만 있다면, 이 잔혹성도 사그라질 것이며 그들이 상실한 것도 잊어버리고 아무런 고통도 없으련만······. 그들의 잔혹성, 양심, 과거의 삶에 대한 추억, 이런 것들이 모두 살아 있어서 그들에게 고통을 가할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그분과 함께하는 기쁨을 영원히 누려야 했건만, 이제 하나님의 진노를 마시며 그분의 임재에서 떠나 있는 고통을 겪어야 한다. !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돌이키고자 그분의 사자들을 보내어 얼마나 간곡히 말씀하셨던가:"죄인들아, 네가 어디를 향해 가는지 상고해 보라. 잠깐이라도 가는 길을 멈추고 너의 종말이 어떠할지 생각해 보라. 하나님께서 네게 주고자 하시는 영광, 네가 그처럼 받기를 거부하는 영광이 어떤 것인가 생각해 보라. 결국에는 네가 비참한 지경에 이를 것이 아니냐?" 그러나 이들은 간곡한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그들이 판 웅덩이에 빠지는 날, 그들은 이 말들을 기억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로잡으시고, 심판을 선고하시고, 진노를 쏟아부으시는 날, 그들은 이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지금 이 세상의 쾌락에 사로잡혀 오는 세상을 생각할 여유조차 없다. 그러나 그때가 되면 이 모든 것들을 생각할 시간이 충분하여 넘칠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경고를 그들의 마음판에 새기게 될 것이다. 그들의 손에, 그리고 마음에 그들이 받는 영원한 형벌을 새기게 될 것이다. 리처드 백스터.

16. "여호와께서 자기를 알게 하사 심판을 행하셨음이여."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심판으로 그분이 어떤 분인지 알려진다면, 그 심판이 어떤 심판인지 알아야 한다. 이 심판은 공개적인 심판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대부분 공개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목도하는 무대에서 행해진다.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열린 무대에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심판을 행하시는지 세 가지 이유를 들어 보겠다. 첫째,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것을 목도한 증인들이 있어서 그 심판을 기록으로 남기고, 충성스러운 사람들이 후세에 알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둘째, 하나님의 공의와 그것을 시행하시는 것에 대한 증인을 확보하기 위한 것뿐만 아니라, 그것을 느끼지 못하거나 여기에 순복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함이다. 바로 이러한 목적으로 하나님은 모든 민족들이 보는 앞에서 예루살렘을 심판하신 것이다(5:68, 14, 15). 예루살렘은 많은 나라들 사이에 있었고, 열방들은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위해 베푸신 특별하신 은혜와 특권과 구원을 목도했다. 하나님께서 이런 예루살렘을 심판하신 것은 열방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목도하게 하고, 그들도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하게 하려는 것이다. 예루살렘은 세계의 어느 한 구석에 처한 것이 아니었으며, 열방의 중심지에 위치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보이시는 선하심과 엄위하심을 열방이 모두 똑똑히 볼 수 있었다······하나님께서는 어떤 죄인들을 공개적으로 심판하셔서 모든 사람들이 그의 고통을 목도하게 하신다. 그것은 죄인들이 행했던 그 죄악들을 하나님께서 싫어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어서 다른 사람들이 그런 죄인들의 전철을 밟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고통으로 우리가 배우고, 그들이 맞는 매를 바라보면서 우리가 그런 매를 맞지 않도록 교훈을 받는다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면서 또한 은혜인 것이다······셋째, 하나님께서 악인을 공개적으로 심판하시는 것은, 이것을 바라보는 자들이 위로를 얻고 격려를 받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의인은 악인의 보복당함을 보고 기뻐함이여"(58:10). 의인이 악인의 보복당함을 보고서 기뻐하는 것은 원수를 갚았다는 심정에서가 아니다. 이 심판은 하나님께서 죄를 이기심을 나타내는 것이며, 그분이 거룩하신 분이라는 것을 증거하기에 기뻐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애굽 사람들을 홍해에서 치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 사람들이 죽어 바닷가에 떠오르는 것을 목도했다(14: 30). 하나님께서 시체들을 바다 밑바닥으로 가라앉게 하시지 않고 바닷가에 떠오르게 하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그것을 바라보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을 무섭게 치신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목도한 후에 이런 결과를 가져왔다:"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 종 모세를 믿었더라"(14:31). 하나님께서 애굽인들을 공개적으로 심판하심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이 확고해진 것이다. 애굽인들은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매를 맞고 심판을 당한 것이다. 조셉 캐릴의 글을 요약한 것.

16. "여호와께서 자기를 알게 하사 심판을 행하셨음이여." 여호와께서 죄인들에게 심판의 손을 드실 때, 의인들은 떨며 그분의 능력과 위엄과 심판의 속성을 다시 생각하게 되며, 자신을 판단하고 하나님을 노엽게 할 만한 일을 버린다······불이 그 주위를 비추듯이, 하나님의 심판은 세상에 그분의 영광과 공의와 거룩함을 나타내 보인다. 윌리엄 그린힐.

16. "악인은 그 손으로 행한 일에 스스로 얽혔도다." 죄가 죄인과 흥정을 벌이며 내놓는 것은 쾌락과 재물이다. 그러나 죄인이 치러야 할 값은 죽음과 고통과 파멸이다. 죄의 거짓됨과 속임수를 알고 싶다면 죄가 약속하는 것과 그 대가를 함께 비교해 보아야 할 것이다. 로버트 사우스(Robert South, D.D., 16331716).

16. "악인은 그 손으로 행한 일에 스스로 얽혔도다." 우리는 이 사실을 하나님의 말씀에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역사와 우리의 경험에서도 악인이 그들의 손으로 행한 일에 스스로 얽히게 하는 하나님의 공의를 본다. 성경에 나오는 하만의 이야기 외에 가장 극적인 예로서 프랑스 혁명과 관계된 것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프랑스 혁명과 관련하여 이런 기록이 남아 있다:"마리 앙투아네트(Marie Antoinette) 여왕이 길로틴에서 죽음을 당한 후 9개월 이내에, 그녀의 죽음과 관계가 있는 사람들도 모두 죽음을 당했다. 그녀를 고소하던 자들, 재판관들, 배심원들, 검사들, 증인들, 우리가 아는 모든 사람들이 여왕이 죽었던 길로틴에서 사라져 갔다." "그들이 그녀를 잡기 위해 쳐 놓은 그물에 그들 자신의 발이 걸렸고, 그녀를 빠뜨리기 위해 파 놓은 함정에 그들이 빠지고 말았다." 바르통 부시에(Barton Bouchier, 1855).

16. "힉가욘, 셀라." 이 말은 에인즈워스가 "묵상, 셀라"라고 번역했던 것처럼, 이 구절을 심각하게 묵상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힉가욘"은 시편 92:13"십현금과 비파와 '힉가욘'의 정숙한 소리"라는 구절에 다시 나타난다. 다른 악기와 함께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악기 중 하나를 지칭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존 메이어.

17. "악인이 음부로 돌아감이여." 악인은 죽으면 하나님의 진노를 받는다. 나는 에티오피아에 있는 천연 자석에 대해 읽은 적이 있다. 이 자석에는 두 개의 면이 있는데, 한 면으로는 철을 잡아당기고, 다른 면으로는 철을 밀어낸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도 두 개의 손, 즉 자비의 손과 공의의 손을 가지고 계신다. 한 손으로는 의인을 천국으로 이끄시고, 다른 손으로는 죄인을 지옥으로 밀쳐내신다. ! 그 지옥은 얼마나 두려운 곳인지! 그곳은 불못이라고 불리운다(20:15). 지옥을 불못이라고 부르는 것은 지옥이 고통의 장소이며, 이 고통이 극심할 것을 의미한다. 불은 사람을 가장 괴롭게 고문하는 데 사용된다. 스트라보(Strabo)는 그의 지리책에 갈릴리에 있는 연못에 대해 기록했다. 이 연못은 전염성이 있어서 거기에 던져진 것은 무엇이든지 화상을 입어 껍질이 벗겨진다고 했다. 그러나 이 연못도 저주받은 자들을 던지는 불못과 비교하면 시원한 곳이다. 이 불못이 왜 끔찍한 것인가? 이 불못에는 두 가지 특성이 있다. (1) 이 못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이다(21:8). 그러므로 냄새도 지독하고 숨이 막히는 곳이다. (2) 이 불은 꺼지지 않는 불이다. 악인이 숨이 막힌다 해도 결코 소멸되지는 않는다:"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20:10). 죄인이, 오는 세상에서 얼마나 참혹한 상황에 처하는가를 보라. 그들은 결코 죽지 않고 영원토록 고통을 당한다. 이것을 생각하면 죄인들이 지옥불이 얼마나 뜨거운지 맛보기를 결심하지 않는다면, 그들도 죄에서 떠나 거룩한 삶을 살지 않겠는가? 토머스 왓슨.

17. "악인이 음부로 돌아감이여." 여기서 "악인"이란 누구든지 중생하지 못한 사람을 말한다······이 사람은 하나님을 잊어버린 사람이다. 이들은 하나님을 생각할 때에 마땅히 가져야 할 사랑이나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고, 기쁨도 없으며, 하나님을 자주 생각하지도 않는 자들이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사람과 악인은 같은 말이다. 다음의 두 가지 사실은 이 말을 잘 증명해 줄 것이다. 하나님을 잊어버린다는 것은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요소를 제외하는 것이며, 가장 사악한 것을 포함시키는 것이기에 이는 악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것은 기독교의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인 것을 제외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그분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가치관이 없다는 말이고, 하나님으로부터 얻는 행복이나 능력을 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또한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분께 순종하지도 않으며, 그분의 통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는 또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을 자신의 인생의 목표로 삼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자는 악한 사람임에 틀림없다······하나님을 우리의 생각 속에서 밀어내 버리고, 그분으로 우리 마음 가운데 거하시지 못하게 하며, 하나님을 생각하지도 않는 것은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악한 일이다. 이런 사람은 술 취하고, 맹세하고, 속이고, 사람을 압제한다.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를 당하고, 돌이킬 수 없이 지옥으로 떨어지게 된다. 존 하우(John Howe, 16301705).

17. "악인이 음부로 돌아감이여." "음부로"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리숄라"(hlwavl)는 지옥으로 직행한다는 말이다. 원어에는 이런 뜻이 강조되어 있다. 아담 클라크.

17. "악인이 음부로 돌아감이여 하나님을 잊어버린 모든 열방이 그리하리로다." 모든 악은 지옥에서 온 악인과 함께 발생한 것이다. 악은 다시 지옥으로 보내질 것이며, 악을 행하던 악인도 고통의 장소로 되돌려지고, 거기서 영원히 갇혀 있게 된다. 열방이나, 열방을 구성하고 있는 개인이나 그들의 상태는 한 가지 기준에 따라 평가될 것이다. 이 기준은 하나님을 잊어버렸는지, 아니면 기억하는지를 말한다. 그분을 기억하는 것은 모든 덕이 흘러나오는 샘과 같고, 그분을 잊어버리는 것은 악의 근원과 같다. 조지 혼.

17. "악인이 음부로 돌아감이여."

음부,

그곳은 악인의 거처

꺼지지 않는 불이 가득 찬 곳

저주와 고통의 집.

존 밀턴(John Milton, 16081674).

17. "악인이 음부로 돌아감이여."

음부란

행할 능력이 없는 의지

무슨 일이나 자신의 머리로 돌리는 곳

! 끔찍한 고독

이기적인 사랑이 그에 합당한 열매를 거두는 곳

악의와 조소 띤 입술

살기 가득한 눈길

그러나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또한 아무것도 듣지 못하는 곳

흑암의 깊은 어둠 속에 홀로 갇힌 구덩이

채우지 못하는 욕망

비탄의 눈물을 삼키는 슬픔

누구나 혼자만 갇혀 있는 곳

증오가 자신을 삼키고

발목의 사슬은 육신을 뚫고 영혼까지 할퀴네

죽음 같은 고독

모두 미쳐 버린 곳

아무도 없는 칠흑 같은 감옥

누구도 고통을 어루만지며 위로해 주지 않는 곳.

헤로드(J. A. Heraud).

18. "궁핍한 자가 항상 잊어버림을 보지 아니함이여." 이것은 어떤 경우에도 감미로운 약속이다. 주님은 모든 약속을 기억하시고, 그분 자신이 성경에 약속된 위대한 약속이다. 그분의 이름으로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 간구하는 자는 하나님의 응답을 받는다. 아멘. 로버트 호커(Robert Hawker, D.D., 1820).

18. "가난한 자가 영영히 실망치 아니하리로다." 이방인들도 새가 매를 피하여 그들의 가슴으로 숨어들면, "네가 나를 피난처로 삼아 날아들었으니, 내가 너를 네 원수에게 내어주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아 숨는다면, 하나님께서 우리 영혼을 원수에게 내어주시겠는가? 이렇게 기도하라:"여호와여, 나는 유혹으로 괴롭힘을 당하고, 욕망에게 쫓기나이다. 당신께서 나를 용서하지 않으시면, 나는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나이다. 이것들을 죽여 주소서, 그렇지 않으면 내가 이것들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나이다. 그리스도를 보시고 나를 당신의 사랑의 품으로 받아 주소서. 당신의 영원한 팔로 나를 숨기소서. 나를 구하실 능력이 당신께 있사오니, 나를 원수들에게 내놓지 마소서. 나는 나 자신을 믿을 수 없고, 다른 사람들도 믿을 수 없나이다. 오직 당신만을 믿고, 당신만을 의지하나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이렇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영혼을 보호하신다. 그분은 이처럼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고 피하는 자를 위로하실 것이라고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으로 맹세하셨다:"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나니"(6:17). 이것은 성도들로 더욱 담대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피하면 그분이 따뜻하게 영접해 주실 것을 기대하게 한다. 하나님은 그분의 이름과 약속을 견고한 성처럼 세워 주셨다. 이 하나님의 이름과 약속이 그분의 백성들로 그곳에 들어가 숨게 한다. 윌리엄 거놀.

18. "궁핍한 자가 항상 잊어버림을 보지 아니함이여." 하나님은 우리의 간구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심으로써 우리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경우가 있다. 크리소스톰은 이것을 장기 예금에 비유했다. 돈을 은행에 오랫동안 예금해 놓을수록 이자는 더 불어난다. 우리는 더 많은 이익을 얻기 위해 사람에게 돈을 맡기고 기다리는데, 또한 더 큰 것을 받기 위해 하나님을 기다리지 못하겠는가?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즉각적으로 응답하지 않으심으로 우리가 더 많은 기도를 드리게 하신다. 그래서 우리가 더 많은 기도를 하고, 더 오랫동안 기다리면서 우리는 더 많은 위로를 받고, 결국 더 많은 것을 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허락지 않으시는 것과 연기하시는 것을 구분해야 한다······하나님 아버지는 사랑이 한이 없는 분이시다. 이 사랑은 무한하다. 그분이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기를 늦추시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우리도 자녀들이 구하는 것을 주기로 작정하고서도 즉각적으로 주지 않는 경우가 있지 않는가? 아이들이 가장 잘 준비되었을 때, 그때에 가장 좋은 것을 주기 위해, 우리는 아이들이 기다림을 배우기를 바라지 않는가? 어머니가 그의 외아들을 잊어버린다 해도, 하나님은 결코 잊으실 수 없고, 잊지도 않으신다.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은 결코 포기하지 않으신다. 결코! 리처드 캐플(Richard Capel).

