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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 신학/성경신학

<김세윤 교수> 고린도 전서 강해(녹취록)

by 금빛돌 2011. 4. 9.


아래의 내용은 제가 대구 경북 sfc간사(93-99년)를 할 때 김세윤 교수 영동교회에서 강해한 것을 간사님들을시켜서 녹취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강해 (1)

본문; 행 18: 1-10

고린도전서 서론을 위해서는 고린도가 어느 지역에 있으며, 고린도 교회가 어떻게 생성되었으며 또 그 교회가 어떤 문제들을 가지고 있었으며, 사도 바울이 이 교회와 어떤 관계들을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것을 전체적으로 보아야 합니다. 오늘은 이러한 맥락 가운데서 고린도전서라는 책이 어떤 책인가 대강 이해하고, 다음 주부터는 본문을 자세히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고린도라는 도시가 어떤 도시였는가 하는 배경적 사실부터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지도를 통해 고린도의 위치를 확인하십시오. 고린도가 있는 지역을 펠레폰네소스 반도라 부릅니다. 마라톤 경기가 이 반도의 전투와 관계가 있습니다. 고린도는 펠레폰네소스 반도와 그리스 중부를 잇는 지협에 위치하여 그리스 반도의 종단로를 지배할 뿐 아니라 좌우에 두 항구를 끼고 있었습니다. 서쪽으로는 레케움, 동쪽으로는 켄크레아라는 항구였습니다. 그래서 고린도는 그리스 반도의 종단로 즉 육로를 지배했을 뿐 아니라, 동방과 서방의 해상로도 지배하는 무역과 교통의 중심로에 있었습니다. 이런 연고로 고대 고린도는 아주 부유한 도시로, 포세이돈 신의 영광을 위해서 그리스의 도시 국가들이 모여서 운동경기를 벌이던 곳이 되기도 했습니다. 포세이돈이나 멜리케르테스 외에도 사랑과 생식의 여신인 아쓰로디테를 섬기는 사람이 많아서 성도덕이 문란한 도시였습니다.

고대 고린도는 주전 146년 로마에 의해 파괴되었다가 주전 44년 줄리어스 시저에 의해서 로마의 식민지로 재건되어, 주전 27년부터는 아가야 지방의 수도가 되었습니다. 재건된 고린도도 풍요로운 삶과 문란한 성도덕으로 유명했습니다. 그리스인들, 로마인들, 여러 동양인들이 모여 살아서 아주 국제적인 도시였습니다. 당연히 종교적 혼합주의와 타락이 심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볼 때 타락상의 극치는 사랑의 여신인 아쓰로디테 신전의 성창이었습니다. 예배를 위해 신전에 고용된 창녀들, 소위 성창들과 성관계를 가짐으로 신을 예배하고 신으로부터 힘과 생식의 능력을 얻는다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덕이 아주 문란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고린도인 같이 산다’라는 격언이 있었는데 이 말은 성도덕이 아주 문란하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에는 유명한 철학과 수사학의 학교도 있어서 지식층의 자부심도 강했습니다. 부유한 도시었기 때문에 유명한 철학자나 수사학자를 청빙해서 학교를 세웠습니다. 아테네에 맞먹는 훌륭한 학교를 세워서 철학과 수사학을 자랑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당시 고린도인적 성생활과 더불어 고린도인적 수사는 ‘고린도인 같이 말한다’라는 세계적으로 알려진 격언이 될 정도로 말재주가 있었습니다.

또 고린도에는 상당히 큰 유대인의 공동체가 있었습니다. 팔레스타인에서 이민 온 유대인들이 헬라 세계의 큰 도시들에 공동체를 이루고 살았는데, 고린도같이 크고 부유한 도시에도 당연히 큰 공동체가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의 2차 선교 여행 중 주후 50년에서 51년 사이 겨울에 당도해서 약 1년 반을 머물면서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오래 머물면서 교회를 세운 것은 고린도가 유일한 예입니다. 나중에 바울이 에베소에서 약 2년여 목회를 하지만, 이외에는 한 지역에 오래 머물면서 목회한 것은 고린도밖에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린도 교회는 여러 가지 문제로 바울에게 골치를 썩게 한 교회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개척 상황이 행전 18장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으므로 행18장을 한번 같이 읽겠습니다.
주후 50-51년 어간에 아덴에서 고린도로 와서 약1년 반 동안 교회를 개척할 때 거기서 동역자로 누구를 만났습니까? 로마의 4대 황제 클라우디오의 칙령에 의해 주후 49년에 로마에서 추방되어 고린도에 온 유대인 부부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를 동역자로 만났습니다. 클라우디오는 로마에 사는 모든 유대인들을 로마에서 다 쫓아냈습니다.

‘클라우디오 황제의 일생’이라는 책을 쓴 로마의 역사학자 수에토니우스에 의하면 ‘어떤 크레스투스 때문에 로마에 폭동이 일어남으로 로마의 유대인들을 추방한다’는 칙령을 발표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학자들이 다 일치하여 말하기를 ‘크레스투스’는 ‘크리스투스-그리스도’라는 말의 의미를 잘 모르고 크레스투스라고 잘못 적었다고 합니다. 크레스투스는 ‘유용한 자’라는 뜻으로서 당시 노예들이 많이 가진 이름입니다. 그래서 수에토니우스는 헬라어로는 아무 의미 없는 크리스투스(그리스도)를 크레스투스로 생각하여 어느 노예 때문에 폭동이 일어난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이 말은 곧 주후 49년에 벌써 로마의 유대 공동체에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느냐 안 믿느냐 때문에 큰 분쟁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클라우디오는 이것 때문에 로마인들을 내쫓았던 것입니다.

이 때에 로마로부터 고린도로 온 그리스도인 유대 부부가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였습니다. 이들은 상당한 재력을 가졌던 천막 재조업자였것 같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그 집에 취직해서 일을 하면서 유대회당에서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했습니다. 천막 제조업은 가죽을 다루는 업종인데, 일상용 뿐아니라 군수품으로 천막이 상당히 중요한 물품이었습니다. 고전 9장에서 말하듯이 바울은 스스로 일하면서 고린도인들게 전혀 신세를 지지 않고 공짜로 복음을 전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한 푼도 누를 끼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당시 헬라 세계의 유대 회당에서는 보통 목사의 직책이 없었고, 그저 회당을 관리하면서 예배를 인도하는 정도의 회당장만 있었는데 성직자는 아니고 회당의 대표자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유대 회당에서의 예배 순서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사도행전의 기록을 종합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안식일날 읽게 되어 있는 구약의 어느 구절을 읽는데(매안식일 성경 본문이 미리 정해짐-렉셔너리), 회당장이 성경 본문을 읽고서는 ‘회중들 중에 혹 이 구절을 우리에게 강해해줄 사람있으면 나와서 말하라’고 초청을 합니다. 그러면 바울이 손님으로 앉아 있다가 ‘기회는 이때다’ 해서 나가서 뭐라 하는가 하면, “오늘 읽은 이사야의 이 말씀이 나사렛 예수에 의해 성취되었다”라고 합니다. 그러고는 예수가 어떤 분이었고, 무슨 일을 해서 구약을 성취했는지를 말하고 또 어떻게 구원을 얻는가를 말합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유대인들은 더 듣기를 원하지만(베뢰아 사람들같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단자가 와서 성경을 맘대로 해석한다’ ‘모세 율법을 어기는 자’라고 반발을 합니다.

그런데 유대 회당에는 뒤편에 이방인이지만 유대교에 매력을 느껴서 회당 예배에 참석하여 성경을 배우고 가르침대로 살고자 하는 이들이 앉아 있습니다. 이들을 ‘하나님을 공경하는 자들’이라 불렀습니다. 행 18:7에 나옵니다. 이들은 바울의 설교에 아주 솔깃합니다. 자기들은 유대교에 매력을 느껴서 회당에 오긴 했지만, 아무리 오래 참석해도 구원을 약속받지 못했는데, 바울이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할례자나 무할례자나 다 죄가 용서받고 구원받아, 똑같이 아브라함의 자손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 했으니, 이 ‘하나님을 경외(공경)하는’ 이방인들에게는 진짜 복음인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반발을 하지만 이들은 자기 집으로 초청해서 더 듣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디도 유스도라는 사람이 자기집으로 데리고 갔는데 그 집이 회당 바로 옆에 있었습니다. 거기서 바울이 이방인들을 데리고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를 동역자로 삼아서 교회를 개척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주후 51년 7월에 갈리오가 아가야 지방에 로마 총독으로 부임했습니다. 갈리오의 총독 시절의 비석이 발견되어서 신약의 가장 정확한 연대를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총독에게 바울이 불법 종교를 퍼뜨린다고 송사했습니다(행 18:13-율법에 반하여 하나님을 공경하라고). 갈리오는 유대인들의 송사를 듣고는 ‘너희들의 종교 내적 문제이다’라고 기각했습니다. 학자들은 유대교가 로마법상 합법적인 종교로 인정을 받았거나, 아니면 적어도 여러 특혜를 가지고 있었던것으로 생각해 왔습니다. 유대인들은 바울의 전하는 복음에 대해 당국에 공식적으로 제소했습니다. 만약 바울이 불법 종교로 판결받으면 선교가 힘들어지고 교회는 로마 정부의 혹독한 핍박을 받게 됩니다. 갈리오는 바울의 기독교가 ‘유대교의 완성을 말하는 것으로서 다른 종교가 아니고 오히려 정통 유대교, 진짜 유대교’이므로 이 송사를 다루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래서 당분간 기독교는 유대교가 누리던 로마법의 특혜를 누리면서 전파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일후에 52년 봄 바울은 고린도를 떠나 에베소로 갔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일반적 성격과 문제들

고린도 교회의 대부분의 하층 이방인 출신이었던 것 같습니다(고전 1:26). 그들과 더불어 부유층 출신이 더러 있었고 유대인들도 다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국제 도시 고린도의 이방적 환경과 고린도 그리스도인들의 이방인적 과거는 교회의 많은 문제들을 야기했습니다. 문란한 성도덕, 우상숭배, 불신자들과 어울림, 분파주의, 지혜와 지식 자랑, 열광주의등 이런 것들이 복잡한 문제들이었습니다.

이런 것들의 근본 문제는 그리스도의 구원과 성령의 은사를 그들의 헬라적 이원론적 사고로 이해한데 있었습니다. 헬라적 이원론은 영과 육을 완전히 구분하여 이데아의 세계과 현상의 세계로 보는 것입니다. 현상의 세계는 본질, 실재의 세계인 이데아의 세계에 대한 모조품,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인간도 물질의 세계에 속한 몸과 영의 세계에 속한 영혼으로 나누고, 영혼이 몸에 갇혀있는 것이 인간의 근본 문제로 보는 사상입니다. 몸은 영혼의 감옥, 무덤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이란 몸속에 갇혀있는 영혼이 해방되어 영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육신은 썩어질 것이고 영혼이 이데아의 세계로 복귀하는 것이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구원을 얻는가 하면, 지식을 얻음으로서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식을 얻어 본질의 세계에 대한 깨달음을 얻고, 우리가 체험하는 이 세계가 가짜임을 알고 현상의 세계의 가치들에 얽매이지 않고 본질의 세계와 그 가치를 사모하고 이 세상으로부터는 점점 자유하여 이데아의 세계로 복귀한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인들도 헬라 사상의 영향으로 구원에 대해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 약속한 메시야의 시대, 오는 세상을 들여 오셨다는 것입니다. 헬라의 본질적, 존재론적 이원론과는 달리 히브리인들은 이 세상을 시간적, 역사적 이원론으로 이해했습니다. 이 세대와 오는 세대로 나누는 것입니다. 이 세대는 사단이 하나님의 통치권을 찬탈해서 고난으로 통치하는 세상이지만 하나님께서 종말에 오셔서 메시야를 통해 사단의 세력을 꺽고 하나님 나라를 이루고 세 시대를 연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의 가르침과 죽으심과 부활을 체험하면서 선지자들과 묵시자들이 기다렸던 메시야 시대, 곧 하나님이 통치하는 시대가 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구원이 이미 시작되었다. 믿음으로 벌써 구원을 받고, 현재의 고난은 재림 때 오는 세대가 완성이 될 때 완전해 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말에 받을 완성된 구원의 첫 열매를 받은 것입니다.

그러면 그 증거(보증금)가 무엇이냐? 성령이 주어지고, 성령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종말에 하나님의 통치의 영, 구원의 힘인데 벌써 그것을 내가 체험한다는 것은 존말의 완성될 구원의 첫 열매, 보증금이라는 것입니다. 현재에 조금 맛보고 재림때에 틀림없이 받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전파한 복음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창조주의 부요한 힘을 빌어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악과 고난을 이기면서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의 증거가 성령입니다. 그러면 성령 받은 증거는 무엇입니까? 방언과 이적인가? 고전12:3 처럼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것이 곧 성령 받은 증거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라 부르면 아들의 영이 우리 가운에서 부르짖는 것이기 때문에 성령을 받은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힘을 끌어쓰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런 복음을 선포했는데 고린도인들은 자기들 사상으로 지나치게 번역하고 토착화해버린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은 육신의 세계를 벗어나서 영의 세계의 구원을 누리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성령의 은사들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문제의 근본 원인은 그리스도의 구원과 성령의 은사를 그들의 헬라적 이원론적 사고로 이해한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면서 그 구원의 첫 열매는 현재 누릴 수 있지만 그 완성은 재림 때에 누릴 수 있다고 가르치고 믿는 자들 안에 거하는 성령이 이미 받은 구원의 첫 멸매을 대표하고 그 완성을 보증하는 하나님의 선물 혹은 보증금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린도인들은 영과 물질의 헬라적 이원론에 젖어 있어서 바울이 말한 시간적 이원론을 본질적 이원론으로 오해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도의 구원을 자신의 영혼이 육신을 벗어나 하늘의 축복을 현재 완전히 획득한 것으로 보고 성령의 은사들이 이것을 확인해 주는 것으로 이해하였습니다. 그들은 장차 도래하리라한 하나님 나라를 이미 얻은 것으로 믿고 그 속에서 왕노릇할 수 있을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고전4:8에서 냉소적으로 ‘우린 이렇게 고생해도 너희는 벌써 왕노릇하는구나’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또 성령을 받아 육신의 제약을 벗어난 영적 존재들이 된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재림때에 우리 몸이 부활하리라는 것은 이해하기도 어렵고 불필요한 것이었습니다. 영혼이 이미 구원 받았는데 육신의 부활이 무슨 필요가 있나는 것입니다. 그들은 세례 때에 이미 영적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령의 은사들 특히 방언과 같이 현저히 나타나는 것들에 관심을 집중시키고 자신들의 은사를 서로 자랑하고 교만과 멸시로 예배를 혼란스럼게 했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이방의 철학과 수사학을 높이 평가하는 전통, 우상 숭배 전통, 문란한 성도덕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해서 그들은 영감으로 말하는 성령의 은사와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신비의 지식을 헬라적 철학이나 수사학의 일종으로 오해하고 서로 말자랑과 지식 자랑 경쟁을 벌였습니다. 성령을 통해 얻은 지식으로 그들은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생각하고 우상의 신전에서 우상숭배자들가 함께 참예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는 자유를 누렸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영혼이 벌써 하늘의 구원을 얻었으므로 몸으로는 무슨 짓을 해도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문란한 성생활을 계속했고 심지어는 이방인들도 안하는 짓들까지 행했던 것입니다. 이런 것을 열광주의, 광란주의라 부르는데 이런 광란주의자들이 고린도 교회에서 다수를 형성하고 있었거나 목소리 큰 자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반면에 그리스도의 구원의 체험으로부터 그들과는 정반대의 결론을 내린 자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주로 유대 그리스도인들로서 극단의 금욕주의자들이었습니다. 육은 중요하지 않고 영혼만 중요하므로 영혼을 지키기 위해 육신에 얽매는 것을 피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혼을 삼가고 시장의 고기를 먹지않았습니다. 광란주의자들과 금욕주의자들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는 것은 불가피하였습니다. 전자는 그들의 지식과 자유를 자랑하고 후자를 약한 자들이라 멸시했고, 후자는 전자를 육신적인 방탕자들이라 비방하는 영적 교만을 품고 있었습니다.
이 분쟁은 아볼로와 베드로가 고린도를 방문함으로서 더욱 복잡하게 된 것 같습니다. 철학과 수사학을 자랑하던 열광자들은 알렉산드리아 출신으로서 성경 지식과 수사적 능력을 가진 아볼로를 위해한 선생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난 연약한 형제들, 유대 그리스도인들과 금욕적 이방 그리스도인들은 베드로의 가르침을 더 좋아하게 되었는데, 아마 베드로는 행 15장의 예루살렘 사도 회의의 결의 즉 이방 그리스도인들도 우상숭배를 삼가야하고, 피를 먹지 말고, 목졸려 도살된 짐승을 먹지 말라는 결의를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요구했고 이방 그리스도인들은 베드로를 자신들의 선생으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아볼로파와 베드로파가 생겼는데 거기에 대항해서 어떤 이들은 그들의 원래 사도였던 바울에게 신실해야 한다거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바울파가 생겼습니다. 그 외에도 또 한 파가 있었는데 소위 그리스도파입니다. 실제로 있었던 파당인지 논란이 있지만, 아마 실제로 있었나 봅니다. 이들은 극단의 열광주의자들 중에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와 직접 교제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다른 이들을 바울이나 아볼로 같은 인간들의 가르침에 얽매어 있다고 멸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거기에다가 다시 부자들과 가난한 자들로 분열되기도 했습니다. 성만찬 석상에서 부자들은 가난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였고, 교회의 하나됨을 확인하고 시위해야할 성만찬을 분쟁의 장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바울과 고린도 교회의 서신 왕래

고전 5:9에 ‘전에 썼던 편지(이전 편지)’가 나옵니다. 이 편지에서 바울은 고린도인들에게 교회 안의 부도덕하고 악한 자들, 우상숭배자들과 어울리지 말라고 경고하였는데, 이 경고는 세상의 이웃들과 일체 교제하지 말라는 말로 오해하기도 했습니다. 이 편지는 완전히 상실된 듯 하지만 일부 학자들은 고후6:14-7:1을 그 편지의 한 부분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바울은 글로에의 집 사람들로부터 고린도인들이 바울의 편지를 오해하고 있다는 소식과 함께 고린도 교회가 여러 파당으로 분열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 무렵 바울은 또한 고린도의 여러 문제들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을 구하러 온 대표단(스데바나 등)을 맞았습니다. 결혼 문제, 우상의 제물 문제, 예배의 혼란, 성령의 은사와 활용, 부활, 예루살렘 교회에 대한 헌금 문제들이 그것들입니다. (7:1 ‘너희들이 쓴 것들에 대해 이제 내가 대답하겠습니다. 첫째... 8:1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바울은 이 고린도전서를 써서 이 문제들에 응답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전은 그들에게 쓴 두 번째 편지가 되는 것입니다. 주후 55년경 에베소에서 쓴 이 편지에서 성령주의자들에게 그들이 아직도 지상에서 육신과 죄에 노출되어 살고 있는 현실을 상기시키고 교회의 교제를 북돋우는 삶의 정신과 절도있는 삶을 권면함으로써 그들의 열광주의를 교정하려 한 것입니다. 바울은 55년에 오순절 뒤 고린도를 직접 방문하려 계획하면서 디모데에게 이 편지(고전)를 먼저 보냅니다. 그러나 이 편지는 그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효과를 보지 못하고 디모데는 바울의 지시들을 집행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문제들을 스스로 척결하려고 고린도에 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고린도에서 모욕을 당하고 큰 슬픔가운데 에베소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바울은 이 방문을 고후 2:1-5에서 ‘가슴아픈 방문’이라 부릅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에서 애통한 마음으로 많은 눈물을 흘리며(고후2:35) 강경한 어조의 편지를 써서 디도편으로 보냅니다. 이 편지를 눈물의 편지 또는 혹독한 편지라 부릅니다. 이것은 바울의 세 번째 편지였는데 완전히 상실된 것으로 보입니다. 어떤 학자들은 고후 10-13장에 이 편지의 일부가 남아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에베소에서 바울은 심한 우울증에 빠졌고, 외적 핍박도 받았습니다. 그는 마음을 놓을 수 없어서 배편으로 돌아오는 디도를 하루라도 빨리 만나기 위해 드로아까지 마중나갔습니다. 전도의 문이 활짝 열렸지만 마다하고 간 것입니다. 그러나 디도가 오지 않자, 육로로 돌아오는 줄로 알고 마게도냐까지 가서 디로를 만납니다(고후 2:12-12). 디도는 바울의 혹독한 편지가 효과가 있어서 고린도인들의 반란이 끝나고 바울의 권위에 도전한 주모자를 처벌했다는 소식을 전합니다.

즉시 바울은 빌립보에서 고린도후서를 썼는데(혹은 1-9장)-55년 후반-, 이것이 그의 네 번째 편지입니다. 여기서 그는 문제들이 해결됨에 대한 그의 안도함과 사랑을 나타내고, 적대자를 용서할 것을 권면합니다. 바울은 기쁘고 들뜬 마음으로 고린도인들에게 자신의 사도직의 영광과 고난을 생생하게 그려서 표시하고(고후 3-6장), 예루살렘 교회에 대한 헌금의 문제를 다시 제기하고 있습니다(고후8-9장). 그는 마게도냐 교회들의 헌금을 가지고 마게도냐 교회들의 대표단과 함께 고린도를 거쳐 아가야 지방의 헌금을 모아 예루살렘으로 가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다시 디도를 고린도에 보내 헌금 사업을 완성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사업이 오해를 받으면서 또 하나의 위기가 생겼습니다. 외부에서 고린도 교회에 온 방문객들이 사태를 더욱 심각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이스라엘 족속인 것을 자랑하며 예루살렘 사도들의 권위를 내세우고, 환상과 이적등 영적 체험들을 과시하며, 바울을 예루살렘으로부터 위임받지 못한 가짜 사도라고 선동했습니다. 그들의 권위적 행세- 부양받을 권리를 주장, 영적 체험에 대한 과시 등-는 원래 세상적 능력을 높이 평가하는 경향이 있었던 고린도인들에게 잘 먹혀들어 갔습니다. 고린도인들이 한국 사람들과 비슷했던 모양. 권위적으로하고 독재하면 잘 따릅니다. 박 은조 목사님은 큰 교회하기는 틀렸다!! (김*석, 김*춘, 강*근 목사님도 가망없는 듯...???) 고린도인들도 섬기는 자들은 멸시하고 권위를 주장하는 자들은 높이 받들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거짓 사도들의 주장에 맞서기 위해 고후 10-13장을 썼습니다. 이것은 그의 다섯 번째 편지였는데, 앞 편지(1-9장)에 부착되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앞 편지 보다 나중에 썼지만 앞 부분에 덧붙여 한 편지로 만들어 보냈을 것입니다. 후자의 경우.. 고후를 쓰는데 여러 날 걸렸는데, 편지를 쓴 후 고린도 교회로부터 새로운 소식을 받았고 대단히 결렬한 어조로 10-13을 써서 합쳐서 보낸 것일 것입니다. 이 편지에서 바울은 고린도에 온 방문객들 다른 예수를 전파하고, 다른 영을 가지고, 다른 복음을 선포하는 자들로 규정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그들이 내세우는 사도의 요건들에 비추어 조금도 뒤지지 않음을 주장하면서, 진정한 사도의 표징들은 가문이나 외적 위임(학위증, 안수증)이나, 놀라운 영적 체험도 아니고 오직 예수를 섬기는 과정에 당하는 고난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10-13장에서 거짓 사도의 세상적으로 판단하는 고린도인들의 영광의 신학에 맞서서 자신의 고난의 사도적 삶을 예로 들면서 십자가의 신학을 말하고 있습니다(나중에 살펴볼 것임). 그래서 고후는 신약 성서뿐 아니라 고대문학을 통틀어 가장 개인적이고 감동적인 문서가 된 것입니다.

생각해보기

한국 교회 100년 --- 토착화를 재고
한국 교회의 전통중에 섞여있는 요소들
개인적 문제- 제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교회적 문제- 성적 구별, 역할

고린도전서 강해 (2)(3)

본문: 고전 1:1-9

바울은 당시 헬라 세계의 편지 양식을 따르고 있습니다. 네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서두, 감사와 기도, 본론 그리고 말미입니다. 서두에는 바울과 소스데네가 고린도에 보낸다고 되어 있고, 감사 또는 기도는 3절부터 9절까지입니다. 10절부터가 편지의 본론이고 16장 끝에 가서 말미 즉 인사와 축복이 나옵니다. 바울은 이라한 편지 형식을 그의 신앙에 비추어 확대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자신을 장황하게 소개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자’라고 말합니다. 또 수신자인 고린도 교회도 복잡하게 소개합니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 이라 말합니다.

바울의 편지를 다 비교해 보면 롬, 고전후, 갈 등에서는 바울이 자신의 사도직을 상당히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빌, 살전후 등에서는 바울이 자신의 사도됨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고린도나 갈라디아 교회에서는 바울의 사도직에 대해 오해와 시기가 있었고, 또 로마 교회는 바울이 세운 교회가 아니고 바울이 모르는 이들이므로 사적은 편지가 아니라 사도로서 쓰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직이 오해와 시기없이 잘 받아들여지는 빌립보나 데살로니가 교회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에 사도직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바울이 언제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습니까? 다메섹 도상에서 부르심 받았습니다. 사도란 말은 신약 성경의 독특한 언어이고, 사도의 직책은 신약 교회의 독특한 직책이었습니다. 사도는 십자가에 못박히고 부활하고 높임받은 주 예수의 전권 대사로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오늘날 사도직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고린도 교회에서 바울의 사도직은 오해되거나 의심을 받았고, 사도직의 진정한 증표에 대한 혼란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어떤 인간으로부터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부름받은 사도임을 일관되게 내세웁니다. 특히 갈1:1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 이것은 자신의 사도직과 복음이 갈라디아에서 시비거리가 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고린도와 갈라디아에 침투한 거짓 사도들은 자신들이 예루살렘 사도들로부터 임명장-학위증과 안수증-을 내놓으면서 자신들이 진짜 사도이고, 바울은 이런 것없이 자기 혼자 다메섹 도상에서 뭘 받았다고 한다, 그러니까 당신들에게 헌금해서 생활비 보태란 말도 차마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냐?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루살렘 사도로부터 임명된 것은 진짜가 아니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임명된 것이 진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권위 주장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으로부터 보냄 받은 하나님의 전권 대사’- 얼마나 위대한 권위 주장입니까? 그런데 곧 이어서 형제 소스데네를 이 편지의 공동 저자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형제를 공동 발신인으로 삼은 바울의 겸손함을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이 편지는 바울이 혼자 쓰고 있는 것이지만- 소스데네가 혹 서기 노릇하고 있는 지는 모르지만- 이 중요한 편지에서 조수에 불과한 사람을 공동 발신인으로 쓰고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당회장 목사님들이 이만큼 자기 동역자들을 자기와 동격으로 생각하고, 당회장이나 부목사 혹은 전도사 같은 것들이 단지 기능의 차이일 뿐, 본질적 권위의 차이가 아님을 인정하고 목회하면... 그러나 한국에서는 오히려 역효과가 나서 오히려 잘 안된다고 합니다. 축구장만한 당회장실을 만들어 놓고 저 뒤에 앉아서 권위를 부리고 부목사나 전도사를 노예 부리듯이 부려야 교회가 잘 된다 그럽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사도로서의 권위와 동역자를 삼는 겸손함을 같이 음미해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여러 가지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구약에서는 불러모아진 하나님의 백성 즉 이스라엘 공동체를 지칭하던 이 칭호-하할 야훼(?)-를 더 이상 이스라엘에게 적용하지 않고 교회에 적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의 공동체-가 새로운 또는 종말의 하나님의 백성임을 나태내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교회라는 말을 지역 교회에도 적용하고, 전 세계의 모든 곳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총체에 적용하고 있습니다. 이말은 곧 한 지역의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는 그 숫자나 장소와 관계없이 그 지역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로서 그 지역에서 부름받은 하나님의 백성을 구체적으로 표현한다는 뜻입니다. 영동 교회 한 교회만으로도 어떠한 부족함이 없는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진 자들, 곧 성도들로 부름받은 자들입니다. 거룩이나 성도라는 말을 초두에 두 번이나 되풀이 하고 있고, 나중에도 이 말이 여러 번 나옵니다. 성경에서 거룩이란 말은 근본적으로 도덕적 개념이 아니라 물리적 개념입니다. 하나님께 속하도록 이 세상으로부터 분리됨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건물이 거룩하다는 말은 건물이 도덕적으로 훌륭하다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께 속한 소유물이란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선택하여 자신과 교제하도록 부르신 자들이 거룩한 자들 곧 성도들입니다. 그러므로 선택, 부름, 성도 등은 같이 쓰는 말이거나 동의어들로서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에게 적용된 말입니다. 신약의 교회는 스스로가 이스라엘의 이상을 실현한 진정한 이스라엘,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보고, 구약에서 이스라엘에게 쓴 용어들을 모두 자신들에게 적용했습니다. 벧전 2:9이 대표적인 것입니다. (너는 택한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이며...)

고린도인들을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든 이는 하나님이시고,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을 십자가에서 대속과 화해의 제물로 드림으로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거룩하여지고 성도가 된 고린도인들은 더 이상 세상에 속하지 않고 하나님께 속한 자들이므로, 세상에 속한 자들과 같이 살아서는 안되고, 자신을 불러 하나님 백성 삼으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자신의 거룩함을 진지하게 의식한다면, 자연히 그들의 삶에 도덕적 열매가 풍성하였을 것입니다. 거룩이란 말은 일차적으로 물리적 개념이지만, 사람들에게 적용할 때는 결과적으로 도덕적 함축의미를 갖게 됩니다. 부르신 뜻에 맞게 살아야 하기 때문에 도덕적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의 도덕적 상황은 바울로 하여금 개탄하게 했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편지의 서두에 두 번이나 거룩한 하나님 백성됨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1:30, ‘예수는 우리의...거룩함이 되셨으니..’라 하고 있고, 곳곳에 매우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도덕적으로도 온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기독 신앙의 근본 원리를 하나 배울 수 있습니다. 성도들의 도덕성은 하나님의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도덕을 많이 쌓음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은혜로 부르셨으으로 우리가 도덕적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종교는 도덕적 수양을 통해 구원에 도달한다 하지만 성경의 진리는 반대입니다. 성도 삼아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도덕적으로 깨끗할 힘을 얻고, 또 그렇게 살야야할 당위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바울은 교회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라고 정의합니다.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것(롬10:9), 이 말은 그에게 의지하며 예배와 기도 중에 그의 이름을 부르며 호소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의 주권에 전적으로 순종한다는 의미입니다. 사단과 죽음의 세력을 이기시고 만유의 주로서 심판과 구원을 베푸시는 분에게 전적으로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의지하며, 그의 도움을 위해 호소하며 전적으로 순종하는 자가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이 세계 각처의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그리스도인됨의 근본 조건을 공유하고 있음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각처에서 이름을 부르는 자들가 더불어’라고 해야 더 정확합니다. 왜 이들과 함께 하나님의 교회됨을 언급함은 고린도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부요함과 우월성을 자랑하면서 다른 그리스도인들과는 다른 특별한 사람들로 생각하는 교만함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교회 문제들의 원인이 이것이었습니다. 고린도인이라고 특별히 잘난 것 없다는 것입니다. 전 세계 교회 공동체의 일원임과 전적으로 주 예수께 의지하고 순종해야 하는 것임을 은근히 인식시키려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속으로 부름받은 자들입니다(9절). 하나님께서 고린도인들로 하여금 우리 대신, 우리의 대표로 십자가에 못박히고 부활하여 높아지신 하나님의 아들과 연합하여, 그의 하나님과의 관계에 동참하도록, 즉 아들됨에 동참하여 우리로 하나님의 아들되게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여러 가지로 고린도 교회를 정의하는 것은 고린도 교회의 문제들과 관계가 있습니다.

이제는 바울의 축복 기도를 살펴봅시다(3절). 은헤는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구속의 행위로서 즉 인간의 어떤 공로에 부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들에게 먼저 그리고 거저 베푸시는 구원의 사랑으로서 모든 그리스도인의 실존의 근거입니다. 평강은 구속 행위의 결과로서 하나님과 화해된 인간이 누리는 전체적 안락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경건주의적 복음주의적 전통에서는 마음 속의 평안으로 축소해서 해석하는 경향이 있는데, 물론 그런 평안함도 한 요소이긴 하지만 소극적인 요소이고, 성경에서의 평강은-구약의 샬롬- 우리 삶의 모든 관계에서 안락하고 복된 상태를 말합니다.

이 은헤와 평강은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오는데, 하나님과 주 예수를 한꺼번에 언급하고 있는데, 이런 것을 이위일체론적 언어라 합니다. 우리에 대한 구원의 사업이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조금도 생소하지 않을 지는 몰라도-우리는 늘 이위일체 혹은 삼위일체론적으로 이야기하기 때문에- 이 편지를 쓰는 바울의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은 유대인으로서 유대의 근본 신앙고백, 하나님은 한 분 이심-신6장 쉐마-이라는 절대적 유일신론에 의해서 태어낳고, 쉐마를 늘 암송하고, 이 신앙고백을 지키기 위해 싸웠던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하나님이 두 분인 것 처럼 들리게 하는 말을 쓰게 된 것은 엄청난 변화입니다.(이것은 점차 생각해보기로 합시다. 오늘은 이만...다음 시간에는 4절 부터)

4-9절
이 부분은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위해서 감사하고 기도하는 부분입니다. 바울의 편지에는 항상 인사 다음에 이 부분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제외- 긴급한 마음으로 바로 본론으로 넘어감)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문제가 많고 못된 교회라 해도 감사와 기도의 부분을 빼먹지 않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고린도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와 믿음으로 연합하여 그를 통해서 이루신 구속을 얻도록 하신 것, 즉 그들에게 아무 대가 없이 은혜를 베푸신 것에 대해서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란 말은 ‘그리스도 예수와 믿음으로 연합하여’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힘을 덧입게 된 것을 감사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받은 은혜는 은사를 통해 구체화됩니다. 은사는 ‘은헤의 구체화되고 개인화된 형태’라 정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풍부한 은사들로 나타나서 고린도인들게 풍족했습니다.

은헤는 부르심(소명)의 사건인데 구원의 사건과 사명에로의 부름을 포함합니다. 바울은 의인됨, 자녀됨, 화해함등의 그림을 사용하여 구원을 설명하는데 이것은 창조주와의 관계회복 즉 창조주 하나님의 부한한 부요함을 덧입어 살 수 있게 됨을 뜻합니다. 우리는 시간적 장소적으로 제한되어 있는 존재들이어서 제한된 지혜와 능력으로 인한 고난으로 눌린 살인데, 이것은 죽음의 증상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부요함과 완전함을 덧입을 때는 더 이상 그런 고난이 없습니다. 이 삶은 신적인 삶이고, ‘영생’이라 합니다. 우리가 현재 사는 것을 ‘삶’이라 한다면, 하나님적인 이 삶은 ‘하나님적인 삶’입니다. 현재의 삶을 ‘죽음’이라 한다면, 이 삶은 ‘생명’입니다.

이러한 삶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맺음으로 얻어지는 것입니다. 죄인들로서 하나님을 무시하고 우리의 제한된 것으로 고통가운데 살았는데, 이제는 하나님의 ‘하나님 노릇해주심’, ‘하나님의 무한한 부요함을 상속’받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이고 은혜입니다. 이 관계는 하나님께 의존하는 관계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부요함을 덧입을 수 있습니까? 오로지 하나님께 순종함으로써 얻을 수 있습니다. ‘의존’과 ‘순종’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의존한다면, 그대로 순종하게 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의존은 순종으로 표현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관계라야 올바른 관계입니다.

우릴 구원에 참여하도록한 은혜는 우릴 하나님께 순종하게 하는데, 순종하게 하는 능력이 은사들입니다. 즉 은혜는 은사들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께 순종함 즉 이웃을 섬김을 통해 나타납니다. 구원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이런 은사들을 받은 것입니다. 은혜는 은사들로 구체화되고 개별화되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이 은사들을 통해 하나님께 순종하고 이웃을 섬기게 됩니다.

고린도 교회도 은혜가 은사들로 풍성하게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이 은사에 부족함없이 풍족하게 된 것(5-7절)을 먼저 칭찬합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각각 순종케하기 위해 각기 은사를 주시는데, 고린도인들은 특별히 지식과 언변-헬라의 영향-을 높이 평가하였습니다. 언변은 방언이나 예언, 또는 다양한 수사학적 능력 같은 말의 은사입니다. 그들의 교만과 오해가 고린도 교회의 근본 문제들입니다. 바울은 이것은 시정하도록 충고하고, 지식이나 언변보다 더 우월한 것 즉 사랑을 역설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게 전에 서두에서 그들의 자랑을 인정하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상대방을 충고할 때 높은 위해에서 잘못을 지적하기 보다, 처음엔 칭찬하고 ‘그러나 이런점에는 많이 부족하니...’하는 것이 효과있는 충고입니다. 우리 한국인들은 특별히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토론의 문화가 없어서 그렇습니다(국회-토론인지 싸움인지). 교회가 먼저 바울에게 이런 점을 배워야 합니다. Excellent! But... 영국인들의 체질화. 지도 교수였던 F.F Bruce는 10분 칭찬하고 5분 지적함. 한국어는 언어가 거칠다-예, 결사 반대, 된소리가 많다. 6.25와 대립의 문화 영향인가?

바울은 여기서 그들이 어떻게 그들이 이런 풍족함을 받게 되었는지르 두가지로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하나는 은사의 은혜성(6절)-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케 되어-이고, 둘째는 은사의 종말론적 유보성(8절)-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견고케-입니다. 먼저 은혜성은 십자가의 복음을 들을 때 성령께서 그들 가운데서 진리임을 확증함으로서 견고케 되었다는 말입니다. 선포된 복음을 듣고, 성령의 내적 증언을 통해 믿게 되었을 때에 은사들이 주어진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들의 은사들은 십자가의 복음과 따로 생각할 수 없고, 자신들의 업적으로 내세울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린도인들은 그들의 은사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따로 떼어서 생각했고, 하나님께 순종함과 그리고 이웃을 섬기는 사명과 따로 생각하려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을 은혜를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둘째로 은사의 종말론적 유보성입니다. 바울은 구원의 은혜를 체험한 고린도인들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남, 즉 하늘로부터 오셔서 심판을 통해 이 악과 고난의 세대를 종결짓고 구원을 완성할 것을 기다리는 자들임을 상기시키고,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들로 판명되어 완성된 구원에 참여해야 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날은 구약의 주의 날과 같은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주의 날은 하나님 백서에게는 자동적으로 구원의 날이고, 이방인들게만 심판의 날일 것으로 알고 방자해졌습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이 주의 날은 이스라엘에게도 심판의 날이 될 것임을 말합니다. 오직 언약에 신실한 자들에게만 구원의 날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업는 자들로 나타나야 한다고 말합니다. 고린도인들은 이미 풍성한 은사들은 은사들을 체험했기 때문에 그들의 구원이 벌써 완성된 것처럼 방자했습니다. 바울의 충고는 많은 은사들의 목적은 주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들로 서게 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방자와 교만으로 살아가는 그들에 대한 근심했습니다. 교회를 세우라고 주신 은사들이 오히려 교회를 허무는 수단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안녕과 궁극적 구원이 그들에게 달려 있지 않고,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 주신 그리스도와 신실하신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상기시켜 그들도 안위하고 바울 자신도 안위하는 것입니다(9). 인간들은 신실하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신실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구원이 우리 스스로에게 달려 있다고 한다면 그리스도의 날에 감히 자신있게 나설 수 없을 것입니다. 심지어 우리 구원이 우리의 믿음에 달려있다고 해도, 누가 핍박을 이기도 자신있게 설 것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얼마나 불안하겠습니까? 바울이 입장에서 고린도인들이 아슬아슬하고 불안하지만, 바울은 우리 구원이 우리의 행위나 심지어 우리의 믿음에 달려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그의 변치 않는 신실하심에 달려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예정론의 근본 논리요 의도인 것입니다.

요약한다면 이렇습니다. 바울은 이들에게 주신 은헤와 은사들을 인해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들이 은사를 오해한 것입니다. 바울이 이것을 어떻게 교정하는가 하면, 첫째는 은사를 믿음과 순종과 따로 생각할 수 없음을 말하고, 둘째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날에 그의 심판대 앞에 설 것임- 은혜와 은사를 어떻게 써서 책망할 것이 없는 자들로 설 것인지를 성찰해 보아야 함- 말했습니다. 이렇다고 했을 때 바울이나 고리도인들 피차가 그들의 상태에 불안이 생기지만 마지막으로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신실하심에 달려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이만. 예습 좀 해오소..??!!


고린도전서 강해 (4)

본문: 고전 1:10-17

11,12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바울은 글로에의 집 사람들로부터 고린도 교회에 심각한 분쟁이 있다는 말을 듣습니다. 글로에의 집 사람들은 그 집에 소속된 노예로 있다가 자유를 얻었으나 계속 그 집에서 섬기며 사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들이 보고한 분쟁의 내용이 12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서로 교회의 지도자를 내세우면서 파당을 지은 것입니다. 이 파당들의 성격이 무엇이었을까요?

우선 행18:24-19:1을 보면 아볼로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으로 대단한 성경 지식과 수사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는데, 에베소에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후 고린도에 왔습니다. 아볼로를 그들의 지도자로 내세운 이들은 전형적인 헬라적 사람들로서 철학과 수사학을 높이 평가하고 성령의 은사로 받은 언변과 지헤를 높이 생각했던 열광주의자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아볼로를 높이 평가하는 반면, 글을 쓸 때와는 달리 눌변가였던 바울은 무시했습니다. 고후 10:10- ‘그 편지들은 중하고 힘이 있으나 그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말이 시원치 않다 하니’. 고후 11:6에도 ‘내가 비록 말에는 졸하나 지식에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합니다.

게바파는 어떤 부류였을까? 바울은 항상 베드로를 아람어 이름은 게바라 부릅니다. (갈2장에서 한 번만 예외) 베드로는 예루살렘에서 온 히브리인이었기 때문에 고린도에 있었던 소위 ‘연약한 자들’ 곧 음식 삼가 규칙을 중시한 이들이 그를 지도자로 여긴 것 같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무시한 바울의 복음과 사도직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던 것 같습니다. 베드로는 어떤 음식 규칙을 고린도인들에게 강조했을까? 행15장에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던 사도들과 바울과 바나바처럼 이방인들에게 전하던 사도들이 예루살렘에서 ‘사도 회의’ 열었습니다. 그 이유는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인들이 될 때 먼저 할례를 받고 유대인이 되어 언약 백성의 표증을 받은후, 옛 언약의 성취로 오신 예수의 구원의 덕을 입어야 하느냐, 아니면 이방인들은 할례 필요없이 믿음으로 언약 백성이 되느냐 하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결론은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요구할 필요없고, 요구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으심의 덕을 입어서 하나님의 백성과 자녀가 된다는 것입니다.

다만 네가지만 존중하도록 결의 했습니다. 첫째는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지말라. 둘째로 목을 매달아 도살한 짐승의 고기를 먹지 말라. 셋째로, 피를 먹지 말라. 넷째는 음행을 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네가지를 ‘사도들의 결의’라 합니다. 유대인들의 도살 방법은 피를 흘리는 것이었는에, 목매달아 도살한 짐승은 피를 흘리지 않기 때문에 율법에 어긋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방인들에게 요구하는 최소한의 요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사도들의 결의를 별로 중요시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베드로가 고린도에서 이것들은 가르치고 강조했던 것 같습니다. 특히 우상의 제물을 먹는 문제와 음행하지 말것을 강조했던 것 같습니다. 당시 시장의 고기는 거의 예외 없이 우상에게 한 번 바쳐지고 이방 종교의 방식대로 도살된 것들이었습니다. 고린도의 연약한 자들은 또 음행을 하지 말라는 말을 지나치게 해석해서 ‘남자가 여자를 만지면 안된다’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7:1을 보면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이 말은 ‘남자가 여자를 만지지 아니함’이 정확한 번역입니다. 이 말은 “ ”속에 들어가야 하는 말입니다. 이 말은 ‘연약한 자들’의 구호였는데, 바울이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바울의 사도직을 벌써 고린도전서에서 의심한 것 같고, 고후 가면 아주 심각한 문제가 됩니다.

아불로파와 게바파는 신학적으로 정반대입니다. 아볼로파는 자유주의자들로서 무슨 일이든지 해도 된다고 생각해서, 시장의 고기먹는 것은 물론이고 우상의 신전에서의 잔치에 동참하기도 했습니다. 구원은 이미 확보했고, 어차피 구원받는 것은 영혼이고 육신은 없어질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적으로 문란했습니다. 반면 금욕주의로 흐른 이들이 게바파인 것 같습니다.

이들이 이렇게 대립하는 가운데 어떤 이들은 그들의 원래 사도였던 바울에게 충실해야 한다고 생가했습니다(바울파). 또 어떤 이들은 바울이나 아볼로 같은 인간의 가르침에 구애받지 않고 그리스도외 직접교제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그리스도파). 어떤 학자들은 실제적인 파당은 아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고린도인들이 세 파로 서로 싸우는 것이 싫은 어떤 이들이 어떤 신학적인 입장과 특성을 가지지 않고 그저 ‘그래, 그럼 우린 그저 그리스도파다’라고 말한 것 뿐이라는 것입니다. 또 어떤 학자들은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는 말이 바울의 말이라고 합니다. 고린도인의 파당에 대항하여 바울이 자신을 그렇게 부른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들 그리스도파는 아볼로파보다 더 극단적으로 자유주의적 성령파, 열광주의자들이었습니다.

이들에게 바울이 ‘형제들아’(10)는 말로 권면을 시작합니다. 분쟁으로 교회가 갈라지지 말고, 같은 생각과 같은 의견을 가지고, 같은 말을 하는 하나의 공동체로 환원할 것을 간곡히 권고합니다. 이렇게 권고할 수 있는 것은 고린도인들의 그리스도안에서 바울 자신에게 형제들일뿐 아니라, 서로에게 형제라는 사실이며, 함께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다느 사실입니다. 10, 11절에 ‘형제들아’라는 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 한국 교회의 상황이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극심한 분열이 문제인 상황에서 고린도 교회의 문제 같은 여러 다른 입장들이 한 교회를 이루고 산다는 것이 가능할 것인가? 신학적 문제가 더 이상 문제가 아니고, 교권의 문제로 찢어지는 일이 옳은 것입니까? 바울은 다른 입장을 가진 여러 부류의 사람들은 형제들로 부르며 서로 교제하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우리 한국인들은 아주 극단적이어서, 조금이라고 다른 의견을 인정하지 못합니다. 다른 입장을 인정하지 못하고, 맞는 사람끼리만 모여서 잘 해보자는 것은 성경적이 아닙니다. 신학적인 차이도 인정하고, 윤리적인 입장고 관용하고, 이데올로기적 차이도 용납하고 하나의 교회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13절에 충고하기를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뇨’, 이렇게 세가지로 질문합니다. 이렇게 세 질문을 분파주의자들을 향하여 퍼붓는 것은 교회의 기초를 무엇으로 보고 있는지 잘 암시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이름 속으로 세례를 받아 우리를 대속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 예수와 연합한 자들의 모임이기에, 그러기에 교회가 분파되고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여러 갈래로 찢는 행위이며,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의 몸을 부인하는 행위이며, 그리스도와의 세례를 통한 연합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세례는 믿음으로 그리스도 속으로 내포되는 표식이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 속으로 세례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었기 때문에 분파는 그리스도를 나누는 것이 됩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받았다느 말은 ‘그의 이름 속으로’ 세례받았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름 속으로’는 ‘통장 속으로’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받았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통장 속으로 전입(입금)되었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소유물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그의 종이 된 것입니다. 이제껏 주로 섬겼던 사단의 주권에서 벗어나서 그리스도의 주권 속으로 이전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자신의 이름을 내세운 파당에게 ‘너희가 바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느뇨’라고 말하는 것은 곧 ‘너희가 내 통장 속으로 전입되어서, 내 소유물과 종이 되었다는 말이냐’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의 값을 치르고 사셨기 때문에 우릴 소유하실 수 있는 것이지, 바울이나 다른 이들은 전혀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14-17까지에서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복음을 선포하도록 보냄받았음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바울은 세례를 많이 주지 않았는데, 이것은 복음 선포에 집중하기 위해서입니다. 그가 그리스도에게서 위임받은 것은 세례를 주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세례를 준 사람은 두 가족밖에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 중 한 사람은 초기 회심자였던 그리스보인데 그는 고린도의 회당장이었습니다. 그리고 가이오는 바울과 고린도에 처소를 제공한 초기 회심자 중 한사람이었습니다. 그 다음에 가만히 생각해 보니 또 한 사람이 생각났습니다. 처음에 두 사람만 생각났는데, 나중에 또 한 사람 스데바나가 떠올랐습니다. 불과 4년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기억이 가물가물 했던 모양입니다. 기억력 나쁜 사람은 위로받으시길... 바울은 복음 선포에 집중하면서 지도자들에게만 세례를 주고, 나머지는 실루라노 같은 동역자들에게 맡겼던 것 같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믿음과 세례의 관계를 엿볼 수 있습니다. 또한 믿음은 세례로 객관화되고 문서화됩니다. 세례는 믿음의 공식화이고 극화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세례를 꼭 받아야하는 것이지만, 형편상 받지못할 때에라도 그 믿음은 똑같이 구원 얻는 믿음입니다. 세례는 믿음과 항상 같이 가는 것이지만, 믿음이 주이고 세례는 부입니다. 그리고 때로는 이 둘이 분리될 수도 있습니다. 중세 카톨릭 교리는 세례의식 자체가 거듭나게 하는 마력을 가진 것으로 말하는데, 세례는 그 의식 자체에 무슨 힘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로부터 세례를 받은 자들은 바울을 그들의 영적 지도자로 생각할 수 있었겠지만, 자신들이 바울에게 속한다 하는 것은 그리스도 신앙에 어긋나며 ‘그리스도 이름 속으로’의 세례도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세례를 많이 주지 않아 그런 오해를 일으키지 않은 것을 오히려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자신의 이름을 내세운 파당을 예를 들어 모든 파당들을 책망하는 것은 본받을만 합니다. 혹시 교회에 파벌이 생긴다면 그 지도자들은 바울과 같이 자신을 받드는 자들을 먼저 책망해야 합니다. 자기 파벌은 두둔하고 다른 파벌을 비난하는 것은 망조가 든 증상입니다.

17절 후반부, 바울은 복음을 전파하라고 보냄받았는데, 어떻게 전파하는가 하면, 말의 지혜로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말은 십자가가 알맹이 없이 비워져 버리지 않도록 한다는 말입니다. 17절 후반부는 18절 이하의 웅변, 십자가와 인간의 지혜를 대조시키는 웅변의 주제, 제목입니다(4장 끝까지).

행전 17장에는 바울이 아덴에서 한 설교가 요약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18장에 고린도 사역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이 아덴에서 철학자들이 모이는 아레오바고에서 변론을 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에서는 예외적으로 오래 머물면서 교회를 크게 세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바울이 아덴에서는 철학과 수사학적 능력을 총동원해서 복음을 선포해보니 별 효과가 없어서, 세상의 말과 지혜가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선포하리라고 마음먹고 고린도에 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17절 후반부같은 말을 한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이 17절에 한 말은 아덴에서 고린도에 올 때에 고쳐먹은 생각이 아니라, 다메섹 도상에서 부름받을 때부터 위임받은 것입니다. 아덴에 오기 전에 쓴 갈라디아서에도 십자가 중심 신학이 분명히 나옵니다.

인간의 지혜로 하지 않는다는 것은 설교자들이 효과적인 복음 설교를 위해 신학 공부와 연설 기술을 개발하지 않고 십자가만 단순히 되풀이 하거나 아무렇게나 설교해도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게으른 설교자에게 위로가 되는 말이 아닙니다. 단순히 ‘예수 천당’만 외치라는 말은 아닙니다. 고전, 고후에만 해도 엄청난 웅변이 나옵니다. 다른 편지들에도 깊은 신학적 묵상과 표현이 있습니다. 수사학과 웅변술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복잡한 학문적 토론이나 현란한 수사학을 사용하여 선포해서 청중들의 관심을 복음의 내용 즉 십자가보다는 그 선포의 기교에 집중시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알맹이 없이 빈 껍데기만 남는 것을 말합니다. 어렵게 설교하고 난해한 강의를 해야 수준높은 강론... 청중이 못알아 듣도록 강의하고 휴강을 많이 해야 권위있는 교수로 보였던 옛 전통... 60년대 중반까지 일부 교수들, 설교자들... 폴 틸리히, 칼 바르트의 언어... 지식 주준이 높지 않은 어떤 설교자들은 예화 중심의 설교를 합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25절까지 해야 내용이 이어지는데 시간이 없어서 다음에 합시다.


고린도전서 강해 (5)

본문: 고전 1:18-25


바울은 1장 17까지에서 분쟁이 벌어진 것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그들의 분쟁의 원인은 그들이 복음을 헬라 철학의 맥락에서 지혜의 일종으로 보고, 복음 선포자들을 지혜자나 웅변가의 한 사람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복음을 전할 때에 철학이나 수사학의 일종으로 오해받지 않도록 선포했다고 말합니다. 복음의 알맹이가 비워지지 않게 했다는 것입니다.

17절(하)에서 바울은 자신의 복음을 지혜나 수사학의 맥락에서 선포하지 않은 것은 십자가가 헛되지 않도록 즉 껍데기만 남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18-31절의 주제입니다. 18-25절까지는 십자가의 도와 세상적 지혜를 대조시키고 있고, 26-31절에서는 고린도 그리스도인들 자신들의 예를 들어서 하나님의 지혜, 능력과 세상의 지혜, 능력이 어떻게 대조가 되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31절까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인간의 지혜를 대조하였는데, 바울은 대단히 강력한 변증법적이고 역설적인 웅변으로 복음이 무엇이며 세상의 지혜의 본질이 무엇인지 밝히고 있습니다.

바울 신학의 중심을 십자가의 신학, 혹은 칭의론이라 말합니다. 갈라디아서나 로마서에서 바울은 우리 인간들이 율법을 지키거나 종교적 선행을 함으로 덕을 쌓아서 하나님 앞에 내세울 수 있는 업적이되어서 하나님께서 우릴 의인이라 인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릴 사랑하셔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대속의 죽음에 내어주어서 오직 그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데, 이 구원을 의인됨 즉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는 사람으로 말합니다. 빌립보서 3장에도 나타나있습니다. 이것이 바울 신학의 중심이라 생각해 왔었는데, 19세기말부터 종교사학자들이-대표적으로 알버트 슈바이쩌, 요하네스 바이스 등- 바울의 편지에서 의인을 강조한 것은 갈, 롬 그리고 빌3장 뿐이라 했습니다. 즉 바울 신학의 중심은 의인됨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고 부활함이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인데,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연합해서 옛 죄인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우리가 새로운 사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단지 바울이 유대인들과 논쟁을 벌일 때에 특별히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칭의론을 논쟁용으로 개발했을 따름이지 그의 신학의 중심은 아니다라는 말입니다.

이들의 주장이 옳다면 개신교 신학의 많은 개정이 필요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사상이 많이 약해집니다. 고린도전서 4장까지 특히 1:18-31이 이런 사상이 틀렸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본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나 갈라디아서나 빌3장에서는 율법을 지킴으로서 인간이 선행을 이루어 구원을 얻으려는 종교적인 인간을 염두해두고, 인간이 자기 힘으로 구원을 얻을 수 없고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이 가능하다고 씁니다. 반면 고전후에서는 인간들이 자력구원의 또하나의 수단으로 삼는 것, 즉 지혜를 얻는 것에 대해서 똑같이 지혜를 통한 자력구원은 가능하지 않고 십자가를 통한 은혜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간은 항상 두 가지의 구원의 길을 추구해 왔는데 하나는 종교적인 선행을 통한 도덕적 자기 완성입니다. 19세기 자유주의자들과 휴머니스트들은 교육을 통해 인간의 원래 선한 면을 잘 개발하여 악이 없고 다 잘 사는 세상을 말하였습니다. 종교적인 사람들은 ‘내가 교회는 안 다녀도 산상수훈대로 살고, 절간에는 안가도 부처님 가르침대로 살면 심판이 있어도 살 수 있다’라고 자신의 업적을 내세웁니다. 유대인들이 이러한 사상을 대표합니다. 반면에 헬라인들이 대표하는 것은 지식을 통한 구원입니다. 플라톤 같은 고대 철학자도 그렇고, 인도의 힌두교 사상과 개혁 힌두교라 볼 수 있는 불교도 구원의 길의 첫째를 지식으로 삼습니다. 그리고 둘째를 선행으로 봅니다. 힌두교의 가장 오래된 경전을 ‘비다’라 하는데 ‘안다’라는 뜻입니다. 지식을 통한 구원을 말합니다. 플라톤의 대화록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깊은 종교나 철학의 수준이 아닌 보통의 경우를 생각해봐도 비슷합니다. 지식을 많이 쌓아서 문명의 이기들을 만들었는데, 기아와 질병에서 해방되고 전기와 자동차같은 풍요와 평안을 얻었다는 문명 낙관론적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많은 과학자와 의학자들이 최근에는 늙는 현상을 연구해서 늙지 않게하는 기술을 얻으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고린도서는 헬라인들에게 쓴 편지이기 때문에 똑같은 십자가의 신학, 하나님의 은혜로만 인간이 구원받을 수 없다는 동일한 원칙을 고린도인들에게 천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은혜로 의인된다는 신학이 롬, 갈, 빌3장에서만 나타난다고 해서 바울신학의 중심이 안되는 것이 아니고, 바울은 똑같은 십자가의 신학을 고린도인들에게는 유대인들에게와는 달리 지혜를 통한 자력 구원의 원리에 대응하는 것입니다.

18절의 ‘십자가의 도’는 십자가의 말씀, 혹은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란 뜻입니다. 이것과 세상적 지혜를 다른 것으로 대조하고 있습니다. 인간을 자연을 관찰하여 이치를 터득하고 자연의 힘을 이용하는 지혜를 얻습니다. 이로서 인간은 스스로의 생명과 행복을 도모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됩니다. 이세상을 관찰하면서도 이세상 만물이 나타내는 창조주를 깨닫지 못하고, 자신에게 이치를 터득하는 힘-이성-을 주신 창조주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한 채로 날로 더 많은 지혜를 얻어 더욱 더 풍성함을 얻을 수 있다는 자신감과 자만심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을 자랑하게 됩니다. 그러나 인간을 지혜를 얻어 자신을 구원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 자신도 피조물이고 그의 세상 곧 자연도 제한된 자원을 가진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그의 지혜로 이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삶은 제한성 또는 결핍성으로 일관된 삶일 수밖에 없습니다. 자원도 제한되어 있고 그것을 이용하는 인간의 힘도 제한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 스스로 결핍과 고난이 없는 상태는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궁극적 구원은 자연밖에 계시며 자연보다 크신 초월자 하나님으로부터 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인간 밖에서 초월자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서 구원의 행위를 하셔야만 피조물인 자연속에 갇혀있는 인간에게 구원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와 함께 세상에 초월하여 선재하신 분을 이세상에 보내셔서 우릴 위해 대속의 죽음을 죽으시도록 십자가에 내어주심으로서 그 구원의 행위를 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기쁜 소식, 즉 복음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그리스도의 십자가 또는 십자가의 말씀(도)이라 불립니다. 초월자 하나님이 우릴 위해 베푸신 구원 행동이 그의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심에서 절정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초월자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심의 극적인 상징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을 한마디로 십자가의 도라고 요약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십자가의 말씀이 모든 사람들에게 터득되고 신앙을 불러 일으킵니까? 20절부터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22절에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라’고 합니다. 바울이 헬라인들에게 ‘초월자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어 십자가에 대속의 죽음을 죽게하고 우리의 영원한 구원을 이루셨다’라고 말했을 때, 지혜를 추구하는 헬라인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어불성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가장 처절한 패배와 무능력의 상징인 십자가에 못박힐 수 있는가? 가장 잔인하게 처형된 죄수를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라고 인식할 수 있는가? 헬라인들에게 있어서 인간을 구원할만한 자은 철인(지혜자)이나 영웅호걸 같은 존재라야 합니다. 그런데 비천함과 무력함과 완전한 패배를 말하는 십자가에 죽은 자가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라는 것은 말도 안되는 것입니다.

다른 한편, 유대인들에게는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자라는 복음이 무엇을 의미했겠습니까? 바울은 유대인을 표적을 구하는 자라고 합니다. 유대인은 종교적 인간들의 대표입니다. 이들에게는 하나님이 보낸 구원자에게서는 마땅히 기상천외한 이적이나 경천동지의 행동을 기대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사실은 모순을 넘어서 걸림돌일 수밖에 없습니다. 신21:23에 의해 십자가형을 하나님의 저주의 표시로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라’. 그래서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거짓 선지자, 거짓 메시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해서 신명기 법에 의해(13,17,18장-거짓 선지자는 사형에 처하라)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죽은 것에 불과했습니다. 표적은커녕 나무에 달려 죽은 자를 메시야와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으로서, 유대인들을 화나게 하는 것입니다. 갈3:13 고전12:3-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예수를 저주할 자라 말하지 않고...

바울도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고 그들에게 예수를 저주하게 하는 말을 억지로 하게 했었는데, 다메섹 도상에서 십자가의 예수를 하나님께서 높이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갈3:13에서 예수가 신명기 법을 따라 하나님의 저주로 죽은 것은 사실인데, 그 죽음이 우릴 위한 대신적 죽음, 대속의 죽음인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음으로 그 은혜를 덧입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 깨달음이 없는 유대인들에게는 다메섹 도상 이전의 바울과 같이 십자가라는 것이 화나게 하고 걸림돌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체험상 이것을 잘 압니다.

그래서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 첫째로 지혜로 구원을 얻으려는 헬라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또 율법의 선행으로 구원을 얻으려는 종교적인 인간 즉 유대인에게는 도리어 걸림돌과 약한 것(25)입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자들에게는 십자가의 말씀이 구원의 힘이요 지혜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이 연약하고 걸림돌되고 미련한 것이 하나님의 구원 사건이라고 깨닫게 되었습니까? 이것은 인간의 지혜로는 깨달을 수 없습니다. 인간적 방법으로는 하나님의 독특한 구원의 방법-자기 아들의 대속적 죽음-을 깨닫지 못하게 했습니다(21). 하나님의 지혜는 세상의 지혜와 정반대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복음을 어떻게 깨닫게 되었습니까?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알게 된 것입니다(2장). 첫째로 24절 하나님의 은혜로 부르심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을 통해 깨닫게 된 것입니다.

20절의 선비는 유법학자 즉 서기관을 말하고, 변사는 ‘진리를 논하는 자들’을 의미합니다. ‘이 세대에’라는 말을 주목해야 합니다. 이 세대는 ‘오는 세대’, 종말의 새 시대와 대조를 이루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새 창조로 새 시대가 열렸지만,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그저 자연을 관찰하고 하나님의예비적인 계시에 불과한 구약 성경에만 근거해서 하나님의 아들을 통한 완성된 계시는 볼 줄 모른채, 진리와 구원을 논하면서도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통해 나타내신 의와 진리와 사랑과 구원을 헤아리지 못하는 자들을 여기서 바울이 질타합니다. 그들은 그들의 지혜를 총동원했어도 십자가의 말씀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자들-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성령의 역사하심을 힙입은 자들-은 십자가의 말씀이 하나님의 오묘한 지혜이며,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능력임을 깨닫는다는 것입니다. 이 세대의 지혜로는 깨닫지 못하고 오는 세대의 힘인 성령의 역사하심으로만 십자가의 진리를 깨닫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의 복음)은 반지성적인 것인가라는 어려운 문제에 봉착합니다. 이 세대의 지혜는 역가치인가? 인간들로 하여금 자신감과 자만심을 갖게 해서 하나님을 무시하고 십자가를 무시하게 하는 것에 불과한 것인가? 학문이나 과학, 문명의 발전 같은 것에 대해 기독교는 반대적인 태도만 가져야하는가? 기독인들은 탐구하는 것은 되도록 절제하고, 오직 신비적인 믿음과 지식만을 추구해야 하는가? 2장까지 가면서 이 문제를 숙고할 것입니다.

믿음의 관점에서 십자가를 보았을 때는 오묘함을 발견합니다. 반면에 인간의 지혜나 종교심의 관점에서 보면 십자가는 미련하고 연약하고 걸림돌이지만, 부르심을 받고 성령이 역사한 이들이 영적인 눈을 뜨고 믿음의 관점에서 바라볼 때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임을 깨닫게 됩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면 십자가의 말씀이 ‘그럴 듯 하고(reasonable)' 또한 ‘놀라운’ 것임을 알게 됩니다.

십자가의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이야 말로 구원과 치유의 수단입니다. 모든 갈등과 고난은 죄에서 오는데, 죄의 본질은 단절- 자기 주장, 자기 유익-입니다. 이것 때문에 하나님과 이웃들과 단절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무한하신 것을 저버리고, 자기 힘으로 살겠다고 자기 주장하는 것이 죄의 본질입니다. 자신의 제한된 자원에 갇혀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웃에게서 빼앗아서 자신의 자원을 늘릴려고 합니다. 그래서 갈등과 전쟁의 고난들이 생겨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고난들에 대한 치유는 오로지 자기 주장의 반대인 ‘사랑’-자기를 내어주는-입니다. 그리고 초월자의 사랑이어야 인류 전체를 치유하는 것이 됩니다. 즉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준 사랑은 인류의 유일한 치유 방법 즉 구원의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듯 믿음의 눈으로 보았을 때 십가가의 도는 아주 이성적이고 놀라운 구원의 방법이 되는 것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이 말이 안되는 것이기 때문에 믿는다’라는 역설적인 말을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관점은 십자가의 도가 놀라운 지혜임을 발견하게 합니다. 이것은 이 세상의 모든 종교와 철학 체계와는 반대되는 것입니다. 어느 종교에 십자가에 처절하게 죽은 자를 신격화하고 구원자로 말합니까? 그런 종교는 없습니다. 이것은 기독교 복음의 독특함입니다.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니의 지혜는 인간의 지혜와 반대가 되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지혜가 인간의 지혜를 심판함을 의미합니다. 인간이 스스로의 지혜로 하나님을 알고 구원을 얻지 못하고, 또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지혜를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미련하고 무능하다 함으로 스스로의 한계 즉 미련함을 드러낸 것입니다. 이 역설적인 진리를 바울은 이렇게 요약합니다. 하나님의 미련한 것 즉 십자가에 아들을 내어주심 곧 세상의 지혜로는 미련한 것으로 판단되는 것이 인간의 최상의 지혜보다 더 지혜롭고, 하나님의 연약한 것 즉 세상의 판단으로는 무능과 패배의 상지으로 보이는 십자가가 인간의 최고의 힘보다 강하다는 것입니다. 이로써 바울은 하나님의 무한한 우월성을 표현할 뿐 아니라 십자가의 그리스도는 인간의 사상과는 완전히 배치되지만 인간의 지혜와 힘이 이룰 수 없는 인간의 구원을 이룬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인 것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토론)

1. 오늘 본문에 비추어 현대인과 현대 과학 문명의 본질을 조명해보고, 인류의 진정한 구원의 길을 제시해보자.

2. 혹 우리 중에 복음을 이해하려는데 어려움을 느꼈던 사람은 없는가? 복음을 지성적으로 이해하려고 많은 책을 읽고 많은 설교를 들어도 이해를 못하다가 복음의 빛을 본 분이 혹 없는지? 나와서 견증(Not 간증)할 사람 없습니까? 오늘 본문을 읽고 무엇을 느꼈는지 견증할 사람?

3. 또한 표적을 구하는 것은 잘못된 것인가? 모세에게도 표적이 주어졌고, 예수님도 표적을 많이 행하였는데(요)...특히 오병이어의 표적은 중요하다. 예수님께서 모세가 출애굽 때 백성에게 표적을 행한 것과 동일한 것을 행함으로 만나의 표적을 보입니다. 바울도 사도의 표적들을 행했다고 합니다.
오늘날도 많은 거짓 사도들이 많은데 이들을 분별하기 위해서 표적을 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떤 때에 표적을 구하는 것이 나쁩니까? 예수님께 표적을 구했던 유대인들처럼... 이들은 예수님의 표적을 표였지만 볼 줄 몰랐습니다. 이런 자들에게는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여줄 것이 없다고 합니다. 고린도인들은 바울이 사도의 표적을 행했지만 분별할 줄 몰랐습니다.
올바른 신앙은 지혜에 대해서, 그리고 표적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를 생각해보십시오.

(6)-(10)고린도전서
고린도전서 1:26-31
오늘은 고린도전서 1장 26절에서 31절까지를 보는데, 지난 시간에 살펴볼 말씀을 더 살펴보자. 지난 시간에 살펴본 말씀을 다시 읽자. 1장 18절-25절
지난 시간에는 복음에 대한 지식, 복음이주는 구원에 대한 지식을 헬라의 철학적 지식의 일종 쯤으로 혼돈한 고린도교인들이 바울이 전한 복음형식, 베드로가 전한 복음형식, 아볼로가 전한 복음형식, 이런 것을 마치 헬라의 철학자들이 서로 학파로 나뉘어서 토론하고 다투고 하 srjt과 같이 고린도 교회에서 파로 나뉘어서 서로 지혜자랑을 하고 지식자랑을 한 것의 부작용에 대해서 바울이 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진리는 셎\상적 지혜와는 전혀 관계없는 것이고 도리어 반대되는 것이다. 이것을 세상적 지혜로 오해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이 세상적 지혜와 십자가의 말씀, 십자가의 도를 이 본문에서는 대조시키고 대립시키다고 말했다. 그래서 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에 구원자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 죽음으로 인류를 우하고 온 피조세계를 구한다는 것은 헬라의 철학적으로 생각해볼 때, 세상의 지혜로 생각해볼 때는 어불성설이다. 다른 한편 종교적인 사람들은 하나님 쪽은 기이한 것이고, 위대한 것이고, 큰 것이고 이런 것을 늘 머리에 두고 있는 사람에게 예수가 십자가에서 무참히 죽었고, 그것도 신명기 법에 의해서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둑은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인류의 구원자라고 하는 것,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의 지혜로 세상적인 종교의 논리로 십자가에서 달려 대속의 죽음을 당하신 예수그리스도의 구원을 이해하려면 이해할 수 가 없다.
지난 번에 그런 체험을 한 사람 간증해 보라고 했죠. 이 지성쪽으로 기독교의 복음을 이해해 보려고 할 때 도대체 이해가 안되고 회의가 생긴 분 없었는가? 우리 인간들의 지혜로 하나님의 구원의 도를 깨닫지도 못하는 것이다. 인간의 지혜로는 인간이 구원을 받을 수도 없는 것이다. 인간의 지혜는 양날 가진 칼같다. 인간들은 두 개의 구원의 길을 설정했다. 하나는 지혜를 개발해서 문명을 발달해서, 이웃과 의롭게 화합해서 잘 사는 법을 개발해보려고, 지혜를 개발해서 피조세계의 자원을 잘 활용해서 삶을 풍부하게 모든 기구를 발달해서 우리의 장소적인 제한, 시간적 제한을 극복하려고 교통, 통신수단을 발전시키고 의학을 잘 발달시켜서 우리 생명이 덜 질병에 처하는 이런 방법을 발전시켰는데, 우리 문명이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안락하게 하지만 우리의 삶을 망가뜨린다. 자동차는 삶을 풍요롭게 하지만 그것이 살상의 무기이고, 우리 삶을 황폐하게 만드는 무기이다. 인간 지혜의 첨단의 적용은 핵무기에 있는데, 그 인간의 지헤가 결국 우리 삶을 가장 크게 위협하는 것이다. 인간의 지혜가 구원의 방도가 되지 못하고, 인간의 지혜로 보기에 미련한 십자가의 말슴으로 만 구원이 가능하다. 왜 십자가의 말씀이 유일한 구원의 방법인가? 그것이 하나님의 오묘한 인간의 구원을 위한 길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계시를 볼 줄 아는 사람들에게는 십자가의 도리가 그럴듯할 뿐 아니라, 엄청나게 그럴듯한, 아주 오묘한 지혜임을 발견하게 된다. 혹 우리가운데 이성적으로, 지성적으로 신앙을 얻어보려고 노력하다가 끝에 십자가의 복음을 터득하게 되어서 바울의 신앙을 얻게된 사람은 간증을 하라고 했다. 지난 시간에 2가지 문제를 제시하고 넘어갔다. 요즘 구원파, 오대양 같으 사건이 우리에게 이단 사설의 문제를 부각시켰다. 그것과 관련해서 고전 1:22과 연결해서 우리가 생각해보자고 했다.
고전 1:22
똑같은 문제를 2가지로 나누었다. 기독교는 반지성적인 것이냐? 헬라인은 지혜를 구하는데 우리는 그렇지 아니하냐? 세상적인 지혜로는 미련한 십자가의 복음을 전한다고 세상적인 지혜와는 대조시켰다. 또 유대인은 표적을 구한다는 것에 대해 표적을 구하는 것이 옳은 것이냐? 정통 기독교단내에서도 많은 사람을 현혹하는 비기독교적인 신비주의에 대해 고린도전서를 공부하면서 답해봅시다라고 넘어갔는데 이 두문제에 대해서 오리엔테이션을 하고 넘어가려고 한다.
이단의 표적은 성경인용과 환상등이다. 이런 것으로 성경지식이 부조간 사람들이 많이 쏠리게 된다. 유대인들은 왜 표적을 구하는가? 하나님으로부터 보냄받은 선지자인가 아닌가? 선지자로 주장하는 사람이 많이 나타나는데, 신명기서 13장을 보면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람들을 구별하라는 법이 나타나서 표적을 구하는 법이 중요하다. 고후 12:12-13을 보면 바울이 표적을 행했다고 한다. 선지자, 사도, 예수의 표적을 볼려고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고전 14:29 -
여기서 분별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성령의 영감으로 예언한 것인가, 악령 인간의 자의적인 것으로 예언한 것인가를 판단하라는 말이다. 오늘날 사이비 교주에게 올바른 표적을 구하지 않아서 미혹된다. 어떻게 표적을 구할 것인가? 이단의 표적의 공통점은 기이한 점에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의 공통점은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의 말씀과 일치해야한다.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의 말씀과 일치해야한다. 하나님의 계시의 절정인 십자가의 도리와 일치해야한다. 그것이 가장 큰 전제이다. 세분화시켜보면 첫째는 은혜성이 있어야한다. 지정한 생명을 북돋우는 것이어야한다. 외형적인 질병을 고치는 것뿐아니라 삶의 의미를 주고 풍성하게 하고 갈등관계에있는 이웃관계에 새로운 관계를 하는 이런 것이 생명을 북돋아주는 것이다.
둘째는 철저히 하나님 중심(신본적)이어야한다. 이 표적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창조주로 인정하고 순종하게 하는 것이냐? 아니면 반대로 기이한 힘 자체만을 높이 평가하게 하고 그것이 우리의 구원인양 생각하게 하고, 그것을 행하는 사람에게 매달리게 하고, 이런 것은 다 우상성이다. 예를 들면 치유의 체험(생명을 북돋아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행하는 사람이 신본주의인가를 분별해야한다. 표적 자체가 우사이 된다든가, 표적을 행하는 사랑자체가 우상이 된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또 하나 생각해본다면 도덕성을 볼 수 있다. 진정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은 도덕성이 있다. 성령의 열매는 모두 도덕적 가치이다. 성성은 무도덕한 도덕적으로 중립적인 기이한 힘이 아니라 도덕적이다. 적어도 이 세가지로 하나님으로부터 온 표적인지 분별할 수 있다.
유대인은 그렇지 않았느냐? 왜 바울과 예수님은 표적을 구하는 자들에게 믿음없는 패역한 세대라고 욕하면서 요나의 표적밖에 줄 것이 없다고 했는가? 예수님RP서 오천명을 먹이신 것은 모세의 표적의 재현이다. 그런데 표적을 본 유대인이 또 표적을 구했다. 그 유대인들은 어떤 표적을 구했는가? 머리속에 미리 신적인 것은 이런 것이다라는 선입관을 가졌다. 하나님으로 하여금 우리의 고정관념에 맞게 해주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예수니몌PR서 하신 표적(생명을 불어넣는 표적)을 거부하고 자신들의 고정관념에 맞도록 요구했다. 이런 표적을 구하는 자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가 걸림돌이 되었다. 기독교의 복음은 반지성적인가? 하나님의 계시를 깨닫기 위해서 이성, 지혜를 사용한다.
고전 2:6
하나님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 과학, 예술, 문명개발활동이 필요하다. 이성의 판단을 중단시키면 맹신주의, 이단 사설에 빠지기 쉽다. 바울이 여기서 배격하는 지혜란 어떤 것인가? 하나님께서 대항하는 지혜, 하나님을 무시하고 지혜를 우상화하여 그것으로 자신의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헬라적, 불신자적 지혜를 배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들이 과학을 하고 문명이 발달함에 따라 자신감, 자만을 느끼게 된다. 바울의 용어로 고전 1:31 자기를 자랑하는, 나의 존재밖의 구원자는 필요없다는 것이다.
1:26-31 고린도교회가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의 예증이 됨
바울은 1:18-25에서 하나님은 인류의 구원을 세상의 지혜와 힘이 아니라 세상적으로 볼 때 미련한 그리스도의 십자가오 이루셨다는 것을 고리도교회의 교인의 실상을 예로 들어 증명하고 있다.
26절
고린도인들은 헬라의 철학자라도 된 것처럼 기구만장해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너희들을 지혜롭게 만들었는데 그것이 어떻게 된 것인지를 보라고 했다. 고린도교회 예배 때의 혼란, 성령의 은사를 자랑했기 때문이고, 여자들이 말이 많았기 때문이고, 부자와 가난한 자들의 위화감 때문이었다. 신분은 노예는 아니지만 수공업자, 소상인들 그들은 인간적 지혜로 볼 때 미련한 자들, 연약한 자들, 천민출신자이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그들을 택하시고 부르셨다. 하나님은 고린도의 학자들이 아니라 노예를 택했다. 이들ㄹ이들로 교회를 이루게 하셨다. 이 사실을 통해서 두가지를 깨달아야 한다. 하나는 이 세상에서 높이 평가되는 힘, 지혜, 가문 등은 인간을 구원할 수 없는 무능하고 연약한 것이라는 것 노예들은 하나님의 고귀한 자녀들로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다. 고린도교인들은 하나님RP서 주신 성령의 은사들을 세상적 지혜처럼 자랑하면서 분쟁하는 것을 보고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라는 말을 두 번이나 강조하고 있다. 28절에서는 바울이 천하게 생각하는 것과 멸시받는 자들을 택하신 것을 뽐내는 자들을 폐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폐하게 한다는 말은 부끄럽게 한다는 것보다 더 강한 표현이다.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택하여 존재하고 있다고 뽐내는 것을 폐하게 하신다. 왜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는가? 마치 이것이 우상이 되어 이것이 자신을 구원해 줄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그 우상을 폐하게 하신다. 부자는 곡간에 쌓아놓은 양식을 의지하는 한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한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께서 폐하신다. 롬 4:17 아브라함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을 믿었다. 하나님은 문벌이 없는 고린도의 천민들을 택하여 자신의 무한한 능력 거룩한 위엄에 참예하도록 하시었다. 이것이 의가 전혀없는 죄인에게 의를 주시어 의인이 되게 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이다. 고로 구원을 창조주 하나님의 재창조의 역사이다. 고후 5:17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재창조 되었다는 것이다. 29절에 어던 육체라도 하나님앞에서 자랑할 수 없는 것이다. 어떤 것이라도 자랑 할 것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구원을 맛볼 수 없다. 교회사람들은 세상 사람들과 같이 그들은 권세, 부, 학벌을 자랑했다. 30-31절 이들에게 바울은 축복의 철저한 은혜를 강조했다. 30절 너희는 하나님에 의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것입어 그리스도안에 있게 되고.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이 받은 하나님의 구원의 선물을 자랑한 것은 옳지 않다. 않을 수 있다. 하나님을 망각하고 하나님의 선물에만 집착하면 특권의식, 우월의식에 빠질 수 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에게 지혜를 주신 주를 자랑하고, 부를 주신 주를 자랑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우리 자신은 고린도교회처럼 그리스도의 예증이 되고있는가? 고린도교회 성도처럼 부족한 자를 택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하셨다는 예증이 되고있는가? 위대한 과학자들이(지혜있는 자들이)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을보고 무엇을 느끼는가? 바울은 그들에게 20절에 무엇이라고 하는가? 철학자, 지혜자, 신학자가 어디있는가? 하나님은 이런 지혜있는 자가 아니ㅏ 미련한 자를 택하여 하나님의 자녀를 만드셨다. 아무리 지혜가 있다 하여도 하나님의 피조세계를 보고도 그것을 만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 왜 그런가? 인간의 죄악성 때문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면서도 가문, 학벌을 자랑하고 있지 않은가? 교회에서 위화감을 일으키고 있지 않은가? 구원의 giver인 주를 망각하고 그의 선물에만 집착하는 것이 교회에 어떻게 나타나는가? 오늘 본문은우리삶에 많은 것을 적용하게 한다.