19. "여호와여 일어나사." 이 구절은 무슨 뜻인가? 시편 기자는 원수들을 저주하며 그들이 파멸당할 것을 기도한다는 말인가? 아니다. 이 말은 원수들에게 불행한 일이 임할 것을 바라는 자의 기도가 아니다. 이것은 원수들의 죄로 인해서 그들에게 악한 일이 일어날 것을 예언하는 선지자의 언어이다. 어거스틴.

20. "여호와여 저희로 두렵게 하시며."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이나 된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에게는 죄성이 강하여 이것을 강력하게 억제할 필요가 있으며, 하나님을 향해 교만한 마음으로 부풀어 있어서 이 타락한 것들이 사라지도록 하기 위해 우리의 육체에 가시가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의 끊임없는 징계는 우리로 땅에 엎드리게 하고, 여호와의 자비가 필요한 존재임을 인정하게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하셨으나, 우리로 겸손케 하기 위해 목에 고삐를 걸게 하신다. 스티븐 차녹.

20. "열방으로 자기는 인생뿐인 줄 알게 하소서." "인생"을 히브리 원어로 "에노쉬"(vwna)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 기도는 사람들은 비참하고 약하며 결국에는 죽게 되는 존재인 것을 알게 해 달라는 기도이다. 이 단어는 단수이지만 집합적인 의미로 쓰였다. 존 칼빈.

[설교힌트]

1. (1) 우리의 찬양을 받으실 분은 오직 한 분여호와께.” (2) 풍성한 찬양주의 모든 기사.” (3) 찬양의 합당한 특성전심으로.” 데이비스(B. Davies).

1.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 우리가 영원히 할 일, 그리고 영원한 기쁨.

1. “주의 모든 기사.” 창조, 섭리, 구속, 이것들은 놀라운 기사이며, 하나님께서 만드신 우주가 기뻐할 만한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낸다. 설교 제목으로 적합하다.

2. 거룩한 찬송과 거룩한 기쁨. 거룩한 즐거움의 의무, 아름다움, 그리고 근거.

4. (1) 의인의 권리는 공격을 당한다. (2) 의인의 권리는 보호를 받는다.

6. (1) 대원수. (2) 그가 행한 파멸. (3) 원수를 이기는 방법. (4) 이어서 나오는 안식.

7절 상반절. 하나님의 영원하심, 성도들의 위로, 죄인의 두려움.

8. 하나님 나라의 공의, 특히 마지막 심판의 날에 있을 공의.

9.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 도움을 필요로 하는 시기, 온전한 구원.

10. (1) 가장 중요한 지식주의 이름을 아는 자.” (2) 축복된 결과주를 의지하오리니.” (3) 충분한 이유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 메드허스트(T. W. Medhurst).

지식, 믿음, 체험, 이 세 가지의 연관성.

10. 여호와의 이름은 우리로 그분을 의지하게 한다. 여호와 이레, 찌드케누, 라파, 삼마, 샬롬, 닛시, 엘로힘, 샤다이, 아도나이.

11. (1) 시온, 이것은 무엇인가? (2) 시온의 영광스러운 거주자, 그들은 무엇을 하는가? (3) 시온의 백성들이 하는 두 가지 일여호와를 찬송하며” “그 행사를 백성 중에 선포할지어다.” (4) “시온에 거하신 여호와께 두 가지 의무를 수행하는 이유.

12. (1) 무서운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 (2) 그분의 백성들을 기억하시는 하나님구원하시고, 영광스럽게 하시고, 축복하시고, 원수를 갚아 주시기 위해. (3)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사 그들을 구원하시고 원수들을 넘어지게 하신다. 전쟁과 질병이 만연한 시대에 위로의 설교가 된다.

13. “여호와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우리가 드릴 세리의 기도.

13. “나를 사망의 문에서 일으키시는 주여.” 흑암의 절망, 위대한 구원, 영광스러운 높임.

14.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 하나님이여, 이 구원은 주의구원이므로 주를 높이나이다. 이 구원은 값없는 구원이며, 온전하고, 적합하고, 확실하고, 영원한 구원이다. 누가 기뻐할 수 있는가? 왜 그들이 항상 그렇게 해야 하는가?

15. 기억할 만한 사건들.

16. 무서운 사실. 10절과 비교해서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무서운 대안.

17.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자에게 주는 경고.

18. 구원의 지체. (1) 불신자의 생각잊어버림.” (2) 하나님의 약속항상 잊어버림을 보지 아니함.” (3) 믿음의 의무기다림.”

19. “인생으로 승리를 얻지 못하게 하시며.” 힘있는 간구, 성경에 나타난 예들, 이 기도가 힘이 있는 이유, 이 기도를 드리는 시기.

20. 사람이 배워야 할 교훈. 하나님은 이 교훈을 어떻게 가르치시는가?

시편 10

[개 요]

주제이 시에 머리말이 없으므로 어떤 사람들은 이 시를 시 9편의 일부분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시를 그 구성이 완전한 하나의 독립된 시로 본다. 지금까지 어떤 시들은 두 편의 시가 쌍을 이루고 있음을 보았다(1편과 2, 3편과 4). 이처럼 이 시도 시 9편과 쌍을 이루고 있다.

악인의 압제와 박해를 주요 주제로 다루고 있으므로 이 시의 제목을 압제받는 자의 부르짖음이라고 붙여 보았다.

구성이 시는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다.

1절 시편 기자의 깜짝 놀라는 외침에는 이 시를 쓰게 된

의도가 나타나 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가난하고 박

해받는 백성들의 구원을 위해 개입해 주실 것을 간구

한다.

211절 압제자의 특성을 힘있게 묘사한다.

121절에 나타났던 시편 기자의 외침이 다시 터져나온다. 그러나 이번에는 더욱 분명하게 표현되었다.

1315절 하나님의 눈은 악인의 모든 잔인한 행동을 감찰하신다.

1618절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께서 압제받는 자를 위해 심판하실 것을 기쁨 가운데 기다린다.

박해받는 하나님의 교회, 그리고 교만한 죄인의 손 아래서 신음하는 성도들은 이 시에 나오는 언어로 하나님께 기도와 찬양을 드리기에 적합하다.

[강 해]

1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

1.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고난당하는 자의 눈물어린 눈에는 하나님께서 활동하시는 것이 보이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그저 묵묵히 바라보기만 하시며 압제당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지 않으시는 듯하다. 아니, 이보다도 더욱 심해 보인다. 하나님은 '멀리 서 계시고' 이제는 더 이상 환난 날에 도움이 되시지 않는 것이다. 그분은 어느 누구도 오를 수 없고, 가까이할 수도 없는 산처럼 느껴진다. 하나님께서 임재하시고 함께하신다는 것은 그분의 백성들에게 큰 기쁨이다. 그분이 함께하신다는 것에 대해 회의를 품게 되면 그분의 백성들은 평안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러므로 주께서 우리와 늘 동행하심을 항상 기억하자. 금을 제련하시는 분께서 금을 용광로에 넣으실 때에 용광로 가까이 계시고,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들이 그곳에 던져질 때에는 하나님의 아들께서 친히 그 불꽃 가운데 함께 거니신다. 그분은 또한 사람의 연약함을 다 아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급하고 험한 일로 고난을 당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일하시지만, 우리가 그분의 버리심을 받은 것처럼 생각하며 염려하는 것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으신다.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 우리는 우리가 당하는 고난으로 심령이 상하지 않는다.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에 하늘 아버지께서 그분의 얼굴을 우리에게서 숨기시는 것처럼 생각되기 때문에 심령이 상한다. 우리가 시련을 당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셨다는 생각이 우리를 엄습할 때에는, 바울이 두 물이 합하여 흐르는 곳에서 배가 파선되고 곤경을 당했던 것과 같은 곤경을 당하게 된다(27:41). 이런 상황에서 앞 부분은 부딪혀 움직일 수 없게 되고, 뒷 부분은 큰 물결에 파손돼 나간 배처럼 위기에 처하게 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일식 현상에 의해 태양이 일그러진다면 빛을 잃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우리가 "어찌하여 얼굴을 숨기시나이까?"라고 묻는다면, "그럴 필요가 있다"라는 사실에서 그 대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시련을 당할 필요가 있으며, 또한 시련 가운데 근심할 필요도 있다(벧전 1:6).

그러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고난을 주시면서도 또한 위로의 빛을 비추시는 이유는 무엇인가? 부모가 자식을 징계하면서 동시에 위로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징계를 하는가? 미소 짓는 얼굴과 징계하는 채찍은 서로 어울리는 친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매를 때리실 때에는 바지를 걷어올리고 때려 아픔을 느끼게 하신다. 아픔을 느끼는 고난만이 우리에게 축복이 되는 고난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고난의 강이나 시내를 건널 때마다 하나님의 팔에 안기어 건넌다면, 그 고난은 우리에게 임할 필요가 없는 것이며, 또한 그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고자 하시는 것을 경험할 수도 없을 것이다.

2악한 자가 교만하여 가련한 자를 심히 군박하오니 저희로 자기의 베푼 꾀에 빠지게 하소서

3악인은 그 마음의 소욕을 자랑하며 탐리하는 자는 여호와를 배반하여 멸시하나이다

4악인은 그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치 아니하신다 하며 그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

5저의 길은 언제든지 견고하고 주의 심판은 높아서 저의 안력이 미치지 못하오며 저는 그 모든 대적을 멸시하며

6그 마음에 이르기를 나는 요동치 아니하며 대대로 환난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나이다

7그 입에는 저주와 궤휼과 포학이 충만하며 혀 밑에는 잔해와 죄악이 있나이다

8저가 향촌 유벽한 곳에 앉으며 그 은밀한 곳에서 무죄한 자를 죽이며 그 눈은 외로운 자를 엿보나이다

9사자가 그 굴혈에 엎드림같이 저가 은밀한 곳에 엎드려 가련한 자를 잡으려고 기다리며 자기 그물을 끌어 가련한 자를 잡나이다

10저가 구푸려 엎드리니 그 강포로 인하여 외로운 자가 넘어지나이다

11저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잊으셨고 그 얼굴을 가리우셨으니 영원히 보지 아니하시리라 하나이다

2. "악한 자가 교만하여 가련한 자를 심히 군박하오니." 이 구절은 악인에 대한 공개적인 공소 사실을 담고 있다. 여기에는 '교만''포학함,' 두 가지의 책망이 들어 있다. 전자는 후자의 뿌리가 되고 원인이 된다.

"저희로 자기의 베푼 꾀에 빠지게 하소서." 이 구절에는 압제당하는 자의 간절한 간구가 포함되어 있다. 이는 합리적이고, 공정하며, 당연한 기도이다. 우리의 원수들이 재판장이 되어 있다 할지라도, 사람들은 자신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행하기를 바랐던 그대로 당하는 것이 정당한 일이다. 우리가 사람들을 그들의 저울로 무게를 재고, 그들의 그릇으로 부피를 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 , 핍박을 일삼던 바벨론아! 너희들의 마지막 날이 끔찍할 것이다! 그날이 되면 너희들이 성도들의 피로 넘치도록 가득 채웠던 잔을 너희가 마시게 될 것이다. 누가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힐문할 것인가? 그분은 하만이 만든 교수대에 하만 자신을 달아매셨듯이, 사람들이 각자 만든 자신들의 교수대에 그들을 달아매실 것이고, 여호와의 다니엘들을 사자들의 구덩이에 던져 넣었던 자들을 거기에 던지실 것이다.

3. 악인에 대한 공소장을 읽고, 고소자의 소원을 제시한 다음, 이제 그 증거가 제시된다. '교만'의 문제에 대해서는 그 증거가 광범위하고 확실하다. 그러므로 어떤 재판관도 피고인에게 유죄 선고를 내리기를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부터 그 증거들을 하나 하나 살펴보자.

"악인은 그 마음의 소욕을 자랑하며." 첫번째 증인은 그를 교만하게 자랑하는 자라고 했다. 그는 단순한 "소욕"을 자랑했다. 그의 소욕은 헛된 것이기에 그것을 자랑한다는 것은 그가 후안무취하여 부끄러움을 모르기 때문이다. 자기의 부끄러운 것을 자랑하다니, 이 사람은 버림받은 죄인임에 틀림없다. 교만하게 자랑하는 죄인들, 특히 더러운 욕망, 너무나도 추잡하여 행동으로 옮길 수 없는 것들을 자랑하는 자들은 가장 추악하고 천박한 자들이다. 선을 미워하는 자와 고집불통이 함께 손을 잡게 되면 그들은 마귀가 원하는 것을 행하게 된다. 이것만으로도 피고인에게 유죄 선고를 내리기에 충분한 것이다. 그를 옥에 가두라! 그러나 잠깐만! 여기 또 다른 증인이 증언할 것이 있다.

"탐리하는 자는 여호와를 배반하여 멸시하나이다." (KJV에는 "탐리하는 자를 축복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멸시하는 자니이다"라고 번역되었다역자 주.) 두번째 증인은 탐심을 품은 자를 비열하게 축복하는 것에 대해 증언했다. 여기에는 교만한 자의 태도가 더욱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교만한 자의 가면 뒤에는 오만함이 도사리고 있다. 이 오만한 자는 온 땅의 재판장 되신 하나님을 감히 대적하며, 하나님께서 저주하신 자를 축복하고 있다. 말라기의 시대에 행악하는 세대가 이처럼 행했다. 그들은 교만한 자를 행복한 자라고 불렀으며, 악을 행하는 자를 칭찬했다(3:15). 이 천박한 자들은 그들을 지으신 조물주와 다투면서 이렇게 살아간다.

하나님의 손에서 무게를 재는 저울과

징계하는 채찍을 빼앗으라.

하나님의 정의를 다시 헤아려 판단하고

하나님을 판단하는 자가 되라.

악인은 탐욕스러운 자들이다. 그들은 가난한 자를 멸시하고, 그들처럼 착취하는 자를 영화롭게 하는 말을 자주 들어 오지 않았던가? 옛말에도 이런 말이 있다.

가장 많은 지갑을 가진 자가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다.

교만이 탐욕을 만나면, 그를 지혜로우며 생각이 깊다고 칭찬한다. 이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다. 수많은 그리스도인 교수들도 부자를 보면 그에게 깎듯이 대하며 아부한다. 이 부자가 가난한 사람들의 살과 피를 취하여 자신을 살찌웠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들을 이처럼 대한다. 죄인으로서 존경과 환영을 받는 자가 있다면, 그는 바로 탐욕스러운 사람일 것이다. 우리는 간음한 자나 술 취한 자를 교회 밖으로 내어쫓는다. 그러나 탐욕스러운 자를 징계했다는 교회에 대해 들어 본 일이 있는가?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탐욕스러운 자를 축복하지 말자. 이는 교만의 죄이며, 하나님께 반역하는 죄이다. 이 교만과 반역의 죄에 동참하지 않도록 두려움 가운데 떨자.

4. "악인은 그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치 아니하신다 하며." (KJV에는 "악인은 그 교만한 얼굴로 하나님을 찾지 않으며"라고 번역되었다역자 주.) 증인들이 말한 대로 악인에게 불리한 증거로서 교만한 자랑과 비열한 축복이 받아들여졌다. 이제는 그 자신의 얼굴이 그를 탄핵하는 증인들의 소리가 옳다는 것을 증거한다. 교만한 마음은 교만한 얼굴을, 그리고 굳어져서 꿇을 수 없는 무릎을 만든다. 시계의 바퀴가 돌아가는 것이 바늘로 나타나듯이, 마음속에 일어나는 생각들이 때때로 얼굴에 나타난다는 것은 정말 놀랄 만한 일이다. 굳은 얼굴과 상한 심령은 함께 존재할 수 없다. 아테네 사람들은 피고인들을 밤에만 심문하도록 했다. 이는 재판관이 그들의 얼굴 표정을 보고서 판단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것이 과연 잘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사람의 얼굴에 나타나는 근육의 움직임을 보고 입술에서 나오는 말보다 더 많은 것들을 알 수 있다. 정직함은 얼굴을 빛나게 하고, 비열함은 눈을 통해서 뿜어나오는 법이다.