2장 1절~5절
본문 :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1장에서 바울은 하나님은 인류를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구원하셨다고 했습니다. 세상적으로 볼 때는 무능한사람들이 십자가로 구원 받음을 실증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좋은 인상으로 설득력있는 지혜로, 세상적 지혜를 높이 평가하는 고린도교회에 설교하고자하는 유혹을 받았을 것이다.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의 바른 번역 ‘하나님의 비밀을 전할 때에’ 비밀은 2장 7절에 또 나온다. 바울은 복음을 비밀이라고 한다. 이 비밀은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다. 이 구원의 계획을 1장에서 ‘지혜’ 또는 ‘복음’이라고도 표현했다. 이것은 구원의 계획의 다양성을 나타내려고 그렇게 하였다. 비밀이라고 할 때에는 감취어져있음을 나타내려고 한다.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이것은 이땅에 성취될 것이나 미리 묵시자들에게 구원의 계획이 성취도기 전에 보여주셔서 선포하게 하기 위함이다. 롬 11:25
여기서 비밀이란 종말에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말한다. 비밀은 하늘에 이미 정해진 사람에게 감취어져 있고 선포되어지는 것이다. 복음은 비밀을 선포하면서 동시에 그 구원이 종말에 완성되어질 것을 말한다. 이것을 복음의 은닉성이다.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감취어져있다.
설교내용은 2절이다. 예수그리스도, 십자가에 못박혀 달려있는 그리스도외에는 아무것도 선포하지 않기로 작정했다. 아데네에서 바울이 복음을 선포하다가 고린도로 왔다. 복음주의에서는 ‘복음만 선포해야 되기 때문에 영화나 세상의 지혜를 알아서는 안된다. 그런 것과 연결해서 복음을 선포하면 효과가 없고 단순하게 그리스도를 선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갈 3: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고린도보다 먼저 복음을 선포한 갈라디아에서 예수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린 것을 포스터로 그려줬는데 그것을 인간적인 지혜로 부축여서는 안된다. 그것은 예수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단순한 언명만 되풀이 했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바울은 여러 서신에서 여러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죄, 고난, 예수의 부활, 재림, 성령의 역사,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 그런데 이런 모든 문제는 십자가와 관계가 있다. 이것과 관계해서 여러 설교를 했다.
설교의 방법, 1절에 유식한 말과 지혜로 하지 않았다. 4절에 설득력있는 지혜의 말로가 아니라, 대단한 수사력으로가 아니라 세상적인 관점에서 보면 단순하지만 4절에 성령과 능력의 과시를 통해서, 성령과 능력을 과시함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증거했다.
고후 10:10 저희 말이 그 편지들은 중하고 힘이 있으나 그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말이 시원치 않다 하니
고린도인들이 바울을 약하고 말이 시원치안하다고 하고 있다. 바울의 헬라어 수준은 엄청난 수사학, 표현의 깊이가 있었는데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본문의 말씀이 게으른 설교가가 사회에 대한 깊은 통찰력도 가지지 않은채 성령에 호소만 하여 같은 말만 되풀이 하라는 말이 아니다. 바울의 편지는 인간, 사회에 대한 통찰력, 구약의 깊은 이해가 있다. 바울이 경계하는 것은 복잡한 수사학으로 십자가가 가려지는 것이다. 성령의 능력은 2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1. 이적
고후 12:12 사도의 표 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
살전 1:5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라
성령의 능력이 이적이나 기사로 나타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확신으로 나타난다. 말의 진리됨과 구원을 일으키는 바울은 자신의 설교가 성령의 확신하는 능력으로 설교했다고 한다.
3절에 내가 너희가운데 거할 때 약하며 두려워하며 떨었노라.
요즘 성도들은 자신만만하여 카리스마적인 설교가를 훌륭하다고 하지않는가?
고후 12:9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인간의 철저한 무의 상태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남을 확신했다. 자신의 사도로서의 결정을 수치로 보지 않고 하나님늬 능력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았다. 복음선포자가 자신을 높일수록 하나님의 영광은 더 가리워진다. 바울의 말씀에 비추어 설교자의 태도에 대해 생각해보자. 박사학위로 복음의 권위를 부축이려 하지 않는가? 연예인 집사의 간증이 어느때 합당하고 어느 때 합당하지 않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말씀을 전할 때의 태도가 두려움과 떨림인가, 자신이 소유했다는 생각으로 하지 않는가? 바울이 여기서 보여주는 설교자의 상, 설교의 내용과 다른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다시 생각해보아야한다.

비밀에 쌓인 하나님의 지혜
고전 2:6~9 :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의 없어질 관원의 지혜도 아니요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6절에 온전한 그리스도인들: 성령을 받고 행동과 생각이 변한 자들. 바울의 언어에서 육신적인 자라는 말은 하나님께 대항하는자. 자기를 신뢰하여 자기의 힘과 뜻대로 살려는자 라는 말이다. 영적인 자들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외적인 모습(방언...)의 모습을 보고 자신을 성숙했다고 하니 바울은 그들에게 아직 육적인 자들이고 어린아이라고 했다. 2장 6절에서의 지혜는 무엇일까?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지혜이다. 이것을 어린 고린도 교인에게 깊이있게 설명하지 못했다.
세상의 지혜와 대조해서 바울은 비밀이라고 하고 있다. 감추어져있음을 강조한다. 비밀은 종말에 실현될 것인데 선지자들에게 미리 선포케하셨다. 이 지혜는 이 세상의 인간적인 통치자의 지혜가 아니다. ‘주’라는 것은 만유를 다스리는 자로서 예수, 사랑하는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분, 역사를 다스리는 분, 종말의 구원과 심판을 하실 분, 예수의 죽음에는 항상 그리스도라는 칭호가 쓰인다.
요한복음이 얘기하는 예수의 수난사에 대해 알아보자.
요 11:46:52 : 그 중에 어떤 자는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예수의 하신 일을 고하니라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가로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만일 저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저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 그 중에 한 사람 그 해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저희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에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또 그 민족만 위할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것을 미리 말함이러라
예수님께서 유월절에 나사로를 살리는 이적을 행하자 로마 군병들이 강한 감시를 하려고했다. 가야바가 한 사람이 희생해야 백성전체가 로마군인에게 희생되지 않는다고 했다. 이 가야바의 꾀를 이용해 예수그리스도의 일을 이루셨다. 온갖 갈등하는 지혜속에서 우리눈에는 안보일지라도 구원의 계획을 성취하실 것이다. 빌라도, 가야바가 자신의 꾀를 쓰는 순간에 자신의 구원의 일을 이루셨다. 피조세계의 왕(가이사)가 세상의 창조주, 하나님 나라의 왕을 재판했다. 거짓의 왕이 진리를 재판하고 유죄선언을 했다. 역사속에서 항상 불의가 정의를 재판했다. 사단의 왕이 그의 최후 최대의 무기인 죽음으로, 십자가로 도전했다. 빌라도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온 세계에 알리게 되었다. 예수는 사단의 최대무기인 죽음을 부수고 승리하셨다. 사단의 세력이 이 지혜로운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알지 못했다. 하나님은 인간의 꾀를 이용하셔서라도 구어의 계획을 성취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배우는가?
1) 인간적, 세상적 지혜의 무지함
산헤드린공회, 빌라도는 지혜롭게 예수님을 제거, 그러나 하나님은 이 지혜를 이용해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심
2) 인간 그의 지혜로 하나님께 대항함
과학기술의 발달로 삶을 풍료롭게 함. 그렇지만 인간은 자만함.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께로 부터의 독립(인본주의)를 추구한다. 계몽시대 이후의 인간이 이러한 모습을 드러낸다.
3) 하나님의 지혜는 승리하고 마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의 지혜의 놀라운 능력
하나님의 지혜는 이 세상 관원에게 감취어져있다. 인간의 이성의 도구로는 헤아릴 수 없다. 믿음으로만 헤아릴 수 있다. 우리는 보이지 않기 때문에 회의를 일으킬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왜 의인은 고난을 받고 악인은 승리하는가? 하나님께서 동행하시고 통치하시는가? 실제의 경험은 악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님은 자기에게 반역하는 인간의 꾀를 이용해서라도 하나님의 일을 하신다. 불확실성의 시대속에 온갖 인간의 지혜들이 제시되어도 하나님의 지혜를 헤아리면서 하나님의 지혜로 살기 바랍니다.


고린도전서 2:10~16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지난 시간에 하나님의 섭리가 우리 역사속에 확실히 있음을 보았습니다. 세기말에 설 때마다.우리는 불확실속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계몽주의, 인본주의, 과학으로... 인간의 지혜로 자만하게 하고 십자가에 대항하게 되었다. 히틀러의 막시즘, 모택동의 문화운동, 반신인 김일성은 얼마나 많은 재앙을 가져다 주었나?
그런 지금 우리는 확신과 지혜를 가지고 살 수 있다. 모택동을 이용해서라도 김일성을 이용해서라도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이루어 가신다.
10절 :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앞에는 하나님의 지혜가 감취어져 있음을 말해줬는데 하나님의 성령으로 이것을 보여주셨다. 어떠한 인간은 십자가의 도를 깨닫지 못하지만 성령이 미리 우리 가운데 역사하셔서 우리의 눈으로 그것을 알게하셨다. 믿음이 성령의 선물이다. 하나님의 영은 모든 것을 통달하시고 하나님의 깊은 곳, 하나님의 계획 까지도 통달하신다는 것이다. 인간의 영이 인간자아의 중심이기에, 자기 마음에 무엇을 생각할 지 안다.
11절 :
우리그리스도인은 성령을 알게하는 영을 받았다. 동시에 우리 인간의 스스로를 알게한다. 하나님RP로 오는 영은 하나님의 구원계획, 속마음을 알게한다. 하나님의 영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을 알게한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하고, 자아를 알게하고, 우리가 그의 피조물이며, 독립적 존재가 아니며, 창조주 하나님께 의존하여 살아가야 하는 존재임을 알게한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동시에 자아에 대한 지식이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알면 나를 알게된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며 자기가 자신을 의지하며 살게된다.
12절:
참인간에 대한 지식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으로 인도할 수 있다. 인간이 정직하게 인정할 때 자신의 피조물로성을 인식할 수 밖에 없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안다고 하면서 인간으로서 어떤 삶을 살아야 되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13절 :
영적인 것들을 영적인 것들로 분별한다 할 때 앞의 영적인 것은 새롭게 받은 성령의 계시를 의미하고 뒤의 영적인 것은 지금 받은 성령의 계시로 영적인 사람들에게
14절 :
육에 속한 사람=혼적인 사람은 옛 아담적인 사람
혼적인 사람 : 창2:7 하나님께서 생기를 불어넣은 존재. 혹은 자연인 이라고도 한다. 생명을 가진 사람, 흙의 사람, 육적인 사람 다 똑같은 말이다. 반대말은 새피조물, 새 아담된자.
이 때 숨은 생명의 원천이다. 바울의 육신이라는 말은 하나님께 대항하는 사람이라는 뜻 영적인 존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새피조물이 된 자라는 뜻. 축복은 영적인 것을 받지 못한 사람은 개닫지 못한다.
15절 :
신령한자;영적인자
성령이 충만한 그리스도인은 성령으로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다. 15절에 자신은 다름사람으로 판단받지 않는다는 뜻은?
1) 눈은 뜬, 빛을 본 사람은 세상을 판단할 수 있다. 는 가능성
2) 고전 4:3, 인간의 판단은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께서 만이 판단하신다는 가능성
3) 혼적인 사람으로부터는 판단받을 수 없다. 는 가능성. 1번 가능성과 비슷하다.
15절 후반부는 고전 12:10, 14:9과 모순될 수는 없다. 영적인 사람은 전혀 판단받아서는 안된다는 말이 아니다. 15절 후반부는 성령을 받지 않는 사람, 자연인에게만 판단을 받지 않는다는 말이다.(같이 성령을 받은 사람은 포함하지 않는다.) 선지자가 선생들이 진짜 복음을 가르치는가 판단할 수 있다.
16절:
이사야서 40:3의 인용이다. 바울은 자신의 논증을 사 40:3의 인용으로 결론내리고 있다.
그리스도의 마음=그리스도의 영=하나님의 영
사40:3의 ‘주’는 여호와 하나님. 바울은 ‘주’를 예수에게 적용하고 있다. 이 문단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담고있다.(2:10-16)
예수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모든 속성과 모든 것을 위임받은자이므로 하나님을 나타낸다. 계시된 하나님(예수님)을 계시하시는 분:성령
성령을 통해서 계시된 하나님을 터득하게 하신다.

고전 3:1-17
3:1에 두가지 사람을 분류하고 있다. 영적인 사람과 육에 속한 자들. 즉 육신적인 사람들.
영적인 사람 : 성령에의해 깨우침을 받아 성령에 따라 사는 사람. 하나님의 뜻을 준행하여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사람.
육신적인 사람 :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고 자신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사람
바울이 왜 고린도 교인에게 육신적인 사람이라고 하는가? 복음을 받아 영적인 삶을 시작했지만 육에 의해 더 많이 지배를 받기 때문에, 그리스도안에서 아이들이다.
부정적으로말하면-육신적인 사람
긍정적으로 말하면-구리스도안에서 갓난아이
단단한 음식을 먹일 수 없어서 젖을 먹일 수 밖에 없었다. 복음의 핵심만을 쉽게, 간단히 설명할 수 밖에 없었다. 풍성한 은사를 받아서 스스로 영적인 자들인것처럼 생각하지만, 바울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했다. 육신적인 자인 증거 : 3절 - 너희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그들이 바울파로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로 나누어서 분쟁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기와 분쟁은 자신의 자랑(자신에 내재되어있는 자원에 의존함)이 원인이다. 한국교회는 영적인 자들의 교회인가? 육신적인 자들의 교회인가? 한국교회의 특징:기도의 열성, 그것과 못지않게 분열, 분쟁이 한국교회의 특징이다. 우리 각자의 신앙의 성숙도를 돌아보아야 한다. 겉으로 형식적으로 성숙한자 같이 보이나, 속으로 육신적인 자일 수 있다는 경고로 받아들여야 한다.
5-15절
고리도 교이들은 탁월한 재능, 지혜를 남들이 그들을 우러러 보게 하는 힘으로 이해했다. 심지어 성령의 은사들도 그렇게 생각했다. 겉으로 크게 드러나는 은사를 추구했다. 바울은 모든 은사는 다른 사람들에게 섬기라고 주신 것을 12장-14장에서 말하고 있다. 5절
바울은 사도들이 지배하는 작 아니라 섬기는 자임을 얘기하고 있다. 사도들을 큰 은사를 가진 자로 생각하고 따르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들은 종이기 때문이다.
종:식탁에서 시중드는 사람이라는 뜻
신약성경에서 교회직분의 칭호:장로, 감독, 집사,사도... 들을 한 단어로 모두 종이라고 한다. 당시 관직을 나타내는 말에는 ‘다스린다. 존경을 받는자’라는 함축어가 들어있는데, 교회 직분에는 적용되지않는다. 반면에 교회의 모든 직분을 종으로 나타낸다.

신약성경의 직분관
1) 교회내의 모든 직분은 지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섬김을 위한 것이다. 심지어 사도직도 섬김을 위한 것이다. 종노릇하는 것이다.
2) 교회내의 모든 직분은 그들의 차이는 섬김의 다양한 형태에 있는 것이지 권위의 과다에 있지 않다.
(적용)오늘 우리교회의 직분에 대한 이해를 어떻게 고쳐야 하는가? 목사, 장로, 권사, 집사...
기독교문화의 변화는 언어사용부터 나타나야하다. ‘장’이라는 말보다는 섬김을 나타내는 말로 바꾸어져야 한다. ex) 대통령-큰종
사도바울, 아볼로-성도들의 종이라고 말하 수 있다. 교회의 직분자들은 1차적으로 하나님의 종이며 2차적으로 성도들을 섬기기 위한 종이다.
‘종’이라는 말은 한국사회의 가치관과 잘 맞지 않다. 그래서 ‘종님’이라는 칭호도 쓴다. 바울은 자신이 ‘개척선교사’임을 나타냈고, 아볼로는 선생으로서의 섬김을 하였다. 바울은 자신은 심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다고 하였다. 이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일하신다고 하였다. 심는이와 물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요,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이 일을 하신다고 하였다. 그들이 구체적으로 맡은 일은 다르다고 하여도 같이 교회를 세우는 일에 참여하고 있다.
10-11절
놓여진 터는 예수그리스도. 그 기초위에 집을 짓는가?
예수그리스도늬 구원을 약화시키는 가르침-율법, 지혜,인간의 공적도 중요하다고 하는 가르침은 그리스도의 터위에 다른 기초를 놓는 가르침이다. 마16장 베드로의 고백.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드링다’라고 하자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반석(베드로)라고했다. 고리도교인이 베드로가 교회의 주춧돌이라고 생각하자 예수님만이 교회의 기초라고하였다.
엡 2:20 복음 선포자들-교회의 주춧돌
예수님 - 교회의 모퉁이돌
복음선포자들이 주의해야할 점
1) 예수님 외에 다른 주춧돌을 쓸 수 없음
2) 무엇으로 집을 짓는가? 금, 은인가? 지푸라기인가/ 복음을 올바르게 효과적으로 (금, 보석)으로 지어야 한다.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을 것을 가르치지만 최후 심판의 날에 지푸라기로 지었나, 보석으로 지었나라고 심판하신다고 가르친다. 이것은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지 않은가? 다음시간에 구체적으로 알아보자.


고린도 전서 11 (3:4-15)

최후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 우리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는다는 이 진리가 어떻게 상호 조화되는가를 고전 3:4-15의 말씀으로 토론해 보자.

바울은 사도들, 즉 바울 자신과 아볼로, 베드로를 교회에서 각자 맡은 사명을 다한 자들로 표현을 한다. 자신은 개척 선교사로서 교회를 개척하는 일을 아주 잘 했으며, 지혜로운 건축자 같이 터를 잘 닦았다고 자부하면서 이 터는 예수 그리스도일 수밖에 없으며 그의 십자가와 부활로 구원받는다는 이 복음의 진리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 다음에 아볼로가 와서 성도들을 좀 더 가르치고 양육하는 일을 하였는데 이것을 바울은 “물 주는 이“ 로 표현한다. 이런 가운데에 베드로(게바)가 혹 유대 예루살렘 출신의 사도로서 모세 율법을 강조하고 음식을 가린다든지 우상과 어울리는 일들을 상당히 엄격히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베드로를 추종하는 자들이 예수께서 교회의 주춧돌로 베드로를 삼았기 때문에 우리가 베드로의 가르침을 따라야지 바울의 가르침을 따라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므로써 고린도 교회에 분파가 일어나고 분란이 일어났다.

이에 대해 바울은 사도들이 다 하나님이 각자에게 주신 자기의 독특한 사명을 감당할 따름이고 주춧돌은 예수 그리스도일 뿐이고 그 위에 우리가 집을 지어가는 자들인데 문제는 각 사도들이 어떻게 집을 짓는가 그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사도들을 집 짓는 자들로, 교회를 세우는 자들로 나타내면서 사도들이 자신의 맡은 일을 금과 은과 보석으로 한다고 할 수 있느냐 아니면 비효과적이고 튼튼하지 않은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한다고 하는거냐 하는 것을 잘 살펴야 된다고 한다. 이것은 최후의 심판 때에 하나님이 불로 심판하실텐데 나무와 풀과 짚으로 지은 집은 다 타서 없어질 것이며 그렇게 집 지은 사도 자신은 구원은 받을 것이나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마치 불 가운데를 지나간 자같이 겨우 구원만 받게 된다. 이와 반대로 사도의 직분을 성실하고 효과적으로 잘 감당한 자, 즉 금과 은과 보석으로 지은 집은 불 심판 가운데 더욱 환하게 드러나서 상을 받을 것임을 말한다.

이것은 단순히 바울, 아볼로, 베드로에게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은헤의 사명을 받았다. 우리의 삶 전체를 통해서 열매를 맺는 자들이라고도 말할 수 있고 집을 지어가는, 즉 교회를 세워가는 사람들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데, 우리 각자가 우리 삶을 통해서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에 어떠한 공헌을 했느냐 그것이 나중에 심판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가끔 교회 생활과 개인 생활을 분리해서 우리 개인 생활이 교회를 세우고 교회를 허는 일에 직접적 관련이 없는 것 같이 생각하지만 우리의 말하는 것, 행동하는 모든 일거수 일투족이 교회를 세우고 때로는 교회를 허는데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우리가 우리 삶에서 옳은 것을 생각하고 따뜻한 사랑의 말을 하고 옳고 사랑스런 행동을 하면 그것 자체로서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증거가 되고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알게 되고 그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로 모이게 되고....... 이것이 바로 교회를 세우는 것인데 꼭 교회내에서 성도에게 좋은 일을 하고 권면하고 하는 이런 것만이 교회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반면에 그리스도인들이 나쁜 것을 생각하고 나쁜 말을 하고 남에게 상처 주는 말을 하고 옳지 않은 모의를 하고 또, 남에게 해 되는 일을 하면 당장에 그리스도가 욕을 먹고 교회가 욕을 먹고 이것이 바로 교회를 허는 일인 것이다. 그래서 본문은 바울이 사도들인 자기와 아볼로와 베드로를 염두에 두고 말하지만 우리 모두에게 적용성이 있고, 우리가 우리 삶 전체로써 얼마나 교회를 세우는 일을 했느냐, 무엇으로 집을 지어 갔느냐, 즉 금과 은과 보석으로 지었느냐 나무와 풀과 짚으로 지었느냐하는 것이 심판 받을 때에 드러날 것이기에 우리는 여기서 경고 받고 새로운 결단을 해야 한다.

이 쯤에서 우리에게 한가지 갈등할 문제가 생긴다.
(갈등) 바울은 로4:5에서 의롭지 않은 자를 의롭다고 하시는 하나님이시기에 오직 은혜로,
믿음으로만 구원 받는다고 했는데, 어떻게 또 우리의 행위대로 심판받고 심판대로
상을 받는 자가 있고 상을 받지 못하는 자가 있다고 하느냐?
로 4: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고후5: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함이라
어떤 학자는 행위대로의 심판을 바울이 유대 과거 바리새인 랍비 신학자로서의 자기의 과거를 완전히 청산하지 못한 데서 나온 찌꺼기로 생각했다. 과연 그러한가? 그렇지 않다
1. 최후의 심판 때 상을 못 받을 짓을 한 자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받기는 하되 불 사이를 지난 자 같은 가난한 구원을 받는다. 히6:4-12에서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체험 했다고 하더라도 후에 신앙을 부인하고 뒷걸음질하면 하나님의 은혜는 계속 역사하시나 그것을 계속 뿌리치고 계속 뒷걸음질 치면 구원에서 떨어진다고 바울이 경고하고 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우리가 기본적으로 성화의 과정 가운데서 나무, 풀, 짚으로 집을 짓는 자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이면 구원을 받는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를 믿는 구원을 원천적으로 부인않는 한
(원천적으로 부인할 수 없다) 하나님의 은혜로 공로가 없다 하더라도 구원은 받는다.
2. 하나님의 뜻을 따라 풍성한 열매(금, 은, 보석으로 집 지은 자)를 맺는 자는 상을 받는다.
3.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상태에는 논리적으로 등급이 있을 수 없다.
일등 구원, 이등 구원..., 다 100평 아파트인데 로얄층, 1층, 2층,....이런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구원” 이라는 말은 “ 완전함” 이란 뜻인데, 일등 구원과 꼴지 구원이 있다면 결핍된 구원을 받는 것이 된다. 구원은 온전한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구원은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것이다.
구원을 영생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지금 우리의 삶이 근심, 걱정, 두려움, 고독, 병듦과 같은 죽음의 증상들로 얼룩진 것이라 한다면 구원 즉, 영생을 얻는 것은 결핍에서 오는 부자연, 지혜 부족에서 오는 불안, 사랑의 부족에서 오는 갈등, 근심과는 전혀 다른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어 부요한 하나님의 무한을 얻는 것이다. 즉 한계(결핍성, 제한성)를 극복하므로 우리 피조물이 하나님의 온전함에 참예함, 이것이 영생이고 하나님적인 삶,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아담과 같이 스스로 우리가 하나님 같이 될 때에는 인간 이하가 되지만 우리가 전적으로 하나님 은혜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면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나님 같이 됨을 허락 하신다. 이것이 은혜이다.
4. 상의 의미
상은 좋은 것이고 잃어버림의 반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상은 세상의 상과 같이 우리를 자랑하게 하고 자만하게 하고 이웃을 깔보게 하는 상은 아니다. 이런 행위는 바로 나무와 풀과 짚으로 집을 짓는 것과 같으며 이것은 죄다.
5. 의를 보상하고 불의를 벌주는 하나님의 심판이 없으면 도덕은 있을 수 없고 죄의 개념도 성립될 수 없다.

1-5을 정리하면 우리가 은혜로 믿음으로 받는 구원은 온전한 것이라서 상급을 많이 받고
적게 받는다는 것이 성립이 안 된다. 반면에 최후 심판이 없으면 도덕도 없고 죄의 개녑도
성립될 수 없으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에 정진하게 하는 동기도 없어지게 된다.

이 상반 모순되는 두 가지 관접 때문에
6. 행위에 대한 심판이 있을 뿐 아니라 있어야 된다.


위의 내용을 대충 연결해 보면 바울은 은혜로 받은 우리구원을 그림으로 그리고 있다.

뜻1) 의인 --- 하나님 법정에서 무죄 선고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대신 벌 받고 죄의 대가를 치르심을 믿으면 의인이라 선언되는데
의인으로의 선언은 벌써 미리 일어난다. 거꾸로 말하면 지금 벌써 의인으로서의 선언됨이
심판에서 확인된다는 말이다.
뜻2) 의인 --- 헬라어의 법적 개념만이 아니라 더 근본적으로 관계론적 개념이다.
무죄 석방된 자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속에 들어간 자이다. 지금 벌써 용서하시고 의인
으로 선언되고 이 선언은 최후 심판을 거쳐서 확인되고 완성되어진다.

벌써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이 속에서 우리가 의인이란 것은, 믿음으로 의인 되었다는 것은 최후 심판을 거쳐서 우리 의인됨의 축복을 완전히 누릴 때까지, 그 때까지 우리는 욕심 즉, 하나님 뜻보다 내 스스로가 운명의 주가 되고 내 인생의 주가 되라고 조종하는 사단의 도전에 노출된 자이다.


고린도 전서 12 (3:16- 성전에 대하여)

성전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이나 태도는 그의 선지자적 행위 또는 메시야적 상징 행위였다.
지금은 첫 번째 상징인 예루살렘 성전이 너무나 타락해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으며 하나님이 이 성전에 계시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께서 성전을 파괴하실 것임을 말씀하신다. 막14:58에 예수께서 재판 받으시는 장면이 나오는데 여기서 예수의 죄목은 새로운 성전의 건축, 즉 성전을 부수겠다고 위협하신 것이다. 여기서 “ 성전" 은 하나님의 거룩한 집, 즉 하나님이 거처하는 곳(하나님의 이름이 거하시는 곳)인데 당시 구약시대에서 하나님의 성전 파괴에 대한 예언은 사형감이었다. 실제적으로 구약의 예레미야가 성전의 파괴를 예언했다가 죽도록 맞았었고,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의 증언에 의하면 A.D.62년 무렵 아나니아의 아들 예수라는 사람이 성전파괴의 예언으로 유대인들로부터 핍박을 받고 유대 총독에게 넘어가서 사형은 면하지만 하얀 뼈가 드러날 때까지 맞았다고 했다. 본문에서 예수는 하나님이 성전을 심판으로 헐겠다고 예언했지만 거짓 증인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예수 자신이 직접 성전을 헐겠다고 한 것처럼 거짓 증언(마가는 이들을 거짓 증인들이라고 함)을 하므로써 예수님이 사형 판결을 받게 된다.

대제사장이 예수께 “ 성전을 부수고 다시 짓겠느냐?” 라고 질문했으나 예수께서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자 앞의 질문과는 별로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라는 질문을 다시 하는 것을 본다. 그러면 이 두 질문 사이에는 어떤 연관성이 있는 것일까? 원래 솔로몬의 성전을 지을 때 예언인 나단의 신탁(삼하7:12-14)에 의하면 다윗의 아들(메시야)이 성전을 짓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예수가 스스로 성전을 때려 부수고 성전을 새로 짓겠다는 말은 당시 유대 신학자들에게는 나단의 신탁을 성취한다고 주장하는 다윗의 아들로써 다윗 왕조를 재건하고 이스라엘의 왕, 즉 하나님의 아들되겠다고 하는 주장을 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대제사장이 그렇게 물은 것이다. 여기서 예수께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심으로써 죄가 성립된다. 자신이 메시야라고 한 주장이 죄가 되는 것이 아니라 성전을 때려 부수겠다고 한 것이 참란죄(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한 것)가 된다. 성전은 하나님의 이름이 거하시는 곳이기에 성전을 파괴하겠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한 것과 같기 때문에 이 위협은 참란죄로써 사형감이다.

그러면 예수께서 자기가 새로 짓겠다고 한 성전은 무엇인가?
막14:58 우리가 그의 말을 들으니 손으로 지은 성전을 내가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에 지으리라 하더라 하되
예수께서 새로 짓겠다고 한 성전의 열쇠가 되는 것은 “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과 “사흘만에”
(호6:2인용) 이다. 이 두 가지의 의미는
1) 인간이 짓지 않고 하나님이 세우시는
2) 돌과 나무로 짓는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이 새로 창조, 회복하시는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
이것이 바로 예수께서 선포하시는 하나님 나라(성전)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새로 짓겠다고 하시는 성전은 종말에 하나님 통치 아래에 있는 백성의 공동체를 창조하겠다는 약속을 하신 것이고 지금 예루살렘 성전은 철저히 타락해서 그들의 제사를 하나님이 역겨워 하시며 받지 아니하시므로 이것을 금하시는 것은 구약부터 내려오는 선지자적 상징 행위이다. 그래서 이 타락한 예루살렘 성전이 하나님께 버림받는데 돌 하나 위에 돌 하나를 올릴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파괴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해서 사탄의 통치에서 회개함으로 벗어나 하나님 통치 아래로 불러 창조하고 모은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를 예수의 새로 건축할 성전이라고 한다.

그러면 예수는 어떻게 새로운 성전을 짓느냐?
1. 하나님 나라의 선포를 통해
우리에게 하나님의 무한하고 풍요로운 잔치, 즉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어서 하나님의 무한한 부함을 상속받게 해 주겠다는 약속을 하므로써 우리로 사탄의 통치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통치에 들어오라고 초대하신다.
2. 자신의 죽음으로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떡과 포도주를 놓고 내일 다가오는 자신의 죽음을 두고 많은 사람들을 위해 흘리는(사52, 53:10-13) 언약의 피(출24)로써 자신의 죽음이 죄인들을 의롭게 하는 제사로 설명한다. 이 의롭게 함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피조물-창조주, 언약의 백성-언약의 주)의 회복을 의미하기도 한다.
예레미야가 렘31:33이하에 예언한 새 언약, 즉 하나님이 신의 언약에 불순종하는 이스라엘로 인해 하나님이 새로운 언약을 세우시리라 했는에 바로 예수님의 죽음이 바로 예레미야의 예언을 성취하는 새 언약을 세우는 제사이다하고 예수께서 자신의 죽음을 설명하고 있다. 예수의 죽음은 죄의 대속과 대속함을 얻은 새로운 백성들의 공동체를 세우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성전의 기능이다. 성전의 의미는 언약의 상징이며 성전의 제사는 언약의 관계를 지탱해서 하나님 백성이 하나님 백성으로 살게 하기 위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자신의 죽음을 성전 기능의 종말론적 완성으로 보았다. 왜 이것이 필요한가? 예루살렘 백성의 성전이 타락해서 그성전의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파괴되므로 예수 자신이 성전의 기능을 완성하므로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거처하는 그 백성의 공동체가 창조되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교회라고 한다. 그래서 교회가 성전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그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와 십자가에 대속의 새 언약을 세우는 제사로서의 죽음을 통해서 창조한 종말에 새로운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를 교회하고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제사하지 않는다. 예수의 죽음으로 성전의 기능을 종말론적으로 완성했으므로 우리는 새 언약을 세운 제사에 힘입어서 하나님과 관계가 올바로 되고 바울의 언어로 의인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하나님의 부요함을 상속받는 자가 된 것이다.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인 교회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을 체험할 수 있는 표지가 무엇인가?
그것은 성령의 거하심, 즉 하나님 영의 임재하심이다. 그래서 우리가 예배 때마다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우리에게 오시기를 제일 먼저 기도하고 시작하는 것이다. 5장에 가면 바울이 우리 각 그리스도인 개인을 성전(하나님의 거처지)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성령이 우리 개인에 거하시기 때문이다.

질문) 교회 건물은 성전인가?
신학의 대표적 주된 의미는 하나님의 거처지가 성전이며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가 성전이다. 그리고, 이차적인 의미로서 교회 건물을 성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기능적으로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가 모이는 곳이기 때문이다. 원래 교회 건물이 성전인데 그 곳에 하나님 백성이 모인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가 있는 곳이기에 이차적인 성전의 의미를 둘 수 있으며 이 때는 기능적인 의미로서 성전이다. 텅텅 빈 건물이 성전이 아니라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가 모이는 곳이기 때문에 성전이 될 수 있다 (복현 오거리, 축협 오거리, 반야월 삼거리에 우리가 모였다면 그 곳이 성전이 된다). 지금 교회 건물을 구약 시대의 예루살렘 성전 건물과 동일시 해서 여기에 건물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얼마나 신학적으로 정당성이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러다 보면 목사들도 구약에 성전에서 섬기던 제사장에서 자기 이해를 끌어내서 종교 개혁자들의 의도와는 다르게 개신교회 목사들이 중세 카톨릭적 사제주의에 빠져 들어가는데 이는 구약의 제사장직에서 많이 끌어낸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성전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며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 즉, 교회(회중)가 일차
적인 성전의 의미이고 건물이 성전이라고 할 때는 하나님의 회중이 모이는 곳이기에 비로소
성전의 의미를 띄는 것이지 건물 자체가 본래적으로 성전의 의미를 띄는 것은 아니다.


고린도 전서 13 (3:16-4:5)

지금 고린도 교회는 복음 선포자들, 즉 바울과 아볼로 게바(베드로), 그리스도파로 분파되었는데, 바울은 이렇게 분파되는 것이 옳지 않음을 바울과 아볼로의 예를 들어 말하고 있다. 바울이 사도의 사명을 잘 감당하는 예로 바울 자신과 아볼로의 예는 서슴없이 들지만 게바파에 대해서는 그러하지 않음을 볼 수 있다. 이는 교회가 주춧돌은 그리스도이고 그리스도 이외에 다른 주춧돌은 놓을 수 없다고 했을 때 게바파는 교회의 주춧돌이 게바라고 생각하고 주장했기 때문일 것이다. 게바파는 7장 특히 8장에서 만나게 되는 금욕주의적 율법주의자들이었던 것 같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우리가 의인이 되고 구원 받는다는 복음을 율법에 대한 강조로 약화시키는 경향을 가졌던 자들이었다. 바울은 자신이 교회의 주춧돌은 그리스도이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고 하나님 백성이 되어서 성전을 이루는 자들임에 대한 그리스도의 복음을 잘 선포해서 기초를 잘 놓았는데 그 위에 쌓는 자, 특히 게바가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구원 받는다는 복음에서 악간 빗나간 율법도 중요하고 인간의 노력도 중요하다는 섞여진 복음을 선포한다면 그것은 자기가 놓은 좋은 주춧돌 위에 금이나 은으로 집 짓는 것이 아니라 짚이나 나무나 풀로 지은 하나님 앞에 쓸모없는 그런 것으로 집 짓는 것과 같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래서 바울은 사도의 사명은 오로지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믿음으로만 구원 얻는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인데 이런 순수한 복음에 조금이라도 무엇인가 섞인 복음을 선포하는 것은 결코 옳지 않음을 경고하고 있다.
바울은 16절에서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를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하는데 이는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거하시기 때문이라고 한다.

3:17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여기 번역이 좋지 않다. 좀 더 옳은 번역은 만일 누가 하나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나님은 그 사람을 파괴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너희들이 그 성전이다. 17절에 두 동사 “ 더럽히면” 과 “ 멸하시리라” 의 동사는 다른 번역이 아니라 똑같은 동사이다.(여기서 성전은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 즉,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를 말함)
여기에서 “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파괴하면)“ 의 성전파괴는 문맥상(고전1-4) 교회에서 유대 율법주의등과 같이 교회의 기반인 그리스도의 의미를 약화 시키거나 스리스도의 의미를 왜곡시키는 행위를 말하는데 앞에서 말한 게바파와 같은 예를 말하는 거 같다. 갈2장에 게바와 바울의 신학적으로 완전히 일치하는 생각을 엿볼 수 있는데 아마 베드로 스스로는 그렇게 가르치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적어도 게바와 예루살렘의 사도들에게 자신들의 권위를 호소하는 일부 거짓 사도들, 갈라디아에 침투하고 나중엔 고린도 교회에도 침투해 자꾸 바울을 깎아내리고 바울 복음이 자꾸 틀렸다고 하는 그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율법의
행위 특히 할례도 중요하다는 이런 것들도 덧붙었는데 지금 바울이 그런 것을 염두에 두고 하는 소리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하나님의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종말에 백성이 되었는데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약화시키거나 왜곡시키는 가르침을 하는 행위는 교회의 및바탕이 되고 근본이 되는 주춧돌, 즉 그리스도를 파괴하는 행위인데 이것이 성전파괴의 첫 번째 의미이다.
두 번째 교회 파괴 행위는 고린도 교회와 같이 서너개의 파벌로 나뉘어져 분파된 것을 교회 파괴행위로 보고 있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인 교회의 기반을 흔드는 행위이기 때문이며 이런 행위를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성전인 교회를 파괴하는 사람들인데 하나님은 그런 행위를 하는 사람을 파괴하실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바울은 삼하6:1-6의 말씀을 염두해두고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인 교회가 하나님 즉, 초월자,거룩하신 이의 성령이 거하시므로 거룩한 성전인데 이 거룩성을 분간하지 못하고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일반적인 것 즉, 세상적인 것과 같이 치부하면서 그것에 대해서 함부로 대하면, 다시 말해서 말씀을 가르칠 중요한 직책을 맡은자가 그리스도의 은혜를 약화시키는 가르침을 한다던가, 이 교회의 기초를 뒤흔드는 일을 한다던가, 이단사설아의 이단을 가르친다던가, 아니면 당시 세상의 풍조와 타협하는 그런 복음을 가르친다던가 해서 그리스도의 유일한 구원자됨의 의미를 약화시키거나 왜곡시키는 가르침을 한다던가, 또는 교회를 세상의 클럽쯤으로 생각해서 여러 분파행위를 한다던가, 이런 것은 하나님의 거룩성을 침범하는 행위이고 하나님의 성전을 파괴하는 것으로서 하나님께서는 탈리의 법대로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응징할것이며 하나님은 그를 파괴하고 말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율법주의를 예로 든다면 율법주의를 가르침은 그리스도의 의미를 약화시키거나 왜곡시키는 행위이며 교회를 파괴하는 행위인데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손상하는 의미가 된다. 왜냐하면, 율법을 잘 지켜서 인간의 공로로 구원을 얻겠다는 것은 나의 공로로, 나의 지혜로, 나의 능력으로, 나의 선함으로, 구원을 받겠다는 행위이므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구원의 은혜를 져버리고 하나님에 대항해서 자기 주장하는 행위가 되며 이것은 곧 하나님과 피조물의 올바른 관계를 져버리는 행위이기 때문인데 이런 행위는 결국 멸망일 수밖에 없다.

바울은 이미 앞에서 사도와 교회의 사역자들이 미천한 재료(나무, 풀, 짚)를 써서 집을 짓는 자들은 훌륭한 사역은 하지 못하나 근본적으로 틀린 가르침을 하지 않는 경우에 그들은 불을 통과한 자들같더라도 구원은 받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제 더 나아가서 바울이 16,17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구원받고 있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파괴대상이 될 수 있는 교회의 사역자도 있음을 말하는데 이들은 어떤자들이냐 하면 성전의 기초인 그리스도의 은혜를 약화시키거나 왜곡시킨 틀린 복음을 선포하는 행위 즉, 성전을 파괴하는 자들임을 경고하고 있다. 이것은 교회의 사역자들과 좀더 확대 해석하면 성도들 모두에게 엄중한 경고이다. 이와 관련해서 복음 선포자들(목사, 장로, 가르치는 자들)은 어떠한 복음을 어떻게 선포하는가에 늘 두럽고 떨림으로 신경을 써야 하며 우리 주위에 어떠한 사상들이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구원을 얻는 복음을 약화시키거나 왜곡시키지 않는지 잘 살펴야 하며 혹시 우리가 큰 분별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상황 속에 우리도 모르게 그런 세태에 휩쓸리거나 그런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지 잘 생각해 보아야 한다.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에도 상당히 미신화되어가는 성령운동이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구원 얻음의 복음을 굉장히 왜곡하는 것을 발견하게도 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른바 적극적 사고(켈리포니아식 복음)를 통해서 출세하고 건강얻고 돈벌고 하는 기독교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상당히 유행되어 있다. 한 예로 올해 강남의 부유층 속에서도 이 켈리포니아적 즉, 켈리포니아의 로버트 슐러 시대 복음이 상당히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데 그런 복음을 바울은 지금 하나님의 성전을 파괴하는 행위로 지칭하고 있다. 또, 한국 교회 내에서 교권 투쟁을 함으로써 많은 분열을 일으키고 교회를 나누는 짓을 하는 사람들도 이 본문을 새겨 읽어야 한다.
고전14:12 그러면 너희도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 세우기를 위하여
풍성하기를 구하라
바울은 우리에게 기독교 윤리에 가장 귀중한 원칙들 중 하나가 우리 모든 행위가 교회를 세우는 일임을 이야기 한다. 고전14:12의 교회의 덕을 세운다는 말은 교회를 세운다는 말인데 원래 덕이란 말은 거기에 없는 말이고 가령 우리가 중요한 윤리적 결정을 할 때에 말하기를 담배를 피워도 그 자체로 죄가 아니고 술 한잔 마시는 것도 그 자체로 죄가 아니나 “ 건덕”을 위해서 해서는 안된다고 말할 때 쓰는 표현이다. 교회 공동체의 거룩성을 더 높이고 교회 공동체의 영성을 더 높이고 교회 공동체의 사랑과 은혜가 풍성함, 그 화평이 풍성함을 더욱 증진시키는 것을 교회를 세운다고 하며 이것을 우리말로 표현키가 어려우니까 덕을 세운다고 풀어서 말한 것이다. 우리 모두는 교회 공동체를 세워 나가기 위해 하나님께로부터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이 본문을 단순히 교회 사역자들과 말씀 선포자들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로 보아서는 안 되며 우리 각자가 자신의 은사를 잘못 써서 교회 공동체를 오히려 파괴하는 일을 하지는 않는지 스스로를 잘 돌아볼 필요가 있다.

3:18-23까지는 사도들과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들의 관계를 바울이 쓰고 있는데 18, 19절은 앞에 1, 2장의 내용을 요약하고 있다. 하나님의 지혜와 이 세상 곧 인간의 지혜는 정반대인데 세상적 지혜를 추구하지 말고 또 사도들을 이 세상적 지혜의 선생들 쯤으로 생각하지 말고 차라리 이 세상적 바보가 되어서 하나님의 지혜를 얻는 진정으로 지혜있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19절에 욥기5:13을 바울이 인용하는데 정확히 번역하면 하나님은 지혜있는 자들을 그들이 부리는 꾀 가운데서 체포한다고 한다. 이 말은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된다. 가끔 우리를 파멸하게 하기 위해 모략하고 못살게 굴기 위해꾀를 부리던 사람들이 자기 올무에 자기 꾀에 붙잡혀서 파멸 당하는 것을 가끔 보게 된다. 그 때에 하나님이 하나님에 대항해서 하나님의 의에, 하나님 백성을 대항해서 부리는 꾀의 올무에 스스로 빠지게 해서 체포하는 그런 분임을 우리가 발견하게 된다. 이 반대는 요셉의 이야기 같은 것인데 하나님 백성을 위해서는 인간이 악을 도모하더라도 하나님이 선으로 바꾸는 또한 그런 분임을 우리가 체험한다. 그래서 바울은 세상적 지혜를 쫓지 말 것을 강조하고 있다.
고전3:20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
이 말씀은 시편94:11의 인용인데 정확한 번역은 주는 지혜있는 자들의 생각이 헛된 것임을 아신다는 것이다. 이 말로도 바울은 우리가 세상적 지혜를 쫓을 것이 아니고 이 세상의 지혜와는 반대되면서 또 훨씬 더 지혜롭고 도리어 이 세상적 지혜를 이용해서 자기의 뜻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지혜를 쫓을 것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이미 1, 2장에서 보았듯이 하나님의 지혜와 세상적 지혜의 반대됨을 역설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를 우리에게 보여준 것이다. 자기를 대항하는 이 세상적 지혜를 이용해서라도 자기의 지혜로운 구원 계획을 성취하시는 분이며 하나님은이 세상의 악인들이 하나님을 대항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항해서 부리는 꾀에 그 올무에 스스로 빠져들게 해서라도 그들을 체포하시고 반면에 그 올무에 대상이 되었던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요셉에게 주셨듯이 도리어 선이 되게 하시는 이심을 보여준다. 그러면서 이 고린도인들 식으로 이 복음을 지헤의 일종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가르침을 계속 하고 있다.

21절의 “자랑” 은 고린도 교회의 분파 행위때 나타난 두드러진 현상이었다. 그들은 파벌로 나뉘어서 각각 바울, 아볼로, 게바파임을 자랑하였다. 그들은 인간들(자기들의 우두머리인 사도)을 자랑함으로 분파 행위를 했는데 그것은 커다란 판단의 오류에서 나온 것이었다. 바울, 아볼로, 게바에게 고린도인들이 속하므로 그들을 상전으로 모시고 자랑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고린도인들의 것, 곧 고린도인들을 섬기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고후4:5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된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이 본문에서 바울은 자신을 “ 종” 이라고 표현한다. 그러니까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종만이 아니고 주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이 성도들의 종임을 바울이 여기에서 강력히 말하고 있다. 이것은 아주 훌륭한 그리스도인의 소명 사상이다. 이렇듯 죄인의 불의한 인간관계의 특징은 만인이 만인에게 자기 주장을 해서 만인을 자기의 종으로 삼으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이나그리스도의 은혜로 의인된 자들의 의로운 인간관계는 만인이 만인에게 빚진 자로써 종노릇하는 것임을 말한다.

고린도 전서 14 (4:6)


고전4:6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가지고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한 말씀밖에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
하여 교만한 마음을 먹지 말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에서는 고난받는 사도들과 자만하는 고린도인들이 대조되고 있다. “ 형제들아” 라는 호칭은 고린도 교인들의 문제를 예리하게 지적하고 그들을 꾸짖으면서도 사랑함을 보이는 바울의 표현이다. 바울은 3장에서 자신과 아볼로를 집짓는 자, 청지기, 심는 자로 표현하면서 성장은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과, 최후 심판 가운데 복음 선포자들의 책임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이렇게 말하는 데에는 두 가지 목적이 있는데
1. 고린도인들이 바울과 아볼로에게서 기록된 것들 외에 넘어가지 않게 하려고
이것에 대해 학자들의 토론이 구구한데 그 중에 가장 그럴듯한 해석은 고린도에 네 개의 파벌(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그리스도파들이 성령과 구원을 이미 받으므로 완전한 자유를 얻었기 때문에 구약 율법이나 윤리적 죄악에 얽매일 필요가 없고 무엇이라도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전6:12) 이런 주장에 대해 바울은 근본적으로는 동의하지만 자신에게 모든 것이 가하지만 자신의 행동으로 누군가가 이렇다 저렇다 하는 식의 비난거리로 만드는 건 어리석은 것이라고 약간 수정한다. 이들에 대항해서 유대 그리스도인들인 게바파(베드로의 가르침을 존중)는 성경의 기록된 가르침을 넘어가서는 안된다고 하면서 율법주의로 나아갔다.
양쪽의 주장으로 다투면서 서로를 무시하고 스스로를 높이고 교만하는 이런상황에서 바울은 양쪽에 충고하는데 유대 그리스도인들의 기록한 것을 넘어가지 말라는 구호를 빌려서 헬라 그리스도파들의 방종을 경계하는 동시에 성경의 유대 그리스도인들의 율법주의에 의한 교만을 은근히 지적하였다. 게바파가 그리스도파에게 기록된 것을 넘어가지 말라고 하는 것으로 자기들은 성경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것처럼, 성경 말씀으로 그리스도파의 방종을 꾸짖는 것처럼 생각했으나 바울은 게바파가 구약 말씀을 그리스도의 은혜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주의적으로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으로 보았다. 구약은 게바파처럼 율법주의적으로 해석하면 그리스도의 은혜가 헛되이 된다. 이것은 구약 말씀의 진정한 의도를 넘어가는 것이리 옳지 않다.
게바파에 대해서는 8장에서 다시 다룰 것이고 여기에서는 특히 그리스도파를 표적으로 우선 그들에게 충고하는데 그리스도파의 구호는 “ 지식” 이었다. 즉, 우리 지식에 의하면 하나님은 한분이시고 우상이라는 것은 존재하지도 않고 돌조각, 나무조각에 불과하기 때문에 우리는 완전히 저 우상을 무시하고 그냥 우상잔치에 어울려서 같이 지내도 괜챦고 그렇게 해도 된다고 생각했다. 바울은 이에 대해 여전히 앞에서와 같이 동의하면서 지식은 교만케 하나 사랑은 덕을 세운다고 교정한다.

2. 바울이 자신과 아볼로를 들어 설명한 것은 한 사도위에 다른 사도를 쉽게 세움으로 교만치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고린도 교인들이 이렇게 네 파로 나뉘어 자신들은 위대한 스승을 모셨기 때문에 저 못난 사도들을 모신 바보들... 이런 식으로 서로 교만하여 경쟁하였다. 이런 가운데서 바울은 자신과 아볼로를 들어 설명한 것은 성경의 뜻을 바울이 고전3:5에 설파한 대로 올바로 깨달아서 그런 치졸한 경쟁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면서 4:7에 이 교만의 문제를 일반화 함으로 그것을 쳐부수는 가장 예리한 논법을 사용한다.
고전4:7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뇨
바울은 이런 수사학적 질문으로 아무도 너를 네 이웃보다 잘난 사람으로 만들지 않았고 너도 네 이웃과 마찬가지로 기껏해야 용서받은 죄인이라는 뜻과 만약 네가 남다른 유별난 은사를 받았다면 하나님께서 그의 영으로 주신 은사이므로 마치 니가 잘난 것처럼 자랑할 건 못된다는 이 두가지 뜻을 모두 말한 것 같다. 고린도 교인들의 자랑은 특히 겉으로 드러난 은사(방언, 이적,...)들로 이런 드러난 은사를 가진 사람들은 은근히 신앙의 교만(하나님이 특별히 나를 사랑해서, 내가 기도를 많이 해서, 내가 교회 봉사를 많이 해서,...)에 빠져있었던 같다. 이에 대해 바울은 설령 그렇다하더라도 이것은 성령 하나님의 은혜고 주신 것이기에 특별히 이것이 남보다 자기가 잘난 표징으로 삼을 건 못 된다고 하면서 감사하고 겸손히 받을 뿐이지 자랑하지 말라고 한다. 더 나아가 바울은 니가 가진 것 중에 받지 않은 것이 무엇이냐, 니가 모든 것을 하나님 은혜로 받았으면서 어찌하여 마치 안 받은 것같이 그것을 스스로 받은 것처럼 자랑하고 교만하냐고 고린도 교인의 근본 문제인 교만과 자랑을 지적하고 있다.

자랑, 교만은 피조물인 인간이 모든 것 즉, 우리의 생명까지도 받은 우리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며 어떤 인간도 어떤 피조물도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치 못함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인간은 서로에게 자기를 자랑하고 심지어 창조주 하나님까지도 자기를 위해 자랑한다.
바울은 로3:27에 율법주의자들이 율법을 잘 지킨 것으로 자랑하는데, 이것이 인간의 근본 문제이며 죄의 본질이라고 말한다. 죄의 본질인 자랑은 자만에서 나온다. 자기 성취, 자기가 가진 것에서 나오는 높은 평가, 그래서 자신이 가지고 성취한 것으로 자신의 삶과 행복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자랑거리로 삼는다. 이 자랑은 우리를 하나님과 소외시키고, 이웃과 소외시킨다. 그래서 바울은 이웃과의 관계속에서 자랑하고 교만한 태도를 엄격히 금한다.

고린도 전서 15 (4:14-21)

이 자신들의 허황된 자만심에 바울이 그의 사도직의 고난을 쓴 역설로 쓰디 쓴 역설로 대조시키는 것을 보고 고린도인들은 마땅히 부끄러워해야 한다. 그러나 바울은 이들을 부끄럽게 하기 위해서 이 글을 쓴 것이 아니라 그들의 영적 아버지로서 영적 자녀들을 타일러 그들로 하여금 바르게 생각하고 살도록 하는 데에 이것을 쓴 목적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자신의 사랑하는 자녀들로 자신을 그들의 아버지로 관계를 그리고 있는데 이 그림 언어는 바울이 고린도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여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어 새로운 피조물들이 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전혀 새로운 사람됨을 말할 때에 새로 난다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 요한은 그런 표현을 쓴다.(요3:5) 요3:5에서처럼 “ 거듭난다” 는 이중의 의미가 있다. 하나는 위로부터 낳는다는 말인데 이것은 어머니 뱃속으로부터 낳는 자연 출생과는 다른 또 한번의 낳음이고 이차적 의미로는 거듭난다는 뜻이다. 위로부터 낳는다는 말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성령의 힘에 의해서 낳는 것, 그것을 구원 받은 자의 전혀 새로워짐을 나타낼 때 쓰는 그림이다. 그런데 바울은 그런 그림을 쓰지 않고 같은 실제를 말하고자 하나 이 새로 낳는다는 것보다 훨씬 더 적극적이고 포괄적 언어인 새로운 피조물들, 새로 창조된 그런 언어를 쓴다.
고후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이 본문은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 사람에게는 새 창조가 일어난다고 번역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그런데 지금 이 본문에서 바울은 요한의 그림과 같은 뜻을 내포하는 의미를 가지고 이 언어를 쓰고 있다. 이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의 복음선포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연합해서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된 새로운 창조가 일어난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여기서 그 사람들을 새로 난 자들, 새로 출생한 자들, 거듭난 자들로 간주하면서 고린도 교인들을 자신의 복음 선포로 새로 창조된 새로 태어난 자신의 영적 자녀로 말하고 있다. 바울 뒤에 고린도에 온 사도들이나 앞으로 올 기도교 지도자들은 그들의 영적 아버지인 바울과는 달리 선생들에 불과하다고 하면서 15절에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을 수 있으나 아버지는 하나일 수밖에 없으며 고린도 교인들을 낳은 영적 아버지가 자신임을 말한다.
앞에 3장에서는 바울 자신이 고린도 교회의 터를 놓았다고 하고 자기 뒤에 온 사도들은 그 터 위에 집을 지는 사람들이라 했는데 이제 여기에서는 자기와 자기 위에 온 사도들과 구분해서 자신은 고린도 교회에 처음 와서 복음을 선포하고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와 연합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창조되고 새로 낳음을 받도록 한 영적 아버지이고 자기 뒤에 오는 사도들은 선생들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은근히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대한 자기의 사도적 권위를 표현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고린도 교회에 대한 사랑과 책임을 남달리 강조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바울이 그들에게 자신을 본 받으라고 16절에 권하면서 고린도인들은 자녀들로서 마땅히 자기의 영적 아버지인 바울의 모범을 받아야한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바울이 그들에게 자신을 본 받으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자신이 그리스도의 모방자이기 때문에 그렇다. 마찬가지로 고린도 전서 뿐아니라 갈4:12, 빌3:17, 살전1:6,2:14, 살후3:7,3:9등 모든 곳에서 바울은 자기 교회의 성도들에게 자기를 본받으라고 권면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는 말로만이 아니라 삶 전체로 그리스도, 그것도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그려냈기 때문에 바울의 사도적 권한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달림의 그 고난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니까 바울은 사도로서 자기 몸에 그리스도를 그대로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온유함, 그리스도의 사랑, 그리스도의 능력, 심지어 그리스도의 사랑의 섬김이 고난으로 나타나기까지... 그러기 때문에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로 하여금 자기를 본받으라고 자신있게 권면하는 것이다.

4:17에 바울이 디모데를 보낸다고 한다. 여기에 시제가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다는 과거 시제로 되어 있는데 이런 과거시제를 “ 편지적 과거형” 이라고 한다. 헬라어에서 편지를 받는 이가 이 편지를 볼 때쯤에는 바울이 이미 보낸 것이 되기에 편지 읽는 사람의 입장에서 쓴 것으로 이것을 편지의 과거형이라고 한다.

그런데 디모데를 왜 보내느냐?
바을의 모범을 잘 받도록 가르치기 위해 보낸다고 한다. 즉 고린도인들이 바울을 본받는데 돕도록 하기 위해서 바울은 디모데를 고린도로 보내는 것이다. 디모데는 바울이 사랑하고 신임하는 조력자로서 고린도 교회의 개척에 동역하였을 뿐 아니라 바울에 의해 그리스도인이 된 바울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이라고 표현한 디모데였다. 바울이 디모데를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이라고 소개하는데에는 신실한 아들인 디모데와 신실하지 못한 아들들인 고린도인들에 대한 대조가 은근히 내포되어 있다. 더불어 고린도인들이 디모데를 본받아서 신실한 자녀들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도 함께 내포되어져 있다. 바울의 모범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신실하게 따르는 디모데가 고린도인들에게 바울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길들(우리말 번역으로 나의 행사, “ 길” 은 행동 양식을 가리키는 유대 숙어로 나의 행동 양식, 나의 태도, 나의 가치관, 나의 윤리적 결정을 말함)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자신의 행동 양식 또는 삶의 방식을 모든 교회에서 같이 가르친다고 한다. 이것은 세계의 모든 교회들의 지역 문화적 특수성들을 초월한 규범적 그리스도인의 삶이 있음을 암시한다.
바울이 각 교회마다 보여준 삶의 방식은 바로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의 삶의 모습으로 이웃을 섬기기 위해서 자신을 내어주는 그것이 심지어 바울이 말하는 고난을 포함하더라도 이웃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삶의 방식, 이것이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의 정신이요, 모습이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같이 따라서 행해야 할 삶의 방식인 것을 말하고 있다. 반면에 고린도인들은 자기 주장하고 교만하고 서로에 대적하여 자신을 높이는 일을 했는데 고린도인들이 바울의 영적인 자녀들로서 당연히 바울의 고난의 삶으로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모범을 따라야 할 것을 바울은 지금 역설하고 있다.

18절 이하에서 바울은 자기의 고린도 방문 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바울은 디모데만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고긴도에 방문하여서 자신이 직접 그 문제들을 바로 잡을 생각이다.
19절에 “ 주께서 허락하시면” 이라고 덧붙임으로서 자신의 모든 계획이 주님의 주권자적 뜻에 달려 있음을 나타낸다. 그는 곧 고린도를 방문하여서 벌써 하나님 나라에 도달하여 왕이나 된 듯이 허황된 말로 자랑하며 날뛰는 자들이 그들의 교만하고 허황된 주장이 아니라, 그런 말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써 사람을 도덕적으로 변화시키고 핍박 속에서도 진리와 사랑에 충실하게 하며 고난 속에서도 믿음과 소망과 기쁨을 견지하게 하는 성령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를 조사해 볼 것이라고 바울은 말한다.

그러면 이 성령의 능력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물론 고린도인들이 생각했던대로 방언, 환상과 신유에도 나타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을 도덕적으로 변화시키고 그래서 늘 이기적으로만 살았던 사람을 남을 생각할 수 있는, 남과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시키고 거짓말하고 남을 구박하고 남을 이용하던 사람을 변화시켜서 참되게 만들고 남에게 사랑을 베풀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 핍박속에서도 진리와 의와 사랑에 충실하게 해서 고난 속에서도 믿음과 소망과 기쁨을 견지하게 하는 것 이것이 성령이 능력이다.
이런 성령의 능력을 이들이 가지고 있는지 아닌지를 조사해 보겠다고 바울이 말하는에 이는 하나님의 다스림은 허황된 말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런 능력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바울은 21절에서 버릇없는 자녀를 훈육하는 아버지같이 영적 자녀인 고린도 교인들에게 내가 회초리를 들고 갈까, 아니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갈까라고 묻고 있다. 바울의 편지를 받는 사람중에는 바울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도 있을 텐데 그러함에도 바을은 디모데를 먼저 보내고 자신도 뒤따라 갈 것인데 자신이 갔을 떼에도 여전히 그러하다면 회초리로 매를 때리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보듯이 종으로 철저히 섬기는 자인(고후4:5) 겸손한 바울이 또 동시에 엄청난 사도적 권위로 이 고린도 교회에 권면하는 것이다.

명령할 수 있고 이렇게 경고할 수 있고, 나를 본받으라고 자신있게 말하는 이 영적 권위,
이 영적 권위는 어디에서 나오는가?
그것은 바울이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로써 그의 말 뿐만이 아니라 그의 삶이 복음, 즉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그려내는 그런 삶이었기 때문에 이런 사도적 권위, 영적인 권위를 주장할 수 있었고 그것에 교회들이 순복하는 것이다. 그래서 차암 조오은 영적 리더쉽, 영적 권위의 일면을 보게 된다.


고전 강해 (김세윤목사) 고전 5장 1절- (16)
고전 1장-4장은 제1부로 그릇된 지혜 자랑으로 교회의 분열에서 십자가 지혜 자랑으로 하나됨을 이야기하고, 5장 1절- 6장 20절 에서는 2부로 고린도 교회의 그릇된 자유 사상에 근거한 도덕적 타락과 이에 대한 교회의 거룩성에 대해 이야기 한다.
음행과 교회의 관계에 대해 1절에서 바울은 계모를 데리고 사는, 이방인 중에도 없는 악질적인 일이라 말하며 ‘심지어’ 라는 말로 실제로, 들어서 믿기지 않으나 실제로 라는 말로 풀이할 수 있다. 그들은 이미 구원받아, 성령 가운데 산다 하지만 이방보다 더한 삶을 살고 있다. 여자는 그리스도 인이 아닌 듯 하고, 바울은 음행한 남자보다 교회 전체를 꾸짖고 있다. 교회는 이를 통곡하고 출교시켜야 한다고 얘기.
2절에서 허파에 바람이 잔뜩 들어간 상태의(교만한) 교회를 나무란다. 음행을 오히려 고린도 교회의 자랑으로 여기고 교만하며 자랑하는 그릇된 구원론과 자유 사상을 가짐. 이것은 헬라적 이원론(영, 육 구분)에 근거한 것으로 구원으로 성령받은 영적구원에는 육적으로 아무거나 해도 해를 받지 않고, 몸으로 아무거나 해도 자유로움을, 영적구원의 더 확실함의 근거로 삼아 자랑하고 있다. 음행을 영적 구원과 자유의 표시로 간주하고 있다. 이에 찔림이 있는 사람은 자유를 모른다고 하며, 영적 구원을 받지 못했다고 함.
3절에 바울의 결론은 이미 이 자를 심판했다고 하며, 4절에는 심판의 내용이, 5절에는 사단에게 넘겨줌이 마땅하다고, 출교시켜 사단에게 넘겨주라. 3절부터 한 문장으로 넘겨 주도록 내가 이미 판단했다고 이야기 한다.
3절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 개척자로 안녕과 평안을 전하고, 영적으로 함께하는 자로서 거기 있는 것처럼 판단한다. 한 지도자의 독단적인 결정이 아니라 민주적 결정으로 사단에게 넘겨 주는 것은 궁극적으로 그의 구원을 위함 이다.
골 1장 13절에서 교회는 사단의 통치 영역에서 벗어나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로 불러 모아진 시림들의 공동체 이므로, 교회로부터 쫓겨남은 예수그리스도의 통치영역에서 사단의 주권영역으로 쫓겨남을 의미하며 음행자는 사단에게 넘겨주라고 했다.
히 2장 14절에서 하나님은 사단에게 사마의 세력을 주었고, 사망의 세력을 죄인에게 행사하여 육신이 멸망토록, 음행자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을 받아 새 피조물이 (올바른 관계로)되어 최후의 심판때 구원을 받는다. 행위, 육신은 심판의 불을, 본질적인 자아, 영은 구원받는다.
고전 3장 15절에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각자 어떻게 집을 짓는가를 적용.(건축자재로 지프라기, 막대기...) 집이 심판의 불을 통과 하므로 검정이 묻기는 하나 구원 받는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주로 고백했던 자 이므로 그전 성령의(종말의 구원의 보증금) 능력이 있었던 성령을 받았던자 이므로 그도 구원을 받는다. 그러나 그의 집이, 일생 쌓았던 것이 다 불타 없어진 상태로 구원 받는다.
사단에게 내어 줌으로 육신은 멸망, 영이 주의 날 구원 얻게 한다. 한때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 세례 받았던 사람이 중도에 끔찍한 죄를 저질렀을 때 구원을 받을 것인가?
죽으면 육은 멸망하고 영만 하나님 나라에... 의식은 소멸하고 의식 주체인 영은 하나님 앞에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닌가? 인간론적 언어들 (육, 혼, 마음) 이분법, 삼분법? 고린도 교회의 인간론은 헬라적 이원론이 원인 이었다. 영과 육의 완전 구분으로 영은 육이아닌 의식하게 하고 생각하게 하고 영원한 것이고 육은 물질, 시공을 차지하는 것으로 가시적, 보이는 것이다. 이 두 개의 이질적 요소로 된 것으로 본 헬라적 인간론이 죄를 짓게 했다. 영은 구원 받음으로 육은 소용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바울은 무엇에 근거하여 이야기 하나? 바울은 분석적 견해가 아닌 총체적 견해로 하나님으로부터 지음 받은 몸이나 자기 개인의 것으로 만족하는 자족, 하나님이 필요 없다라고 하며 자만하는 인간을 육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모든 피조물, 시간성, 한계성을 가진 존재인 육신의 생각은 악이다라고 얘기한다. 영은 의식, 느낌, 의지, 결단, 생각 능력, 의지 능력으로 하나님과 교류할 수 있는 인간을 말한다. 인간은 자기 멋대로 육신의 열매를 맺는 육신적 인간이기도 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영의 열매를 맺는 영적인간이기도 하다.
영적 삶이 시작된 사람이 엄청난 음행으로 사단에 순종함이 드러남으로 사단에게 넘겨 줌이 옳고 사단의 주권 행사로 결국 죄의 삵, 죄의 월급인 죽음을 맞게 된다고 한다. 그러나 이미 주로 고백했을 때 시작된 성령의 역사, 하나님과 교류하게된 영적 생명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구원받게 된다. 육신은 죽고 영은 사는 것이다. 죄짓는 인간이 종멸되고, 영이 구원받는다.
한 번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은 중간 죄악으로 인해 무효 되지 않는다. 롬 5장 15절에서 죄의 분량에 넘치는 은혜로, 마지막 아담인 그리스도를 통한 은혜가 최초의 아담의 죄를 덮고도 남는다고 이야기한다. 구원은 철저히 하나님 중심의 생각이며, 하나님의 은혜로만 되어진다. 시작부터 끝까지 모두 하나님의 은혜이며 그가 고백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렇게 하심을 미리 역사하시는 성령으로 인함임을 이야기 한다. 신실하신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절대 무효되지 않는 것이다. 하니님의 신실하심은 그가 택하고 영을 보내 깨닫고 믿게 하심으로 끝까지 신실히 우리를 구원하고 마시는 하나님이다. 이것을 예정론이라 한다. 나를 위하시는 것은 우리에게가 아니라 하나님 손에 있으므로 우리의 구원은 확실한 것이다. 구원의 확신과 위안은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 때문에 구원하신다.
바울의 관심은 교회의 거룩, 순결성을 지키는 것으로 음행자로 인한 관계훼손은 죄로 인한 언약관계의 훼손을 뜻한다. 6절의 적은 누룩이 온 반죽을 부풀게 (갈 5장 9절) 7절 새 죽덩이가 되기 위해 묵은 누룩을 쓸어 내어 버리라. 누룩없는 자이므로, 유월절 어린양으로 인해... 유월절 쯤에 이 편지를 쓰고 있는데, 유월절에는 7일 동안 누룩으로 부풀리지 않은 떡, 무교병을 먹는다.
고린도 교회의 도덕적 순결성 회복을 위해 모든 죄악을 쓸어 내어 버리고 무룩의 영향이 없는 깨끗한 새로운 삶의 시작, 순결해져야 함을 이야기한다.
누룩 없는자(누룩에 부풀리지 않은자)이므로 묵은 누룩(죄악성,옛습관)을 다 버리라.
7절 명령형과 서술형과의 관계
너희는 새 반죽덩어리 이다. 묵은 누룩을 버리고 새 반죽덩이가 되라.
명령형이 서술형에 근거해 있다. - 바울 논리의 기본 구조
롬 6장 11-14, 19절 새로운 피조물이다. 새사람으로 살라. 십자가로 옛사람이 죽고 그와 함께 새 사람으로 부활했다.(서) 그러므로,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으로 살라.(명)
오늘날 성 도덕의 물란은 교회 공동체의 책임이며, 도덕성의 타락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있다.
교회의 도덕적 타락에 대해 헤이해짐의 문제를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한국 교회는 교회안의 행악자에 대해 오히려 관대하고, 감싸안으려 하고, 교회 밖의 행악자에 대해 정죄, 우월감을 가지려 한다. 그러나 바울은 교회 내의 행악자에 대해 더욱 엄격하고 더욱 준엄하게 대처하여 출교함으로 교회의 거룩성, 순결성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고 한다. 거룩한 교회 공동체의 유지를 위해...
이 장에서의 교훈은 우리의 구원이 신실하신 하나님께 있음으로 버리지 않고 구원하심에 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고려 해야 할 것은 구원의 첫 맛을 본자들이 끝까지 거부하면, 오래 참으심의 한계로 두 번째 회개함이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위로와 경고가 함께 주어져야 한다.