"그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 교만한 자가 결국 어떻게 되는지 보라. 이 교만은 사람들로 하나님을 찾지 못하게 한다. 곧은 목, 굽혀지지 않는 무릎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벼의 껍질이 아무리 많이 쌓인다 해도 거기에 알곡은 없다. 이처럼 하나님이 없는 자들은 아무리 많은 생각을 할지라도 하나님을 생각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임재하지 않는 단 하나의 장소가 있다면, 그곳은 악인의 마음이다. 이 말은 악인에게 치명적인 책망이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곳은 지옥의 권세가 다스릴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면, 우리가 하는 모든 생각들은 우리로 멸망에 이르게 할 것이다.

5. "저의 길은 언제든지 견고하고." 그가 걷는 길은 거친 길이다. 지옥을 향한 길은 거친 길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지옥을 향해 걸을 때에는 슬픔을 당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죄의 길을 울타리로 막으셨다. ! 이 울타리를 넘어서 가시덤불에 떨어지다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그가 걷는 길은 역시 다른 사람에게도 많은 슬픔과 요동의 원인이 된다. 그러나 그가 이런 일에 무슨 상관을 하겠는가? 그는 자신의 괴물스런 차를 타고 질주하는 우상과도 같아서, 질주하는 동안 부딪혀 깨어지는 군중에게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

"주의 심판은 높아서 저의 안력이 미치지 못하오며." 그는 고개를 들고 하늘을 바라본다. 그러나 저 높이 계시는 하나님께까지는 안력이 미치지 못한다. 하나님을 잊어버렸으니 그분의 심판도 역시 잊어버렸다. 그는 하나님께 속한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돼지가 망원경을 통해 별을 바라보는 것이,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여호와의 의를 이해하는 것보다 더 빠를 것이다.

"저는 그 모든 대적을 멸시하며." 그는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을 대적하고 다스리려고 한다. 사람들이 그의 가혹한 행동을 책망하거나 저항하는 빛을 보이면, 그는 이들을 비웃고 냉소하면서 모두 멸절시키겠다고 위협한다. ! 그러나 그의 멸시와 위협을 받지 않을 자가 아직 남아 있다. 죽음! 죽음이 그의 생명의 불을 꺼 버린다면, 이 악한 자가 무덤 안에서 아무리 교만을 떨어 보아도 어떤 유쾌함도 누릴 수 없고, 그저 어둡고 우울할 뿐이라는 것을 알 것이다.

6. "그 마음에 이르기를 나는 요동치 아니하며 대대로 환난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나이다." 이 구절은 죄인이 마음속에서 생각하는 바를 말로 표현한 것이다. 죄인에 대한 첫번째 책망은 그가 '교만'하다는 것이었다. 이 구절은 그가 얼마나 교만한가를 극명하게 나타내 준다. 죄인이 얼마나 교만한지를 증언하는 자가 그 죄인의 마음속에 은밀히 들어가 그곳에서 들은 말을 전해 준다. ! 이 사람은 얼마나 오만한 사람인지! 그가 "대대로 환난을 당치 아니하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가 자신을 전능한 자로 간주한다는 것을 말한다. 자신을 특별한 존재, 특혜를 받은 자로 간주한다. 그는 홀로 앉아서, 어떤 슬픔도 보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는 별들 가운데서 오만스럽게 거하면서, 그를 그 높은 곳에서 뽑아 버리실 지존자를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집은 모래 위에 지은 집이요, 바다에서 일렁이는 파도처럼 요동하는 기반 위에 지은 집이라는 것을 기억하자. 자신이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자는 결코 안전할 수 없다. 자기를 자랑하는 것은 그의 방호벽이 되지 못한다. 자만심은 대적에게 쉽게 정복당하는 취약한 성벽과 같다. 이것은 바보들이 당하는 폐해이기도 하다. 그들이 조금이라도 성공하게 되면, 그것을 지나치게 자랑하고 자만심으로 부풀린다. 마치 그들의 여름이 영원히 지속되고, 그들의 꽃이 영원히 시들지 않을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 사람아! 너는 겸손하라! 인생은 유한하며, 영원한 존재가 아님을 기억하라!

이제 죄인을 기소하는 두번째 문제, 즉 그가 '포학함'을 증거할 때다. 사람이 교만하고 오만하다는 것은 그가 곧 복수하기를 좋아하는 잔인한 존재라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증거하는 사례들은 얼마든지 있다. 하만의 교만은 모든 유대인들을 멸절시키려는 잔혹한 계획을 세우는 뿌리가 되었다. 느부갓네살은 우상을 세웠고, 교만한 마음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그것에 굽혀 절하라고 했다. 이후 그는 잔혹한 마음을 품고서 그의 뜻을 따르지 않는 자는 일곱 배나 더 뜨거운 불 속에 던져 넣도록 했다. 모든 교만한 생각과 잔혹한 생각은 쌍둥이와도 같은 것이다. 자신을 높이는 자는 다른 사람들을 경멸하게 되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잔혹한 군주가 되는 것이다.

7. "그 입에는 저주와 궤휼과 포학이 충만하며." 법정에 서서 악인의 악함을 증언하는 증인은 이렇게 말했다. 악한 자가 스스로 자신을 변호하게 해 보라.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그 자신을 정죄할 것이다. 그 입은 악으로 충만해 있다. 머리가 세 개 있는 독사가 꼬리를 틀고서 그 모든 독을 검은 입 속에 품고 있는 것과 같다. 그가 하나님과 사람을 향해 내뱉는 말에는 저주가 가득하고, 조심성이 없는 사람을 함정에 몰아넣는 데에는 궤휼이 가득하며, 또한 주위 사람들을 강탈해 가는 데에는 포학이 가득한 것이다. 이런 사람들을 조심해야 한다. 이들과는 아무런 관계도 맺지 말아야 한다. 거위처럼 바보 같은 자가 늑대의 설교를 들으러 가며, 가장 어리석은 자만이 악인들의 사회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 사람의 입만 바라보지 말고, 그의 혀 밑에 무엇이 있는지 살펴보라:"혀 밑에는 잔해와 죄악이 있나이다." 그의 목구멍 깊은 곳에는 아직 내뱉지 않은 말이 있다. 이것들은 잔해와 죄악으로 나타날 것이다.

8. "저가 향촌 유벽한 곳에 앉으며 그 은밀한 곳에서 무죄한 자를 죽이며 그 눈은 외로운 자를 엿보나이다." 이 천박하고 사악한 자는 자신을 자랑하지만, 그는 잔혹하고 비겁한 겁쟁이다. 그는 길거리에서 강도질을 하는 자와도 같다. 이런 사람들은 인적이 드문 길에 숨어 있다가, 아무런 주의도 기울이지 않고 다니는 여행객을 덮치는 자들이다. 어느 곳에든 성도들을 기다리고 엿보는 악한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다. 이 땅은 강도들과 도적들의 세상이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자는 무장을 잘해야 한다. 어느 숲속에든 원수들이 숨어 있을 수 있다. 어느 곳에나 우리를 잡으려고 쳐 놓은 함정이 있고, 피에 굶주린 원수들이 있다. 저 멀리뿐만 아니라 우리 바로 곁에도 원수들이 있다.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하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안전할 수 없다.

9. "사자가 그 굴혈에 엎드림같이 저가 은밀한 곳에 엎드려 가련한 자를 잡으려고 기다리며." 시편 기자는 악인의 모습을 더욱 어둡고 추악하게 묘사한다. 여기에는 다른 사람의 것을 훔치는 강도의 모습뿐만 아니라 사냥꾼의 모습, 그리고 숨어 기다리는 사자의 모습도 들어 있다. 바로 이와 같은 표현이 꼭 들어맞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숨어 감시하고, 왜곡하고, 비방하고, 수군거리며, 거짓 맹세로 의로운 사람을 비방하고 무죄한 자를 살인한다. 또한 변명, 저당, 동맹 등으로 가난한 자를 사로잡고 그물로 끌어들이기도 한다:"자기 그물을 끌어 가련한 자를 잡나이다." 크리소스톰은 이처럼 극도로 잔혹한 자들을 매우 신랄하게 꾸짖었다. 형제들이여! 참으로 조심하라. 형제들을 노리고 있는 함정은 끝이 없기 때문이다. 배고픈 사자는 어느 동굴에든 숨어 기다리고 있고, 사악한 자들은 어디든지 그물을 던진다는 것을 기억하라.

퀄스는 우리가 당하는 위험을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너를 쫓는 자가 그 손으로 행하는 것은

네가 부할 때에도 덫을 놓고,

가난할 때에도 덫을 놓으며

네가 명성을 얻을 때에도 덫을 놓고,

수치를 당할 때에도 덫을 놓으며

네가 높아진 때에도 덫을 놓고,

낮아진 때에도 덫을 놓네.

너의 침실에도 너를 살피는 덫을 놓고,

활동하는 중에도 덫을 놓으며

네 생각에도 덫을 놓고, 네 말에도 덫을 놓는다네.

네가 침묵할 때에도 덫을 놓고,

소동을 일으킬 때에도 덫을 놓으며

네가 절제하는 중에도 덫을 놓고,

헌신하고 있을 때에도 덫을 놓으며

네가 확신 중에 있을 때에도 덫을 놓고,

의심하고 있을 때에도 덫을 놓네.

네 마음에도 덫을 놓고, 네 행동에도 덫을 놓으며

네 머리 위에도 덫을 놓고, 발 아래에도 덫을 놓으며

네가 질병 가운데 있을 때에도 덫을 놓고,

네가 죽을 때에도 덫을 놓는다네.

, 주여! 당신의 종들을 지키시고,

우리를 모든 원수들에게서 보호하소서.

10. "저가 구푸려 엎드리니 그 강포로 인하여 외로운 자가 넘어지나이다." 사람들은 종종 악한 의도를 행하기 위해 겉으로는 겸손한 척한다. 사자가 구푸리는 것은 더 힘껏 멀리 뛰기 위한 것이며, 이렇게 해서 먹이를 덮치고자 함이다. 늙어 교활해지고 사람의 피를 맛본 이리를 보면, 옛 영국 사람들은 이렇게 외쳤다:"이리를 조심해라!" 그러나 우리는 "여우를 조심해라!"라고 외쳐야 할 것이다. 그들이 우리 발 아래서 엎드리는 것은 우리가 넘어지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아첨하는 자를 경계하고 조심해라. 우정과 아첨은 원수 사이와도 같다.

11. "저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잊으셨고 그 얼굴을 가리우셨으니 영원히 보지 아니하시리라 하나이다." 6절에서 악인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것을 증언하는 자가 있었다. 그 증언은 유효하다. 이제 악인의 마음속에서 주고받는 말을 들었던 증인이 다시 나타난다. 그가 악인이 마음속으로 뭐라고 말했는지를 이렇게 증언했다. 이 잔혹한 인물은 하나님이 눈이 멀었거나, 또는 최소한 건망증으로 잊어버리셨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자신을 위로했다. 그러나 이것은 어리석은 바보들의 환상에 불과한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박해할 때,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것을 모두 알지 못하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하고, 그분이 모든 것을 다 아신다는 사실을 안다면 어찌 감히 그분의 백성을 학대할 수 있겠는가? 사실 "오 하나님이여! 당신이 나를 바라보고 계시나이다"라는 생각보다 우리를 죄로부터 잘 보호해 주는 것은 없다.

위와 같이 법정에서 심문이 진행되었다. 사건의 전말이 자세히 드러났다. 이제 박해받았던 고소인이 머리를 들고 하나님의 심판을 요청하는 것이 자연스런 순서가 될 것이다. 다음에 계속되는 내용은 바로 이것을 나타내 보여준다.

12여호와여 일어나옵소서 하나님이여 손을 드옵소서 가난한 자를 잊지 마옵소서

12. "여호와여 일어나옵소서."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가 말씀을 드릴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강한 확신 가운데 있을 때에도 의심하는 마음이 섞여 있을 수 있다. 시편 기자는 아무런 두려움도 없이 여호와를 깨우며, 그분이 일어나 손을 드실 것을 간구했다. 그러나 그는 마치 여호와께서 그분의 성도들을 잊어버리기라도 하셨다는 듯이, 소심하게도 가난한 자를 잊지 마실 것을 간구했다. 이 구절은 교회가 끊임없이 부르짖어 간구하는 기도이기도 하다. 주님께서 영광 중에 다시 오시고 교회의 모든 대적들을 벌하시기까지 교회는 이 기도를 쉬지 않을 것이다.

13어찌하여 악인이 하나님을 멸시하여 그 마음에 이르기를 주는 감찰치 아니하리라 하나이까

14주께서는 보셨나이다 잔해와 원한을 감찰하시고 주의 손으로 갚으려 하시오니 외로운 자가 주를 의지하나이다 주는 벌써부터 고아를 도우시는 자니이다

15악인의 팔을 꺾으소서 악한 자의 악을 없기까지 찾으소서

여기에는 악한 자에 대한 묘사가 농축되어 나타난다. 시편 기자는 그의 악한 성품을 그 근원까지 추적한다. 그 근원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무신론적 사상이다. 시편 기자의 기도는 여호와께서 그 능력을 보이시고 공의를 나타내실 것을 간구하는 기도이다. 악인이 하나님의 의를 문제삼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공의 가운데 그들에게 놀라운 사실을 가르치실 것을 간구하게 되는 것이다.

13. "주는 감찰치 아니하리라." 이 구절에는 경건치 못한 자의 소망, 그의 마음의 소원이 적나라하게 나타나 있다. 그가 여호와를 멸시하는 이유는, 그가 죄를 지어도 하나님께서 벌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그 마음에 이르기를 주는 감찰치 아니하리라." 다른 사람을 위한 지옥이 없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공의를 멸시하는 자를 위해서만은 지옥이 있어야 한다. 악인의 사악한 생각에 대한 표현이 14절에 나타난다.

14. "주께서는 보셨나이다 잔해와 원한을 감찰하시고 주의 손으로 갚으려 하시오니." 하나님의 눈은 모든 것을 보시고, 그분의 손은 원수들을 심판하고 징계하신다. 하나님의 눈에서 숨어 피할 자가 없으며, 하나님의 공의에서 도망할 자도 없다. 방탕하게 잔해를 행하는 자는 심판과 비극을 맛볼 것이며, 원한을 마음속에 품는 자는 슬픔을 거둘 것이다. 이 땅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진정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임재가 이렇게 심판 중에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압제자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은 또한 압제당하는 자를 가까이하는 자비로운 분이시다.

"외로운 자가 주를 의지하나이다." 그들은 여호와의 손에 온전히 자신을 맡겨 버렸다. 압제자에 대한 판단도, 자신들의 의지도 모두 온전히 그분께 맡겨 버리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합력하여 그들을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실 것을 믿고 안식하는 것이다. 그분은 이런 소망을 저버리지 않으신다. 그분은 고난당하는 시기에 그들을 보호하시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선하심에 즐거워하게 하신다.

"주는 벌써부터 고아를 도우시는 자니이다." 하나님은 고아들의 아버지가 되신다. 육신의 아버지가 땅 속에서 잠을 잘 때, 하늘 아버지는 하늘 위에서 미소를 지으신다. 어찌 되었든지 고아들은 굶지 않고 일용할 양식을 먹고 지낸다. 그들에게 하늘 아버지가 계시니 이것은 당연한 일이다.