고린도 전서 강해 (17) 고전 5장 7절
개혁성경과 김세윤 목사님의 번역을 보면- 새 반죽덩이가 되기 위해서 묵은 누룩을 쓸어 버리자. 너희는 누룩에 부풀리지 않은 자 이므로, 뿐만아니라 어린양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음으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누룩에 부풀리지 않은 새 반죽덩이 이다. 그러므로 새 반죽덩이가 되기 위해 묵은 누룩을 쓸어 버리라.- 어순을 거꾸로 하고 있다. 왜냐하면 너희는 누룩에 부풀리지 않은 새반죽덩이 이고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음으로 묵은 누룩을 쓸어 버리라.
두문장에서 바울의 윤리는 인본주의적 윤리- 우리가 죄짓지 않고 선한 일을 해서 의인이 된다는, 인간의 노력-와 반대되고, 한 번 하나님의 은혜로 새 피조물이 되면 위로부터의 성령의 은혜로 거듭나면, 의인이 되면, 성령을 받았으면 이제 더 이상 내가 노력을 하건 하지 않건 내가 의인으로 남는 것이고, 구원으르 확보한것이고, 죄와는 관계없게 된다는 생각이 고린도 교회에서 볼수 있는, 고대 영지주의자들의 생각, 오늘 우리나라의 구원파 사람들의 얘기와도 반대되는 독특한 가르침 이다.
고전 5장 7절이 기독교적 윤리를 가장 잘 반영한다.
너희는 누룩에 부풀리지 않은 새 반죽덩어리이다.-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푼 구원의 사건 즉 구원의 은혜를 서술한 서술형이다.(description)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새로운 피조물이다.라는 뜻이다.
요3장 성령으로 새로 낳았다. 거듭났다. 의인이 되었다. 고전 6장 9-11절 - 씻음과 거룩하게 의롭게 되었다.(서술형) 곧이어 그러므로 새 반죽덩이가 되기 위해 묵은 누룩을 쓸어 버리라(명령형) 새반죽덩이가 되라. 예로 골 3장1-9절 옛 죄인으로 죽었고, 새생명을 받았다.(서술형)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명령) 죽었다고 했다가 다시 죽이라고 한다. 새사람을 입었으니(서술), 아담적 옛사람이 죽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재 창조된 사람이 되라. 9, 10절은 서술형으로 명령형을 위해 서술형을 이용한 것이다.
갈 5장 16절 - 성령을 쫓아 행하라.(명) 두가지 가능성 - 성령, 육신을 쫓아 행할때의 각각 열매들... 결론에서 성령에 살면, 성령으로 행하라.(명) 성령에 인도함에 따라 사는자 이다(서) 그러므로 성령의 인도 대로 살아야 된다.(명)
바울은 롬 1-6장까지 율법의 행위로 의인될수 없고 하나님의 은혜로만 된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를 덧입어서 의인된다고 한다.(5장) 은혜로만, 믿음으로만 가능하다고 함으로 항상 똑같은 오해를 불러 일으켰다. 6장 1절, 15절이 근거가 된다. 율법을 지키는 선행으로 되는 것이 아니므로 죄를 더 짓자. 그래도 하나님은 믿음으로, 은혜로 되니, 하나님의 은혜가 더 크게 될것이 아니냐라고 적대자들의 오해의 근원이 되어왔다. 바울은 그럴수 없느니라. 아주 강하게, 말도 안되는 소리라 한다. 왜냐면 6장에 믿음으로만 의인 되었다는 소리가 무엇인가 하면, 은혜, 믿음으로 의인되었음으로 의인으로 살 수밖에 없음을 말한다. 믿음, 은혜로 의인됨이 없으면 의인으로 살 수 없음을 또한 말한다. 인본주의적 윤리 아닌 창조주 하나님의 초월적 능력으로 새 피조물이 되어야만 비로소 선을 행할수 있고,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음을 보여준다.
6장 2절 바울 복음에 대한 근본적 비판 -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 그와 함께 장사됨 (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장사 되었다는 것을 극으로 설명한 것이 세례이다.) - 이는 함께 부활하고, 새생명에 동참케 하시기 위해...(서) 6절 옛사람이 -옛 아담적인 사람, 사단의 말을 듣는 사람, 스스로 하나님같이 되라. 내가 존재의 근원, 스스로의 힘으로 살고, 사단의 종이된 사람, 하나님의 통치 아래서 사단의 통치 아래로 넘어간 사람, 사단이 노예주가 됨. 하나님을 거스르도록 채찍질함. 사단이 주는 삯, 월급은 죽음. 사망 - 이런 사람이 예수와 못박힘은 죄의 몸이 멸망하기 위해.. 10절까지는 세례를 상기 시키며 서술하여, 극적인 설명을 하고 있다.
11절 명령어로 ‘여기라’ 12-14절 못하게하여, 말고, 드리며, 드리라.(명) 6장 6, 7절과 모순 되는 듯하다. 6장 18, 19절도 대조를 이룸. 바울서신의 구조가 다 이러하다.
롬 1-11장 - 하나님의 은혜로만, 믿음으로 의인됨 (구원의 사건을 서술)
12-15장 - (윤리장) ‘그러므로’로 시작하여 의인이 되라함. 갈, 엡, 골도 동일.
첫부분은 교리 부분, 뒷부분은 윤리 부분이라 할 수 있다. 구원의 사건, 은혜를 서술하고, 그러므로 우리가 의인으로 살아야 함을 말한다.
서술과 명령형의 엇갈림이 잘 나타난 곳이 고전 5장 7절이다. 이것이 진정한 윤리를 가능케하는 이유인데, 구원의 종말론적인 구조 때문에 이러한 현상이 나타난다. 그리스도의 오심(성탄절), 이세대, 이세상(사단이 왕노릇 - 아담이 부여 받은 왕권을 사단에게 이양함으로, 흑암, 고난의 세상), 그리스도의 두 번째 오심, 하나님의 나라. 오는 세상(창조주가 다시 통치, 의와 사랑과 생명의 통치), 그리스도가 오셔서 하나님 나라 선포. 대속, 죽음, 부활로 사단의 세력을 끊고, 하나님 나라가 시작 - 그리스도 재림의 때에 완성. 십자가, 부활로 결정적인 패배, 그리스도가 오실 때 완전히 섬멸됨. 이차 대전을 경험한 신학자들은, 처음 오셔서 이루신 구원을 d-day승리, 재림의 승리를 v-day승리, victory day라하고, decision day는 전쟁이 결판난날, (2차 대전때 1944년, 연합군이 성공적으로 상륙한때) d-day 후 1945년 5월8일까지 전쟁은 끌어 졌고, 사인한 후 완전승리한 때를 5월9일을 v-day라 했다. 그리스도의 사단에 대한 승리, 십자가의 구원(d-day, 이미 이루어짐), 재림(v-day, 아직 이루어지지 않음) 재림하여 사단을 실업자로 만들 때 그때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 나라가 완성, 지금은 구원의 첫 열매, 구원의 보증금, 이것을 증명하는 것이 성령, 구원의 완성을 향해가는 우리 의 위치 - 이미 구원받음, 그러나 오실 때 완전한 의인으로...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며 사단의 통치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통치로 이전된 것이 우리의 구원, 믿음 - 그리스도와의 연합, 옛 아담적 자아가 죽고 장사됨, 하나님의 통치 영역으로 그리스도와 연합 새로운 피조물이 됐다.
골 1장 13절 -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어 아들 (상속자), 하나님의 사랑의 통치 영역으로 넘겨졌다.(서) 의인된다는 말은, 주권의 이전이다. 사단에서 그리스도의 주권으로 이전, 사단의 세력이 더 이상 우리에게 미치지 않는가? 아니다. 사단은 등뼈가 분질러 졌지만, 아직 우리에게 까지 그 마수를 뻐치고 있다. 그러므로 명령형이 계속 나오고 있는 것이다. 구원의 사건이 일어 났기 때문에, 사단의 통치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가능성이 우리에게 있는것이다. 두가지 가능성이 우리에게 주어진다. - 하나님의 주권 행사, 아직 완성되지 않으므로 동시에 사단의 유혹도 사단의 사주도 같이 온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느냐, 사단의 사주를 받는냐
하나님의 구원 행위가 없으면, 어짜피 사단의 통치아래 있어 소용이 없지만, 그러나 하나님으로 인해 의인이 되었기 때문에, 두가지 가능성의 문이 열린 것이다. 하나님을 쫓으라 라는 명령형이 우리에게 적용된다. 왜냐면 우리가 시작과 완성의 긴장 속에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 윤리가 가능한 것은, 서술형이 명령형의 기초 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통치 안에 있으므로 그렇게 살라는 가능성이 열려진 것이다. 인본주의는 이와 거꾸로 이다.
사단은 속이는자로 우리에게 온다. 네 유익을 위해 살라. 돈 , 권세, 명예,.... 니가 니 하나님이되라고 충동.. 결국은 사단의 노예가 된다. 하나님이 요구하는 완전한 의인이 될 수 없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대항하게 된다.
새로운 피조물이 된사람만이 하나님을 순종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그러나 이 가능성만 열린 것이 아니라, 사단에게 대한 가능성도 여전히 열려 있다. 성령에 따라 걷는 가능성, 육신에 따라 걷는 가능성이 생기는데, 구원의 완성까지 계속 된다.
순간 순간 마다 하나님을 쫓느냐, 사단의 옛사람을 쫓느냐, 시시 각각으로 선택에 직면한다. 두가지 가능성이 모두 다가오는데... 그러기 때문에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고, 의인이 되었으므로 더 이상 사단의 뜻을 쫓지말고, 의인의 사람으로 살라. 옛 자아가 다시 살아나서는 안된다고 얘기한다. 구원의 사건이 비로소 기독윤리를 가눙하게 한다.
구원파의 윤리와 반대 영지주의와 반대 - 이미 하나님의 통치에 들어 갔으므로 ‘너희가 이미 부요하게 되었구나’ 성령받은 것을 근거로, 영혼은 이미 구원받았다고 생각. 이미와 아직의 긴장을 해소 해 버리고, 사단이 자기에게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 그러므로 이런일도 가능하다고 얘깋나다.
구원파는 성경에 위배, 종말론적 구조를 이해 못한 것이다.
의인 됐다는 말은 become what you are로 하나님의 은혜로 너희가 의인이다. 또한 그것이 되라는 말이다. 의인이 된다는 말은, 의란 관계론적 개념 창조주와 인간의 올바른 관계를 의라하고 관계의 의무를 다함이 의이다. 부자관계에서 관계속에 있는 의무를 다할 때, 올바른 관계를 지탱하게 된다.
하나님은 의로 하나님 노릇해주심에, 인간은 그의 무한한 사랑에 의존하는 것, 순종할 때 우리는 의로와 진다. 인간은 관계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므로 불의 하다. 하나님이 벌만 주면 하나님 또한 불의 한 것이 된다. 그러나 복음이라는 것, 우리는 불의 하나 하나님은 의로우심으로 아들을 통해 대속하심으로, 우리로 그와 올바른 관계로 들어오게 하심이 하나님의 의 이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 가 나타나서.... 롬 3장 21-26절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그와 연합함으로 관계속에서 회복, 하나님의 은혜로만, 믿음으로만 의인이 된다.
올바른 관계속에 들어가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 되시고, 주 되신다. 그러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어떻게 하면 이 관계속에 머무르느냐 하는 것인데...
구원의 완성때까지는 의무로 여겨지는 데, 그것은 사단이 우리를 뺄려고 하기 때문에
새로운 피조물됨을 상기 시킴으로 여기서 빠져나가면 안됨을 명령형으로 표시 한다.
서술형으로 설명하고, 그러므로 의인답게 복음에 합당하게 살라. 그 상태에 머물러야 한다는 것으로 기독교적 윤리는 서술형이 있을때만 가능 하다.
고전 5장 17절 누룩없는 새반죽덩이이다. 그러므로 옛누룩을 쓸어버리라. 이것은 구원의 사건의 서술과 그것에 근거한 윤리적 명령이 교직 되어있는 것이다.


고전 강해 (김세윤 목사) 고전 5장 9절- 6장 11절 (18)
바울은 5장에서 고린도 교회의 음행의 케이스를 가지고, 고린도 교회를 꾸짖었다. 9절에서 13절까지는 바울이 전에 썼던 편지를 오해하고 있음을 바로 잡기 위하여 쓰고 있다. 고린도인들의 문제는 성도덕의 문란 이었다. 고린도인 처럼 산다는 것은, 완전한 성의 개방으로 문란함을 말한다. 이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도, 뿌리 깊은 헬라적 철학으로 인해 구원은 영이 받는 것이므로 이 육신으로는 아무것을 해도 영의 구원에는 영향이 없다고 얘기한다. 바울은 이미 있어져온 이것을 두고 지난번에도 한 번 경고를 했었다. 교회내의 성적 문란자들과 상관하지 말고 교회 공동체의 사귐속에서 제외시키라 라고 편지를 썼다. 이것을 이전 편지라 하였는데, 이것은 우리에게 상실 되었다. 이전 편지를 고린도교회가 오해 했는데, 교회 내외를 막론하고 이런 음행하는 자들과는 도대체 상종하지 말라고 알고 있었다. 바로잡으면 그게 아니고, 교회외의 사람들의 문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내에 있는 형제들 중에 음란 행위가 있으면, 그런자들과는 상대 하지 말고, 교회 밖으로 내어쫓으라고, 이전 편지를 설명해 주고 있다. 고린도 교회에서의음행자를 처리하도록 하고, 교회의 순결성을 유지 하도록 했는데, 고린도 교회는 비그리스도인 음행자 까지도 상대하지 말라고 오해 했다. 금욕주의적. 수도원적 이상이 있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교회내에서 관용하여서는 안된다.
11절에 죄악 목록이 나오는데 음행하거나 탐람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욕되게 한다는 것이다. 우상숭배하거나, 후욕하거나(욕을 잘 하거나), 술취하거나(술주정뱅이), 토색하거나(남의 것을 뺏앗는자, 사기치는자)는 사귀지도 말고 함께 먹지도 말라고 내쫓아야 된다고 강경하게 이야기한다.
하나님 백성의 거룩성과 순결성, 하나님과의 언약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교회내의 거룩, 순결성을 훼손하지 않도록 힘써야 한다.
두어가지 원칙을 발견할 수 있는데, 하나는 교회사를 보면 타락한 세상에서 교회의 거룩성을 지키기 위해서 수도원적 이상을 표방하는 사람들이 늘 있어왔다. 고대 교회에서부터 점점 발전하는 수도원운동, 죄악을 적게 짓기위해 산속으로... 자기들끼리만 엄격한 훈련을 해왔지만, 중세에 와서 타락 했고, 종교개혁 때 에라스무스가 수도원 타락을 풍자하는 책을 썼다. 교회가 거룩과 순결성이 훼손되어 세상과 별차이가 없어지면, 항상 교회와 세상을 가르기위해, 세상에서 떼어서 세상과 거래 하지 않을 수 있는 교회를 만들자는 것으로, 산으로, 사막으로, 신대륙으로 ... 이것이 17, 18세기 삶의 양태였다. 바울은 원칙을 천명하는데, 교회가 세상속에서 나갈수는 없는일이다라고 했다. 한국에서 수적증가 70, 80년대 경제성장의 정신에 세뇌되어 교회가 물량주의로 교인들의 신앙이, 윤리가 타락하여 세상과 다를바가 없게 되었다. 이런때 진정한 부흥운동을 하려면 이 본문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는가...
그리스도인들끼리만 하는 것이 옳다고 가르치는가 ... 수도원적 이상이, 우리에게 유혹거리 이지만 우리의 신앙고백과는 위배 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유의 주로 고백하고, 선교의 사명을 가진자로 세상을 마귀에게 내어주고, 도피해서 그리스도인끼리만 사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세상에 대해 하나님 께서 사랑하셔서, 아들을 보내시고 십자가로 세상의 주로 고백할구것을 천명해야 한다. 동시에 교회는 거룩성과 순결성을 보존해야할 의무가 있다. 거룩성이란 세상으로부터 분리된 하나님께 바쳐져 하나님의 것임이다. 세상의 가치관에 휩쓸려서는 안된다. 순결성을 보존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위해서는 세상 내에 있는 행악자와 거래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교회내의 하나님백성답게 살지 못하는 자는 그가 속한 곳으로 물리적으로는 교회에 있지만, 그가 속한 세상으로 내 보내야 한다. 교회는 순결한, 거룩한 하나님의 공동체로 보존되어야 한다. 두 번째의 요점은 교회의 순결과 거룩성을 보존하기 위해 어떻게 교회를 올바로 가르치고 권면하고 규율, 치리를 업격하게 해야 하는가. 사랑으로 권면하며, 동시에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사랑을 우습게여기고 죄악에 빠져있는 사람에게 얼마만큼 인내함으로 권면하다가 어느시점이면 그 사람이 있는 것이 교회전체에 악한 누룩과 같아 교회 전체의 타락 원인이 되겠다고 생각할 때, 어떻게 치리해야 할 것인가... 비울의 세상으로 내 보내라 라는 구체적 치리를 실천하느냐... 교회내의 치리가 굉장히 약해 졌다. 선배들은 치리가 엄격했다. 교회내 순결, 거룩 유지함이 중요. 권면도 필요하지만 치리도 필요함을 발견하게 된다.
6장 1-11절 바울은 성문제에 관한 가르침을 다 마치지 않았다. 6장 12절 보면 모든 것이 가하나... 음란의 문제를 계속다룸. ‘모든 것이 가하다’는 고린도 교인들의 구호였다. 자유주의자들의 구호를 인용. 사실이다, 그러나 모두 유익한 것이 아니다. 비판받는 바보같은 짓은 해선 안된다. 13절 물질적인 것 ‘삭물은 배를 위하고, 배는 식물을 위한다.’ 은 아무소용이 없다는 구호. 고린도인의 영, 육 이원론. 15절 그리스도의 지체 에 대해, 7장 결혼 이란것은 해선 안된다. 고린도 교회 금욕주의자들의 말, 바울은 동의는하나 완전 올바른 것은 아니다라고 하고. 되도록 결혼을 하라라고 한다.
외인은 하나님이 판단... 5장 12절 이하 심판에 관해 언급하게 되었는데, 고린도교회의 또 하나의 문제인 재판에 관해 다루고 넘어감. 고린도 그리스도인끼리 정부의 재판에 나가 서로 송사한 것에 대해그리스도인들은 그들끼리의 다툼을 그들 스스로의 재판정에서 해결해야된다는 것을 1-6절까지, 그들 가운데 송사가 아예없어야 된다는 총고. 7-8절, 6장1-11절 번역 구태여가 아니라 감히 너희가 그럴수 있느냐의 뜻이다. 다른이와 사건 있을 때 감히 불의 한자들 앞에서 송사할 수 있느냐... 하나님과 교회에 대한 모욕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일차적으로 종교적 개념으로 불의한자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들어가지 못한자며, 의롭게 되지 못한자들로 성도들은 하나님의 백성 소유물을 지칭하는 말인데... 고린도교인은 자신의 하나님의 백성된 특권을 망각함으로 원래는 성도가 세상을 심판함이 마땅한 상식에 속한 것이고, 신앙의 기초에 속한것이다. 5장 13절 외인들은 하나님이 심판, 교회내 행악자들은 세상으로 보내라. 심판치 않는다 하고는 6장에서는 2절에서 성도들이 세상 사람들을 심판한다고 하는가? 모순되는 것 같다. 5장 12,13절의 요점은 비판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고, 6장2절에서는 다니엘서 7장등에 근거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반영하는 것으로서 설명이 필요하므로 나중에... 종말의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계시로 인자에게 세상에 대한 심판권을 양도하시고, 인자는 종말의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심판할 것이 예언됨. 이예언에 근거 해서 예수는 자기를 인자라, 그사람의 아들이라, 예수의 세상에 대한 심판에 동참하게 되는것. 그래서 마 19장 28절, 눅 22장 30절 최후의 만찬때, 하나님 나라 완성때 11제자로 대표되는 새 이스라엘, 옛 12지파에 의한 옛 이스라엘이 아니고, 새 12제자로 대표 되는 새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을 심판할 것을 약속하심. 바울이 이것을 이어받아 종말에 하나님의 백성이 주님의 최후의 심판에 참여 할 것을 바울이 이야기 한다. 종말에 세상을 심판할 사람들이 그들 가운데 일어나는 지극히 소소한 갈등하나 해결하지 못하는가 통탄하고 있다.
3절 더나아가 세상만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심지어 천사도 판단하게 되는데, 그런데 성도들 끼리 갈등 해결 못하느냐. 좋은 천사와 나쁜 천사가 있고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에 천사들도 심판을 받는다. 배경 설명이 필요...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종말에 천사들보다 더 높은 지위가 된다. 유대 신학에서는 가령 야곱, 이스라엘이 천사 중에 가장 으뜸가는 천사라하고... 여러가지 그림으로 설명... 이것이 무슨말이냐 하면 종말에 구원받는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상속자로서 하나님의 부요함, 하나님의 통치권까지 상속받는다는 말. 심판권까지 구약의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불리우는 천사들 위에 우리가 놓이게 된다. 구약 신학에서는 야곱이 천사들 중에 가장 으뜸가는 천사장이다. 보좌에 하나님과 함께 앉아 있는 천사장이다. 다른 천사들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얼굴을 가리고 있다. 한결같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하나님의 모든 것을 상속받는 자들로서 천사들위에 놓이게 된다. 고양된 위치, 위대하고 영광스런 구원을 약속받고, 첫맛을 보게 된 것이 우리이다. 높은 정체성을 망각하다니...
4절에 갈등이 있을 때, 일상생활에 관계된 문제가 있을 때, 세상 재판관에 맡길 것인가
5절에 창피, 무안을 줌. 수치심을 불러 일으키기 위해 고린도 교회의 문제 - 스스로 지혜있다고 하는 것, 헬라식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 바울, 아볼로, 베드로 좀 더 지혜롭게 들리는 것을 선택, 지혜에 대한 자신감이 음행을 불러 일으킴. 지혜를 구원의 수단으로 여김-냉소적으로 역설적으로 이야기 함. 바울의 심정, 강력한 언어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자기자랑하는 교회치고 내실있는 교회는 드물다. 자기자랑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하나님의 은혜로 겸손히..
6절 고린도 교회의 실상은 형제가 형제를 더블어 송사, 그것도 세상사람 앞에서,...
교회내 형제로부터 보다는 세상사람으로 부터 더 올바른 판단을 얻을 것으로 생각한다면, 세상 만도 못한 교회가 되는 것이다,
7절 사실 서로가 더블어 송사한다는 것 자체가 전적으로 패배를 의미한다. 왜 차라리 불의를 당하고 말지 않으며, 이기적 욕망이 사랑과 평화를 압도해 버림으로, 송사함으로 그리스도인의 가장 큰 덕목인 사랑과 정의를 저버리고, 그리스도인적 실제를 포기했음을 공포... 설사 한쪽이 승리한다해도 그리스도인적인 승리가 아니고, 패배인 것이다. 양쪽 다 완전한 패배이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산상수훈), 모범을 따라 차라리 불의를 당하고, 강탈당하고 말지... 7절 후반부, 산상수훈의 정신을 설파하고 있다. 자신의 권리를 찾지 않거나, 보복하려 하지않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이상이다. 고린도 교인은 완전 반대이다. 8절 너희가 불의를 행하고 강탈한다. 그것도 형제에게
9-10절 죄악목록이 다시 음란, 우상, 남색(동성애), 도적, 토색 욕쟁이 ,.... 하나님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 상속받지 못한다.(중요한 표현이다.) 종말의 하나님 백성의 숙명을 얻지 못하고 말것이다.
11절 너희중 몇은 이와같은 자들이었다. 그러나 씻겼고, 그러나 거룩해졌고 ,그러나 의로와 졌다. 각 동사앞에 극대화하는 그러나를 눈여겨 보라. 성령을 선물로 받을 떄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올바른 관계가 되어졌다. 이 전환, 구원의 실제를 강조하기 위해, 그러나를 세번 강조함- 이것이 서술형. 재판행위는 아직도 그리스도인다운 삶이 아님으로 바울이 권면하고 있다. 정체를 실제 삶에서 실증하라. (명)
고린도 교회를 예로삼아 공부할 문제- 그리스도인들끼리의 다툼 문제-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우리에게는 다분히 있는 일이다. 우리 교회는 고린도 교회보다 나은가?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법정에서 송사해도 되는가? 아니면 어떻게...
제일 어려운 것이 그리스도인끼리의 송사이다. 라고 재판자들이 흔히 이야기한다. 바울의 이야기를 근거해 자기를 방어하는, 악용하는 자도 있다. 토론해 보라.


고전 강해 (김세윤 목사) 고전 6장 12-20절(19)
6장 1-11절 세상 법정에서 서로 송사함. 첫마디부터 너희가 감히 어떻게... 라는 말투에서 부터 바울의 교회 공동체에 대한 이상이 얼마나 높았는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고결하게, 거룩하게 본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오늘 우리의 교회 공동체에 대한 이상은, 기대하는바가 얼마나 높은가... 세상 공동체와 교회가 별로 차이가 없는 것 같아 보여 이상이 낮을 수 있다. 조금 차이나는 것으로 안도하고, 자랑하는 것을 보면 우리가 이상을 아주 낮게 잡음을 알 수 있다. 더 고상한 단계로 끌어올릴 노력이 필요하다. 바울이 가진 교회에 대한 이상을 되새겨 보고 그와같은 하나님의 거룩한 배성의 공동체가 얼마나 거룩, 고결해야 하는가를 생각하고접근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12절에서 5장에서부터 다룬 성적 문란에 대해 다시 다룸. 부도덕의 근저를 짚어 이야기 하는데, 그 근저는 고린도인들의 방탕한 생활의 구호를 바탕으로 하고 있고 바울은 그것을 인용함으로 고린도인들의 문제를 깊이 다루고 있다.
12절 모든 것이 네게 가하다 - 고린도인들의 구호.
다 네게 유익하지는 않다. - 바울의 논평
모든 것이 네게 허락 된다. - 고린도인들의 구호
나는 어떤것에 대해서도 지배 당하지 않겠다. - 바울의 대응
고린도교회의 자유주의자들의 구호에 대해 바울은 일단 수용하나 두가지 논평으로 대응하고 있다. 바울은 전면적인 거부를 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강조(갈) 율법주의로 흘러서는 안된다. 자유가 방종으로 흘러 진정한 자유가 아닌 속박으로 흐르는데 문제가 있다. 그리스도인들의 자유 근본에 동의하나 제약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율법을 지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있는 것이므로 근본적으로 자유의 삶이다. 그러나 그들의 자유를 무책임하게 쓰면 안된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율법에 대응해강조(갈5장13절) 자유를 왜곡하지 않도록 경고도 함께... 그리스도인은 자유를 자기뿐아니라 교회에 유익하게 써야 한다. 서로에게 사랑으로 종 노릇하라. 사랑에 근거한 것 만이 유익하기 때문에.. 교회를 세우는 것이 된다. 고전 8장1절에 우상의 제물에 대해 답하겠습니다 라고 서문을 달고, 다음 문장은 고린도 교회의 구호 인용. 우리가 다 지식이 있다. 그러나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고, 사랑이 교회를 세운다. 진정한 자유아닌 죄의 노예에 머무르는 상태일 뿐이다. 사랑으로 교회의 높은 이상의 실현.. 사랑의행위만이 유익한 것이다.
두 번째로 어떤것에 의해서도 지배 당하지 않겠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진정한 자유이어야 함이다. 자유라는 이른 아래 방종함은 실제로 자신의 욕망이나 나쁜일을 위함일 뿐이다. 방종은 자유보다 큰 것이 아니라 더 작은 것이다. 성 도착증에 걸린사람이 구원받았으므로 심지어 세상의 도덕도 무시하고 자기 아버지의 아내와도 같이 사는 성욕을 즐겼다. 이것을 자유라고 여기고 교회 사람들도 박수를 보내고 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자신의 성욕에 완전히 지배 받고 있는 것이다. 복음의 자유함을 모르는 사람이다. 옛 사람의 성욕 속박 가운데 그대로 있는 것이다.
13절 ‘음식은 배를 위하고 배는 음식을 위하나’ - 구호
하나님이 둘다 패하실 것이다 - 구호
몸은 음란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고 주를 위해 있고 주는 몸을 위해 있다. - 논평
육은 영의 구원에 아주 영향이 없고, 몸을 어떤음식으로 채워도 괜찮다고 보았다. (헬라적 철학) 음식가리는 문제에 있어 합당할지는 모른다. 8장 8절에 음식은 우리를 하나님앞에 세우지 못하나니...(하나님 앞에 천거? 심판?) 음식이 별것아니라는 것에 동의. 10장 25절 시장에서 파는 것은... 묻지말고 먹으라. 그러나 배의 식욕을 만족시키는 것과 몸의 성욕을 만족 시키는 것은 본질적으로 다름을 이야기 한다. 배는 단순한 물질이지만, 몸은 바울에게 단순한 고기 덩이가 아니라 혼을 가진 인간으로, 자아를 가진 자아 자체, 인격 자체 이고, 장차 영적인 몸으로 부활 되어 영생을 누릴 것이다. 고전 15장 42절 이하 구원의 완성 상태는 영적인 몸으로 부활하는 상태, 그러므로 몸이란 인간의 자아란 말이다. 음란을 위해 몸을 써도 괜찮은 것이 아니다. 오직 주를 섬기기 위해 있는 것이다.
14절 하나님이 주를 살리셨을때 예수그리스도가 영적인 몸으로 나타 나셨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종말의 부활시에 몸없는 영의 상태가 아니라 우리가 영적인 몸을 가진 상태이다. 몸이란 말은 인간이 몸이다. 몸은 보이는것, 물질적인것, 시공을 차지하는 눈에 나타나는 것, 영은 몸이란 형체 속에 보이지 않는 진정한 자아가 있는데, 그것을 영이라고 헬라적 이원론 철학으로 보았다. 성경의 가르침은 총체적 관점에서 인간자체를 몸이라고도 하고 영이라고도하고, 혼이라고도 한다. 세분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어느 관점에서 인간을 봤느냐의 문제이다. 인간을 몸이라 봤을 때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파조세계 전체와 연대해 있는 전체로서의 인간, 하나님께 의존해서 존재할 수 있는 인간, 하나님으로부터 분리 되면 피조 세계의 제약 안에 갇힐 수 밖에 없는 존재로서의 인간을 몸이라 한다. 도덕적으로 말하면 중립적이다. 섬기는 몸이 될 수도 있고 등을 돌리면 자기 뜻대로 살수도 있고... 후자의 경우 육신이 된다. 육신이란 하나님께 의존, 순종을 거부 하고 살려는 태도. 도리어 대항. 육신의 반대말이 영. 영은 창조주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인간, 혼이란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 살아있는 존재로서의인간. 육신은 도덕적으로 부정적인 말이다. 하나님께 대항, 유한한 재원을 무한한 것으로 착각 사단의 권세 아래 있는 몸. 우리 몸을 구원하여 영적인 몸이 되게 하셨다. 하나님과 올바른 사귐 속에 있는 존재로 창조주의 모든 부요함을 덧입는 존재로... 재림때 영적인 몸을 입으리라 설파. 은밀한 의미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를 받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육신적 몸이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새로운 사람으로 부할했을 때 구원의 첫열매-영적이 몸- 우리 가운데 시작되었다. 벌써와 아직의 긴장 속에서 육신으로 전락하도록 방치하느냐 아니며 이런 것으로부터 해방 된자로 하나님을 섬기는데 쓰느냐가 우리에게 문제이다. 바울은 육신으로 죽이고, 영을 따라 영의 열매를 맺으라고 가르침. 바울이 몸에 대한 사상을 교정하고 있다. 음식 먹는것과는 달리 성관계는 인격전체에 대한 것으로 한시성을 가지는 것이아니라 영원성을 가진다.
15절 또하나의 이유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와 연합 그리스도에 내포됨으로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 이므로 창기와 연합하면, 떼어내어 창기와 한 몸을 이루게 하는 것이다. 왜냐면 성적 결합은 둘이 한 육체가 되게하기 때문이다. 창 3장 둘이 한몸이 된다. 한몸이 된다는 것은 둘이 한 인격이 되는 것이다. 간음의 경우 이혼을 허락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간음은 사실상 연합관계를 파괴한 것이다. 결혼은 한 몸을 이룬다는 원칙을 적용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세례받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연합했다. 그리스도안에 내포됐다. 그리스도인들이 창기와 연합하면 자기 몸을 그리스도에게서 떼내어 창기와 연합시킨 것이다. 자신을 구원의 상태에서 빼내어 죄악의 연합을 이룬 것, 구원의 상태에서 자신을 제거함. 절대 그런일이 있어서는 안된다.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이것을 알지 못하느냐. 마땅히 알아야 할 일이다.
17절 주와 한 영이니라. 창기와 몸을 이룸, 주와 한영을 이루는 것이니라. 교제 할수 있는 인간, 영적인 몸이 된다. 부활 하시어 만유의 주가되신 예수그리스도는 영적 몸을 가지신 분이기 때문에 그와 연합 그와 한 영이된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그의 몸으로 적대하고 자존하려하여 육신으로 전락하려 하지않고, 하나님께 의존하는영, 진정으로 산 영이 된다. 고린도의 문제로 인해 바울은 인간론을 펼쳤다. 고전 15장에가서 어휘들을 설명
18절 음행으로부터 도망하라. 사람이 저지르는 모든 죄는 그의 몸밖에 있는 것 이지만, 음행으로 저지르는 죄는 자신의 몸에게 죄를 저지르는 것이다. 도망하라는 강한 표현 주시. 10장 14절에서 우상숭배하는 일을 피하라. 도망가라 라는 강한 언어를 쓰고 있다. 왜냐하면 고린도에서는 음행과 우상숭배가 강하게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에, 성문란의 장소나 계절을 만나면 도망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모든 죄가 자신의 몸을 상하게 하는 것인데, 바울은 어떤 의미로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는가? 칼빈의 해석을 인용하면 다른 죄도 그러하나 음행이 저지르는 죄보다 더러운 것을 남기지는 않는다. 음행은 자아 전체에 지울수 없는 떼를 남긴다. 그래서 다른 죄와 음행을 분리 한 것이다. 음행을 피해야하는 이유들을 여러 가지로 열거하고 있다.
19절 너희몸은 하나님께로 받아 너희안에 계시는 성령의 성전이고, 너희는 너희것이 아닌줄 알지 못하느냐. 3장 16, 17절 교회가 성령의 거처지로서 하나님의 성전이다 라고 얘기. 여기서는 각 개인을 성전이라 했다. 왜냐면 그리스도인 각자의 몸에 성령이 거하시기 때문이다. 성령을 받아 성령이 우리안에 내주한다.
20절 하나님께서 너희를 값을 치르고 샀기 때문이다. 몸은 너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다. 예수그리스도를 속전으로 삼고 우리를 종으로 삼았다. 이것이 구속이다. 이전의 상전인 사단을 섬길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몸으로 자아의 모든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성도덕의 문란은 근본적으로 그들의 잘못된 인간론에 의해 왜곡돼, 복음의 자유의 오해로 인함.
오늘 한국이 퇘폐적 문화로, 고린도 교회의 문제가 우리의 문제임을 알게 된다. 몸의 물질화가 근저에 갈려있는 현대, 몸의 상품화 상황이 퇘폐적 문화 근저에 깔려 있지 않은가... 자유의 왜곡이 자유의 확대가 아니라, 방종으로 왜곡 되어 속박이 된다는 것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오늘 우리를 지배하려는 것들, 돈, 스포츠... 모두 우리의 자유를 넘겨주는 대상이 될 수 있다.
질문) 다른 죄는 몸밖에 있다는 말에 대해, 상대적 의미로 음행이 우리 자아에 가장 더러운 것을 남긴다는 의미로 죄악 중 가장 나쁜죄악으로 꼽고 있다. 바울은 음행을 여러 가지로 신학적으로 설명하여 음행이 단순한 물질적 의미가 아니라, 우상숭배와 연결 되는 행위이므로 가장 심한 죄로 말하고 있다. 거짓말 하는 죄와 비기어 음행은 이미 그 속에 거짓말이 내포되어 있다. 음행이 큰 죄냐, 우상숭배가 큰 죄냐. 우상숭배가 근본된 죄이다. 바울이 음란에 대해 이야기 할 때 강한 표현을 쓴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사회와 관계없이 교회의, 우리의 순결성을 유지해야 한다.


고전 강해 (김세윤 목사) 고전 7장 1-7절(20)
바울은 고전 5장 1절부터 성 문제를 다루어 왔다. 7장 에서는 결혼에 대해 다루고 있다. 남편과 아내에 대한 충고를 고르게 하고 있다. 그러나 7장에서 결혼에 관한 기독교적 견해를 포괄적, 전체적으로 다루기 위함이 아니라, 고린도 교회의 문제 때문에 다루게 되었다. 본문이 고린도 교회의 현실적 문제를 두고 다루기 때문에, 우리에게 낯설 수도 있다. 한계점을 염두해 두고 살펴 보아야 한다.
1절 너희들이 쓴것들에 대하여... (제목) 내가 답하겠다. 그들의 쓴 것이 무엇이냐... 첫째, 결혼문제 둘째, 7장 25절 처녀들에 대해서 셋째, 8장 1, 4절 우상의 제물을 먹는것에 대해서 넷째, 12장 1절 영적인 것들에 대하여 - 성령의 은사들에 대하여 - 14장까지. 16장 1절 성도들을 위한 연보에 대해서(예루살렘). 신학자들의 짐작으로 다섯 번째로 15장에 예수그리스도의 부활과 그리스도인의 부활에 대하여-부활을 부인하는 자들에 대해-도 있었을 것이다.
바울은 답할때 고린도 교회에서 유포되고 있는 구호를 인용하여 옳고 그름을 논평하며 충고 하고 있다. ‘남자가 여자를 만지지 않것이 좋다’-구호. 그러나, 음행의 연고로 남편과 아내를 두라-논평. 이와같이 답하는 과정 중 바울은 그들의 말을 인용 5,6장에서는 성령주의파들이 자유를 부르짓는 구호 인용. 7장에서는 금욕자들의 구호를 인용. 모든 성 관계룰 원칙적으로 부인. 결혼한 부부는 이혼을 하든지 아니면 같이 살면서 성관계를 하지 말든지.. 성관계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용인 되는가 하는 문제이다. 고린도 두 파들가운데의 논쟁거리들을 다루고 있다. 성령파의 방종(아프로디테 우상숭배)과 금욕주의자들의 완전한 율법주의가 문제이다. 결과적으로 완전히 상반된 이야기를 하지만 근거는, 이원론으로 똑같은 것이다. 헬라적 영과 육의 이원론에 의해 성령파는 자기들의 성령받은 체험과 구원받은 체험에 근거해 영혼이 이미 구원 받았으므로 몸으로는 아무래도 괜찮다고 한다. 금욕주의자들은 영적인 사람은 육신적인 것을 되도록 부인하고 순결한 영의 상태를 보존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율법주의 이다.
바울의 답은 1, 2절에 나와 있는데, 남자는 여자를 만지지 않는 것이 좋다. 수긍하고 독신이 선호할 것이기는 하나 결혼은 하나님의 창조 뜻에 합당한 것이고, 일반적으로 사람을 음행으로 부터 보호하는 것이다. 2절은 7장의 바울의 대답의 기저가 된다. 고전 7장 8-16절 결혼과 이혼 8-9절 미혼자 상대. 10-12절 결혼해서 사는자들에 대한 충고. 12-16절 그리스도 신자와 비신자의 결혼에 대한 충고. 25-38절 아직 결혼하지않은 처녀들에 대한 충고. 다양한 케이스에 대한 충고의 기저를 이루는 것이 2절이다.
독신의 선호를 종말론에 기초해서 이야기. 6장은 자유를 음행에 이용. 성생활의 방종하는 것을 막고, 7장에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성새활에 대한 율법주의에 희생시켜서는 안된다고 이야기한다. 바울은 유대 랍비들이 이야기한 의무적, 남자의 결혼의무에 대항해서, 금욕주의자들의 무결혼에 대항해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이야기한다. 당시 랍비들은 의무적으로 결혼해야 했다. 이것에 대항, 독신도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이야기한다. 주의 일에 집중하기 위해 가능하다. 다만 성욕 절제의 은사를 받은 자에게만... 그리스도인들의 자유를 확대하고 있다. 금욕주의자들에 대항해서 성관계는 하나님이 주신 창조의 선물로 결혼안에서 누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자유이다. 방종과 율법주의 사이에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최대한 확대 하고, 그것을 보호하기 위해서 얼마나 얘쓰는가를 배워야 한다. 우리는 한쪽으로 치우칠 때가 많다. 방종주의 혹은 양심에 연약함을 가진 사람들은 스스로 법을 정하여 모든 것을 안함으로 편안함을 느낀다. 복음의 자유를 모르고 비그리스도인과 멀리, 이웃과 사회에 대한 소극적인 자세로 세상에 소금과 빛의 생활을 하지 못한다. 비판, 옹졸, 비타협적이되고 오히려 불안한 유형의 그리스도인이 되기 쉽다.
금욕주의자들의 구호는 창 2장 18절과 완전 배치된다. 결혼을 창조의 제도로 만드신 것은 남자가 홀로임이 좋지않으므로... 7절 은사에 따라 살것이지 일률적으로 독신으로 살 필요는 없다. 바울은 구호를 일단 수용하고, 그것에 고쳐 나가고, 수정하여 충고 하는 좋은 교육방법을 가지고 있다. 영국 문학의 어법이 이러하다. 수긍하고 그러나...하는 어법, 위험한 구호임에도 수용하고 그러나....로 충고. 한국사람은 토론이 이루어 지기 힘들다. 토론의 절차는 교회가 잘 갖추고 있는데 상대의 의견을 존중하려는 태도는 아직도 부족하다. 연습하고 훈련해야한다.
2절 음행의 죄들을 피하기위해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 소극적, 부정 목적만으로 결혼이 존재하는 것인가, 의문이 생길수 있다. 그러나 처음 말했듯이 고린도의 성문란과 성관계 부인을 염두해 두고 충고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다. 성관계에 대한 현실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 바울은, 금욕주의자들의 과장되게 주장하는 자신들의 자제능력도 신뢰하지 않다. 성욕에 의한 음행죄라도 피할수 있도록 결혼해야 한다고 이야기 한다.
2-4절 바울은 남녀의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이야기하고 있다. 효과적 가르침을 위해 엇갈리는 어법(키라스무스)을 수사학을 이용. 얼마나 동등하고 균형잡히게 설명하고 있는가 이것이 중요. 철저한 상호주의적 윤리는 고대 사회에서(남성위주)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엡 5장 22절 아내들이여... 상호주의적 원칙에 따라 쓰고 있다. 언어가 다르다는 것에 걸릴 필요 없다. 5장 21절이 대 원칙이다. 피차 순종하라. 이러한 가르침으로 인해 기독교가 전파 된 곳에는 여성해방운동이 일어났다. 하나님의 은혜, 그리스도의 가르침 덕분...
3절 남편은 자기아내에게 빚을 갚고... 일차적으로 욕구를 충족시키는데 의무를 다하라. 서로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섬기는 관계를 함축하고 있다.
4절 키아스무스의 구조. 남편과 아내의 동등한 관계. 자기 몸을 자기 것으로 주장해서는 안되고 스스로 상대방의 권위 아래 있는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5절 다시한번 상대방의 권리를 빼앗지말라. 부정적 형식으로 되풀이... 상호 동의 가운데 영적 목적을 위해 금욕이 가능한 것이다. 기도에 전념하기 위해 모든 다른일을 중지하듯이... 서로 합의하여... 끝나며 다시 회복. 서로 분방하지 말라-서로의 권리를 빼앗지 말라. 서로간의 주권이 서로에게 있다. 서로합의, 일정기간, 영적목적을 위해...
6절 이것을 말함은 금욕주의자들에 대해 양보(권면아님)이지 명령이 아니다.
7절 모든 사람이 절제의 은사를 가지고 전심으로 주를 섬기기를 바라나, 모두 다른 은사를 가짐을 앎으로 결혼을 통해 하나님께 순종해야 하는 것이다.
뒤에 나오는 결혼에 대한 것을 읽은 후에 바울은 결혼 했을 것인가... 쓸 당시에는 미혼. 결혼했다면 상처했을 것인가. 이혼 했을 것인가 의문. 당시 랍비라 불리는 자들은 결혼 했어야 하는데, 그러면 예수님도 결혼을 했을 것인가. 2세기엔가에 랍비가 결혼하지 않은 확실한 예가 있으므로 예수가, 바울이 예외일 수 있다. 예수는 당시 랍비 학교를 다녀서 된 정식 랍비가 아니었다.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하나님나라를 선포함으로 그의 제자들이 랍비라 불렀다. 바울은 랍비 학교를 다녔는데(갈1장) 랍비 훈련을 받은 사람인데... 결혼했을 것이다.... 7장 결혼 생활을 체험하지 않은 사람이 자상하게, 부끄럼 없이 충고 할 수 있을까? 그러므로 바울이 결혼 했을 것이다. 그러면 상처 했는냐 이혼했는냐... 이혼당했다고 보는게 합당하지 않을까? 빌 3장 그리스도를 위해서 모든 것을 잃어 버렸다. 그 가운데 가정도.... 랍비가 그리스도인 되면 아내는 이혼할 의무가 있었으므로 바리새적 랍비인 경우 더욱 그러하다. 유대교에 열렬했던 아내는 이혼했을 것이다. 이런 언어 때문에 이혼당했을 것이라 본다. 믿지않는 자가 끝내 이혼하자 하면 하락 하는 것으로 보아서도... 그러나, 확실한 것은 아니다.

(21) 고전7:8-16 결혼에 대한 다양한 실제적 경우들.
8,9절은 미혼자들과 상배한 자들에 대한 충고, 10,11절은 지금 결혼생활을 하고 있는 부부들에게 하는 충고, 12-16절은 기독인과 비기독인의 결혼에 대한 충고이다.

8-9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다. 그러나 절제할 수 없거든 혼인하라, 정욕이 불같이 타는 것보다 혼인하는 것이 낫다.’ 혼인하지 아니한 자는 ‘남성’(헬.의 명사의 성)으로 되어 있고, 과부는 ‘여성’이다. 이들이 충고의 대상이다. 허나 바울이 문맥에서 남녀에게 동등하게 원칙들을 적용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 충고는 결혼않은 여자와 아내잃은 남편에게도 적용됨을 볼 수 있다.
이들에 대한 충고는 독신으로 지내는 것이다. 그러나 절제의 은사를 받았을 때에만 그러하다(7절). 정욕으로 내적으로 불타는 상태에서는 단정한 몸가짐으로, 온전한 정신으로 주를 섬기기가 불가능하다. 너희 유익을 위하고 온전히 주를 섬기는 것(35)이 기독인의 근본적 삶의 태도이다. 율법주의적 금욕주의에 빠져 혼자지내는 것은 안된다.

결혼한 자들은 절제의 은사가 있다하더라도, 결혼을 깨뜨려서는 안된다. 주의 명령으로 충고하고 있다. 바울은 예수의 말을 직접 인용하지 않는다. 허나 그의 신학사상은 주예수의 가르침의 가장 정확한 해설이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인한 의인됨과 예수의 하나님나라는 깊이 연구해보면 완전히 일치하며, 하나님나라를 잘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예수의 한마디만 인용하면(음식가리기, 안식일 등) 충분히 설득할 수 있었을 텐데, 한마디도 인용하지 않았다. 이것이 많은 토론거리가 되고 있다. 이러한데 이곳은 예외로서, 예수의 말을 드물게도 인용한 한 구절이다. 막10장, 마19장, 눅16장등의 예수의 말을, 이혼에의 가르침을 바울이 직접 인용하고 있다. ‘이혼하지 말아야 한다. ’
유대교에서는 거의 남자가 여자를 이혼증서를 주며 이혼을 했다. 예수 동시대에 위대한 랍비 둘이 있었다. 샤마이와 그의 제자였던 힐렐이다. 여러 학파들이 있었으나 이 두 학파가 가장 영항력있는 학파였다. 샤마이학파는 아주 율법적, 보수적이고 이방인에게도 배타적이었으며, 힐렐학파는 자유롭고, 인간적이고, 이방인에게도 좀 친절한 학파였다. 그래서 이혼문제에 있어서도 샤마이학파는 모세율법을 엄격히 적용해 이혼을 될 수 있는대로 허용치 않았다. 힐렐학파는 빵을 많이 구워 태운다든가 수프를 태워 탄내만 나도 이혼증서만 써주면 이혼을 할 수 있도록 했다. 코란의 샬리아법으로는 이혼이 더 쉽다. 그래서 이란 호메이니 혁명이후 회교근본주의로 들어가려는 운동(알제리, 파키스탄, 인도네시아)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걱정스러운 현상이다. 회교근본주의는 코란의 법을 현대의 복잡한 삶의 상황에 대한 고려없이 유목시대의 법조항을 문자그대로 지켜려는 것으로, 선교는 더 어려워지며, 이혼과 일부다처제가 가능해지게 되는 것이다. 당시의 상황은 이렇게 여자들에게 불리했다. 이런 가운데 예수도 랍비로서 샤마이와도 힐렐과도 다른 전혀 새로운 가르침을 준다. 이것을 그의 사도인 바울이 그대로 이어받아 고린도에 전한다. 헬라의 중요한 한 도시로서 고린도에서는 여자도 동등하게 이혼을 제기할 수 있었고, 당국에 보고하는 것으로 이혼이 성립니 되었다. 이 고린도에 맞추어 바울은 이혼을 원칙적으로 금하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전하는 것이다. 10, 11, 13, 14절에서 4번이나 이혼하지 말라고 금하고 있다. 남자와 여자에게 동등하게 말하고 있다.
이혼금지의 주의 가르침이 있지만, 이혼은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돼있다. 11절 괄호안 말씀은 이것을 다루고 있다. 만일 이혼하게 되면, 아내는 그냥 지내든지 다시 화합하라고 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인 여자가 비그리스도인 남자의 구박에 더 많이 이혼을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렇게 충고한 것이다. 이것은 바울이 율법적으로만 해석하고 있지는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현실적으로는 이혼이 있음을 인정하고 그럴때는 이렇게 하라고 충고하고 있는 것이다. 결혼은 남편과 아내의 일생동안 파괴될 수 없는 관계임을 명심해야 한다. ‘한몸됨 원칙’은 일생동안 사람이 파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한남자가 한여자와 이혼한 후 또 다른 여자와 결혼하여 한몸을 이루는 것은 간음이다. 막10:11-12에서 예수님이, 롬7:2-3에서 바울이 이혼을 하더라도 그 배우자가 살아있는 동안 다른 사람과 결혼하는 것은 간음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여기서 많은 의문들이 맘속에서 오락가락할 것이다. 이혼은 절대 안 되는가 해도 되는가, 재혼은 절대 안 되는가 항상 혼자 살아야 하는가 등의 문제가 생길 것이다. 이것은 바울의 충고를 좀더 들은후 토의하기로 하자.

12-16절까지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의 결혼에 대한 충고: 예수님은 이런 결혼에 대해서는 가르침을 남기지 않으셨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판단에 따라 충고한다. 그래서 이것은 내가 말한다고 밝히고 있다. 허나 이것은 주의 가르침을 새롭게 해석해 적용하는 것이지 사사로이 말하는 것이 아니다. 12-13절에서 바울은 혼합결혼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한다. 고후6:14-7:1에서 혼합결혼에 대해 아주 명백하게 반대임을 밝히고 있다. 여기서우리가 다뤄야 하는 경우들은 이미 결혼한 상태에서 한쪽은 그리스도인이 되고, 한쪽은 그렇지 못한 경우이다. 이런 혼합결혼의 지속은 원칙적으로 비그리스도인 배우자에게 달려있다. 그 배우자가 계속 같이 살기를 원하면, 그리스도인 배우자는 같이 살아야 한다. 그 결혼생활을 지속해야 한다. 그 이유는 2가지로 바울이 예수님을 본받아 가르친 것과 같이 ‘이혼금지의 정신’ 뿐 아니라, 신학적 이유(14절)도 있다. 그 신학적 이유는 몇몇 고린도의 교인들이 가지고 있었을 수도 있는 오해와는 달리, 즉 한쪽이 비그리스도인이라서 결혼이 부정하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비그리스도인이 결혼으로 그리스도인 배우자와 연합되어 삶으로써 간접적으로 그리스도의 주권의 영역에 가까이 와 도리어 거룩하게 된다는 것이다.
고전7장에서 결혼의 문제를 제기한 자들은 금욕주의자들이다. 이들은 영육의 2원론에 근거해, 육은 무익한 것이므로 몸으로 하는 모든 것은 부정하게 생각했으며 남녀의 성관계는 물론,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의 결혼생활을 당연히 부정한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바울은 반대로 거룩하게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거룩하게 된자’라는 말을 바울은 그리스도를 믿어 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자에게 쓰고 있다(고전1:2, 1:30, 6:11). 하나님께 속한, 바쳐진 자라는 의미이다. 거룩하다는 말은 2가지 개념을 가지고 있다. 우선 물리적 개념으로 세상 보통것으로부터 분리되어 하나님께 바쳐진 것, 그래서 하나님께 속한것(분리의 의미)이라는 뜻을 가진다. 그리고 거기서 두 번째인 도덕적 개념이 파생된다. 하나님의 성품에 합당한 것, 하나님의 온전함에 일치되는 것이 도덕적 의미이다. 하나님의 것이 된자, 하나님의 은행구좌를 들어간 자를 거룩한 자라고 부른다. 거룩함이란 믿음으로 그리스도안에서 얻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말하는 것으로서, 성령의 인도함에 따라 하나님을 섬기는 삶의 의무를 내포한다. 바울은 물론 거룩하다는 말을 이런 풍부한 의미로, 또는 구원받음과 동의어로 쓴 것은 아니다. 다만 비그리스도인의 영향으로 그리스도인이 더러워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삶에 의해 그리스도의 주권을 느끼고 창조주 하나님 의식하게 되며 우리가 그에게 속한 피조물임을 의식해 하나님나라에 가까워지게 된다는 뜻으로 바울이 쓴 것이다.
‘접촉에 의한 부정의 원칙’이 모든 종교에 있다(문둥병, 시체). 그러나 예수는 공관복음에서 접촉을 통한 거룩해짐을 보였다. 죄인, 이방인과도 같이 예수는 밥을 먹을수 있었다. 이것을 바울이 이어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부정한 자가 거룩한 자와 짝지워짐으로 그 부정한 자가 거룩해지는 것이다. 롬5:20 하반절에 더 깊은 신학적 근거가 있다.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라는 말씀으로 더욱 부정한 자와의 결혼으로 더 많은 은혜를 누릴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첫 번째 아담과 마지막 아담을 이야기하며 ‘은혜의 역사의 승리’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이야기가 중요한 이유는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의 세상에 대한 태도, 불신자와의 관계에 대해 영향을 미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거룩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세상과 접촉을 많이 하다보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잃기 쉽고, 더러워지기 쉽다. 하지만 접촉을 두려워하던 약한 고린도인들처럼 여러 관계, 활동들에 대한 참여를 꺼리다 보면, 모든 태도에 있어서 부정적이고 소극적이게 된다. 그러나 예수님과 바울의 모범은 세상으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그 속에 뛰어들어서 이 거룩성의 영역을 넓히고, 세상이 우리들과 많이 접촉해 하나님과 예수에 대해 더 알고 거룩해지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야 하는 ‘선교적 자세’이다. 우리는 이렇게 살아야만 한다. 지금의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금욕주의자, 세상적인 그리스도인, 선교적 자세로 사는 그리스도인의 3유형이 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주체의식을 분명히 가지고, 불신자들이 우리를 통해 하나님, 예수, 올바른 삶에 대해 알도록 살아야 한다.
바울은 혼합결혼으로 비그리스도인이 거룩해짐을 그들사이의 자녀들의 거룩성을 들어서 증명하고 있다. 14절이하에서 바울은 혼합결혼으로 출생하게 된 자녀들도 거룩하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자녀들도 부모 중 한쪽만이라도 하나님의 언약관계에 동참하고 있으면 그도 거룩함을 말해주고 있다.
15절에서 비그리스도인 배우자가 갈라서기를 원하고 있으면 그리스도인은 기계적으로 결혼을 지속해야할 의무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다. 이혼금지를 기계적으로 적용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아주 새롭게 적용하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예수님 당시 유대에서는 간음의 경우에만 이혼이 용납(이것은 허락이라기보다는 용납이다)되었다. 그것은 간음으로 이미 한몸이 깨어진 것이므로 결혼도 이미 깨어진 것이다. 이미 둘사이에서 깨어진 한몸에 대해서는 더 논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결혼을 깨어서는 안된다고 예수는 가르치셨다. 그래서 이러한데 15절말씀이 있을수 있는 것은 바울이 율법적으로 적용하지 않고, 그 이혼금지의 정신을 존중하되 새롭게 해석하고 적용하는 모범을 보여주고 있음을 알게 한다.
여기서 성경말씀을 항상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게 능사가 아님을 배우게 된다. 기계적으로 적용하다보면, 그 말씀정신에 오히려 위배되거나 역설, 역효과를 일으킬 수 있다. 성경을 복잡하고 댜앙해진 오늘날 문자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인간에게 엄청난 고난을 가져다 줄 수 있으며, 이것은 예수께서 의도하신 바 또한 아니다. 산상수훈을 예로 보자. 이 고귀한 가르침도 문자그대로 적용하면 역효과가 날 수 있는 것이다. 2차대전때의 히틀러나 김일성에게 우리가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적용했다면 더 큰 고난이 있었을 것이다. 고후3:6을 보면, 바울은 단숨에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라’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예수님은 안식일문제로도 있어서도 문자에 얽매이지 않고, 하나님의 창조의 회복에서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고 즐기는 것이 안식일의 기본 의미임을 보이고 문자에서 자유하셨다. 안식일에 병자 있는 것이 바로 안식일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은안식일에 병자를 고침으로 안식일이 안식일되게 하신 것이다. 유대인은 안식일을 어긴 것으로 생각했기에 예수를 죽이려고 앴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말하고 있는 문자는 죽이고 영은 살린다는 의미이다. 여기서는 이혼의 가능성에 대한 해석을 새롭게 제시하고 있다. 이것은 예수님의 이혼금지에 문자적으로는 어긋나나 그 정신에는 합당한 것이다. 모든 윤리적 문제에 있어서도, 성격의 가르침을 적용할 때 문자적으로 적용할 때와(이것은 성경의 가르침을 경시하라는 말이 절대 아니다) 그 정신을 살려야 할 때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15-16절은 상반된 두가지 해석을 학자들 사이에 일으키고 있다. 첫 번째 해석은 부정적인 것으로 불신자에게 이혼동의를 않으면 계속 부부가 싸울 것이므로, 이런 경우에는 이혼에 동의 하여 평화를 얻는 것이 낫다는 해석이다. ‘화평중에서’가 아니라 ‘화평속으로’가 맞는 해석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평화속으로 부르셔서 평화를 누리도록 하셨다. 그리스도인은 계속 같이 살아 구원에 이르도록 하려하나 그 일의 성공여부는 보장할 수가 없다(독일 프리드리히 랑교수 해석). 두번째의 해석은 이러하다. 우리는 갈라설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평화속으로 부르셨다. 그래서 결혼이 깨지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이 부름의 뜻에 거스리는 것이 되어버리고 만다. 그러니 불신자 배우자와도 평화를 누리며 사는 것이 신자의 소명인데, 이것이 거스려지는 것이 되고 만다. 그러니 그리스도인 배우자는 평화를 위해 결혼을 지속해야 한다. 그리고 구원의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에 결혼을 지속하는 것이 좋다고 보는 것이다. 둘중 더 나은 것을 가려내는 것은 문맥상 아주 어렵다. 전자가 조금 더 맞는 것같으나 언젠가 더 훌륭한 해석으로 확답을 드리겠다.

유의할 점:남편과 아내에 대한 동등한 권리와 의무 인정, 정신을 존중하면서도 율법적으로 적용하지 않고 새로운 상황에 맞게 재해석, 재적용할 것을 염두에 두면서 보기 바란다. 우리 한국교회가 보수적 경향이 강함을 기억해야 한다.
기도 : 우리가 화목한 가정을 이룸으로써, 부정한 것을 몰아내고 거룩함을 펼쳐가는 가정이 되게 하소서.


(22) 고전7:17-24 그리스도인과 세상의 다양한 처지들과의 관계에 대한 원칙
그 원칙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이 임했던 처지에 머무르라는 것이다. 결혼한 상태에서 부르심을 입었으면 그 각자의 상황에서 결혼생활에 충실하라는 충고를 앞에서 하고, 이제 뒤에 26절부터 결혼하지 않은 자들에게 충고를 하려고 한다. 그 사이에서 지금 바울이 이 원칙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이 원칙을 바울이 천명하는 이유는 이 세상의 질서와 제도들을 혁명적으로 거부하려는 경향의 성령파 열광주의자들과, 그와 정반대였던 금욕주의자들의 마찬가지로 혁명적인 변화시도 때문이었다. 바울은 하나님으로부터 부름받은 인간을 하나의 추상적인 존재의 이세상과 관계없는 하나님의 자녀로만 보지 않고, 이세상에서 그냥 뽑혀서 공중에, 그냥 진공상태에 하나님의 자녀로만 존재하는 것으로 보지 않고 구체적으로 이 세상에서, 이 세상을 딛고 하나님자녀로서의 삶을 꾸려나가야 하는, 이 세상에서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부르심의 뜻을 성취해가야 하는 구체적인 존재로 보고 있다. 따라서 바울의 논리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해야하는 것이다. 복음에 합당하게 살라고 권면하고 있다. 그러나 바울은 세상의 현실을 무시하는 이상주의적이고 낭만적인 윤리을 가르치지 않았다. 세상에서 계속 살아가야 하는 존재임을 아주 현실적으로 늘 인식하면서 어떻게 이 세상에서 하나님자녀로서 살 수 있을까 이렇게 질문하며 가르치는 것이 바울과 성경의 윤리이다. 이것은 아주 현실적이다. 17절 첫부분 ‘부르신 대로, 나눠주신 대로 걸으라’라고 되어있다. 무엇을 나눠주신 대로인지는 다른 바울의 서신들과 비교해보면 곧 알수 있다(롬12:3-하나님께서 각사람에게 각기 다른 은사를 나눠주신다, 고전12:11-성령께서 은사들을 나눠주신다). ‘은사를, 또는 사명을’을 아마 빠뜨렸을 것이다. 이 두가지는 같은 것으로 볼수 있다. 은사는 사명을 내포한다.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의 운용을 헬라어로 오이코노미아라고 한다. 구원의 경륜가운데 우릴 부르셨다. 하나님의 오이코노미아(엡3장에 많이 등장), 즉 창조, 계시, 구원의 한 부분을 감당하도록 우릴 부르셨다. 사명뿐 아니라 그 사명을 감당할 힘도 주셨는데 그것이 은사이다. 은사는 사명을 내포, 사명은 은사를 전제하도록 되어 있다. 목적어 빠진 것은 ‘은사를, 사명을’이 둘 다 됨. 17절의 목적어는 그렇게 된다. 롬12:3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사를 나눠신다, 본문서는 주께서 나눠주신다(주-예수 그리스도or 하나님으로 바울서신 속의 주는 대부분은 예수님), 또 고전12:11에서는 성령께서 은사를 우리에게 나눠주신다고 한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은 은사의 원천으로서, 하나님으로부터 또는 하나님께로부터(FROM, OF) 은사가 나오며,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성령의 힘, 은사로 나타낼 수 있다. 삼위일체이신 하나님께로부터 은사가 주어짐을 볼 수 있다. 은사는 사명 감당하도록 하기위한 것이다. ‘바울의 소명사상’을 강의할 때 말했듯이 은사는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구원의 힘)가 다양하게 우리에게서 형상화, 구체화된 것이다. 은사는 은혜의 개별화하고 구체화된 형태이다. 각 사람에게서 구체적인 개별화된 모습을 띠게 된다. 은혜는 헬라어로 ‘카리스’이고, 은사는 ‘카리스마’이다. 헬라어에서의 ‘--마’는 구체성 가짐을 의미한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만 은사가 아니다(은사의 다양성). 치유, 말씀선포 등만 은사로 봐서는 안된다. 기도, 위로의 말 하기등 아주 다양하다.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 이루는 데는 각양의 부품이 필요하다. 우리 모두가 그중 한부분을 담당하게 되어있다. 사명에 꼭 합당한 은사가 우리에게 다양하게 다 주어져 있다. 은사는 하나님의 오이코노미아속에서 사명과 분리되어 있을 수 없는 것이고, 은혜와도 분리가 불가하다. 그래서 은혜받고 은사 자는, 우리는 늘 그 사명을 생각해야만 늘 한다. 이것이 바로 ‘바울의 소명사상’이다.
우리에게 은사를 나눠주셨음은 사명을 나눠주셨음을 의미한다. 우리를 부르심은 곧 사명에로의 부르심을 내포한다. 바울이 ‘부르다(소명)’라는 말과, ‘은혜’라는 말을 어떻게 쓰는가? 이 부르다라는 말을 하나님이 우리를 믿음과 구원에로 부르다, 즉 우리를 그리스도를 믿어서 구원을 얻도록 불렀다고 쓴다. 그래서 바울은 고전1:2에서 그리스도인을 부름받은 이들이라고 한다. 그리고 동시에 이말을 사명에도 쓴다. 바울은 자기가 사도직을 감당하도록 부름받았다고 했다. 은혜도 2가지로 쓰고 있다. 첫 번째로 구원의 힘이기도 하며, 두 번째로 동시에 내게 주어진 은혜, 즉 자기의 사도직이 은혜라고 했다. 간단히 말하자면 소명과 은혜는 사실 하나다. 나중심의 관점(인본주의 적 관점)에서 우리 구원을 보면, 하나님은 나를 구원하시는, 나를 섬기는 이인 종으로 전락된다. 그러나 하나님중심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셨다. 하나님이 주가 된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 입장에서 왜 구원하셨는가, 무엇을 위해, 왜 나를 구원하셨나에 대한 관심과 생각이 생기게 된다. 창조주의 주권자적인 목적, 어떤 뜻을 가지고 우리를 구원하셨나에 대한 물음이 생기게 된다. 바울로 하여금 ‘이방인들에게 그리스도를 복음으로 선포하게 하기 위해서’, 다메섹 도상에서 구원으로 부르신 것이다. 이렇게 바울을 쓰기 위해 부르신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빚진 자의 심정을 갖게 되는 것이다(고전9:16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니라......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있으리로다’). 바울은 이렇게 소명을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자신의 사도직을 감당함으로 구원 얻는다면 이것은 행위로, 공적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얻는 것을 바울은 대체로 ‘의인이 된다’, ‘의인됨’이라고 표현한다. 전통적으로는 ‘의인’, ‘의’라는 말에는 헬라 사상에 의해 법정의 개념밖에 없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무죄’석방을 받고 의인으로 인정됨, 그래서 더이상 벌받지 않음’의 뜻으로만 생각되었다. 하지만 더 깊은 연구에 의하면 의인됨은 그 뜻을 넘어서서 관계론적 개념으로 ‘올바른 관계안에 있는 자’가 의인이다. 어떠한 관계이든, 관계는 그 관계속에 있는 두 파트너들에게 의무를 지운다. 부자의 관계에 있어서는 아버지는 아들을 잘 양육할 의무를 갖게 되고 아들은 아버지를 잘 순종하고 공경할 의무를 갖게 된다. 이런 관계에서 나오는 의무를 다하면 그 관계는 원만한, 올바른 관계가 된다. 그 중 의무를 한쪽이 다하지 않으면 그 관계는 파기된다. 남편이 아내에게 의무를 수행치 않는다든가 그 아들이 아버지에게 순종치 않으면, 그 관계는 절단된다. 올바른 관계속에 있는 사람이 의인이다.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살펴보자. 하나님의 창조행위가 이미 약속행위이다. 우리에게 하나님 노릇해 주겠다는 약속행위이다. 이스라엘에게 언약을 주심으로 그것을 증거하신다. 그리고 우리 인간은 피조물로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성경언어로 하면 하나님께 영광돌리고) 하나님께서 순종할 의무를 진다. 한데, 아담 이래로 자기 뜻대로 자기힘으로 살려고(이것이 죄의 본질) 했다. 인간이 하나님 인정을 않고 순종을 않아, 그 관계가 파기된다. 그래서 인간이 ‘불의’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만약 하나님도 인간을 내팽개쳐 버린다면 하나님도 불의하게 된다. 그러나 인간이 불의할 때에, 하나님은 의로우셨다. 하나님은 그의 의를 나타내셨다(롬3장). 하나님은 그의 의를 계시하셨다. 바로 그리스도이다. 우리의 죄를 담당하게 함으로, 구원자를 보내주심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노릇해 주셨다(이것이 하나님의 의). 이 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의인이 된다. 다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속에 들어간다, 즉 있게 된다. 이것이 내가 의인이란 말이다. 하니님 은혜로 이제 올바른 관계속에 내가 있다는 것이 우리 구원의 상태이다. 이것은 예수의 재림때에 완성이 된다. 이 현재와 정말 사이에서 우리의 구체적 삶을 통해 하나님께 의존하고 순종함으로 이 하나님이 마련해주신 올바른 관계속에 어떻게 머무르느냐가 이제 우리 관심사이다. 우리가 다시 우리 옛사람같이 하나님께 의존하지 않고 순종하지 않으면 그것은 우리가 그와의 올바른 관계속에서 뛰쳐나옴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고전9:16에서 바울이 말한대로 하면 ‘화’를 입는 것이다.
모든 인간에게 하나님이 요구하고 있는 보편적 양태의 순종-도덕성, 이웃을 사랑, 거룩한 삶 살기-이 있고, 또 각 개인에게 요구하시는 개별화, 구체화돤 순종의 양태가 있다.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요구하는 순종의 양태는 이방인들에게 사도노릇하는 것이다. 그 사도직을 순종한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속에 머무른다는 것이고, 이것이 즉 구원받는 것이다. 이것이 구원의 실제이다. 여기서 바로 바울의 소명사상이 나온다. 우리를 구원하시면서 우리 모두에게 베푸시는 원칙은 우리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들어오게 함, 창조주의 무한함에 참여하게 함, 그래서 영생을 얻게 함이다. 이것이 구원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인정하고 순종, 의존하는 자가 되었다. 이제 우리각자에게 요구하는 순종은, 우리에게 담당하게 하기 위해 구원 베푸신 이유는 무엇인가, 이것이 각자의 소명이다. 의사는 그 직이 하나님의 소명이다. 선생은 선생직이 바로 하나님의 소명이다. 한 예로 하나님이 나를 구원에로 부르신 주권자적 목적은 뭔가 하면 학생들에게 하나님의 진리, 복음 잘 가르쳐 하나님을 체험하고 하나님께 잘 순종하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서 사는 것이다. 하나님과 저와의 관계속에서 하나님이 저에게 요구하시는 개별적이고 특수한 순종은 선생노릇을 잘 하는 것이다. 의사, 기업가, 정치가 각자가 각자의 노릇을 잘하는 것이다. 그럼 잘한다는 것은 무엇이냐? 빚진자로서 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들덕분에 내가 구원받은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에게 빚진자의 심정으로 우리가 우리 소명을 감당해야 한다. 모든 직업이 소명이다. 우리가 우리 직업의 대상들에게 빚진자로서 섬김을 다할 때에 ‘만인의 만인에 대한 관계’는 더 이상 남이 나를 섬기게 하는 관계-내가 이익보고 남이 손해보게 하는 관계, 갈등, 싸움, 고난을 일으키는 관계-가 아닐 수 있다. 내가 이렇게 모두에게 성경의 가르침대로 우리 직업을 바라보고 빚진자의 심정으로 섬김으로써 우리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속에 머무른다면 섬김의 관계, 이웃을 내몸같이 사랑하는 관계, 고난이 없는 관계, 원만한 관계, 즉 ‘의인의 관계’, ‘의로운 관계’가 되는 것이다. ‘의’란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게 하는 힘’이라고 했다. 하나님의 목적 깨달아서 구체적인 순종을 하는 사람이 의인이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고 따라서 우리 직업의 대상들에게 빚진자의 심정으로 섬김의 자세를 다하는 사람, 즉 하나님, 이웃과 올바른 관계를 갖는 사람이 의인이고, 이것이 의인의 삶, 구원받은 자의 삶이다. 이것이 바울의 소명사상이다. 종교개혁 이전 중세에는 성직만 거룩한 것이고, 일반 직업은 소명이 없으며 소명과는 무관한 신학적, 도덕적으로 중립적인 것으로 보았다. 루터가 지금 우리 본문 20절의 그가 하나님께 부르심받은 그 부름이 임한 그 부름에 머무르라는 말에서 모든 직업이 하나님의 소명이다라고 했다. 직업이 독어로는 ‘부름이 임한 바로 그 곳’이라는 뜻을 지닌다. 이렇게 하여 모든 직업에 신학적, 도덕적 의미를 부여했다. 독일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이 새로운 바울의 소명사상의 예들이 근대 시민사회, 근대 자본주의경제를 일으키는 큰 동력이 되었다. 은혜로만 의인됨의 재발견이 종교적 혁명을 일으켰다면 이 바울의 소명사상의 재발견은 문화적, 경제적, 정치적 혁명을 이루는 힘이 되었다’고 말했다. 루터, 칼빈 등은 여기까지 보았다. 하지만 섬김의 도를 행해야 함, 그리고 그것이 의인됨의 표현이라는 것, 지금 구원받아가는, 그 완성을 향해가는 자의 그 구원의 현재를 체험하는 과정이라는 것, 직업활동이 우리의 구원과 관계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 구원과 직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이 직업활동을 잘 못하면 고전6:19의 화가 있으리로다라는 말처럼, 하나님의 치유의 은혜를 전달하도록 나를 불렀는데 내가 의사의 직무를 소홀히 하면 내게 화가 있다, 내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서 뛰쳐나감이 된다는 뜻이다. 구원은 한 번 내가 받아서 가지고 있다가 내가 의존, 순종과 관계없이 가지고 있으면서 심판때 내보이면서 ‘당신 나를 구원하지 않았소’라며 내놓는 그런 것이 아니다. 구원이란 ‘하나님과 내가 구체적으로 주종의 관계속에 들어감,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를 덧입는 관계속에 들어감’이다. 구원은 우리가 그 관계속에 머무를 때만 가능한 것이다. 우리가 온 삶의 활동 전체를 통해서 그 관계속에 머무른다. 우리 삶의 그 대표적인 것이 직업활동이며 이것은 구원과 무관하지 않다. 그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순종하고 의존하는 것이다. 이것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하면 우리의 직업활동에서 빚진자로서 섬김을 다하는 것이다. 그럴 때에 하나님의 은혜, 생명력, 축복을 풍성히 나누고 체험하는 올바르고 원만한 관계가 있게 된다. 이 바울의 소명사상을 전제로 이 본문이 쓰여진 것이다.
17절: 걸으라라는 살아가라는 유대교적 숙어이다. 각자를 각기 다른 처소에서 주를 섬기도록 한다. 은사(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힘)를 주셔서 감당케 하신다. 바울은 그리스도인 각자가 하나님의 소명이 임한 그 처소에서 주께서 주신 은사로 각자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열광주의자 뿐 아니라 모든 교회에 이 원칙을 천명하고 있다. 문자는 죽이고 영은 살린다고 바울을 말했다(고후3:6). 우리는 구약을 읽는 원칙으로서 더 이상 구약을 그 자체로서 읽고 그 계명들을 문자 그대로 적용하는게 아니라, 그리스도안에서 완성된 하나님의 계시의 빛에 의거해서 구약성경을 읽고 그 계명들의 참뜻을 깨달아서 그것을 우리에게 적용한다(이것을 바울이 ‘영’이라고 했다). 할례받은 유대인은 그 할례의 상태에서 유대인의 처지와 관습을 유지하면서 그 부름 속의 하나님의 뜻을 이뤄나가야 하며, 또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은 할례받을 것이 아니라 그대로 그 처지에서, 그 무할례의 상태에서 그 전통의 처지와 문화를 유지하면서 그 부름속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이뤄나가야 한다. 이말은 선교학의 중요한 원칙이다. ‘복음과 문화’라는 말이다. 그럼 우리의 제사는 어떤가? 종교적, 도덕적으로 죄악성이 없는 한 그러하다는 뜻이다. 우상숭배의 요소, 죄악성이 있는 것까지도 유지하라는 말이 아니다. 물론 조금이라도 있으면 안된다. 우상숭배의 요소나 죄악성이 없는 관습, 문화전통을 구태여 부인하고 없애려 하지말고 그런 것은 유지하면서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라는 말이다. 전통적으로 제사는 우상숭배의 요소가 있다. 효도의 연장이라고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8장에 가서 토론하기로 하자. 곧 설이 다가오므로 이것을 잠깐 다루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모두다 배격할 필요는 없다.
20절: 바울이 17절의 원칙을 다시 천명하고 있다. 각사람이 하나님이 부르실 때에 우리가 머물렀던 그 부르심속에(in that calling) 머무르라는 말이다. 우리를 부르실 때의 인종적, 신분적, 직업적 상황을 바울이 그것을 부르심이라고 부른 데에 의미가 있다. 루터가 바로 이 구절에서 재발견을 시작했다. 하나님의 부르심(믿음과 구원에로의 부르심)이 각 사람에게 임할 때에 그가 처해 있었던 그 부르심(그의 직업, 신분적 처지)에 계속 머무르라고 20절에서 말했다. 여기서 우리는 삶의 구체적 장이 창조주 하나님과 무관한 게 아니라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소명에 의한 것이라는 중요한 진리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21절: ‘그러나 자유할 수 있거든 차라리 사용하라’고 종에게 말하고 있다. 차라리 현재의 처지에 머무르라와 자유롭게 될 수 있거든 그 기회를 이용하라의 2가지로 주석가들의 해석이 갈리고 있다. 전자로 해석하면 신약성경은 노예해방을 주창하지 않은 것이 되며 후자의 해석은 노예해방을 명백히 말한 것이 된다. 초대교회와 바울의 노예제도에 대한 태도를 보여주는 이 말을 확실하게 해석할 수 없는 것은 아쉬운 일이나 노예제도가 종은 것이 아니라는 인식은 틀림없이 두 해석 다 담고 있다. 문제는 적극적으로 주창했는냐 아니면 양보했느냐 하는 것이다. 루터, 칼빈, 아더 슈라터, 에셀 부르스, 프리드리히 랑, 우리 번역, 그리고 저는 후자의 뜻으로 해석한다.
21절 후반부 이부분을 7:11절(믿지않는 배우자가 원하는 이혼)처럼 예외의 경우로 다루고 있다. 그 처지에 머무르는 것이 대원칙이나 해방을 받으라고 괄호를 쳐서 예외로 다루고 있다고 본다.
22절: 세상적 신분의 차이는 근본적 의미가 없다. 바울은 종과 상전의 근본적 평등함을 고취하여 고대로마사회에서 노예제도 타파운동의 근본정신을 제공한 것이다. 바울의 소명사상을 노예와 상전에게 적용한 것이 이것이다. 그럴 때에 세상의 사회적 신분의 의미가 다 없어져 버린다는 것이다. 더불어 빌레몬서를 한 번 읽어 보세요. 바울은 노예제도의 형식을 인정하나, 해방하지 않을 수 없도록 빌레몬에게 쓰고 있다. 이것이 신약성경의 노예에 대한 태도이다. 전반적인 기조가 사회제도를 인정하는 것이다. 바울의 사회윤리는 반동적인 것인가라는 토론제목을 달아 주었다. 형식적으로는 바울의 사회윤리는 아주 반동적이다. 종의 처지에 있어라도 그것 괘념치 말고 그낭 거기 머무르라고 하고 있다. 그러나 그 내용상 종과 주인의 의미를 아예 제거해버린 것으로 더 큰 혁명적 힘을 가지고 있다.
23절 첫부분: 그가 대가를 치르고 샀으므로 모두 해방된 자이며, 그리스도의 종이다. 후반부: 죄짓는 자가 되지말라는 종교적 의미와 스스로를 노예로 파는 일이 종종 있었는데 이것을 바울이 금했다고 하는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 ‘하나님과 더불어’라는 이 마지막 구절은 우리 각자가 하나님의 소명에 성실해야 함을 나타낸다.
오늘 이 본문에 의거해서 생각해 볼 두가지는 “우리 각자의 소명의식”과 “바울의 사회윤리가 반동적인가, 오늘 우리가 우리 사회에서 어떠한 기독교적 사회윤리를 표방해야 되는가”의 두가지다.

(23)고전7:25-38
25절: 처녀에 대하여 고린도교인들이 바울에게 결혼하는 것이 좋은가 아니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은가에 대한 문의편지에 답변을 요청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처녀에 대하여는 주께서 주신 계명이 없어서(이혼과는 달리) 자신의 의견을 준다고 바울은 말한다. 자기가 자신의 의견을 귄위 있게 줄 수 있는 이유는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로 사도직을 받았기 때문이다. 주의 ‘자비하심을 받아서’ 충성된 자가 되어 의견을 고한다고 말한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을 ‘내게 주어진 은혜’라는 하나의 고정된 문형으로 늘 말해 왔다(롬1:5, 고전15:10, 롬12:3 등).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전권대사이다. 이것을 분명히 밝히면서 그래서 이것은 사사로운 충고가 아니라 예수님 말씀과 동일한 권위를 가진 사도의 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좋다고 바울이 말하고 있다.
사람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다는 것이 원칙이다. 그냥 그 처지를 계속 유지하는 것이 좋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일관된 충고이다. 지금 하나님의 소명이 임한 그 상태에 그냥 머무르는 것이 좋다.
26절: 임박한 환란이 그 이유이다. 종말이 가까워 오기 때문이다. 삶이 간편하면 간편할수록 좋다. 그 신학적 이유를 여기서 밝히고 있다.
27: 현재의 상태를 유지함으로 번거로움을 피하고, 현재의 삶을 바꾸려고 하지 말라고 하고 있다. 하지만 결혼이나 부부관계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28: 이것은 앞의 충고와 상반되는 것이 아님을 알려주기 위해 결혼하는 것이 다 죄가 아님을 다기 말하고 있다. 그러나 임박한 종말에 식구들이 많으면 육신의 고난이 있기 때문에 너희를 아끼는 마음에서 이 말을 한다고 말한다.
29: 그 환란 때에 결혼생활이 가져오는 필연적 어려움 때문에 이렇게 간편한 생활을 하도록 하라고 바울이 충고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ad 52-53년쯤에 이렇게 환란이 임박했다고 바울이 삶을 단순하게 살고 환란을 통과할 준비를 하라고 충고를 했는데 1950년이 지나도록 아직 주님은 재림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이 충고는 우리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먼저 29-30절을 좀더 보고 이 문제를 다루어 보자. 미혼자들에 대한 충고를 계속하기 전 바울은 17-24와 마찬가지로 신학적 근거부터 삽입하고 있다. 그 상태에 머무르라는 충고를 소명 받은 그 자리에 머무르라는 말로 17-24절까지 설명해 주었다. 여기서도 29-31까지 미혼자들에게 그냥 지내라고 한 충고가 나오게 된 것이 임박한 환란에 대한 의식에서 나온 것임을 말해 주고 있다. 이 문단은 종말에 대해 상기시킴으로 시작하고 또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가 버리는 것임을, 이 세상이 사라진다는 것을 말함으로 끝을 맺는다. 그리고 그 사이에 그리스도의 재림 때 없어질 이 세상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서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5가지로 바울이 ‘-하지 않는 자같이 살라’는 원칙으로 말하고 있다. 결혼문제를 제일 먼저 언급한 것으로 바울이 결혼 내에서의 성관계를 무시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그러나 완성된 하나님나라에서는 결혼이 더 이상 없다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마찬가지로 결혼을 이 세상과 함께 종식될 제도로 보는 관점에서 결혼을 가장 높은 가치나 목표로 삼지 말고 진정으로 지고하고 절대적인 하나님나라의 삶에 대한 소망으로 상대화하라는 가르침이다. 결혼은 좋은 것이나 그것이 영원한 가치도 아니고 가장 고귀한 가치도 아니므로 결혼여부에 하나님나라에 대한 소망으로 살라는 것이다. 바울의 이 말은 결혼은 좋은 것이나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결혼 못했다고 안달하거나 결혼했다고 득의양양해 할 것도 없다는 것이다. 결혼이란 것은 이 세상에 속한 것으로서 영원한 것이 아니므로 결혼의 한시성과 상대성을 인정해서 그 속에 폭 빠지거나, 또는 어떤 결함이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둘째로 우는 자와 기쁜 자가 나온다. 이 세상의 가치들--돈, 권력, 지식, 명예, 아름다움들은 다 좋은 것이나 그것들이 오용되거나 우상화되면 도리어 우리에게 해악이 된다. 진정으로 고귀하고 절대적인 가치는 주 예수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우리에게 주어질 하나님나라에서의 영생이다. 그러므로 이런 가치들을 많이 확보하지 못했다고 해서, 곧 출세하지 못하고 성공하지 못하고 가난하고 고난 속에 있다고 하고, 조금 신체적인 결함이 있다고 조금 못생겼다고 울고 절망하고 한을 쌓고 살지 말라는 것이다. 반대로 많이 확보한 사람들은 마치 영생이라도 얻은 것처럼 기뻐 날뛀 것도 없다는 것이다. 영생에 대한 소망은 고난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울지 않을 수 있게 하고 힘을 주고 부자들에게 원한을 품지 않게 하고 도리어 이 세상을 살아갈 새로운 소망과 새로운 인내와 힘을 얻게 한다. 또 출세한 사람들로는 이 세상에서의 행복만 확보해 주는 이런 가치들을 경계하고 자만을 억제하고 이런 가치들을 책임 있게 쓸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찾아왔던 그 부자관원은 슬픈 얼굴로 다시 자기가 진정으로 섬기던 맘몬으로 돌아갔다. 맘몬이 주는 안전과 행복은 이 세상에서의 안전과 행복에 불과하고 영원한 세상에서의 영생을 줄 수 없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들은 이런 가치들을 상대화하고 자만을 억제하고 이런 가치들을 책임 있게 써야 한다. 이 세상의 모든 가치들을 상대화해서 종말에 완성될 하나님나라의 영생에 소망을 두고 삶으로 이 세상가치에 대해 자유하면서 살아갈 수 있다. 가난한 자들은 가난하다고 원한을 쌓고 살지 않을 수 있고 부자들도 상대방에게 자신을 과시하고 억누르는 수단으로 부를 쓰지 않고 도리어 관대히 나눠주는 자유를 누리게 된다. 이것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란 말이다. 이런 깊은 이해가 있어야만 우리가 우리 돈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것이다. 네 번째와 다섯 번째 충고를 보자. 이 세상의 기회나 물건들을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우리는 이용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들을 우상화, 절대시해서는 안 된다. 종말에 얻을 구원의 은혜에 비추어 그런 가치들을 상대화하고 이용하되 그것들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와야 한다. 본문은 하나님나라에서의 영생에 대한 확신과 소망을 강력히 나타내고 있다. 또 그리스도인의 이 세상과의 관계에 대한 중요한 원칙을 제시하고 있다. 본문은 또 기독교윤리의 중요한 원칙도 함께 제시하고 있다. 하나님나라에서 백성으로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 ‘-하지 않는 자같이 살라’는 말은 이 세상으로부터의 도피도 아니고 동조하는 것도 아니고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시작되고 그의 재림으로 완성될 구원에 비추어, 인본주의자들이나 세속주의자들이 이 세상의 가치들을 우상화하고 절대화하며 그것들에 스스로를 얽어매고 스스로 노예가 되는 것에 반해서 그리스도인의 그것들 곧 이 세상가치들로부터의 진정한 자유를 잘 표현하고 있다.
여기까지 결혼에 대한 바울의 충고, ‘될 수 있으면 현재의 상태에 머물러라, 처지를 바꿈으로 일어나는 번거로움을 되도록 피하라’는 것이 대원칙이다. 종말이 가까웠기 때문이고 결혼도 이 세상에 속한 하나의 제도로서 한시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결혼에 너무 큰 가치를 두지 말고, 종말에 환란이 있을 것인데 그 환란을 최대한 간편한 상태에서 맞을 수 있도록 하라는 충고이다.
아까 제기했던 질문을 다시 생각해 보자. 바울이 이 편지를 쓴 후 지금까지 1950 여 년 동안 예수님께서 재림하지 않고 있다. 이 바울의 충고는 언제까지 우리에게 적용성있는가? 부인할 여지없이 바울과 초대교회전체는 종말이 자기 세대 안에 일어날 것으로 보았다. 신약성경이 전체적으로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 고전15장에서도 바울은 재림 때에 살아서 예수님을 만나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고후5장에 가서는 바울이 자기 죽음 후에 예수님의 재림이 있을 수도 있음을 제시했다. 빌1장에까지 가면 바울이 지금 죽어서 그리스도에게로 가까이 가는 것을 소망한 것을 볼 수 있다. 바울의 종말론에 변화가 있었다고 어떤 이들은 말한다. 고전15장을 쓸 때까지만 해도 바울은 죽기 전에 재림을 맞을 것으로 봤는데 그후 고후5장을 쓸 무렵에는 자기가 재림 전에 죽을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었고 그것이 전혀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고 말했고 빌1장에서는 죽어서 그리스도에게 가는 것이 더 나은 것으로 말하고 있다. 여기에 바울의 종말론에 분수령이 있다고 어떤 학자들은 말한다. 고후1장에서 바울이 에베소에서 핍박으로 죽음에 직면했었다고 보고 있다. 그 엄청난 체험이 바울로 하여금 자기의 죽음을 복음의 빛 아래서 봤을 때 그것이 더 나은 것이라는 깊은 깨달음을 얻게 한 것이다. 학자들의 가능한 설명이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예수님에게서나 바울에게서나 종말에 대한 2가지 경향을 보게 된다. 하나는 임박한 종말을 강조하는 경향이다. 사람들이 생각할 수 없는 때에 오므로 항상 대비해야 한다는, 곧 임박했다는 가르침이다. 다른 하나는 종말이 언제 일어날 지 모른다는 것이다. 종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한 주권에 달려 있는데, 여기서 특히 ‘선한’이라는 말을 쓰고 있다. ‘종말’ 하면 우리는 하나님은 심판하신다, 환란이 있다고 생각하며 무섭게 심판하는 분의 영상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심판관인 동시에 구원자이다. ‘하나님은 사랑이다’라는 것이 더 중요한 진리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구원의 첫 열매를 받은 사람들이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는 분임을 체험한 사람들이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해 주실 것이다. 그 구원의 첫 열매를 주신 하나님이 신실하게 우리를 종말의 환란의 끝까지 지키실 것이다. 우리를 예정하시고 의롭다 하심으로(무죄선고 하심,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있게 하심) 우리는 심판 때에 우리의 무죄선고 받음, 새로운 피조물 됨을 재확인하게 된다. 우리는 종말에 근본적으로 우리를 위하시는 분으로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그런 하나님은 그러면 언제 재림하시는가? 그리스도의 재림과 더불어 이 세상과 역사를 종결하고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느냐? 근본적으로 사랑이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장 유리한 시점을 택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선하시고 사랑이시고 우리의 구원자이시기 때문이다. 언제인지는 아무도, 그 아들도 모르나 우리에게 가장 유리한 시간이 될 것이다. 이 두 가지가 늘 성경에 같이 나오는 종말에 관한 진리이다. 이 두 가지는 모순관계인 듯 하나 이 두 가지가 우리로 올바른 신앙 자세를 견지하게 한다. 만약 종말에 대한 기대감 없이 산다면, 종말을 믿지 않는다면 이 세상이 전부이므로 세상 가치를 절대화하게 된다. 건강, 부, 권력, 얼마나 가지고 얼마나 소비하는가가 현대 소비 사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된다. 우리의 인격, 인간관계는 물질화 되고 우리는 인간성을 상실하게 된다. 우리에게 이 세상이 절대화되고 세상가치에 빠져 살 수 밖에 없게 된다. 반대로 언제 올지 모르나 하나님의 선한 주권에 달려 있다는 생각이 없으면 신앙의 기쁨, 그리스도 안에서의 평안이 없어진다. 하나님의 구원의 평안이 없는 옳지 않은 신앙인이 된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의 기쁨, 평화, 너그러움이 없게 된다. 아주 세속적인 그리스도인이 되거나 그리스도인의 기쁨, 평화가 없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극단을 달리게 된다. 우리는 늘 근신하고 깨어서 기도하는 자세로 살아서 이 세상의 가치들을 상대화하면서 살되(왜? 곧 종말 때에 사라져 버리니까) 날짜를 세거나 기도하러 쫓아 다녀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 두 가지 가르침을 동시에 견지해야 한다.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그러면 우리는 이 두 가지 기대를 가지고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 세상과 세상 가치들을 과감히 상대화하면서 ‘--하지 않는 자 같이 살라’는 것이 기독교의 대 원칙이다.
토론거리-1)본문의 가르침에 비추어서 자본주의자들과 민중신학자들을 각각 비판해 보라.-하지 않겠음.
2)우리들의 삶을 한 번 반성해 봅시다.-집에서 해보기
3)우리의 과소비문제-얼마나 가졌느냐로 그의 됨됨이가 결정되고 인간관계가 물질화 되는 소비사회에서 우리는 더 많이 소비하고 더 많이 가지려고 달려들게 된다. 이로 말미암은 자원고갈, 환경파괴, 인간성의 상실 등으로, 우리의 죄악으로 우리 스스로를 종말에 자꾸 밀어 넣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때에 진정한 구원과 치유의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그리스도의 복음이 올바로 선포되어 사람들로 하여금 이 세상과 세상의 가치들을 제대로 평가하고 제대로 상대화할 줄 알아서 이렇게 살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많이 나오고, 선교의 일부로서 이웃들에게 이것이 진정한 행복임을 자꾸 가르칠 때에만 우리 인류에게 소망이 있게 된다. 그리스도인들이 지금 이 바울의 가르침을 더 깊이 깨달아 행복은 소비하는데 있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살아 계신 하나님께 의지하고 그에게 순종하는데 있다는 진정한 깨달음 속에서 ‘--하지 않는 자’같이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새로운 각성과 선교, 그리고 윤리실천운동이 있을 때에야 비로소 우리국가의 과소비나 인류의 문명사적 문제도 해결이 될 것이다.

(24) 고전7:32-40
결혼과 남녀관계에 관한 바울의 다양한 충고를 긴 7장에서 다루고 있다. 고린도 교회의 일단의 금욕주의자들은 성관계를 악한 것으로 보고 결혼하지 말도록, 결혼한 자들을 성관계를 하지 말고 살도록 하라는 말들을 했다. 그리고 또한 영혼의 구원을 이미 받았으므로 육신으로는 어떻게 살아도 괜찮다면서 성적으로 문란한 생활을 하는 자들도 있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에 균형잡힌 남녀관계, 부부관계, 결혼생활에 대해서 충고하는 것이 어렵고도 절실한 문제였다. 간단히 복습해 보겠다.
1-7: 부부관계에 대한 원칙, 금욕주의자들에 맞서서 정당한 성관계를 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8-16: 결혼과 이혼에 대한 충고.
17-24: 하나님의 소명에 대한 근본적, 원칙적인 가르침으로, 될 수 있으면 그 하나님의 구원에의 소명이 임한 그 상태를 변동시키려 하지 말고 그 상태에 머무르라는 원칙을 제시한다. 그 하나님의 구원의 소명이 임했던 그 삶의 장-신분적, 직업적 상황, 결혼 여부-에서 기회를 최대한 이용하고 그 처지를 될 수 있는 대로 변동시키지 말라고 한다. 고대사회에서 가장 어려웠던 관계가 노예와 주인의 신분관계였는데 21절에서 보이듯이 노예제도가 옳지 않은 제도임은 행간에 분명히 드러냈지만, 바울이 그 제도를 상대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노예도 주안에서 자유자가 되고 상전도 노예와 같이 다 같이 서로에게 종노릇하는 관계이므로 세상에서의 신분적 차이는 큰 의미가 없다고 상대화해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그냥 처음의 처지에 머무르라는 것이 바울의 가르침의 기조이나 노예제도는 그 자체가 워낙에 악하므로 자유할 수 있으면 사용하는 것도 가하나 너무 억지로는 말라고 하고 그 외에는 그 원래 처지에 머무르라는 가르침이다.
25-38: 바울이 다시 남녀관계, 결혼문제로 되돌아가고 있다. 17-24까지에서 원칙적인 문제를 토론했고 이제는 처녀들에 대해서 충고하고 있다. 이 문제 또한 기조는 그냥 지내라는 것이다. 여기에 2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임박한 종말-이 세상의 종결과 우리 구원의 완성인-에 우리가 처해 있으므로, 둘째로는 종말 전에는 환란이 있다는 단12장 이래로의 한결같은 가르침, 곳곳에 있는 예수님의 가르침, 계7장의 가르침에도 있듯이 종말 전에는 큰 환란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끝까지 참고 견디는 것이 중요한데 결혼이라는 것이 이 세상에서의 번거로움을 더하는 것이다. 각자가 배우자와 자녀에게 마음을 쓰게 되므로 결혼하지 않는 게 좋다는 가르침이다. 29-31까지는 또 임박한 종말은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이 세상에서의 시간동안 결혼이나 출세도 상대적인 것이고 이 세상의 제도일 뿐임을 말해 주고 있다.
이제 또 32-35절에서 처녀에 관한 충고를 시작하고 있다. 바울은 7장 전체에서 임박한 종말에 비추어서 그 임박한 종말은 환란과 함께 온다는 사실과 잠깐 나는 시간은 그리 절대적인 시간이 아니다라는 것의 두 가지 생각으로 그냥 처지에 머무르라는 기본기조의 충고를 대원칙적으로 해 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늘 예외가 있음을 바울은 말해 주고 있다. 절제의 은사가 없으면 더 마음이 분요해지고 죄를 짓게 되므로 바울은 결혼하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문자적, 기계적인 적용은 되지 않는다. 사람들의 하나님 앞에서의 자유, 개별적 신앙의 결단에 장애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35절에서 이것에 대해 덧붙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말을 함은 너희에게 유익을 주려 함이라고 바울은 분명히 밝히고 있다. 36-38: 36에서는 결혼시켜도 되며 37에서 그냥 지낼 수 있으면 그냥 지내는 것도 좋으며 38에서는 종합하여 그냥 결혼 않고 지내는 것이 ‘더’ 좋다고 다시 정리해 말해 주고 있다. 39-40: 과부들에 대한 충고. 결혼관계는 이 세상에서 끝난다. 그러므로 다시 결혼해도 간음죄가 아니나 주안에서 하라고 한다. 예수를 믿고 그 주되심을 고백하는 사람과만 하라고 하고 있다. 이제까지 여러 예외들을 다뤄 왔으나 바울은 기왕이면 믿고 하나님의 주권아래 들어온 자와 결혼하라고 한다. 그냥 과부로서 그대로 지내는 것이 가장 좋다고 바울은 단순한 삶을 권하면서 그냥 지내라는 원칙을 다시 천명한다. 이제껏 11-12에서 예수님의 말을 인용하고는 더 이상 인용할 말이 없어서 사도로서의 자기의견을 주었다. 왜냐하면 혼합결혼 등의 문제가 유대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사도의 권리로서 자기의견을 계속 주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입은 자로서(늘 자기 사도직이 은혜라고 설명해 왔다), 즉 사도의 권위로, 그리고 하나님의 영을 받은 자로서 성령의 영감으로 내가 충고하노니 이것을 존중하고 참고해 달라고 하고 있다. 본문에 나오는 꽤 어려운 신학자들이 신학을 함에 있어서 부딪히는 신학적 문제 하나, 여러분들이 성경을 연구할 때도 느끼는 어려운 신학적 문제 하나는(오늘 해결은 안 하겠지만) 바울은 종말이 아주 임박하다고 봤다는 것이다. 고전15장을 쓸 당시만 해도 바울은 재림이 자기 당대에 있어서 자기가 산 자로서 다시 오시는 예수를 맞이할 것으로 보았다. 임박한 종말에 대한 확신에 비추어서 이렇게 바울은 충고하고 있다. 곧 환란이 닥치므로 될 수 있는 대로 단순한 삶을 살라고 충고하고 있다. 그러나 1950년이나 지난 우리의 상황에서 우리는 바울의 여기의 이 충고를 이 때에 어떻게 우리의 상황에 받아들이고 적용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점차 해결해 보려고 다같이 노력해 봅시다.
<찬444장>1.예수가 거느리시니 즐겁고 평안하구나 주야에 자고 깨는 것 예수가 거느리시네
주 날 항상 돌보시고 날 친히 거느리시네 주 날 항상 돌보시고 날 친히 거느리시네
2.때때로 괴롬 당하면 때때로 기쁨누리네 풍파 중에 거느리고 평안할 때 거느리네
3.내주의 손을 붙잡고 천국에 올라가겠네 괴로우나 즐거우나 예수가 거느리시네
4.이 세상 이별할 때에 지옥의 권세이기네 천국에 있을 때에도 예수가 거느리시네


(25)고전8:1-13
8:1-11:1까지가 고린도전서의 제3부에 해당된다. 제1부는 1장-4장으로서,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지혜를 자랑함으로 파벌로 나뉘어져 교회가 큰 갈등을 겪고 있는 상황속에서, 진정한 지혜란 무엇인가? 십자가의 복음이 진정한 지혜이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성령으로 계시된 것임을 바울이 설파한다. 인간들의 지혜와 그리스도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를 대조함으로써 후자가 얼마나 헛된 것인가,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지 못하는가, 오직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의 지혜만 우리를 구원한다는 지혜문제를 다루었다. 2부는 5장-7장으로 우리가 막 공부했던 부분으로서, 간음문제 즉 교회 내에서의 성도덕의 타락으로 인한 문제를 다루고, 겸하여 결혼문제, 이혼문제 등을 다루었다.
1부는 지식, 지혜를 통해 사람이 구원을 받는다는 사상의 영향으로, 그리고 지식, 지혜를 통해 구원을 얻는다는 헬라의 강한 뿌리깊은 문화전통 때문에, 사도들이 선포한 복음도 하나의 지식 또는 지혜의 일종으로 보고, 또는 다양한 철학학파들의 다양한 지혜의 일종으로 보고 있었다. 그래서 바울이 전한 복음을 바울적 지식, 지혜, 베드로가 전한 복음을 베드로적 지혜, 아볼로가 전하는 복음을 아볼로적 지혜라고 하면서 서로 선호하는 대로의 파벌을 만드는 것을 보고 바울이 그런 세상적인 지혜로 복음을 오해하는 것을 철저히 막고 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타난, 이 세상의 지혜와는 정반대되는 미련함과 연약함이 어떻게 진정으로 우리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지혜인가와, 그것은 오로지 성령의 계시, 성령의 깨우침으로만 우리가 터득할 수 있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이 1부였다.
2부서도 고린도인들의 그 원래의 문제, 그들의 그 문화적, 종교적 전통 때문에, 즉 그들의 지혜를 통해서 인간이 구원 받는다는 헬라사상 때문에, 그런 문제가 1부에서 발생했었었는데, 여기서도 영과 육을 분명히 구분하는 헬라적 인간론이 문제를 일으켜서, 구원은 영혼만 받는 것이고, 육은 아무 소용없는 것이라는 헬라의 존재론적 이원론 때문에 그리스도의 복음도 오해하게 된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도 영혼만 구원받는 것이 되므로, 그런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성령의 은사라는 물증을 대려는 강한 자들, 즉 성령의 은사를 자랑하고 그것들을 아주 중요시하는 열광주의자들(그런 신학을 열광주의신학이라고 함)이 육신으로는 아무렇게나해도 괜찮다고 했다. 그래서 성도덕이 아주 격언적으로 타락한 고린도이방인들도 감히 하지 않는 정도의 성문란을 자행하게 되었다. 그래서 바울이 그 문제를 다루었고 또 그와 똑같이 고린도교회내의 약한 자들, 즉 금욕주의자들이 영육을 구분하는 존재론적 이원론에서 영혼의 구원위해서는 육의 모든 소욕을 절제해아 된다면서 7:1절에서 남자는 여자를 만져서는 안된다, 결혼도 해서는 안되고, 결혼상태에서도 부부관계를 가져서는 안된다고 했다. 이런 문제들, 성도덕의 문제, 남녀관계의 문제, 부부생활의 문제, 결혼의 문제를 죽 다루어왔다.
이제 제3부 8:1-11:1에서는 우상의 제물을 먹는 문제, 즉 우상에게 바쳐졌던 고기를 먹을 수 있느냐 없느냐 라는 고린도의 이방환경 때문에 일어나는 구체적 문제를 통해서, 바울로 하여금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그 자유의 한계에 관해 원칙적으로 다루어 보게 한다. 앞서와 마찬가지로 이 문제도 고린도교회의 이방이라는 환경 때문에 일어나는 문제이다. 헬라인들의 다신주의, 복잡한 종교적 우상숭배의 환경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주위의 우상숭배, 문화, 생활환경과 어떻게 관계하면서 살아야 되는가? 그리고 또다시 교회내에서 강한 자들-그리스도를 믿어서 하나님을 알고 구원의 도리를 터득한 우리 지식있는 자들은 우상이 아무것도 아니니까 무시하고, 우상숭배하는데서 큰 잔치가 있거든 가서 같이 참여해도 괜찮은 것이고, 그 바쳐진 고기 먹는 것도 아무렇지도 않다는-과 약한 자들-금욕주의자들로 우상이라면 천길만길 뛰는-과의 갈등문제를 다루면서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그 자유가 어떻게 쓰여져야 하는가, 또 그 자유는 어떠한 한계를 가지고 있는가하는 문제들을 이곳 3부에서 상당히 원칙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이다. 앞서의 두가지도 우리 한국의 상황에 여러 가지 적용성을 갖지만, 이 문제도 또한 그러하다. 우리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 땅에 들어온지 겨우 100 여 년이 되어, 어떤 의미로 우리교회의 상황은 고린도교회의 상황과 많이 유사하다. 우리 주위에도 우상숭배의 문제의 형태가 많고, 우리 문화가 그런 전통을 가지고 있는 다종교들의 상황속에서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하는 문제를 우리로 하여금 많이 생각하게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과 우리의 전통문화와의 관계를 많이 생각하게 하는, 오늘의 우리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들과의 관계는 어떻게 해나가야 되는가, 더 나아가서 교회내에서 이 문제에 대한 분분한 의견에 어떻게 서로를 존중하며, 강한 자는 약한 자를 무시않고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어떻게 자기의 자유를 자제해야 하는가, 약한 자는 어떻게 또 강한 자를 자기 양심의 기준에 따라 비판해서는 안되는가, 그리하여 또 교회내에서 어떻게 하나의 공동체성(fellowship)을 잘 이뤄가야 하는가의 문제를 생각하게 하는 부분을 우리가 하고 있다.

8:1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들에 대하여서’가 제목이다. 7:1에서도 바울이 ‘너희의 쓴 말에 대하여는’이라고 제목을 붙여 시작하면서 이제 내가 편지에 답하겠다고 했었다. 우상에게 바쳐졌던 제물을 먹는 것이 옳습니까 아니면 피해야 합니까 하는 질문은 고린도인들이 바울에게 보낸 그들의 편지에 구체적으로 제기한 듯하다. 이제 이 문제를 다루겠습니다라는 뜻으로 먼저 제목을 썼다.
그 다음 ‘우리 모두가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안다’는 고린도교회의 일부 강한자들의 구호의 말을 바울이 지금 사용한 것이다. 그러아 우선 제3부의 구조를 간락히 말해보고 시작하겠다. 고린도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이방인들의 우상숭배와 접촉하게 된 것은 두가지의 계기에 의해 이뤄졌다. 하나는 우상에게 바쳐졌다가 시장에서 매매되는 고기를 먹는 것이다. 지금도 정통 유대인들은 랍비가 예를 베풀고 율법에 규정된 예에 따라 도살된, 피를 전부 뺀 고기만 먹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율법을 어기는 것이 된다. 이슬람세계에서도 이슬람의 법에 따라도살된 고기만 먹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법을 어기는 것이 된다. 그래서 이 고대 헬라 세계에서도 고기를 도살하면 그들이 믿고 섬기는 신에게 바쳤다거 그것을 세상에 내다파는 형식을 취했다. 그래서 시장 푸주간에 나와있는 대부분의 고기가 이렇게 한 번 그들이 신봉하는 신에게 바쳐졌고, 그 종교의 예법에 따라 도살된 고기들이었다. 시장에서 거기를 사먹게 되면 상당히 많은 경우 우상에게 한 번 바쳐졌던 고기를 사먹게 되는 셈이었다. 그러나 고대문헌에 보면, 우상에게 바쳐지는 의식을 치르지 않고 도륙되는 고기도 더러 있었다고 한다. 오늘날 세속화된 세상에서는 그런 일이 별로 없지만, 지금도 전통종교가 뿌리박혀있는 사회에서는 전부 이렇게 도살이 그 종교의 예법에 따라 이뤄진다. 그리고 그 중의 핵심부분이 그 신에게 한 번 바쳐지게 된다. 그러한 속에 그리스도인이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때 고기를 사먹는 게 옳은가 옳지 않은가? 또 하나는 이방인들의 사원에서 우상에 대한 제사의식과 더불어 베풀어지는 식사에 참여하는 것이다. 당시 고대 헬라세계에서 직업단위로 자기들의 직업의 번영과 속해있는 사람들의 친목을 위해서 제사와 잔치를 벌였었다. 그런데 내가 만약 어부라면 그런데에 참석해야 되느냐 안해야 되느냐, 내가 천막 만드는 사람이라면 거기에 참석해야 되느냐 말아야 되느냐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이런 상황에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시장에서 사는 고기가, 또는 비그리스도인 이웃집에 초대되어 대접받는 고기가 우상에게 바쳐졌던 고기인지 아닌지를 항상 구별해 낼 수가 없었다. 비그리스도인 친구집에, 또는 친척집에 초대를 받았는데, 거기에 갈비나 스테이크가 나왔다면, 그것이 우상에게 바쳐졌던 고기인지 아닌지를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친구나 이웃집에 초대되어 먹을 수 있는 사람들은 부유층에 속하는 자들이었다고 한다. 최근의 신약성경연구의 한 방법론으로 ‘사회학적 방법론’이라는 것이 발달하고 있는데, 그들의 사회학적 관점에서의 연구를 통해 밝혀낸 것이 바울시대에 고린도에서 친구집에 초대되어 고기를 대접받을 수 있는 사람들은 부유한 계층에 속한 자들이었다고 한다. 가난한 자들은 고기를 사먹을 수가 없어서 사원에서 열리는 종교적 잔치에서 공짜로 고기를 얻어먹으려는 유혹을 강하게 받았다고 한다. 우리중의 대부분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예를 들어 어서 풍성한 고기를 공짜로 나눠준다면, 나는 얻어먹으러 갔을 것이다. 요즘의 풍요한 상황에서도 아무개 국회의원이 점심낸다고 하면 다들 식당으로 우르르 몰려가 수백켤레의 신발들이 놓여있는 것을 TV를 통해 볼 수 있다. 밥굶는 사람없는 이 세상에 타락한 국회의원이 공짜밥을 준다니까 그 식당까지 찾아가서 시간쓰고 계면쩍어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존재하고 있다. 이러한데 30년 내지 40년 전 가난한 시절에 어디가서 공짜로 고기를 준다고 하면 가서 먹을 것이다. 하여간 그런 상황이었다. 이것이 이 고린도교회 문제의 베경이다. 8장에서 바울은 우상의 제물을 먹는 문제를 다루면서, 형제에 대한 고려를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한계로 제시하고 있다. 9장에서는 자신을 예로 들어, 자유와 사랑의 올바른 관계에 대하여 설명한다. 5장서는 자기가 사도로서 자유가 있고 많은 귄리가, 특히 고린도교회로부터 헌금을 받아서 생계를 유지할 권리가 있으나 자기가 전혀 그 권리를 쓰지 않고 완전히 포기했다고 한다. 그것은 효과적으로 복음을 선포하고 교회를 세우기 위해 사도로서 자유와 권리를 가진 자이나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그 권리를 포기하는 자기의 예를 들어서 그리스도인들이 근본적으로는 자유가 있으나 이 자유를 어떻게 써야 되는가를 말하고 있다. 어떻게 형제를 고려하면서 써야 되는가를 예증하고 있다. 그렇게 하면서 고린도교회의 바울의 사도직에 의심하고 도전하려는 사람들에 대한 자기변호도, 9장에 조금 섞여 있다. 그러나 어쨌든 근본적으로 자기의 사도적 예를 드는 이유는 8장에서 제시하고 있는 원칙에의 예증으로 들고 있는 것이다.
그 다음 10:1-22까지에서는 성만잔에 참예하는 자가, 우상숭배의식이 벌어지는 식사에 참예할 수 없다고 경고한다. 과거 이스라엘의 예를 들며, 엄중히 경고한다. 우상숭배에 동참하지 말 것을 엄중히 경고하고 있다. 이것은 강한자들에 대한 경고이다.
그다음 10:23-11:1까지에서는 우상의 제물에 대한 그의 입장을 결론적으로 정의하고 있다. 그 부분10:23-11:1까지만 한 번 읽어서 이 제3부가 전체적으로 어떤 형태를 취하는지를 알고, 그다음에 8장부터 나가는 것이 더욱 쉽겠다. <교독> 11:1은 사실 윗장에 속한 것으로, 장절을 잘못 나누는 현상이 가끔 일어난다. 바울이 원래 편지를 쓸때는 장절도, 구두점도, 띄어쓰기도 없었다. 그냥 옛날 우리 한글로 두루마리로 글 써내려가듯 계속 써내려갔다. 종교개혁시대 이후에 장절 가르는 것이 이뤄졌다.
8:1-13 : 지식에 앞서는 사랑. 바울은 강한 자들, 이 자유주의자들의 구호를 다룸으로써 그의 가르침을 시작하고 있다. “우리가 다 지식을 가지고 있다(8절)”는 구호에 일단 바울은 동의한다. 그건 우리 인정한다. 그러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운다. 바울은 7장 1절에서도 같은 구조를 보여주었다.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아니함이 좋다.”는 금욕주의자들의 구호를 바울은 인용하고 일단 거기에 바울은 동의한다. 그다음 2절에서 그러나, 음행의 연고로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둔다고 한다. 이처럼 바울은 일단 그들의 구조에 동의하면서 교정해 가기 시작한다. 여기서도 다 지식을 가졌다는 강한자들, 고린도 교회의 자유주의자들의 구호에 동의한다. 10장 23절에서도 마찬가지로 “모든 것이 내게 가하다”는 구호를 먼저 인정한다. 즉 내가 ‘그리스도안에서 얻은 자유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내게는 모든 것이 합법적이다, 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고 한다. 바울은 그들의 구조를 인용함으로서 동의한다. “그러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다”라는 말은 바울이 그들을 교정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내게 가하다, 그러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도 아니다.”라고 바울은 항상 극단의 논리를 펴는 이들에게도 무조건 틀렸다고 하지 않고 일리가 있다고 말한다. 어떤 의미로 그건 맞는 말이다. ‘그러나-’라고 한다. 나중에 내용적으로 보면 바울은 남자가 여자를 만지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일리가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모든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말도 바울은 인정치 않고 있다. 그들이 지식을 가졌다고, 성숙한 사람이라고 바울은 인정하지 않는다. 바울은 그러나 무시하지 않고 “그래 맞는 말이야, 너는 지식이 있어” 이렇게 아이들에게 하듯 먼저 인정을 해준다. 내가 이제 스승된지 15년이나 아직 너그럽지 못하다(김세윤). 바울, 그리고 바울에게서 배운 내 스승들에게서도 배울것이 많다. 바울은 그들의 지식이 있다는 구호에 일단 동의하지만 그것을 곧장 사랑과 연결 시킨다. ‘지식’은 고린도의 열광 주의자들의 중심 개념으로서 앞에서본 1부, 1장-4장에서 다룬 지혜와 연결되는 것이다. 이것은 ‘지식’은 고린도 열광주의자들이 성령의 은사로 얻었다고 생각한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깨달음으로서 자기들은 그것으로 자기들의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 구원론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이것은 그들로 하여금 ‘내 영혼은 구원받았다, 나는 이제 됐다’는 자만에 빠지게 하였다. 그래서 그런 지식이 없어서 어떤 이들은 소심하고, 고기가 우상에게 바쳐졌던 것은 아닌가 따지고, 안절부절하고 있다면서 업신여기기 시작했다. 이래서 바울은 그들의 구호에 사랑을 대조 시킨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나 사랑은 덕을 세운다는 말을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지식은 빈공기가 허파에 많이 들어가 부풀게 하나 사랑은 교회를 세워 올린다, 건축한다’이다. (고전 3장 9, 10, 12, 14절, 10장 23절, 14장 3-5절, 12장 17, 26절) 지식은 서로가 지식 자랑을 하게 해서 상대방을 업신여기게 하며, 교제가 부서지게 하며 교회내의 공동체성(fellowship)을 파손 시킨다. 그러나 사랑은 서로를 섬기고, 자기보다 낫게 여기는 것이며 서로의 결점을 보완하고 서로를 섬김으로 이 공동체성을 더 튼튼하게 만들어주며 교회를 세워 올려가는 것이다. 덕을 세운다는 말은 사실은 ‘교회를 건축해 올린다는 것이다, 더 순결하고 아름답고 사랑이 넘치고 따뜻한 공동체성이 있는 튼튼한 교회를 세워나간다’는 말이다. 지식은 사람을 부풀게하나 사랑은 교회를 세워나간다. 바울의 교회를 세워 올리고자 하는 관심은 이전의 많은 구절에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지식은 사랑을 동반하여야지만 교회를 지워나갈 수 있다, 세워나갈 수 있다. 고린도전서의 1-2장과 이 본문 1-3절은 교회의 반 지성적 경향에 많이 이용되어 왔다. 그러나 그런 태도를 바울이 권면한 것은 아니다. 지식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사랑에 의해 동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랑’이라는 더 고귀한 가치를 지원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래야 교회를 세워나간다는 것이지 ‘지식이 옳지 않다, 성경도 더 깊이 연구할 필요도 없다, 신학공부도 해서는 안된다’는 뜻으로 바울이 말한 것은 아니다. 바울 스스로가 엄청난 지성인으로서 구약과 유대 신학에 대한 엄청난 지식으로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어서 우리가 그의 그 지식의 도움으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게 된다. 그러나 인본주의적 지식에 대해서는 바울이 한 말이 맞다. 지식은 하나님을 창조주, 구원주, 우리의 주로 알게 하는 것이 궁극적 목표이며 지식이 바라는 효용성을 가지게 되는 것인데 인본주의적 지식은 인간을 자만하게 할 뿐이다. 올바로 그리스도인이 신학함은 교회를 세워나가는 것이 된다. 우리는 이런 지식을 갖추어 나가야 한다.


고린도전서 강해(26)
본문 고전 8:1~13

1절에서의 고린도 교회의 구호는 “우리는 다 지식을 가졌다. 우리가 가진 지식에 의하면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것이다. 그 지식은 우상은 세상에 아무것도 아니며 하나님은 오로지 한분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식물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지 못한다. 하나님 앞에 우리를 천거하지 못한다. 그런말들을 고린도의 강한자들, 지식을 가진자들, 곧 하나님에 대해서 알고 구원에 대해서 스스로 안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이야기 하고있다. 하나님은 한분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우상들을 아무것도 모르는 이방종교들을 추종하는 저런것들은 다 하나의 돌조각 나무조각에 지나지 않으며 거기에 받쳐진 음식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 교회에서는 우상이 무슨 실체가 있는 것으로 생각해서 우상에 대해서 벌벌떨고 우상에게 받쳐진 음식을 꺼림찍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바보짓이다라고 고린도의 지식있는자-강한자들은 주장하고 있다. 바울은 이점에서 원칙적으로는 동의를 하고 있다. 그러나 지식이 없는 자들(연약한 자들) 생각해서 우리는 지식에거 나오는 것을 절제함을 강조하고 있다.

바울은 고린도의 (열광주의자들)의 구호를 사랑과 연결시켜 설명하고 있다. 열광주의 자들은 그들의 지식이 성령에서 나왔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자만하게 했고 남을 업신여기게 만들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들의 구호에 사랑을 대조시켜 설명하고 있다 바울은 지식은 교만하게 하지만 사랑은 덕을 세운다고 이야기한다. 덕을 세운다는 말은 다른 말로 교회를 세운다는 말이다.
교회를 세우는 것을 사명으로 생각한 바울은 지식에는 사랑이 필히 동반하여야 함을 되풀이해서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 안에서의 진정한 지식은 2의 아들인 예수그리스도의 자기 계시에 의햬서만이 가능하다. 마찬가지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도 그리스도와의 관계속으로 들어 가야만 가능하다고 이야기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안다는 것은 선택했다는 표현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는 자는 자기의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라고 이야기 한다. 그사랑의 관심속으로 들어간자를 아는자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무슨말인가?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 사랑을 힘입어 순종하면서 살아갈 때 우리는 하나님을 안다고 표현할 수 있다. 하나님에 대한 단편적인 지식이 아니라 이러한 연합이 중요한 것이다. 지금 고린도 인들이 지식을 자랑하면서 연약한 자들에 대한 사랑이 부족한 것은 이들이 사랑이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없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말할 수 있다.


고린도 교회의 진정한 문제는 바로 하나님에 대한 참지식이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에 애한 참 지식은 사랑의 관계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이야기 한다. 바로 사랑으로 표현되어져야 참 지식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4절에서는 본격적으로 우상에 관하여 설명하고 있다. 바울은 우상자체는 실체가 없지만 인간이 그 돌조각에 절하고 그 나무조각에 매달리는 그 행위를 이용하는 마귀의 실체는 인정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신이라고 할 때 신명기 6:4절의 표현으로 쉐마라고 하면서 유일신임을 강조하고 있다. 당시 고린도 지방에는「이름도 모를 신」이 있을 정도로 온갖 우상들이 범람하는 곳이었다. 이런 신들이 인간에게 어떤 악영향을 미치지 않을까하는 항상 두렵고 불안한 생활을 지속했다. 헬레니즘의 시대적 배경의 가장큰 정신적 작용은 바로 이러한 불안이었다.
우리의 신앙고백은 크게 3부분으로 되어 있다. 신에 대한 고백과 하나님에 대한 고백, 그리고 성령님에 대한 부분으로 되어있다.
본문에서는 두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하나님에 대한 부분과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부분이다. 예수는 하나님을 아빠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 단어는 언약신앙에서 유래된다. 그 유일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어 주신다는 것이다. 아버지 노릇을 해 주신다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을 감히 주님을 따라 우리도 아빠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아버지 노릇을 해주시는 것 또한 우리는 그의 자녀가 되어 그의 구원을 받아들이는 것 나의 아버지되어 주심을 감사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예수그리스도 복음의 핵심이다.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 되심이야말로 하나님나라의 복음이다. 이 하나님은 만물이 그로부터 나온 창조주이시다. 따라서 우리는 그의 창조의 목적에 따라 살아야 한다. 우리의 삶의 목표는 바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두 번째는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이다. 우리의 主는 한분밖에 없는 예수그리스도 이다. 하나님이 창조주되시며 예수그리스도는 창조의 일꾼이시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여기서 본문은 ‘만물’과 ‘우리’를 구별하여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안에서 택함받은 자를 이야기한다. 또 만물은 예수그리스도의 중보로 창조되었다. 그러나 이것또한 「우리」만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그리스도의 재 창조의 덕을 힘입은「우리만」그것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위해 존재한다고 고백하고 있다.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만물을 지으셨고 그 창조의 하나님은 사역에 처음부터 함께하신 것이다. 곧 이는 하나님이 한분이시면서 두 인격체로 인식되는 것을 고백하고 있다. 이것은 초월하시면서도 내재함을 표현하는 언어수단이다. 구원은 오로지 초월자만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그 초월이 이 세상속에 함께하여야만-내재하셔야만-온전한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27번 고린도전서강해
고린도전서 8장 1절부터 13절까지 교독하겠습니다.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바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칭하는 자가 있어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며 또한 한 주 예수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
그러나 이 지식은 사람마다 가지지 못하여 어떤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
식물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아니하여도 부족함이 없고 먹어도 풍성함이 없으리라.
그런즉 너희 자유함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지식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약한자들이 담력을 얻어 어찌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약한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

예, 여러분들 교재 p53 위에서 7절, 지난번에 우리가 6절에 있는 신앙고백 두 부분으로 된 창조주 아버지에 대한 신앙고백 그리고 주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에 대해서 알아 보았어요.
그런데 그 신앙고백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고백으로 되어 있는데 이런 신앙고백을 이위 일체론적 신앙고백이라 그래요.
삼위 일체론적 신앙고백,성령에 대한 신앙고백, 우리가 보통 축도로 쓰는 성령에 대한 신앙고백까지 합쳐서, 또는 성령의 역사까지를 거명하는 기도를 삼위일체론적 형식이라 한다면 그에 견주어서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함께 고백하는 이런 신앙고백을 이위 일체론적 신앙고백이라 한다 이말이예요.
그것의 의미는 전에도 제가 한번 이 삼위 일체론의 의미를 한번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만 나중에 한번 또 제가 설명하겠어요.
우리의 기독교 신앙의 모든 요소들이 궁극적으로는 삼위 일체론적인 하나님에 정박 돼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개시하신다. 할 때 스스로를 개시 하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냐? 초월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그 초월하신 하나님이 어떻게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에게 자기를 보여주시느냐?
그의 아들을 통해서 이세상에 오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 같은 죄인들이, 피조물들이, 우리의 지혜가 제한돼 있고 지식이 한계가 있고, 그런 죄인들이 어떻게 자기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스스로를 개시한 이 초월자 하나님을 알아 볼 수 있게 되느냐?
그것은 하나님의 영, 성령이 우리의 영적인 눈을 띄워서 하나님 아들의 안에 개시 된 하나님을 우리에게 개시되도록 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도대체 이 초월하셔서 초월하시기에 우리를 구원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을 알게 되는거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 하나님의 개시를 말한다든가 또는 하나님께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셨다든가 이런 말을 할 때는 다시 말해서 스스로를 개시하시는 하나님 또는 은혜로 우리를 구원 하시는 하나님 이런 말을 할 때는 사실은 어떤 하나님을 우리가 말 하느냐 하면 삼위 일체론적인 삼위 일체론적으로 존재 하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말하는 거예요.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을 안다든가. 그 하나님을 암으로써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든가, 이러한 구원론이라든지, 우리의 신앙고백, 우리 기독교 신앙의 모든 것들이 결국은 궁극적으로는 삼위 일체론적인 이 실론에 정박 돼 있어요.
그런데 이제 이 논리를 전에도 제가 한번 설명을 했는데 나중에 제가 또 자세히 설명하려고 해요.
우리 기독교와 모든 종교들을 궁극적으로 구분하는 것은 삼위 일체론적인 실론에 있어요.
아주 귀중한 교리로써 우리가 늘 고백하고 귀하게 여겨야 하는데 많은 사람들은 이 삼위 일체론적인 실론이 어떻게 세 신이 한분이냐 하는 어떻게 셋이 하나냐는 이 숫자 놀음인줄로 생각을 하고 이 삼위 일체론적인 하나님을 고백하는 그 신학적 논리를 터득못해서 잘 모른다고요.삼위 일체론적 실론이 성경에 그렇게 씌여져 있으니 그렇게 믿을 따름이지 우리는 잘 모른다.
삼위 일체론적인 실론이 우리 신앙의 모든 요소들과 우리의 구원에 대한 고백, 우리의 종말에 대한 소망,우리의 기도 행위, 이 모든 것들이 궁극적으로는 이 삼위 일체론적인 실론에서 유래하는데 그것을 모르는 분들이 꽤 많은데 한번 좀 더 좋은 이 본문보다 조금 더 좋은 교재가 주어질 때 자세히 설명하려 해요.
우선 7절 입니다. 7절
바울이 그러니까 이 세상에 이방인들은 신들을 섬기고, 주들로 섬기는 것들이 많이 있으나 우리에게는 한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가 계셔서 그로부터 만물이 창조되었고 그렇기 때문에 만물이 그를 영광으로 돌리는 것을 존재의 목적으로 삼고 존재해야 하나 만물이 그러지 못해요.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계시로, 역사로, 그리고 성령의 계시로 역사로 그 하나님을 알게 된 우리는 그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을 우리의 목적으로 살고 있다.
그게 첫 고백이지요.
그리고 우리에게는 한 주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다.그 한 주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전부터 하나님의 아들로,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분으로 하나님께서 창조 역사에 일꾼으로 쓰셨던 분이어서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창조 되었다.그를 수단으로 삼아 만뭉리 그로 말미암아 창조 되었다.
그러므로 물론 그로 말미암아 창조 되었는데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창조 되었다는 것은 앞에 우리도 하나님 아버지를 위해서 존재한다는 말과 병행을 이루어서 뒤에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창조 되었다는 말은 구원의 재창조로 보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재창조로 보고 우리가 그의 재창조의 행위를 통해 구원 받는 자들로써 그로 말미암아 구원 받은 자, 재창조 돤자 임을 인정한다 고백하는 게예요.
신이 없어요 사실은. 그 외에는 아무 신이 없어요. 온당한 기독교적 실론이다 이말이예요.
그래서 이 고린도 교회의 강한자들 바로 신학적 지식을 가지고 있는 자들 이 사람들이 신학적으로는 옳아요.그런데 불행히도 7절에 그러나 이 지식은 사람마다 가지지 못하여 어떤이들은 지금까지의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서 우상에 대한 제물로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
모든 사람들이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한 분 여호와 아버지 한 분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고 주는 한 분 예수 그리스도 그의 아들 이라는 지식, 그 외의 모든지식 이른 신들이라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이 지식을 모든 사람들이 다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가지고 있으면 문제는 간단하다.그러나 그렇지 못하다.
1절에 인용된 고린도인들의 강한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1절에 뭐라고 했느냐 하면 우리가 다 지식을 가지고 있다. 고린도인들의 강한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모든 사람들이 이 지식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다.
우상이 영적인 힘을 가진 것으로 실제로 믿어 온 사람들 중 그리스도인이 된 뒤에도 그 생각을 계속 가지고 있어서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도 실제로 종교적 또는 영적인 의미가 있다고 보는 자들이 있다 이말이예요.
이들을 바울은 약한자들이다 칭해요.왜냐하면 그들은 양심이 약하고 소심하고 초조해 하며 근심하는 자들이예요.
신학적으로 아직 지식을 가지지 못한 자들이예요.
그래서 이 우상이 실제로 있는 줄 알고 그것에 대해 두려움을가지고 있고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오는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에요. 늘 마음에 거리낌을 가지고 근심하고 초조해 하는 이런 사람들이예요.
우상이 제물을 먹는 것은 그들의 양심에 어긋나는 것이예요.
그러므로 그것을 먹는 다면 그들의 양심은 더러워진다. 이것은 어리석은 지식의 부족에서 오는 것이고 소심증이어서 바울은 그것 자체를 잘하는 일이라고 칭찬하지 않아요. 저도 옹호하지 않아요. 그건 분명히 신학적인 지식이 부족해서 오는 것이고 복음의 자유를 제대로 터득하지 못해서 오는 것이고 그것 자체가 좋은 것이라고 바울은 칭찬하지 않아요. 여기 칭찬하는 말이 있습니까? 없어요.
8절에 바울은 다시 고린도인들의 구 한마디를 인용해요.
식물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지 못한다.
이것은 고린도인들의 우회예요.“” 안에 써야 해요. 식물이라는 것은 먹고 마시는 것,먹는 음식, 마시는 것, 다시 말해서 음식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지 못한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음식을 가려 먹는 다고 해서 하나님께로 부터 상 받게 되는 것도 아니고 그렇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께로부터 심판 받는 게 아니다 라는 말이예요.
그게 지금 고린도인들의 우회예요.
이게 예수님의 가르침이죠.마가복음 7장 15절을 누가 읽어 보겠습니까? 누가 읽어 보세요.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 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게속하세요. ‘사람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예수께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음식을 가리고 그릇을 닦고 손을 닦고 이 정결을 무시해 버렸죠.
이 정결의 예는 유대인들에게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성전안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하게 하는 자격을 갖추는 예, 그러니가 그것은 원래 래비 법에 의하면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들에게만 주어진 법이었는데 바리새인들의 신학에 의하면 유대 민족 전체가 출애굽기 19장 5절에 의해서 제사장의 민족이다. 제사장 나라다,그래서 성전에서 제사 드리는 제사장들만이 아니고 이른바 평신도들 , 모든 유대민족 구성원들이 함게 스스로의 몸을 정결케 하고 손을 씻고 목욕을 하고 그릇을 닦고 음식을 가려 먹고 아렇게 해야만 하나님 앞에 나아 갈 수 있다. 그래서 성전에서 제사를 하고 하나님의 잔치에 참여하고 하나님과 교제 할 수 있다.
그런데 예수께선 그런 걸 다 무시해 버렸다고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도 그런걸 무시 해 버렸어요. 그래서 시비가 붙은 거죠. 그러니까 예수께서 지금 이 말씀을 하시는 게예요. ‘밖에서 우리 몸 속으로 들어 가는 것이 우리를 더럽게 하는 게 아니고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 우리를 더럽혔다고요. ’우리 속에서 나오는 것이 우리를 더럽힌다.‘
이게 아주 알쏭 달쏭한 말이예요. 문자 그대로 옳은 말이죠.
여러분들이 채소를 먹는다든가, 고기를 먹는다던가 수돗물 한 방울 마신다는 것이 우리를 더럽힌다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우리의 위에서 소화되고 창자를 통해서 나올때 그것이 우리를 더럽힌다는 거지.
예수님은 이것을 하나의 비유로 삼은거죠.
무슨 음식을 먹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고 없고가 아니고 진정으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 될거냐 안 될거냐 한느 것은 우리의 심장에서 나오는 그생각, 우리 심장이 하나님 앞에 바른가, 이웃에 대해 올바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아니면 우리 심장에서 하나님을 불신하고 불순종하고 이웃을 증오하고 무시하고 , 그것이 다 어디에서 나와요.밖에서 우리 속으로 들어 간게 아니라 우리 심장에서 나온 것이거든.그것이 우리를 더럽히는 거지 음식 그것이 우리를 더럽히는 게 아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구약의 법의 해석은 문자에서 문자적으로 법을 지키는 바리새인들을 비판하면서 그 문자가 비판하는 정신으로 들어 가는 거예요.
그 정신은 항상 도덕적인 거예요.
예수님께서 그렇게 가르쳤어요. 그래서 제자들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선다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순종하며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지 손을 씻고 음식을 가리고 문자적인 법을 지키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그런 가르침을 지금 바울이 여기서 그대로 가르치고 있는 거예요.
고린도 교회에도 원래 바울에게서 이것을 배워 그대로 구원을 닦고 있는 거예요.
음식이 우리를 하나님 앞에 천거 한 것도 아니고 하나님 앞에 벌 받게 한 것도 아니다. 우리가 먹은 것과 관계 없는 것이다.
그 말 자체는 옳아요.
이게 그리스도인의 자요예요. 복음의 자유, 복음이 우리에게 주는 자유, 그런데 요 구에서 아마 고린도인들은 그러니까 우리가 음식을 가려 먹는다고 해서 칭찬 받는 것도 아니고 그렇지 않다고 해서 심판 받는 것도 아니니까 아무거나 먹어도 괜찮다.
지금 고린도 교회의 금욕주의자들, 열심히 음식을 가리면서 애를 쓰는데 그렇다고 해서 너희들이 나을 게 없다. 최후의 심판대에서 하나님으로 부터 조금 더 상 받고 그런거 없다.
도리어 그것을 생각해서 지금 맛있는 음식이 여기 있는데 안 먹으면 그 당시 고기 먹기가 힘들었다고 했죠, 여기 지금 아프로디테 신전에서 큰 잔치가 벌어져 있는데 고기가 막 쏟아 지는데 그것을 얻어 먹으면 좋을텐데, 아 여러분들 음식 가린다고 안 먹으면 너희들만 손해야, 그렇게 결론을 내린거예요.
이 고린도인의 강한자들은 바울은 그 역도 성립한다는 거예요.
그것은 그렇다고 해서 음식이 우리로 하여금 가려 먹는다고 해서 하나님으로 부터 상 받는 것도 아니고 그렇지 않다고 해서 하나님으로 부터 심판 받는 게 아니니까 너희들이 막 먹는다해서 그게 이로울 게 뭐 있냐? 그말이예요.
먹지 않는다고 해서 손해 없고 먹는다해서 이익 볼게 하나도 없고, 이렇게 바울은 고린도인들과 정반대의 결론을 내리고 있어요.
8절에 다시 바울은 고린도의 구호를 인용해요.
‘음식은 우리르 하나님 앞에 세우지 못한다.’ 즉 음식을 가려 먹는다 해서 하나님께로 부터 상 받게 되는 것도 아니고, 그렇지 않다고 해서 하나님으로 부터 심판 받는 게 아니다. 이 구호된 그것 자체로는 옳다. 궁극적으로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오는 거다. 여기서 고린도인의 강한자들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을 것이다.
곧 우리가 우상의 제물을 먹는다고 해서 우리의 그리스도인적 신분이나 자유를 좀 더 잃는 게 아니다. 또 약한자들 같이 안 먹는 다고 해서 무슨 이익을 보는 게 아니다. 그러니까 만들어 먹어도 된다.
바울은 이에 동의하면서 여기 그 반대, 그 역도 성립됨을 말하면서 고린도인들의 강한자들을 교정하기 시작해요.
너희들 주장대로 음식을 먹는다 해서 크게 이익 되는 게 없고 잠시 육신을 기쁘게 해 줄지는 모르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음식을 만들어 먹는다 해서 상 받는 것도 아나고 또 음식을 가린다 해서 하나님으께 꾸지람 받는 게 아니니까,손해 보는 게 없다. 바울은 그 역도 성립한다. 이렇게 말하면서 이제 9절부터 교정하기 시작해요.
‘그런즉 너희 자유함이 약한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강한자들이 우상의 제물을 먹는 권리,또는 자유가 약한자들의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된다. 어떻게 걸림돌이 되는가. 약한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양심에 어긋나게 행동하게 함으로써 걸림돌이 되는데, 그 자세한 것은 10절에서 바울이 부연하고 있어요.
‘지식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약한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어찌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다, 하는 지식있는 강한자가 즉 아프로디테 신전에서 베풀어 지는 잔치에 앉아서 고기를 열심히 먹었다고 봐요. 그는 신을 섬기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한 하나님, 한 주 밖에 안 계시니 나무로, 돌로 만든 저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 지식에 근거해서 당당히, 자기 양심에 아무 거리낌이 없이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누리면서 음식을 먹는거예요. 그런데 약한자가 아직도 우상의 실체가 있는 것으로 관습적으로 생각하는 약한자가, 자기 교회의 한 형제가 우상 신전에서 벌어지는 큰 잔치에 앉아서 먹고, 마시고, 즐겁게 지내는 것을 보고 스스로를 설득하는 거예요. 진짜 하나님은 한 분이시지,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지, 그래서 담력을 얻어요.
혼자 여기 참석치 않다가는 우리의 직업 공동체,‘길드’, 가령 텐트, 천막 만드는 사람,그 직업에 속하는 모든 사람들이 신을 모시는 신전에서 큰 잔치를 하는데 나만 소외되면 직업에서 손해를 볼 것이고 이웃간에도 따돌림을 받을 것이고, 굉장히 불편 할것이다. 그런데 한 형제가 저기에서 잘 어울리고 잘 노네. 사실 그 사람이 맞잖아 . 우리는 한 하나님, 한 주 고백 하니까, 어찌 생각하면 저 우상 저것 아무것도 아나잖아. 하면서 스스로를 자꾸 설득해서 없는 용기를 내서 자기도 거기에 슬며시 동참한다구요.그러나 그 순간부터 그 사람은 마음의 양심에 거리낌이 생겨서 ‘우상 숭배에 동참하지 않았는가?’, ‘우상에 바쳐진 제물에는 우상의 마력이 작용할텐데, 내가 저걸 먹었으니 내게 무슨 액이 오지 않을까? 내 건강이 내 가족이, 내 집안에 액운이 오지 않을까?’ 이 소심한, 초조해 하는 양심이 거리낌을 느끼게 되고 불안하게 된다. 이것을 바울이 이 사람의 야심이 더럽혀진다. 그렇게 말한거예요.그 양심이 상함을 받게 되요. 그래서 이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평화 대신에 불안을 받게 되고, 자유 대신에 속박을 받게 되고, 이렇게 해서 더 불안한 상태에 빠져 버린다는 거예요.
그래서 바울이 11절에 뭐라고 합니까?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아주 강한 말-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네 지식으로 그 약한자를 용기 북돋케 해서 그로 인해 양심에 반한 행동을 해서 결국 이런 어려움을 당하게 하니 그 얼마나 큰 문제냐? 그 얼마나 큰 문제인가를 강조하기 위해서 바울은 그 형제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자 아니냐. 이렇게 말해요. 이 형제의 가치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어요.
오늘 우리는 인권을 논 할때에, 그리스도인의 인권을 논 할때에 각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원 받았음을 그 인권사상의 기본으로 삼고 있어요.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띠는 것이기 때문에, 그의 인격이 존중되어야 하는, 어떤 인간을 죽이는 행위는 하나님에 대한 도전으로, 그렇게 창세기 1장 26절, 27절 하나님이 그의 형상으로 인간을 지으셨다는 기독교 성경의 창조의 교리는 유대교, 기독교 인권사상의 기본이예요.
그런데 우리 신학에 와서 인권사상에 하나 덧붙여지는 요소가 이거예요. 인간이 어떤 존재냐. 하나님이 그의 형상으로만 지어진 존재가 아니고 그 인간을 위하여 그 인간이 죄인이지만, 하나님의 원수이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서 자기 자신을 내 주셨다. 그런 값진 존재, 그래서 모든 인간이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내 줄 정도의 사랑의 대상이라는 사실, 그것이 또 기독교적 인권사상의 또 하나의 신학적 기반이 되는 거예요. 신학에 덧 붙여 지는 거예요. 바울이 그 말을 하고 있어요.
너희 직업,시원찮게 보이고 똑똑해 보이지 않는 직업에 종사하는 것 같아서 너희가 마음대로 무시해도 괜찮으냐? 그럴지 않고 그가 어떤 사람이냐? 바로 그리스도가 그를 위해서 죽은 그런 값진 존재라는 것, 그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 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내어 주실 정도의 사랑의 대상이라는 것, 그런 사람을 네가 함부로 손상해서 되느냐?
‘이 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였으니.’ 이말은 11절 후반부에서 나오는 말이죠.
그리스도께서 그 형제를 구원하시기 위해 죽으셨고, 자기 목숨을 내 줌으로써 그 형제의 목숨을 샀다. 이말이예요. 그런데 그 형제를 다시 고난 가운데 빠지도록 하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행패와 자신의 지시과 그것에 근거한 자유의 무분별한 행사는 형제를 헤칠 수 있어요. 이것은 형제에 대한 죄이고, 결국 그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에 대한 죄라. 그래서 바울이 13절에 이제 자기의 모범적인 결단을 말하죠. ‘그러므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 바울은 자신의 자유를 형제의 이익을 위해 스스로 제한 할 준비가 돼 있다. 영원히 제한 할 준비가 돼 있다고 바울이 말하고 있어요.
자 이제 8장의 내용을 세 마디로 요약하면,
첫째,우상의 실제와 우상의 제물을 먹는 자체에 대해서는 바울은 동의해요. 이 점 상당히 중요해요. 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복음의 자유를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래서 그리스도인 일수록 소심하고, 더 불안해 하고 더 초조해하고, 그런 사람들이 많아요. 그런데 바울은 그런걸 잘한다고 칭찬하지 않아요. 여기 지금 약한자들이 잘한다고, 그 사람들이 옳다고, 바울은 일체 칭찬하지 않아요. 우리가 올바른 신학적 지식을 가지고 그 지식에서 사물에 대한 올바른 판단을 하고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주신 자유를 누리는 것이 옳아요. 그래서 이웃들이 보고 진정으로 자유가 있구나, 진정으로 그리스도 안에 평화가 있구나, 그러므로 나도 그리스도가 어떤분인가, 어째서 그를 믿으면 진정한 자유와 진정한 평화가 있는가.나도 좀 그리스도에 대해서 알아 봐야겠다. 이렇게 우리들의 그리스도의 평화,진정한 자유가 이웃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에 대해서 호기심을 일으킬 정도가 돼야 해요. 그리스도를 선전하는 요과가 있어야 해요. 우리 삶이 이게 잘못되면 실제로 우리 한국에서 그렇듯이 그리스도인이 진정한 평화, 진정한 자유를 누린다고 말로는 그러는데, 성경에는 그렇게 써진 모양인데, 실제 우리 한국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을 보면 더 안절부절하고, 더 부자유하고, 더 소심하고 살 맛 안나게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이 자유없는 고린도인의 약한자둘과 같은 삶이, 그리스도에 대한 선전효과를 일으키는 게 아니고 오히려 역효과를 내는 경우가 많아요.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
원칙적으로 바울은 지식을 가지고 ,원칙적으로, 신학적으로 바울은 동의해요.그러나
두번째, 지식은 사람을 방자하게 할 수 있고 그것에 근거한 자유는 형제를 헤칠 수 있음이라. 이게 똑같이 중요해요.
우리의 지식과 그것에 근거한 자유가 이웃을 해칠 수 있음도 인정해야 한다. 인식해야 한다. 그래서 교회의 공동체를 세워 올리는데 하나님의 거룩한, 그리고 의롭고 사랑이 풍성한 백성의 공동체로 세워 올림에 장해가 있음을 바울이 지적하고 있어요.
그래서 세번째, 그리스도인은 자유를 형제에 대한 사랑으로 제한 할 수 있음을 바울이 역설하고 있어요.
자신의 자유를 이웃, 그러니까 약한자들에 대한 사랑으로 제한 하면서 교회를 세워 올려야함,우리말로 옛 번역으로는 교회의 덕을 세워야 함을 바울은 제시하고 있어요.
이 장에서 제시된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교회를 세우는 사랑에 의거해 사용해야 함에 대한 원칙을 오늘 우리 교회에서 강한자와 약한자가 대립하는 문제들에 적용해 봅시다.
저기 스위스 정신과 ‘볼트니에’ 라는 의사가 있죠. 그 사람이 신학적 통찰력과 심리학, 정신의학적 통찰력을 종합해서 좋은 책들을 많이 썼어요. 평신도들이 읽을 만한 책들을 많이 썼어요. 제제바 의사인데 영어로 번역되어 불어권 뿐만 아니라 영어권에도 항상 베스트셀러예요. 이 사람의 책 중에 ‘강한자들과 약한자들아’ 라는 책이 있어요. 바로 이 문제를 다룬 책이에요. 왜냐하면, 어느 교회나 어느시대나 항상 강한자들과 약한자가 있어요. 어느 이슈에 대해서나 신학적인 올바른 통찰력을 가지고, 지식을 가지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를 높은 가치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강한자들이 있고,어느 시대 어느 교회나 구체적인 삶에서 제시되는 문제에 대해서 신학적인 통찰력이 좀 적은, 없거나, 아니면 관습적으로 내려오는 옛 생각을 , 극단적인 보수적인 생각에 사로 잡혀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유를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고 누리지 못하고 초조해 하는 이 약한자다. 어느 교회에나 있어요. 이런 강한자들과 약한 자들이 하나의 그리스도 교회 내에서 어떻게 강한자들은 올바른 지식과 올바른 지식에서 나오는 지식을 약한 자들에 대한 사랑으로 제한해서 써야 하며, 약한자들은 어떻게 자기 약한 양심을 조금 부족한 신학적 지식을 절대 기준으로 삼아서 이른바 강한자들을 신앙이 없느니, 세속화 됐느니, 세상적이니, 이렇게 비판하지 말아야 하는가.
어떻게 강한자들은 약한자들을 무시하지 않고, 지식도 없고 자유도 없으면서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그래, 이렇게 강한자들은 약한자들을 무시 하지 않고 약한자들은 강한자들을 비판하지 않을까. 어떻게 해서 하나의 공동체로 올라 갈 수 있는가? 이런 것들에 대한 아주 현실적인 것을 관찰하는 좋은 책이예요.옛날에 읽어서 자세한 내용은 다 잊어 버렸지만,한국말로 번역되었으면 한번 읽어 보십시오.
그런데, 우리 한번 좀 토론 해 보십시다. 우리 교회도, 우리 영동교회도 좋고,한국 교회 전체도 좋고, 지금 내가 예로 든 제사,술, 담배,주일 성수 방법, 사치스런 삶, 그 외 다른 이슈들이 많이 있겠죠. 그런데 제일 앞에 든 제사, 이 문제는 10장까지 공부한 뒤에 토론 합시다. 왜냐하면 바울이 지난번네 아웃트라인을 설명한 것같이 이 문제는 10장까지 계속해요. 9장에서 자신의 사도적 권리와, 사도적 권리를 교회 전체를 위해서 포기하는 강한자 입장에서 바울 자신이 예로 자기 자신의 삶을 하나의 예로 든 뒤에, 10장에서 이 문제를 계속해요.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어야 하나, 신전에서 열리는 페스티벌에 참여해도 되나,그리스도인의 이웃집에 초청 받아 갔을 때 음식이 나왔을 때 어떻게 해야되나, 그런 일체의 문제를 10장에서 계속하니까, 그 문제는 10장을 공부한 뒤에 제사를 어떻게 봐야 하나,우리 그리스도인이 어떠한 태도를 가져야 할 것인가,이것에 대해 한번 토론 해 보겠어요.
그런데 우선 여기서는 술 마시고 담배 피우는 것,주일 성수 방법, 주일을 어떻게 지켜야 옳게 지키는 것인가, 이 두가지만 가지고 강한자, 약한자,강한자는 어떻게 해야 한다 그러고,약한자들은 어떻게 해야 한다고 그러고, 지금 어떻게 우리 교회 내의 의견이 있고, 아니 꼭 우리 영동교회만이 아니고 한국교회 전체를 한번 생각해서, 그러면 이 바울의 8장의 가르침에 근거해서, 어떻게 해야 온당한 그리스도의 태도인가. 한번 토론 해 봅시다. 10분 정도만, 여러분들 구체적으로 부딪히는 문제 아닙니까? 적어도 형제들은 날마다 술,담배 문제, 사업 하시는 분들은 술 문제에 부딪힐거예요. 이야기 해 보세요.
지금까지 늘 고민으로 생각했던 거라든지, 아니면 그런 고민을 통해서 터득한 지혜라든지, 있으면 한번 이야기 해 봅시다. 성경 공부가 구체적으로 우리 삶의 도움이 되야 될거 아닙니까?
아까 음식이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지 못한다, 지금 여기 8절, 이게 옳은 말입니까? 아닙니까? 예수님의 말씀, 마가 복음 7장 15절의 말씀, ‘밖에서 우리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우리를 더럽히는 게 아니고 우리 속에서 나온 것이 우리를 더럽힌다’는 말이 옳은 말입니까, 아닙니까. 옳은 말이죠. 술,담배에 적용하면 무슨 말이예요. 네,
할 말 없습니까?
제가 미국에 있을 때, 거기는 2주 마다 한번씩 월급을 줘요, 교수들에게,그러면 이제 은행으로 들어가고 명세서만 봉투로 온다고요. 그 때마다 다니는 대학 제정 담당 부처장이 항상 몇 마디 써요. 그런데 한번은 무슨 말을 썼냐 하면, 85년 입니다. ‘뉴 일글런스 저널 오브 메디슨’ , 아주 유명한 의학 전문지 예요.거기 난 의학 보고서를 결론만 요약해서 거기 실었어요. 하루에 술을 한잔 마시면, 'onE DRINK', 서양 사람들의 개념이 있어요, 가령 맥주 같은 약한 술이면 어느 정도, 와인은 어느 정도고, 강한 술이면 어느 정도고 이게 있다고요. onE DRINK' 하면 무슨 말인 줄 알아요, 그사람들은. 그러니까 한잔의 술을 매일 마시면 전혀 안 마시는 사람들보다 심장병 걸릴 확률이 1/3로 줄어요. 그러나 하루에 석 잔 이상을 마시면 심장병 걸릴 확률이 3배로 늘어요, 안 마시는 것보다. 그러한 의학 보고서를 싣고는 그러니까 여러분은 하루 한잔씩 술을 하라.
그 대학는 화란계 아주 훌륭한 대학교예요. 고신대 신학 대학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거기서 배우고 오는데,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우리 한국 장로 교회에 크게 영향을 신학의 두 개가 미국계가 있고, 화란계가 있는 데 미국계도 그렇고 화란계도 술을 많이 마셔요. 금연, 금주 운동이 청교도 운동에서도 시작 하지만 그보다는 19세기 감리교에서 시작하는 거예요. 그래서 미국에서 음주가 굉장히 문제시 되어, 미국 법이 술을 전혀 못하도록 금세기 초에 그런 일이 있었어요.
그런 전통이 우리 한국에 와서 지금까지는 상당히 공헌을 했어요. 옛날에 우리 한국의 농경사회에서 패가 망신하는 원인들이 도박하고 술 마시고, 축첩하고 이런 것들이 한국 남자들의 패가 망신이고, 중국 사람들이 거기에 아편이 하나 더 들어 갔죠. 우리 복음이 이땅에 금주,금연 운동이 함께 들어 와서, 일체 그런걸 금 한것이 상당한 공헌을 한 거예요.건전한 기독교 문화를 위해서 상당한 공헌을 한 거예요.
그런데 율법이 되어 있어요. 그리스도인은 일체 술 마시면 안됨, 담배 피우면 안됨, 그것에 대한 합리적인 토론, 술이라는 것이 정말 건강에 좋지 않다, 아까 말했듯이 술을 하루 세잔씩 마시면 그렇지 않을 때보다 심장병을 일으킬 확률을 세배로 늘인다 말이예요. 담배는 계속되는 연구가 더욱 더 확실히 보여 주듯이 백해무익한, 더욱 나쁘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게 건강에 좋다, 나쁘다,오늘 우리 경건 훈련에 좋다, 나쁘다, 이런 논리적인 근거를 대면서 이건 나쁘니까 하지 말아야 된다,이런 판단 전에 아예 법으로 정하여 하면 안된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 사업하시는 장로님들, 또는 집사님들, 많이 앉아 계시는 데, 차라리 우리 같은 사람은 편해요. 사업을 안하니까.
그런데 이런 분들은 사회에서 노상 이 문제에 부딪친다 이거예요. 아까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이 자기들이 ‘길드’, 직장 조합에서 해마다, 가령 10월15일에 천막 만드는 사람들이 신전에서 제사하고,잔치를 한다 말이예요. 거기에 참석 안하면 직업에서 소외되고, 사업적으로 많은 손해를 보고, 이런단 말이예요. 우리 그리스도인들, 비지니스맨들, 가령 술 집에서 술을 마시고 사업을 하지 않으면 손해를 본단 말이예요. 그래서 이게 늘 부딪치는 문제예요. 여러분들 부딪치는 문제, 그래서 한번 좀 생각 해 보시라구요.그러면 안된다 하는 율법 때문에 그런게 아니고 이 본문 근거해서 ‘먹여주는 음식을 하나님 앞에 세우지 못한다’, 그 뒤에 있는 예수님의 말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우리를 더럽히는 게 아니고 밖으로 나오는 음식이 우리를 더럽힌다’, 우리가 뭘 먹고 마시고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우리 속에서, 우리 심장에서 나오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 이웃에 대한 사랑, 아니면,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 이웃에 대한, 이웃을 무시하고, 이웃을 증오하고, 이런것이 우리를 더럽히는 거다. 이 말을 근거로 해서 우리가 술 마시고 담배 피우는 걸 어떻게 생각해야 되나. 그런데 우리 한국 교회의 오랜전통상 이런 걸 하면, 심지어 대한 예수교 장로회의 꽃인 영동교회 장로 양반이 지금 술집에 앉아서 술을 마시고 있는 걸 아무개 박집사가 보고는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더럽히는 게 아니고 나오는 것이 우리를 더럽힌다고 했지, 맞지,맞지,’ 하면서 장로님 옆에가서 ‘나도 한 잔 하겠소’ 하면 어떻게 되겠어요. 그 사람이 어떻게 된다고요, 그 사람이 멸망한다고, 멸망한다고. ‘네 자유로 네 형제가 멸망하니 그 형제가 어떤 형제냐.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을 뿐만 아니라, 어떤 형제, 그리스도가 그를 살리기 위해서 죽었는데 너느 그를 죽이는 구나.’ 양쪽에 아규먼트가 있어요. 이 이슈를 가지고 토론 해 보세요. 교회내에 강한자는 없는지, 혹 약한자는 없는지, 어떻게 강한자는 약한자를 무시하지 않고 약한자를 고려하는 사랑으로 자기의 지식과 자기의 자유를 제한해야 되는가, 반면에 약한자는 , 우리들 중에 약한자가 있다면, 자기의 약한 양심을 마치 그것이 하나님의 법이나 되는 양 절대화하지 말라는 말이예요. 그래서 자기와 달리 생각하는 사람을 무조건 비판하지 말라, 이말이예요.약한자를 무시해서는 안되고, 약한자는 강한자를 비판해서는 안되고 그것이 교회를 세우는 거예요. 내가 한 이슈를 가지고 말하는데, 주일 성수 방법에서도 그렇고,이른바 사치스런 삶에 대해서도 그렇고, 우리가 많아요. 요새 우리 젊은 여자 아이들이 미니 스커트를 많이 입는데, 미니스커트도 이 문제가 될 수 있겠어요. 생각해보니. 그리스도인의 딸들도 치마를 저렇게 엉덩이까지 올려서 입어야 되는구나? 그래서 되는거야. 약한자들의 생각은, 강한자들의 생각은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아름다움은,모든 진실 한것은 다 하나님의 지으신 것, 그래서 내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내 스스로 즐기고 남으로 하여금 즐기게 하는데 뭐 당신은 창조의 진리도 몰라요, 소심해서 안된다고, 약한자를 무시해요.미니스커트를 가지고 자매님들 여전도회에 거셔서 토론 해 보세요.
자 그럼 오늘 거기까지만. 그리고 각자 자신이 강한자에 속하는지 약한자에 속하는지 어떤 이슈에 따라 달라지겠죠. 한번 좀 곰곰히 생각해 보세요. 찬송가 410장 부르겠습니다.