15. "악인의 팔을 꺾으소서." 이 구절에서 시편 기자가 간절히 간구하는 소리를 다시 듣게 된다. 죄인들로 죄를 범하는 능력을 상실하게 하소서. 잔학하게 행하는 자를 막으시고, 압제자를 체포하시고, 세상에서 강한 자의 허리를 약하게 하시고, 사악한 자를 던져 산산이 부수소서. 그들이 공의를 부정하오니 이것을 온전히 맛보게 하소서. 하나님께서 끝까지 죄인을 추적하실 것이니, 그들은 당연히 하나님의 공의를 맛보게 될 것이다.

"악한 자의 악을 없기까지 찾으소서." 그에게 죄의 씨가 하나라도 남아 있다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찾으시고 벌하실 것이다. 성도들을 크게 핍박하던 자들이 그들의 침상에서 편히 죽는 일이 거의 없다는 것은 다시 말할 필요도 없다. 저주가 그들을 끝까지 추적할 것이고, 그들이 두려움과 고통을 느끼면서 한때 저항했던 하나님의 공의를 그때가 오면 인정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압제자들이 잠시 성도들을 핍박하도록 허락하시는 것은, 성도들 중에 위선자가 섞이지 않도록 울타리를 치고 보호하시기 위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은 옛 생활로 돌아가려는 성도들을 교훈하신다. 기드온도 숙곳 사람들을 광야의 찔레로 교훈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곧 하나님께서 가시와도 같은 헤롯들을 모두 잘라 불 속에 던져 버리신다. 그리스의 현자인 탈레스(Thales)는 이 세상에서 가장 희귀한 일이 무엇이냐고 묻는 말에 "압제자가 노인이 되도록 사는 것을 보는 일"이라고 했다. 여호와께서는 악인의 팔을 꺾을 뿐만 아니라, 교만한 압제자의 목도 꺾어 버리신다. 성도들을 향해 어떤 공의나 긍휼도 베풀지 않았던 자들에게 하나님의 충만한 공의를 베푸실 것이며, 긍휼의 씨앗은 한 톨도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16여호와께서는 영원무궁토록 왕이시니 열방이 주의 땅에서 멸망하였나이다

17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으니 저희 마음을 예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18고아와 압박당하는 자를 위하여 심판하사 세상에 속한 자로 다시는 위협지 못하게 하시리이다

1618. 시편 기자는 위대하고 영원하신 왕께 드리는 감사의 노래로 끝을 맺는다. 왕께서 가난하고 압제받는 백성들의 소원을 허락하시고, 고아를 보호하시며, 가난하고 박해받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짓밟았던 열방들을 벌하셨기 때문이다. 우리의 불평스러운 일들을 왕 중 왕께 올려보내면 그분께서 속히 해결해 주신다는 것을 기억하자. 여호와의 보좌 앞에 문제를 들고 나아가면 여호와께서 우리의 권리를 보호하시고 잘못된 것들을 다시 바로잡으신다. 그분은 가난한 자의 이익을 무시하지 않으시고, 강한 자의 압제를 용납하지 않으신다. 위대하신 하나님이여, 당신의 손에 우리를 맡기나이다. 당신께 당신의 교회를 새롭게 의탁하나이다. , 하나님이여! 일어나소서! 이 땅의 사람들, 하루살이 같은 존재들로 당신의 권능 앞에서 부러지게 하소서. ,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당신의 백성들을 영화롭게 하소서. 아멘. 아멘.

[주해와 설명들]

10편 전체. 경건치 못한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하는 생각, 태도, 하는 일과 말, 감정, 운명을 이 시가 가장 적절하고 자세히, 그리고 통찰력 있게 묘사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악인에 대해 지금까지 묘사한 것 중에 부족한 것이 있다거나, 앞으로 나오는 시에서도 부족한 것이 있다면 이 시에서 악에 대한 완벽한 묘사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시는 사람의 눈에는 훌륭하게 보인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혐오스러운 사람에 대해 묘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거스틴과 그 이후의 사람들은 이 시를 '적그리스도의 시'로 이해했다. 그러나 이 시에는 아무런 머리말도 없다는 사실을 유의하여 가장 일반적인 이해를 받아들이고, 이 시가 경건치 못한 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하자. 이것은 다른 사람들의 다양한 이해를 거부하자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 시에 대한 일반적인 견해를 받아들이면서, 또한 이 시를 적그리스도에 대한 시라는 견해도 받아들일 것이다. 이 시를 앞에 나오는 시 9편과 연관지어서 이해한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9편에서 다윗은 불경건한 자가 회심할 것에 대해 말했고, 또한 회심할 자들을 위한 기도를 드렸다. 그러나 이 시에서 그는 아직도 회심하지 않은 불경건한 자, 자신이 힘이 있다고 약한 자를 압제하는 자, 앞으로 회심할 가능성이 거의 없는 자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마르틴 루터.

1.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 여기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여호와께서 숨지 않으셨더라면 환난의 때가 임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이 질문은 밤에는 왜 해가 비치지 않느냐고 묻는 것과 같다. 해가 비쳤더라면 결코 밤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환난을 당할 때에 하늘 아버지께서 미소를 거두셔야만 우리는 이 환난에서 온전히 교훈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여러 가지 시련을 만나는데, 이 시련을 통해서 무거운 마음도 경험해야 한다. 우리가 아픔을 느끼지 않는다면 매는 아무 소용도 없는 것이다. 고통이 없다면 시련은 우리에게 아무 유익도 없다. 하나님께서 숨지 않으신다면 우리는 아픔이나 슬픔을 느끼지 못할 것이고, 그 결과 그분의 징계를 통해서 우리가 깨끗하게 되는 것을 체험하지 못할 것이다. C. H. S.

1. "환난 때." 우리가 당하는 환난의 때는 우리에게 확신의 때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 마음을 고정시키는 자는 마음속으로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그는 흉한 소식을 두려워 아니함이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그 마음을 굳게 정하였도다"(112:7). 어떻게 이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여호와를 의뢰하는 자는 그 마음이 굳게 정해지고, 두려워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경박한 자가 되어서 여러 가지 악한 사조에 흔들리며, 우리가 듣는 소식에 따라서 소망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믿음과 기도로 강청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지 못할 것이다. 우리 주님의 제자들은 배 안에서 지극히 작은 믿음을 가졌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 작은 믿음이 폭풍 가운데서 주님을 깨웠고, 주님은 제자들을 구원해 주셨다. 우리의 불신은 하나님을 실망시켜 드리고, 하나님으로 그분의 능력을 베풀지 못하게 할 뿐이다. 스티븐 차녹.

2. "악한 자가 교만하여 가련한 자를 심히 군박하오니." 압제자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나는 법적으로 내 소유인 것만을 추구한다. 그는 자신의 자유 의사를 따라 나와 계약을 맺었다. 그가 계약을 지킬 수 없다면, 나는 그의 물품과 육체를 취할 수 있다. 나는 계약을 따라 그의 물품과 육체를 취하든지, 아니면 내 돈을 받으면 그만이다. 그의 자녀들이 거지가 되어 소진해 간다거나, 그의 교만한 아내가 망한다 해도 난 상관하지 않겠다. 그들이 망하는 것은 그들의 잘못이지 내 잘못이 아니다. 그것이 도대체 내게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인가? 난 돈을 받아야 해. 그가 몸과 뼈를 깎는 고초를 겪더라도 내가 받을 돈은 다 받아야 해. 법이란 공의롭고 선한 것이지. 이 법을 따라 살고 있는데, 어떻게 내가 행하는 것이 불공평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사업가가 100을 얻어야 하는데 30만 받고 나머지를 포기할 수 있는가? 이 세상에 그저 지푸라기나 잡으려고 태어났단 말인가? 그들의 눈물 몇 방울 때문에 나의 즐거운 삶을 포기할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의 울음이 한밤중에 짖는 개처럼 내 마음을 감동시키지 않는 것에 감사한다. 나는 내 돈을 받든지, 그의 뼈를 받든지 해야 한다······내게 양심을 말하지 말라. 내 사업에 양심이란 없다. 세상의 모든 게으른 자들보다도 이 양심 때문에 파산당한 사람들이 많다. 내 양심은 바보가 아니야. 내 양심은 내가 소유한 것만이 진정한 내 것이라고 가르쳐 주지. 속이 가득 차 있는 돈가방은 나를 속이지 않아. 내 친구들이 모두 나를 버릴 때에도 이것은 내게 가까이 있으니까.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합법적으로 부자가 되는 것을 나쁜 양심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내가 다른 사람들의 것을 움켜쥐고 그들을 압제한다고 말하지 말라. 이 세상은 냉혹한 세상이지. 이런 세상에서 살아 남기 위해서는 무엇이고 움켜쥐지 않으면 안 되지. 난 줄 것은 주고, 빌려주는 것은 빌려줄 뿐이다. 거지가 되어야 천국에 가는 것이라면, 그렇게 할 사람들이나 그렇게 하라지. 네가 압제라고 말하는 것을 나는 이해하지 못한다. 난 법을 따라서 살 뿐이니까. 그러나 압제자와 압제받는 자 중에서 하나를 택하라면, 난 압제를 받는 것보다는 압제하는 자가 되겠다. 빚진 자들이 정직하게 빚을 갚는다면, 내 손을 묶어 두고 잠잠히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잘못하여 내 지갑이 비게 된다면, 난 도저히 참을 수 없어. 그들로 마땅히 대가를 치르도록 해야지." 프란시스 퀄스.

2. "악한 자가 교만하여 가련한 자를 심히 군박하오니." 악명 높은 박해자 도미티안(Domitian)은 로마의 다른 황제들과 마찬가지로 스스로 자신을 신이라고 생각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의 신상에 절하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그들을 처벌할 용광로를 일곱 배나 뜨겁게 했다. 이와 같이 로마의 교황도 '세상의 주' 그리고 '온 세계의 아버지'라는 신성 모독적인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을 때, 주님께 신실했던 자들을 피로 압제하기 시작했다. 교만은 박해의 씨앗과 같은 것이다. C. H. S.

2. "교만." 교만이란 사람들의 마음에 속히 들러붙는 악이다. 우리가 잘못한 것을 하나 하나 벗겨 간다면, 가장 단단히 붙어 있어서 제일 마지막까지 남는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교만일 것이다. 리처드 후커(Richard Hooker, 15541600).

3. "악인은 그 마음의 소욕을 자랑하며." 악인은 그의 악한 삶을 자랑한다. 이 말은 그가 사악한 계획을 성취한 것에 대해 공개적으로 자랑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가 원하는 대로 행하는 자들을 칭찬하는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이는 그가 오직 자신과 같은 사람들, 자신이 존경하는 사람들만 칭찬한다는 말이다(참조. 36:4; 49:18; 1:32). 조반니 디오다티(John Diodati, 1648).

3. "악인은 그 마음의 소욕을 자랑하며 탐리하는 자는 여호와를 배반하여 멸시하나이다." (KJV에는 "악인은······탐리하는 자를 축복하니"라고 번역되었다역자 주.) 사람들은 서로 같은 사람들을 좋아하기 마련이다. 주의 계명을 모두 무시하는 자들은 여러 가지 추한 죄를 범할 뿐만 아니라, 그들처럼 죄를 짓는 자를 칭찬한다. 그들은 이렇게 죄를 범하는 자들을 사랑으로 용납하고, 그들이 하는 말을 듣고 아첨하고 칭찬하며, 그들이 하는 것과 같은 행동을 하며 그들을 격려한다. 피터 머펫(Peter Muffet, 1594).

3. "탐리하는 자." 탐심은 우리가 소유하지 못한 것과 세상의 온갖 부귀를 갖고자 바라는 열망을 말한다. 이것이 상업이나 여러 가지 사업에 종사하는 자들의 특성은 아닌지, 또 사람들이 잘못된 것이라고 불평하는 불공정 거래의 근본 원인은 아닌지에 대해서는 내 주위에서 갖가지 상업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의 판단을 들어 보겠다. 우리 조상들은 매일 매일 근면하게 살면서 작지만 고정된 수입에 만족하며 살았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의 모습은 이와 대조적이다. 사람들은 단숨에 떼돈을 벌 궁리를 하고 있으며, 날마다 성급하게 돈벌이를 위해 모험을 감행하는데 이는 지난 삼사십 년 동안 탐심이 사람들의 마음에 자리를 잡았다는 것을 확실히 증언한다.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 사람을 시험하기 위해 이 땅에 일어난 산업혁명, 여러 가지 물품을 대량으로 생산하기 위한 훌륭하고 놀랄 만한 기계들이 수없이 많이 발명되어서 인간의 모든 생활에 영향을 미쳤고, 우리 조상들이 알지 못하던 세속적인 마음을 갖게 했다. 그 결과 우리 젊은이들은 성인이 되면서 조상들처럼 정직하게 살고 약속을 지키며 주님의 도우심을 따라 근면하게 일하면서 가족을 부양한다는 꿈을 갖고서 살아가지 않는다. 오히려 단번에 큰 돈을 벌어 편안하고 안일한 삶을 추구하며 온갖 사치스러운 삶을 즐기고자 한다.

형제들이여, 이러한 탐심을 물리치고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진지하게 부탁드린다. 기독교가 왕성하게 발전한 대영 제국의 대도시는 바로 이런 싸움의 중심부가 되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이 허영과 탐심의 세상에서 부르심을 받았다. 이렇게 택하심을 받은 것은 세상으로 물러서는 교회에 대해 이 사실을 증언하라고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그리고 확실히 탐심에 물들어 있다고 생각된다. 바로 이것을 그들에게 지적해야 한다. 탐심의 덫에 사로잡히지 않은 자가 어디 있는가? 에드워드 어빙(Edward Irving, 1828).

3. "탐리하는 자는 여호와를 배반하여 멸시하나이다." (KJV에는 "탐리하는 자······이는 여호와께서 멸시하는 자니이다"라고 번역되었다역자 주.)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6:24). 이는 한 사람이 하나님과 세상을 모두 섬길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도, 또한 세상도 한 사람의 일부분만 취하려 하지 않고 전체를 모두 취하려 하기 때문이다. 천사와 마귀는 모세의 몸을 서로 취하려고 다투었다(9). 그들은 모세의 몸의 일부분을 취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전체를 취하려고 했다. 그들은 지금도 우리의 영혼을 모두 취하려고 다투고 있다. 그러므로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말했다:"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이니라"(4:4).

하나님과 세상은 서로 대항하는 관계에 있어서, 세상이 일부라도 자리잡고 있는 사람과 하나님이 함께하실 수 없으며, 또한 하나님이 일부라도 함께하시는 사람과는 세상이 함께할 수 없다. 그러므로 세상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원수되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며, 세상을 사랑하려는 자는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탐심을 가진 자는 결코 하나님의 종이 되지 못하고,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탐심은 곧 우상 숭배라고 했다(5:5). 이것은 바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이다. 반역자가 왕의 궁전에 또 다른 왕을 세우듯이, 우상 숭배는 하나님의 자리에 또 다른 신을 세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헨리 스미스.

4. "악인은 그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치 아니하신다 하며 그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 (KJV에는 "악인은 그 교만한 얼굴로 하나님을 찾지 않으며 그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나이다"라고 번역되었다역자 주.) 다윗은 시 10편에서 힘있는 정치가들과 압제자들에 대해 말하는데, 그들은 이 세상에서 오직 자신만을 생각하고, 짐승처럼 자신들보다 더 약한 자들을 희생물로 삼으려 한다. 그들이 이렇게 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그들의 생각 가운데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구절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해석하지만, 그 의미는 모두 같다. 어떤 사람들은 "그의 교활하고 건방진 목적에는 하나님이 없다"라고 해석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그들은 모두 하나님은 없다고 생각한다"라고 해석한다. 이 구절은 악인들의 잡다하게 많은 생각 가운데 하나님에 대한 생각은 없다는 것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 그들이 마음속으로 모든 계획과 음모를 꾸밀 때에, 하나님이나 그분의 뜻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그들이 상의해야 할 하나님이 전혀 계시지 않는 것처럼 행동한다. 하나님이 마치 하나님이 아닌 것처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는다. 그분에 대한 생각과 그분의 뜻은 그에게 아무런 영향력도 미치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마침내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는 사상은 그들의 모든 악한 계획과 다른 사람을 해치고 속이는 행위의 근원이 되어 있다. 그들 위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는 생각, 그들을 징계할 분이 계시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그들은 담대하게 원하는 대로 행하는 것이다. 토머스 굿윈.

4. "악인은 그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치 아니하신다 하며." (KJV에는 "악인은 그 교만한 얼굴로 하나님을 찾지 않으며"라고 번역되었다역자 주.) 악인은 그를 위한 배심원이 아무도 없는 상태에서 교만한 자라는 판단을 받았다. 악인은 교만하다는 판결을 받은 후에도 용서를 받기 위해 겸손히 엎드려 순복하려고 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의롭다 함을 받기 원하면서도 하나님의 사랑이나 그분과의 평화를 누리기 위해 자신이 해야 할 의무를 다하지 않는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흘리신 피를 의지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받기보다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죽어 간다. !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저주받을 교만이여! 어느 때나 사람들은 자신을 하나님보다 지혜롭다고 생각하지 않게 될까? 하나님을 제한할 수 있다고? 하나님께서는 피로 영원한 언약을 세우시고 우리를 구원하고자 하시는데, 사람들은 어느 때나 이와 같은 하나님의 방법에 만족할 것인가? 어떻게 감히 사람이 이처럼 무한히 지혜로우신 하나님을 지시할 수 있단 말인가?

당신은 사람이 교만 때문에 스스로 파멸을 자초한다는 것을 인정하겠는가? 당신의 구원이 당신에게서 올 수 있는가? 당신은 자신의 죄로 자신에게 상처를 입혔다면, 값없이 주시는 은혜를 받고 치료받으려 하기보다 영원한 사망을 택하겠는가? 스스로 구원하려 하여 저주를 받겠는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3:16). 하나님은 이처럼 당신을 구원하고자 하시는데, 당신은 그렇게 교만하여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겠는가? 당신에게는 스스로 구원받을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당신에게 무엇을 말해야 하겠는가? 당신은 가련하고, 또 교만하다. 당신은 비참한 존재이건만, 아직도 무엇을 자랑한다는 말인가? 이것은 하나님을 진노케 하는 일이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 특히 영적으로 교만한 자를 대적하신다. 하나님은 사람이 자신의 의와 혈통을 자랑하는 것을 싫어하신다. 그리스도의 구원과 그의 의를 의지하여 사람을 구원코자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을 멸시하고 하나님께 순복하기를 거절하며,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더욱 멸시하시기 때문이다. 루이스 스터클리.

4. "악인은 그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치 아니하신다 하며." (KJV에는 "악인은 그 교만한 얼굴로 하나님을 찾지 않으며"라고 번역되었다역자 주.) 악인이 하나님의 지식을 구하지 않는 것은 그가 교만하기 때문이다. 교만은 온갖 방법으로 악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지 못하게 한다. 첫째, 이 교만은 악인으로 하여금 하나님은 묵상하기에 유쾌한 존재가 아니며 그분에 대한 지식을 갖는 것도 별로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게 한다. 교만이란 자신은 특별한 존재라고 분수에 맞지 않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만한 자는 경쟁 상대를 참을 수 없고, 자기보다 우월한 자를 미워하며, 자기 위에 주인을 두고 섬길 수 없다. 교만이 우리 마음에 더 폭넓게 자리를 잡아 갈수록 우리보다 위에 있는 것은 그 어떤 것도 바라지 않게 되고, 우리 자신의 의지 외에는 어떤 법도 인정하지 않게 되고, 우리가 원하는 것 외에는 어떤 법칙도 따르지 않게 된다. 이렇게 하여 사탄은 조물주를 대적하게 되었고, 우리의 조상 아담과 하와로 하여금 하나님처럼 되기를 소망하게 했다. 교만의 이러한 특성 때문에, 하나님처럼 되기를 원하는 생각보다 더 교만한 자의 마음에 고통을 주는 것은 없다. 그 하나님은 무한한 능력을 가지셨고, 공의롭고 거룩하시며, 어느 누구도 그분을 저항하거나 속일 수 없다. 그분은 자신의 뜻을 따라 모든 피조물과 사건들을 다스리시며, 특별히 교만을 미워하신다. 그분은 교만한 자를 심판하기로 작정하신 분이다. 그러므로 교만한 자는 하나님을 생각할 때에 두려움과 증오를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교만은 하나님을 자신이 무서워하고 대적해야 할 가장 핵심적인 원수로 간주한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이 교만한 자에게 하나님이 무한한 능력을 가지셨고, 그분은 사람이 저항할 수 없는 분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 이 지식은 하나님의 권위에서 벗어나 그분의 능력을 대항할 자는 아무도 없다는 점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께 순종하든지, 아니면 그분의 처절한 심판을 받아 영원한 불행 가운데 지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지식은 악인이 보기 싫어하는 것을 보게 하여, 그가 하나님을 저항한다 해도 결국은 하나님의 뜻이 설 것을 알게 하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모든 일이 이루어지고, 모든 교만한 사람들보다 하나님은 위에 계신다는 것을 알게 한다. 이 지식은 교만한 자들의 마음을 괴롭고 아프게 하며, 그 결과 그들은 이러한 진리를 가르쳐 주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싫어하고, 진리를 추구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 무지하기를 바라고, 그들의 마음속에서부터 그분에 대한 생각마저 추방해 버린다. 그들은 하나님의 참된 성품을 가르쳐 주는 계시의 말씀을 무시하고, 왜곡하며, 별로 중요한 것도 아닌 것처럼 설명하여 하나님이 마치 그들과 같은 존재나 되는 것처럼 믿으려고 노력한다.

교만이란 얼마나 어리석고, 어처구니없으며, 그 사람을 황폐하게 하고 파멸에 이르게 하는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려다가 오히려 아래로 떨어지며 진흙 구덩이로 곤두박질칠 뿐이다. 자신을 위해서 보좌를 세우려고 하면서, 결국에는 자신의 무덤을 파헤치는 것이다. 이 교만은 사탄을 하늘에서 지옥으로 떨어지게 한 것이며, 우리의 조상을 낙원에서 추방당하게 한 것이다. 이것을 허용하고 좋아하는 자들도 역시 파멸을 당하게 된다. 이것은 사람들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게 하고, 그분의 은혜를 받지 못하게 하며, 우리가 그분을 닮지 못하게 하고, 이 땅에서도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며 얻을 행복과 명예를 얻지 못하게 한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가 교만을 미워하고 이것을 좋아했던 것을 회개하며 이것을 버리지 않으면,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은 닫혀 버리고, 지옥으로 안내된 후에는 그곳에서 나가지 못하도록 문이 닫혀 버린다. ! 그러므로 내 형제들이여, 다른 무엇보다도 교만을 조심하시오! 당신들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것을 탐하지 않도록 주의하시오! 교만이란 다른 어떤 죄보다 가장 비밀스럽고, 교묘하게 우리를 사로잡기 때문이라오. 에드워드 페이슨(Edward Payson, D.D., 17831827).

4. "교만한 얼굴." 그가 품고 있는 교만은 그의 얼굴과 이마에 새겨져 있어서, 그가 하는 모든 행동에 나타나게 된다. "하나님을 찾지 않으며"라는 말은 그가 하나님과 사람의 모든 법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는 아무것도 상관하지 않으며 자신의 욕망만 채운다. 그는 어떤 것도 궁금해 하거나 알려고 하지 않으며, 모든 것에 무관심하게 지낸다. 조반니 디오다티.

4. "그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을 "그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라고 해석한다. 세네카(Seneca)는 완벽한 무신론자는 없다고 했다. 누군가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한다면, 그는 자신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다. 그들이 낮에 이 말을 했다 할지라도, 밤이 되어 그들이 홀로 있을 때에는 낮에 했던 말을 부인한다. 그들이 마음을 더욱 강퍅하게 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셔서 그들이 두려움을 느끼게 되면, 그들은 하나님이 계시다고 고백하게 된다. 많은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했다. 그러나 그들이 어려움에 처하고 넘어지게 되면, 그들도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유명한 무신론자 디아고라스(Diagoras)는 극한 고통에 처했을 때, 그가 그토록 부인하던 하나님을 결국 인정하고 말았다. 이러한 무신론자들을 위한 하나님의 자비가 남아 있는지는 모를 일이다. 다만 그들을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맡길 뿐이다. 리처드 스톡.

4. "그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 경건치 못한 자나 무신론자에게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 것과 같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기뻐하지 않는 자에게 하나님이 무슨 위로가 되겠는가? 잊혀진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스티븐 차녹.

4. "악인은 그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치 아니하신다 하며 그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 (KJV에는 "악인은 그 교만한 얼굴로 하나님을 찾지 않으며 그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나이다"라고 번역되었다역자 주.) 사소한 것들이 우리의 생각을 사로잡아 우리에겐 정작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생각할 시간이 별로 없다. 이상스러운 일이지만 우리는 세상의 일시적인 것들에 대해서는 지속적으로 생각을 하면서도, 지속적이고 영원하신 하나님에 대해서는 잠깐 동안 생각하고 만다. 하나님은 우리와 은혜의 언약을 맺으시고, 우리가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바라보기를 바라신다. 그러나 하나님과 수많은 사람들의 영혼은 왜 이리도 서로에게 이방인과 같은지! 그분이 우리를 지으신 조물주라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하나님을 기뻐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와 긴밀한 관계를 맺지 못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의 지혜를 따르지 않고, 그분의 온전하심을 묵상하지도 않고, 그분의 선하심을 찬송하지도 않기 때문에 다른 것들을 노래하는 시보다도 그분을 노래하는 시가 적은 것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생각할 때면 그들의 이성과 상상의 나래를 접어 버린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육체적인 힘과 곡식과 포도주가 주어졌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저주받은 바알에게 바치고 말았다(2:8). 우리도 세상의 주를 따르기 위해 하늘을 버리지 않는가. 스티븐 차녹.

4, 5. 세상의 영적 현혹과 마력에 이끌려 자신과 하나님의 존재를 망각하는 자들이 많이 있으며, 그들은 술 취함과 쾌락에 빠져들고, 쉽게 미치거나 어리석은 일을 하곤 한다. 어떤 사람들은 어리석은 아이처럼 헛된 자기 과시를 위해 매우 사소한 일로 큰 분란을 일으킨다. 그들은 스스로를 위대하고 굉장한 인물로 보고서 이런 분란을 일으키지만, 사실 세상은 이 일로 그들의 존재 가치를 조금이라도 더 귀하게 생각해 주지는 않는다. 또 어떤 사람들은 야수와 같이 변해서 사자나 호랑이처럼 포학하게 살기도 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돼지처럼 더러운 욕망에 몸을 맡기고 살기도 한다. 어떤 사람들은 사람의 마음이나 애정을 버리고, 다른 사람들을 억눌러서 위대한 자가 되려고 한다.

카이우스 칼리굴라(Caius Caligula), 아하수에로(Xerxes), 알렉산더(Alexander), 그리고 다른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존재라고 생각했는데, 그들의 괴상한 행동에 대해서 읽는 자들은 경악을 금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태어나 마침내 죽게 되는 인생뿐이라는 것을 망각하고 그렇게 했지만, 사람들의 우스갯거리요 어린이들에게까지 조롱당한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우리는 이것을 세상의 명예와 쾌락에 중독된 자들의 희귀하고 이상한 행동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우상에게 절하는 모든 사람들의 일반적인 행동이다. 그들은 세상에서 미친 짓을 할 때에도 그들을 제어할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살아간다. "그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나이다"(4). "주의 심판은 높아서 저의 안력이 미치지 못하오며 저는 그 모든 대적을 멸시하며"(5). "그 마음에 이르기를 나는 요동치 아니하며"(6). 이 시는 자신의 이성을 잃어버리고 광기어린 행동을 하는 자를 묘사하고 있다. 마귀가 활동하기에는 세상이 주는 쾌락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겠는가? 리처드 길핀.

5. "견고하고." 이 말은 사람을 슬프게 하고 괴롭게 한다는 말이다. 즉 그가 하는 모든 노력이나 행동은 다른 사람을 괴롭게 하는 데에만 목적을 두고 있다는 말이다("견고하다"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야힐루"<wlyjy>이며, 이 단어의 원형인 ''<lwj>'회오리치다', '고통이나 산고로 몸을 비틀다'라는 뜻이 있다역자 주).

"높아서." 그는 하나님의 율법에 나타난 공의를 이해할 수 없다. 그는 지극히 육적인 사람이고, 하나님의 말씀은 영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육적인 사람은 율법에 나타난 공의로운 삶을 살지 못한다(7:14; 고전 2:4).

"멸시하며." 그는 가장 교만하게 사람들을 멸시하며, 그들을 쉽게 무너뜨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조반니 디오다티.

5. "주의 심판은 높아서 저의 안력이 미치지 못하오며." 하나님께서 죄를 즉각적으로 심판하시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땅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심판하신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인간의 법정에서는 어떤 사건에 대해 공개적으로 신속히 잘잘못을 가려서 판결을 내려야 한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죄를 다루시는 방법은 이와 다르다. 그분은 더 고상하며 시간을 두고서 처리하시므로, 악한 자의 눈이 이것을 볼 수 없고 사람의 천박한 지혜로 이해할 수도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모든 법정에 앉으셔서 판결을 즉각 즉각 내리신다면, 바보들이라도 그분의 의를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분은 즉각 즉각 심판하시지 않기 때문에 악인들은 더 높은 법정, 곧 하늘의 법정에서 이루어지는 심판이 더욱 엄숙한 것임을 이해하지 못한다. 성도들도 조심하여 그들과 같은 오류에 빠지지 말고, 지극히 존귀한 분께서 행하시는 것을 비판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은 너무 높아서 사람의 이성으로 그것들을 다 이해하지 못한다. C. H. S.

5. "주의 심판은 높아서 저의 안력이 미치지 못하오며." 독수리는 하늘 높이 날며 '저의 안력이 미치지 못하게 하라'고 스스로에게 다짐한다. 땅에 있는 먹이감이 하늘을 나는 독수리의 발톱을 보지 못하게 하고, 독수리에게 잡힐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라는 것이다. 땅에 있는 사냥감이 독수리의 발톱을 보지 못하여 두려워함이 없듯이, 악인은 아무런 두려움 없이 죄를 짓다가, 곧 절망하게 된다. 처음에는 "하나님께서 보시겠느냐?"라고 하지만, 마침내 "!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시겠느냐?"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자신이 지은 죄를 기억하지 못한다 해도, 죄가 그를 기억해 낼 것이다. 오만함으로 닫았던 눈은, 두려움으로 열리게 마련이다. 토머스 애덤즈.