28번 오늘은 고린도 전서 9장 공부입니다.
9장 전체가 하나의 주제 이므로 오늘 물론 다 할 것입니다.
1절 부터 끝절 까지 읽겠습니다.제가 읽겠습니다.
내가 자유자가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도니 나의 사도 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
나를 힐문한는 자들에게 발명 할 것이 이것이니
우리가 먹고 마시는 권이 없겠느냐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자매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이 없겠느냐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이 없겠느냐
누가 자비량하고 병정을 다니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실과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 떼를 기르고 그 양 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
내가 사람의 예대로 이것을 말하느냐 율법도 이것을 말하지 아니하느냐
모세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전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 된것이니 밭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 즉 너희 육신의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을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 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을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라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을 모시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는 것을 너희 는 알지 못하느냐
이와 함께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
그러나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 또 이말을 쓰는 것은 내게 이같이 하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차라리 죽을 지언정.... 누구든지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 할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내가 내 임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임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직분을 맡았노라.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인하여 내게 있는 권을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 이로라.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된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자들에게는 내가 약한자와 같이 된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 인 줄을 너희는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캍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은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 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이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8장에서 바울은 자유, 그리스도인들의 그리스도안에서의 자유와 사랑의 올바른 관계를 역설 했어요.그 원칙을 8장에서 바울은 밝혔어요.
이제 바울은 사도직 수행에 있어서 자신의 모범을 예로 들어서 거기 자신의 가 빠졌어요,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사랑의 의무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어요.
9장 전체가 바울이 자신의 사도직 수행을 하나의 예로 든것이죠,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사랑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서.
바울은 사도로서 교회로부터 생계비를 받아 살 권리와 자유를 가졌어요. 그러나 그는 교회를 위해서 그리고 복음의 효과적인 선포를 위해서 이 권리 또는 이 자유를 스스로 포기했어요. 그러나 이 권리의 자발적인 포기를 고린도에 침투한 거짓 사도들과 그들의 영향을 받은 고린도인들은 바울의 사도직의 결함의 증거로 왜곡 해석했던 것 같아요.
이것은 특히 고린도후서 3장,특히 고린도 후서 10장에서 13장까지 보면은 확연히 들어나요. 고린도 전서를 쓸 당시에 벌써 바울의 사도직에 대한, 사도적 권위에 대한,회의가 고린도 교회의 일부에 일었는데,그바울의 사도적 권위를 회의한 이유들 중 하나는 바울이 추천장이 없어요. 예루살렘 사도들의 추천장, 요새 말로하면 학위증이나 증명이 없어요. 또 하나는 바울이 이 교회로 하여금 자기의 생계를 담당하도록 요구하지 않아요.그런데 나중에 바울을 적대하는 고린도후서10장에서 13장까지의 초급사도들이다 냉소하기도 하고 또 거짓 사도들이다 말하기도 하고 사단의 사자들이다, 욕하는 이 바울의 적대자들의 고린도 교회의 침투하에서는 예루살렘 사도들의 추천장, 편지를 내 보이면서 이것이 우리 사도됨의 객관적 증거다. 또 사도는 마땅히 엄청난 영적 체험, 환상을 보고, 예언도 할 수 있고, 특히 사람들을 현혹하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병자들을고치고, 이런 일도 할 수 있어야 되고, 물론 족보도 좋아야 하고, 유대인으로써 히브리 인으로써 족보도 좋아야 하고, 예루살렘 교회와 좋은 관계가 있어야 되고,그런 사람들이 사도인데, 그런 사도는 당연히 교회로부터 자신들의 생계를 부양하도록 요구 할 수 있는 그런 권위를 가져야 된다.
바울은 사실 우리 교회 전체가 인정하는 사도가 아니기 때문에 물론 추천장 하나도 내 놓을 수 없었지만 그러기 때문에 자기가 다맥시도상에서 그리스도를 만나서 자기가 사도로 소명 받았다고,그리고 복음을 개시 받았다고 해서,여러분들에게 와서 복음을 전파하고 교회를 세웠지만 사실은 우리가 다 인정하는 사도가 아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에서 안수증, 추천장 하나 받은 것 없지 않느냐.바울이 바로 그와 같은 약점이 있기 때문에 자기의 사도직에 결함이 있기 때문에, 우리 사도가 다 누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준 특권, 곧 복음 선포자는 복음으로 말미암아 생계를 얻으라는 이 특권을 누리지 못하고, 여러분들에게 감히 자신의 생계를 부담하도록 요구하지 못하고, 지금 저 아골라 부리골라 천막에서 자기 손으로 일하면서 무슨 노동자 같이 무슨 노예같이 일하면서,생계를 벌어서 복음을 선포하지 않느냐.
아무리 말로 사도라 주장하지만,자기 사도직에 결함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이렇게 지금 바울을, 바울의 사도직에 대해 공격을 한거예요.
거기 고린도인들이 굉장히 혹 했어요. 고린도인들이 이런 점에 있어서 우리 한국인들과 비슷했어요. 이점에 있어서
혹해서 바울의 사도직에 대해서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여기서 한편으로는 자기가 사도로서 권리가 있지만 교를 위해서, 다시 말해서 사랑의 선포를 위해서,자기 권리를 포기한 그것을 말해요.
그래서 지금 8장에서 시작한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사랑의 관계를 자기의 모범을 들어서 설명을 해요.
하면서 동시에 자기의 사도직에 대해서 변명하는 두 가지의 동기를 바울이 동시에 고린도전서 9장에서 추구하고 있어요. 그래서 고린도 후서에서 특히 잘 볼수 있는 바울의 사도적 자기 이해,바울의 입장에서는 어떤 사람들이 진정한 주의 종이고, 어떠한 자세로 교회를 섬기는 자가 진정한 목회자인가?
그것을 우리는 고린도 후서에서 특히 잘 볼 수 있는데 그것의 첫 맛을 우리는 고린도 전서 9장에서 볼 수가 있어요. 이 문제는 우리에게 항상 있어요.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항상 진정한 주의 종과,거짓 종, 구약시대에 말하면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 예르미와와 지금 하나님께서 바르노니아에 있으라 해서 심판화 되는마당에 그 심판의 메세지를 전한 참 선지자 예르미와와,반대로 그 당시의 사람들이 좋아했던 평화,평화,평화의 거짓 메세지를 전한 거짓 선지자들과 이 구약에서는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들의 대립이고, 우리 신약에서는 참 사도와 거짓 사도의 대립, 오늘 우리의 교회에는 진정한 주의 복음의 선포자,진정한 주의 종, 진정한 목회자와, 거짓으로 주를 선포하고 거짓으로 주의 양떼들의 돌보는 목회자들과 항상 대립이 있어요.
이 가운데 과연 우리가 어떤 사람들의 진정한 주의 목회자로 알아 보고 그런 사람들을 존중히 여기고, 그런 사람들이 주의 일을 잘 할 수 있도록 돕고,하는가를 중요히 여기고 그런 사람의 메세지에 따라 가르침에 따라 이 시대 하나님의 종으로 거룩하게 풍성한 사랑으로 주를 섬기면서 사는게 아주 중요해요. 역으로 말하면 어떻게 우리가 거짓사도,거짓 선지자, 거짓 주의 종을 알아 볼 수 있고 어떻게 그런 사람들의 메세지를 우리가 될 수 있으면 피하고,그래서 그런 사람들이 오도함에 따라 하나님의 백성중에 해서는 안되는 일들을 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마땅히 살아야 할 바를 하지 못하는 그런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 아주 중요해요. 그래서 고린도 전서는 특히 여기서는 목회자의 자기 이해, 진정한 목회자의 상에 대한 연구에 아주 중요한 부분인데, 특히 고린도 후서가 그래요.그것의 첫 맛을 여기 고린도 전서 9장에서 벌서 보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래서 바울은 첫 째로 그가 진정한 사도임을 강력히 주장해요. 첫 문장부터 자신이 진정한 사도임을 강력히 주장함으로 본 장을 시작해요.그리고는 둘째로 자신도 사도로서 교회로 부터 생계를 받아 살 권리를 가졌음을 증명하고, 3절에서 15절까지 바울이 여러가지 인간적인 예를 들면서 구약의 가르침을 들면서 마지막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을 예를 들면서, 사도로서 자기가 교회로 부터 생계비를 받아서 살 권리를 주장해요.여러분들 너무나 되풀이가 많을 정도로 길게 바울이 그걸 논증해요.
셋째로 자신이 그 권리 포기는 자신의 사도로서의 결함이 있어서가 아니고, 사랑을 위해서 자발적으로 함이요,그것은 누구에게 메인 바 되지 않은 자유로운자로서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효과적으로 선포하기 위해서라고 논증을 해요. 19절에서 23절 까지.
마지막으로 바울은 24절에서 27절까지 자신의 절제있는 사도직 수행의 모범을 요약하여 10장에서 그가 발할 강한자들에 대한 경고를 준비하고 있어요. 지금 9장의 구조가 그렇게 되어 있어요. 지난번 8장,9장 10장이 연결된 장으로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는가의 문제,먹을 수 있는 자유, 그러나 사랑을 위해서 자제해야 할 경우,이런 것을 지금 8장에서 10장까지 쭉 봐왔는데 그 가운데 9장은 자신의 사도직을 예로 들어서 하고 있어요.
9장 1절에 ‘내가 자유자가 아니냐,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보지 못 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이게 지금 네개의 질문이 연달아 나오죠. 네개의 질문들은 다 헬라 문법에 의하면 긍정적인 답을 요하는 형식이예요. 헬라어에는 부정적인 답을 요하는 질문을 할 때에는 ‘매’ 라는 조그만 말을 끼워 넣고, 긍정적인 답을 요구하는 질문에는 ‘우’ 라는말 또는 ‘우크’라는 말을 끼워 넣어요. 그런데 여기 지금 전부 ‘...아니냐’ 하는 말로 ‘우’,‘우크’라는 말을 넣고 있어요.
그래서 바울이 이 네개의 질문에 대해서 당연히 그렇다.는 답을 요구하고 있어요. 그래서 바울이 첫째로 자기가 자유자라.바울은 자신도 그리스도께서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신 자유를 가졌음을 주장해요. 지난 시간에도 강조하였지만 그리스도인에게 이 자유는 굉장히 중요하죠. 갈라디아서5장 6절, 갈라디아서는 특히, 어떤 사람들은 갈라디아서를 뭐라고 하죠,그리스도인의 자유의 헌장이다.라고 그러죠.
우리 그리스도인이 율법에 얽매일 수 없음,그리스도인이 사단의 세력들,욕심,율법,죄 등의 사단의 세력에 얽매일 수 없음,그리스도인이 주안에서 자유함,그래서 대표적으로 갈라디아서 5장 1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다.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맺지 말라.이게 갈라디아서 전체의 좋은 요약이죠.
갈라디아서가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대헌장이다. 그렇게 말할 수 있어요. 그리스도인이 자유가 없으면 맛 잃은 소금과 같아지죠.지난 시간에도 제가 말하였지만 우리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자유를 누리기 보다는 더 얽매인 모습을 보여서 많은 불신자들에게 그리스도를 선전하는 전도 효과가 나오지 못하고 역효과가 나타난 때가 참 많아요. 불신자들이 그리스도인을 봤더니 말로는 그리스도를 믿으면 참 자유롭고 참 평화를 얻는다 했는데, 그리스도인들 친구를 보면 예수 믿는다면서 더 조마조마해 하고 더 불안해 하고 더 얽매이는 게 많고 이래서 안 믿는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 삶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제대로 나타내지 못하는, 물론 그렇게 되면 개인적인 우리 삶도 굉장히 불행한 것이지만,우리의 전도 효과가 반감 될 뿐만 아니라,역효과가 나타날 때가 참 많아요. 그래서 자유가 상당히 중요하다.
그래서 첫째로 바울이 나도 자유자가 아니냐. 한번 곰곰히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얼마나 자유를 누리는가.
둘째로 바울이 내가 사도가 아니냐. 이 말은 왜 하겠어요. 바울의 사도직에 대해서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바울이 진정한 사도가 아니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아까 말씀 드린대로 고린도 후서 10장에서 13장 까지 가면 진짜로 바울이 사도가 아니라고 주장한 바울의 적대자들의 모습을 우리가 볼 수 있어요. 아마 갈라디 학교에 침투했던 바울의 축배자들도 바울의 사도직과 바울의 복음의 정당성에 대해서 심한 공격을 했던 것 같아요.
바울은 하여간 그의 사도직에 관해서 초대 교회의 특히 예루살렘과 유대에 근거를 둔 유대 그리스도인 쪽으로 부터 많은 도전을 받았어요. 그래서 여기 그 다음 질문은 자기 사도직의 근거를 대는 거예요. 내가 사도가 아니냐. 바울은 어디다 자기 사도직의 근거를 대는 거예요? 내가 예수 우리 주를 보지 않았느냐. 이게 바울의 사도직의 1차적 근거예요.
이것은 고린도 전서 15장 8절에서 좀 더 부연하죠. 15장 한번 보겠습니다. 고린도 전서 15장.
고린도 전서 15장 1절에서 11절까지 제가 빨리 읽겠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로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너희가 만일 나의 전한 그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않았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여기 까지는 서문이예요. 고린도 교회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는데 이제 주예수 그리스도께서 확실히 부활 하셨음,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다 부활의 소망을 갖게 되었음을 길게 논증하는 고린도 전서 15장을 시작 하면서 내가 여러분들에게 제일 중요한 것으로 ,가장 우선적으로 고린도의 교회 개축 할때 선포했던 그복음을 다시 한번 상기 시키겠노라.
3절 후반부 부터 5절까지를 보통 바울이 자기보다 먼저 사도 된자들로 부터, 다시 말하면 예루살렘 사도들로 부터 신실하게 전승받아서 자기도 고리도인들에게 신실하게 전승한, 내가 받고 너희에게 전해 준 언어는 랍비들의 전문 언어예요. 어떤 가르침을,어떤 교리를 신실하게 전승 받아서 신실하게 전승 해 주는 전문언어 인데 그것이 3절 후반부터 5절까지가 그 복음이고,그 다음에 바울이 6절 7절,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셔서 나타나심의 증거들을 두어절 대고, 8절에 다메슥 도상에서 자기에게도,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에도 나타났음을 죽 이야기 한다고요. 쭉 보십시다.
3절 후반부, 복음은 네개의 제목으로 되어 있어요.첫째,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것,우리 말 번역이, 나중에 거기 가면 잘 알겠지만, 번역이 좀 좋지 않아요.4개의 절로 되어 있어요. 둘째로 그가 장사 되었다는 것, 세째로 성경대로 그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 다시 일으킴을 받으셨다는 것,그렇게 무엇 했다는 것 ,끊어야 하는 데 우리 말 번역이 좋지 않아요. 그 다음 넷째로 그가 게바에게 보이시고,나타나시고 후에 열 두 제자에게 나타나시고, 열 두 제자란 사실 열 하나죠, 유다가 빠져버렸으니까, 열 둘 이라는 말은 전문 용어로, 숙어로서 열둘이라는 말을 쓰고,
그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거기까지가 바울이 선포한 복음이예요.
거기 초대교회의 복음의 형식이예요. 그 다음은 괄호예요. 이 오백의 형제,
그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있고 어떤이는 잠들었으며,잠들었다는 말은 죽었다는 말이예요,더러는 죽었지만 태반은 살아 있다 , 이것은 괄호 속에 들어가요.그 다음에 7절은 바울이 또 부활을 부인한 고린도인들에게 설득하기 위해서 자기가 모은,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남에 기록을 여기에 덧붙여요.뭐냐하면,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후에 모든 사도에게와,여기 보십시오. 모든 사도들에게도 보이셨다. 그리고
맨 나중에 여기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자,는 번역이 조금 달라요.맨 나중에 유산된 것 같은 내게도 보이셨다, 나타나셨다.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그러나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그러므로 내나 저희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
여기 8절에서 10절까지는 바울의 자기 사도직에 대한 변명이예요.
왜 이런 변명이 필요하냐,초대 교회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바울의 사도적 요건에 결함이 있어요. 아마 초대 교회의 입장에서 봤을 때 사도적 요건들은 누가가 사도행전 1장 21절 에서 26절까지의 내용을 요약하는 이 두가지였을거예요. 하나는 예수께서 요한,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 받음으로써 메시아직에 취임하셔서 하나님의 나라,메시아 운동을 시작 한 때로부터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고 우리 가운데로부터 하늘로 부터 늘림을 받을 때까지, 예수의 메시아직 감당 전 기간까지,예수와 함께 한 자로서,예수를 따라 다닌자로서, 원래 성경의 이 따라간다는 말은, 제자가 된다는 말의 숙어죠,그 때 예수의 전 메시아 사역 기간동안 세례요한으로 부터 세례를 받아서 ,메시아직에 취임하면서,하나님의 말을 선포한 그때부터 그의 십자가에 못박혀 죽음과 부활까지 예수를 따라간 예수의 제자로서,그러니까 예수의 가르침과 행적에 증인이 될 수 있는 자,요게 하나의 요건이고 ,또 하나는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그 주 예수 그리스도가 구체적으로 사도로 불러서 보낸 사람, 여러분들 내 복음서들과 사도행전에 보면 부활하신 예수그리스도의 나타나신 그 기록들이 있죠. 기록들은 항상 무엇이 따라 가냐하면 이 예수께서 자기가 사도로 부르는 자들은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도록 보내는 그 기사가 따라요. 그래서 이 예수의 부활 출현 기사는 사람들의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있는 게 아니고, 사도로서의 소명과 보냄을,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도록 보냄을 위해서 쓰여진 거예요. 그래서 마태복음 28장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마가 복음 16장 이른바 긴 마가복음 16장이 8절로 끝나버리는 데 그 뒤에 나오는 긴 마가복음의 덧붙여진 부분, 누가복음 24장, 또는 사도행전 1장 8절, 요한복음 20장, 어느곳에서나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냄으로써 그들을 사도로 삼아요.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 사람들은 많아요. 여기 아까 바울도 고린도 전서 15장 6절에서, 뭐라고 말해요. 오백여 형제들이 한꺼번에 나타난다. 이 오백여 형제들이 다 사도는 아니에요. 그들 중의 몇을 불러서 사도로 보낸거죠. 이게 두개의 요건인데 바울은 교회의 핍박자였기 때문에, 예수의 제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지금 이 누가가 사도행전 요약하는, 사도의 요건을 말한다면, 첫째 요건이 결함이 있죠. 그 대신에 바울은 뭘 했어요. 그 반대였죠.교회를 핍박한 자라. 그래서 바로 이런 이유로 사도로서의 요건이 결함이 있다고, 이런 것을 흠 잡아서 족배자들이 반대를 했겠죠.
그러니까 고린도 전서 15장 10절에서 15절까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왜 사도인가? 여기 좀 길게 변명하고 있어요.
거기 보면 7절에 야고보에게 보이시고 모든 사도들에게 보이셨다, 그러니까 다매식 도상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울에게 나타나서 바울을 사도로 부르시기 전에 모든 사도들에게서 그림이 정해져 버린 거예요. 그림이 정해져 버렸어요.
그런데 바울이 뒤늦게 그 써클 속으로 열심히 열고 들어가서 어땠어요, 문을 다시 닫아 버렸어요.
맨 마지막에, 맨 나중에 그러니까 마지막 사도로 자기에게도 보이셨다, 부활하신 주께서. 그러니까 자기 뒤에는 사도가 없어요.
자기가 마지막 사도, 마지막 사도예요. 그런데 다맥시 도상에서 인명하고 보내기 전에 모든 사도들이 정해져 버렸는데 그 써클 속으로 자기가 어떻게 끼어 드느냐. 무슨 조건 무슨 자격으로 끼어 드느냐.
여기 보면 전문어로 주께서 게바에게 보이시고, 열 둘에게 보이시고,야고보에게 보이시고 모든 사도에게 보이시고, 여기 보이신다는 언어가 부활하신 주의 출현을 그리는 전문언어 예요. 오페 라는 전문언어, 그래서 바울은 지금 뭐라고 하느냐 하면, 다맥시도상에서 자기에게 나타나신 주 예수의 그 나타나심은, 질적으로 부활하신 주께서 게바에게 나타나셔서 그를 사도로 삼을 때의 그 나타나심과 동질의 것이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2장 8절과 9절에 바울은 자기가 똑같은 자격으로 베드로와 함께 사도가 되었음을 말해요.갈라디아서 2장 8절을 한번 보도록 합니다.
갈라디아서 2장 6절에서 8절까지 제가 한번 읽겠습니다.
우리가 그러니까, 5절부터 우리가 일시라도 복종치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로 너희 가운데 항상 있게 하려 함이라. 이 예루살렘에서 유명하다는 이들 중에 저 유명한 이들은 내게 더하여 준 것이 없고, 여기서는 유명한 사도들, 그들은 바울의 복음에, 바울이 지금 에루살렘에 방문해서 예루살렘 사도들과 회의를 했어요. 이 복음과 사도직에 대해서 회의를 했는데, 그 때 그 예루살렘의 유명한 사도들,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 이 유명한 사도들이 내게 내 복음에 이것 좀 덧붙여라, 할레를 연구하라, 모세의 율법을 요구하라, 뭐 이런 걸 덧붙인게 하나도 없다. 오히려 내가 할레를 받지 않는 이방인들에게 복음 전함을 맡기를 베드로가 할레 받은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위로부터 위임받은 것과 같이 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레자의 사도로 삼으십니다.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의 사도도 삼으셨기 때문에 이것을 그들이 인정했다 말이에요.
또 네게 주신 은혜를 암으로 예루살렘에서 기둥들로 여겨지는 사도들,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나와 바나바에게 교제의 악수를 하였으니,우리는 이방인에게로 저희는 할레자에게로 가려 하려한다. 여기서 바울 이방인 선교자, 이방인을 선교하는 바울과 유대인을 선교하는 베드로를 필두로 하는 예루살렘 사도들과 서로의 사도직을 인정하기로 하고, 왜 똑같은 하나님께서 똑같은 은혜를 베풀어서 이들을 사도로 세우셨으므로, 바울의 사도직이 조금도 결함이 없다 이말이예요.
그래서 서로 인정하기로 하고 서로의 복음을 인정하기로 하고, 그래서 이 예루살렘 사도들이 바울에게 당신 복음에 요만큼이 모자라니 , 율법을 좀 지키라고 하시오. 할레를 연구하시오,이런 일 요구한 적이 하나도 없다.
서로 인정하고 다만 선교 지방을 분할했어요. 게바와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는 유대인을 선교하고, 할레자들,바울과 바나바는 이방인을 선교하고, 선교지만 분할을 하고, 하나 그들이 나에게 요구한 게 있다면, 10절에 예루살렘의 가난한 선교자들을 기억 해 달라. 왜 이런 부탁을 해요. 이 갈라디아서 2장 1절에서 11절까지 보고하는 바울의 이 예루살렘 방문이 자전에 있는, 11장에 있는 바와 같이 예루살렘에 기근이 나서 반디옥에서 바울과 바나바가 헌금을 거두어서 예루살렘에 갖다 줬다고요. 그 게제에 바울이 자신의 사도직을 설명하고 자기 복음을 설명했을 때에, 예루살렘 사도들과, 유대인 선교를 하는 예루살렘 사도들과 이방인 선교를 하는 바울과 바나바 사이에 이런 계약이 체결된 거예요. 계약이 ,그래서 여기 지금 7절 8절 언어는 어떤 학자들은 계약의 언어라 그래요. 계약의 언어. 옛날 할레네 대학에서 가르쳤던 앤 히튼플러 같은 교수는 실제로 여기 갈라디아서 2장 7절은 8절은 그 당시의 바울과 베드로 사이에 체결했던 계약 문서를 문서적으로 인용한다 그렇게 말했어요. 왜 그러냐 하면 여기 언어가 아주 법적인 언어고 계약적 언어이었지만 특별히 유의 할 게 , 이두 절의 갈라디아서 2장 7절, 8절에 베드로라는 이름이 나와요, 베드로. 바울은 항상 시몬을 게바라 불러요. 예외없이 항상, 꼭 여기 두 절에서만 베드로라는 이름을 써요. 이 두 절에서만. 그런데 예수께서 시몬의 교회,또는 하나님의 종말에 백성에서의 탁월한 위치를 위해서 게바란 이름을 줬죠. 여기서 게바라는 말은 바위라는 말,반석 아람어로 그 아람어의 헬레어 번역이 베드로라는 거예요. 그러기 때문에 이 게바란 말은 아람어기 때문에 헬레말 쓰는 사람들에게는 의미가 없어요. 그러기 때문에 시몬의 교회 내에서의 공식 명, 그의 구원사적인 중요한 역활을 말하는 공식명이 헬레 사람들에게 의미있게 전달 되기 위해서는 게바의 헬라 번역 말 베드로란 말을 써야해요. 베드로란 말.
그래서 바울이 여기서 항상 버릇대로 아람어로 게바를 쓰면서 이 두 절에서만은 공식 명칭이 모든 , 심지어 헬라 말 쓰는 갈라디아 사람들도 이해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베드로라 쓴다 말이예요.
그러니까 이것이야 말로 그 당시 체결했던 조약 문서의 헬라어판을 지금 바울이 인용한다. 이렇게 까지 주장하는데 그건 아마 문서적으로 조약 문서를 인용하는 것 같진 않고 우리가 좀 더 자세히 보면, 그러나 분명한 것은 당시 적어도 구두로 체결했던 계약, 또는 조약을 바울이 인요하고 있는 거예요. 이렇게 바울에 있어서 자신의 사도직에 예수의 생존에 목격자 증인이 될 수 없었고, 그의 사도직은 오로지 다맥시도상에서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로 부터 특별히 그에게 나타나서, 그런데 그 나타남에 질은 아까 이야기 했던 대로 게바에게 나타나서 그를 사도로 세우실때의 그 부활하신 주의 출현과 똑 같은 질, 열 두 사도를 사도로 삼았을 때의 그 부활하신 주의 출현과 똑같은 성질의 것,바로 바울은 그의 사도직의 근거를 두고 있어요. 그것을 예루살렘 사도들이 다 인정했다 이거예요. 다 인정했다.
그래서 이와 같이 조약을 체결했다. 그런데 이제 예루살렘 사도들은, 직접 베드로나 야고보나 요한은 바울의 사도직에 대해서 의심하고 뒷소리하고 그런것 같지는 않아요.
그런데 그들에게 붙은자들, 신학적으로 그들보다 보수적이고 열등한자들, 유대주의자들, 우리가 보통 그런자를 유대주의자들이라 그러는데,그런 사람들이 바울의 교회를 돌아 다니면서 반디옥에 갈라디아에 고린도에 와 가지고는 자신의 사도됨을, 예루살렘의 기둥 사도들,유명한 이들이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에게 그들의 추천장을 내 보이면서 자기들의 사도적 권위를 주장하면서 다른 한편 바울의 사도직을 깍아 내린거예요. 바울은 지금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그로부터 보냄 받은 것으로 사도직에 충분하다고 봐요.
그래서 자기가 이미 다 이루어진 사도직 써클 속으로 힘겹게 들어가고 문을 닫아서 이제 더 이상 사도없음 했지만, 조금도 거기 결함이 없다고 봐요.
그런데 자꾸 결함이 있다고 하니까, 그래서 심지어 바울의 사도적 사역을 통해서, 복음 선포 사역을 통해서, 그래서 구원 받은 고린도 사람들까지도 바울의 사도직에 대해서 의심 할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바울이 셋째 말을 하는 거예요. 고린도 전서 9장 셋째 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주 안에서 한 나의 사도직, 주안에서 한 나의 사도직의 열매가 여러분들 아니냐. 여러분들이 어떻게 해서 그리스도를 알고, 그를 믿고,구원을 받아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공동체로 존재하느냐. 사도직 아니냐. 사도 아니면 뭐예요. 예수 그리스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전권 대사로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는 자가 사도라. 그는 그의 가르침과 그의 삶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해야 돼요. 전권 대사니까.
여러분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알게 되었어요. 나의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 선포와 나의 삶을 통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구원의 능력을 알았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그리스도를 알고 믿고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 그러니까 내가 다매시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그로부터 사도로 보내심을 받은 것을 여러분이 의심한다면, 여러분들이 그리스도를 믿고 알고 구원 받은 그 사실만으로도 나를 인정해야 한다는 말이예요. 그래서 거기 한마디 더 하죠. 여러분들이 나의 사도됨의 도장이라. 거짓 사도들은 추천장, 사람들의 도장이 찍힌 추천장이 없거든요. 그래서 고린도 교회의 여러분들이 나의 도장이라. 고린도 후서 3장 3절에는 바울이 뭐라고 합니까. 똑같은 거예요. 고린도 후서 3장 1절부터 읽어 봅시다.
우리가 다시 좌천하기를 시작 하겠느냐 우리가 어찌 어떤 사람처럼 천거서-추천장-를 너희에게 부치거나 혹 너희에게 맡거나 할 필요가 있느냐.
추천장을 가지고 고린도 교회에 온 사람들,뭐 어떻게 우리가 그런짓을 하겠느냐.
아니면 교회로 부터 진짜 추천장을 받는 일,맡는 일을 우리는 할 필요가 없다. 왜, 너희가 우리 편지라. 고린도 교회가 바울의 추천장 편지예요. 또는 고린도 교회가 바울의 추천장 도장에요. 그래서 바울은 이와 같이 두 가지를 자신의 사도직 정당성을 주장하는 거예요.
하나는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가 게바나, 야고보나,열 두 제자에게 나타나서 그들을 사도로 부르심과 똑같은 성질의 나타나심과 소명과 위임으로, 다맥시도상에서 자기가 소명받고 위임 받았다는 것 하나, 둘째로 자기의 사도적 열매,교회 그 자체. 자 시간이 다 돼서 오늘은 여기서 마칠려고 하는 데 중요한 것은 이 시대에도 진정한 주의 종과 거짓종에 대결이 있어요. 그 때 진정한 종을 가리는 또는 거짓 종을 가리는 근거가 뭐냐. 바울은 두 가지를 제시하고 있어요. 지금 우리에게 관심 있는 것은 두가지 다예요. 주의 종의 자격을 갖춘 객관적 자료도 중요해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체험하고 보냄 받은 그런 바울이 여기 베드로나 그런 사람들에게 은혜로 주어졌던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 그의 소명,그의 위임, 똑 같은 것을 받았다.
또 하나는 자기의 진정한 사도됨의 증거, 자기 열매, 사역의 열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무엇을 연상케 합니까? 나무를 보고,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안다. 예수 그리스도의 그 원칙을 우리로 하여금 연상케 해요.
반대로 고린도 교회에 침투한 거짓 사도들은 추천장도 있고,요새 말하면 학위증도 있고, 안수증도 있고, 교단의 위대한 지도자들이 서명한 도장도 찍혀 있고,그러나 나중에 고린도 후서 10장에서 13장 까지 가보면 알지만 그들의 사역은 무얼 말해줘요. 그들의 열매,그들은 거짓 사도들을 말해요. 바울은 종잇장 하나도 없어요.무엇이 바울의 진정한 사도직의 근거예요. 교회, 그의 진정한 사역의 열매, 헌신적 사라의 열매, 교회가. 우리도 너무나 외모를 취하고, 형식을 강조하고 종잇장을 강조하고 이런데, 종잇장,형식 이런것이 내용을 보증하는 것에 전혀 우리가 객관화된 증거를 무시 할 수는 없다고 하더래도 그것만을 전적으로 신뢰해서는 안되는 것, 그것보다는 그사람의 사람됨, 그 사람의 사역의 열매, 이런것을 우리가, 그 정신을 문자보다는 그 정신을,강조해야 된다는 것을 우리가 알게 돼요. 서울의 큰 교회들이 유행이 많이 불었답니다. 목사님을 초빙 할 때에 해외 유학을 했어야 함, 박사 학위를 받았어야 함, 교회 큰 지도자들의 추천을 받아야 함,이런 걸 내세운다 그래요. 그것도 교회의 지도자 될 사람, 교회의 일꾼이 될 사람의 자질을 평가 하는 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될 지 모르겠어요. 그러나 순전히 그런 것에 의존해서 교회의 목자를 구하고 일꾼을 구하면, 우리 예수님의 가르침, 바울의 가르침, 성경의 가르침에 어긋나죠. 그런 자격 갖춘 분이 마침 바울과 같은 위대한 학자가,또는 많은 자격을 갖춘 자가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듯이 그렇게 할 수 있으면 좋죠. 그러나 그렇지 않고 그런 종잇장 내세우면서 권위주의나 행세하고,목회하는 정신이 예수님이나 바울의 섬김의 정신보다는,도리어 고린도 전서에 나오는 거짓 사도들 같은 성경을 받으려는 권위주의 자세나 하고 이러면 안됩니다.
반면에 종잇장 하나도 없지만 정말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로 하나님의 말씀을 잘 터득해서, 잘 가르칠 수 있고 또 그 목회의 자세가 사랑과 섬김으로 가득찬 헌신적인 자세 것이면 그 열매가 그 사람의 안수증이요, 그 사람의 추천증이요, 그 사람의 주의 종됨의 증거 아니겠어요.
우리가 고라린도 전서 9장을 공부하면서 과연 우리가 주의 종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 것이며, 주의 어떻게 옳은 주의 종을 분간하고 그런 종을 어떻게 돕고 더 잘 열매를 절 맺게 할 것인가, 우리는 그것을 배워야 겠고, 우리 복음을 선포하는 자들은 어떻게 우리가 거짓 목자, 거짓 선지자, 거짓 사도의 길의 유혹을 피하고 참 주의 종이 될 것인가? 그걸 배워야겠고 그렇게 해야 겠습니다. 그러면 찬송가 511장 부르겠습니다.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엎드려 비는 말 들으소서
내 진정 소원이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더욱 사랑.
이전엔 세상 낙 기뻤어도
지금 내 기쁨은 오직 예수
다만 내 비는 말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더욱 사랑
이 세상 떠날때 찬양하고
숨 질때 하는 말 이것일세
다만 내 비는 말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더욱 사랑 아멘
기도 합시다.

고린도 전서 강해(29)
본문 고 9:1~15

지난 시간에 본바와 같이 이장은 고린도 교회에서 8장에서 시작된 것 같이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문제에 관하여 충고하는 과정에서 바울이 자기에게 주어진 사도직 가운데 자기형제들을 위해서 자기의 권익을 포기하는 모습을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다. 왜 사도이면서도 교회의 생계의 지원을 받지않고 왜 자비량으로 생계를 유지하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이 문제는 바울 개인적으로도 중요한 문제이면서도 고린도 교회에 상당한 오해를 야기시키기도 했던 것이다. 지난 1절에서 3절까지를 통해 사도의 권위의 근거를 설명한 바울은 왜 사도직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 이루어 졌는가를 설명했다. 바울은 1절 끝에서 사도직의 실증을 고린도 교회에서 찾고 있고 2절에서 강하게 증거하고 있다.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야말로 나의 사도됨의 도장(증명서)이라는 것이다.
사도는 그리스도를 증명하고 그 삶대로 살아가는 사람을 이야기 한다. 갈라디아서 3:1절에 의거해 사도는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의 포스터(현수막)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오늘날의 목회자는 어떠한가? 그리스도를 삶의 현장에서 전하지 않고 잘못되고 가식적인 목회자들이 판을 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바울은 이러한 목회상에 정면으로 대치되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사도직의 정당성을 논증하기 위해 고린도 교회의 사도에 대한 생계의 책임을 이야기 하고 있다. “너희가 나를 먹여 살릴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바을은 4~14절에 걸쳐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생각-바울에게 어떤 흠이 있기에 물직적 요구를 하지 않는다-에 관해 변명하고 있다. 바울과 바나바를 제외하고 거의 모든 사도는 이러한 권리-생계-를 누리고 있다. 이부분에서 게바를 이야기한 것은 유대인 선교의 대표자로서 게바를 인정했기 때문이다. 또한 게바는 그의 아내까지 대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AD 48년 예루살렘 사도회의에서 게바를 대표자로 하는 유대선교사역에 중점을 두는 무리와, 이방인 선교를 대표하는 바울의 선교사역을 인정하는 무리사이에 계약이 생겨난다. 이러한 게바가 고린도 교회근처로 오게되었는가는 신학적인 의문으로 남는다.

40년대 후반에 헤롯의 핍박으로 야고보가 순교하면서 예루살렘교회는 어려운 핍박에 노이게 된다. 그때에 게바는 여루살렘을 떠나게 된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는 예수의 동생 야고보의 리더쉽 아래에 들어가게되고 신학적으로는 더 보수적이 되어 가면서 게바는 이제 이방지역으로 떠도는 사도가 된다. 그래서 안디옥에 가서 머무르다가 바울과 게바의 다툼을 야기한다. 그 후에도 바울의 선교지를 게바는 전전하며 선교활동을 펼친다. 이러한 연계선상에서 고린도 교회를 방문하게 된다.
시대적으로 이때쯤은 AD48년에 이루어졌던 선교지 분할계약은 무효가 되며 계약 위반의 책임은 게바쪽에 있는 것이 아니냐는 문제가 발생한다. 그것이 바울의 사도직에 도전하는 유대주의자들과 연결되어진 것이 아니냐는 문제를 제기한다. 그러나 원래 48년 선교지를 분할할 때 처음부터 오해의 소지는 잔존해 있었다. 게바와 야고보와 요한은 유대인들과 선교하기로 했고 바울과 바나바는 이방인들과 선교하기로 했지만 그 선교지의 분할이 지역적인 분할이었는가 아니면 인종적인 분할이었는가 하는 문제가 조약에 명시되지 않았기에 바울도 선교전략상 가는곳마다 유대회당에 가서 유대인들에게 먼저 복음을 전파하고 지난 시간에 본바같이 유대인들 몇 명을 회심시키기도 했지만 주로 그 회당에 같이 참석해서 예배를 드리는 이방인들을 선교하는 사역을 하였다. 따라서 처음부터 이러한 오해의 소지가 나타나게 되었기에 베드로 또한 고린도에 오게 되었다. 그래서 베드로의 가르침을 좋아하는 베드로파가 발생하였고 8장에서의 약한자들의 주종을 이루었다고 추측할수 있다. 여하튼 게바는 자기 아내를 거느리고 다니면서 바울의 교회인 고린도 교회에 와서 그들의 재정적 도움을 받으며 복음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바울과 바나바는 가족부양의 권리는 물론 자신의 부양권리도 포기하고 스스로 일하며 복음을 공짜(?)로 선포하였다. 이것은 바울에게 아주 중요한 원칙이었다.

당시의 상층 헬라인들은 신체적 노동은 시민에게는 합당치 아니한 것으로 여겨 천시하였다. 그러므로 바울이 사도의 권익을 주장하지않고 비천한 노동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한 것은 고린도의 일부 그리스도인들의 눈에는 그의 사도직에 있어서의 결함때문으로 비추어 졌다.
유대인들은 랍비라도 대대로 이어지는 가업을 한가지씩 배웠다.
바울도 랍비 학교에서 자란 후보생이었기에 가죽 다루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 우대인들에게는 손으로 일하는 것이 그렇게 천시될만한 것이 아니었다.
이런 배경으로 바울이 사도라는 직분을 가지고도 천막공장에서 손이 닳도록 일하는 모습이 고린도 교회의 지식인들에게는 이상하게 보였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에게 그러한 권리가 있다는 것을 군인, 포도농부, 양치기의 비유를 들어 강조하고 있다.
8절에서는 앞에서 들은 사람의 비유뿐만 아니라 율법도 똑같은 것을 가르치고 있다고 이야기 한다. 신 25:4절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는 것을 예로 들고 있다 바울은 이것은 소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을 위해서 기록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에 대한 해석은 랍비들도 동일한 것이었다.
이 말씀은 오늘날 사용자와 노동자의 관계에서도 적용되는 말씀이다. 노동자가 일방적으로 착취당한다고 느끼면 그 회사 또한 번영하기가 어려우며 사용자 또한 하나님의 법대로 그 이익을 노동자와 알맞게 배분하여야 한다. 그것은 사용자가 노동자에게 베푸는 은혜가 아니라 당연한 노동자의 권리인 것이다. 이러한 율법을 예로 들어 복음을 선포하는 일꾼이 복음 선포로 말미암아 생계를 얻는 것은 당연한 권리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것을 다시 11절에서는 씨뿌리는 자의 비유로 설명하고 있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교회를 세우고 복음을 전파함을 영적인 씨뿌림으로 이야기 하고 있다. 이렇게 귀한 영적인 귀한일을 하는 사도를 고린도 교회가 부양하는 것은 절대로 지나치는 일이 아니다라고 이야기 한다. 12절에는 다른사람들도 이러한 권리를 가지고 있음에도 하물며 교회를 세운 바울 자신으로서는 당연한 것이 아니냐를 이야기 하고 있다. 그러나 이후부터 논지는 반전되기 시작한다. 이 권리를 바울을 포기하였음을 천명했다. 그리스도의 복음에 장애가 없게 하기 위해,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이 권리를 포기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데살로니가전서 2:5~6절에 의하면 “너희도 알거니와 우리가 아무때에도 아첨의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이 증거하시느니라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도로 중히 존중할 터이나 그러나 너희에게든지 다른이 에게든지 사람들에게는 영광을 구치 아니하고”-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도로 능히 권리를 주장할수 있었으나 이말은 바울이 각교회를 돌아다니며 아첨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사도들이 있음을 지적하면서 이들과 자신을 비교하고 있다. 이들에게는 그 속에 탐심이 있으며 권위를 내세우고 있으므로 그렇게하면 복음이 효과적으로 전파될수 없다는 것을 이야기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좀더 많은 재정을 타기위해 주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전하지 못하는 실태를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 권리를 스스로 포기하였다고 단언하고 있다.

바울의 이러한 복음의 효과적 선포란 것은 숫적인 의미를 이야기 하지는 않는다. 바른 복음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것을 얻기위해 바울은 그의 기득권을 포기한 것이다. 15절에서 바울은 내가 차라리 죽을 지언정 여러분에게 손벌리는 일을 하지 않겠다고 단언하고 있다.

※생각해 보기
복음선포자는 복음으로 말미암아 생계를 잊고자하는 예수님의 뜻은 무엇인가?

고린도 전서 강해(30)
본문 고전 9:16~27

우리가 공부한 바와 같이 9장1절에서 15절까지는 바울이 사도로서 혹 고린도 교회에서 자기의 사도직에 관해 의심하는 자가 있다면 그들에게 자기가 분명히 정당한 합법적인 사도로서 세상의 이치로 보나 구약의 예로보나 율법의 명백한 규정으로 보나 심지어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으로 보나 교회의 도움을 얻어서 생계를 지원받고 복음을 선포할 권리가 있는데 자기는 그러한 권리를 일체 쓰지않고 자기의 손으로 일해서 자기의 생계를 얻으면서 복음을 전한다라고 지난번까지 밝혔다.
그런데 더 나아가서 자기가 복음선포자로서의 사도적 자기 이해를 좀더 밝히고 그것을 지금 고린도 교회의 당면문제의-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자기들의 권리만을 주장해서 성도들의 교제가 손상되는 -하나의 예로 삼아서 이렇게 우리가 그리스도의 권리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절제해야 된다는 것을 밝히는 부분이다. 좀 더 자세히 공부를 하면 이부분은 전에 이야기한 바울의 소명사상이라는 특강을 했는데 그 특강중에 이 본문이 중심을 이루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본문을 공부해 가면서 전에 한 강의가 연상되기를 바라고 간단히 설명하면서 넘어 가고자 한다.

15절에서 바울은 사도로서 교회의 지원을 받을 권리가 있으나 이 권리를 하나도 쓰지 않았음을 이야기 하고 있다. 내가 지금이 말을 하는 것은 여러분이 그것을 나에게 해달라는 뜻이 전혀 아니다라고 강력하게 표현하였다. 내가 차라리 죽을 지언정 여러분에게 나의 생계를 도와달라는 그런 부탁은 내가 하지 않겠다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그 이유로서 바울은 누구든지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 것으로 돌리지 않게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바울은 이 자랑을 피조물의 창조주에 대한 교만의 표징으로 보고 자랑은 죄의 본질이며 아주 나쁜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바울은 이 편지에 예례미아서에 나오는 누구든지 자랑하려거든 육신을 자랑히지 말고 주를 자랑하라는 말을 두 번이나 인용을 하고 있다. 우리말 번역에 1장 36절 주안에서 자랑하라고 번역한 것은 옳지 않으며 주를 자랑하라라고 이야기 해야 한다.

주를 자랑하는것의 반대말은 자기를 자랑하는 것이고 자기를 자랑하는 것은 자기를 내세우는 것이고 자기를 내세우는 것은 자기힘과 자기 행위를 의존하는 것이다. 자기힘을 의존하고 자기지혜를 의존하기 때문에 자기힘과 자기지혜가 자기의 행복을 가져다 주고 자기에게 안전을 가져다 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기 지혜와 능력을 자랑한다는 것은 자기를 믿는다는 것이다.
그것을 바울은 ‘육신을 자랑한다’는 한마디로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그것은 기껏해야 자기가 가지고 있는 피조물의 제한된 자원이 줄수 있는 만큼의 안전과 행복밖에는 줄수가 없다. 예수님의 비유의 부자관원과 같이 부자관원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부에서 자기의 안전과 행복을 얻을려고 예수께서 무한하신 하나님의 부요함을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 했을 때 그는 그곳에서 등을 돌리고 자기의 세상적인 부요함-제한된 자원-을 선택하고 만다. 그러면 이 사람에게는 자기가 줄수 있는 세상적인 부요한 만큼의 행복과 안전을 얻을 수밖에 없다. 무한한 하나님의 영원한 부요함이 주는 행복을 얻을 수 없다. 그래서 우리에게 항상 자랑이라는 것은 자기를 의지하는 태도의 표현인데 그러므로 바울은 그것을 죄의 본질로 보고 정죄한다.
그래서 자기를 자랑하지 말고 나의 모든 부요와 안전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온다는 신앙고백을 한다는 것이 주를 자랑하는 것이며, 바꾸어 말해서 주를 자랑한다는 말은 나의 모든 삶의 의미, 나의 구원이 오직 그로 말미암는다는 신앙고백이다.

바울은 자기가 사도로서 자랑하고 싶어하는 것이 있다고 한다. 그것은 바로 자기힘으로 무엇을 했다는 것을 내세우기 보다는(얼핏보기에는 그런뜻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내가 다른 사도들(게바)과 같이 사도직을 수행한다면 내가 그들과 다를바가 무엇이 있는가 내가 그들과 같다면 자랑할 것이 없지 않은가 나는 자랑할 것을 보여주고 싶다. 교회에 누를 안끼치면서 내가 손으로 나의 생계를 유지하면서 교회에 도움을 받지않고 그리스도의 복음만을 전하는 것을 나의 자랑으로 여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8~11절에서와 같은 심정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나는 사도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 하였으나”여기서 바울은 자랑하고 있다. 수고란 말 속에는 복음선포에서의 수고와 함께 자기 손으로 노동을 했다는 뜻이 함께 내포되어 있다. 바울은 고전4장에서 사도로서의 받은 권한의 목록을 되뇌이고 있다. 중노동을 하고, 잠을 못자고, 배고프고, 춥고, 두들려 맞고, 파손당하고 감옥에 갖히고…이러한 것을 사도들의 권한 목록이라고 보는데 고린도 전후서에서 바울은 3번씩이나 되풀이 하고 있다 여기서 중노동하고 잠못이루고는 같이가는 말이다. 바울이 밤에 일을 하느라고 생계를 버느라고 밤에 잠 못자고 일을 했다는 뜻이다. 기회있을 때마다 복음선포하고 사람들이 잘때에는 생계유지를 위하여 일을 한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수고라는 말 속에 그것까지 포함해서 한 말이다.

15장 10절에서 바울은 수고했다는 말은 복음전파외에 이러한 밤잠을 안자고 내 손으로 수고해서 생계를 얻으면서 복음선포를 한 사람이다라고 자랑했다. 그러나 금방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다라고 표현함으로서 주를 자랑하고 있다. 부활하신 주께서 성령을 통해 자기에게 주신 그 은혜의 힘에 의해서 자기가 이일을 감당할 수 있었다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바울은 결국 주를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바울의 인간적인 면모를 보고 있다. 자랑은 죄이다. 우리가 자랑하고자하는 유혹이 있을때는 그 마음을 꺽고, 남보다 조금 다른 것이 있다면 주의 은혜로 달라지는 것이므로 주를 자랑해야 하는 것이라고 보여주고 있다. 분명히 그는 다른 사도들보다 자기의 노력으로 더큰 열매를 맺었다. 그것은 분명히 자랑할 만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바울이 강해서도 잘나서도 의지가 강해서도 아니고 주께서 성령으로 역사하셔서 그분이 주시는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다라고 주를 자랑하는 모습을 볼수가 있다. 16절이하에서 바울은 은혜를 받은자로서 다른 자들과는 달리 주예수 그리스도의 명백한 가르침을 주신 특권을 포기하고 밤잠을 안자고 생계를 벌면서 복음을 공짜로 선포했다라고 나온다.
16절에서 바울은 앞과는 달리 내가 자랑할 것이 없다라고 자기 자랑함을 부인하고 있다.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복음을 전파함은 부득불 할 일임이라 여기서 부득불 할 일임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아난케”라는 말로서 숙명, 필연이라는 뜻이다. 16절의 좀더 정확한 번역은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내가 전혀 자랑할 것이 없다. 왜냐하면 숙명이 내 위에 놓여졌기 때문이다. 복음선포하는 것이 나의 숙명이라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만약 복음을 선포하지 않으면 다시말해 숙명을 거스리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다. 이 “아난케” 숙명이라는 말은 유명한 헬라어 속에서 중요한 개념으로 위치하며 특히 헬라어 비교문학에서는 천편일률적으로 이 개념을 주제로 삼고 있다.

바울은 복음선포의 사명을 하나님이 주신 숙명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이러한 숙명을 거스리면 ‘내게 화가있다’라고 표현한다. 이말은 구약에서 나오는 하나의 고정된 문구이기도 한다. ‘내게 화가 있다’는 것은 임박한 재앙에서 달리 부르짖음이 없을때의 외침이 ‘내게 화가 있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복음선포는 나의 숙명이다. 이 숙명을 거스리려고 하면 나는 멸망받고 만다. 구원받지 못한다.”하는 말이다. 참으로 엄숙한 표현이 아닐수 없다. 이말은 우리로 하여금 예례미아서 20장 9절의 예례미아의 울부짖음과도 상통하고 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수 없나이다.”
복음선포자의 숙명이라는 말외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아모스 3장 8절은 “사자가 부르짖은즉 누가 두려워하지 않겠느냐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신즉 누가 예언하지 아니하겠느냐”라고 이야기 한다.

그러나 바울은 이보다 더욱 강한 표현을 하고 있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1장3~16절에서 다메섹 도상에서의 경험을 어떻게 이야기 하고 있는가를 살펴보면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여 잔해하고 내가 내 동족중 여러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히 있었으나” 이것은 바울의 핍박자로서의 과거이다. 조상의 전통에 의한 열심 때문에 이단자들을 폭력으로 처단해서 이단자들의 집단을 잔해할려고 지금 다메섹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이가” 자기어머니의 태로부터 자기를 택정하시고 자기를 불렀다- 이 말은 예레미아서 1장5절의 말과 이사야서 49장 1절의 말을 혼합해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당시의 깨달음이 아니라 사도로 세움받은 뒤 돌아 보면서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런데 소명의 목적이 16절의 그 강조점에 나온다. 소명의 목적이 바울을 구원하고자 함이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을 이방인들에게 복음으로 선포하기 위해서, 그 하나님의 아들을, 그 영광의 아들을 내 속에 계시하시기를 기뻐 하셨다라고 이야기 한다. 그러니까 그 소명의 목적을 이방인들에게 그 하나님의 아들을 복음으로 선포하기 위해서 이것이 하나님의 바울의 소명의 목적이다. 지난번 이야기했듯이 바울은 굉장히 많은 곳에서(고전9:1, 고전15:8~11, 고후4:6, 엡3, 골로새서1:26~29, 고후 5:16~21)자기의 다메섹 도상에서의 체험을 직간접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데 어느곳에서나 “그때 나를 구원하셨다”가로 표현하지 않고 항상 “사도로 소명했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유일한 예외인 빌립보서 3장에서는 다메섹도상에서의 사건이 자기의 개인적 구원의 사건이면서 동시에 사도로서의 소명적인 사건이라고 이야기 한다.
다른부분에서는 대부분 개인적 구원이 아니라 사도적 소명의 부분에 초점을 두고 있다. 물론 그것은 바울의 개인적 구원의 사건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것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로 하여금 사도로 부른 소명을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이것은 바울의 신본주의적 표현으로 그렇게 될 때 우리는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목적을 생각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소명의식이다. 바울의 소명은 복음선포에 있고 그것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구원하셨기에 그 사건 자체가 숙명인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신 목적이 이방인들에게 복을 전파함인데 만일 그것을 안해 버리면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신 목적에서 이탈하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멸망받는다고 전하고 있는 것이다.

17절에서는 그것을 부연하고 있다.
“내가 이것을 임으로 한다면 보수로 받게된다. 그러나 내가 임으로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경륜가운데서 일부를 담당하는 그 직분을 위임받은자이다.” 바울이 스스로 선택해서 복음선포를 하면 될 수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도 개인에게 한정지어 생각하게 된다. 특히 개인의 체험을 강조하는 우리 보수적 복음주의적 전통에서는 거기에 항상 강조점을 두고 있다. 그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나의 구원이 절대주권자의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이라는 큰 틀 속에서 이해되어져야지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의 큰 틀을 망각해서는 되지 않는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은 나의 구원을 위해 존재하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나의 기도응답을 위해 존재하시는 분이다라고 내가 중심이 되고 하나님은 나를 섬기는 종이되고만다. 사실은 구원이란 하나님을 창조주로 인정하고 나의 생명과 필요한 모든 것이 창조주 하나님의 도움속에 있음을 인식하는 것 그래서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나와의 관걔가 올바로 인식되는 것이 구원인데 우리는 구원을 인식함에 있어서도 피조물인 나 중심적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많다. 바울은 이부분을 부정하면서 구원의 개인성보다는 사명에 초점을 맞추어 절대 주권자로서의 구원의 계획을 운영하시는데 나를 무슨 목적으로 구원하셨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는 그것에 대해서 보수를 기대할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일을 스스로 택한 노동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써 이렇게 하나님의 주권자적 목적을 붙잡힌 바 되었다고 이야기 하고 있는데 붙잡힌 바 되었다는 뜻은 징집되었다는 뜻이다. 나의 선택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너는 이방인들에게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는 사도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군사로 징집된 노예이다. 노예는 대가를 바랄수 없다. 보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선포함으로 그 대가로 무엇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선포한 대가로 성도들로부터 돈을 받는 것을 거기에 혹시 보수 받는 의미가 조금이라도 있을까바 아직 어린성도들이 그런뜻을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다면 선포한 복음에 온전히 은혜됨,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됨이 충분히 전달되지 못하면 복음선포에 장애가 되기 때문에 보수를 받지 않는 것이다.

지난번 빌립보서 강해를 공부할 때 빌립보 교회에서만 이례적으로 바울이 보수를 받은적이 있었다. 빌립보 교회는 무척이나 가난한 교회였다. 고린도전후서와 데살로니가를 통해 전적으로 보수에 대한 강한 원칙이 있었던 바울이 왜 빌립보 교회에서는 보수를 받았을까? 여기에 그 본문이 간접적으로 설명을 하고 있다. 이 빌립보 교회는 헌금의 의미를 깨달았다. 헌금이 복음선포의 대가가 아니라 전적으로 사랑의 교제인 것이다. 그래서 바울이 그들에게서 도움을 받으면 그들의 사랑을 거절하지 않는것이되고 만약에 그것을 받지 않으면 빌립보 교인들에 대한 사랑을 거절하는 것이 되므로 felloship이 도리어 약화되는 것이었다. 만약에 영적 성숙이 약화되어 바울에게 헌금을 전하면서 “이것이 당신이 우리가운데서 수고한 보수요”이런뜻이 조금이라도 있었으면 바울은 거절을 하였을 것이다. 왜, 그렇게 되면 처음의 순수한 동기와는 달리 빌립보성도들이 가난하게 될 때 점차 이것이 복음선포의 보수다라는 생각이 될 때 바울은 복음선포를 생계수단으로 삶는 사람이되고 그렇게 될 때 복음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기쁜 소식이 아니라 사고파는, 주고받음의 원칙이 적용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팽배해져 복음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 사랑으로서의 복음에 대한 이해가 왜곡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이 볼 때 고린도 교회에서는 그 위험이 있어 보수를 받지 않기로 원칙을 세운 것이다. 이런상황 속에서 바울이 복음선포를 통해 받기를 원했던 것은 선포자로서의 자부심 자랑 이것이 바로 보수라는 역설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 또한 육신의 자랑이 되지 않을까 16절이하에서 이야기 하는 것이다. 복음선포라는 징집된 병사로써 숙명적인 것이되므로 마땅히 받은 직분을 하는 것이므로 무슨 보수를 필요로 하겠는가를 역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19절에서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모든 사람에게 종이된 것은” 그러니까 18절까지는 바울이 사도로서 권리가 있으나 그 권리를 포기했음을 설명했다. 무엇을 위해서?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파하고 성도들을 사랑하기 위해서 원리를 포기했음을 이야기 했다. 19절에서 바울은 사도로서 자유(=권리)가 있으나 그 자유를 억제하면서 살아가고 있음을 적고 있다. 더 많은 사람을 얻기위하여, 복음의 호과적 선포를 위해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은혜로부터 속박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바울은 자유하게 되었다. 이것은 사단의 주권의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주권의 영역으로 이전된 결과이다. 그리스도인이 복음의 자유를 고린도의 상놈들이 도리어 육신의 기회로 삼아서 죄를 짓고 있기 때문에 이 자유를 강조하지 않고 도리어 절제를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 에서는 그리스도인 이면서도 북음의 자유도 모르고 율법의 속박 밑에서 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의 근본은 자유라고 강조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또한 자유를 육신의 기회로 삼아서는 안된다고 하고 있다. 그 경고가 고린도 사람들에게 해당되게 되었다. 복음의 자유를 기회로 삼아 온갖 육신의 죄를 다 저지르고 교회가 깨지는 상황이 되었다. 그래서 고린도 전후서에서 바울은 절제, 거룩한 삶을 강조하고 있다.

갈라디아서와 고린도 전후서는 이러한 맥락에서 같이 읽어야 하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인은 자유를 지향해야 되지만 그것이 육신의 기회, 방종으로 흘러가지 않도록 조심하여야 하는데 바울은 후자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근본적으로 자유한 자다. 그런데 어떻게 자유를 얻을 것인가? 그리스도의 종됨으로 자유를 얻는다. 그리스도의 종이 되는 것이 진정한 자유이고,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 진정한 자유된 자이다. 아담을 유혹할 때 사탄은 너는 자유한 자이다. 너도 하나님이 될 수있다. 창조주을 인정하는 것은 속박이다. 네 주인은 바로 너이며, 너의 마음대로 살라는 것이 창세기 3:5절에 있는 사탄의 유혹이다. 그말은 인간에게는 항상 해방의 복음처럼 들리는 것이다. 밖에 있는 권위, 창조주는 말만들어도 부담이 되는 것이다. ‘인간이 만물의 척도이며, 만물의 영장이며 인생은 자기 스스로 마음대로 살아가는 것이다’라는 인본주의의 철학은 오늘날까지도 우리의 의식속에 세뇌되어 있다. 그런데 그것은 창조성이 보여주는 것과 같은 사탄의 속임수이다. 아담이 사탄의 뜻을 따르기로 결단을 했을 때 아담은 자기의 주가 되었고 우주의 주가 되었는가? 그것이 아니라 도리어 사단0의 주권안에 떨어지게 된 것이다.

사탄은 인간의 육신을 통해서 진입을 하게된다. 인간의 육신은 하나님께 대해 자기를 주관 할려는 존재이다. 육신이 사단의 말을 들었을 때 진정한 자유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분리되어 죽음이 주어지는 것이다. 죽음의 증상은 인간의 모든 고난들의 근원이 되며 율법 또한 하나님에 대한 자기 자랑의 수단으로 삼으며 하나님께 대항하게 한다. 이럴 때 율법은 우리를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데려다 주는 실체가 아니고 하나님과 갈등을 일으키게 하는 요소가 되고 만다.

그래서 율법의 행위로는 구원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도리어 율법이 인간을 속박하는 체인의 한 마디가 되는 것이다. 예수그리스도는 이러한 속박의 힘들로부터 우리를 구출해서 자유케 한 것이다. 그러나 그 자유는 역설적인 자유이다. 예수그리스도 안에 계시는 하나님을 인정하고 창조주임을 인정할 때 그때 비로서 자유하게 된다. 그래서 구원은 사탄의 주권에서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로 옮겨지는 주권의 이동을 의미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할때-우리의 삶과, 행복과 안전을 그로부터 얻는다는 태도-우리는 비로서 자유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말씀은 마태복음의 “너희가 위대해 질여고 하면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야한다.”는 그리스도의 말씀과도 일치한다. 바울의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한 가르침에 대해 루터는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모든 것위에 군림하는 자유인이고 누구의 종도 아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사랑으로 모든 것을 섬기는 종이고 모두의 종이다.” 바울이 자신의 권리를 포기할 때 모두에게 아무보수도 요구하지 않은 것은 더 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얻기 위함이다.

20절이하는 이러한 섬김을 이야기하고 있다.

고린도 전서 강해(31)
본문 고전 9:20~27

지난번에 우리는 바울이 고린도에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니므로 제단에 바쳐진 음식은 먹어도 괜찮다는 고린도의 강한 자들과 우상을 실제로 힘있는 마귀의 실체로 생각을 해서 우상에게 바쳐진 것을 먹는 것을 굉장히 꺼려하는 약한 자들과의 관계에서 강한 자들은 약한 자들이 신앙이 미성숙하다고 깔보고 약한 자들은 강한 자들은 너무 자유롭고 경건치 못하다고 비난을 하는 내부의 문제 가운데 바울은 강한 자들에게 신학적으로는 동의하면서도 약한 자들에게 자기의 신앙을 과시하려는 태도와 연약한 자들을 사랑하는 차원에서 그들의 자유를 포기할 것을 바울 자신의 사도 된 권리를 포기함을 예로 들면서 강한 자들에게 권유하고 있다.

바울은 예수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사도로서의 많은 권리를 포기할 뿐 아니라 오히려 모든 사람들에게 스스로를 종으로 만듦으로써 섬기는 일을 한다. 또한 바울은 복음을 공짜로 전파할 뿐만 아니라 밤잠을 자지 않고 생계를 유지함으로 교회에 부담을 주지 않고 더 나아가 그들을 섬김으로써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섬김을 역설해서 보여주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종으로 살다가 죽으셨듯이 그리스도의 전권 대사로서의 사도 또한 그 삶을 따라 살아감으로 진정한 사도로서의 본을 이야기하고 있다. 보냄 받은 자는 보낸 자와 같다는 뜻으로 예수그리스도는 하나님께로 보냄 받은 자이므로 하나님과 같고 사도는 아들로부터 보냄 받은 자이므로 사도는 아들의 전권 대사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들이 하는 모든 행위는 보낸 자의 행위이므로 하나님의 계시자요 상속자이다. 마찬가지로 사도의 가르침은 예수님의 가르침이며 예수님의 계시자이다. 따라서 바울은 자기의 사도적 섬김으로 그리스도의 섬김을 나타내고자 하였다.

오늘의 목회자 또한 마찬가지이다. 목회자는 그의 가르침, 선포만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섬김으로써 그것을 나타내어야 한다. 20절 이하에서는 이를 구체적으로 나타내어 모든 사람에게 어떻게 종노릇하였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첫째, 유대인에게는 유대인 같이 됐다. 그런데 이렇게 종노릇한 목적을 무엇인가?
아들은 그들을 섬김으로서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계시했다.
20절의 “얻고자 한다.”는 말은 숙어로서 그리스도를 믿게 하여 신자로 만든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을 계시하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고 보고 믿는 자로 얻었듯이 사도된 자들도 그리스도를 계시하여 하나님을 알고 믿게하여 신자로 얻게하였다. 그 첫 번째가 유대인에게는 유대인 같이 된 것이다. 그런데 유대인 같이 된다는 것은 결코 쉬운일이 아니다. 또 그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율법아래 있는 자들같이 된 것은 율법아래 있는자들은 얻고자 함이요.“ 바울은 똑 같은 말을 두번 반복하고 있다.
유대인은 율법아래 있는자들이다.
오늘날 이스라엘에서는 유대인의 정통성에 관한 문제들이 제기되고 있다. 어떤 사람이 정통유대인이냐 하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부계를 따지지 않고 유대인 어머니에게서 난자들을 유대인으로 보고 있다. 또한 정통 유대교를 믿는 사람들을 유대인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고 이스라엘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을 유대인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복음서에는 바리새인들이 많이 나온다. 그러나 여기에서 바리새인들에 관한 기술 또한 여러 가지로 나타난다. 바울은 바리새인들에 관한 정의를 비교적 정확히 내리고 있다. “율법에 의하면 바리새인이다.”는 것이다. 유대인에 대한 정의 또한 바울은 ‘모세의 율법아래 있는 자들’로 정의 하고 있다. 바울은 또한 율법을 지킴으로 그 공로로 하나님에게 구원을 상금(보상)으로 받을려는 사람이라고 정의 하고 있다. 바울은 이러한 의미로 인종적으로는 유대인이지만 신학적으로는 유대인이 아니다. 그러나 바울은 내가 유대인이 아니지만 유대인 같이 된다고 본문에서 이야기 하고 있다. 유대인 같이 된다는 말은 바울이 생각하는 무의미한 율법 조차도 일부러 지키는 자가 되어 유대인과 같이 되고자 함이었다.
이러한 예는 사행 21장에서 바울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결례의 예를 행함을 볼수가 있다. 반면에 이방인들-율법없는자들-에게는 율법없는 무법자 같이 되었다. 이방인들은 율법이 없는 죄인들의 부류이다.

바울의 입장으로 돌아가 보자.
어려서부터 유대인으로 자랐고 유대인의 교육을 받은 바울이 아무리 다메섹 동산에서 변화를 경험했지만 이방인들을 허물없이 접하게 되기까지는 얼마나 큰 갈등이 있었겠는가?
바울은 스스로를 율법없는 자가 아니라 율법있는 자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바울이 이야기하는 율법은 모세의 율법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법을 지키는 자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여기에서 도대체 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율법은 모세의 율법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라는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아주 중요하면서도 어려운 문제이다. 이것은 신학적으로 중요한 문제일뿐아니라 일반 성도의 삶에도 중요한 문제이다. 이른바 복음과 율법의 문제, 성도의 윤리에 관한 가치의 문제, 좀더 구체적으로 구약에서의 율법이 오늘날 어느정도의 적용성을 가지는가? 또한 신약의 가르침이 얼마만큼 원칙으로서 우리에게 다가오며 지켜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법이라는 말은 신약에서 2번 언급된다. 갈 6:2에서 ‘너희가 서로 짐을 지라 그래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는 말씀이 있다. 또한 고전 10:21에 한 번 나타난다. 여기 두가지 말씀의 공통점이 무엇인가? 그리스도의 법이란 무슨 말인가? 내용적으로는 사랑의 법이다. 사랑과 섬김을 내용으로 하는 법이다. 그러면 이 법은 모세의 율법과는 어떤 관계에 있는가? 로 10:4에 ‘그리스도가 율법의 마침’이라는 유명한 말씀이 있다. 여기서 마침이란 무슨 뜻인가?
첫째는 끝장이라는 뜻이있다. 예수께서는 율법과 선지자는 세례요한까지로 한정하고 있다.
둘째는 목적이라는 뜻이 있다. 섯째는 성취하는 의미이다. 이러한 뜻으로 볼 때 율법이 그리스도의 성취라는 뜻이다. (요 1:14~16)
좀더 정리하면 그리스도께서 모세의 율법을 성취하심으로 말미암아 완성하였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통해 내려진 하나님의 계시가 모세율법을 능가하여 대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모세의 율법은 약속의 측면이 강하다. 이 율법을 그리스도가 성취함으로 말미암아 그 약속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완성된 계시는 부분적 계시를 대치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율법은 모세 율법을 성취하여 대치하는 율법이다. 모세율법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함께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연속적인 부분과 불연속적인 부분은 무엇인가? 칼빈은 “구약의 의전적인 법(제사에 관련된 법)들은 그리스도의 종말론적인 한 번 만에 또한 영원히 효과 있는 제사를 통해서 다 돤성되었기에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적용이 안된다. 레위기의 의전적 법들은 더 이상 우리 성도들에게는 적용이 안된다. 그러나 모세 율법의 도덕적인 법들은 지금도 적용이 된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할례나 성전에 들어가기전 목욕을 한다거나 하는 등은 지켜야할 필요가 없으나 도덕적인 법들 즉, 간음, 도둑질 살인등은 계속적으로 지켜야된다”라고 설명하였다. 도덕적인 법도 그리스도의 법에 연속성이 있으나 그리스도의 법에 의하여 완전히 계시된 것은 마태복음 5장의 산상수훈에서 보듯이 모세의 율법이 행위의 최소한을 규제하는 법이라고 할 때 예수의 법은 내면화하여 행위의 동기까지 하나님 앞에서 의로움을 요구하고 있다. (ex. 살인하지말라-->형제를 미워해도 살인하는 것과 같다. 간음하지 말라-->마음속에 음욕만 픔어도 간음한 것이다.) 이러한 예에서 보듯이 그리스도는 모세를 통해서 계시된 하나님의 법보다 훨씬 더 완벽한 절대적인 하나님의 법을 계시하는 분으로 당신을 내세우고 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법은 모세의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등의 법을 무조건 끝장내는 법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더 약속의 성격을 가진 임시적인 법을 성취함으로 말미암아 능가해서 대체하는 계시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신약성경에서 공통된 신앙고백이다. 요 1:1~18의 찬송시, 히 1:1~3절을 보면 과거의 하나님께서 조각조각 여러 가지로 말씀하셨으나 이 마지막때에 그의 아들을 통해서 완전히 말씀하셨다.

그리스도의 법은 불완전을 채움으로서 완전하게하여 대치하였다. 그래서 우리들은 구약에서의 법들을 신약의 그리스도를 통한 계시에 비추어서 해석을 함으로 말미암아 어떤 것이 어떻게 적용되는가를 따져 보아야 한다. 또한 그리스도의 법과 모세율법의 큰 차이는(로8:3) 육신에 의해서 항상 약해진다는 것이다. 율법은 우리에게 의를 위해 주어진 것인데 우리는 율법의 목적을 달성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율법이 나빠서가 아니고 육신이 연약해지기 때문이다. 육신을 하나님 앞에서 자기 주장을 하는 것이라고 정의 할때 이 육신은 사단에게 조정을 받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를 가져다 주기 위한 율법도 육신은 자기 의를 쌓는 기회로 삼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닦아 공로를 많이 쌓아 하나님께 대항하도록 만들어 버린다. 따라서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옳바른 존재로 세우기 보다는 하나님께 대항하려는 존재로 세우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모세의 율법을 지킴으로서는 의롭게 될 수 없다고 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법과 모세 율법의 또 하나의 차이는 바로 육신에게서 연약화되지 않는 이미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의인이 된자가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완벽한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고 그것에 순종해서 살도록하는 것, 법을 지키는 것을 하나님 앞에 공로로 내세워서 구원을 얻고자 하는 충동에 노출되지 않는 법,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법이며 그 내용이 사랑이라는 말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의롭다 함을 받은자로서 우리안에 이루어진 의로움의 구원이 이제 신앙의 행위로-사랑으로-나타나게 되는 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전도하기 위해 그리스도 안에서 하지 말아야 될 일도 하게 되었다. 율법없는자와 같이하기위해 그들의 삶에 적응할려고 하는 수고를 서슴지 않았다.
22절 후반부는 바울의 선교관행을 요약하는 말이다. 23절의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의 바른 번역은 내가 복음을 위하여 이 모든 것을 행한다. 그것은 그렇게 해서 내 복음 선포를 듣고 구원 얻는자들과 함께 나도 더불어 구원을 얻고자 하기 위해서이다.” 이 말은 9:16절에서 연속되는 말의 결론이다.
23절 이하는 다음시간에
※토의 내용
바울을 통해 오늘날 우리가 믿지 않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함에 있어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가?