5. "저는 그 모든 대적을 멸시하며." 다윗은 교만한 자들을 '대적에게 콧방귀를 뀌는' 자들로 묘사했다(히브리어로 "야피아흐"<jypy>의 원형 '푸아흐'<jwp>'숨을 내쉬다', '콧방귀를 뀌다'라는 뜻이며, 여기서는 "멸시"라고 번역되었다역자 주). 그는 다른 사람들을 멸시하며 마치 자신이 위대한 존재나 되는 것처럼 자만심으로 부풀어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에게 무슨 큰 해나 끼칠 수 있는 것처럼 그들을 향해 콧방귀를 뀌어 대는데, 그는 자신이 이 세상에서 그저 사라져 가는 한낮 콧방귀나 바람과 같은 존재라는 것을 잊고 있는 것이다. 조셉 캐릴.

5. "저는 그 모든 대적을 멸시하며." 이 구절을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저는 그들에게 휘파람을 불며'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사람들에게 지극히 냉담하고 무관심하며, 다른 사람들을 자신처럼 돌보는 일이 결코 없다. 그의 대적이 누구이든 간에 그는 상관하지 않는다. 멸시와 조롱이 그가 가진 유일한 무기이다. 거룩한 성품을 가진 자와 함께 일하는 법을 잊어버린 자들이다. 그는 습관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멸시하고, 세상의 지혜 있는 자들이 내리는 판단이나 의견, 그들의 행하는 것들을 경멸한다. 존 모리슨.

6. "그 마음에 이르기를 나는 요동치 아니하며 대대로 환난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나이다." 세상에 속한 것으로 안전을 추구하면 그 영혼에는 경건치 못한 것들이 침투하게 된다. 폼페이(Pompey)는 어느 성을 공략하다가 그 성을 점령하지 못하게 되자 그 성 안에 있는 사람들과 약속을 맺으며 이와 같은 전략을 썼다. 그는 전투에서 부상당한 몇몇 군인들을 그 성에서 받아들이고 치료해 준다면 그 성의 포위를 풀고 철수하겠다고 했다. 그들은 군인들을 받아들였다. 그 성에 있는 사람들이 이제는 안전하다고 믿고 안심하고 있을 때에 그 군인들은 성문을 열고 폼페이의 군대를 성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세상에 있는 것들을 소유했다고 해서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그 영혼에 탐심의 대군을 불러들이는 것과 같다. 토머스 브룩스.

6. "그 마음에 이르기를 나는 요동치 아니하며 대대로 환난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나이다." 하나님을 믿는 삶이란 편안하기만 한 삶이라고 생각하는 것,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어떤 노력도 하기 전에 그 결과를 얻은 것처럼 축하하는 것, 영적 전쟁을 벌이기도 전에 의의 면류관을 얻기를 바라는 것, 진정한 위로를 주는 은혜를 얻기 위해 어떤 노력도 하지 않은 채 거짓 된 평안에 만족해 하는 것, 이런 것들은 어떤 항해사가 표현했듯이 바다에서 불현듯 당하는 무서운 적막과도 같은 것이며, 지극히 무서운 사건의 전주곡과도 같은 것이다. 망망대해에서 어느 순간 갑자기 바람이 그치고 바다가 고요해지며, 해면이 수정처럼 맑고 유리처럼 잔잔해지면, 아무 경험 없는 여행객들은 기분이 좋아지고 행복해 하지만, 경험이 풍부한 항해사들은 두려움에 떤다. 순식간에 물결이 솟구치고, 바람이 일기 시작하며, 천둥이 치고, 배를 삼킬 듯한 파도가 입을 열며, 하늘에는 번갯불이 번쩍이고, 매순간 밀려오는 파도는 배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가려는 듯 위협할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풍요로운 것으로 구원받았다고 안심하는 자들은 이와 같은 자들이다. 제임스 소린(James Saurin, 16771730).

7. "혀 밑에는 잔해와 죄악이 있나이다." 이 무시무시한 표현은 독사의 모습을 염두에 두고 표현한 것인데, 독사는 이빨 밑에 독주머니를 가지고 있어, 교활하게 목표물에 접근하여 마침내 사정 거리내에 있게 되면, 목표물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힌다. 이 표현은 불신앙으로 오염된 마음이 성도들을 얼마나 황폐하게 하는가에 대해 잘 묘사하고 있다. 그들이 진리를 왜곡하며 부도덕한 감정과 행동으로 성도들의 마음에 끼치는 해독은 치명적인 독이 몸에 끼치는 해독과 방불한 것이다. 존 모리슨.

7. "저주." 저주하는 사람들은 저주받은 사람들이다. 존 트랩.

79. 앤 아스큐(Anne Askew)는 보너(Bonner) 주교에게서 심문받은 것에 대해 기록했는데, 이 기록에는 박해자의 잔혹함이 잘 나타나 있다:"다음 날, 런던에 계시는 내 주인께서는 나와 세시에 만나게 되어 있었는데도 한시에 나를 불렀습니다. 주인님께 나아갔을 때, 내게 매우 미안하다고 말씀하시며 나를 공격하는 이러한 일들에 대해 내가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물었습니다. 주인님은 내 마음속에 품고 있는 비밀들을 모두 털어놓으라고 했답니다. 내가 그의 집에서 말한 것으로 인해서는 결코 어느 누구도 나를 해하지 못한다고 말하며 내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세시에 만나기로 되어 있고, 내 친구들도 세시가 되기까지는 아무도 오지 않을 테니 그때까지 내가 말하지 않도록 허락해 주십시오'라고 부탁했습니다."

이 기록에 대해 베일(Bale) 씨는 이렇게 말했다:"이와 같은 심문에서 바벨론의 교구, 피에 목마른 여우가 먹이를 잡아먹고자 하는 탐욕을 읽을 수 있습니다. 다윗은 '이 사람들은 혀로는 거짓을 말하고, 입술에는 독이 있으며, 입에는 가장 잔혹한 복수심을 채우면서, 아무 죄도 없는 자의 피를 흘리기 위해 정말 신속히 움직인다'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그들이 영적인 지도자로 있으면서도 이처럼 미쳐서 믿음을 가진 자들을 압제하는 것을 적법한 일로 생각하고, 마치 빵 한 조각을 먹어 치우듯이 아무런 동정심도 없이 그들을 먹어 치우는 것을 보고서 놀랐습니다. 이들이 하나님에 대해 한 구절이라도 읽었더라면 이렇게 행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진정한 의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상관하지 않았지요. 제레미는 '잔혹한 박해자들은 공중의 독수리보다 더 빨리 움직입니다. 그들은 산을 넘어가면서 우리를 추적하고, 광야에서 우리를 은밀히 기다린답니다. 성도들을 박해하던 교구들이 그들이 희생물로 삼은 자들을 얼마나 교묘하게 다루었는가를 알고자 하는 자는 이 기록에서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내 생각으로는 가룟 유다조차도 그들의 음흉한 계략의 십 분지 일도 갖지 못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존 베일(John Bale, D.D., 오소리의 주교, 14951563, Examination of Anne Askew, Parker Society's Publications).

8. "저가 향촌 유벽한 곳에 앉으며." 아랍의 강도들은 모래 언덕에 이리처럼 숨어 있다가 혼자 다니는 여행객을 갑자기 덮쳐 물건이나 돈을 빼앗은 후, 광야의 모래 언덕과 갈대밭으로 도망치는데 그들을 추적할 길이 없다. 우리 친구들은 뿔뿔이 흩어지거나 뒤처지지 않도록 늘 조심을 시키기에 이런 일을 당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이곳에서 강도 사건은 흔히 일어난다. 참 이상한 나라이다! 구약의 역사서, 시편, 선지서에는 이런 일들이 수백 번이나 언급되어 있다. 그래서 시편 10:810에도 이런 표현이 나타난다:"저가 향촌 유벽한 곳에 앉으며 그 은밀한 곳에서 무죄한 자를 죽이며 그 눈은 외로운 자를 엿보나이다 사자가 그 굴혈에 엎드림같이 저가 은밀한 곳에 엎드려 가련한 자를 잡으려고 기다리며 자기 그물을 끌어 가련한 자를 잡나이다 저가 구푸려 엎드리니 그 강포로 인하여 외로운 자가 넘어지나이다." 수많은 악당들, 바로 이 시에 나오는 사람과 같은 악당들이 곳곳에 숨어 기다리며 가련하고 힘이 없는 여행객들을 노리고 있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이 모두 무장을 하고 있다. 각 성에 있는 대포들이 안전을 유지하고 질서를 지키는 듯하지만, 사람들은 권총 없이는 어느 곳에도 가려고 하지 않는다. 이곳은 세상에서 가장 이상한 나라이다! 그러나 이 나라는 고대로부터 이런 역사를 이어왔다. 톰슨(W. M. Thomson, D.D., The Land and the Book, 1859).

8. "저가 향촌 유벽한 곳에 앉으며 그 은밀한 곳에서 무죄한 자를 죽이며." 내 동료들은 내가 금방 당할 뻔했던 위험이 무엇인지 아느냐고 내게 물었다. "아니오"라고 답했다. 그리고 "무슨 위험이지요?"라고 묻자 그들은 그들이 떠난 직후에 일어났던 일을 말해 주었다. 어느 험상궂게 생긴 아랍 사람이 땅에 바짝 붙어서 잠복하며 나를 뒤쫓았는데, 그의 손에는 권총이 들려 있었다. 권총으로 나를 쏠 수 있는 지점에 이르렀을 때, 그는 권총을 들었다. 그러나 사람이 어떤 결정적인 행동을 하기 전에 주위를 살피듯이,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살피다가 그들 일행을 보게 되었고, 그래서 슬그머니 사라져 갔다. 예레미야의 글을 보면 이런 아랍 사람들의 행동을 알고 있었던 듯하다:"네가 길가에 앉아 사람을 기다린 것이 광야에 있는 아라바 사람 같아서 음란과 행악으로 이 땅을 더럽혔도다"(3:2). 이 시의 910절에 나오는 내용도 아랍 사람들이 그 해할 자를 적극적으로, 그리고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는 것을 비유하는 데 사용되었다. 존 개즈비(John Gadsby, My Wanderings, 1860).

8. "저가 향촌 유벽한 곳에 앉으며 그 은밀한 곳에서 무죄한 자를 죽이며 그 눈은 외로운 자를 엿보나이다." 이 모든 강렬한 비유는 진리와 의의 원수들이 그들의 타락하고 사악한 뜻을 이루기 위해 보이는 열심과 교활함과 저질스런 책략을 묘사하기 위한 것이다. 그들의 최대 목적은 참된 종교를 근절시키는 것이다. 이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그들은 가능한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할 것이다. 여러 세대에 걸쳐서 그리스도의 교회를 압제하던 세상의 권력들이 이것을 증거한다. 세상의 권세들과 천주교의 교황들이 이처럼 악명을 떨쳤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불쌍한 양 떼들을 잡으려고 문자 그대로 매복해 있었다. 그들은 극악무도한 모든 전략을 동원했다. 이 일을 이루기 위해서 왕궁에 있는 고귀한 왕자들로부터 동굴에 사는 거지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과 손을 잡았다. 그리고 시골로부터 사람이 많고 번잡한 도시에 이르기까지 모든 곳에서 수색 작업을 펼쳤다. 이 모든 일은 영원히 지속될 이름, 태양이 있는 한 계속될 이름을 지우려는 헛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존 모리슨.

9. "저가······가련한 자를 잡나이다." 그들이 사냥하는 동물은 가련한 자이다. 이 가련한 자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밤에는 늦게야 쉬며, 슬픔의 떡을 먹고, 여러 사람과 함께 배고픈 식사를 하고, 어쩌면 그의 자녀들은 배고파 울며, 그가 고통스럽게 얻은 모든 음식은 니므롯에게 바쳐졌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가난한 자를 희생물로 삼는 자들은 저주를 받을 것이다. 이것은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울리는 죄이다. 여호와의 귀는 가련한 자들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실 것이며, 그분의 분노의 손은 이것을 행하는 자들을 용납하지 않으실 것이다. 가련한 자가 침묵한다 할지라도, 돌들이 외칠 것이다. 구금, 구타, 폭행, 압제, 괴롭힘,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그 원한을 갚아 주실 것을 간구할 것이다. "담에서 돌이 부르짖고 집에서 들보가 응답하리라"(2:11).

그들이 사냥하는 사냥물들을 보라. 이것들은 이리나 여우나 황소나 호랑이가 아니다. 어떤 야수들도 자기와 같은 종류를 먹어 치우고자 사냥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이런 야수보다도 못한 존재들이다. 그들은 사람이면서도 자신들과 같은 사람을 사냥한다. 그러나 이 악한 자들은 그들이 사냥하는 가련한 자들과 질이 다른 존재들이다. 이 가련한 존재들은 양과 같아서, 그들 안에는 피와 살이 있고 양털이 있다. 그러므로 이 악한 자들이 가련한 자들을 삼키고자 사냥하는 것이다. 그들이 가진 무기는 악한 자들의 잔혹함에서 자신을 보호하기에는 너무도 약한 것이다. 그러므로 악한 자들이 이들을 다스린다. 내가 담대히 말할 수 있다. 이 세상에서 자신과 동등하게 경쟁할 수 있는 자들을 사냥할 강한 니므롯은 없다. 이 니므롯들은 젊은 네로처럼 자신보다 약한 자, 양처럼 순한 자들만을 공격한다. 그들이 식인종이 아니면 좋으련만. 세난누스가 티베리우스의 호의를 받는 한, 마크로만이 그에게 인사할 것이다. 그를 정상에서 땅으로 내던져 보라. 개들이 그 살을 먹을 것이다. 토머스 애덤즈.

9. "저가······가련한 자를 잡나이다." 사람을 압제하는 왕자는 부르짖는 사자와 같고, 재판장은 저녁 이리와도 같다. 이 죄는 자연의 진리와 빛에 역행하는 죄이다. 어떤 피조물도 자신과 동류의 짐승을 해치지는 않는다. 공중의 새를 보라. 독수리, , 이들은 결코 자신과 같은 종류를 사냥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것이다. 삼림에 사는 짐승들을 보라. 사자, 호랑이, 이리, , 이들은 자신들과 동류의 짐승들에게는 호의적으로 대한다. 그러나 유독 사람만은 다른 사람들을 희생물로 삼는데 마치 바다의 물고기와도 같다. 바다의 물고기들은 큰 물고기가 작은 물고기를 삼켜 버린다. 토머스 브룩스.

10. "저가 구푸려 엎드리니." 그들은 사악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어떤 수단이라도 효과만 있다면 치사하고 비굴하다고 마다하지 않는다. 무지한 대중에게 영향력을 끼치기 위해서 교황이 순례자의 발을 씻어 주는 모습도 볼 것이고, 또한 세상의 왕들을 조종하기 위해서라면 그가 자주색 보좌에 앉아 있는 모습도 볼 것이다. 존 모리슨.

10. "저가 구푸려 엎드리니." 양의 탈을 쓴 이리를 보거든, 그를 교수형에 처해라. 그는 이 세대에서 가장 악한 자이다. 토머스 애덤즈.

11. "저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잊으셨고." 과거에 범한 죄에 대해 아무런 주의도 기울이지 않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아닌가? 사람이 과거에 지은 죄를 잊었다고 해도, 모든 것을 아시는 그분은 그것을 잊지 않으신다. 영원 전부터 계신 그분께는 시간이 흐른다고 해서 잊혀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부터 사람이 죄를 짓기 전에 이것을 미리 아셨고, 또 죄인은 그것을 다시 범할 수도 있는데 이것을 잊으시겠는가? 아말렉 족속은 고대에 이스라엘에게 죄를 범했다. 그러나 죄를 범한 조상들이 무덤 속에서 썩어진 지 오랜 후, 사울 시대에 후손들이 조상들의 죄를 갚아야 했다(삼상 15:2). 옛날에 지은 죄일지라도 항상 하나님 앞에 있는 책에 기록되어 있다. 이 죄는 우리 자신만의 죄가 아니라, 후손들이 치러야 할 조상들의 죄도 포함되어 있다:"보라 이것이 내 앞에 기록되었으니"(65:6). 그러므로 우리 조상들이 범한 죄라고 무관하게 생각하는 것은 소용 없는 일이다. 이 죄악들을 우리가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기억에서도 사라졌겠는가? 죄란 그 값을 모두 치르기까지 함께 묶여 있는 것이다:"에브라임의 불의가 봉함되었고 그 죄가 저장되었나니"(13:12). 하나님은 사람들이 앞으로 행할 모든 일을 다 아시듯이, 또한 과거에 행한 모든 일도 기억하신다. 하나님께서 곧 잊어버리실 일을 미리 아셨겠는가? 그분에게는 결코 잊음이 없으시다. 스티븐 차녹.

11. "저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잊으셨고 그 얼굴을 가리우셨으니 영원히 보지 아니하시리라 하나이다." 많은 사람들이 입술로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바라보고 계신다고 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하나님이 보지 아니하시리라"고 말한다. 얼굴에만 혀가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도 혀가 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다른 혀는 같은 말을 하는 법이 거의 없다. 우리의 얼굴에 붙어 있는 혀는 "우리는 하나님의 시선에서 피할 수 없다"라고 말하지만, 악한 자들의 마음에 있는 혀는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숨으시고, 우리를 바라보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사야 선지자 또한 이같이 말했다:"그들은 자기의 도모를 여호와께 숨기고자 구덩이를 깊이 팠다"(29:15, KJV). 이들은 자신의 도모를 숨기고자 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구덩이를 깊이 파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들이 땅을 깊이 파고 숨기는 것처럼, 그들은 자신들의 지혜와 계교와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그들의 계교를 하나님에게서 숨기려 했다. 그리고서 "누가 보겠느냐? 누가 알겠느냐? 사람도, 하나님도 우리가 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조셉 캐릴.

11. "저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잊으셨고 그 얼굴을 가리우셨으니 영원히 보지 아니하시리라 하나이다." 성경은 모든 죄의 뿌리를 여기서 찾는다. 악한 자들이 9, 10절에 기록된 대로 가련한 자를 압제하는 것은 바로 이런 생각을 기초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쓴 뿌리와 같다. 모든 죄는 이 쓴 뿌리에서 시작되고 자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에 대한 믿음이 없어지거나 희미해지면, 밤새에 사람의 야심과 탐심, 하나님을 만홀히 여김, 불신앙, 조급함, 그리고 다른 나쁜 것들이 자라게 된다! 이러한 생각에 근거하여 사람들은 담대히 악을 행한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삶 속에서 친히 간섭하신다는 것을 믿는 믿음처럼 인간의 타락을 막고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것은 없다. 스티븐 차녹.

11. "저의 마음에 이르기를." "악한 일에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않으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기에 마음이 담대하도다"(8:11). 하나님께서 사람이 회개하기를 기다리시며 징계를 지체하시므로 사람들은 회개하기를 지체한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등을 후려쳐서 징계하지 않으시므로, 사람들은 부끄러워하며 볼기를 치지 않는 것이다(31:19). 죄인들은 이렇게 생각한다:"하나님은 지금까지 나를 징계하지 않으셨다.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나를 징계하지 않으실 것이다." "저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잊으셨고."

때로 하나님은 무한히 인내하시며 징계하기를 연기하신다(벧후 3:9). 꿀벌은 일상적으로 꿀을 내며, 분노할 때에만 침으로 쏜다. 여호와께서는 사람들이 그분과 화목하기를 바라신다(27:5). 하나님은 빚을 갚으라고 독촉하며 갚을 시간도 주지 않는 조급한 빚쟁이와 같은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실 뿐만 아니라 은혜를 베풀기 위해 기다리신다:"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30: 18). 하나님은 인내하시면서 죄인이 회개하도록 기다리신다. 그러나 아! 사람들은 이 하나님의 인내를 너무나 오용하지 않는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 사람들의 마음을 완악하게 만든다는 말인가! 하나님께서 진노 가운데 복수하지 않으시므로, 죄인들은 눈물의 샘을 막아 버린다. 토머스 왓슨.

11. "저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잊으셨고 그 얼굴을 가리우셨으니 영원히 보지 아니하시리라 하나이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계속해서 용서하시므로, 그들은 계속해서 하나님을 격노케 한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생을 연장시키시는 만큼, 그들은 탐욕을 더해 간다. 이것은 병을 고칠 의사가 있다는 이유로 사람이 자기 뼈를 부러뜨리는 것과도 같은 것이 아닌가?······하나님의 공의가 그들에게 눈짓을 하자, 사람들은 그를 소경이라고 생각한다. 그분이 심판을 지체하자, 사람들은 그가 심판을 거부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분이 그들의 죄를 항상 견책하는 것은 아니기에, 그들은 그가 죄를 항상 용인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을 기억하라. 큰 소리나는 포탄뿐만 아니라 조용한 화살도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것을. 하나님의 인내는 지속될지라도, 그것이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아니다. 윌리엄 세커.

1113. 무신론자들은 하나님께서 이 땅의 일을 주관하신다는 것을 부인한다:"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극히 높은 자에게 지식이 있으랴"(73:11). 이렇게 해서 그분을 보는 눈도 없고 능력의 팔도 없는 무능한 신으로 격하시키거나, 구름 위에 있는 것들만 간섭하는 신으로 제한시키려 한다. 그러나 왕이신 그분을 하늘의 보좌에만 국한시키려 하는 자들은, 곧 그 보좌에서도 하나님을 끌어내리려 하고, 마침내 그분을 정면으로 부인하게 된다. 토머스 풀러.

13. "어찌하여 악인이 하나님을 멸시하여 그 마음에 이르기를 주는 감찰치 아니하리라 하나이까." 한 조종사가 필사적으로 땅을 향해 기관총을 쏘아 댔다. 그의 선임자는 그에게 지금은 어떤 법도 그를 제지할 수 없지만 마지막 심판날에는 이 모든 행위에 대해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 조종사는 "그날이 이르기까지 내가 살아 있다면, 내가 당신을 이 비행기에 태우고 가겠소"라고 답했다. 이 땅에서 사람들을 압제하는 자들은 그들이 말로 표현하지는 않을지라도, 마음속에 이와 같이 자기 기만을 품고 스스로 위로하며 살아간다. 토머스 애덤즈.

13, 14.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기억하지 않으신다고 생각하는가? 우리가 죄를 짓는 동안 죄의 점수는 올라가고, 재판관은 기억의 책에 이것을 기록하고, 마침내 그 내용이 하나님께 도달하게 된다. 고리대금업, 소작인에 대한 착취, 속임수 카드 놀이, 난잡한 화장, 노름, 영혼을 굶주리게 함, 성직 매매, 이외의 모든 행위에 대해 하나님께 해명을 해야 할 것이다. 더러운 쾌락을 추구했던 행음자, 수천의 영혼을 죽였던 부주의한 성직자, 가난한 소작인에게서 과도하게 돈을 착취했던 지주, 이 모든 자들이 마지막 나팔 소리가 울릴 때에 도살할 양처럼 끌려나오고, 하늘과 땅이 그들을 심판하게 될 것이다. 하늘이 두루마리처럼 말리고 땅이 불에 소멸되는 날, 모든 피조물들이 그들을 대적하게 될 것이다. 바위가 갈라지고, 산이 흔들리고, 땅의 기초가 떨릴 때에 그들은 산을 향해 "우리를 덮으라. 우리 위에 떨어지라. 우리가 대적했던 그분의 진노와 임재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하라"고 외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어디에도 숨어 피할 곳이 없을 것이다. 그들은 뱀과 독사가 우글거리는 곳, 그곳으로 가서 영원히 마귀에게서 고통을 받으며 지내게 될 것이다. 헨리 스미스.

14. "주께서는 보셨나이다 잔해와 원한을 감찰하시고 주의 손으로 갚으려 하시오니." 하나님은 악인이 그분의 위엄을 대적하며 품었던 모든 생각과 행동에 대해 심판하실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모든 것을 해명해야 할 악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모든 행동을 감찰하고 계신다는 것에 대해 공포심을 품어야 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죄를 짓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느껴야 한다. 그들이 욕망에 불타고, 증오심을 품고 사람을 해하며, 의로운 자를 멸시하고, 무죄한 자를 박해할 때, 그들은 하나님의 시선 앞에서 이 모든 것을 행했을 뿐만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가슴 속에서 이 일을 행한 것이다. 그분은 그들이 들판의 야생 나귀처럼 살아가는 것을 잠시 두고 보셨지만, 마침내는 그들을 찾아내고 파멸시키실 것이다. 이것이 악인에게 공포가 되는 것처럼, 의인에게는 위로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도와주시며, 그들에게 이처럼 가까이 계시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들로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게 한다. 우리가 어느 곳에 있든지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하심을 확신할 수 있다. 윌리엄스(G. Williams, 1636).

14. "외로운 자가 주를 의지하나이다." 우리가 고통을 당하는 것은 서로 신뢰하지 못하는 데서 연유한다. 믿음이 없는 자들이 약속을 따르는 것은 얼음 위를 걸어가는 것과도 같다. 그가 얼음 위를 처음 걸어갈 때는 얼음이 깨지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으로 가득 차서 걸어간다. 그러다가 점차 마음으로부터 하나님께 순복하면, 하나님의 능력과 신실하심, 그리고 그분의 다른 성품들을 더 알아 가게 되고(하나님의 성품을 잘 모르기 때문에 우리 마음에 질투가 일어나는 것이다), 그분의 성품과 약속을 그의 삶 속에서 체험하게 된다. 우리의 믿음은 어린아이와 같이 약해서, 이러한 체험을 하게 되면 더욱 강한 믿음으로 그분을 의지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 구절을 자세히 살펴보고, 여기 기록된 대로 매일 아침 당신을 하나님의 손에 의탁하라. 밤이 되면 하나님께서 당신을 돌보신 일을 생각해 보고, 그분의 신실하심에 감동하라. 밤에도 하나님이 지켜 주실 것을 믿고 의지하기 전에는 잠자리에 들지 말라. 당신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그리고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얻은 축복을 상실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이것을 어떻게 채우시는지 자세히 주의하여 살펴보라. 하나님의 선하심을 마음속으로 확신하기까지 포기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에 대해 조금이라도 불만족스러운 생각이 들지 않도록 하라. 다윗처럼 당신의 마음을 경계하라(42).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며 더욱 깊고 넓은 믿음으로 인생의 긴 경주를 달리게 될 것이다. 윌리엄 거놀.

14. "주는 벌써부터 고아를 도우시는 자니이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불행한 환경에 처한 자들을 특별히 보살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고아를 도우시는 자"라고 부른다. 교회는 하나님을 이렇게 부르며 그분께 나아갔다. "고아가 주께로 말미암아 긍휼을 얻음이니이다"(14:3). 우리 하나님은 이 세상을 다스리신다. 그분은 지혜로워서 실수하는 법이 없고, 신실하셔서 속이는 법도 없으며, 불쌍히 여기셔서 그분의 백성을 버리지 않으시며, 능력이 많으셔서 원하신다면 돌들을 명하여 떡덩이가 되게 하실 수도 있다! 이런 하나님이 계신다는 생각을 하면 얼마나 위로가 되는가!······하나님은 이 세상의 군주처럼 자신의 이기적인 뜻을 따라서 다스리시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지혜와 자비로운 아버지의 선하심을 따라 다스리신다. 그분은 절대 능력과 이해할 수 없는 지혜를 나타내 보이기를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무한하신 선을 보이기를 가장 기뻐하신다. 그분의 다른 모든 특성들은 그분의 '선하심'에 뒤따르는 것이다. 스티븐 차녹.

14. "주께서는 보셨나이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행하는 것을 보지 않으신다면, 우리가 죄를 지어도 벌을 받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악을 용납하지 못하는 순결한 눈으로 우리의 모든 행위를 보시고, 죄인을 징계하시고 공의를 행하신다. 다윗은 하나님이 사람을 감찰하시는 목적이 바로 이것을 행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주께서는 보셨나이다 잔해와 원한을 감찰하시고 주의 손으로 갚으려 하시오니 외로운 자가 주를 의지하나이다 주는 벌써부터 고아를 도우시는 자니이다." 이처럼 시편 기자는 여호와께서 사람들의 모든 행위를 보셨다고 묘사했다:"주께서는 보셨나이다." 하나님께서 보신 것은 무엇인가? 그분은 악인의 모든 악한 행위와 가난한 자를 압제한 그 모든 행위를 보셨다. 또한 악인이 하나님을 향해 신성 모독적인 말을 한 것도 보셨다. "어찌하여 악인이 하나님을 멸시하여 그 마음에 이르기를 주는 감찰치 아니하리라 하나이까"(13). 시편 기자는 이 헛되고 자만심에 차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무엇을 하신다고 말하는가? 주께서는 잔해와 원한을 감찰하셨다고 했다. 이렇게 감찰하시는 목적은 무엇인가? 그 목적은 "주의 손으로 갚으려 하시오니"라고 했다. 그들이 원한을 품고 잔해를 행한 것을 보신 하나님은 마침내 때가 되면 공의롭게 갚아 주신다.

하나님은 단순한 구경꾼이 아니시다. 그분은 상과 벌을 주신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우리의 모든 행위를 보시고 걸음을 살피신다는 것을 알고서 우리는 이사야 선지자의 권고를 들어야 할 것이다:"너희는 의인에게 복이 있으리라 말하라 그들은 그 행위의 열매를 먹을 것임이요 악인에게는 화가 있으리니 화가 있을 것은 그 손으로 행한 대로 보응을 받을 것임이니라"(3:10, 11). 오직 우상만이 눈이 있으나 보지 못하고, 손이 있으나 징계하지 못한다. 조셉 캐릴.

14. "주께서는 보셨나이다 잔해와 원한을 감찰하시고 주의 손으로 갚으려 하시오니 외로운 자가 주를 의지하나이다 주는 벌써부터 고아를 도우시는 자니이다." 세상에서 가련한 자들은 그들의 하나님이 그들을 돌보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형제들의 물건을 도적질하는 자들을 징계하신다. 하나님은 그들을 무장시키시고 내분을 일으켜 서로 상대방을 치게 하시며, 자기들이 가진 막대기로 서로 매질하게 하신다. 그들 당대에 그들로 자기 꾀에 빠지게 하셔서 재산을 탕진하거나, 그들의 후손이 재물에 날개를 달아 날아가게 할 것이다. 또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축복하셔서 그들로 재산을 쓰도록 하되, 가난한 자들에게 자비롭게 쓰도록 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지혜로운 자의 권고를 들어야 한다:"침방에서라도 부자를 저주하지 말라"(10:20). 성도들은 좋은 목적을 가지고 일하는 자를 향해서 원한을 품고 공격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도우시며 또한 심판주가 되신다는 사실에 위로를 받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고통을 보시고, 그들을 구원하시고 압제자를 심판하신다는 사실만으로도 압제자를 향한 모든 불만스런 마음을 버리기에 충분하지 않는가? 에드워드 마베리.