(32)고린도전서강해
자 오늘은 성경 말씀, 마지막으로 고린도 전서 9장을 볼려고 그러는데요, 9장 16절부터 마지막 절까지 두 절을 제가 간단히 말씀 드릴테니까, 두 절을 생각하면서 읽고 마지막으로 두 절을 정리 하겠습니다.
이 두절, 9장 16절과 17절은 바울이 자기가 복음 선포하는 것이 자기의 복음 선포가, 자기의 소명이고 직분이어서 이것을 잘 감당하므로써 구원을 얻고,이걸 감당치 않으면 하나님의 화를 받는다. 하나님의 화를 받는다, 이 복음 선포를 하도록 하나님께서 바울을 다맥시도상에서 구원하시고, 사도의 직분을 주시고, 사도로 소명했기 때문에, 그가 사명을 잘 감당하면 구원을 받고, 감당치 않으면 화를 받는다. 이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느냐? 그는 우선 두 가지로 말을 해요. 18절은 값없이 무료로 한다. 왜냐하면 복음을 선포하는 것에 대해서 금전적으로 대가를 받으면 자기의 사도직의 동기, 복음 선포의 동기에 누가 혹 의혹을 가지고 복음에, 구원의 힘에 손상을 가지게 될까 봐 그런일이 없도록 자기가 무료로 선포하는거다. 오로지 그것을, 자기는 무료로 선포하는 자체를 큰 상으로 생각하고, 전적으로 자기 사도적 권리를 포기하고 무료로 선포한다. 그 다음 19절 부터 22절 전반부까지는 어떻게 일을 효과적으로 감당하기 위해서 어떻게 하느냐. 스스로가 모든 사람의 종이 되므로 자기의 복음 선포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의 자리에 내려가 앉고, 메인에게는 메인같이 대하고, 이방인에게는 이방인 같이 대하고,이렇게 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에요.
자기 자신을 자기의 충종의 자리에 내려가서 그들과 한가지가 되어서, 문화적으로 경제적으로 모든 면에서 그들과 같이 되어 그들에게 신뢰를 얻고, 환심을 얻고, 그들에게 가장 잘 이해 할 수 있는 그런 방법으로 복음 선포한 것. 다시 말해서 종들, 종 노릇 하므로써 한다. 요 부분에 대한 결론이 22절 후반부,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으로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다. 이게 결론이예요. 이게 사명이었는데,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자기가 무료로 선포하고,더구나 강조 된 것이 모든 사람들의 종 노릇하고,그 사람들의 위치에 서서 그 사람들과 같은 사람이 되고 종 노릇 한 것은 이 복음을 효과적으로 선포하여, 되도록 많은 사람에게 선포하고,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고자 하는것, 이것이 22절 후반부가 요 대목의 결론이예요. 그리고 23절, 요 말의 결론이예요. 그러니까 23절은 16절,17절을 되풀이 한거예요. 23절은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내가 복음을 위하여 이 모든것을 한다, 지금 대표적으로 두 가지, 무료로 선포하고,모든 사람들의 종 노릇하는것, 이렇게 하는 것은 복음을 효과적으로 선포하고, 최대한 효과적 선포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고 그렇게하여 나도 같이 구원 받고자한다. 나도 같이 그들과 함께 구원의 잔치에 참여하고자 한다. 그말을 23절에서 하죠. 내가 복음을 위하여 이 모든것을 행한다. 그것은 나도 함께, 거기 우리 말의 ‘함께’가 빠졌어요. ‘함께’가 들어가야 해요. 자기 복음 선포를 들은 유대인들, 자기 복음 선포를 들은 이방인들, 그래서 구원받은 그들과 여기 바로 앞절에서 말한,복음 선포를 통해서 그들을 구원하고자 하는데, 그들과 함께 나도 같이 구원 받고자 한다. 그러니까 23절은 16절,17절에 표명한 바울의 소명사사의 되풀이 표현이예요. 한번은 부정적으로 표현했어요. 내가 이 소명을 잘 받들지 못하면 화를 받는다, 그리고 어떻게 했어요. 내가 이것을 효과적으로 최선을 다해서 감당할려고 한다. 그래서 어떻게 하는가, 구원을 얻을려고 한다. 이 소리예요.
23절은 16절, 17절을 되풀이 해서, 그러나 이번은 긍정적으로, 위에서는 부정적으로, 그러면 다시 한번 바울이, 여기 24절에서 27절까지는 또 한번 복음을 효과적으로 선포해서 자기 소명을 이룸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을려고 하는 자기의 개인적인 자세, 이것은 앞에서 무료로 선포하고, 권리를 주장 않고 무료로 선포하고, 모든 사람의 종 노릇함으로 하는데, 그렇게하기 위해 자기가 어떤 자세로 하는가. 여기 운동 경기하는자, 경주하는 자세를 그림으로 들고, 24절,여기에 다시 이렇게 말하고 있어요.
24절,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자는 하나인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은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 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그러니까 24절,25절은 경주하는 것, 경주하는 자를 예로 들어서 열심히 달려가는 자의 모습으로, 26절은 권투선수의 그림을 빌려서, 경주 하는 자가 어떻게 한다고요, 경주하는 자가 분명한 목표를 두고서 최선으로 일심으로 달음질 해야죠,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는 게 아니고 하나 목표지점을 향해 최선을 다 해 달리는,집중해서 달리는, 또 두번째로 허공을 치지 않고, 권투 선수가.
26절까지 첫째는 경주자의 비유로, 둘째는 권투선수의 비유로, 권투선수가 상대의 얼굴을 향해 때렸을 때 허공을 치는 것 같아서야 되겠습니까,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허공을 치듯하지 않고 목표에 정확히 치듯이 하려 한다. 그런데 이것을 하기 위해서, 이렇게 효과적으로 경주를 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겠어요.
27절 전반부 어떠한 것이 필요해요. 시련이 필요하다. 각고의 단련, 내가 몸을 처 복종케 함은, 각고의 단련, 절제와 단련, 자기 육신의 소요, 좀 놀고 싶고, 죄에도 빠지고 싶고, 향락도 좀 즐기고 싶고, 이런 것이 우리 인간들의 보편적인 경험 아닙니까. 그럴 때 마다 바울이 뭐라구요, 내 몸을 쳐서 나로 하여금 구원의 목표를 향해서 달려가는, 나로 하여금 나의 소명을,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 하신 바, 절대 주권자이신 창조주, 나를 지으시고,역사를 다스리는 주, 께서 나를 구원으로 부르셔서 그 분을 주로 부르게 했다말이예요. 그 주가 나를 자기의 영원한 구원의 계획의 운영상, 어떤 일을 감당케 하기 위해서 나를 구원하셨을까? 그것이 나의 소명이예요.바울에게 있어서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그역활을 담당하게 하는, 하나님의 이방인을 구원하고자 하는 구원의 계획에 가장 중요한 부분을 담당케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바울을 용서하시고, 하나님의 원수 노릇하는 이, 핍박자 바울을 용서하시고, 자기에게 화해시키시고, 그에게 하나님 아들되는 단서를 주시고, 구원을 주셨단 말이예요. 그러기 때문에 바울은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안에 있는 그에게 부여된 그 직분,을 제대로 감당함으로써 자기가 구원을 받고, 그렇지 못하면 자기가 칼을 맞아요, 그러기 때문에 자기가 절제하고, 단련하고, 하나님의 뜻을 늘 거슬리려고 하는 우리의 육신적인 우리의 자아가 요구하는 것 다 뿌리치고, 향락에 빠지고 싶고, 죄를 짓고 싶고, 거짓말 할려고 하고, 남을 이용할려고 하고, 이런 충동이 있을 때마다 절제하고, 단련하고, 몸을 처 복종시킨다. 이 얼마나 강한 표현입니까? 이렇게 해서 목표, 경주자가 향방없이 달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리는 것이다. 권투 선수가 목표를 분명히 하고 치듯이, 소명을 달성하므로 말미암아 구원 받는 것이 목표예요, 바울의 목표. 그래서 다시 9장 27절 이제 후반부가 총 결론이예요. ‘내가 남에게 전파 한후에 내 스스로 구원 못 받는, 버림 받는 일이 있어서는 아니되겠기에, 복음의 효과적인 선포를 통해서는 개인적인 수련,절제하고 단련하는, 목표를 분명히 정하고, 달려가는 그런 걸 통해서 자기가 구원받아야 한다. 하나님으로 부터 버림받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고, 그 이야기예요.
바울이 보시는 바와 같이 세번 똑 같은 이야기를 되풀이 하고 있어요. 중간 중간에 그 설명을 부연하고 있어요. 자 이 두절을 염두에 두시고 본문을 읽고 우리에게 간단히 적용해 보는 그런 일을 하고 10장으로 넘어 갈려고 합니다.
9장 16절부터 교독하겠습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내가 내 임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임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직분을 맡았노라.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인하여 내게 있는 권을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라.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아래 있는 자에게는 내가 율법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융법아래 있는 자를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첨예하고자 함이라
운동장에서 달음질 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들은 썩은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 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 하기를 향방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 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여기서 바울은 제가 여러번 시사한 바울의 소명사상,을 잘 표현하고 있어요.그것이 정리된 말로 여러분의 강의안 58페이지 제일 위에 거기 한번 제가 읽어 보겠습니다.
바울은 효과적인 복음의 선포를 위하여 많은 사람들을 구원함으로써 자신도 그들과 더불어 구원의 능력인 복음의 덕을 입고자 하였다. 이 말씀은 앞서 나오는 16절과 뒤에 나오는 27절과 더불어 갈라디아서 1장 15절,16절,로마서 1장 14절 등에 표현 된 바울의 소명사상의 표현으로 보아야 한다.하나님께서는 그의 이방인들을 구원하려는 구원의 계획에 바울을 도구로 쓰시고자 그를 다매색도상에서 구원과 사도직에로 부르셨으므로 갈라디아서 1장 15절에서 16절에 써졌어요, 그러므로 바울은 하나님께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빚을 진 자로써, 로마서 1장 14절에 내가 모든 이방인에게 빚진 자라. 위대한 선언이 그렇게 해서 나온다 그러죠. 빚을 진자로써 그들에게 복음을 효과적으로 선포하여 그들에게 구원에 이르게 함으로써 스스로도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선포는 그의 숙명으로써 그의 구원과 직결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가 이 숙명을 거스리면 그는 구원에 이르지 못하고 그는 화를 당하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 여러가지 일들을 한다 말이예요.
여기서 우리가 생각 해 볼 것은 우리는 우리 각자의 소명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이 말이예요.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를 그의 주권자적 목적 가운데에 무엇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 무엇을 쓰시기 위해서 우리를 구원하셨는가. 한번 생각을 해봐요.
구원이라는 것이 너무 관념화되고 추상화 되어서 우리의 현재의 삶과 관계없이 사람들이 많이 이해해요. 그렇지 않아요.
구원이라는 것은 아주 구체적으로 지금 여기서 내가 체험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제림때 완성 될 그 구원을 향해서 우리가 가는 자들로써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음으로 이미 구원의 첫열매를 받은 자들로써 지금 구원 받아가고 있는 거예요. 우리의 지금 삶의 모든 체험이 우리의 한계가 있어요. 우리 삶이, 우리의 구체적인 삶이 구원이 체험되어 가는 장이예요. 우리의 모든 활동, 직업 활동이라고 하는 중심적인 활동등 우리의 모든 활동이 우리의 구원이 실현되어 가는 장이예요.
그러기 때문에 우리 각자가 한번 생각해 봐야 해요. 하나님께서 나에게 그의 어떠한 주권자적 목적을 위해서 내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셨나, 그래서 자기의 소명을 확인 하는 게 아주 중요해요. 소명을 확인 하고,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신 바 목적, 그 소명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서 내가 바울의 복음따라 내가 이런 자세로 살고 있는가,아닌가, 또 이게 확인하는 게 아주 중요해요.그렇지 않으면 구원이라는 것이 너무 관념화되어 아무 의미가 없이되요. 그러면 곧 보겠지만 고린도 사람들 같이 돼 버린다 말이예요. 그렇지 않기 위해서는 첫째가 각자의 소명을 확인 할 것, 어떻게 확인 하느냐, 하나님께서 나를 무엇을 위해서 구원 한것이냐,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직분으로 소명만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구원 하실 때 우리에게 그 사명만 주시는 게 아니고 그 사명을 감당 할 은사를 주신다고요, 은사,그 은사가 누구냐, 우리를 구원에로 부르시고 우리를 사명에로 부르시는 그 은혜의 구체화 된 표현이라고 지난번에 제가 여러분에게 여러번 설명 했어요. 그래서 우리의 소명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슨 은사를 주셨는가, 이걸 헤아려 보는 것도 중요하고, 지금 현재의 삶, 역활, 도는 그 직업, 이런 것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내가 하나님께서 나에게 지금 사업가로서, 또는 공무원으로서,또는 선생으로써, 의사로서, 한 가정을 잘 꾸려가는 주부로서 이 직책을 주셨는데, 이 지금 이 장에서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무엇을 하게 하시나, 그런 소명을 각자 확인 할 것이며, 둘째로 그 소명을 확인 했으면 각자 자기의 직업이, 자기의 활동이 이 세상에서 겨우 살기 위해서 갖는 활동이 아니고 하나님의 천지를 지으시고 역사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주권자적 경륜, 하나님의 이 세상을 경영하시는, 구원하시고,그의 모든 인류에게 그의 구원을 풍성하게 제공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그 구원의 계획의 운영에 중요한 일부를 내가 담당하는거다. 내가 하루 종일 책상에 앉아서 도장을 찍는 행위가 무의미한 행위가 아니고, 내가 하교에 가서 코 흘리개들을 가르치는 것으로 월급 받아 겨우 처자식 먹여 살리고 하는 정도의 내 생활의 안락한 정도를 영위하게 하는 정도가 아니고, 그것을 넘어서 나의 삶과 나의 삶의 활동에 대상이 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전달하는,직접적인 전달도 있겠고, 또는 간접적으로 하나님의 섬김을 통해서, 하나님의 진리를 드러내고 또는 하나님의 그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구원을 얻도록 하는 체험하게 하는 아주 귀중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에 일부를 담당하는 그런 의미를 갖는 거예요. 그림을 그리는 예술가가 자기 혼자 만족하기 위해서 그림을 그리는 것도 아니고, 그림을 팔아서 돈을 벌어서 좀 더 안락한 생활을 하려는 의미만 있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체험토록 함으로써 하나님의 구원의 그 면, 그 측면을 체험케 하는 것, 이게 미술가의 소명이요, 음악가의 소명이예요.이렇게 해서 인류를 구원코자 하는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에 일부를 담당함으로써 우리 삶의 대상, 우리 활동의 대상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전달하는 것, 그러면 그 소명을 위해서 우리가 어떤 태도를 가져야겠어요. 이 소명을 다 감당하면 구원을 얻고, 그렇지 못하면 화를 받는다는 이 두렵고 떨림의 자세, 오늘 우리의 삶이 구원과 무관하지 않아요. 우리의 직업 활동, 우리와 날마다 접촉 상태에 들어오는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 이게 다 우리의 구원과 무관하지 않아요. 우리의 삶 전체가 우리의 구원이 실현되어 가는 장이예요. 우리의 소명을 다 감당함으로써 우리가 구원을 받아가고, 구원의 완성을 향해서 가고, 그 소명을 거부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우리 스스로를 가둬 버리는 행위에요.옛 아담이 저질렀던 행위를 다시 저지르는 그런 일을 할 수가 있어요. 그런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화가 임 할 것 임에 대한 경고,그래서 바울이 여기 자기 스스로 끝내 버림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서 섬김의 자세, 그것을 위해서 절제하고 단련하는 운동선수들을 넘어서 그보다 훨씬 더 절제하고 단련하는 자로 달려간다. 이렇게 말하고 있어요. 그래서 우리 한번 두 가지에 대해서 성경공부를 통해서 새롭게 점검 해 볼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됐을 때 우리 삶은 더 의미 있어지고,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의 일부를 담당하고,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을 더 체험하게 하는, 하나님의 평화를 더 체험하게 하는, 하나님의 치유를 더 체험하게 하고, 하나님의 그 아름다움을 더 체험하게 하는 이런 놀라운 은혜가 있다. 이런 소명을 가진 사람은 자격지심 갖고, 열등감 갖고, 좌절하고, 그럴 수가 없어요. 하나님의 동역자로, 하나님의 일꾼으로 세움 받은 자인데 어떻게 자기를 무시하고, 멸시하고, 그럴 수 없어요.
잘못 되었을 때 다시 일어 서는 자세로 더 절제하고,더 단련하고 해서 다시 목표를 분명히 하고 다시 달려가는 이런 나무의 자세를 갖는거지,좌절하고 열등감 갖고, 자격지심 갖고 이럴 수가 없어요. 소명의식을 분명히 갖고 소명을 위해서 진지한 자세로 달려감으로써 우리가 구원을 완성 해가는 거예요.지금 이런 자세를 바울이 고린도인들에게 보여주고 있어요. 자신의 예를 들어서. 이게 오늘 성경공부의 첫 요점이고, 둘째 요점은 바울이 고린도인들에게 지난번에 우리가 쭉 해왔죠, 왜 자기의 예를 들어서 아주 진지한 언어로 구원과 멸망의 가능성을 고린도인들 눈 앞에 보여주면서 자기가 어떻게 파멸의 구렁텅이로, 하나님의 진로, 과의 구렁텅이로 빠지지 않고 구원을 얻기 위해서 목표를 향해 달려 가는가, 이 모습을 왜 보여줍니까, 고린도인들 중에 특히 강한자들의 경거 망동을 책하기 위해서 그러죠, 그들은 왜 우상숭배의 활동에 참여 해도 된다, 그런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또 연약한 형제들, 그들은 신앙이 옳지 않아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를 잘 알지 못해서 율법주의로, 또 소극적으로 사사건건 시비만 하고 참 불행하게 사는데 ,그들을 무시해 버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를 만끽하고, 구원받는 자로서 당당히 살겠다, 이런 사람들에게 바울이 경고하면서 자신을 모범으로 삼아서 그렇게 살면 안된다고, 이렇게 살라 그런 가르침을 하고 있는 것이죠.이 고린도인, 강한자들은 이미 경거망동의 자세가 어디서 나오는가 하면,구원의 확신을 가진자들로서 세례때 성령을 체험하고, 성령의 이른바 은사들을 자기들이 시위할 수 있고, 특히 방언이라든지,치유하고 이렇게 가시적으로 잘 드러나는 은사들을 자랑하면서, 우리가 이미 구원받은 증거 아니냐, 우리는 이미 구원받았다, 이런 구원의 확신에 사로잡힌 사람들, 이 사람들은 이제 구원은 자기 주머니 속에 따논, 상으로, 자기의 소유물로 가지고 있는 거예요.
지난번에 우리가 앞에 장들에서 그런 걸 많이 봤죠.이제 아주 냉소적으로 너희들이 이제 하나님의 나라에 당도했구나, 너희들이 벌써 왕들이 되었구나, 제발 그렇게 되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 구원의 완성이 이루어졌다면 우리도 함께 너희들과 왕 노릇 할 수 있을텐데, 하고 바울이 아주 냉소적으로 말하죠. 그런데 이게 본질적인 문제예요. 이 사람들의, 구원의 확신을 가지면 가령 세례를 체험 한다든가, 여기 곧 10장에서 보시다시피 세례와 성 만찬이 구원을 보장하는 마력적인 힘을 가진 것으로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이 사람들이 세례 때 체험하는 성령이 증거요, 자기들이 지금 자랑할 수 있는 방언이나, 이런 것이 그 물증이요, 날마다 모일때마다 되풀이 하는 성찬식이 확실한 보증이요, 해서 자기들이 구원을 확신했다. 그러므로 이제 아무렇게나 살아도 되는 거예요. 우리 한국의 구원파들도 마찬가지로, 그런 사람들에게 바울이 지금 경고하는 거예요. 전에도 제가 빌립보서 강의 할 때 말씀을 드렸지만,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구원의 확신을 얻느냐, 그 문제로 고민들을 해요. 교회를 오래 다닌 사람들도 구원의 확신이 없다고도 하고, 또 구원의 확신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이 가끔씩 와서 교회를 오래 다닌 사람들을, 주의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사람들을 골탕을 먹여요. 당신 교회 20년, 30년 다녀서 집사가 되고, 장로가 되었는데 진짜 구원의 확신이 있소,글쎄 잘 모르겠는데, 예수믿고 성경도 잘 읽고, 목사님 말씀따라 교회 봉사도 잘 하고, 하는데 구원의 확실한 그 무엇이 내 신앙속에 뜨거운 무엇이 있어야 된다면,내가 어느날 갑자기 내 눈 앞에 밝아지는 그런 체험을 해야 하는 것이라면, 또는 내 마음 속에 갑자기 밀물같은 평화가 나를 압도하는 그런 체험이 있어야 하는 것이라면 , 나는 그런 건 별로 없었던것 같애, 그러면 나는 구원을 확신 할 수 없구만, 그러면 당신은 구원 못 받았소, 그러면 어떻게 되요, 큰일났지요.그래서 고민을 하기 시작해요. 그런데 그런식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의 구원의 확신이 뭐냐하면 우리의 심장에서의 주관적인 느낌, 내가 구원 받았다 하는 느낌, 이것이 우리를 구원하는 줄로 생각해요. 그런데 여러분도 다 아시다시피 초보 심리학이 가르쳐 주듯이 우리의 확신이라는 것, 느낌이라는 것,은 얼마든지 조작 할 수가 있어요. 심지어 양심이라는 것도 문화적 훈련에 의해서 이루어져요. 우리의 구원의 확신이 구원 받는 게 아니예요. 우리가 뭘로 구원 받아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죠.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아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는다는 말은 우리의 모든 죄악스러움과, 부족함,심지어 우리의 믿음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는 무엇무엇에도 불구하고예요. 예수님에게 구원을 체험하려는 사람, 귀신들려 경기 하는 아들을 안고 달려온 아버지가 뭐라고 합니까, 내가 믿습니다, 나의 믿음 없음을 도와 주십시오. 이게 믿는 자의 자세라고요. 내가 믿는다,확신 있다,그러므로 내가 구원 받는다, 그게 아니고 전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에 달렸다고 생각 할 때 비로소 진짜로 구원의 확신이 생기는 거예요.구원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로든지 우리의 무엇, 우리의 공로,우리의 무슨 지혜, 우리의 무슨 능력, 우리의 무슨 선행, 이런 것들과 무슨 관계 있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가 없어요. 왜, 우리의 지혜는 항상 부족할 수 밖에 없고,우리의 선행도 항상 부족할 수 밖에 없고, 우리의 선행의 동기도 항상 섞여있어요. 인간의 심장같이 강한게 없어요, 에레미아가 말한 거와 같이. 우리의 선행, 우리의 사랑 행위를 유발시키는 동기 자체도 굉장히 항상 섞여 있어요. 진정한 나를 내어 주려는 이웃 사랑에 대한 순수한 동기와, 누가 나를 좀 알아 줬으면, 누가 나의 선행을 알아 줬으면, 하나님께서 나를 보상해 주시겠지, 이런 불순한 것들이 섞여 있어요. 그래서 우리 선행이라는 것도 완전 할 수가 없고, 우리의 지혜도 완전 할 수 없는 것이고, 그래서 우리 구원이 이런 것과도 조금이나마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는 구원의 확신을 가집시다. 우리는 우리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오는데, 그것은 우리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은혜라는 말은 불구하고의 은혜란 말이예요, 우리의 믿음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사랑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그냥 주신 은혜로, 은혜로 주신 선물,로서 내가 구원을 받는 거다, 이렇게해서 비로소 우리가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가 있어요. 그런데 이렇게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을 때에, 바울이 다맥시도상에서 갑자기 하늘에서 내려 온 하나님의 개시의 빛, 속에 나타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는 체험, 이런 체험이 있어요. 가끔씩. 그러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믿음이 그렇게 오는 게 아니고, 믿음의 체험이 그렇게 오는 것이 아니고, 내가 그리스도를 알고, 성경을 공부하고, 설교를 듣고, 하면서 그리스도를 알고, 그를 주로 고백하고, 우리 구체적인 삶에서 그에게 의존하고, 우리 구체적인 삶에서 그에게 순종하는 이것이 우리의 신앙체험이예요, 대부분. 그러니까 구원의 확신이 꼭 바울과 같은 체험이 있어야 구원의 확신이 있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들이 돌아 다니면서 묻는 사람들, 자기들이 주장하는 마음에 확신이 있어야, 그래서 편안한 상태가 되어야 구원을 확신한다, 그런 것도 아니예요, 아니예요. 우리 구원의 확신을 얻고 싶으면 그 증거가 뭐냐하면, 내가 지금 나의 구체적인 삶의 장에서 예수를 주로 고백하나, 다시 말하면 예수께 의존 하는가, 그건 우리가 확인 할수 없잖아요. 여러분들 삶의 구체적인 장에서 여러분들 예수께 의존 합니까? 예수님께 지혜를 달라, 사랑을 주십시오, 남들을 사랑 할 수 있도록 사랑을 주십시오.이 어려운 경고 속에서 도움을 주십시오, 여러분들 구체적으로 의존 합니까, 그것이 있으면 구원 받은 자예요. 그러한 근본적인 삶의 자세가 있으면 그는 자신이 구원 받았다고 확신해도 돼요. 또 구체적으로 삶의 장에서 예수께 순종하려는 게 있습니까, 우리가 그렇게 합니까, 백번 실패해도 한번이라도 돌이켜서 주께 순종하려 하고, 실패 했을 때는 다시 한번 회개하고,내가 주께 순종해야지, 그런 자세를 우리가 새로 갖게 됩니까, 그런 자세가 있으면 우리는 구원 받은 거예요, 구원 받은 증거예요, 예수를 주로 아는, 주로 고백하는 자의 삶 아닙니까. 그러니까 예수를 주로 고백하면 구원 받은 거예요. 여러분들 유명한 로마서 10장 9절이 뭐예요, 누가 구원 받았어요,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자가 구원 받은 거예요. 우리의 구체적인 삶의 장에서 예수를 주로 고백한다는 말은, 예수의 주권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예수의 주권에 전적으로 순종한다는 말인데, 그렇게 할려는 의식적인 노력이 내 속에 있으면 나는 뭐하는 자예요, 주를 아는 자요 주를 고백하는 자예요. 그 사람에게는 성경이 뭐라고 선언 합니까, 하나님 말씀이, 구원 받은 자로 선언해요. 그런데 왜 자꾸 의심합니까, 우리가 요구하는 게 뭐예요, 어떻게 내 심장에 감정을 어떻게 조작해서 나도 좀 구원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 같이 감정을 좀 얻을 수 없나, 그런데 그런 감정은 아무 소용이 없는 거예요.예수에 대한 구체적인 순종 없이 나의 구원 받았다는 감정은 아무 소용이 없어요.구원의 확신이라는 감정이 우리를 구원하는 게 아니고, 주관적인 감정이라는 것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데 그 구원 능력을 우리가 어떻게 힘 입느냐, 덧 입느냐, 구체적으로 주 예수께 의존함으로 해서 나의 온전해진 나를 체험 할 때, 구체적으로 주 예수의 완벽한 뜻에 순종했을 때, 내가 다시 온전해지는 그 치유, 그 자유, 그 평화를 누리고 나의 순종을 나와 접촉 상태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그만큼 하나님의 자유와,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아름다움,하나님의 치유와 해방이 일어 날 때, 그 때 우리는 구원이 일어남, 구원이 발생했음을 확인 할 수 있죠.
그 때 우리는 구원의 확신을 갖는다는 거예요. 구원의 확신을 주관적인 감정의 상태로 오해를 해서 그런 것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상당히 구체적인 삶에서 무책임 해지기 쉬워요. 이 고린도 사람들 같이. 나 구원의 확신이 있으니까, 이제 구원은 이제 따논 당상이니까,내 주머니에 있으니까, 내가 죄를 좀 지어도 내 멋대로 좀 살아도, 나의 영혼의 구원은 지장을 안 받는거지, 이렇게 생각해서 도덕성이 결여되기 시작해요.그래서 구원파 사람들에게는 도덕성이 결여 되는 것이며, 고린도 사람들 같이 성령의 은사, 가시적인 은사들로 자신들의 구원의 확신하려는 오순절 계통의 사람들이 도덕성이 상당히 약해요. 우리 한국도 마찬가지예요.
교회사적인 실제예요, 항상. 그래서 바울은 그런 사람들에게 지금 구원의 확신이라는 것이 무책임한 부도덕을 조장하는 것일수는 없다, 하는 것을 보이고 있어요. 왜냐하면 정리된 말로 조금 하고 시간이 됐으니 그만 할려고 해요.
나는 하나님의 은혜에 전적으로 신뢰하는 자로서만 즉 그의 사랑의 뜻에서 순종하는 것으로 표현되는 나의 하나님에 대한 신뢰로만 그의 구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그러므로 궁극적으로 진정한 구원의 확신은 객관적인 근거 없는 주관적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 나의 생각과 삶에서 구체적으로 주께 의존하고, 그의 선한 뜻에 순종하려는 의지를 갖고 있는가의 문제예요. 이 의지가 약화 될 때에 우리는 스스로가 불신앙의 도전을 받고 있음을 인식하고, 그 때 나 구원을 잃어 버렸다 이렇게 말하지 말고, 이 불신앙의 유혹을 믿음으로 극복하는, 즉 새롭게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하고, 그의 선한 뜻에 순종하려는 결단을 하는 일을 반복해야 해요.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과 그 때 있을 우리 구원의 완성 때 까지 우리의 믿음은 완전 할 수 없어요. 우리의 믿음은 어쩔 수 없이 사단의 세력과 사단의 세력의 공격에 노출 된 것으로써 시험과 회개와 새로운 신앙의 결단을 되풀이 할 수 밖에 없는 것이예요. 우리가 날마다 회개와 신앙의 결단을 새롭게 하는 한 우리는 우리의 구원의 완성을 향해 확실히 달려가는 자로서 구원의 확신을 가져도 좋아요. 아니 구원의 확신을 가져야 해요.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평안함, 자유함을 알아야 된다 이말이예요. 예수 믿는 사람들은 평안함, 자유함이 없으면 안돼요. 기쁨이 없으면 안돼요.왜냐하면 그것이 곧 성령의 우리 안에서 내재함의 실증이기 때문에 날마다 회개와 신앙의 결단을 새롭게 하는 것, 이것이야 말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요, 내 안에서 성령의 역사란 말이예요. 그러니까 내개 날마다 회개와 믿음의 새로운 결단, 하나님께 의지하고 순종하려는 새로운 결단, 이것이 있는 한 성령이 우리 가운데 역사하심에 대해서 우리가 확신 할 수 있어요. 그것이 우리의 구원의 확신의 근거 아닙니까? 하나님의 뜻, 보편적으로 모든 참된 것, 모든 선한 것, 모든 아름다움을 추구하려는 것,우리 삶의 장 곳곳에서 참된 것을 추구하고,아름다운 것을 추구하려 하고, 선한 것을 추구하려 하고,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요구하는 뜻이죠.
저짓말 하고자 하는 유혹에서 물리치고, 참아야 하고, 남을 미워하고, 무시하려는 유혹이 있을 때, 자기를 내 주는 사랑을 베풀고, 추악을 선호하려는 우리 암흑의 시대, 타락의 시대에, 진정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려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뜻이죠. 이런 하나님의 뜻, 또 더 구체적으로 각자에게 제시하는 소명, 각자에게 구체적으로 주시는 소명, 거기에 담긴 하나님의 구체적인 뜻, 이것들에 대해 순종하고, 뜻을 성취 할려고 우리가 부단히 노력하고,실패하면 다시 회개하고, 새롭게 결단하고,이렇게 부단히 노력 할 때,우리는 구원 받은 자로서 구원의 천명을 받은 자로서, 구원의 완성의 목표를 향해서 달려가는 자예요. 좌우로 치우치는 자 아니고,목표를 분명히 하고,절제하고, 단련하고 그렇게 해서 달려가자. 그러나 구원의 확신이 그러니까 자만과 방종이 되어서는 안된다. 자성하고 회개하고 새롭게 결단하는 달려가는 자로의 긴장, 이것을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뭐라고 표현해요. 두렵고 떨림이라고 해요. 긴장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구원의 확신이 주는 평안함, 안도함,과 구원의 완성을 향해서 하나님의 소명을 성취함으로써 구원의 완성을 얻는다는, 달려가는 자로서의 지금 바울이 요 부분에서 강조하는 긴장, 두렵고, 떨림.이 동시에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에 기본적인 자세로 요구되는 거예요. 이제 그것의 좀 더 구체적인 것은 10장에서 살펴보기로 해요.


고린도 전서 강해(33)
본문 고전 10:1~13

본문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강한자들에게 출애굽을 예로 들어 경고하고 있다. 지금까지 바울은 고린도의 열광주의 자들-성령의 체험을 내세우면서 자기들이 성령과 지식을 가진 것을 자랑하면서 물질이나 육신적인 것은 영적구원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문란한 성생활을 하여 이방인들의 잔치에 참여하는 것을 시정할려고했다. 지금까지 5장에서 7장까지는 문란한 성생활을 지적했고 8장에서 10장까지는 우상의 신전의 잔치에 참여함으로 이들이 과거에 받았던 우상의 영향읗 다시 받지 않을까하는 마음으로 경고하고 있다.

오늘의 본문인 10:1~13절에서 바울은 강한자들이 그들의 세례와 성만찬이 마술적 능력으로 그들의 구원을 보장한다는 오해를 이야기 하고 있다. 이들은 세례와 성만찬으로 영적 구원을 지탱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따라서 육적으로는 무슨짓(우상숭배, 간음등)을 해도 관계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들은 자기들의 성령의 표시를 방언이나 이적을 보는 것으로 나타나고 예배때마다 거행하는 성찬식을 통해 그들의 영적 구원을 자신하고 있었다.

이 본문에서 중심되는 충고는 12절에서 나오고 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여기서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구원을 받았다고 자만하는 자이다. 이 본문이 바로 바울의 충고의 핵심이다. 우상의 실제를 부정하는 고린도의 강한자들은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은 돌조각, 나뭇조각이 진짜 신인줄 알고 그 앞에서 먹고 마시고 잔치를 하는데 우리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그 자리에 동참해도 우상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다’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바울은 19절 이하에서 새로운 인식 하나를 첨가하고 있다.
우상자체는 문제가 아닌데 우상을 이용하는 세력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 우상이 실체가 아니라 그것을 이용하는 세력인 마귀가 그것을 이용함으로써 사람들을 미혹해 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상이 문제가 되는 근본적인 이유이다. 바울은 여기서 고린도 교회의 강한자들을 출애굽세대와 비교함으로서 경거망동을 하지말것 즉, 우상과 성문란에 빠지지 말 것을 경고하고 있다. 우상과 성문란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순종의지가 약화될 때 오는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시험에 빠지지 말 것을 이 본문을 통해 바울은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출애굽한 예를 6절에 우리의 거울이 되게 했다고 이야기한다. 11절에 ‘이런일이 거울이 되고’ 거울이라는 말은 모형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출애굽세대의 하나님에 대한 체험이 오늘 신약의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모형이라는 말이다. 모형이라는 말은 전형이라는 말로 바꾸어 사용할 수 있다.


그들이 경험한 축복도 전형이요. 그들이 받은 징벌또한 전형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그들과 같이 우리도 경거망동하면 그들이 광야에서 징벌받은 것같이 우리도 징벌 받을 것을 바울은 경고하고 있다. 이런 것을 모형론이라고 한다. 이러한 역사 이해는 궁극적으로 유대인들의 역사관에 종말은 태초와 같다는 기본원칙에서 나오는 것이다.

종말의 구원은 태초의 낙원의 회복이다. 가령 바울은 예수그리스도를 마지막 아담이라고 부른다. 태초의 아담의 축복의 상태를 회복한 분, 새 인류를 창조해서 새 인류의 축복을 가져 오신 분이라는 의미로 그리스도를 아담이라고 칭한다. 구약에서는 출애굽사건이 구약의 구원의 사건이다. 그래서 유대신학에 의하면 출애굽의 구원은 태초의 낙원으로 보고 있다. 유대문서들을 읽어보면 출애굽세대가 광야에서 먹은 만나, 물 등은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기 전에 낙원에서 먹고 마셨던 천사들의 음식 즉, 신령한(영적인)음식을 먹고 마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출애굽세대가 금송아지를 만들며 우상숭배를 저지르는 범죄를 하였던 것은 낙원에서 아담과 하와가 사단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불순종한 죄의 되풀이로 보고 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가 낙원에서 추방되어 죽음의 영역속에 빠졌듯이 출애굽세대도 마찬가지의 길을 걸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필요한가?
진짜 종말의 구원이 또 필요한 것이고 그것을 그리스도께서 가지고 오셨다는 것이다. 11절을 보면 “저희에게 당한 이런일이 우리에게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에게 경계”로 기록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말세때 종말을 사는 사람들을 이야기 한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나라가 오고 종말이 시작되었으며 ‘우리’라는말은 고린도 교회 사람들 까지라는 것이다. 그래서 신약 성경은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제 2의 출애굽사건으로 보며 동시에 태초의 회복으로 그리고 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말은 태초가 복원이 되며 그리스도의 구원을 제2의 출애굽과 태초의 회복이라는 두가지로 보고 있다.
본문은 전자에 주안점을 두고 있으며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의 예를 들고 있다. 유대인들의 역사관은 종말은 태초와 같다는 사상을 원칙으로 가지고 있었다. 이 원칙은 종말의 구원은 태초의 낙원임을 함축하며 한편 출애굽의 구원은 태초의 낙원의 회복으로 이해되었고 종말의 구원은 제2의 출애굽 구원 즉, 태초의 낙원의 회복으로 기대되었다. 이런 역사관에 따라 유대 신학은 종말의 메시아를 모세와 같은 메시아로 보고 메시아를 통한 구원을 제2의 출애굽사건으로 기대하였다. 그래서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예수께서 광야에서 5천명을 먹이자 덕을 본 사람들이 ‘예수가 모세와 같은 선지자다’라고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모세가 광야에서 만나를 주었듯이 이사람이 우리에게 만나를 주는구나해서 예수를 지도자로 추대할려고 하였다. 바울과 초대교회도 이러한 사상을 이어받아서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한편 제2의 출애굽으로 설명하고 그를 통한 새 언약을 모세가시내산에서 세운 옛 언약에 비교하고 그리스도를 통해 드려진 언약의 제사를 통해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창조 되었음을 이야기 하였다. 그래서 교회를 새 이스라엘로 보며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을 새 유월절 양의 희생으로 보며 다른 한편 예수그리스도를 마지막 아담이라 부르고 그리스도인들을 새피조물들로 그리며 하나님의 영광된 형상을 회복할 자들로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전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종말의 구원을 태초의 낙원의 상태로 보는 관점에서 시작한다.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하나님의 구원사에 중요한 인물들이나 또는 사건들의 모형에 비추어 해석하는 것을 모형론이라고 한다.

본문에서도 바울은 모형론을 적용하여 출애굽하여 가나안으로 가기 위해 광야를 지나는 세대를 새언약에 의해 하나님의 종말의 백성된 교회의 전형으로 보고 홍해 건넘을 후자의 세례의 모형으로 전자의 광야에서 만나먹음을 후자의 성만찬의 전형으로 보며 고린도 교회의 방자한 행동들이 출애굽세대의 우상숭배와 같아지지 않아야 할 것은 경고하고 있다. 고린도의 강한자들이 세례나 성만찬의 자체가 마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홍해와 만나를 먹은 출애굽세대가 징벌받았음을 예로 경고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세례나 성만찬은 자동적으로 우리의 구원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의 신학사에서도 고린도 교회의 이러한 형태가 자주 되풀이 되었었다. (ex. 카톨릭의 성체, 성례의식) 1절부터 간단히 보면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말은 엄숙한 선언의 형식이며 독자들의 관심을 유도하는 아주 중요한 것이다. 내용인즉 우리조상들이 다 구름아래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났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리스도인 들의 세례는 출애굽시대의 구름아래 있음과 홍해를 지나감에 있음을 비교하고 있다.

‘우리 조상들’이란 말을 유의해 보자. 지금 바울은 고린도의 헬라인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출애굽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우리조상이라고 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의 연속성,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하나님의 백성된 자는 인종을 초월하고 민족의 차이를 초월해서 다 함께 창조때부터 종말때까지 계속되는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에 참여 시키고 있다. 그래서 구약시대의 하나님의 백성이 우리의 조상이라는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 4장에서 아브라함은 육신적인 유대인들의 조상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가진 모든 사람의 조상이다라고 이야기한다. 이것은 중요한 개념으로 오늘날 가장 문제점으로 제시되는 것중의 하나인 민족주의 문제를 경고하고 있다.

민족주의는 항상 인간에게 가장 큰 갈등을 유발시켜 왔다. 자기민족에 대한 사랑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기독교적 사해동포주의에 의해서 교정되지 않으면 기독교는 평화의 힘, 사랑의 힘으로 작용할 수가 없는 것이다. 기독교 자체가 너무나 오랫동안 민족주의에 이용되어 오히려 갈등을 일으키는 요소로 오해될때가 참 많았는데 그리스도의 한 믿음안에서 우리는 모두 한 민족인 것이다. 2절에서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이 번역은 ‘다 구름과 바다에서 모세 속으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영적인 식물을 먹으며 다 같은 영적인 물을 마셨으니라고 하여야 옳바른 해석이 된다.
출애굽 시대의 구름아래 있음과 홍해 건넘은 모세속으로 세례받음의 사건이었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다. 모세속으로 세례 받았다는 표현은 유대인등은 쓰지 않는 표현이다. 이것은 그리스도 속으로 세례받음을 비유하여 만든 것이다. 롬 6:4, 갈 3:27절을 보아 바울의 우리가 그리스도 속으로 세례받는다는 뜻은 그리스도의 이름속으로 세례받음의 약자로 볼수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구원의 주권의 영역으로 들어간다는 뜻이고,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의미하며 그래서 그리스도의 소유물이 된다는 뜻이다. ○○의 이름으로 라는 말은 ○○의 통장속으로 라는 말이다. 그의 소유물이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구름은 구약에서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출애굽세대의 위에 있었던 구름은 그들이 하나님의 임재하심아래 있었음을 의미한다. 유대신학은 민수기 20:7~11, 21:6절에 근거해서 이스라엘에게 물을 공급하는 바위가 광야 여행중 그들을 줄곧 동반 했다고 보았다. 유대철학자 필러는 이 바위가 하나님의 지혜였다고 가르친다. 하나님의 지혜를 인격화한 지혜신학은 말씀신학과 같은 개념으로 이것이 하나의 물체화가 된것이다. 추상적인 개념이 아닌 구체적으로 공간과 시간을 점유해 인격화가 되었는데 지혜는 하나님의 딸이라고 표현되고(잠 8) 말씀은 하나님이 아들로 묘사되는데 그 이유는 헬라어와 히브리에서 지혜는 여성명사이고 말씀은 남성명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물체화되고 인격화된 지혜가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아서 하나님의 사자노릇을하여 하나님의 일꾼노릇을 하게 된다.

다시말해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는데 그의 딸 지혜를 보내서 세상을 지었다는 것이다. 또 볼수 없는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이 지혜인데 지혜있는 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요 지혜의 근본은 하나님을 경외함이라고 되풀이 되풀이 되고 있다. 반대로 지혜없는 자는 하나님을 없다고 하는자이다. 그러므로 지혜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계시해 주는 자이다. 이것은 납득하기가 좀 어려운 개념인데 그 의미는 하나님이 초월자 되심과 그가 이세상가운데서 구체적 활동을 하시는 내재자 되심을 말하고자 하는 신학언어 수단이다.

그래서 모든 구약의 구원의 행위에 사용된 매개체(ex.므리바의 바위)를 지혜라고 하였다. 이제 바울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해 부분적으로 계시하셨던것들이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계시되었을 때에 그 온전히 계시된 빛아래 되돌아 봤더니 구약과 유대교에서 구원의 활동으로 쓰였던 것이 하나님의 말씀또는 지혜라고 하는데 그게 사실을 성육신 하기전에 삼위일체로 존재하시는 제2의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활동을 그렇게 말했구나라고 깨닫게 된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4절에서 그들을 따라 다니면서 신령한 영적인 음식을 공급함으로 그들에게 구원을 준 그 반석, 그 바위가 바로 그리스도였다는 것이다. 성육신하기전에의 그리스도의 구원의 활동모습이었다. 그것을 부분적으로 계시받은 유대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지혜, 말씀이라고 보았는데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 계시를 받더니 바로 그게 성육신 하기전의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깨닫게 된 것이다. 요 1:1~18절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완전히 내재해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모세를 통한 계시보다 완전한 계시를 받게되었다.


(34)10장 1-13절
지난시간 10장의 성령 체험을 강조하고 지식을 자랑하면서 자신들의 구원에 확신을 가지고, ‘육으로든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생각으로 성문란하게 살던 사람들을 경고한 바울을 보았다. 10장에서 바울은 똑같은 열광주의자들이 세례와 성찬식을 마술적으로 생각해서, ‘세례를 받고 성찬식에 참여하면 구원이 확실히 보장되는 것이므로 이제는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사람들에게 바울이 경고하고 있다. 출애굽시대 이스라엘인들의 예를 하나의 경고의 예로 삼고 있다. 그들이 홍해를 건너는 일은 크리스챤들의 세례에 해당하는 구원의 체험이었고 또 그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으로 부터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만나를 먹고 므리바 반석에서 나오는 물을 마심으로 구원을 받은 것은 우리 크리스챤들이 성만찬에 참여하는 것에 상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죄를 지음으로 다 멸망하고 말았음을 바울이 생생하게 상기시키면서 크리스챤들의 세례와 성찬식이 자동적으로 구원을 확보하는 마력을 가진 것이 아님을 상기시키면서, 고린도의 강한 자들에게 신앙인의 책임있는 삶을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지난 시간에는 출애굽세대의 사건을 우리 크리스챤들의 구원의 사건에 대한 경고의 예로 삼는데 있어서의 신학적인 구조를 설명하였다. 10장 4절에서 출애굽시대의 사람들과 동행하면서 그들에게 물을 공급하신 이 반석이신 그리스도안의 신학적 의미를 여러분에게 설명해 드렸다. 이제 중단되었던 5절에서부터, 바울은 출애굽세대들이 범한 죄를 열거하면서 고린도의 강한 자들이 똑같은 죄들에 빠져들 위험이 있음을 아주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5절 ‘다수를 기뻐하지 않는고로’. 즉 출애굽 세대가 세례를 받고 하나님의 은혜의 만찬을 다 체험했어도 그들중 다수가 죄지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아서 그들이 다 광야에서 멸망받았다고 말했다. 그런데 1절 부터 우리 조상들이 모두 구름아래에 있었고 모세에게 속하여, 모세속으로 모두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았으며 모두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었으며 모두다 같은 신령한 물을 마셨다라고 하면서 바울은 모두라는 말을 5번이나 썼으나 그들중 다수는 광야에서 범죄함으로 죽고 말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일을 경고로 받아야 한다. 6절의 그런일은 우리에게 거울이 되어서 우리에게 경고가 되게 하려고 한다. 우리로 저희와 같이 악을 즐겨 행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즉 출애굽인들에게 일어났던 일들은 우리에게 주는 하나의 경고의 예로서 종말에 우리에게 일어날 일을 미리 알리는 의미를 함축하는 사건이기도 했다. 이제 7절에서 부터 구체적으로 어떤 죄들이 있는가를 보이고 있다.
이스라엘의 지은죄
7절 우상숭배의 죄: 그죄의 모습 (출 32장 6절)-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춤추는 우상숭배의 광란의 숭배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것이 고린도 이방신들의 신전에서 벌어지는 우상숭배 상황을 잘 연상시킨다. 여기에 고린도인들이 참여하고 싶은 충동을 많이 느낀다. 그 이유는 사회학적 연구로 밝혀낸 바에 의하면 당시 고린도는 부유한 도시이나 앞의 1장에서 본바와 같이 2,30년 전의 우리 한국같이 고기는 명절에나 구경할 수 있는 그런 비슷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11장에서 후에 볼 바와 같이 거기는 몇 명 부자들도 있었으나 그리스도인의 대부분은 노예출신, 가난한 사람들, 하층민이었다. 그래서 여러 신들의 신전에서 직업단위(예: 대장장이, 선원들이나 어부들)들로 공짜의 풍성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그 기회는 큰 충동을 주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을 바울은 암암리에 출애굽시대의 이스라엘 인들이 애굽의 고기 가마와 떡가마를 열망하면서 모세를 원망하고 ‘애굽에 있으면서 떡과 고기부스러기 먹을때가 나았다’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악을 열망한 것과, 고린도 그리스도인들이 여러 신전의 우상숭배를 동반하는 잔치에서 고기를 얻어 먹고자 하는 그 열망을 비교하고 있다. 이렇게 이스라엘인들은 우상숭배의 죄를 범하게 되는데 고린도 인들과 비슷하게 우상숭배의 죄를 범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8절 간음죄: ‘하루에 2300명이 죽었나니’ 간음과 우상숭배는 늘 같이 한다. 고대 팔레스티나에서는 바알 숭상은 성창이라는 성전에 고용된 여사제들(창녀들)과 성행위를 함으로써, 생식의 신인 바알신을 즐겁게 하고 그 신으로 부터 힘과 정력, 생식력을 얻어 농사도 잘 짓고 삶의 활력도 되찾고 하는 것이었다. 고린도에서도 마찬가지로 가장 유명한 신전은 사랑의 여신인 아프로디테의 신전이었다. 그러나 그 예배라는 것 자체가 성 행위를 통한 예배였다. 그래서 이 우상숭배와 간음을 같이 경고하고 있다. 어디서나 이 사교는 죄, 즉 인간의 물질에 대한 욕망 문제와 성욕 문제가 항상 같이 개입되어 있다. 지금의 한국이나 다른나라도 마찬가지 이다. 철학적, 심리학적 접근방법으로 깊이 들어가서 종교적 합일의 체험과 성적 합일의 체험이 어떤 상관관계가 있느냐하는 이런 문제를 논의하게 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여기서는 다루지 않는다. 이것은 고대 뿐만 아니라 오늘도 전 세계에 있다. 계룡산의 모든 사교들, 통일교, 구원파등 모든 종교들이 이 문제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바울이 우상숭배와 간음을 함께 경고하고 있다. 고린도 인들은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세례를 받았다. 그리하여 세례때 받은 성령이 우리가 받은 이 구원의 증거요, 보증금이요, 담보이다. 또 우리가 성찬식때 먹고 마시는 것이 우리의 영혼의 구원을 완전히 확보하니 아무것도 아니고 한조각의 돌, 나무에 불과한 우상을, 이방사람들은 진짜 사랑의 신(아프로디테), 선원의 신으로 복주는 줄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된다. 그냥 우리는 가서 그들과 함께 그런 것들에게 절도 하고 그들의 예배에 형식적으로 참석하지만 마음속으로는 그런것들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우리끼리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면서 그 자제에 참여 하면 되는 것이다”하며 이런식으로 신학적으로 또 이성적으로 자신들의 입장들을 가지고 참여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할 때 그들이 이 출애굽시대의 이스라엘인들의 예를 경고로 삼아야 된다고 바울이 좀더 길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9절 “주를 시험함”: 이것은 민수기21장5-6절, 시 78편 18절 등을 우리에게 상기 시킨다. 먹을 것과 마실 것 없음을 불평함으로써 “주가 과연 구원자이신가 또 과연 이스라엘을 구원해 낼 수 있는 분이 맞는가”를 시험해 본 것이었다. 출애굽시대 이스라엘인들은 이렇게 했는데. 고린도인들은 우상숭배잔치에 참여함으로써 주의 참을성, 주의 오래참음을 시험하였고, 또 주의 심판자로서의 권위와 능력을 시험하였다. 이렇게 주를 자주 시험하였다. 여기 22절에서 바울이 다시 한 번 말하고 있다. “우리가 자주 하나님의 노를 돋구어서 어떻게 하겠느냐, 그가 우리를 심판하실텐데, 우리가 그를 이길 수 있는 강한자냐? 주를 시험하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말아라.”
10절: “원망”. 모세와 아론에게, 출애굽시킨 것을 원망하면서 “광야에서 다죽게 생겼으니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는게 낫겠다”며 원망을 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었다. 지금 고린도인들은 비슷하게 하나님의 분명한 뜻-우상숭배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등의 계명-에 아랑곳 없이 이 이방인들의 우상숭배와 간음에 휩쓸리려고 하는 것도, 그들이 마치 광야에서 ‘원망함’으로 표출했던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불순종을 그대로 다시 표현하는것과 같은 상황이 되었다. 그래서 바울이 이스라엘의 불신앙, 불순종하고 원망해서 어떤 파국을 맞았나를 보여 줌으로써 우리 크리스찬들이, 그리고 고린도의 강한자들이 똑같은 죄를 짓고, 똑같은 파국을 맞지 않도록 경고하고 있다.
12절: 이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가 10장 전체의 요지이다. ‘섰다’는 믿음안에 서다는 뜻으로 고전15:3에도 나온다. 이렇게 ‘구원의 영역에 들어있다고, 서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넘어질까 조심해야 한다’고 말한다. 죄의 유혹에 빠져서 우상숭배하고 간음하는 등 하나님에게 불신앙과 불순종을 범함으로써 구원의 영역에서 제외할까 근신해야 된다. 건전한 신앙은 항상 전에도 되풀이 했듯이 구원에 대한 확신과 두렵고 떨림의 자성의 정신, 이 두가지가 같이 있는 것이다. 먼저, ‘구원에 대한 확신, 즉 우리의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달렸다는 깨달음’, 그 믿음에서만 구원에 대한 확신이 나올수 있고 우리에게 평안과 위안을 준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 하나님은 변하지 않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므로 그가 우리의 구원을 예수그리스도의 날, 대심판의 날까지 지키신다. 그래서 설령 나는 신실하지 못하고, 죄를 짓고, 불신앙하고, 불순종하고 해도 하나님은 신실하시므로 그는 끝까지 나를 지키신다. 그래서 우리는 구원에의 확신과 평안함과 안도감을 갖게 된다. 이것은 우리의 구원의 처음부터 끝까지, 즉 영원한 하나님의 사랑에 의한 선택, 또는 힘에 의한 것으로써 그의 정한 때에 ‘그가 나를 믿음에로 불러서 복음을 터득하게 하고, 그래서 예수를 주로 고백하게 하고(누구든지 예수를 주로 고백하면 구원을 받는다 롬10:9, 고전12:3 성령을 받은자가 예수를 주라 고백하게 된다), 성령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 영적 눈을 띄어서 복음을 터득하게 함으로 말미암아 예수가 주라고 고백해서, 우리가 죽음과 죄악으로 통치하는 사랑의 영역에서 의, 사랑, 생명으로 통치하는 주예수의 통치영역으로 옮겨서 비로소 구원을 받을 수 있게 하시는 것이다. 이 구원의 사건을 세례로 표현한다. 사단의 영역 속의 옛아담성의 내가, 그리스도안에서 죽어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의 영역으로 새로운 자아로 부활하는 체험을 세례때에 한다. 그러나 우리가 신실하지 못하고, 우리 믿음이 완벽하지 못하고, 때로 넘어지고 죄짓고 그래도, 하나님을 신실하시다. 원래 나를 구원하기로 예정하시고 그의 예정대로 때가 이르매 나를 부르사 그 구원을 체험토록 하신 그 하나님이 나의 구원을 끝까지 지키신다는 이것을 ‘성도의 견인’이라고 한다. 사랑과 신실함의 하나님이 나의 구원을 끝까지 지키신다. 그래서 내가 나의 모든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나의 구원에 확신을 가질수 있는 것이다. 거기서 안도함, 평안이 나온다. 성도의 안도함이, 그리스도인됨의 표징이 기쁨, 사랑, 평안이다. 없으면 뭔가 잘못된 것이다. 건전한 믿음은 언제나 한편으로는 구원의 확신이 있어야 되고, 또 구원의 확신에서 오는 기쁨과 평안함과 사랑이 품성해야 된다. 반면에 ‘두렵고 떨림의 자성의 정신’이 필요하다. 이 빌립보서의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완성하라’에서의 구원은 ‘우리 개개인의 종말에 하나님의 구원을 덧입는다’는 뜻이 아니고, ‘건강하고 온전한 사랑과 기쁨과 평안으로 넘치는 그런 교회를 이루라’는 뜻의 구원이란 말인 것이다. 그렇지만 보통 우리가 잘못 이해하는 대로 쓰였어도, 이말은 바울 신학을, 그리고 우리 신약의 가르침을 잘 표현한 말이라 할 수 있다. 그 구원을 우리 개개인의 종말론적인 숙명, 운명으로 이해하면 빌립보서 문맥에서는 틀린 말이나 바울신학의 한 표현문구로서는 좋은 말이다. ‘선 줄로 아는 자들은 넘어지지 않을까 걱정하라’는 바로 이 뜻에 해당되는 말인 것이다. 구원의 확신이 있는 사람도 동시에 자신이 구원의 영역에서 제외되지 않도록 늘 자성하고 새롭게 회개하고, 새롭게 신앙결단을 하고, 새롭게 가치판단하고, 윤리적 선택을 하여야만 한다. 건전한 신앙에는 이 두가지가 어느정도 긴장을 이루면서 같이 있어야 한다. 우리에게 후자가 있는한, 즉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면서 나의 삶을 반성하고, 내가 얼마만큼 나의 구체적인 삶에서 예수를 주로 고백하며 그의 뜻을 행하려하고, 그의 뜻을 행했을 때에 반성하고, 회개하고, 새롭게 그의 뜻을 헤아리고 그의 뜻을 실천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하는 삶을 살 것이다. 이러한 두 번째의 자세가 있는한 우리는 구원의 확신을 가져도 좋다, 아니 가져야 된다. 이유는 이런 두렵고 떨림의 자성의 정신, 즉 자기 죄를 회개하고, 새롭게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 하는 이런 것들이 다 우리 속의 성령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그 신실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꽉 붙들고 있음을 확인해 주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분이 그 붙들고 있음을 주 예수그리스도의 날, 즉 종말까지 하실 것이란 말이다. 그러니 이런 때는 우리가 구원의 확신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안도함이 있어야 한다. 즉 두렵고 떨림의 자성과 이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우리가운데서 활동하신다는 재확인으로 말미암는 새로운 안도감이 늘 교차하는 것이 건전한 신앙생활인 것이다. 지금 고린도 강한자들의 문제는 전자만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주의 참을성을 그 한계까지 시험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이 죄 조금 저지른다고 뭐, 여기까지는 참아 주시겠지‘, ‘내가 여기 이 우상숭배잔치에 참여해서 좀 분향하고 절하고, 거기 고용된 창기들과 좀 먹고 마시고 춤도 춰도, 한두번은 하나님께서 참아주시겠지’. 주를 죄로 자꾸 시험하는 것이다. 언제까지냐 하면 참을성의 한계가 있는 데 우리는 알 수가 없는 바로 거기까지이다. 더 이상의 회개의 가능성이 없는 낭떠러지로 떨어질때가 있다. 히브리서의 기자가 이것을 아주 ‘더 이상은 회개없다’고 경고하고 있다. 지금 여기의 광야의 이스라엘이 아주 좋은 경고의 예이다. 그들의 불평, 불신앙을 하나님께서 계속 참아주고, 참아주고, 참아주고 계셨다. 그러다가 언젠가 그 참을성의 한계에 도달해서 하루에 한꺼번에 2300명이 죽고 결국 대다수가 그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어버린 것이다. 그러니 두가지가 항상 같이 있어야 한다. 바울은 상황에 따라 한쪽을 상당히 강조하기도 한다. 전자(롬8장 빌립보인들에게 믿음있는 사람들이 고난받는 상황속에서 바울이 그들에게 위안과 확신을 주려한 때)와 후자(고린도의 경거망동하는 자들에게는 후자의 진리를 강조한다.)는 모순되는 것이 절대 아니다.
13절: 그러나 바울이 고린도인들에게 12절에서 끝내버리면 이것은 반쪽진리만 말한 것이된다. 이 첫째의 진리, 전자를 다시 한 번 13절에서 확인시켜 고린도인들에게 위로와 확신을 주면서 권면하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감당할 시험만 당한다.’ 이 주권자 하나님께서 너희들의 믿음과 구원을 지키신다는 진리를 동시에 상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신실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한계를 잘 아시고 피할 길을 예비해 주신다는 것이다. 먼저 21:4-8에 있는 ‘불뱀’의 이야기를 염두에 두고 바을은 지금 말하고 있다. 그 독사들에 물려 죽게된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피할 길을 주신다. 모세에게 불뱀을 쇠막대기에 높이 달게 하신다. 그래서 그 불뱀을 쳐다 보는 자는 구원을 받게 하신다는 것이다. 즉 독사에 물려도 안 죽게 된다는 것이었다. 예수님께서 바로 이이야기를 요3:14에 썼다.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서 지표면에서 높이 들려진 사건을 모세가 그 불뱀을 놋기둥에 달아서 높이 든 사건의 전형적인 완성으로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예수의 십자가가 바로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주신 구원의 방도임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광야에서 놋불뱀을 바라보는 것이 구원의 길이 될 수 있었는가? 이것은 역대 랍비들의 토론거리였다. 지금까지의 공통된 결론은 ‘오직 하나님만 바람’이다.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피할 길, 즉 인간의 가능성에 철저히 절망함으로 말미암아 이젠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이 옴을 인식하고 그 하나님께 기대하는 마음으로 바라볼 때” 한줄기의 구원의 빛이 비추는 것이다. 즉 고린도인들에게 12절에서 한 번 경고하고, 13절에서 다시 위안을 주고 있는 것이다. 위의 두가지 진리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하나님을 시험하고 불순종하는 이들에게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경고해놓고, 즉 이런 두렵고 떨림으로 자성하고, 새롭게 회개하고, 새롭게 결단하며, 하나님을 믿고 순종함이 있어야 한다고 상기시키면서, 하나님께서 바로 그와같이 새롭게 회개하고 새롭게 믿고, 순종하는 길을 또한 이미 예비하고 계심을 바울이 상기 시키고 있다.
14절과 11장에서 성찬식에 대한 공부를 하게 될 것이다 그것 공부후 성찬식에 대한 질문에 답을 하겠습니다. 그 외에 평소에 신앙생활 하면서 교리문제나 윤리문제, 관행 또는 문화적인 문제등 궁금해서 토론해보고 싶었던 문제를 제기해 주십시오. “영광돌린다”는 하나님에 대해 인간이 좋은 생각, 좋은 의견을 갖게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것은 약간 피상적인 이해이고, “영광”이란 말은 원래 ‘하나님의 본질의 나타남’이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스스로를 나타내실 때, 계시하실 때, 하나님의 하나님다움이 드러났을 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다’고 한다. 모세나 선지자들이 빽빽한 구름가운데 찬란한 태양빛이 내리쬐는 상황속에서 하나님을 체험했다. 그런때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다고 한다. 출24장이나 34장의 상황을 보자. 시내산에서, 빽빽한 구름속에서 찬란한 빛이 나타났을 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다고 했다. 또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나타났을 때, 즉 하나님이 바로의 군대를 치고, 홍해의 물을 중단시키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했을 때 거기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다’고 한다. 즉 거기서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드러났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현현, 하나님의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말을 쓴다. 구름이 빛으로 내려 쬐이는 것이 하나님이 구약에서 나타나실 때마다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이렇게 구름속이 빛으로 나타나신 것이 ‘하나님의 나타남의 가시적인 현상’, ‘하나님의 나타남의 비젼’이며, 이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고 하였다. 그러나 꼭 가시적으로 볼 수 있도록 비젼으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그의 구원의 행위로도 나타난다. 출애굽 또는 블레셋과의 거룩한 전쟁을 할 때 거기서 승리하게 하셨을 때,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다’고 한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과 우상숭배하는 이방민족과의 싸움에서 그의 백성을 숭리하게 함으로써 말미암아 이방백성의 손에서 구출하실 때에, 우리는 왜 거기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하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언약에 신실하심이 의라는 것이다. 그는 그의 언약을 신실히 지켜서 자기 백성에게 하나님 노릇해 주겠다는 약속을 지키셨다. 즉 하나님의 하나님다움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런 구원의 행위에는 하나님의 전능하심, 하나님의 구원할 수 있는 능력, 사랑(자기 백성을 사랑하심), 하나님의 신실하심(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죄지어도 하나님은 신실하셔서 그의 약속을 지키심), 또 하나님의 거룩함 등등, 하나님의 본질이 나타났을 때에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다’고 한다. 영광을 보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 하나님이 스스로 하나님임을 나타내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본질, 하나님의 하나님다움이 나타남을 영광이라고 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돌린다는 말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함’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영광을 나타냄으로, 즉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함으로 하나님은 과연 거룩하시고, 전능하시며, 온전히 사랑이시며, 신실하신 분이라는 것을 우리가 인정할 때에 바로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 된다. 이렇게 말로도 영광 돌릴 수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으로 이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영광돌리느냐?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서 하나님의 권능과 사랑과 신실함으로 구원받은 백성이다. 사단은 우리를 죄악과 죽음으로 통치하나, 하나님은 그의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의와 사랑과 생명으로 통치한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사단의 뜻을 좇지 아니하고 의의 뜻을 좇을 때에, 불의를 하지않고 의를 행할때의 우리의 행위를 통해서 구체적 삶의 상황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돌린다. 그래서 항상 가치판단과 윤리적 선택의 갈림길에 선다. 내가 세상적인 명예를 고관대작이 되는 것을 더 가치있게 보느냐, 아니면 모든 사람을 겸손히 섬기는 것을 더 가치있게 보느냐하는 가치판단의 갈림길에 우리가 서게 된다. 내가 사업하는 사람이라면 내가 정당한 옳은 방법으로 합법적이고 도덕적이고도 의롭게 장사를 해서 나의 고객들을 섬기고 거기에 따른 정당한 이익만 취할 것이냐, 아니면 어떤 자본주의자가 말했듯이 경제에 원칙은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이라는 자본주의 정신으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내 이익을 극대화 하는냐는 갈림길에 놓인다. 이 상황에서 사단은 우리에게 이세상의 길을 가도록 무슨 방법을 통해서든지 나의 이익을 극대화하라, 그것이 옳다고 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웃을 섬기는 길을 가라고 하신다. 이 상황에서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나의 삶에서 무엇이 나타나게 되는가? 내가 죄악과 죽음으로 통치하는 사단의 길을 자꾸 좇으면, 나의 삶에서 무엇이 드러나는가? 사단의 냄새가, 사단의 본질이 나의 삶을 통해서 드러난다. 반면에 내가 자꾸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나의 삶에서 하나님의 의로우심, 하나님의 사랑이, 즉 하나님의 본질이 나의 삶에서 나타난다. 아까 ‘영광은 하나님의 본질이 나타남, 그러니까 나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냄’이 하나님께 영광들리는 것이다. 나의 삶을 통해서 그 하나님의 본질,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이 드러나는 것이 영광돌리는 것이다. 예수께서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이 너희가 나의 제자인 줄 안다고 말씀하셨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바로 여기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에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사랑의 덩어리, 체현으로서, 하나님의 본질이 나타나는 것이다. 영광은 하나님의 본질의 표현, 본질의 나타남으로, 그의 구원의 행위로 나타나게 된다.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의 구원을 지키실 때에, 그의 구원의 능력과 신실하심과 사랑이 나타난다. 그의 역사적인 심판에서 하나님의 심판자로서의 본질이 나타나기도 한다. 즉 하나님의 영광은 그의 구원과 심판의 행위에서 동시에 나타난다.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돌린다’는 것은 그의 뜻에 맞게 삶으로써, 그의 백성들인 우리들의 삶속에서 하나님의 본질이 드러났을 때 하나님의 본질이 드러나고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게 되며, 그러면 다른 사람들은 당연히 하나님을 칭송하게 된다. ‘아.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살아계시며 온전히 신실하시구나’하면서, 헬라적 의미로 하나님깨 좋은명성, 칭송을 가져오게 된다. 이런 의미가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것이다. 이 헬라적 의미는 그러나 보다 부차적이고 피상적인 의미이다. 본질적인 의미는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돌리느냐? 하나님위 뜻에 맞게 삶으로 하나님께 영광돌린다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순종이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애매하고 추상적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이것은 아주 아주 구체적인 것이다. 우리의 섦의 매일매일의 가치판단과 매일매일의 윤리적 선택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돌리느냐, 사단에게 영광돌리느냐 하는 것이다. 우리의 삶속에 사단이 반영되느냐, 하나님의 본질이 반영이 되느냐 하는 것이다. 우리의 삶이 조금씩이라도 하나님의 뜻에 더 많이 합당하게 살면 하나님의 본질이 우리를 통해서 더 많이 나타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형상,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형상에 닮아감, 성화의 과정’이라고 하겠다.

(35)고전 10:1-22
바울은 롬8장부터 줄곧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이 우상숭배하는 주위 환경에 어떻게 적응하면서 살아야 하는가의 문제를 다루어왔다. 고린도교회에는 신앙의 올바른 지식에 근거해서,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까 우상이라는 것은 사실 실재가 없는 것이다’라는 지식에 근거해서 이방불신자들이 우상이라고 숭배하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다고 생각하는 강한 자을이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은 “자유롭게 시장에 나와있는, 우상에게 제물로 바쳐지는 과정을 통해서 도살되었던 고기를 양심에 거리낌없이 자유롭게 사먹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 10장에서 다루는 “우상의 신전에서 여러 가지 종교의식과 겸해서 행해지는 잔치들에 같이 참여해서, 우리는 우상을 인정하지 않으니까 우상숭배에는 참여하지 않지만, 같이 그 잔치에 참여해서 귀한 고기도 좀 얻어먹고, 즐겁게 놀고 소외되어 직업활동이나 사회적 관계에서도 어려움이 없게 하고, 동료들과 잘 어울리기도 할 수 있다고 보는 강한 자들이 있었다. 또한 반면에(어쩌면 주로 유대 그리스도인들이었을테지만), 약한자들로서 우상의 ‘우’자만 들어도, ‘멀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있었다. 그래서 우상숭배하는 그 신전에 가서 어울리고, 먹고 마시는 것은 물론, 심지어 시장에 나와있는 고기 사먹는 것도 꺼리고, 또 불신자 친구의 초대에 가서 음식을 먹고 마시는 것에도 기리낌을 느껴서, 이것이 우상에게 바쳐지는 과정을 통해서 도살된 고기입니까? 아닙니까?를 묻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양심에 늘 거리낌을 느끼는 자들이었다. 이 복음의 자유를 모르고, 그것을 즐기지 못하는 만끽하지 못하는 약한 자들이다.
이 강한자들과 약한자들간의 갈등이 한 교회내에서 자연히 벌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바울에게 이것에 대에서 좋은 가르침을 주십사고 질문을 한 것이다. 그리고 지금 바울이 답을 하고 있다. 그래서 8장에서 바울은 답을 하기를 우상을 사실 실재가 없는 것이라면서 신학적으로는 강한자들과 의견을 같이한다. 그래서 시장에 나와있는 음식도 양심에의 거리낌없이, 그리스도를 믿는자들로서 사먹으라고 했다. 그러나 윤리적으로, 약한자들을 보호하고, 분란없이 함께 하나의 교회로서 원만한 공동체성을 이루면서 교회를 세워 올려가야 된다는 윤리적인 측면에서, 즉 약한 형제에 대한 이웃사랑의 측면에서, 자기의 권리와 자기의 이익을 포기해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윤리적 의무의 입장에서 바울이 강한자들에게 경고를 시작하고 있다. 약한자들은 그래도 지금까지의 관례상 우상이 무슨 실재가 있는 걸로 생각을 해 왔으니까 그렇게 알기 때문에, 우상에게 바쳐졌던 음식을 먹는 것을 꺼리고, 먹을 때 신앙양심에 어려움을 느껴서 고생을 하고 있다. 그러니 그러니 강한 자들은 그들을 생각해서 자기의 권리를 포기해야 하는 의무와 필요가 있다고 바을이 설명하였다.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9장에서 바울은 자기가 사도로서 마땅히 교회로부터 생계를 지원받을 귄리가 있으나 자기 복음의 효과적인 선포를 위해서, 즉 자기의 복음선포하는 선교사 목회직을 바울이 돈벌이 수단이나 생계유지수단으로 삼는다는 오해를 줘서 복음의 진보에 장애를 주지 않기 위해서, 자기가 사도의 권리를 포기하는 모습을 바울이 보여주고 있다.
9장에서 그 모습을 바울이 보이면서 강한자들에게도 자기들의 올바른 신학적 지식, 그 지식에서 나온 올바른 삶의 결론, 곧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으나 교회공동체의 하나됨을 위해서, 그리고 이 교회공동체가 하나로서 같이 굳건히 세워지게 하기 위해서(‘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서’로 번역되어 있는 말과 같은 말이다. 교회가 분란, 분산되거나 서로 싸우거나 욱박지르지 않고, 교회로서 굳건히 쌓아 올려져가도록 하기 위해서), 강한자들이 자기의 지식을 좀 양보하고, 자기의 권리를 좀 양보하고, 좀 자유를 억제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 바울자신의 삶을 모범의 예로 들어서 경고를 함에도 불구하고, 바울의 경고를 듣지 않으면, 그 강한자들은 교만하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지식이라는 것은 이렇게 사람을 교만하게 하고, 지식이 없고 생각되는 사람을 무시하게 하는 경향이 있다. 좋지 않은 것이며, 중요한 것은 사랑이다. 연약한 자들을 위해서 자기의 입장을 좀 양보하고 권리를 포기하고, 중요한 자유를 좀 포기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다. 그 사랑은 교회를 세워 올린다.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여 서로 다투고, 의견대립하고, 싸우게 만들고, 그래서 교회를 분산시키고 파탄시키는데, 이 사랑은 교회를 세워올린다고 설명하고 있다.
9장 마지막에 와서는 바울이 이제, 지식에 근거했답시고, 지식에서 오는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너무 방종적으로 쓰다가는 자신들의 구원에도 영향이 있을 수 있고 죄에 쉽게 빠져서 구원의 완성에로 매진하는 태도가 약화될 수도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다 구원받아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때의 우리 구원의 완성을 향해서 가는 자들로서 하루하루의 삶에서 우리의 성화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달음박질하는 자로서, 권투하는 자들로서 우리몸을 다스리면서, 목표를 분명히 하고 가야 된다. 그런데 고린도의 이 지식을 가졌다는 강한자들은 마치 이미 자기들이 다 구원에 이른 양 지금 자만하고 방종하는 그런 상황에 빠져 있다.
그래서 바울이 계속해서 10장에 가서 더 중요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 문제가 무엇인가 알아보자.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오직 한분이시고, 그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 아무것도 아니니까, 믿지않는 내 이웃, 동료, 내 직업의 동료는 지금 저 우상이 진짜 신인 줄 알고, 계속 아프로디테 신전에서 거기 고용된 창녀들과 온갖 음행을 저지르면서, 잔치하면서, 먹고 마시고 흥겹게 놀고 있지만, 우리야 저 아프로디테신 인정하지 않으니 상관없이 그냥 함께 먹고 마시며 즐기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고린도의 강한자들중에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사람들을 가만히 바울이 보니, 복음이 지식에는 복음의 지식에만 근거해서 이런 짓을 하는 게 아니고, 기독교신앙의 또 한 요소를 오해해서 그런 짓을 했던 것이다. 세례와 성만찬(즉, 성례)을 그 자체로서 구원을 우리에게 가져다 주고, 구원을 지탱해는 마력을 가진 것으로 오해를 했던 것이다. 즉 우리가 세례를 받으면 그 세례의 물이 우리를 거듭나게 하고, 우리가 성만찬을 통해서 또는 떡과 포도주를 마시면 그것이 예수의 몸과 피로서 우리의 구원을 자동적으로 지탱한다고 오해를 하고서는, 시쳇말로 간이 커져서 우상의 신전들에서 우상숭배자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음행하였던 것 같다고 바울이 말한다. 그래서 이 세례와 성만찬이라는 것이, 자동적으로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주거나 또 우리의 구원을 지탱하는 그런 마력을 가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출애굽 당시의 유대의 이스라엘인들의 예를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지난 번에 본 바와 같이, 출애굽의 구원을 체험한 이스라엘인들이 홍해를 건넌 것은 우리 교회의 세례에 해당하고 그들이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 므리바의 바위에서 나오는 물을 마신 것은 우리 교회의 성만찬에 해당된다. 우리교회서 지금 행해지는 세례도와 성만찬도 그리스도의 은혜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구원의 선물이요, 구원의 은혜의 전달 수단이요, 그때도 예수 그리스도가 성육신하기 전에 이스라엘을 동반한 므리바의 바위로서 물을 내주시고 만나를 주시고 구원을 하셨던 분이다. 그래서 그 당시의 이스라엘사람들이 오늘의 우리가 체험한 구원과 같은 그 구원을 체험했는데, 우상을 숭배하고, 음행을 저지름으로 다 광야에서 죽고, 그 약속의 땅, 구원의 땅, 그 구원의 완성에 들어가지 못했던 것이다. 지금의 우리가 꼭 같은 상황에 있다. 우리는 출애굽을 하고,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 므리바의 물을 먹었던 그 사람들과 꼭 같다. 우리가 세례를 통해서 이 구원의 첫맛을 보았고, 지금 가나안 약 속의 땅, 구원의 땅,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때 있을 그 영광의 하나님나라, 그 구원의 나라로 향해 가고 있는데, 우리가 지금 중도에서 우상숭배하고 음행하고 이러면, 이스라엘인같이 광야에서 다 죽고 말고, 걸국 구원의 완성에 들어가지 못한다. 이스라엘인들에게 일어났던 그 출애굽당시의 역사는 우리 교회에의 경고를 위해서 미리 주어졌던 예표라고 바울이 설명하고 있다. 그런 상황속에서 이제 5절부터 보겠다. 10:1-22교독.
5절: 바울이 이제 우리 교회의 세례에 해당하는 홍해를 건넘과, 우리 교회의 성만찬에 해당하는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 물을 마심을 경험한, 이런 구원의 체험을 한 이스라엘인이, 그 대부분을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고로 광야에서 죽고 말았다. 그래서 구원의 완성, 가나안 구원의 땅에 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바울이 5절에 ‘모든’이라는 말을 5번이나 되풀이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위에서 1절부터 ‘다수’라고 쓴 말이 다 원래는 ‘모든’이라는 말이다. ‘모든’ 이스라엘이 ‘모두’ 같이 출애굽을 하고 신령한 식물을 먹고 신령한 음식을 먹고, 다 같은 , 다같이, 다같이라고 여러번 썼다. 모든 이스라엘이 다같이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은 하나님의 노여움을 사서 광야에서 죽었다. 그 이유를 6-10절에 쓰고 있다. 그들의 죄를 나열하고 있다. 1)그들이 악을 열망했다. 그 악을 열망함은 애굽의 고기가마를 열망했음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을 경시하고, 현재의 구원의 완성으로 가는 도중에의 성화과정이 어렵다고 하면서, 오히려 구원받기 전의 죄인들의 생활을 동경한 죄이다.
7절: 2)그 다음이 우상숭배이다.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그 앞에서 먹고 마시고 뛰어 놀았다고 7절에 출32:6을 인용해 말하고 있다. 금송아지를 만들어놓고 자기들을 구원할 자라고 하며, 하나의 쇠붙이에 신의 의미를 스스로 부여해 놓고는 그 앞에서 먹고 마시고 춤추고 뛰어놀았다.
8절: 3)간음죄. 민254:1-9까지를 8절에 간단히 요약을 했다. 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물러서 바알신의 신전에서 고용되었던 창녀들과 음행을 저지르면서 바알숭배에 빠져버렸다. 그래서 바알에 속한 자들이 되어버렸다. 그런 자들을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다 죽이게 만드신다. 하루에 2300명이 죽었다. 이런 극형을 통해서, 바알 숭배에 빠녀서, 바알신전에 고용되었던 성창들과 했던 음행이 근절됨으로 이스라엘의 염병이 그쳤다.
9절: 4)주를 시험했다. 광야의 구원의 완성을 향해가는 과정이 너무 어려우므로 과연 주께서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면서 주를 의심하기 시작하고, 그가 만약 우리를 구할 수 있으면 왜 우리를 이리 고생시키느냐, 먹을 것도 없고 마실 것도 없다, 주께서 과연 살아계시느냐? 그가 과연 우리를 돌보시는가 우리를 돌볼 힘이 있는가 하며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의심하고, 과연 우리를 돌보고 계시는가 아니면 우리는 도무지 안중에도 없는가 광야에 다 죽게 만드는가 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면서, 이렇게 하나님께 자꾸 도전하였다.
10: 5)그리고 마지막으로 주를 원말했다. 이럴바에야 차라리 애굽의 고기가마와 떡가마밑에서 종노릇하면서라도 지내게 하지, 왜 이렇게 우리를 광야에 끌어내가지고 여기서 이렇게 고생을 시키느냐면서 주를 원망했다. 모세와 아론에게 왜 우리를 끄집어 냈느냐고 원망했다.
이것들이 다 출애굽당시 이스라엘인들이 범한 죄인데, 그 죄와 똑같은 죄들을 지금 고린도의 강한자들이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이 이스라엘인들이 애굽의 고기가마를 열망했듯이 고린도의 강한자들은, 여기 지금 분명히는 없으나 행간에 우상숭배가 벌어지는 신전에서 고기얻어 먹을 것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 지난시간 언급했듯이, 이당시 고기먹는 것은 옛날 1950년대 한국전 후 굶주린 한국사람들 고기먹기보다 더 어려웠고 부자들이나 고기를 조금 먹었었다. 이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 중엔 1장서 본 바와 같이 부자들도 더러 있었지만 재부분이 노예, 하층민이었다. 그래서 그들이 신전에서 직업단위로 이뤄지는 예배와 잔치에 참여해서 고기얻어 먹는 것은 중요했고, 고기에 대한 열망은 컸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 된 뒤에도 그런데 좀 참예하면어떠냐, 우리는 어차피 우상츤 인정않으니까. 그양 상식적으로 잔차에 참여해서 고기좀 얻어 먹으면 좋지 않겠냐는 이런 열망함을 바울은 비금 이스라엘 이 광야에서 애굽의 고기가마를 열망하던 것과 비교해서 말하고 있다. 그래서 또 이 고린도인들이, 이스라엘이 우상숭배했듯이 이런 식으로 우상신전에 참여해서 점점 우상숭배에 빠져가고 있는 것을 지금 보고 경고하고있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 모압여자들이 바알신전에서 성창으로 활약을 해서, 바알숭배가 성창과의 관계를 통해서 이뤄졌듯이, 고린도에서도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신전에 많은 성창들이 고용되어서 성창과의 간음행위를 통해서 예배를 하였다. 그래서 지금 고린도의 강한자들이 우상숭배와 겸해서 지금 간음의 위기에 있는 것이다. 광야를 지나던 이스라엘인들이 주의 전능하심과 주의 사랑과 그의 살아계심을 의심하고 시험하고 불평했듯이, 비슷하게 이 고린도의 강한자들도 주의 심판, 주의 두려움을 자꾸 시험하였다. ‘우리가 이정도 했기로소니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미 우리에게 구원의 첫열매를 주신 우리에게 진노의 심판이 있겠느냐, 우리가 이 정도의 우상숭배잔치에 좀 참여했다고 해서, 이정도의 간음행위 좀 했다고 해서, 우리가 이정도 술 좀 마셨다고 해서, 이정도 우리 주위의 사악한 분위기와 타협했다고 하기로서니, 우리 삶을 위해서 할 수 없이 좀 했는데 하나님께서 과연 우리를 정말 엄하게 벌하시 겠느냐.’ 이렇게 주의 오래참음, 주의 진노하심을 도전하는 짓을 자꾸 하였다. 이렇게 이스라엘인들의 죄와 고린도인들의 이미 빠져있는 죄, 아니면 앞으로 빠질 가능성이 있는 죄를 비교함으로써 바울은 고린도인들에게 경고를 하고 있는 것이다. 같은 죄를 범하지 않도록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11절의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즉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당한 이런 일들이 경고의 예가, 거울이 되어서 이 말세의 우리에게 경계를 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바울이 말하고 있다.
그것을 종합적으로 말하면 12절이 된다. 이 12절이 바울의 이 부분에 대한 가르침을 요약하는 것이다. ‘선 줄로 생각한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여기서 ‘서다’는 ‘믿음안에 서다, 구원에 서 있다’는 뜻이다. 스스로 믿음안에 서 있다, 구원의 상태에 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믿음으로부터 불신앙으로, 구원으로부터 파멸로 떨어지지 않을까 조심하여야 한다고 경고한다. 광야에서의 이스라엘의 죄와, 고린도인들이 위험을 하나씩 비교했는데, 그 옆에 우리, 또는 나를 한 번씩 돌아보고 적어보자. 우리 사회에서 우리도 지금, 그리스도의 재림때 있을 구원의 완성을 향해서 사는 사람들이다. 겅화의 과정을 가는 사람들이다. 우리도믿음으로 세례를 받고, 구원의 백성에 참여해 날마다 말씀으로, 그리고 성례를 통해서 오는 그 구원의 은혜를 체험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우리도 혹시 이들과 똑같은 죄를 짓고 있지는 않는가? 악을 열망함, 즉 애굽의 고기가마를 열망하는 죄, 고린도인들도 과거 그리스도인되기전에 내가 텐트 만드는 사람으로서, 가죽 다루는 내 동료직업인들과 함께 1년에 한 번씩 축제가 열리면 그 신전에 가서 먹고 마시고 춤추고 놀던 그것이 그립다, 내가 뱃사공, 어부 또는 배부리는 사람이벼, 내가 그 선원들 보호한다는 신의 신전에 가서 큰 잔치 베풀면서 먹고 마시고 흥겨웠던 그것이 그립다,고 하였다.
우리도 가끔 그리스도인의 삶이 너무 많은 희생과 억제를 요구하는 것같아서 차라리 그리스도인 되기전의, 옛날 불신자 시절의 그 자유, 그 죄속에서 스스로를 즐김, 육신을 즐기던 것에 대해서 열망하거나 동경하던 것은 없는가? 아니면 지금 사업에서 내가 차마 그리스도인이라서 그렇게 행실을 못하지만, 그 순간에 섰을 때, 수천만원, 수억, 아니면 정보사업의 경우 몇백억이 내가 잘 만하면 지금 굴러들어 올 수 있다고 하면, 가끔씩 ‘아, 내가 예수만 안 믿었더라면, 내 양심에 거리낌없이 도장 몇 개 찍고 당장에 나와 내 자녀들 일생보장하는 수십억 얻을 수 있는데.......’ 하는 악을 열망함, 그런 것이 여러분들에게는 없었습니까? 네?
또 우상숭배, 우리는 하지 않고있는 가? 여기 서 있는 저와 여기 앉아있는 여러분 모두다 지금 돈을, 맘몬을 어느 정도 우상으로 숭배하고 있다. 간음문제도 실제로 우리가 간음행위를 저지르지는 않는다지만, 우리의 그 성개방문화 전체가 예수님의 척도로 하면 다 간음의 문화다. 이성을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다 그 마음속에 간음을 했다고 했는데 우리가 지금 다 간음을 굉장히 조장하는 문화 속에 살고 있다. 그러한 거기에 우리는 얼마나 타협하면서 살고 있는가, 스스로 한 번 가끔씩 생각해 보자.
또 주를 시험함,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권능, 그 심판자되심을 의심하거나 또는 무의식상태로 우리 의식에서 제거하려 하고, 하나님의 오래 참음을 이용해서, ‘이정도 사회에서 타협하는 거야 뭐, 악과 이정도타협하는 거야, 하나님께서 이정도는 봐 주실 것이다,’ 하는 주를 시험함은 없는지, 또 하나님에 대한 원망은 없는지 우리도 한 번 써보자. 고린도인들의 죄에 우리의 죄를 비교해 봄으로써 우리가 다시 한 번 회개하고 정신을 바짝차리고, 믿음을 새롭게 천명하며 우리의 성화의 자세를 새롭게 가다듬어야겠다.
이렇게 했을 때에 우리가 너무 실망해서, 고린도인들이 지금 바울의 지금까지의 상당히 적나라한 언어로 경고한 것에 대해서 고린도의 강한 자들이 너무실망해서 자포자기해 버릴까 봐, 바울이 거기에 13절을 집어넣은 것이다. 하나님은 신실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한계를 잘 아시고 피할길을 예비해 주신다는 말이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점검해 봤을 때 우리가 믿음안에, 구원안에 스스로를 굳건히 서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믿음에서, 구원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자포자기 해버리고, 실망할까 봐 여기 바울이 말하고 있다. 신실하신 하나님이 너희를 다 붙들고 계신다.
여기 14절의 이야기는 민21:4-8까지를 두고 하는 말이다. 간음을 통해서 바알숭배한 자들을 피할길을 하나 마련해 주셨던 것이다. 그 피할길은 모세가 놋쇠로 뱀을 만들어서 막대개에 높이 달아서 그 뱀을 쳐다보는 자는 구원을 받는 것이다. 이것이 유대신학의 중대한 논점이었다. 요3:13에서 예수께서 앞으로 자기가 인자로서 십자가에 달림이 바로 모세가 막대기에 봇뱀을 달아서 높이 세움과 같은 구원의 사건임을 말하고있는 것이다. 유대랍비들에서 기독교신학도들까지, 도대체 이 놋쇠로 뱀을 만들어서 막대기에 높이 달아서 세움이 어떻게 구원의 효과를 가져오는 것이냐를 많이 연구했다. 그것은 ‘하나님을 바람’의 뜻이라고 옛 유대신학자들이 옳게 해석했다. 인간의 시험의 구렁텅이 속에서 자기자신의 힘으로 그 시험에서 나오려고 하고, 자기 믿음을 회복하려고, 자기를 바로 잡으려고, 자신을 의인으로 만들려고 하고, 다시 한 번 자기를 거룩한 성스러운 사람으로 만들려고 하여도 만들어지지 않는다. 오로지 ‘하나님께 바람’이 있을 뿐이다. 그만이 신실하시고, 전능하시고 살아계셔서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분이다라고 전적으로 자아를 포기하고 ‘하나님께 바람’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구원의 은혜를 새롭게 체험해야 한다. 그렇게 하나님을 새롭게 체험함으로 하나님을 주로 인정하고 순종하게 되는 것, 그것이 구원의 효과를 가져오는 것이라는 말이다. 놋뱀을 높이 든다는 것은 하늘을 향해서 하나님을 바람이다. 지금까지 땅을 바라보고 땅에서 가능성을 찾으려고 해서 우상숭배하고, 이 땅에 속한 물질을 숭배하고, 피조물을 숭배하고 피조물의 가치들을 추구했으나, 땅, 피조세계들이 줄수 있는 만큼의 가능성만 누렸는데, 그것은 멸망이다. 오로지 우주밖에 계시는 초월하시는 하나님, 그를 바람으로써만 우리는 구원을 얻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신 분이어서 어떠한 어려움속에서도 피할길을 주니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을 바래야 된다. 옛 광야에서의 이스라엘인들이, 모세가 높이 든 놋뱀을 마라보면서 하나님께 바랬듯이, 우리도 어려움가운데 있을 때에 ‘내가 이 시험에서 도저히 헤어나올 수 없구나’, 자포자기할 것도 아니고, 나의 힘으로 어떻게 헤어나오려고 발버둥칠 것도 아니고, 미쁘사 신실하셔서 우리에게 늘 피할길을 주시는 그 하나님을 바라라고 말하는 것이다.
14: ‘그런즉 내 사랑하는 자들아 우상숭배하는 일을 피하라.’ 1-13절까지의 바울의 성찬식에 대한 신학적 이해를 잠깐 살펴보면 1.세례와 성찬식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통한 구원에 동참케 하는 진정한 은혜의 수단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마력적으로 작용하여 우리의 구원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고, 도리어 우리를 믿음과 순종에로 부른다. 그래서 마틴 루터는 성례들(세례와 성찬식)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만 효과가 있다고 했다. 믿음과 순종이 없으면 그것들은 무효이고 도리어 11:30과 같이 하나님의 징벌을 초래한다. 가톨릭교회에도 구원이 있느냐는 질문이 있었다. 가톨릭의 현상은 아주 복잡하다. 신부나 신학자에 따라 신학이 다 다르다. 로마 교황청에서 정식으로 인정하는 교리들을 우리가 따라 판단할 수 밖에 없는데. 그 교리들도 많이 변했다. 중세 가톨릭 신학의 중요한 사상 하나가 은혜를 물질화하는 것이다. 이것을 성례신학이라 한다. 피조물적인 물질을 영적이고 초자연적인 구원의 힘에 대한 심벌, 상징으로만 인정하는 것이 아니고 ‘실체’고 인정하는 것이 가톨릭의 큰 특징이다. 그래서 중에에는 세례의 물이, 마치 전기를 띠듯 성령을 띠어서 사람을 거듭나게 하는 힘을 가졌다고 보았다. 즉 세례라는 것이 옛 죄인이 죽고, 옛 죄인의 죄가 깨끗이 씻기고 그리스도와 연합해서 새로운 사람으로 부활하고 깨끗이 씻긴 의인으로 됨에 대한 상징이 아니라, 물자체가 아예 사람을 완전히 새롭게 거듭나게 하는 힘을 가졌다고 보았다. 또 떡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이 되어서(화체설) 은혜가 물질화되어서 우리에게 구원을 전달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또 그 은혜의 성령의 힘을 갖는 물을 만들고 떡과 포도주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만드는 사제는 옛날 베드로(그리스도로부터 죄용서의 권위와 하나님나라 열쇠를 받은 베드로)에게 물질화되어 나타났기 때문에. 베드로가 이제 그것을 그 후계자들에게 안수를 통해서 마치 전류가 전선을 타고 통하듯이, 대대로 베드로가 안수하면, 베드로의 손을 통해서 그 사도적 권위(죄를 용서해 주고,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권세를 주는)와 힘이 다음 세대 사제에게 전달된다고 봤고, 또 그다음의 세대가 그 다음 세대에게 안수함으로써 사도적 권위와 힘이 전선에 전기 흐르듯 그 밑 사제에게 전달된다고 보았다(‘사도적 계승’이라는 교리이다). 첫교황 베드로의 안수를 받은 사제가 그다음 사제에게 안수하고, 또 그다음 사제가 안수함으로써 오늘까지 내려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도 가톨릭에서는 사제들이 축복한 모든 영세줄 때의 물은 성령의 물이 되어서 사람을 거듭나게 하는 힘을 가졌고 성찬식의 떡과 포도주는 우리에게 영생을 주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순간에 변한다고 본다. 그래서, 여기서 바울은 경고하는 세례의 물과 성찬식의 떡과 포도주가 마력을 가져서 그리스도의 은혜에 참여케 하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참여케 하는 수단이 아니며, 그 이상으로 자동적으로 우리를 거듭나고 구원받게 보장하는 것도 아니라고 했다. 그 바울의 가르침을 루터가 받아서, “아니다, 이세례와 성찬식은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한 죽음에 우리로 하여급 동참케 하는 은혜의 수단정도이지, 마력으로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은 예수님, 바울, 그 외의 사도들의 가르침에 따라 가톨릭의 신학을 비판한 것이고, 종교개혁을 한 것이다. 그금도 그래서 일부 가톨릭신자들이 영세와 성만찬을 그런 식으로 은혜를 물질화해서 이해하고 있다면, 잘못된 신학인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말을 조심스럽게 하는 이유는 가톨릭신학이 아주 다양해서이다. 어떤데서는 마리아숭배가 아주 심한데, 폴란드 가톨릭교회이다. 지금의 교황이 그곳 출신이다. 그는 전반적으로 보수적인 신학을 갖고 있지만, 마리아숭배도 아주 강조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또 어떤 신학자들은 거의 강조하지 않는다. 또 성례도 개신교와 거의 차이없이 하는 곳도 있다. 그래서 이것은 어떻다고 말하기가 매우어렵다. 그래서 거기도 구원과 성령의 역사가 있을 수 있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거기도 그리스도를 믿는다. 그러나 어떤 곳은 그 그리스도를 믿음이 잘못된 교리들에 의해 그 선을 넘어서, 즉 너무 미신적으로 너무 이단적으로 넘어가는 가톨릭교회가 있어서 그렇게 가르치고 믿는 신부와 신자들이 있다. 반면에 가톨릭에 몸담고 있지만 최근 1960년대 있었던 제2 바티칸공회 이래로 가톨릭들도 성경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다. 그래서 과거의 공회에서는 그 가톨릭자체의 신학정의, 성례, 마리아숭배, 성인들의 중보의 힘을 입어 구원얻는다 등등을 가르쳤지만, 그런 것 믿지않고 또는 무시하고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성경공부한 대로 단순하게 공부한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맏고 구원받는다고 하는 가톨릭도 있다. 이런 사람들은 어떠한가? 결국 구원과 멸망은 심판자 하나님이 선언하실 것이다. 우리가 누구에게도, 어떤 인간에게도 말할 수 없다. 결국 끝내 재림하실 그리스도가 하나님위 대권자로서 죄의 심판을 통해서 자기 백성을, 양떼들과 염소를, 알곡과 쭉정이를 분간하실텐데 우리가 짐작을 한다면 우리의 선행, 완전한 지식도 아니고 오로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그래서 명백한 미신적 요소, 또 옳지 않은 교리에 휩쓸리지 않고 진정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이 있으면, 그분의 교리와 복음이해에 부족함이 있더라도 그리스도의 른혜로 구원받지 않을까하고 나는 생각한다. 즉 우리 개신교들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복음이해가 완벽한가, 아니다, 그럴 수가 없다. 우리 지식으로 우리 구원받지 못한다. 우리의 완벅한 신앙으로도 아니다. 스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이 은혜로 우리는 구원받는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그의 은혜에 의존하고 그의 뜻에 순종해서 사느냐는 단순한 데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가톨릭교도들을 볼 때 우리는 늘 엇갈리는 심정을 가질 수 밖에 없다. 거기서 나와서, 옳지 않은 교리들과 믿음의 관행으로 누더기진 곳에 있으면, 아무래도 옳은 목음을 들을 기회도 적어지고, 옳은 신앙갖기가 어려우니 거기서 나와서, 성경대로 하나님위 진리를 이해하고, 선포하고, 살려고 하는 우리 개혁교회에 들어오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우리 친지나 가족중의 가톨릭에게 우리가 개혁교회, 즉 개신교회로 인도하려고 노력해야 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무조건 다 정죄할 수도 없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더 올바른 교회에서 더 올바른, 선명한 복음을 받고 더 올바르게 신앙생활하라고 인도하려고 노력해야지, 틀렸다고 정죄할 수는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여러분은 의견이 다를 수도 있다.
14: 바울은 7절에서의 경고를 14절에서부터 다시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15: 스스로 지혜있다고 뽐내는 고린도인들에게 바울의 경고를 판단해보고 그 경고가 옳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라고 맣하고 있다.
16: 마울은 그리스도를 믿음과 우상숭배를 도저히 화합될 수 없는 것임을 성찬예식과 우상숭배잔치의 관계의 예를 들어서 설명하고 있다. 여기의 ‘축복의 잔’은 떡을 떼어 나누고 잔을 나누는 식사전에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던 관행에서 나언 말이다. ‘이 잔에 하나님께서 축복하십시오’하고 기도하던 관행을 말한다.
유대인들의 유월절 만찬때에는 4잔의 포도주를 마신다. 그래서 원래 잔치가 두부분으로 되어 있다. 먼저 간단히 먹어 배고픔을 진정시키는 ‘예비식’이 있었고, 중심되는 ‘중심의식’이 있었고, 결론이 있었는데, 예비식때 2잔, 그다음에는 각각 한 잔씩 마셨는데. 이 셋째잔을 유월절 만찬때의 ‘축복의 잔’이라 불렀다. 예비식 후 중심의식때 무교병을 나누 먹고, 성전에서 잡아 집에 가져와 불에 구웠던 양고기를 조금씩 나눠 유월절 만찬에 참여했던 가족이 다 나눠먹고, 셋째잔 포도주를 따라서, 그 잔에 하나님의 복을 빌고 그리고 같이 마셨다. 이 잔의 관행을 기초해서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이 유월절 잔치때 이뤄졌다. 그래서 학계에서는 최후의 만찬이 그 유월절 만찬때, 우대인의 유월절 만찬을 상기시키면서 변형된 형태의 만찬을 했다는 것이 다수 의견이다. 그러나 또 어떤 학자들은 이것을 ‘토라 만찬’이라는 감사의 만찬, 병이 낫거나 어려움에서 구출됐을 때, 잃은 것을 찾았을 때 주위 친구들을 다 모아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함께 즐기는 만찬이 있었다. 앞으로의 자기의 대속적 죽음을 통해서 이뤄질 구원을, 친구들을 미리 모아서 즐긴 감사의 만찬이라고 해석하는 학자들도 더러 있다. 그러나 소수이다.
예수님도 그의 최후의 만찬을 유월절 만찬 형식을 따라 행했는데, 유월절 만찬의식중에 ‘하가다’라는 것이 있다. 먼저 가족중 제일 어린아이가 가장에게 ‘왜 유월절 만찬을 합니까’하고 묻게 돼있다. 그러면 가장이 애굽에서 종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모세 통해 어떻게 우리를 구원해 내셔서 우리가 빨리 애굽에서 도망가느라고, 누룩없이 빨리 준비한 떡을 먹고 쓴 풀을 먹고, 홍해를 어떻게 건너서 가나안으로 갔는가하는 출애굽의 구원사를 이야기하게 되어있다. 그래서 대대손손 이스라엘의 자손들이 그 하나님의 구원행위에 동참하게 되어 있었다. 그애서 유월절만찬이 자손으로 하여금 그들의 조상들의 구원사건인 출애굽사건에 동참하게 하는 것이 될 수 있었고 이것이 ‘하가다’이다. 예수께서 바로 그 유월절에, 내일 다가오는 자기 죽음을 통해 옛 출애굽의 구원과 마찬가지의 새로운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을 기념하게 하신 것이다. 이것이 새로운 유월절이다. 앞에서 고전 5장에서와 같이 예수께서 새 유월절 양으로서 십자가에 달려서 도살되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시다. 그래서 예수께서 새로운 유월절의 구원을 시작하신다. 그래서 옛 유월절만찬에 우리의 애굽 종살이에서 여호와가 우리를 구원했다고 말해야 하는 그 ‘하가다’의 그 시점에 ‘이것이 나의 몸, 피니 나눠 먹으라’는 새로운 하가다, 새로운 구원 사건의 말씀을 하신 것이다. 그래서 지금 형식은 유월절만찬의 형식을 따르고 내용은 탈바꿈시킨 것이다. 이제는 교회가, 새로운 출애굽의 구원인 자기의 대속의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을 통한 구원에, 이 만찬을 통해서 참여하도록 새로운 하가다를 주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도 이 셋째잔을 그 형식에 따라 축복하신 것이다. 그래서 그 잔을 지금 바을이 축복의 잔이라고 말한 것이다.