14. "주께서는 보셨나이다 잔해와 원한을 감찰하시고 주의 손으로 갚으려 하시오니." 하나님께서 당신의 모든 행동과 걷는 길을 바라보시는데, 당신이 행하고 있는 일을 다시 생각해 보고 하나님의 길을 고려해 보지 않겠는가? 이 점만은 기억하라. 당신이 하나님의 길을 고려하여 당신의 말과 행동을 바꾸든지 아니 바꾸든지 하나님은 당신의 길을 분명 바라보신다는 것이다. 당신이 죄악된 길,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길을 바라보고 머리 속으로 생각만 해도, 그것으로 인해서 말할 수 없는 수치를 당할 것이다. 하나님은 진정 이 일을 묵과하지 않으실 것이다. 하나님은 작은 악을 보고서도 용납할 수 없는 순결한 눈을 가지셨다. 그분은 당신이 저지른 저질스런 악, 당신이 걸었던 부정한 길을 보시고 보응하실 것이다. 다윗은 "주께서 잔해와 원한을 감찰하시고 갚으려 하신다"고 했다. 하나님은 사람의 가장 추잡하고 더러운 길, 그들의 압제와 불의, 그들의 혹독함과 음탕함, 그들의 분노와 악의를 보시고 그들을 미워하시고 추적하시고 보응하신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더럽고 구부러진 길을 감찰하실진대, 사람은 하나님의 거룩하고 공의롭고 의로운 길을 생각해야 하지 않겠는가? 조셉 캐릴.

1418. "주는 벌써부터 고아를 도우시는 자니이다." 그분은 가장 약할지라도 가장 선한 자들과 함께하기를 좋아하신다. 그분은 사람들이 행하는 것과 정반대로 행하신다. 사람들은 양쪽에 분쟁이 일어나면 어느 쪽에 설지 결정하지 못한다. 어느 쪽이 더 정의로운가를 묻지 않고, 어느 쪽이 더 강한가를 분명히 보기까지 무관심하게 대하거나 중립을 지킨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기 위해서 고려할 사항 중에 어느 쪽이 더 정의로운 명분을 가졌느냐는 것 외에 또 달리 고려할 요소가 있다면, 어느 쪽이 더 약하냐일 것이다. 그분은 강한 쪽과 함께하시는 것이 아니라 약한 쪽과 함께하신다. 그러므로 그분은 외로운 자의 도움이 되시고 "고아가 주께로 말미암아 긍휼을 얻는다"(14:3). 고아란 부모가 없는 자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고, 어려움 가운데 있는 모든 자를 말한다. 예수께서도 그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약속하셨다:"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않을 것이라"(14:18)고 하셨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아무 도움도 없이, 아무 위로도 없이 버려 두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이다. 너희가 아버지를 잃은 아이들과 같으나, 내가 너희들의 아버지가 되어 주리라.

사람들은 바다로 녹아들어가는 구름과도 같을 때가 많다. 그들은 부자에게 선물을 보내며, 강한 자를 도와준다. 그러나 하나님은 마른 땅에 비를 내리시고, 약한 자에게 힘을 주시는 분이다······선지자는 하나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주는 포학자의 기세가 성벽을 충돌하는 폭풍과 같을 때에 빈궁한 자의 보장이시며 환난당한 빈핍한 자의 보장이시며 폭풍 중에 피난처시며 폭양을 피하는 그늘이 되셨사오니"(25:4). 조셉 캐릴.

16. "여호와께서는 영원무궁토록 왕이시니 열방이 주의 땅에서 멸망하였나이다." 이러한 확신과 믿음은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이상하고 설명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어떤 사람이 놀라운 투시력을 갖고서 시실리의 릴리바이움에 있으면서도 카르타고 항으로 카르타고 함대가 들어오는 것을 분명히 보았다고 말했다. 사람이 바다 건너편에 있으면서도 그렇게 멀리 있는 물체를 바라보고 말할 수 있다니!(이것이 사실이라면 정말 놀라운 일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서 즐거워했을 것이다. 이처럼 믿음을 가진 자들은 릴리바이움에 서서 오랫동안 항해한 배가 소원하는 항구에 안전히 들어오는 것을 보는 것처럼, 먼 훗날 있을 축복이 마치 지금 도착한 것처럼 보면서 즐거워한다. 앤드류 보나.

17.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으니." 믿는 자의 겸손한 모습이 기도에 나타나 있다.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분을 뵈올 때에 우리는 자신의 악함과 죄성을 깨닫고, 우리가 받고자 하는 자비와 긍휼을 받을 자격이 없음을 고백하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모습을 보았던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외쳤다:"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6:5). 또한 욥은 이렇게 말했다:"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42:5, 6). 이러한 태도는 기도하는 데 합당한 태도이다. 사도가 말했던 것처럼, 이것이 없이는 누구도 하나님의 손에서 무엇인가 받을 줄로 생각지 말아야 한다(1:7)! 하나님은 빈 그릇을 채우기를 원하시며, 상한 심령을 찾으신다.

시편에서 우리는 얼마나 자주 하나님께서 겸손한 자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말을 보게 되는가. 이런 겸손한 자의 기도에는 항상 믿음이 포함되어 있다.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을 잊지 아니하시도다"(9:12).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으니 저희 마음을 예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10:17). 진실로 겸손하게 된 자는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시기에 합당한 마음을 준비한 것이다. 그러므로 시편에서 우리는 "나는 가난하고 곤고하오니"라고 기도하는 것을 자주 보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겸손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특별히 소원하는 것을 들어주시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을 버릴 수 있게 된다. 시편에는 고난 중에 드리는 메시아의 기도가 포함되어 있다:"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치 아니하오나 응답지 아니하시나이다······우리 열조가 주께 의뢰하였고 의뢰하였으므로 저희를 건지셨나이다······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22:2, 4, 6). 그리스도도 하나님을 경외하심으로 자신을 낮추셨고, 그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신 바 되었다. 이처럼 자신을 철저히 낮추고, 하나님의 자비를 얻고자 끊임없이 열심히 기도하는 것을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믿음으로 기도하는 것으로 간주하신다(8). 토머스 굿윈.

17.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으니." 겸손한 자는 영적인 기도를 드린다. 기도는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며, 이는 겸손하게 해야 한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18:13). 우리가 하나님께 겸손히 나아갈 때에 놀랍게도 하나님의 크신 영광이 우리와 함께할 것이다:"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끄러워 낯이 뜨뜻하여 감히 나의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오니"(9:6). 가련하고 곤고한 자가 그를 지으신 조물주의 발 아래 엎드리는 모습은 아름다운 모습이다. "티끌과 같은 나라도 감히 주께 고하나이다"(18:27). 우리의 마음이 낮아지면 낮아질수록, 우리의 기도는 더욱 높이 올라간다. 토머스 왓슨.

17.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으니." 이러한 특권과 하나님의 자비가 '기도로 얻다'라는 구절과 함께 우리 손에 주어졌다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로버트 레이턴.

17. "겸손한 자의 소원." 기도는 우리의 소원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올리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다. 우리는 우리의 소원을 하나님께 드린다. 소원이란 우리의 영혼과 같고 기도할 때에 하는 말은 육체와 같은 것이다. 영혼이 없는 육체는 죽은 것과 같이 우리의 소원이 담기지 않은 기도는 죽은 기도이다:"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으니." 하나님은 말을 들으시는 것이 아니라 소원을 들으신다. 토머스 왓슨.

17.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택하시고 함께하신다. 로버트 레이턴.

17. 티끌에 가장 가까이 앉은 자가 하늘에 가장 가까이 앉은 자이다. 앤드류 그레이(Andrew Gray, 1616).

17. "여호와여······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기도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는 것이기에, 기도에는 능력이 있다. 기도는 쇠사슬을 풀고(16:25, 26), 쇠문을 열며(12:510), 하늘의 창을 열고(왕상 18:41), 죽음의 문을 부순다(11:40, 43). 사탄은 하나님의 교회를 대적하는 세 가지 이름을 가졌다. 악한 의도를 나타내는 용, 교활함을 나타내는 뱀, 힘을 나타내는 사자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도 기도 앞에서는 아무 효용이 없다. 가장 잔혹했던 하만의 악의는 에스더의 기도 아래서 침몰당했고, 가장 꾀가 많다는 아히도벨의 계교는 다윗의 기도 앞에서 시들었고, 애굽의 강력한 수천 명의 군대는 아사의 기도 앞에서 겁쟁이처럼 도망했다. 에드워드 레이놀즈(Edward Reynolds, 15991676).

18. "고아와 압박당하는 자를 위하여 심판하사." 가난한 자의 눈물은 뺨을 타고 내려와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 앞에서 그 원통한 것을 갚아 주실 것을 부르짖는다. 이 하나님은 과부의 재판장이요, 고아와 과부의 아버지이시다. 가난한 자들은 법으로도 보호받지 못한다. 가난한 자에게 불리한 법을 만드는 자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 좋은 법을 막아서고 흠집을 내는 자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겠는가? 마지막 심판의 날, 하나님께서 당신을 방문하실 때에 무엇을 하려는가? 그분은 가난한 여자의 눈물을 들으실 것이라 했다. 그분은 압제당하는 자들을 위해서 세상의 재판관들을 심판하시고 다스리실 것이다.

캄비세스(Cambyses)는 위대한 황제였다. 그의 휘하에는 장관들이 많았고, 또한 보좌관들도 많았다. 이 사실을 나는 역사 책에서 오래 전에 읽었다. 그 황제 아래 있던 사람 중에 뇌물을 탐하는 재판관이 있었다. 그는 부자들의 비위를 맞추면서 가난한 자들에게서 뇌물을 받았다. 아들을 훌륭하게 키우고자 하는 아버지의 열망에서였는데, 옛말 중 "마귀에게 가는 아버지의 아들은 행복하다"라는 말과 같았다. 그에게서 어려움을 당했던 한 과부의 울음이 황제의 귀에 들렸고, 황제는 그 재판관을 속히 죽여서 껍질을 벗겨 재판관의 자리에 깔았다. 그리하여 후에 재판정에서 판결을 내리는 모든 재판관은 그 재판관의 껍질 위에 앉아서 판결을 내리게 되었다. 재판관의 껍질은 모든 재판관들에게 훌륭한 기념비가 되었다. 이러한 기념비가 영국땅에도 있기를 기도한다. 내가 이 이야기를 잔인하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이 말했다고 하겠는가? 아니다. 결코 아니다. 나는 이 이야기를 내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비를 구하는 마음으로 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찾아오시겠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두 번 찾아오신다. 첫번째 방문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자를 통해서 일어난다. 이 첫번째 방문을 받아들이는 자에게는 두번째 방문은 일어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두번째 방문을 하실 때는 심판이 임한다. 재판관의 껍질에 대한 이야기를 귀에 들려주면서 첫번째 방문은 임한다. 이 이야기를 무시하면, 그분은 분노와 심판과 함께 두번째 방문하신다. 휴 래티머(Hugh Latimer, 14801555).

18. "세상에 속한 자." 8편은 시작과 끝이 같다:"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8편에서 우리는 눈을 돌려 위와 아래, 어디를 바라보아도 하나님의 영광으로 둘러싸여 있는 우리 자신을 보았다. 시편 기자는 모든 인류를 겸손히 낮추며 이렇게 질문했다:"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8:4). 9편에서는 이렇게 말했다:"여호와여 일어나사 인생으로 승리를 얻지 못하게 하시며 열방으로 주의 목전에 심판을 받게 하소서 여호와여 저희로 두렵게 하시며 열방으로 자기는 인생뿐인 줄 알게 하소서"(9:19, 20). 이제 시 10편에서는 이렇게 말한다:"고아와 압박당하는 자를 위하여 심판하사 세상에 속한 자로 다시는 위협지 못하게 하시리이다."

시편은 그 배열 순서를 따라 앞으로 진행하면서 우리의 오만함을 버리도록 그 힘과 강도를 더해 간다. (1) 우리는 "사람"이며 "인자"라는 것을 말하고, 우리의 혈통과 후손의 번식에 대해 가르친다(8). (2) "사람에 대한 지식"을 말하여 우리의 잘못된 양심과 경험이 우리를 책망함을 알려 준다(9). (3) "세상에 속한 자"를 보여주어 우리가 원래 ''으로 만들어진 존재임을 보여준다(10). 22편에서는 사람에 대해 수치스러운 내용이 더해진다. 시편 기자가 처했던 상황을 묘사한 것이든, 아니면 그리스도에 대한 묘사이든, 사람을 더 낮은 위치로 표현했다:"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22:6). 모든 인류의 조상이 타락했기에, 후손으로 태어난 형제와 자매들은 벌레와도 같이 된 것이다. 옛말에 이런 표현이 있다.

처음에는 사람

다음에는 벌레

그리고는 썩음과 혐오

사람이란 변화를 겪으면서 사람이 되지 못한다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으로서 자신을 낮출 대로 낮추어서, 자신이 원래 무엇으로 만들어진 존재인가를 고백했다:"티끌과 같은 나라도 감히 주께 고하나이다"(18:27).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 된 자들 중에서, 또는 혈육으로 아담의 후손이 된 자들 중에서 이와 달리 생각하는 자들이 있다면 이것을 기억하라. 당신은 흙으로부터 와서, 흙으로 존재하며,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존 킹.

18. "세상에 속한 자." 사람은 흙으로 만들어져서 흙에서 살고 있다. 토머스 윌콕스.

[설교힌트]

1.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실험적인 설교를 하는 데 좋은 주제가 될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하면서 모두 동일한 방식을 취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과거에 지은 죄, 은혜의 시련, 믿음의 연단, 인간의 타락에 대한 자각, 교훈 등, 하나님께서 얼굴을 숨기시는 여러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다.

2. 교만 때문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종교적 핍박.

3. 탐심에 대한 하나님의 멸시. 그 정당한 이유를 제시하라.

4. 교만은 회심의 길에 있는 장애물.

4절 하반절.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정죄하는 사상들.

5. “주의 심판은 높아서 저의 안력이 미치지 못하오며.” 하나님의 성품과 행하심을 감사할 수 없는 인간의 도덕적 무능.

6. 죄인들의 헛된 믿음.

8. 성도들이 당하는 위험. 성도들의 길에 있는 덫.

9. 사탄의 맹렬함, 교활함, , 행동.

9절 하반절. 사람을 낚는 사탄, 그의 기교, 열심, 성공 등.

10. 겸손의 가면을 벗김.

11. 하나님의 전지하심과 인간의 놀라운 오만함.

12. “여호와여 일어나옵소서.” 우리가 필요로 하고, 허용할 만하고, 때에 맞는 기도.

13절 상반절. 놀랄 만한 사실, 합리적인 탐구.

13. 미래의 심판과 그에 대한 회의. (1) 누가?악인.” (2) 어디서?그 마음에.” (3) 무슨 목적으로?양심을 위로하려고 등. (4) 어떤 경향을 보이는가?하나님을 멸시.” 지옥을 믿지 않는 자는 천국도 믿지 않는다.

13, 14. 세상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 (1) 누가 의심하는가? 왜 의심하는가? (2) 누가 믿는가? 이 믿음을 가진 자는 무엇을 행하는가?

14절 하반절. 고아를 위한 간구.

16. 여호와는 영원한 왕.

17절 상반절. (1) 그리스도인의 특성겸손.” (2) 그리스도인의 삶의 특성소원.” 이들은 거룩함, 성도간의 교제, 지식, 은혜, 쓰임받음을 원하고, 마침내 영광을 얻고자 하는 소원이 있다. (3) 그리스도인이 받는 가장 위대한 축복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으니.”

17. (1) 은혜로운 소원의 특성. (2) 소원의 근원. (3) 소원의 결과. 17절은 이 개요를 따라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매우 유익한 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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