(36) 고전10:14-11:1
아 이렇게 준비를 잘 하시는 너희가 안하고 넘어갔더라면 크게 섭섭했을 뻔 했어요. 자 고린도전서 10장 14절부터 11장 1절까지 교독하겠습니다. 거기 이 부분에서는 바울이 우상숭배에 대해서 이제 아주 직접적으로 경고하고 있는데, 그것을 못하게 권면하고 있는데, 즉 성찬식에 참여하는 자는, 우상숭배에 참여할 수 없음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어요. 지난번에 본 바와 같이 15절에 바울이 이 지혜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면서, 모든 일을 잘 알고 이치를 다 깨달으며 이런 정도야 해도 된다 이렇게 생각하는 강한자들에게 너희들이 지혜있으면 한 번 해 보라. 내가 지금 충고하고 있는 것이 옮은 말이 아니냐 이렇게, 지혜있다고 끝내는 자들. 이렇게 강한자들에게 충고하고 있어요. 그런데 이런 충고의 근거는 16절에서 성만찬의 의미를 해설함으로 그 근거를 삼고 있어요. 그리스도를 믿음과 우상숭배는 도저히 화합될 수 없는 것임을 성찬예식과 우상숭배 잔치의 관계를 들어 설명하고 있어요. 여기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이라고 했는데 지난번 내가 설명한 것 같이 예수께서 최후의 만찬을 유대인들이 유월절 만찬을 할 때 유월의 일부인 유월절 만찬 의식에 따라 하셨는데 유대인들은 유월절 만찬때에 몇잔의 포도주를 마셨는데 그중에 세 번째 잔을 보통 축복의 잔이라 불렀다했단 말이예요. 왜냐하면 세 번째 잔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하기 때문인데, 예수님께서도 그 유월절 만찬의 관행을 따라 최후의 만찬을 했던 거예요. 그 지난번에 잠깐 설명했지만은 최후의 만찬때는 지금 현재에도 마찬가지로 해요. 요즘의 유대 가정에서도 우리가 애굽의 노예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구하셨는가를 그 이야기들을 그 가족에게 그 가장이 얘기해 주게 되어 있어요. 그것을 ‘세덥’이라 하는데 그것이 곧 이스라엘의 이 하나님의 구원사건에 대한 그 체험이었죠.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 ‘최후의 만찬’의 틀을 이용하셔서 새로운 세덥 내일 다가오는 자기의 죽음에 대한 사건, 즉 제 2의 출애굽 사건을 설명해 준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애굽에 노예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구하셨는가 그 얘기 대신에 이것이 나의 몸이고 이것이 나의 피라. 예수님의 십자가에 달리심과 피흘리심을 통해서 다시 제 2의 출애굽의 구원이 일어남. 이것을 옛 유대인들이 출애굽을 기념해서 유월절 만찬을 되풀이하면서 되풀이 할 때마다 세덥 구원의 사건을 이야기했듯이 교회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성만찬을 매번 예배때마다 되풀이 하면서 그 구원의 사건을 이야기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성찬식에 항상 이것이 나의 몸이고 이것이 나의 피라는 예수님의 그의 세덥, 즉 말씀을 우리가 늘 되풀이 하는 거예요. 원래 예배는 항상 이 2가지를 중심으로 이루어져요. 하나는 말씀의 선택, 다른 하나는 성만찬, 이 두가지가 예배의 가장 기본 요소예요. 불행히도 이번 사회에서 성만찬에 대한 신학자들의 오해 때문에 공교롭게 이것이 분리되어가지고 우리는 말씀 선택 중심으로 하는 예배만 드리고 일년에 한 두어 차례 성만찬을 하지만은 우리 교회에서는 그래도 한달에 한 번씩은 하자 그래서 세계의 많은 장로교 교육자들은 한달에 한 번씩은 하는데 우리들도 그렇게 하자. 그렇게 못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원래 신약성경대로 한다면 예배때마다 성만찬이 이루어져야 되요. 이래서 성만찬은 선포된 말씀의 극화라고 할 수 있어요. 드라마상의 극화라고. 그래도 예배는 항상 말씀의 선포와 이 성만찬 그 두 개의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하는데 성만찬이 이루어지는 것은 항상 이것이 나의 몸이고 이것이 나의 피다라는 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몸을 내어 주심과 피 흘리심을 통한 구원의 사건을 기념하고, 기념한다는 말은 현재화한다는 말이예요. 지금 현재 나에게 은혜있게 하는 그것은 현재 지금 나의 구원의 사건이 되게 한다고 얘기하는 거예요. 기념한다는 것은 그렇게 하는 것이 원래 예배예요. 그래서 그 관행을 지금 고린도교호에서 하고 있는 이때예요. 지금 11장을 보면 더 자세히 나오지만 지금은 그것을 지금 근거로 예배 끝나서 모여서 이 포도주잔을 축복하고 그것을 같이 나누어 마시자 말이다. 그리고 한 떡덩어리를 나누어 먹지 않겠느냐 이렇게 성만찬에 기념을 행하지 않느냐 그것은 무얼 말하는냐 말이예요. 그것은 우리가 이 십자가에 축복을 스스로 몸을 내어주시고 또 스스로 피를 흘리신 예수님의 그 속죄의 제사에 덕을 입는자 됨을 말하지 않느냐 그래서 우리말로 참여한다하여 표현했죠. 그죠.
아자 아니냐 그런데 자 성만찬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몸을 내어주심과 피흘리심에 덕을 입는다는 것은 무슨말이냐 하면은 자 18절부터 유대인들의 제사에 관해 그 성전에서 제사의 관행에 풀어서 그것을 좀더 설명하고 있어요. 엄~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바울이 우리가 이렇게 성만찬에 참여하면서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데 여기는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것 성만찬에 떡을 먹고 피를 포도주를 마심으로 두가지 합의를 볼 수 있어요. 두 가지의 조절 믿음과의 교제가 하나는 그리스도와의 교제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몸 속으로 내포되는 거예요.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 내포로써 우리대신 자기 몸을 내어주셨는데 우리가 그를 믿으면 그와 연합해서 그의 몸속으로 내포되는 거예요. 그것을 우리가 세례때에 그것 한 번 표현해요.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 속으로 세례를 받아요. 지난번 우리가 그랬죠. 10장 거기 총 스터디에 유대인들은 무엇을 톱으로 세례를 받으며 우리 스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통으로 세계를 받는다고 그리스도 몸속 우리 내포에 그리스도 몸속으로 들어가서 그리스도의 몸을 형성하는 거예요. 그리스도의 몸. 몸을 형성해요. 그래서 그리스도의 몸이 교회를 이 교회의 그림이 되는거죠. 바울이 쓰는 그림이, 또 하나는 우리가 다 써보는 그리스도에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의 이름 속으로 세레를 받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속으러 다 들어가서 그리스도가 확실히 우리의 모두의 대표가 됨으로 우리가 어떻게 된거예요? 그리스도 속으로 들어갔으니까 우리가 그리스도 몸안에서 우리 모두가 하나가 된거예요. 하나 그리고 우리 성도들의 하나를 성도들의 하나됨. 유니들 그러니까 그리스도와 하나됨. 그리고 성도들과 하나됨, 성도들의 교제 그 두가지의 이 성만찬에서의 이 두가지의 유니들 유니얼은 하나됨을 확인하는 거예요. 그것을 바울은 떡 하나를 같이 떼고 한 포도주란을 같이 마심으로 우리가 같이이면서 하나에 같이 참여한 그래서 같이 우리가 함께 그리스도와 합의를 봐 그리스도의 몸속으로 들어가서 그리스도 첫째 그리스도와 하나되고 그러니까 서로간에 하나되고 이것을 바울은 12장부터는 이에 성령론 2과 3과에서 우리가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교회를 구성하는 개개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몸에 지체들가느이 그림으로 몸과 지체라는 다 표현을 한 거예요. 아주 잘 표현을 한거예요.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부르는 것은 일단은 성만찬의 예식의 말씀에 근거를 두고 있어요. 그런데 이 표현은 바울에게만 나오는 표현이예요.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보는 이 그림을 그래서 이 그림이 아주 효과적인 그림이에요. 첫째 그리스도와의 합의 하나됨. 그래서 그리스도가 우리 모든 대표되는 사상을 잘 나타낼 수 있는 사상은 ? 말이고 성도들과의 성도들간의 하나됨을 잘 나타내는 말이고 그리고 교회의 하나됨만을 잘 나타낸 것이 아니라 또 교회내서의 다양성. 지체들이라는 말은 다양성을 나타내는 말이죠. 몸이란 말은 하나됨을 잘 나타낸 말이라면 지체들이란 말은 다양성을 나타내는 말이에요. 이따 12장을 잘 살펴 보겠습니다만 그래서 그 교회의 하나됨과 공동체의 다양성을 아주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아주 아름다운 그림이에요.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 그리고 또 성도들간의 관계, 그리고 교회안의 하나됨과 다양성 이 모든 것을 잘 효과적으로 표현할수 있는 그림이에요. 그런데 그러니까 자연히 우리들의관심은 이런 그림이 어떻게 해서 신학자들이 갈등하게되는가 바울이 어떻게해서 교회의 그리스도의 몸과 지체라는 그림을 그렸었는가에 대한 연구를 할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저에게도 하나의 뿌리는 성만찬때 예수께서 떡을 떼시며 이것이 나의 몸이고 이것이 나의 피라는 그 말슴에 근거하고 있어요. 우리가 지금 이 본문 보는바와 같이 그러나 우리를 다른 배경들이 있어요. 그러나 오늘 그런것까지 설명하진 않겠어요. 하여간 아주 그리스도의 몸과 지체간 그림은 아주 이 ~ 아름다운 교회에 대한 그림이다. 그래서 교회와 그리스도간의 관계. 그리고 교회의 성도들간의 관계, 그리고 또 하나됨과 이 ~ 다야성을 잘 나타내는 그림이다. 그정도만 여러분들이 알아두시기 바랍니다. 아 ~ 다음에 이 하나됨을 18절부터 바울은 유대인들의 제사예로 설명해요. 제물의 일부를 먹는 제사장들은 레위기 10장 6절에 재단의 동무들이라고 불러요. 그건 지금 바울이 그걸 예를 들어서 제물을 함께 먹는 자들은 재다느이 동무라 그래서 헬레시포켄스에 있는 자들아 그게 유대의 제사중에 유대인들이 성전에 가서 하는 제사가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그중에 하나가 코다라는 제사에요. 코다. 무슨 감사제사라는 말이예요. 무슨 감사제사 그러니까 가령 잃어버렸다가 찬았다든지 또는 어려움속에 빠졌다가 문제가 해겨로디었다든지 무슨 큰 병고에 있었다가 치유를 바앗다던지 이렇게 해서 하나님게 감사하고 이웃과 기쁨을 가팅 나누고자 할 때에는 코다 제사를 드렸어요. 우리 시편에 가끔 코다제사의 모습이 있어요. 그래서 이 코다 제사는 하나님께 감사함과 이웃들과 친구들과 친교를 북돋아주는 제사에요. 그래서 이 제사의 목적은 이 항상 이렇게 특히 코다에서 잘 나타내지만 항상 하나님과의 펠로우십 그리고 이웃들과의 펠로우십을 북돋는거예요. 그것을 이제 바울이 예를 들어서 아~ 성찬식의 성격이 그리스도와 하나된 그리고 성도들간의 하나됨을 북돋아 주는 것으로서 이 성찬식을 설명하고 있어요. 근데 바울이 지금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상에게 제사하면 우상의 제사에 참여하면은 마찬가지로 그 우상과 제사하는 사람이 하나됨을 가져오는 것임으로 있을 수 없다. 그 말을 하고자 해요. 바울이 지금 그러니까 우리가 성찬식에 참여하는 살마으로서 그리스도와 하나된 사람들이 어떻게 동시에 우상에게 우상의 제사에 참여해서 우상과 하나됨이 있을 수 있겠느냐 그건 있을 수 업삳. 바울이 하나 벌써 8장에서 그 말을 지금 바울이 하고자 해요.
여기서 우리가 잘 보세요. 이 성경, 이 바울 서신 어느 곳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이 이 귀신들을 무시무시하게 가르치지 않아요. 이 복음서도 마찬가지예요. 귀신들은 무시무시하게 하지만, 그것을 무시하고 예수가 주인이시다 믿고 전적으로 예수님의 주권을 의존하고 담대하게 사세요. 예수께서 세상을 이기셨어요. 모든 사단의 세력을 이기셨어요. 그러니까 예수의 주권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담대함과 평화와 자유를 갖고 그 예수에게만 순종함으로 그로부터만 구원을 얻으려는 올바른 그리스도인들을 어찌할 수 있겠어요? 우상을 무시해 버릴 수가 있고 우상을 무서워할 필요 없고 귀신을 겁낼 필요가 없어요. 귀신을 무시해 버려요. 귀신은 누구에게 작용하느냐 우상에게 무슨 실제가 있는 것 같은 생각에서 예수의 주권에 대한 철저한 신뢰, 의뢰와 순종이 약해져 가지고 무슨 다른 어떤 것, 그 우상 무슨 돌 조각, 무슨 나무 조각 아니라도 무슨 돈이라든지 명예라든가 아니 가치 이런 것에서 나의 안전과 행복과 나의 인생의 의미를 조금이라도 얻으려고 하면 작용하게 된다. 그 우상숭배 상황에 누가 들어오게 되느냐 귀신이 들어온단 말이예요. 귀신이 들어와요. 올바른 신앙생활 하는 사람은 예수가 주이시라는 철저한 확신 가운데서 그에게 신뢰하고 그에게 순종하고 그로부터 오는 평안과 자유와 방대함을 누리면서 살면 되는 거예요. 근에 예수의 주권에 대한 신뢰가 약하다든지 그래서 어떤 예수 외의 다른 어떤 것으로부터 나의 안전과 행복과 의미를 찾아보려고 하는 바로 그 행위가 우상숭배이다. 이 행위는 스스로를 귀신의 영향력 밑으로 귀신의 주권 영향력아래 스스로 집어넣는 행위로서 귀신의 지배를 받게 된단 말이예요. 그래서 바울이 그런 일을, 그런 어려움으로부터 보호하고자 해서 그렇게 우상숭배에 동참하지 말 것을 권하고 있죠. 21절에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상과 귀신의 상에 겸하여 참예치 못하리라고 바울은 말한다. 성만찬에 참여하는 자들이 어떻게 이제 우상숭배에도 참여해서 그리스도와 하나된 자들이 그리스도와 하나된 성만찬에서 다시 우상숭배에 참여하면 우상 뒤에서 활동하는 귀신과 하나되는 그리스도와 하나됨이 떨어져 버리는 거예요. 그것은 곧 그리스도의 영역이 구원의 영역인데, 성만찬을 통해서 그리스도와 하나된 그래서 그리스도의 구원의 영역에 참여해서 그 구원의 덕을 보는 자가, 우상숭배 함으로써 귀신과 하나됨으로써 그리스도와 떨어져 버리게 되면 사단의 지배하에 떨어지게 된다. 사단은 우리를 죄악과 죽음으로 통치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구원의 영역에서 떨어져 나가서 사단의 죄악과 죽음 영역으로 떨어진단 말이 된다.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22: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시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 벌은 잘못을 했어도 바로 내리지 않는다. 우상숭배를 해서 귀신의 영역, 곧 사단의 영역에 죽음과 죄악의 영역에 떨어지는 사람에게도 돌이켜서 다시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 성만찬의 진짜 이름이 뭡니까? 주의 만찬이예요. 우리는 성만찬이라 부르는데 진짜 성경적인 이름은 주의 만찬이예요. 예수께서 주로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만찬, 주의 만찬에 참여하면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시고 발을 돌이키는 것을 허락해요. 그런데 광야에서 이스라엘인들이 하나님께 불평하고 하나님을 믿지 않고 했을 때 하나님께서 용서하고 양보하고 그들에게 고기를 먹이시고 만나도 내리시고 물도 내려주고 했지만, 하나님의 그 오래 참으심에도 한계가 있어요. 그 한계가 광야에서 어떻게 드러났느냐 하면 그들이 다 죽음으로 나타났다. 다 죽었지만 하나님은 신실하셔서 지난 시간에 봤듯이 살길,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자들에게는 살길 하나를 열어 놓으신다. 즉 이 두 가지는 항상 있다. 첫째로 하나님의 신실하심, 오래 참으심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 오래 참으심을 이용해서 ‘하나님을 오래 참는다, 그러니까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고 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그 오래 참으심과 그 신실하심을 나의 무책임하고 경거망동함에 그 근거를 삼을 때에 다시 더 돌이킬 수 없는 낭떨어지가 있을 수 있다. 그래서 바울은 본문에서 광야에서의 이스라엘인들을 예로 삼았던 것이다.
여기 그 말하고 있어요. 너희들에게도 마찬가지나 고린도 인에게 너희들이 주를 언제까지 모실 수 있는 것 같니? 오래 참으심과 신실하심을 언제까지 담보로 삼아 가지고 계속 하나님을 시험하려고 사느냐, 언젠가는 돌이킬 수 없는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 밑에 떨어질 수 있으니 그래서는 안 된다.
이 후에 주와 씨름하는 자들로 지금 고린도 인들을 생각해서, 너희들이 주보다 강한 자냐, 바울이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제 23절부터 11:1까지 에서는 결론적인 당부를 하고 있다. 지금까지 한 말들은 아주 똑 부러지게 조목조목 가고 있다. 23절부터 11:1까지에는 그리스도인의 모든 윤리의 대원칙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그리스도인의 자유, 두 번째는 사랑이다. 자유와 사랑의 의무이다. 바울이 8장에서부터 지금까지 이 곳 10장 마지막 절까지 3장에 걸쳐서 길게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는 문제에 대해 다뤄 왔다. 거기서 두 가지 원칙을 제시했다. 8-9장에서는 그런 음식을 먹는 것이나 안 먹는 것이나 다 무슨 이익이나 손해를 가져오는 것은 안다. 먹어도 되고 안 먹어도 된다. 먹었다고 무슨 이익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안 먹었다고 해서 무슨 손해가 있는 것도 아니다. 또 금욕주의자 같이 안 먹었다고 해서 무슨 이익이 생기는 것이 아니고 더 거룩해져 하나님께서 더 축복 받는 것이 아니다. 먹었다고 해서 또 하나님으로부터 벌받고 손해보는 것도 아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그리스도인들은 자유인이다. 그러나 그는 그의 자유를 약한 형제에 대한 사랑으로 스스로를 제한해야 한다. 절제해야 된다.
이것이 8-9장이었고 그 다음에 10장에서는 우상숭배잔치에 참여하는 것은 귀신과 연결하는 것이므로 성만찬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하나되는 그리스도인은 절대 그것을 피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즉 8-9장에서 하나의 대원칙을 가르치고, 이 우상에게 받쳐진 음식을 먹느냐 안 먹느냐 하는 것은 자유와 사랑의 결핍이다. 그러나 10장에서는 다른 것이다. 우상숭배잔치에 동참하는 것, 불신자들의 우상숭배에 그 행위에 습관적으로 동참하는 행위, 그 습관적인 행위는 안 된다는 말이다. 이것은 바울이 경고하는 것은 이방인들의 우상숭배잔치에 참여하여 그들의 그 행위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것과 그냥 우상숭배 하는 이방인 이웃들과 사회적 교류를 하며 사는 것, 그들에게서, 그들의 정육점에 가서 음식을 사 먹거나 그들의 집에 초대받아 가서 즐겁게 먹고 마시는 것의 두 가지를 구분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 우상에게 바쳐졌던 제물을 먹는 것, 이것은 먹을 수 있다는 말이다. 다만 약한 자들을 고려해서 사랑의 원칙으로 절제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우상숭배신전에서 우상숭배행위와 함께 일어나는 여러 잔치, 직업단위의 잔치 등에 참여하는 것, 이것은 우상숭배행위라는 말이다. 그 불신자들의 우상의 신전에서의 우상숭배잔치에 참여하는 것은 스스로 거기 가서 절하지 않고 향을 피우지 않아도 그 수상숭배행위에 참여한 것이다. 왜 무엇 때문인가? 먹고 마시는 행위가 무엇이기에? 하나됨을 이루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성찬식에서 그리스도의 몸과, 주의 몸과 피를 마시는 그리스도인이 하나됨을 이루듯이 우상 앞에서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고 마시는 것은 제단의 동무들로 만들어 가지고 우상과 하나됨을 만드는 것이다. 우상이라는 것은 사실상 없으니까 사실은 우상 뒤에서 활동하는 귀신과 하나됨을 이루는 것이다. 즉, 교류와 우상숭배 두 가지를 별개의 것으로 다루고 있다. 다시 말하면 우상숭배행위는 안 된다. 우상숭배행위는 그리스도와의 단절을 가져오고 귀신과의 합일을 가져와서, 그리스도의 구원의 영역에서 탈락되어 사단의 죽음과 죄악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한다. 즉 그것은 파멸이다. 파멸에서 그 사람들이 다시 돌이키는 것을 하나님은 허락하시지만 하나님의 진노에, 오래 참으심에는 한계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또 말하지만 우상숭배 하는 불신자들과 사회적 교류하는 것은 괜찮다는 것이죠. 자유, 팔, 자유, 사망 그것이 늘 양심에 거리껴하는 약한 자들을 위해서 그들을 앞에서는 삼가는 것이 좋으나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은 그런것들에서는 자유하다. 뭐 먹는다고 해가 되는 것도 아니고, 안 먹는다고 해서 무슨일이 되는 것도 아니다. 지금 그렇게 말하고 있어요. 바울은 이미 5:9-10에서 이미 배웠어요. 이 세상이 더럽고 악하고 우리의 이웃 불신자들이 우리와 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있지않고 우리와 같은 윤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해서 또 그들과 교류하지 않고 그들로부터 후퇴해서 그리스도인들을 예표해서 살 수는 없다. 바울이 그랬죠. 바울이 뭐랬죠? 고린도 5:9-10에서 무슨 원칙을 말했죠? 그러면 어떡해요? 세상밖으로 나가야 된다는 거예요. 세상 밖으로 그럴순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어진 환경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불신자들과 사회적 교류는 해야되고, 하고 살아야 된다는 말이예요. 다시는 이제 바울은 두 곳에서 부정적으로 표현하고 있어요. 그러나 예수님도, 바울도 사실은 원래 똑같은 원칙을 긍정적으로 말하고 있지요. 무슨 원칙으로, 선교원칙으로 이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악한 암흑의 세상에서 자꾸 도피하는 것이 올바른 그리스도의 삶이 아니라, 썩고 암담한 세상속에서 들어가서 빛을 발하고 스릴을 선사하고 사랑을 선포하고 통일해 나가고 이런 선교적 자세, 빛과 소금의 자세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자세죠. 올바른 자세죠. 아. 경건주의, 복음주의 전통에 자꾸 후퇴하려는 경향이 아주 강해요. 이 분리 원칙을 자꾸 강조하는 사람들은 자꾸 후퇴하려고 해요. 아. 세상사람들과 어울리면 항상 손해야, 그들의 죄의, 악의 영향을 받게 되고 그러면 나의 도덕성, 기독교적 가치관이 혼돈되고 나의 성화에 지장있고, 될 수 있으면 세상을 멀리 해야 돼. 이 것이 올바른 그리스도인의 자세가 아니란 말이예요. 이 사회적 교류에 이 우리가 우상보다 귀신보다. 더 큰 그들을 이긴 예수 그리스도 믿는 자들로서 우리의 궁극적인 승리를 확신하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회를 변해 가는, 변해져 가려는 그런 선교적 자세, 그런 의지, 확신을 가지고 더러운 사회 속으로 들어가서 빛을 발하고 소금의 역할을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예요. 자, 이것을 이제 바울의 정리함에 있어서 23절에서 11:1까지 정리함에 있어서 23절에 대원칙을 설명, 6:12절에 했던 말을 다시 한 번 해요. 이것은 아까 지난번에 얘기한 대로 고린도의 강한 자들의 구호를 바울이 인용하면서 일부 수정을 가한다 했죠. 모든 것이 너희들에게 과하다, 이것이 고리도인들에게 구호예요. 강한 자들에게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모든 것이 가하다, 그러니까 나는 모든 것이 합법적이다.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이게 강한자들의 구호예요. 내가 이 사단의 세력을 이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로서 그의 구원, 그의 보호하심 그의 인도하심은 받는 자들로소 내가 지금 hd로로 선행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니라 오로지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는 것이니라. 내 뭐 모든 것을 다할 수 있다. 이런 강한자들의 자세, 지난번에도 내가 강조했죠, 바울이 그 신앙의 원칙에 동의를 했죠. 장한 자들의 신학적 결론에 동의를 해요. 그렇다면 우리그리스도인들은 근본적으로 자유가 있다. 내가 그리스도인들을 자꾸자꾸 무서워해서는 않되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함으로 담대함과, 바울 말에 자주 나오는 말의 무슨 말이예요. 담대함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다음에 고린도 후서 3장 끝에도 우리가 담대함으로, 담대함이란 항상 자유란 말을 포함해요. 자유, 그리스도인의 자유, 내가 그 기본적인 설명을 해주고 있어요. 그러나 그 자유라는 것은 사랑을 의무로 깔고 배워야지 방종으로 흘러서는 절대 않된다. 이 요점을 바울이 시정하고 있지요. 무든 것이 지금내게 가하다. 이것이 고린도인들의 강한자들의 구호이다. 그러나 무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다. 그러면서 모든 것이 가하다고 인용한다. 고린도인들의 구호를 또 한번 바울이 수정한다. 그러나 모든 것이 교회를 세워올리는 것은 아니다. 덕을 세운다는 것은 교회를 세워 올린다는 것이다. 교회를 지어간다는 말이다. 교회를 더 성스럽고 아름답고 사랑이 풍성하고 더 의롭고 더 진리로 가득찬 공동체로 쌓아 올린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가하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자유가 있다. 그러나 모든 것들이 나 개인에게 유익한 것은 아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나, 술도 마실 수 있고 다할 수 있다.” 그러나 자유, 그것이 다 유익한 것은 아니다. 내가 술을 많이 먹으면 간이 나빠지고 정신이 혼미해져서 죄 짓기 쉽고 내게 유익하지 않다. 모든 것이 가하다고 내게 다 유익합니까? 유익하지 않다. 허나 더 중요한 것은, 개인적인 삶에서도 그러한데, 모든 것이 가하지만 그리스도인에게는 그리스도와 하나되고, 그리스도로 하나됨으로 말미암아 성도들로 하나된 자들로서, 한 몸으로 지체된 자들로서 자기의 일거수 일투족이 항상 이웃에게, 형제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을 늘 생각하면서 살아야 한다. 그것이 이웃에 대한 사랑의 의무이다. 그래서 나의 일거수 일투족이 나의 형제의 믿음을 북돋아주고 성화를 복돋아 줘요. 교회 전체가 거룩한 공동체로 쌓아 올라가야 된단 말이에요. 그런데 그것을 무시하고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고 아무렇게나 경거망동하거나 형제들에게 상처를 주고 형제들도 하여금 나와 같은 무절제한 방종으로 가게 하면 그 공동제는 어떻게 되요? 쌓아올려져가는 것이 아니고 폭삭 내려앉는 공동체가 되겠지요. 그래서는 안된다. 그렇게 지금 바울은 대원칙을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지금 그리스도인들의 자유, 중요한 사랑의 의무, 이 두가지가 꼭 필요해요.두가지가 꼭 있어야 해요. 그런에 그 다음절에 그중에 어느 것이 더 중요하냐 하면 이 사랑의 의무가 더 중요한 것이다.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자기 멋대로 하지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즉 그리스도인의 그 윤리에 자유와 사랑의 의무가 둘다 똑같이 중요한데 그중에 어느 것이 더 중요하냐 하면 후자가 더 중요하다. 사랑의 의무를 위해서 자기의 자유를 제한할 줄 알아야 한다. 바울이 지금 그렇게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그래요. 제가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해서 강조하는 이유는 전에도 말씀드린 바있지만 우리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자유가참 적어요. 지난 번에도 말씀드렸지만 다시 한 번 되풀이하는데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더 얽매여서, 불신자들의 눈에는 다 예수믿는 것이 도무지 매력적이지 못한 거예요. 너무 속박준다는 거예요. 왜 그래요. 율법주의 때문에 그래요. 율법주의 때문에 니가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자유라고 하고있는 거예요. 그러나 자유가 방종이 되서는 안되고 사랑의 힘으로 절제되어야 해요. 절제. 이렇게 조화가 이뤄져야 돼요. 이 조화속에 율법주의가 파고들어서 모든 것을 율법으로 만들어서 나 스스로를 얽어매서는 안된다. 어떻게든 내가 그 율법, 나 스스로가 만든 율법들을 잘 만들어 지켜서 하나님의 축복을 얻고 무슨 구원을 얻겠다는 것은 복음과 어긋나는 거예요. 율법의 행위로 구원 얻으려고 하나 그것은 옳지않다는 말이예요.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의 은혜에 의한 구원은 자유를 설명하고 있는데, 그 자유는 사랑으로 절제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는 25절부터 지금까지 자기가한 충고를 조목조목 요약을 해요. 이제 이 쓰인 것을 읽음으로써 8장에서 10장에 걸친 오랜 토론을 우리도 마무리하겠습니다.
25절: 첫 번째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시장에서 파는 고기가 우상에게 바쳐졌었는지 아닌지 묻지 말고 자유럽게 사서 먹으라고 말한다. 약한자들이 율법주의적으로 안절부절 못 해하는 것을 바울은 분명히 미신적으로 보고 있어요. 이것은 간접적으로 약한자들에 대한 비판이예요.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약해가지고 주께서 사단의 세력을 이기고, 악의 세력을 이기시고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셨는데 고걸 확신을 못하고, 혹시 우상에게 바쳐진 재물을 먹으면 자기가 이 구원에 이르지 못할까 안절부절 못해 하고 있다. 시장에 있는 것을 사먹는 것을 우상에게 바쳐지는 과정을 통해서 도살되었느냐고 묻지 말고 사서 먹으라고 충고한다. 이 신학적인 충고에 대한 신학적 근거는 ‘창조사상’이예요. 뭡니까?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다 주의 것입니다. 주께서 온 세상 다 지으시고, 그 안에 있는 주께서 하늘과 땅을 지으시고 그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다 지으셨어요. 그러니까 다 선한 것이예요. 세상의 모든 선물은 다 하나님께로부터 왔어요. 하나님께서 음식으로 주신 것은 그 자체로서 깨씃한 거예요. 그러므로 스리스도인은 마음의 거리낌없이 그것들을 먹을 수 있어야 된다. 행10장을 보면 거기의 베드로도 고린도전서를 다시 배워야 돼죠. 음식을 가리는 레위기법 때문에 유대인들에게 기독교 신앙의 자유라는 이 진리가 잘 먹혀들어가지 않는 것이다. 베드로에게도 그러했기에 하나님께서환상가운데서 레위기에 금지되어 있던 동물들을 먹으라고 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막7장에서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우리를 더럽니는 것이 아니라고 맜씀하셨다. 괘지고기 먹고, 무슨 피 마시고 하는 것들은 우리를 더럽히는 것이 아니고, 그런 것들은 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선한 것이라는 말이다. 예수께서 레위기법을 다 증가해 버린 것이다. 완성해서 능가해 버리신 것이다.
신학적으로 말해서 레위기법은 왜 있습니까? 하니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성전에서 하나님께 제사하고 거룩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자격을 주기 위해서 있는 것이다. 청결의 볍이 ㅇ켸수 글스도의 십자가에서 으 대 속의 제사로 그 성전의 기능, 제사의 기능이 완성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그시슫인들은 더 이상 그런 성전에 가서 제사라는 일도 없으려니와 그 제사를 위해서 음식을 가릴 필요가 어 이상 없는 것이다. 하 하나님께서 주신 것, 선한 것으로 다 먹으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아무 거리낌없이 다 먹을 수 있다 이쯤하니까 어떤 양반들은 내게 물었을까 개 사철탕 먹어도 됩니까? 그것은 좀 다른 문제입니다. 그건 다 먹어도 돼요. 그건 좀 먹어도 돼요. 돼. 그건 문화적 문제인것이죠. 그건 각자 신학적 이유로 못먹을 이유 없어요 신학적으로 저는 안 먹어요. 그러나 신학적으로 안 먹는 이유가 아니고 저기 선입관 때문에 못 먹어요. 선입관 그러나 신학적으로 못 먹을 이유가 없어요.
자 두 번째 가르침 28절 누가 불신자 친구 집에 초청을 받아서 식사할 때에 똑같은 자유로 모든 것을 먹으라.불신자 가정에 초대받아 가지고 불신자가 음식을 내났어요. 우리 한국의 상황, 아니 음식이 거하게 내놓은 것을 보니까 당신 어저께 당신 세상 떠난 아버지 제사 지냈소 그런 것 묻지말고 먹으란 먹으란 말이예요. 묻지말고 네 묻지말고 먹으라고, 먹어도 된단 말이예요. 먹으라.
아 그다음에 3번째 가르침 28절과 29절의 그런 상황에서 불신자 친구 집에 초대를 받아 식사할때에 누군가에 의해서 식탁의 고기가 우상에게 제사되었던 것이라고 지적될 경우에는 그것을 먹지말라.
그사람의 양심을 의해서 먹지말라. 자 그말이에요.
그러니까 아무 문제없이 스스로 당신 어제 집에 제사했었소. 왜 이렇게 음식이 굉장합니까 그런 것 묻지말고 그냥 먹으란 말이에요.그런데 누가 같이 식탁에 동참한 자 하나가 아 이것 사실 어제 제사 드렷던 저기 음식입니다. 제사상 음식입니다 할 경우는 먹지 말라. 그 사람의 양심을 위해서 먹지 말라. 자 그러면 그 사람이 누구냐.이 주석가들의 의견이 두 개로 갈려요.
첫째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을 손님 접대하는 주인으로 봐요 왜그러느냐면 여기 28절 봅시다 28절 누가 너희에게 이것이 제물이라 말하거든 여기 제물이 번역된 이 말이 정확히 번역하면 성전에 제사에 바쳐진 제물 그 말이예요. 지금까지는 바울이 똑같은 물체를 가르키는 말로 무슨 언어를 쎴냐면 에이돌로후튼 그 말은 무슨 말이냐면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이라는 뜻이예요. 우상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에이돌로스.후톤하면 제물로 바쳐진 것 그러니까 우상에게 바쳐진 것 그것은 상대방의 종교 상대방의 신을 실제가 없는 거짓 신으로 격한 말이예요 그런데 지금까지는 그 말을 썻어요 왜 고린도인들에게 안하고 있으니까 고린도인들에게 믿는 자들에게 말하고 있는거니까 그런데 28절에는 그 말을 피하고 히에로후톤.성전의 제물. 그러니까 누가 이것이 성전의 제물이라 말하거든 그 사람의 양심을 위해 먹지 말라 했다면은 바울이 왜 여기서는 말한 것을 바꾸느냐. 그 주인의 입장에 서서 말하기 때문에 주인의 입장에 서서 말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냐. 그 주인은 자신의 신에게 제사하고 그 신의 복을 받은 고기를 먹고 그런 고기를 손님 대접을 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또는 보다 적극적으로 주인 친구로 하여금 자신의 신을 믿게 하기 위해서아 이건 사실 신 누구에게 제사했던거요. 구원받고 당신도 우리 신의 복을 나누시오 이렇게 말할 가능성이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에는 먹지 말라. 이런때는 그 지적한 자의 양심을 고려해서 그 고기를 먹지 말아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주인들은 그 고기를 안 먹으므로써 자신의 신에 대한 신앙 고백을 밝히고 거꾸로 그 이방인 불신자 친구의 우상 숭배 행위에 대한 거부의 태도를 밝힐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돌일학자들 프리드리히이나 손전망같은 학자들은 그렇게 해석해요 바울이 그 지적자의 양심을 고려하며 먹지말라고 하는데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이 지적자의 양심하고 무슨 관계가 있어요. 왜 이것이 불신자의 양심을 고려할수 있다는 것인가라는 것을 볼 때는 앞 장8장에 누구의 양심을 고려해서 삼가할 때는 바울이 항상 누구의 양심을 말했어요. 같은 주인들 중에 약한자들의 양심을 항상 고려하라고 했잖아요 불신자들의 양심 뭐 자기 신들에게 바쳐진 것이라고 양심에 아무 꺼리낌없이 떳떳한데 뭐 그 사람 양심을 고려해서 먹지 말 필요 있습니까 그런 어려움 때뭉에 이 찰스 핀슬리 마르크 같은 학자들은 여기에 지적자를 함께 초대된 약한 x인으로 봐요. 그러니까 불신자 이웃들이 두 신자들을 함께 초대한 갓으로 봐요 그 중에 한 자가 약한 자에요 그 사람이 미리 조사한 거예요 식탁에 초대한 주인집으로 가서 혹시 어제 당신 제사해서 당신 뭐 저기 우리에게 대접한 고기가 뭐 저기 신전에서 가져온 것이 아니요 조사를 미리 했어요 아 그렇다고 해서 이 사람이 식탁에 앉아서 먹을까 말까 약한 약심으로 식탁에 초대되었으니까 기쁘게 기꺼이 먹어야 하는 것이 사회적 도리이나 자기 신앙 양심에 거리낌에 걸려 먹을까 말까 하다가 아무래도 안 되겠다 해서 같이 온 형제에게 좋은 일 한답시고 김 아무개 자네도 그 고기에 손 대지 말께 그 고기 이 사람 주인 신에게 바쳐진 고기야라고 말해 주는 거예요그런데 그 불신자 주인의 면전에서 그 사람이 섬기는 신을 우상이라고 하기는 어렵단 말이예요.그러니까 좋은말로 표현해서 이 사람의 신을 성전에서 바쳐져 저울이라 표현 한거예요. 그래서 약한 양심이 그로 하여금 식탁의 고기로 하여금 조사케 했고 그 조사 결과 동료 x인에게 알려줌으로 해서 자신의 양심을 관정으로 해서 먹지말 것을 은근히 종용해요. 나 이것 먹으면 양심에 거리끼고 같은 x인으로서 먹으면 나로써는 상당히 어려울 거라고 그런때는 이 그사람은 지금 약한자는 불신자 주인의 기분을 상치 았으려고 x인들이 쓰는 에이플로후톤 이라는 성전에서 바쳐진 제물이라는 말대신 주인의 언어인 희어로후톤 이라는 성전에서 바쳐진 제물이라는 언어를 쓰고 있어요. 이 해석을 따르면 지적자 양심을 고려해 그고기를 먹지 말라는 가르침은 8장 7절에서 13절까지에 바울이 강한자들에게 가르쳐준 가르침을 되풀이한 것으로 보아야되요. 그런데 9장 30절, 그다음 그다음 왜 그것에 대한 신학적 뒷받침 안해요. 아까 아까 첫 번째 가르침 모든 것 만들어 먹으라 했죠. 그리고 거기에 대한 신학적인 근거 참조사상으로 됐죠. 그다음에 두 번째 가르침주죠. 그리고 두 번째 가르침에 내주함으로 그신학에 참여하는 동료 x인이 양심이 약해서 가지고 우상에게 바친 제물이라 하면 먹지말라. 해가지고 그것을 가지고 또 신학적인 근거를 대는 거예요.
21절후반부에서 30절 까지예요. 그게 뭐 냐 하 면 어찌하여 내 자유가 남의 양심을 따라서 판단을 받으리요. 만일 내가 감사함으로 참예하면 어찌하여 내가 감사하다 하는것에 대하여 비방을 받으리요. 그게 지금 바울이 세 번째에 대한 그 신학적인 근건데 그게 아주 난해한 말이예요. 아주 해석하기 어려운말 그래서 거기 제 보기에 가장 그럴 듯한 해석은 그런거예요 거기에선 강한 x인들이 절제해야 하는 이유를 8장 7절에서 13절 까지 덮 붙여 가지고 거기서는 대해 무슨 이유를 댔어요교회를 쌓아 올리는 덜을 세우는 우리말로 건덕 덕을 세우는 입장에서 사람을 의무로 절제한다고 했는데 여기에 하나를 덮 붙이고 싶어요 그 이유를 하나 덮 붙여 약한 x인들이 우상의 제물을 지적하는 경우 거기 그것을 많이 글짜가 빠졌어요 네가 강한 x인으로서 네 자신의 자유를 그냥 행사해 버리면 그 약한 x인들은 너로 그의 양심의 근거에 의해 비판할 것이다 스스로의 남의 양심의 비판거리로 만들면서까지의 너의 자유로 행사하는 것이 그리 바람치 않는 것이 아니지 않겠느냐 이런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가장 그럴 듯한 해석 같아요 아주 어려운 말입니다만은 31절 결론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주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x인들은 그의 일거수 일투족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함 우상 숭배를 교회 내에서 추문울 일으키는 것 약한 형제의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 이것은 θ께 영광 돌리는 것이 아님으로 삼가야 한다 그 결론에 그것도 원칙이 두 가지예요.
하나는 최대한 우리의 모든 행위는 두 가지를 고려해서 해야 한다 하나는θ의 영광을 고려서 이 말이 내가 θ께 영광되는 것이다 내 하는 이 행의가 θ께 영광 돌리는 것이 아니냐 둘째는 이웃에 대한 고려 이웃에 대한 사랑 거기 32절에 있죠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이것은 부정적으로 표현했죠 이것은 거침돌이 되지 말고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교회나 해를 가져오는 자가 되지 말고 거침돌을 주지 말고 33절은 그것의 반대 표현 똑같은 원칙의 긍정적인 표현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는 구원을 얻게 하라 이 두가지 원칙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다른 하나는 이웃의 이익을 구해서 그로 하여금 나의 사랑의 행위를 보고 θ를 알수 있도록 하나님의 구원을 얻을 수 있도록 그러니까 나의 윤리적 삶이 무슨 목적을 달성하는 겁니까 선교적 목적을 달성하는 거예요. 그리스도인의 삶은 항상 선교적 삶이예요. 선교적 삶,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서 하나님을 영광을 나타낸다는 것이 무슨 말을 하고 있죠. 하나님을 드러냄. 하나님을 드러냄. 나의 삶이 하나님의 드러냄. 그것이 하나님을 영광 돌리는 거예요. 그렇게 그것은 곧 무슨 소리냐하면 남의 유익을 위해서 사는 건데 남의 유익을 위해 사는건데 그것으로 다른 사람이 나의 삶에서 아 저 사람은 하나님을 믿기에 그리스도를 믿기에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좋은것이구나 알고 스스로 그리스도의 구원을 얻어야 된다. 근데 거기 표현 하난 재미있어요. 아주 인류문명사에 재미있는 표현이예요. 원래 헬라인들은 헬라인들은 이렇게 말합시다. 원래 중국 사람들은 중화한 민족과 오랑케 이렇게 구분했죠. 인류를 헬라인들도 마찬가지. 헬라인들 문명인들과 야만인들 그래서 바울이 그들의 언어를 쓰죠. 어디서 로마서 1장 14절 내가 헬라인들에게나 야만인들에게나 그것을 다른 말로 말한다면 지혜있는 지네 문명인들이나 지혜없는 야만인들에게나 유대인들은 인류를 어떻게 갈랐어요. 자기들 선민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이렇게 갈랐죠. 항상 2분법이예요. 인류를 자기와 나를 이렇게 갈랐다구. 우리 한국 사람들도 한민족과 오랑캐들 이렇게 가르지 않습니까. 그런데 지금 바울이 제3의 실체를 말하고 있어요. 하나님의 교회, 하나님의 교회, 교회란 말은 하나님의 백성이란 말이죠. 하나님의 백성, 그러니까 원래 유대교의 틀안에서는 구약과 유대교의 틀안에서는 하나님의 교회가 뭡니까 유대인들이죠. 유대인들, 유대인들, 그런데 바울이 유대인 따로 헬라인 따로 하나님의 교회 따로 요렇게 말하고 있는 것은 우리에게 두가지 중요한 진리를 가르쳐 줘요. 하나는 교회가 즉 예수를 그리스도로 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이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임. 더 이상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 새 언약의 백성. 곧 예수를 그리스도로 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이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임. 고거 진리를 함축하고 있죠. 둘째, 교회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출신자들로써 그리스도를 믿는자들로서 구성된 제3인종임. 그래서 이제 속사도시대에 들어가면 2세기 AD2세기 이후에 들어가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제3의 인종이라는 표현이 교회 지도자들의 글에 많이 나와요. 우리는 유대인들이 아니고 이방인도 아니고 제3의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 다른 그러니까 우리는 이스라엘의 유대인의 문명도 아니고 또 그들의 삶의 방식도 아니고 헬라 이방인들의 문명 또한 그들의 가치관 또는 철학 그들의 삶의 방식도 아니고 또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독특한 아이덴터티 자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됨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어요. 아 11장 1절에 아주 이제 총정리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바울은 이렇게 이 말을 빌립보서 3장 17절, 데살로니가전서 1장 6절 데살로니가후서 3장 7절등에서 여러번 그렇게 말해요. 자신을 모범으로 내세우고 독자들로 하여금 그를 본받으라고 해요. 사도는 그리스도의 대표예요. 그렇기 때문에 사도는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자요. 그의 삶으로서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자 그래서 바울이 뭐라해요.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라. 그러는 한 사도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모범성이 있어요. 그러니까 나를 본받으라 이것은 바울의 교만함이 아니고 나를 본받으라 할 수 있는 이유는 자기가 사도로서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임으로 그리스도를 어떻게 본받아요. 그의 고난, 내줌에서 받아요. 남을 위해서 자기를 내어줌에서 본받아요. 그러기 때문에 지금 남을 위해서 자기를 내어줌 남의 유익을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고 남의 유익을 구하는 요면에서 바울은 십자가에서 자기를 남을 위해서 내어준 그리스도를 그대로 표현하고 있어요. 갈라디아서 3장 1절에서 바울이 뭐라 합니까 내가 그리스도를 포스트로 그려놨다. 내가 그리스도를 포스트 그려놨다. 그러니까 나를 본받으라. 이점에 있어서는 자 거기 토론참고 토론 안해요. 여러분 걱정 마세요. 오늘의 교회 지도자들은 다음과 같이 나의 양떼들에게 나를 본받으라고 할 수 있는가 아마 많지 않을 거예요.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그런데 없으면 왜 없는가 저를 위시해서 많은 사람들은 왜 없는가 어떤점에서 기독교 신앙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인가. 또 어떤 점에서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본 받을 수는 없는가. 3번째 문제에 본문에 또 길게 토론한 8장에서 10장까지 본문에 비춰서 우리 한국 그리스도인들간에 어렵던 문제인 제사문제를 좀 토론했으면 좋겠고 4번째로는 그리스도인들의 사회적 교류 요 문제도 좀 더 토론했으면 좋겠고 그런데 이중에 아마 제사문제가 많은 사람들에게는 절실할 거예요. 그래서 이 다음시간에 조금 토론할테니까 여러분들이 8장에서 10장까지를 좀 한꺼번에 쭈욱 읽어오시고 지금까지 공부한 것을 기억해 가지고 오셔가지고 한 번 그 문제를 토론하고 넘어 갔으면 좋겠습니다. 자 그러면 어 - 찬송가 444장 이 찬송가를 우리의 신앙고백 삼아서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로써 폐하겠습니다.

(37)고린도전서
오늘 우리가 공부할 본문을 고전 11장입니다.
우선 몇 절 읽겠습니다. v2-16v까지 교독하겠습니다.
이 본문은 어려운 본문이고 재미있는 남녀관계-가정, 교회에 대해 현실적이고 재미있는 문제를 제기해 주는 본문이예요.
두주전에 8~10장까지를 마무리 하면서 우리 기독교인들의 비기독교적 문화 환경, 문화 전통속에 살면서 어떻게 문화전통과 관계하면서 살 수 있는가 하는 원칙적인 문제를 종합해서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렸어요.
그것을 예수쟁이 우리에 대한 권고 곧 우리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는 권고와 연결시켜서 우리가 어떻게 소금으로서의 소금기, 우리 그리스도인의 짠맛,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타협없이 유지하면서 동시에 세상속으로 침투해서 소금 노릇을 해야 하는가? 그러기 위해서 세상으로부터 우리가 철수할 수는 없는 것이고 그리스도인끼리만의 공동체 겟토를 만들수는 없는 것이고 세상속에서 세상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그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면서 살아야 하는데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그 점에 있어서 바울사도는 고린도 인들이 당면했던 아주 절실한 문제, 온통 우상숭배의 전통이 그들의 음식이나 문화전반에 반영이 되어있는데 그런 상황속에서 어떻게 환경과 교류하면서 살아야 하는가를 바울이 8~10장에서 길게 가르치므로 그것에 견주어 우리의 상황을 살펴봅시다 했어요
그래서 우리가 흔히 그리스도인이 사회생활 하면서 겪는 문제들을 예를 들어 다뤘어요. 그중 하나가 주는 문제였고 다른 하나는 더 심각한 제사문제였어요. 그러나 제가 지난번에 원칙을 여러분들에게 바울사도의 가르침에 맞추어서 우리가 어떻게 구체적인 문제를 판단해야 하는가에 원칙들을 종합적으로 설명해 드렸는데 저도 토론이 부족했음을 느끼고, 나중에 몇분의 성도님들의 생각도 조금 더 그 문제에 대해 좀 더 토론했으면 좋겠다하는 성도들에게, 그 문제가 절실한 생각이 들어서 오늘 그것을 다시한번 토론할까 합니다. 여자들의 너울문제를 다루어야하는데 그건 나중으로 하고 바울의 마지막 종합적인 권고 10장 31~33절까지를 다시한번 읽겠습니다.
여기서 다시한번 앞에서 정의한 두 원칙, 첫째로 우리 모든 삶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드려야 한다는 것, 오로지 한분 하나님을 성기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한다는 것.
둘째 원칙, 이웃을 위하여 해야 한다는 것.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이 원칙.
그러니까 다시한번 요약하건대 바울사도의 가르침을 세 마디로 요약할 수 있어요. 9장에서 바쳐진 제물을 먹어도 되느냐에 첫째로 시장에 내다 파는 음식 또는 불신자 가정에서 대접하는 음식 묻지 말고 먹어라! 자유, 그리스도인의 자유! 그것을 무시하면 안되는데 자꾸 무시할려고 해요. 둘째로 그러나 이 우상숭배 행위 자체는 절대로 할 수 없다. 우상 신전에서 우상숭배 행위와 함께 벌어지는 잔치에는 참여하지 말라.
우상숭배는 안됨. 다시 긍정적으로 쓰면 하나님에 대한 헌신, 전적인 헌신. 그의 영광을 구해야 함. 하나님의 영광을 구해야 함.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우상숭배 불가.
셋째로는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함. 이웃에 대한 사랑. 그래서 설령 자기가 그리스도 인으로서 음식을 먹는 것이 신학적으로 정당하고 도리어 타당하고 자기가 권리가 있고 자유가 있다고 판단되어도 이웃의 신앙에 혼돈을 주고 걸림돌을 주고 하나님을 믿는데 방해가 되게 하고 또 마음에 상처를 주고하면 자기 마음의 자유를 억제해야 한다. 이 두가지가 첫째고 이것을 여기에 버금가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 성도들도 추석 있는데, 제사문제를 이 기준에 비추어서 우리 가정의 제사문제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며 거기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하는 것인가 그것을 생각해 봅시다.
제가 우리 가정에서의 제사, 이렇게 표현하는 이유는 옛날에는 제사가 말할것도 없이 우상숭배행위였지만 요새는 제사의 행위가 가정마다 달라요. 곰곰히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이런 토론이 필요해요.
그리도의 신앙은 율법이 아니에요. 그래서 무조건 안된다. 이렇게 하면 아주 쉽죠. 그러나 그것은 신앙의 성숙을 가져올 수 없어요. 안되면 왜 안되는가? 에 대한 지적인 설득이 되어야 하고 우리 심장에서의 확신이 있어서 그 안되는 것을 안되는 것으로 정당히 이해하고 확신을 가지고 따라 살아야 우리 개인적인 신앙이 성숙하고 아까 말씀드린 대로 이 시대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 하는거예요. 그래야 우리의 행동이 성숙하게 나타나요.
만약에 그런 것이 필요없다면 사실 우리는 사도신경만 암송하고 있으면 되고, 십계명만 암송하고 몇 개의 계명만 지키고 왜 그 계명이 중요하고 지켜야 되는지 상관할 이유 없어요. 사도신경이 무슨말인지 신경 쓸 필요없이 그것을 그냥 암송하고 살면돼요. 과거에 교회사에서 보듯이 그렇게 생각하는 그리스도인, 기독교적 관점들, 기독교적 가치, 확신들이, 윤리적인 행동들이, 원칙이, 우리 문화에 깊이 뿌리 박아서 우리 문화를 변화시키고 우리 교회가 더 굳건히 서기 위해서는 우리가 우리의 신앙을 찾아 묵상하고 그것에 대해 증인이 됨에 대해 터득해가고 설득되어가고 스스로 확신 생겨가야 되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생각한 것이, 자 여러분 생각해봅시다.
(질 문)
최근에 연세대 신과 교수님이 산소에 가서 절을 한다고 하길래 우상 숭배의 의미가 아니고 효도의 의미지만 저는 그것이 안된다고 판단한 사람인데, 또한 그 사람이 감리교 목사로서 자유주의 신학을 따르는 자기에 그런가보다 했는데, 김세윤 목사님의 고전8~10장을 공부하고 보니까 신학적으로는 신사참배 반대했던 교파로서 여기에 대해 한 말씀 질문하겠습니다. 신사참배 반대했던 사람은 제 기억으로도 보면 우리나라 기독교인 중에서 5%였다. 신사참배했던 사람 중에 우상숭배라 생각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것은 국가의식이었고 그리고 그 사람들 마음속에는 하나님을 믿는 마음이 간절한데, 겉으로만 신사에 절했을 뿐이지 신사가 날 위해서 뭔가 유익을 준다든지하는 신앙에서 한 것이 아니라, 강제에 못 이겨서 내가 고개 숙였으므로 우상숭배가 아니다.그리고 대부분의 그런 사람들이 한국교회를 이끌어 오는 교역자들이며, 다 이웃사랑에 해당됩니다. 왜 그런가하면 그 사람들이 교도소에 들어가 있으면 어떻게 하겠는가? 나와서 그런데 그것이 신학적으로 옳은가 그것이 우리가 추구하는 고신측에서 하는 것이 옳은가? 그리고 음주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며칠전에 9명이서 식사를 하는데 그중 예수 믿는 사람은 2명 뿐이고 술 안 먹는 사람은 저와 또다른 한사람(N-그리스도인)인데 나머지 7명이서 소주 6병을 마셨습니다. 그런 가운데 전도를 하기 위해 거기서 ‘술을 한잔 먹는’ 이런 상황이 벌어지면 어떻게 되는고 하니, 우리나라 음주문화에 있어서는 잔돌리기가 있습니다. 그 7명이서 술한잔을 먹으면 거기서 7잔을 먹어야 합니다.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전도를 위해 분위기를 깨지 않기 위해 우리가 술을 먹어야 하는가? 그리고 두 번째, 음주하는 사람들을 보면 제가 술 안 먹은 사람인줄 알고 제게 그런 말을 합니다. 예수믿는 사람 중 술을 먹으면 엉터리 신자라며 안 믿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저희 동네에서 제게 이런 말을 합니다. 술 한잔만 먹으면 평생 술값을 내겠다고 제안한 사람이 있습니다.그러면서 뭐라고 하냐하니 일주일에 한 번만 자기하고 술을 대작만 해 준다면 자기도 예수를 믿겠다. 그렇다면 이웃사람을 위해서 내가 술을 배워야 되겠느가? 그래서 저는 우리나라 음주문화에서 음주하면서 전도가 되겠는가? 저의 주장은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상황이 적용이 안되지만 중동 회교권엔 목사 visa로 들어갈 수 없으므로 일반 비자로 들어가야 하므로 이런 상황이 적용되지만 한국에서는 적용이 안된다고 봅니다. 이상입니다.
정집사님 생각을 많이 하셨어요. 우리가 토론한 분야 전반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좀 쉬운 문제부터 생각을 해 봅시다. 산소에 가서 절하는 것, 제사예배, 음주를 토론했는데 음주에 관하여 정집사님이 여러 상황을 얘기했어요. 그리스도인이 음주함으로 도리어 ‘엉터리 신자구나, 그리스도인은 위선자야’ 이렇게 해서 전도에 방해가 되는 경우도 있다고 하셨죠? 얼마든지 반대로 한잔 먹어주면 예수 믿겠다 했죠?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세요. 자유롭게 토론해 주세요.
문제가 간단한게 아니니 생각하세요. 예수를 믿고 싶은데 예수 믿는 사람은 술, 담배를 절대해서는 안된다. 그런데 나 예수 믿고 싶은데 나 지금 술 끊기 어렵다. 이런 사람이 있어요. 이 사람은 바울의 언어로 얘기하면 이 사람은 약한 사람이예요. 사실은 그래서 나 사실은 교회 못 간다. 이런 사람 있어요. 담배를 못 끊어서 교회를 못간다. 이런 사람도 있어요.
그러니까 그때그때 지금 말씀한 대로, 정집사님 예대로 그리스도인은 술을 마시지 않는 것으로 사람들이 그 자리서는 따돌릴 지 모르나 그것을 도리어 존경하는 분위기 속에서는 술을 마심으로 해서 그 사람에게 거침돌이 된거예요. 마시지 말아야죠. 그 사람 양심을 상하게 한거죠, 마시지 말아야죠, 그러나 지금 내가 얘기하는 경우엔 그리스도의 자유와 이웃사랑에 대한 원칙을 잘 생각해야 돼요.
한칼로 이러면 이래야 하고 저러면 저래야 한다 그것이 쉬울 것 같지만, 그건 절대로 성숙한 신앙을 기르지 못해요. 한 번 여러분들 주위에 그런 사람들이 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질 문)
술문제는 김진흥 목사님 설교하실 때 간증 얘기중에 판자촌에서 술을 같이 먹으면서 전도했다는 사례도 있어요. 그 때 상황에 따라서 우리가 자유스럽게 우리가 꼭 술을 취하기 위해서 먹는다기 보다도 전도하는데, 대화하는데 한잔이든 반잔이든 같이 마실 수는 있지 않나 그렇게 생각합니다. 제 경우도 저혈압기가 있어서 전에 손박사님이 약이 되면 먹으라고 하셨어요. 우리에게 디모데에게도 바울이 포도주를 취하라고 했어요. 약이 되는데 예를 들어 고기를 먹는데 내가 저혈압기가 있는데 소화를 위해서는 반장정도 먹을 수 있다고 봅니다.
김 말씀하세요~~~~~~
(질문)그리스도인에게 술을 못 먹게 하는 나라가 많지 않다고 봅니다. 특히 우리나라가 더 심하다. 아직 우리나라의 술문화로써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술을 먹는다는 것은 좀 이르다고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이 세계 도처에 술 먹어서 길거리에 비틀거리는 사람은 일본과 한국뿐이다.
그렇다면 술에 대한 일반인의 견해는 술 먹으면 정신이 좀 이상해진다는, 의학적 이해 보다는 xn이 술을 먹어 이성을 잃는다는 차원에선 좀 저거한다고 봅니다. 술에 대해서는 그야말로 교제상 먹는 것은 좀 이르다고 봅니다.
(김) 감사합니다. 시간이 없으므로 길게 나누지 않겠습니다.
대게 이 문제에 대해서는 판단이 설 것 입니다. 일단 술을 취할 정도로 먹어서는 좋지 않아요, 그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할 수 없는 일이죠. 왜 그런가하면 취하면 자율선을 잃어서 죄짓기가 쉽죠. 그래서 어느 환경에 있어서든지 취할 정도로 마셔선 안되죠. 자 그러나 마실수 있는 자유도 있어요. 성경책에는 술마시는 얘기가 참 많아요. 예수님도 술을 잘 마셨어요. 그래서 예수님의 별명이 술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요. 시편도 술을 마셔 흥겹게 하는 경우도 많고 포도주라는 것 하나도 여러분 가끔 독일 사람들이 물이 나빠서 맥주를 마시듯이 하듯 근동의 문화중 포도주는 물 마시는 듯한 문화이다. 금주운동이라는 것은 영국의 감리교도들이 18c기 이후에 시작한 절제운동이 미국으로 해서 우리나라까지 왔는데 왜 그런 운동이 일어났냐면 술 마시고 취해서 패가 망신하고 죄짓고 몸 다 버리고하여 금주 . 단주 운동을 한 것이다.
우리나라 선교초기에도 농업 사회에서 긴 겨울동안 사람들이 노름하고 술 마시고 남자들 특히 축첩하고 이 세가지로 패가 망신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성숙하게 가르칠 수 없었을 때 칼로 끊듯이 술마시면 안된다고 하고 금기.탑으로 만든 것이 잘한 일이죠,
그래서 그런 역사적 과정도 우리가 살피면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자꾸 억제해서 기도교를 가장 매력없는 율법 종교로 사람을 꽁꽁 얽어매는 종교로 안 만들어야겠다는 생각도 가지면서 취해서 자율성을 잃을 정도 되어서는 안된다는 원칙을 가지면서 각자의 현재 처한 상황에서 정집사님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술을 안 마신다’그것을 존중한 뿐만 아니라 사실 그것을 존경한다 말이다. 나도 내건강을 좀 생각한다든가 아내를 생각한다든가 아이를 생각한다든가 내 일을 생각한다든가해서 안 마셨으면 좋겠는데 나는 의지력이 약하든가 종교적 확신이 없다든가 해서 늘 마시고 해서 곤드레 만드레가 되어 돈 다 내버리고 시간 다 앓고 하는데 ‘그리스도 인들 얼마나 훌륭하냐? 이런 사실들이 이런 불신자들이 있는 곳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의 자유 ,주장하며서 술 마시면 그 사람에게 굉장히 해를 준거예요.’그리스도인들 엉터리구나, 위신자들이구나 하나님 믿는다는지 아무 도움 안 되는구나‘ 이러면 너 영광가져오지도 않고 그래서 그들도 하여금 하나님 알아서 하나님 믿고 구원 받도록 하는 바울의 꿈보다는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하죠. 마실 자유가 있어도 마시지 말아야죠. 그러나 정반대의 상황도 있다는 말이죠.“니가 나하고 술마셔 주면 나도 예수 믿겠다.”이런 아주 원시적인 거친 표현이죠. 그게 중요한게 아니고 그런 친구들도 가끔 있죠. 그런게 중요한게 아니고 직장에서 가령 술을 한 잔도 안 된다고해서 그리스도인들이 항상 직장의 분위기를 깨는자로 나타나고 전체의 공동체적 삶에서 철수하는 자로 나타나고 이렇게 해서 사람들 전체에게 “그리스도인들은 좀 힘든자들이야” 이런 인상을 준다면, 지금 술 같이 마셔주므로 전도한다 그렇게 쉽게 표현하는데 그게 중요한게 아니고 가끔 그런 경우도 있겠지만 전체적으로 우리 교회 그리스도인들의 그리스도인과 같이 자유없는 자들 참 삶에 매력없는 자들.같이 화합 못하는 놈들이런식으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전체에 본질적이지 않는 문제로 욕을 먹는 것으로 말미맘아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전제에 본질적이지 않은 욕을 먹는 것으로 문제로 욕을 먹는 것으로 말미암아 우리 신앙을 별로 매력없게 한다든가 또는 양심에 굉장히 예리한 사람,이 문제가 해결이 안 되어 교회 못 갈 것 같애-이런 사람이 있는 경우 이런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해 오고 김지수 장로님이 표현 한 대로 그것이 옳은지 그러니까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큰 원칙을 정해서 판단을 해야되요. 이 판단이 서로 다를 수가 있어요. 누차 얘기했지요. 바울이 지금 그 얘기를 하죠.강한자와 약한자가 판단이 다를 수 있죠. 그런 경우 어떻게 해야되죠? 서로 관용해야 한다. 강한자는 약한자를 율법주의라고 무시하면 안되죠. 약한자는 강한자를 세상적이라고 비판하지 말아야하고 이것이 바울의 가르침이고 이 정도의 테두리 안에서 이견이 용납될 수 있다.제가 알기로는 우리 교회내에도 음주가 조금 심각한 정도에 오른 분들도 있다고 그래요. 그런분들은 심각한 정도가 되지 않도록 음주가 버릇이 되지 않도록 그래서 알콜에 의존하는 정도가 되면 내가 보기에는 이것을 그리스도의 자유가 아니라 무엇으로도 용인되기 어려운 정도에 이른거예요.그런 분들은 될 수 있는대로 안하시는게 좋아요.
(질 문) (안들림)
(김)모든 것이 다그래요
우리가 즐기는 기호식품도 우리 몸에 좋지 않을 수 있어요. 술뿐아니라, 이집사님 같이 생각할 수 있어요. 좋아요, 조금 다르게 생각할 수 있어요. 유집사님은 술문화(한국) 때문에 선교초기의 술문화이므로 지켜야 한다지만 역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 그리스도 인들이 이 나라의 술문화를 바로 잡을 수 있지 않나 한 번 적극적으로 생각해 보세요. 역도 한 번 생각해 봅시다.
그러니까 나는 이렇다 저렇다가 아니고 여러 가지 의견이 가능하다. 이런 원칙하에서 여러 가지를 의견이 가능하다. 이런 원칙하에서 여러 가지를 스스로 성숙한 신앙적 양심으로 판단한다면 믿음으로 판단하면 죄가 아니예요. 너무 무소무소한 것이 불신앙하고 죄예요. 성경의 가르침은 술얘기 그만합시다. 시간이 많이 갔어요. 더 중요한 것이 있어요. 산소가는 문제,제사문제가 있어요.술얘기는 내가 보기엔 중요한 문제가 아니예요.
(질문)우리에게 즐거움을 주고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마음에 피서를 주기 때문에 어떤 사람에게 있어서는 술을 조금만 먹어도-어떤 사람은 성적인 요소에 대해 강한테 어떤 사람은 조금만 받아도 믿음이 허물어지는 사람도 있는데 돈이라는서도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어떤 사람은 돈이 얼마 있든 없건 상관 없는데 어떤 사람은 조그만 돈의 문제에 있어서도 질려 무너지고 그런데 자기가 약하다고 느끼는 부분을 알고 있을 것이 자기가 그 영역에서 오히려 끊는 것이 신앙양심을 위해 올바른 것인데 또 그걸 가지고 그것도 못하냐고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이 물론 그 사람은 자기가 그 영역을 충분히 감당해내므로 그렇겠지만 그 사람을 생각해 준다면 그런 요소들은 보류해주는 것이 좋고 또 그 사람도 분명히 다른 영역에서 약한면이 있다고 생각해요.
참 좋은 점을 지적해 주었어요. 형제가 이야기 한게 뭐냐면 지난 번에 제가 말씀드렸어요 우리는 물신주의 우상숭배에 대해서는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지 않아요 우리는 다 물신주의 우상숭배하고 있어요. 여러분들이나 나나 지금 이시대의 가장 절실한 우상숭배는 물신주의 아닙니까? 돈 돈 돈 쾌락 돈을 얻을수 있는 쾌락 이걸 얻기위해서 아침 새벽부터 저녁까지 부단히 노력하고 투쟁하고 하나님도 잃어버리고 돈을 얻기위해서는 신앙양심도 다 저버리고 별짓을 다한다구요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대신에 돈에 헌신한다구요.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얼마만큼 물신주의 우상숭배에 스스로 빠져있는지, 얼마만큼 이웃에 대한 사랑이 결핍되어 있는지, 이것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고 도리어 무엇에만 관심이 있는가요. 우리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의 그 외적인 것들, 사실은 그 별로 중요한것들 아닙니다.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지키고 할례하고 음식가르는것에 집중했듯이 바리세인은 거기에 십일조, 거기에 집중했듯이 ...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사랑 이웃에 대한 내몸같은 사랑 다 관심없었듯이. 우리가 지금 물신주의에 너나 없이 빠진 사람이 제일로 제사가 우상숭배라고 하면서 제일로 절대안된다고 , 사실은 아무 의미도 없는데도, 이것은 우상숭배고 자신은 물신주의에 완전히 빠져 살면서 어느것이 더 문제인가, 어느것이 더 큰 우상숭배인가, 사실 따져보면 제사라는 것은 별로 해를 안가져오는 우상숭배형태예요, 그래서 설령 우상숭배를 한들 별로 해를 안가져옵니다. 진짜 해를 가져오는 것은 물신주의에요. 제가 회사를 하나 경영합니다. 제가 사장입니다. 근데 우리 사원들이 추석대목을 당해서 밤낮없이 일했습니다. 제가 그들을 위로하기위해서 가령 어디가서 식사를 잘했습니다. 제가 예수를 잘믿는 장로라 합시다. 제가건설회사하는 황장로라 합시다. 근데 큰 건물짓느라고 우리 직원들이 밤낮없이 일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들을 다 초청해가지고 야 이번 프로잭트에서 얻은 실이익이 이만큼이다. 이중 회사발전을 위해 이만큼 투자하고 나머지는 보너스로 주고 우리함께 공동체로서 우리가 힘을 합쳐서 이일을 한 것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식사를 사겠다. 다 소주한잔씩 해도 좋다. 그랬으면 그것이 더 큰 죄입니까, 아니면 아까 말씀하신것처럼 사장이랍시고 예배드리라고 강요하면서 월급제때 안주고 직원들 제대로 대접않고 직원들 노력해도 칭찬할줄 모르고 자기스스로는 물신주의에 빠져있으면서 이웃사랑은 포기해버리며 그 외적인 술한잔안마시고 담배안피고 모여서 예배하는 유대인들 예배처럼, 외적인 뺏지 뺏지 뺏지에 집착을 하면 과연 어느것이 더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태도며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태도며 이웃사랑의 태도며 그 많은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는 태도인가? 우리 한번 곰곰히 생각해 봐야해요.
제가 이렇게 자극하는 것은 무슨 자유주의 하라 이런게 아니고 우리가 지금까지 교회에 처했던 환경 때문에 너무 율법주의로 생각해서 더 이상 그런거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여러분들 자극을 주는 거예요.
아까이야기한데로 제사 행위가 심각한 우상숭배일경우가 있어요. 우리아이가 아팠는데 이건뭐 3대 할머니가 노해서 그렇다, 이건 푸닥거리해야한다. 이건 우상숭배죠. 그건 절대할수 없죠. 그러나 아까 정집사님 얘기한대로 산소에 오랜만에 가서 부모님에게 절한번한다. 서양의 우리 기독교형제들이 산소앞에 무릎꿇고 꽃한송이 갇다 놓듯이. 그 사랑의 표시 그게 우상숭배인가. 아니면 진짜로 ;물신주의에 빠져가지고 쾌락을 우상으로 권력을 우상으로 그래서 우리 손판사님 계십니다만은 권력을 잘배워가지고 나중에 대법관도 하고 대법원장도 하고 까딱하다가 대통령도 할려고 정부에서 이렇게 판결하시오 하면 판결을 왜곡하고.
제가 선생입니다. 제가 진리를 안가르치고 윗사람에게 잘보일려고 학생들에게 인기끌려고 거짓을 가르치고 제가 기잡니다. 진리를 보도를 않고 왜곡 편파보도나 하고 그랬다 합시다. 그러면서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은 내스스로의 신앙양심, 기독교적 경건성 유지한답시고 술안마시고 담배안피고 그런걸로 했다합시다. 그러면은 우리가 더 심각한 우상숭배와 더 심각한 이웃사랑을 못하는 죄에 빠지면서 이것들과는 아무관계없는 것들에서 사실 우리가 자유를 누릴곳에서 자유도 못누리면서 위선 바보짓만 해가지고 주위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 정치인이란게 저제뭐야, 그리스도인 장관이란게 저게 뭐야, 그리스도인 교수란게 저게 뭐야,. 그리스도인 사장이란게 저게 뭐야, 이런 상황을 한번 생각해봅시다.
그러니까 우상숭배, 우리는 우상숭배가 여러 가지 형태로 오는데, 왜 어떤형태의 우상숭배는 심각하게 생각않으면서 어떤형태의 우상숭배는 심각하게 생각하는가, 한번 생각을 해봅시다.아까 원래 재시한 문제 이 제사가 어떻게 되면은 우상숭배가 되는 가. 어떻게 되면 우상숭배요소는 없고 그런가. 지난번에 제가 제시한 문제 가족의 화합도 한번생각해보시고, 또 특히 이중에 장손들 계세요? 정말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은데 집안의 노인들 저 시골의 갓쓰고 있는 양반들의 압력으로 제사대문에 교회못오는 사람들있는가 한번 생각해 보시고 , 또 이 제사지내는 집안에 며느리로 가가지고 고부갈등이 너무심하고, 부부갈등이 너무심해가지고 자기 삶도 고달프지만 가족전체의 전도에도 어려움이 있다는가, 이런경우를 여러 가지를 선입관없이 어느 판단이 옳고 그르고를 떠나 한번 우리스스로 원칙의 마당에서 주어진 상황에서 누구는 이렇게 누구는 저렇게 판단할수 있겠구나.
근데 이 제사문제는 왜 신사참배와는 어떻게 다른문제인가도 한번생각해보구요.
한번 의견을 말해보세요. 자기가 부딛치는 문제가 있으면 그 문제를 한번 설명을 해보세요. 그러면 그런 환경에서는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성경적인가 , 한번 생각해 보세요. 혹시 자매들 가운데 부딛치는 문제있으면 한번 설명해보세요.
모든 그 여러분의 가정내에서 그 제사에 어떤의미를 부여하는가, 그 제사관행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에 관계없이 여러분들이 모두 제사해도 됩니다하는 게 아닙니다. 어떤제사는 분명히 우상숭배요소가 있어가지고 고린도전서 10장의 원칙이 적용될 경우가 있어요. 지금 우상숭배와 더불어 이루어지는 잔치에는 가지말라는 것이거든요. 가령 여러분들의 큰집에 제사가 일어나는데 거기에 분명히 우상숭배의 요소가 있다면 거기에서 같이 참여하고 하며는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이 신전에서 우상숭배함께 일어난는 잔치에 참여함으로 말미암아 그 우상숭배에 휩쓸리고 동참하게 되듯이 그렇게 될 가능성이 있다. 이럴때는 바울의 고전10의 엄중한 경고가 해당되는 것입니다.
저의 경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장남이 아닙니다. 매번 제사때마다 형집에가서 참열를 합니다. 저도 그런 문제를 가지고 고민을 하고 있고 언젠가는 저의 형제들이 전부 하나님을 믿게 되고 기독교식으로 추도예배를 드리면 참 좋겠다는 희망을 항상 갇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형제간이라도 말꺼내기가 어렵더라구요., 언젠가 한번은 제가 용기를 내서 전체 적으로 다모인 자리에서 얘기를 했습니다. 구태여 제사를 다 지내야 하느냐,. 기독교식으로 추도예배를 드리고 음식장만해서 먹고 형제간 우애를 돈독하는게 어떻겠는냐하고 제의를 해봤는데, 결국 부결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계속 제사를 지내고 있는데, 근데 저의 생각은 제사라고 하는 것은 원래 절차라든지 하는 것에 우상숭배적 요소가 많다고 봅니다. 음식상을 차리는 방법이라든지 제사지낼때는 영이 들어오도록 대문을 열어둔다든지 하는 등등 우상숭배요소가 많다고 봅니다. 사실은 그 제사를 지내는 사람들도 그 제사의 절차하나하나의 의미를 다 알고 하는 사람은 없지 않느냐생각들고 저도 모릅니다. 어쨋든 그 중에서 그래도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서 복을 받는다고 생각을 하고 그렇게 하는 사람은 우상숭배가 되겠지만은 같은 자리에서 같은 음식을 차려놓고 같이 절을 한다고 하더라도 제 마음속에 이것이 아니다하는 마음이 있다면 이것은 우상숭배가 아니지 않느냐 하는 생각이 듭니다. 주어진 상황에서 제가 저의 신앙양심을 위로하기 위한 변명일지도 모르겠다는 자책감도 느끼면서도 그러나 여기서 제가 제사를 못지내겠다고 고집함으로써 가족들간에 불화가 생기고 한다면 과연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일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도 내 마음에 중심을 확실히 잘 가지면 우상숭배가 아니지 않느냐 하는 생각을 하고 위안을 삼고 거기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잘된건지 잘안된건지 모르겠습니다.
주집사님은 바울의 언으로는 강한자입니다. 근데 주집사님 마지막 말은 고전 10장과 잘생각해 봐야겠습니다. 주집사님의 형님은 분명히 제사행위를 하면은 구체적으로는 생각을 않지만 조상덕을 받는다고 우상숭배의 의미를 부여하는 거거든요. 우상숭배의 행위가 이루어졌어요. 조금 약한 많은 의미가 희석되었지만은 우상숭배의 의미가 부여된 제사에 참여한 것입니다. 이 음식종류를 옛날 유교법대로 놓고 차리고 이런거야 제 보기야 그거야 문화관습에 따라 , 아까 얘기한대로 서양사람들은 꽃을 바칠 때 한쪽 무릎을 꿇고 바치는 관례 그 사람들도 절차가 있습니다. 이런 관례 좀더 섬세하게 규정된 관례정도라고 생각하면 되는 겁니다. 근데 문제는 그 절차가 문제가 아니고 그 전체의 의미가 조상의 복을 얻는다 구체적으로 어렷을적부터 비실비실하는 내 딸을 고치겠다는 구체적인 의미는 없지만 전통적으로 믿어왔으니 제사를 드리면 복을 얻는다하는 이런 애매한 의미로나마 우상숭배의 요소가 있다말입니다. 의미가 부여됬습니다. 그럴 경우 고전 10장의 바울의 가르침과 어떻게 되는것입니까? 바울은 신전에서 우상숭배와 함께 이루어지는 잔치에는 가지말라고 했습니다. 이런경우에는 같이 동참않는 것이 절하고 그렇지 않는 것이 바울의 가르침에 더 옳을지도 모르죠. 가기는 가는데 자기는 우상숭배를 않는다는 의사 표시로 저는 절만은 않겠소. 내 돌아가신 부모님 존경않고 사랑않는 게 아니니까 제가 그분의 기일을 맞아 참여는 하겠으나 당신들이 이 행위에 그 의미를 부여하니 난 못하겠소. 당신들은 하고 난 여기 앉아서 아버지의 교훈과 가르침과 사랑을 생각하며 앉아 있겠습니다. 하는 태도로 나올수도 있겠고, 아예 그런데 안갑니다. 이런 태도로 나올수도 있고, 아까 주집사님처럼 당신들은 지금 무식해서 조상덕을 본다고 하는데 고전 8장 우상에 무슨 실재가 있느냐 돌조각 나무조각에 불과하지 내가 절하는 것은 무슨 정말 아버지의 영혼이 여기오시고 어떻고해서 그런게 아니고 나의 평소의 사랑의 표현정도지 하고 같이 절하는 경우도 있겠고. 근데 그것은 고전 10장의 한계를 조금 넘어가는 정도가 아니겠는가 하는 저의 판단은 그렇습니다. 근데 여러분들의 판단은 어떤지 그렇다고 주집사님이 그렇다고해서 정죄하지 말라말입니다. 믿음없다고. 아까 약한자는 강한자를 비판하지 말고 강한자는 약한자를 무시하지말고 서로의 상대의 선한양심을 인정하라. 주집사님도 우상숭배한다는게 아니거든요. 그 선한 양심을 믿어주고 존중하고
자 좋은 실례를 들어주셔서 우리토론이 상당히 구체화 되게 되었어요.
저의 집은 믿지 않는 집입니다. 많은 친척이 믿지않습니다. 그래서 제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제가 맏집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추도식을 하라고 했는데 추도식을 할 때 그 자리에 예수님이 오십니까?
예수님이? 그렇죠.
오십니까? 그러면은 그 제사의 주인공인 영이 감히 예수님앞에 설수가 있겠습니까?
영이 오는게 아니에요. 옛날 제사, 유교제사는 지방 써 붙이고 혼백을 부르면은 온다고 생각을 했었는데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거 더 이상 안 믿거든요, 영이 오고 와서 먹고 그런게 아니거든요.
그래서 음식을 의식이 말입니다. 음식을 잡수신다하고 숟가락을 걸치고 물도 갖다 드립니다. 그리고 마치면 대문열고 잘가라고 인사도 하고 그러거든요. 주인이 그러면 저는 대문에 아무리 서있어도 아무도 걸거치는 게 없습디다. 그러니 내 남편이 기절할뻔 했습니다.
우리그리스도인은 그런데는 더 이상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요. 그것은 아까 말씀하신대로 우리가 여러분들이 책임하에 여러분들이 장남이라고 합시다. 그러면은 제사를 전통적인 유교양식따르지 말고 제발 우리기독교적 추도식하세요. 뭐하러 제사를 합니까. 하지마세요. 근데 여러분들이 차남이에요. 또 며느리로 들어갔어요. 그래서 이 제사를 안지낸다는 것 때문에 형제가 의가 상하고 부모와 자식이 갈리고 그래가지고 너 이놈 네가 하는 꼴 보니까 내 교회는 절대 안다닌다. 교회 다니는 것이 조상에게 고따위로 한다면 나 절대 안간다. 이런 상황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말이에요. 이것에도 걸리고 이것에도 걸리고. 이럴때는 그러니까 어느정도까지 이원칙에 따라 이 두가지 문제에 안걸리는 경우, 근데 제사에 이두가지 문제가 걸리는 경우가 있다말입니다. 지금 말씀하신대로 과거 유교관습에서 영이 온다. 문을 열어놔야 한다. 식사하는 도중에는 가족이밖에 나가있어야 한다. 들어와 가지고는 뭐해야한다. 이게 다있었지 않습니까? 절차하나하나에 우상숭배의미를 부여했단말이에요. 근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거 싹 무시해 버리고 그 유교시대의 절차는 여러분들이 장남으로서 여러분들이 책임지는 분이면 그 절차마저도 바꿔버리고 그래서 기독교적 양식으로 하면 그게 제일 좋고 근데 아직 여러분들이 바꿀 힘이 없다. 집안내에서. 그런 경우는 어떻게 하느냐? 그 절차들에게 더 이상 의미를 부여하지 말고 그것은 어느 문화에서나 윗사람에게 공경하는 것을 표시하는 의식이 있습니다. 그정도로만 생각을 하란말입니다.
장로님, 혹시 제가 생각하기로 영이 없다고 하며는, 자기부모를 생각해서 절하는 것도 괜찮지 싶습니다. 영이 안오시면 자기부모를 생각해서 절하는 것도 ...
저도 괜찮게 생각해요. 근데 제가 그렇게 되면 저도 저 주집사님과 비슷하게 강한자에요. 근데 주집사만큼은 강한자가 아니에요. 난 산소같은 데 가서 음식차리고 그런거 하지말고 오랜만에 서울살다가 방학때 고향한번 내려가 부모님께 절한번 하는셈치고 부모님께 절하는 거 그게 무슨 우상숭뱁니까?
영이 안오면은...
영이 안와요...
그래서 말입니다. 제가 생각키로 예수님이 기도하면 예수님이 오시는데 감히 어떤 것이 얼쩡거리겠느냐 하고 그래서 이제사 헛것이니까 지내지 말라 해서 안지냅니다.
예예. 안지낼수 있으면 좋아요.
그래서 친척들은 지내는줄 알지만 우리내 식구들은 안지냅니다.
안지내면 좋습니다. 지내지 마시고 우리 그리스도인들 다들 추도식드립시다. 안지낼수 있으면 좋습니다. 이웃사랑에 대한 이 원칙이 걸리지 않는한 지내지 마세요. 부모와 이가갈리고 형제가 이가갈리고 부부간에 싸움이 나고 이원칙이 다걸리는 거죠. 그럴 경우 지금 우리가 어떻게 생각해 보는 거죠. 이런게 안걸리면 하지마세요.
감사합니다.
제가 두가지 경우만 질문을 드리겠ㅅ브니다. 한가지는 제사를 지내는 경우에 있어서 다니엘 서와 같이 다니엘이 먹어야 될 음식이 왕에게 드려지는 것이고 그것이 또 우상숭배와 관련되기 때문에 다니엘이 우상숭배하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기 위해서 그 음식을 먹지 않겠다고 그 환관장에게 이야기 했을때에 그 환관장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셔서 그 환관장이 근심하지 않는 범위에서 또 그것을 하지 않도록 허락하지 않았습닉까? 그런 경우에 있어서 그리스도인들이 절차와 과정을 중요시하고 그과정을 통해서 우상에 드려지는, 참여하지 않는 것이 필요하긴한데, 제가 알고 있는 한가지 경우가 더 있는데요. 제가 알고 있는 여중 학생이 있는데 자기 어머니가 무당이에요. 무당인데 이 여중학생이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우상숭배를 하지 않겠다고 제사를 하지 않겠다고 하니까 어머니와 언니가 머리채를 잡고 무릎을 꿇리고, 근데 그런 경우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구하고 그런 것이 오히려 불복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닌가 하는 그런생각이 드는데요.
그런 경우는 불복종해야죠.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 분명히 그건 우상숭배행위거든. 우상숭배하지 말아야한다이거예요. 인간보다 누구를 더 섬겨야 되요. 하나님을 섬겨야 된다구요. 그러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우상숭배의 문제가 걸려 있을 때에는 부모가 반대를 해도 그런 제사를 해서는 안되요. 왜? 우리가 인간보다는 하나님을 더 섬겨야 되니까. 근데 그렇게 단호하게 그 제사, 우상숭배를 거부함으로 이 가정이 충격을 받아가지고 도대체 이 기독교가 뭐관대 이러냐하고 가령 그 가정의 부모가 그 여학생의 교회 목사님에게 찾아가서 말을 하게 되었다고 합시다. 그래서 그 부모에게 그 목사님이 충분히 기독교의 진리를 설명할, 복음을 처음으로 충분히 선포한 기회를 얻었다고 합시다. 그래서 그분들이 그리스도인될때가 가끔있어요. 그래서 가끔 단호하게 타협을 거부하고 도리어 기독교의 스깐달론, 기독교의 그걸 바울이 뭐라고 하냐면 고전 1:18에서 거침돌 되는 성격, 우상숭배문화와 정면으로 부딪치는 성격, 복음의 성격, 그 성격을 십자가의 이 세상사고, 문화, 가치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면 그걸 기독교의 스깐달론 성격이라고 해요, 스깬달성격, 거침돌되는 성격. 그 성격이 아주 효력을 발휘할때가 있어요. 그래서 그런 사람들이 그리스도인 될 때도 있어요. 그럴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그 상황에 따라 그 자리에서 각자가 지금 우리가 공부한바 고전 8장에서 10장까지의 이 원칙들을 머리에 가지고 자기하나님앞에 떳떳한 신앙양심으로 판단을 해서 확신을 가지고 하는거예요. 확신을 가지고 자기의 길을 선택하는 것이고, 그 길을 선택함에 있어서 우리성도들끼리 의견이 조금씩 다를 수 있어요. 그럴 때 강한자는 약한자를 무시하지 말고, 약한자는 강한자를 비판하지 말고 서로의 최선의 신앙양심을 인정해주고 도리어 북돋워주고 이런 태도가 중요하고, 한가지만 아까 말씀드렸지만 종합적으로 덧붙이면 우리가 이런것에 얶매여 가지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 풍요로운 지헤 진리에 들어가지 못하고 그리스도안에있는 자유 그 아름다움, 그리스도안에있는 그 우리 생명을 더 풍성하게 하는 그곳에 접근하지 못하고 우리이웃들에게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하고, 이래선 안돼요. 다시말하면 그런거 보다 훨씬더 심각한 우상숭배 아까 얘기한대로 물신주의 권력에 대한 우상숭배, 이세상쾌락, 남들의 의견체면 이런것에는 전전긍긍하면서, 이런것에는 온갖 타협을 다하면서 사실 요 두가지 문제가 걸리는 것에는 이 정말중요한 예수님도 모든 계명이 이 두마디라. 바울도 지금 마찬가지라. 이 정말중요한것들. 이 그리스도인들의 그리스도인다움 , 이 세상을 벽혁시키고 세상을 살맛나게 하고 아름답게하고 생명력이 넘치게하고 사라이 넘치게할수 있는 이 두가지에 있어서는 온갖 타협을 다하면서 돈에대한 권력에 대한 우상숭배는 하루종일 하면서 이웃사랑은 완전히 포기해놓고는 이런 별로 중요하지 않은것들에 전전긍긍하며는 그건 우리가 어떻게 된다구요. 바리세인같이되고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한다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기위해서는 성경의 원리들을 가지고 자기의 구체적인 상황속에서 이 기도하는 가운데 판단을 해서 사는거에요.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다같이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저희들에게 지혜를 주시옵소서. 그래서 우리의 구체적인 삶의 상황, 어떨때는 그것이 흑백으로 분명히 보이지 않고 회색으로 캄캄하게 혼돈가운데 알송달송하게 보일때가 많은 속에서 진정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원칙에 따라 삶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구원의 빛을 전달하는 그런 삶을 할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이제 추석이 되어서 우리 성도들 가운데 혹 이런 문제로 시험을 당하는 성도들이 많을 수 있는데 하나님께서 그들을 특별히 사랑하셔서 성령으로 그들을 인도하셔서 올바르게 판단하므로 우상숭배의 죄에 빠지지 않고 가족간에 사랑을 도모하고 하나님께 영광돌리고 불신자를 다 하나님께로 대려오는 귀한 역사가 일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오늘 성경공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38)-1
여러분 종종 오셔서 특송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 성도 여러분 우리는 사실 몇 달동안 고전8~10장까지를 꽤 자세히 토론했습니다. 고전8~10까지는 8장1절에서 본 바와 같이 고전도 교회가 바울사도에게 무상에게 바쳐지는 절차를 통해서 도륙된 고기,시장에 나와서 파는 고기를 사서 먹어도 됩니까 안됩니까 화는 질문에 온당한 가르침을 주십시요하는 요청에 따라 바울이 그 문제를 3장에 걸쳐서 길게 다른 것입니다.
이 문제가 심각한 이유는 두가지가 있습니다.
1.그 문제를 가지고 교회 내에서 성도들간 이른바 강한자들과 약한자들의 의견 대립이 있었어요.강한자달은 그리스도 신앙에 비춰서 그런 음식을 먹어도 괜찮은 것이다.약한자들은 또 똑같은 신앙에 비춰서 먹어선 안된다. 교회내에서 심각한 신학적,윤리적인 대립과 갈등이 있었어요.그게 중요한 첫째 이슈,그러나 그 보다 더 큰 이유는 그 문제가 표징,표상 하는게 뭐냐면 그리스도인이 자기가 사는 비기독젹 세계,비기독교적 이웃들과 그 비기독교적 문화와 어떻게 교류하면서 살아야 하는가 그 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이 구체적인 문제로 제시되었기 때문입니다.바울은 이 문제를 3장에 걸쳐서 길게 다루며서 중간에 9장에 있어서는 자기 자신의 사도적 삶과 행위를 하나의 모범으로 구체적인 모범으로 삼아서 아주 구체적으로 고린도인들에게 거츠쳐줬어요 그래서 우리가 이제 고전8~10장까지를 상당히 오랫동안 공부를 다한 마당에 한 번 전체를 이 문제를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요. 그것은 오늘 우리가 이땅에서 비기독교적 문화,세계에서 어떻게 우리 한국문화와 교류하면서 또 비기독교적 이웃,정신,철학을 가지고 운영되는 제도들과 교류하면서 살아야 되는가하는 이문제를 상당히 심각하게 생각해 와야겠기에 이 문제를 다루려고 합니다.본문이 어느 한곳에 처음 선포되어서 그곳에 몇사람이 그리스도를 믿기 시작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의 원칙에 따라살고 그리스도의 갈침에 따라 살때에 기독교적 가치관들 그리고 기독교적 윤링와 원칙들이 기존의 문화와 충동할 수밖에 없어요.우리 한국에도 지금 기독교가 들어온지 100년이 넘었지만 그리스도인은 아직도 선교지의 입장에 있다고 해도 광언이 아니예요.
왜냐하면 기독교적 가치관,원칙,윤리,관점들이 우리의 사회,제도,법들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고,도리어 소수로서 기독교적 문화의 테두리 안에 살기 때문에 우리는 갈 등을 겪게돼요.그래서 제가 지난번에 우리가 마지막 공부할때에 몇가지 문제를 토론해 봅시다하고 토론하자고 했지요.하나는 제사,유교문화 유교적 전통 그리고 부모에 대한 효도라는 것이 산동안 예만 표현되는 것이 이 제사라는 것이 오늘 사는 세대가 부모에 대한 효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가족의 종적인 연대의식,가족의식을 강화하는 유교도덕의 본을 강조하는 문화 속에 살고 있는데 그리스인이 이것에 어떻게 접근해야 되는지 또는 조초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자고 했죠?우리가 다루는 문제가 음식물제이기 때문에. 요즘사회가 이 담배로 건강에 해롭다고가 널리 인식이 되어 담배를 끊는 사람이 많이 있고 그것은 큰 문제가 안되는데 이 술이라는 것은 특히 사업하시는 분들이 인간관계를 부드럽게 하는 역할도 있고 사업으 현장에는 그것을 꼭 마시고 해야하지 그렇지 않으면 여러 가지가 잘 안되는 모양이예요.직장생활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직장엣 회식이 벌어질 때 그런데가서 술을 마시지 않으려고 참여 하지 않으려 해도 직장에서 소외감을 일으키고 그리스도인대 비그리스인간에 쓸데 없는 갈 등을 일으켜서 복음 선포에 전도에는 지장을 받기도하고 그리스도인이 적극적으로 미쳐야 할 곳에 못 미치기도 하고 그리스도인ㅇ 더 포용력 있고 더 화합,인화를 도모해야 하는데 직장에서 융화를 깨는 역할을 하는 그런 경우동 있다. 그렇다고 마셔도 되는건가?그런 문제도 심각히 생각해보고 그 외에 좀더 구체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기독교적 신앙 기독교적 삶과 비기독적 삶과 문화와의 관계에서 부딪치는 문제는 어떻게 해소하고 해결을 해야 하느가 좋은 지침을 주는 것이 고전8~10장까지이예요.그리스도인의 비기독교적 세상에서의 삶.
우리는 토론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는 바울이 정한 4가지 원칙을 살펴왔죠.바울의 긴 토론 끝에 내린 4가지 원칙을 1.2.3.4 조목조목 하지요
첫쨰는 우상숭배는 안된다.
우상숭배,이방신들의 제사의 동창하는 것을 안된다.
그런데 10장 끝에 25절부터 25절 순서를 바꿔씁시다.바울이 용약해요.시장에서 파는 고기 양심에 묻지말고 먹으라 이것이 우상에게 바쳐지는 절차에 의해 도륙된 고기요?아니요 묻지말고 먹으라
둘쨰 27절 불신자 이웃집에 초대받았을 때 거기 차려 놓은 음식“어제 제사이 차려 놓은 음식 아니요? 당신 집에 있는 제단에 올린고기 아니요?”라고 묻지말고 먹으라
셋째 28~29절 그러나 같이 초대받은 약한 그리스도인 형제가 “이 음식 이 사람이 믿는 신에게 바친 음식이니 먹지 말자”고 할땐 약한 그리스도인을 위해 먹지 말자.그의 양심,신앙에 어려움을 줄 수 있으니 그런 경우엔 먹지 말라.
네째 10:1~그곳까지 다룬 문제.10:1~24절을 다룬 문제니까 생략.
그러니까 이것을 두 마디로 요약하면 첫째로 우상 숭배는 안된다.하나님은 오직 한분이고 그 분에게 우리는 혼신을 다해 그 분을 예배하고 섬겨야 하기 때문에,하나님에 대한 사랑,헌신이며,둘째는 이웃에 대한 사랑. 여기 있어서는 타협할 수 없다.이 두가지 신앙원칙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웃에 대한 사랑, 이 문제에 걸려 있지 않은 경우 그러니까 관습이나 ㅂ 기독교적 문화 또는 세상이 일으키는 문제에 대해서는 자유하라.이렇게 두가지 가르침으로 요약이 되었어여.그러니까 그리스도인에 대한 사랑, 우상 숭배에 대해 동참할 수 없으며 자유는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제한되고 절제되어야 하는 것이지 이웃을 해를 주고 상처를 주면서까지 자신의 자유를 행사할 수 없는 것이다.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것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이하나님에 대한 사랑,이웃에 대한 사랑은 오늘 아침 박목사님 설교와 딱 맞는것이죠.그래서 사실은 바울의 편지를 자세히보면,바울은 예수님의 인용을 두 번밖에 사용하지 않지만 자세히 보념 예수님의 가르침과 구구절절 일치하죠.바로 이점에서도 그래요. 오늘 아침에 묵상한 막 12:28~34본문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율법을 두가지로 요약한 것이죠.두계명으로
첫째로는 신 6:5 하나님은 한분이시니 그 분을 우리의 혼신을 다해서 사랑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우상 숭배를 허락하지 않아요. 또하나의 신을 둘수가 없어요.
또하나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예수님께서 이 모든 율법을 이 두가지로 요약 정의 하셨는데 바울이 또한 그러는 것입니다.지금 보시는데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그러니까 이것은 신학적인 기준이라 할 수 있겠지요.우리의 신앙고백.우리의 근본적인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 이것은 타협될 수 없는 것입니다.
둘째 이것은 윤리적인 기준이라 할 수 있겠지요. 이웃에 대한 사랑의 의무.이것도 타협될 수 없는 것이다. 그 이외의 것들에는 우리의 구체적인 이웃과의 관계에서 우리의 문화와의 관계속에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신앙고백,이웃에 대한 사랑의 문제가 걸려 있지 않은 것들에는 이래도 저래도 좋다.전문용어로 헬라이 아디아소론이다.이런 문제들에 대해서는 자유로서 문화와 세상에 대해 적응하여 세상사람들에게 환심을 사서 그 사람들은 그리스도께로 인도해야 한다
한국의 그리스도인의 현실은 정반대로 되어있다.예수님께서 교회에게 뭐라 하셨죠. 산상수훈 마 5:13에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소금이 소금기를 잃으면 무엇에 쓰리요 땅에서 버릴뿐이다. 너회는 세상의 소금으로써 소금기를 유지하도록 이 세상의 썪음을 방지하고 맛을 내어 살맛나도록해야한다.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의무이다.그런데 우리나라가 살맛납니까? 온통 부패로 썪은기가 온통.그런데 그리스도인이 한국에 25%인데 주일날 예배하는 자가 천만인데 왜 한국은 살맛나지도 않고 참.선.아름다움.희망.생명력이 넘치는 것이 아니고 추악.갈등.실망.갈등으로 짓눌려 있는지 부패로 짓 눌려 있는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소금 노릇을 못하는 것이죠.지금현재
왜 못하느냐!
소금 노릇하기 위해서는 소금이 어떻게 해야 합니까?두가지 조건이 있다.
1)소금기가 있어야 한다.다시 말하면 세상과 달라야 한다는 것이고 이것은 또한 세상에 줄 수 있어야 한다. 세상이 가지고 있지 않는 짠맛이 있어야한다.
2)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 속으로 침투해야 한다.
세상의 소금은 세상을 위한 소금이다.구체적 그리스도인의 세상의 선교사적 삶을 요구하는 그리스의 가르침이다. 한국 관계를 가만히 보면,이것은 세계 교계와 마찬가지인데 자유주의 신학과 자유주의 신학을 추진하는 교회는 짠맛을 잊어 버렸고 그들은 인본주의 신학을 추진하는 교회는 짠맛을 잊어 버렸고 그들은 인본주의 사상에 맞추고 시외에 맞추기 위해 기독교적 특수성을 약화시켜서 그들의 메시지에는 짠맛을 잊어버렸다.세상사람의 기준으로 세상사람이 좋다고 가치를 글대로 거기에는 기독교적 투수성이 없으므로 줄것이 없다.그러니까 그런 사람들이 소금 노릇을 못하다. 반면에 보수교회는 특히 교신교완을 혹시 세상과 교류하면 짠 맛을 잃어 버릴까봐 짠맛을 유지하기 위해 성별의 원칙을 너무 지나치게 극단적으로 강조하여 세상으로 침투가 약하게 되어 예수시대의 유대인과 같이 될 수 있다.
예수시대의 유대인은 하나님의 성별된 백성으로서의 선의 자기 실체,정체를 보전하기 위해 율법을 담으로 보았다. 유대인을 이방 영향으로부터의 보호를 위해 담으로 규정하여 짠맛을 유지하는데 세상에 전혀 영향을 못끼친다. 세상을 위한 소금 노릇을 못했다.그러므로 유대인은 선교하는 것이 없었다.지금까지 유대인은 선교,선교사라는 말이 없다.소금 노릇을 위해서는 짠맛고 세상에 침투함이 동시에 있어야 하는데 이것을 조화롭게 유지하는 것이 어렵다.
세상 속에 침투하면 짠맛을 잃어 버리기 쉽다. 세상에 동화되어 세상의 물들이 교회 속으로 들어와서 교회의 짠맛을 희석시킬 가능성 높다.
교회가 세상의 영향을 받아 하나님 대신 물신주의,이웃 사랑보다는 내가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교회가 복음이라고 생각하게 된다.교회 복음이 한국 교회에서 건강과 부의 복음으로 전락되었고 하나님 사랑 대신 물신주의,이웃 사랑 대신에 잘 먹고 잘 사는 복음이 한국 교회에 팽배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 두 가지를 균형있게 유지하기가 어렵다.그래서 우대인들은 그럴바에야 담을 크게 쌓아 짠맛을 유지하게 되었다. 그래서 두가지의 조건을 균형있게 유지하기 위해서 바울은 말했다.고전 8~10장이 그 문제다.이 두가지는 타협할 수 없는 것이 곧 짠맛으로 그것을 절대 포기하지 마라 이 두가지 원칙에서 나오는 기독교적 관점,가치관,윤리는 포기하지 마라 그것을 포기하면 짠맛을 잃어버려 자유주의 신앙과 같이 세상에 줄 것이 하나도 없다 .기독교적 특성이 없어진다.그렇게 되면 기독교는 바르게 살기 운동쯤 도덕재무자 운동,민중 운동쯤으로 된다.
그러나 세상에 침투해야 한다.이웃 사랑과 적극적 관계,교류해라 자유함으로 무엇에 있어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개입되지 않은 문제에 있어서는 아디아소로 자유를 가지고 적극적으로 이웃과 관계 교재하여 이웃사랑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인일수록 더 재미있고 더 인화를 잘하는 사람들,폭이 넓고 포용력 있고 관대하고,자유하고 옹졸하지 않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우리 한국은 지금 옛 유대인과 똑같은 현상으로 가고 있어요 지금 그것이 뭐냐 우리가 타협하지 않아야 할,진짜 짠맛을 유지해야 할 것에 대하여는 짠맛을 잃어가는 경향이 있고 기독교적 짠맛과 관계가 없는,이 문제가 개입되지 않은 관습,문화적인 문제에 대하여는 이런 것에는 짠맛을 유지하고 발버둥치는 모습,그것이 우리에게 있다.예수 당시 바울 당시 이 바리새 경건주의자들을 바리새 운동을 칭찬할 점이 많았어요.예수 당시 바울 당시 이 바리새 경건주의자들을 바리새 운동을 칭찬 할 점이 많았어요.예수께서 바울이 왜 그들을 비판합니까? 위선,위장을 비판하죠.(예수께서)바울도 마찬가지죠.왜 그랬냐?유대인들 그 당시 최대의 관점은 외형적으로 자기들을 이방세계와 구분하는 표징들에 최대의 관심이 있었어요. 그것이 무엇입니까?
첫째 할례.그것이 뭣닙까?그들을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이라는 구체적인 외형적인 표징이다. 그 다음은 안식을 지키는 것.
그 다음은 음식 가리는 것 다시 말하면 비위기가 말하는 그 많은 음식 안 먹기.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의 표징이 뭐냐면 보통 음식 안 먹는 것.돼지고기....안 먹는 것 그것은 뭐까지 포함했냐면 이방인들과 교류 않기.이방인과 악수하면 안되고 집에 가면 안 되고 물로 같이 식사하면 안되고 이 세가지로 유대인들의 유대인됨,Idintity,유대인의 짠맛,유대인의 독특성이 정의 된 거예요.할례.안식일.코셔 음식-음식 가리기. 이 세가지는 유대인을 이방인과 분리시킬 담장 노릇 한 것이다. 이들이 거기에 관심을 집중시키면서 보다 더 근본적인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웃에 대한 사랑 그런것들이 중요하다면 신앙의 표현으로 중요할 수 있으나 때로 그런것들이 이 보다 근본적인 하나님의 뜻과 어긋날 때 과감이 포기할 수 있는 것어어야하고 예수님께서 어쨌어요? 이방인과죄인과 같이 먹기도하고 문둥병,혈루병자를 만지고 절대 할수 없는 일이죠.죄인들과 먹고 마시는 일을 절대 할 수 없조.안식일에 일은 하시고 일부러 안식일에 일하시고 바울은 어떻게 했어요?할례 중요한 것이 아니다 할례가 구원 받고 안 받고에 문제라고 주장하는 타인과 바울이 안디옥과 갈라디아서에서 복음이 살고 죽는 문제로 기독교 신앙이 서고 거꾸러지는 문제로 신학적인 논쟁을 벌리죠.할례 중요한 것,안식일 바울이 유대인 사회에 있어서는 안식일 지켜요. 그러나 이방인 사이에서는 그게 중요하지 않아요.음식 가지는 것 유대인과 있을때는 바로 이 조항 때문에 가려 먹어요. 그러나 이방인 형제와 같이 있을 때 바로 이 조항 떄문에 가려 먹어요.그러나 이방인 형제와 같이 있을 때 무슨 음식가리는 것이 중요합니까?먹으라!그래서 안디옥에서 바울과 베드로가 대 논쟁이 벌어졌죠.이 문제로 왜 안디옥 교회는 이방인과 유대인이 혼성된 교회였죠.그래서 베드로,바나바,바울 똑같이 신학적인 예수님으 가르침을 똑같이 이어 받아 가지고 이방인 성도들 간에 음식 가리지 않고 신학적인 예수님의 가르침을 똑같이 이어 받아 가지고 이방인 성도들 간에 음식 가리지 않고 잘 먹었다. 이웃 사랑하면서 잘 먹었다.그런데 예루살렘에서 야고보가 와서 위협을 한거죠.같이 먹으면 안 되는데 하니까 바울과 바나바가 철수했죠.그 결고 안디옥의 이방인 성도들에게 엄청난 성처를 준 것 뿐 아니라 그래서 형제 사라의 원칙을 어겼을 뿐 아니라 더 근본적으로 너희들은 아무래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도 2류 그리스도밖에 안된다며 신앙자체에 의문부호를 찍자 바울이 거기서 갈라디아서 2장 전체에서 보듯이 신학적인 대논쟁을 보는 것이다. 한국 교회가 오늘 과연 그리스도인이 짠맛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세상에 침투해야하는데 우리가 어디서 무엇으로 짠맛을 유지할려고 하느냐?과연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헌신과 사랑,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바울의 가르침에 따라 그리스도인적 정체성을 유지하고 그것으로 불신자 인본주의에 영향을 주어 하나님께 돌아오도록하여 하나님을 예배하고 서로 목졸라 죽이는 중쟁사회에서 사랑으로 살아야 된다는 가르침으로 이 세상이 좀 더 참되고,선하고 아름다워 그래서 살맛나는 곳으로 만드느냐 안니면 다 포기하고 당시 유대인들처럼 그리스도인들의 외적인 표징 그것이 뭡니까?우리는 의적인 그리스도인 정의 표징에는 민감해요. 그 어느 하나 어기면 마치 구원이 다 없어지는냥 마치 옛날 유대인들이 안식일 한 번 어기면 구원이 없어지고 이방인과 악수하면 구원이 없어지고 이방인과 악수하면 구원이 없어지고 술한잔 마시면 유황분조 떨어지는 냥,분신자들과 어울리면 큰일나는냥 십이로-부로토십이로 내토십이조 그런거 한 번 어기면 큰일나는냥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의적인 표징들에 대해 민감해요. 그러나 바울은 그런것들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웃 사랑,즉 근본 문제와 걸리지 않는 문제들로 그런 문제에도 자유하라. 유대인에게근 유대인처럼 이방인에게로 이방인처럼 어느 문제에 있어서 짠만을 유지하라?정체성을 유지하라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이 술한잔 마실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문제가 아니라 그르스도인 부모가 아이의 선생님에게 봉투를 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더 중요한 문제예요.왜? 요 후자의 문제는 이웃 사랑의 문제를 위반하고 있는 거예요. 내 아이를 잘 봐달라고 아이 선생님에게 뇌물을 갖다주는 행위는 물론 그 선생을 타락시키는 의미에서도 위배되지만 내 아이를 특별히 잘 봐줄려면 다른 아이로 조금 보살펴 주지 마시오와 같다.오늘 사업장에서 법을 준행하며 양심껏 사회를 위해 이웃을 위해 물건을 만들고 상행위를 하로냐 그것이 회식자리에서 술을 먹냐 안 먹냐 보다 중요한 문제이다. 오늘 내가 선생으로서 정치인으로서 참을 말하고 선을 도모하느냐 그것이 주일성수,십일조 (불토,내토)하느냐 중요하지만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물신주의를 배결하고 이웃사랑의 원칙을 배결하는 것이예요.내가 오늘 신문 기자로 방송국 관계자로 참 진실을 쓰고,방송하느냐 이것이 주일 송수와ㅏ 술 문제보다 중요하다.우리 그리스도인이 말씀한대로 이 땅에서 소금 노릇을 해야 하는데 짠맛을 잃어도 소금 역할을 할 수 없고 세상 속으로 침투하는 것을 거부해도 소금 역할을 할 수 없고 어떻게 하느냐? 원칙을 제시하면 제사 문제가 성도들에게 있어서 어려우니 이 원칙에 비추어 구체적으로 토론해 봅시다.
각자 돌아보세요. 우리가 여기에 관심 있는지 물질을 섬기고 있는지?심지어 신앙도 왜곡시키지는 않는지?내가 과연 십일조내는 문제보다 십일조도 중요하다.그러나 율법이 문제다 과연 내가 사업장에서 직장에서 이웃에 대한 사랑에 관심을 더 가지고 있는지 각자 반성해보고 구체적으로 제사 문제에 대해 의견제시해 주십시오.
(질문)
이제 내일모레 추석인데 구체적으로 부딪힙니까 조상에게 부모에게 기일 명절을 당해 음식을 차려놓고 혼백을 부르는 지방을 써 놓고 절을해요.그것은 그리스도인이 할 수 있냐 없냐? 우리가 바울에게 편지할 자유가 있다면 이 문제를 물었을 거예요. 바울이라면 첫째로 제사가 조상에게 우상숭배의 의미가 있냐 없냐? 절 행위가 사랑에 대한 내적 의미냐 생존의 세배의 의미냐,사랑과 존경의 의미냐 아니면 신을 잘 달래서 그 신이 내 집안의 후손에게 재앙을 버리고 덕을 음덕 가져 다 주는 의미냐 인지를 결정해야한다.
만약에 후자의 의미가 없다면 엄격하게 말하면 그것은 우상숭배가 아니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나 혼백을 부른 지방을 쓰는 것이 문제다.
둘째로 만약에 부모를 생각하고 가족이 전부 모여 세배의 연장이라면 그랬을 경우 우리는 할 수 있다.그런데 최근에 그리스도인 된 형제가 있는데 기독교가 핍박밭은 이유는 제사 지내지 않는 것 때문이다.부모도 조상도 없는 상놈들이라고 박해 받았다.천주교들도 계신교도들도 아 그게 아니구나. 나는 장소이어서 제사 안 지내면 교회 갈 수가 없다해서 교회 안 나가는 것보다 제사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헌신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더 중요하구나 해서 .바울의 원칙 유대인에게는 유대인 같이 유대인을 얻기 위해 이방인에게는 이방인 같이 이방인을 이것이 꼭 맞는 것이다.두번째 원칙 그런데 최근에 그리스도인적 여동생이 와서 ‘절하지 말자’고 했을 때 약한 그리스도인을 위해서는 절하지 말라
그러나 내 판단에 지방을 쓰고 축을 읽고 혼백을 부르고 부모를 불러 자손들에게부정적으로 재앙을 없애고,긍정적으로는 음덕을 기릴땐 종교적 우상 숭배의 의미가 있으므로 고린도교인들에게 바울이 말했듯이 우상 숭배의 종료들과 그 신전에 제사에 참예하지 말라.구체적인 제사 행위에 우상숭배의 의미가 있다면 절하지 말라.제사 문제에 있어서는 고전 8~10장이 우리에게 상당한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을 우리에게 주고 있어요. 우리가 그때 그때 판단하고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지방쓰고 혼백을 부르는 행위는 우상 숭배의 의미가 있으므로 그것 하지말고 합시다 한 것이 카톨릭 제도고 계신교에서는 조금 더 개량을 한 것이 추도식이다.
그래서 음식차려서 형제들끼리 나눠먹고 조상께 감사하고 형제 우애을 따지고 그런데 가족 전체가 그리스도인 되지 못하고 일보만 그리스도인 된 판에 어떤 사람들은 전통적인 원칙을 따르려고 할 땐 지금 우리가 논의한 원칙을 따라야 하죠. 그래서 종교적 의미가 조금이라도 있으면 제사에 참예하지 말것.이래서 우리가 짠맛,세상 침투의 원칙을 동시에 만족해야 한다.유대인은 유대인 같이 하기 위해 유대인이 되면 안되요. 이것도 자유주의 신앙이예요. 이방인은 이방인 같이라고하여 이방인이 같이 되면 안되요. 그들을 얻기 위해 다시 말하면 부패를 말고 짠맛을 내기 위해야 한다.부패한 곳에 신선함은 절망있는 소망을 갈등 있는 사랑을,거짓 있는 곳에 참이 추함이 있는 곳에 그런데 우리가 하는 식으로 뒤범범일땐 그것에만 짠맛을 지키려고 세상과 담을 쌓으면 진짜 짠맛을 지켜야 할 것엔 많이 타협하고 세상 사람과 똑같이 물신중의의 빠져있고 세상사람과 똑같이 출세하려하고 자기 침공주의에 빠져 이웃에게 사기하여 많은 사람을 어렵게하고 엉터리로 약팔아 교회 헌금 많이해도 아무 소용 없어요.우리가 비기독교적 문화에 살면서 우리가 과연 어떻게 예수님과 바울의 가르침대로 사느냐 아니면 그들의 공격의 대상인 유대인가 같이 사느냐? 그리스도인의 외형적인 표징에 흥겹어 전전형하면서 속은 우리가 지켜야 할 그리스도인됨.하나님에 대한 사랑,이웃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고 타협하고 세상 것으로 대치하는 현상이 있다.그렇게 때문에 교회가 수만개고 그리스도인이 천만이라 하지만 이 나라로 살맛 나지 못하고 어느 직장이든지 제일 꼴불견이고 제일 맛없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소리를 듣는다. 하나님 아버지,하나님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리고 사도 바울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바는 너무도 명백한데 우리가 이 세상속에서 그 가르침을 어떻게 적요할지를 몰라 전전긍긍할때가 많습니다.신앙이 약해서 그럴때도 있고 지혜가 부족해서 일때도 있고 그리고 우리의 가장 절실한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말씀의 순종의지에도 불구하고 긴가 민가 할 때도 있습니다.,하나님께서 구체적인 우리의 삶의 상황에서 지혜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38)-2
고린도전서 11장 2절부터 16절까지 우리 같이 교독 하겠습니다.
11장 둘째줄, 11장 1절은 10장에 소속되는데 장, 절을 잘못 나누어서 이렇게 된 겁니다.
성경에 가끔 이런 경우가 있어요. 장,절은 원래부터 있은 게 아니고 종교 개혁 이후에 한 사람이 우연히 구분 한거예요. 그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러면 제가 읽겠습니다.
너희가 모든 일에 나를 기억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전하여 준 대로 그 유전을 너희가 지키므로 너희를 칭찬하노라.
그러나 나느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무릇 남자로서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요.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머리 민것과 다름이 없음이니라.
만일 여자가 머리에 쓰지 않거든 깍을 것이요 만일 깍거나 미는 것이 여자에게 붂러움이 되거든 쓸지니라.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에 마땅히 쓰지 않거니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또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니.
이러므로 여자는 천사들을 인하여 권세 아래 있는 표를 그 머리 위에 둘지니라.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으나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
너희는 스스로 판단하라 여자가 쓰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 하는 것이 마땅하냐.
만일 남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욕 되는 것을 본성이 너희에게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만일 여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영광되나니 긴머리는 쓰는 것을 대신하여 주신 연고니라.
변론하려는 태도를 가진 자가 있을지라도 우리에게나 하나님의 모든 교회에는 이런 규례가 없느니라.
고린도전서 11장 부터 14장 40절 까지는 고린도전서의 제4부에 해당합니다. 1장에서 4장까지가 제1부로써 고린도 교회가 그 안의 내분, 서로 분파가 있어서 바울이 그 문제를 다루죠. 분파는 왜 생겼느냐 하면, 서로 복음을 무슨 헬라 철학의 지혜 정도로 오해를 하고, 복음을 전한 사도들, 바울, 야고보, 베드로 등을 헬라의 철학 선생 쯤으로 생각하고, 바울의 철학이 더 옳다, 야고보의 철학이 더 옳다, 베드로의 철학이 더 옳다, 해서 서로를 변론하고, 지혜 자랑하고 해서 분파 문제가 났죠. 그래서 1부에서는 바울이 분파 문제를 다뤄요. 그리고 지혜라는 것이 무엇인가. 세상적인 지혜의 이해를 십자가에 달려 죽은 그리스도의 복음과 아주 정면으로 대결 시키면서 지혜 문제를 다루고, 도 지혜를 자랑하는 고린도인들을 꾸짖고, 또 그들이 마땅히 어떻게 인식해야 하는가, 그런 문제를 바울이 다뤘죠.
제 2 부에서는 5장에서 7장까지에서는 고린도 교회의 여러가지 문제들,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의 문제라든지, 서로를 재판하는 문제라든지 이런 것을 다뤘어요. 사실은 5장과 6장이 그렇죠. 그 다음에 제 3부 7장에서 8장 까지는, 7장 이후로 부터는 고린도 교회가 바울의 구체적으로 충고를 구한 문제들에 대해서 충고하기 시작 하는데, 7장에서는 첫째로 결혼의 문제로, 금방 자세히 살펴 본 8장과 10장 까지에서는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어도 되는가,의 문제, 이 두 가지 문제는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 간에, 이른바 강한자들과 약한자들 간의 견해가 엇갈려서 좀 금욕주의 적인, 율법주의 적인, 경향이 있었든 약한자들과, 그리스도의 복음을 터득했으나 그것을 지나치게 자유주의적으로 해석해서 방종의 경향을 가진 강한자들간에 의견이 엇갈리므로 그것들에 대한 충고를 구했는데 바울은 그것들에 대한 구체적인 답을 했어요. 제 4부로 와서는 11장부터 14장까지에 와서는 고린도 교회에서의 예배 때 발생하는 문제들, 고린도 교회의 예배 모임이 아주 난장판이 되었어요. 그 문제들에 대해서 바울이 답을 하면서 교통정리를 하고 질서를 잡고, 그래서 올바른 자세로 하나님께 예배를 하고, 또 올바른 성도의 교제가 이루어 지도록 질서를 잡는 부분이 오늘 우리가 공부 할려는 제 4부에 해당되요.
여기서 바울이 다루는 주제는 3 가지예요.첫째는 예배 때의 여자들의 행색, 여자들이 예배 때 어떻게 참석 할 수 있으며, 그 때에 어떤 단장을 하고 참여를 해야 하는가, 그 문제를 먼저 다루고, 두번째는 성만찬의 올바른 거행,성 만찬은 그리스도인들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연합을 연극하고,또 성도들간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된 연합을 연극해야 되는데, 그것을 실제로 극으로 나타내야 되는데, 고린도의 성 만찬의 상황은 정반대였어요. 그래서 바울이 성만찬을 어떻게 바르게 거행해야 하는가, 그래서 11장 17절에서 34절까지 다뤄요. 그런데 성만찬이 난장판이 된 큰 원인은 요새 우리가 말하는 사회적 위화감, 부자들과 없는 자들의 갈등,이 그 배경에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교회 내에서 부자들과 빈자들이 어떻게 그리스도의 모험의 주체들로서 서로 위화감을 극복하고, 갈등을 극복하고, 아름다운 성도의 교제를 이룰수 있느냐, 이런 문제들, 한국 교회에도 절실한 이 문제들을 다뤄 볼 수가 있어요.
그런데 특히, 바울이 오래 힘들여서 자세히 다루는 문제는 성령의 은사들에 관한 문제들이예요. 이것을 12장에서 14장에 이르기 까지, 아까 바울이 어떻게 그리스도인들이 비 그리스도인적인 문화 환경과 교류하면서 살아야 하는가,를 8장에서 10장 까지에서 자세히 일렀듯이, 그리스도인들의 자유는 무엇이며, 그리스도인이 자유를 어떨 때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 사랑을 위해서 희생해야 하는가, 이런 것을 길게 다뤘듯이, 성령의 은사들에 관해서도 아주 길게 다뤄요. 성령의 은사들은 무엇을 위해 주워졌으며, 어떻게 써야 되는 것이며, 성령의 은사 들의 쓰는 대 원칙은 사랑의 원칙, 그런 것을 아주 길게 자세히 답을 해요.
이런 것들에 대한, 성령의 은사들에 대한 오해로 말미암아, 성 만찬 자체에 대한 오해, 빈부의 갈등에 대한 오해 이런 것들로 말미암아 또 갑자기 그리스도 안에서 해방을 받은 여자들이 예배 때에 여자들이 특히 말이 좀 많죠, 이건 문화 인류학적으로 보편적인 현상이니까, 갑자기 예배 때에 시끌법적하게 되었다고요. 그래서 고린도 교회의 모임이 예배 때 마다 난장판이 벌어졌어요. 그래서 바울이 여기 이 문제를 다룬다 이 말이예요.
12장 1절을 보시겠습니까.여러분
형제들아, 성령의, 우리말로 번역해서, 신령한 것들에 대하여는 이렇게 번역되었는데, 좀 더 제대로 번역하면, 형제들아, 성령의 은사들에 대하여 지금부터 내가 답을 하겠다. 당신들이 다음과 같은 것들을 알지 못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이 문장 형식이 우리와 익숙하죠. 7장부터 기억 나십니까. 7장 1절, 너희들이 쓴 말에 대해서 이제부터 내가 답을 하겠다. 즉, 남자가 여자를 손대지 않는 것이 좋다. 그것이 고린도 교회의 약한자들의 구호라 그랬죠. 그 말에도 일리가 있다. 그러나 음행의 연고로 각자 결혼을 해야 한다. 그렇게 했죠.
8장 1절도 둘째로 이제 여러분이 질문한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는 문제, 에 대해서 내가 답을 해야겠다. 우리가 다 같이 집을 가지고 있다. 고린도인들의 강한자들의 구호라 그랬죠. 바울이 그 말에도 일리가 있으나, 지식은 우리를 교만하게 하고, 하나 사랑은 덕을 세운다는 것을 기억하라. 그 다음에 세번째로 12장 1절에 이제 부터 성령의 은사들에 대해서 답을 하겠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사실은 11장 1절에 여자들의 예배 때의 행색, 이것도 아마 고린도 교인들이 그들의 편지에서 제기했든지, 하나의 문제로 제기했든지,아니면 바울에게 고린도 교회의 그 상황을 보고한 클로어의 권속이나, 또는 스테바나,아가이고로 부터 예배 때의,고린도 교회가 예배 때 마다 난장판이 되는데, 그것이 성령의 은사들에 대한 오해 때문에 서로 방언한다고 난리 부리고, 완성 본다고 난리 부리고, 예언한다고 무질서하게 해서 만이 아니고, 여자들이 상당히 볼품없이 나타나서 소리를 쳐서 그렇습니다, 하고 보고해서 바울이 이 문제를 다루든지, 그런데 아마 전자가 맞을 거예요. 왜냐하면 바울이 여기서 칭찬하는 말을 한마디 하죠, 2절에. 여러분들이 나를 기억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여러분들에게 전해 준 그 전통을 여러분들이 잘 지킨다고 해서 내가 기쁘고, 여러분들을 칭찬하고 싶다. 이렇게 말하는 걸 보면은 바울이 이제 예배 때에 어떤 옷차림으로, 어떻게 하고 와서 예배를 보라고 아마 일렀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그 여자들이 특히 머리에 너울 쓰는 것을 치워버려서 좀 문제가 발생하니까, 교회의 일부가 그래도 됩니까, 하고 문의를 해서 바울이 아마 여기서 이 문제를 다루는 것 같아요.
그러면 한번 보십시다. 본문에서 바울은 여자가 기도나 예언등을 하며 예배에 참여할 때 취해야 할 태도에 대해서, 옛 창조와 새 창조에 대해서 남여의 관계의 원칙을 들어서 충고하고 있어요. 이 배경을 우리가 알아야겠죠. 그래서 거기 몇 마디 썼어요.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여자가 외출시 머리를 덮는 유대인들의 관습을 지속했어요. 여기서 말하는 너울이라는 것은, 오늘날 가톨릭 교회에서 예배시 쓰는 간단한 상징적인 이것이 아니고, 머리를 완전히 덮는 주로 이슬람에서 보는 그런 것을 말해요. 거추장스러운 것, 옛날 우리 할머니들이 치마를 뒤집어 쓰고 다녔던 그런 관행을 말해요.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유대 여자들이 지켜온 그 관습을 지속해서 그리스도인이 된 뒤에도 상체를 감싸고 외출을 했다 이말이예요. 그리스에서도 양반집 여자들은 그렇게 하였으나 거기에서는 유행에 따라 관습이 변하기도 했다고 학자들은 옛 문서에서 증언해요.
일부 유대 그리스도인들을 포함한 고린도 교회에서도 초기에는 여자들이 머리에 너울을 쓰고 예배에 참석했던 것 같아요. 그러나 바울이 떠난 뒤, 고린도의 일반적인, 성령 받고 이미 구원을 확보한 감에서 오는 들뜸, 그것을 우리가 열광주의라 표현했죠. 그런 일반적인 고린도인들의 열광적인 영향 아래,그리스도인의 자유의 이름으로 여자들의 너울을 벗어 던진 것 같아요. 그래서 13절에서 16절 까지에서 바울은 자신의 뜻을 분명히 밝혀요. 고린도 교회의 여자들도 세계 도 처의 교회의 관행, 일반적인 관행과 마찬가지로 예배 때의 머리를 덮어야 한다. 이 가르침을 바울은 신학적으로 3절 부터 논증을 하는 거예요.왜 그래야 되는가, 그 논증을 하기 위해서 2절에 이 말썽많은 고린도인들에게 칭찬을 한마디 해요. 너희가 모든 일에 나를 기억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전하여 준 대로 그 전통을 너희가 지키므로 내가 너희를 칭찬하노라.
여기서 내가 전해준대로,또는 전통을, 이런 것은 고대 유대 사회에서는, 어디나 마찬가지 였지만 특히, 유대 교회에서는 굉장히 높은 의미를 부여했던 전통을 말해요.그 전통은 그래서 한 랍비의 가르침의 전통은 그 제자가 일점 틀림이 없이 고스란히 받아서 다음 자기 제자에게도 일점 틀림없이 고스란히 넘겨줘야 하는 전통의 신실함이 굉장히 강조 되었던 당시의 상황을, 생각을 여기 잘 반영하는데, 사실은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의 다른 교인들보다 바울의 가르침을 잘 안따랐죠. 그래서 문제가 많이 발생하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이 여자들이 너울을 안 쓰는 것도 바울의 가르침에 벗어나기 때문에, 문제가 된거예요.그런데도 여기 바울이 칭찬 한마디를 하고 있어요. 우리가 지난번에도 봤죠. 바울이 이렇게 교육적으로 꾸중을 하기 위해서 먼저 칭찬 한마디 하는, 아주 교육적으로 지혜로운 방법을 쓰는 것을 자주 본다고 그러죠. 그것을 바울이 안 넘기고 딱 하나 있다고 그랬어요, 어느 경우, 갈라디아에서만 그걸 안해요. 갈라디아에서는 칭찬하는 말을 일체 안해요. 서두부터 너희들이 나의 복음에 배신 한 것에 대해서 내가 너무 놀랐다고, 그럴 수가 있느냐고,서두부터 꾸짖는 것으로 나가죠. 그건 갈라디아의 상황이 너무 급박했기 때문에 그래요. 너무 급박했기 때문에, 이단으로 복음으로, 거짓 복음으로 넘어가는 상황이 너무 급박했기 때문에. 이 고린도인들 같이 말썽많은 영적 자녀들을 대하는 데도 바울은 칭찬을 아끼지 않아요. 우리 한국의 자녀들은 칭찬이 부족하다고 하지 않아요, 칭찬이 부족하다고. 그래서 학교에서는 선생님이, 집에서는 부모님이 공부 못한다고 욕하고, 야단하고, 그래서 우리 아이들은 칭찬이 부족하다고 그래요.
칭찬 못받고 자라면 어렵게 된다고 그러잖아요, 교육학자,심리학자들이. 칭찬을 아끼지 말아야겠어요, 자녀들에게.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만큼 말썽많고 상놈들 같은 이들이 어디 있어요. 그런데 거기다가 칭찬을 해요. 지금 전통을 잘 안지켜서 문제되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도 한번 칭찬하고 꾸짖는 그 지혜를 우리가 배워야 할 것 같아요.
3절에 그러나 나는 다음과 같은 걸 알기를 원한다.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라. 4절에서 6절 까지의 충고의 근거로 바울은 먼저 신학적인 원칙을 천명하고 있어요. 첫째, 바울의 머리는 그리스도이고, 여자의 머리는 남자이고,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이고,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다. 이 머리라는 말이 무슨 뜻이예요. 머리라는 말이 자꾸 나오는 데, 다 똑 같은 의미 같지는 않아. 지금 ‘여자의 머리에 너울을 쓰라’, 에서 머리는 문자적인 뜻이죠. 그러나 ‘그리스도가 남자의 머리다’ 했을 때의 머리는 문자적인 머리는 아니죠. 또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머리라’, 의 머리는 문자적인 머리가 아니죠. 그것은 정의어로 쓰인거죠. 그러면 머리란 말이 정의어로 쓰일 때 어떤 의미를 갖느냐, 구약에서는 한 공동체의 우두머리, 지도자를 의미하고, 그러니까 우리말의 우두머리란 뜻이고, 또 헬라어에서는 전체의 성격을 결정하는 한 부분, 전체의 한 부분인데, 그것이 전체의 성격을 규정 할 때에 그것을 두고 머리라, 쓰기도 하고 그레서 또 기원의 뜻, 어디서 발원한다는 기원의 뜻으로 쓰이기도 했어요.
8절, 9절 한번 보십시오.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그러니까 남자가 여자에게서 기원하지 않고, 여자가 남자에게서 기원했다. 이 말이죠. 그런 의미에서 남자가 여자의 머리다. 그래서 3절에 남자가 여자의 머리라 할 때, 그 머리라는 말은 일차적으로 기원의 뜻이구나. 우두머리라는 뜻보다는 기원의 뜻이 일차적인 뜻이구나, 우리가 알게 되요. 이것은 바울이 창세기 2장 18절에서 23절까지를 분명히 염두에 두고 쓰고 있는 말이죠.
거기는 여자는 남자를 돕는 배필로 지음 받았다는 것이며,여자는 아담의, 남자의 갈비뼈를 빼내어 지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여자가 남자의 갈비뼈에서 기원했으므로, 남자에게서 기원 했으므로, 혹은 그런 의미로 남자가 여자의 머리,여자의 머리는 남자이다. 거기 8절,9절에 창세기 2장의 말씀을 염두에 두고 쓰지 않습니까.남자에 의해서 난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의 갈비뼈에서 나왔으므로 남자가 여자의 머리다. 남자가 여자에 위하여 지음 받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 받았으니, 남자가 이거다. 유대교에서는 남녀의 근본적 동등을 선포하는 창세기 1장 27절에도 불구하고, 창세기 1장 27절에 하나님의 남녀 인간 창조의 첫 기사가 나오죠. 거기에는 남자나 여자나 함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음,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이고, 여자는 하나님의 형상이 아닌 것이 아니고, 남자,여자 함께 하나님의 형상임,이 천명되어서 근본적인 남녀 평등이 거기 선포되었다구요. 그런데 창세기 2장에 가면 남자, 여자 창조의 기사가 또 나와요.좀 자세히 나오는데 거기에는 지금 여기 요약한대로 남자가 먼저 창조되고 그 남자에게서 남자의 한 부분으로 여자가 창조되며, 남자를 돕는 배필로 주어져요. 그래서 남자의 여자에 대한 복속의 관계가 창세기 2장 18절에서 23절 까지 에서 우리가 볼 수 있어요. 그래서 유대교에서는 특히 창세기 2장 18절에서 23까지, 창조의 기사를 더 많이 강조해서 여자의 남자에 대한 복속의 관계를 주장했어요. 유대교에서는 여권이 굉장히 무시되었어요. 모든 점에서 여자는 평등을 누리지 못하고, 특히 이혼 같은 데서도 이혼은 남자의 권리이지 여자의 권리일 수가 없어요. 남자만 이혼 할 수 있어요. 그런데 그것이 지난번에도 이야기 했죠. 예수 당시 실랠 이라는 대 랍비의 자유주의 적인 해석대로라면 심지어, 죽을 쑤다가 조금 태워서, 빵을 굽다가 조금 태워서 남자의 비위를 거스려도 이혼의 사유가 되는, 남자는 여자와 이혼 할 수 있는, 아주 여권이 무시되던 그런 상황이었죠. 바울이 일단은 창세기 2장 18절에서 23절까지를 염두에 두고 8절,9절을 이야기 한 것이 분명해요. 적어도 요부분에서는 유대교의 남녀 관계에 관한 견해와 의견을 같이 한다고 할 수 있죠. 그런데 7절을 한번 보세요.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고, 그래서 마땅히 머리에 뭘 써서는 안되고,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라, 거기에 바울이 평행을 깨죠. 그러니까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이고, 영광이고, 그런데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라. 여기에 형상을 뺀다구요. 그것은 바울이 창세기에 창조의 두 기사를 둘 다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예요. 지금 8절과 9절은 창세기 2장 18절에서 23절까지를 염두에 두고 말 했다면, 지금 7절에서는 1장 27절을 염두에 두고, 왜 27절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남자와 여자를 공히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 그러기 때문에 여자는 남자의 형상이 아니고 하나님의 형상이예요. 그래서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이과 영광이라 말하면서 여자는 남자의 형상이라 말하지 않고 영광이라는 말만 한다 이 말이예요.
그래서 바울이 지금 창세기 2장, 유대인들과 같이 창세기 2장 18절에서 23까지만 강조 한 게 아니고, 창세기 2장 27절도 아울러 생각하고 있음을 암시해요. 도 11절 12절을 보세요.
그러나 주 안에서는 남자없이 여자만 있지 아니하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으나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
요 문장은 앞에 바울이 한 말이 너무 유대교식으로, 남성 우월주의식으로 해석 될까 봐 교정하는 말이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다고 그랬지, 창세기 2장 18절에서 23에 따라, 그래서 남자가 여자의 우두머리라고 했지, 그러나 그걸 너무 강조하지 말라 그말이예요, 바울이. 어떤 의미로 여자에게서 났다고 할 수도 있다, 지금 여기 교정 하는 말이예요. 이 창조에서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과 같이 남자들도 다 어머니 뱃속에서 났으니, 여자로 말미암아 나왔으니, 여자에게서 기원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지금 창세기 2장 18절에서 23절을 근거로 내가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고, 남자의 돕는 배필로 주어졌으므로 남자가 여자의 머리라고 하는 건 사실이지만 그걸 너무 일방적으로 강조하지는 말라. 바울이 그 말을 하고 있어요. 11절, 12절에.
그래서 이것을 가부장적으로, 일방적으로 남성 우월주의적인 가부장으로 해석할려는 것을 교정해요. 약화시켜요.
그러나 창세기 2장 18절에서 23절을 근거로 한 근본 남녀 관계의 구조 자체를 부인하지는 않아요. 그레서 이런 걸 종합해 보면, 머리라는 말은 첫째로 기원이라는 뜻이 강하고, 둘째로 권위의 뜻도 함축되어, 지배자, 권위 또는 지배자의 뜻도 함축되어 있다. 왜,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다는 의미로 남자는 여자의 머리이고, 둘째로 여자는 남자를 돕는 배필로 주어졌으니, 남자는 지배자의 권위를 갖는다는 거예요. 그래서 머리라는 말이 문자로서가 아니라 정의어로 쓰일 때, 본문에서 처럼 두 가지 뜻을 다 가지고 있는데,기원이라는 뜻이 첫째이고, 권위,지배자의 뜻은 같이 가는 구속적인 뜻이라고 볼 수 있으면, 거기다 하나 첨가 해야 할 것은, 그런데 이 뜻을 머리라는 뜻을 너무 절대화 해서 일방적으로 주장하지 말라,고 바울이 11절,12절 말을 덧붙이는 거예요.
남자도 어떤 의미로 여자에게서 났다고 할 수 있고, 그러니까 너무 일방적으로, 남성우월주의적으로 주장하지 말라.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로 부터 보냄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이죠. 그래서 지난번에 보냄의 형식이라는 것을 말씀드렸는데,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냈다. 하나님 아들은, 하나님으로 부터 보냄을 받은 자예요. 그러므로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순종하여 그것을 실행하는 분이죠. 이렇게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기원이고,왜,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냈으니까, 아들이 아버지로 부터 기원하죠. 보냄 받은 자로서 아들이 아버지께 순종하는 임무, 그러니까 똑같은 기원과 권위,지배자의 뜻으로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머리라.이렇게 지금 바울이 말하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 이해하기 어려운 말은,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이다, 이해하기 어렵죠, 왜, 남자만 그리스도로 부터 기원하는 게 아니죠. 여자도 그리스도로부터 기원하고, 남자만 그리스도에게 특별히 순종해야 할 의무를 갖는 게 아니죠, 역으로 말하면 그리스도가 특별히 남자만 지배하는 게 아니죠, 남자만 권위 가진 게 아니죠, 여자도 권위를 가진자가 있죠. 또 그리스도가 여자를 위해 권위를 행사 할 때, 그 남편을 통해서 하는 게 아니죠, 직접 행사하기도 하죠. 그래서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이다, 이 뜻은 무슨 뜻일까, 아마 거기에는 더 깊은 뜻이 있다기 보다는 바울이 남녀의 관계를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관계의 비유로 설명하면서, 그 틀을 의식하고 각 남자는, 머리는 무슨 말이냐, 그 틀에 끼워 넣는 말이 아닐까, 남자만 그리스도에게 순종해야 할 의무가 있다든가, 남자만 권위를 행사 할 수 있다든가, 이렇게 까지 깊이 생각하지 않고, 여자의 머리가 남자라면, 여자가 남자의 머리르 가지고 있다면,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머리를 가지고 있듯이, 여자가 남자의 머리를 가지고 있자면, 그럼 남자는 머리가 없다는 말이야, 아 그게 아니고 그리스도에 순종 할 의무가 있지 않느냐, 그러니까 남자의 머리지, 이런 뜻으로만 여기에 끼워 넣었다고 그렇게 보는 것이 온당 할 것 같아요. 율법에 맞춘다면은 거기 제가 쓴 대로 그리스도께서 창조의 중부 노릇을 하셨으므로, 남자가 그리스도로부터 기원 한다고 볼 수 있으므로, 그런 의미로도 남자의 머리라 할 수 있죠. 그러나 이런 해석은 무슨 약범이 있다고? 아 그럼 여자의 창조는 그리스도가 중부 안했나요, 그래서 전반적으로 볼 때에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란 말은 바울이 기원이라는 뜻보다도, 남자도, 남자는 그럼 자기 혼자 제일 우두머리로 아무에게도 순종 안 할 그런 존재냐? 그게 아니고 남자도 그리스도에게 순종해야 하는 존재다. 고런 뜻으로만 여기 끼워 넣은 것 같다, 그 말이예요.
자 여기 4절 보십시오. 자 이런 신학적인 원칙, 3절 신학적인 원칙을 해 놓고, 그래서 남자로서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요, 거기 첫번째 머리는 문자적인 머리죠, 자기의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두번째 머리는 그리스도, 정의어에 해당하는 거죠. 그리스도를 욕되게 하는 것이다. 아니면 문자적인 의미와 정의어적인 의미 둘 다를 의미하는가, 이 문장 자체가 재미 있어요. 왜, 유대의 회당의 예배에서는 남자들만 기도하고 설교 할 수가 있었는데, 그 때 남자들은 구약의 전통에 따라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의 표현으로 자신의 머리에 모자를 썼어요. 모자를. 그래서 지금도 전통 유대인의 회당 예배에 가면 머리에 꼭 조그마하고 상징적인 모자 하나 썼죠. 아예 전통 유대인들은 날마다 이걸 썼어요, 날마다. 그 관습에 따라.
그러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들은 아담이 잃어 버린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덮개로 가리지 않는 얼굴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면서 그의 형상으로 변해 가는 것이예요. 고린도 후서 3장 18절, 그 아름다운 문장 한번 읽어 보실렵니까., 여러분들 고린도 후서 3장 18절.
16절 부터 읽겠습니다. 15절 부터 읽겠습니다. 15절. 고린도 후서 3장 15절.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모세의 글을 어디에서 읽어요, 유대인의 회당에서 읽죠,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도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 께로 돌아가면, 다시 말하면 주를 믿고 주를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이 되면, 회개해서 주께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의 영역에 속하는 자가 되면, 그 수건이 벗겨진다, 이 말이예요.
주는 여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 자유함이 있느니라.
우리가 수건을 다 벗어 던진 것 같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여기에 이중 의미가 있어요, 하나는 거울을 보는 것 같이, 또 하나는 반사하면서 주의 얼굴이, 주의 영광이, 거울에 반사 된 것같이 그것을 쳐다 보면서, 또는 주의 영광을 우리 얼굴로 반사하면서, 그 주의 형상과 같은 형상으로 변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이것이 다 주의 성령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이 문장은 아주 깊은 신학적인 뜻이 있어요.
유대 신학에 의하면 아담이 범죄하므로, 전에도 제가 한번 이야기 했죠. 여섯가지를 잃어 버렸대요, 여섯가지를. 그 중의 하나가 뭐냐하면 얼굴에 광채를 잃어 버렸대요, 광채를. 아담의 얼굴의 광채가 태양보다 빛났는데 범죄하므로 그 광채를 잃어 버렸대요.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잃어 버렸다, 그 소리예요.
둘째는 아담이 키가 조그만해져 버렸어요. 원래 아담이 땅을 덮고도 남을 장대한 자였는데, 키가 요만큼 하게 되어 버렸다. 다시 말하면 무력하고 왜소한 존재가 되었다 이말이예요.
세째는 하늘의 광채들을 잃어 버렸다. 다시 말하면 암흑과 혼돈의 세계에 살게 되었다 그 말이예요. 무질서, 혼돈과 암흑의 세계에 살게 되었다.
네째, 다섯째는 땅의 열매와 나무의 열매를 잃어 버렸다. 그래서 일생동안 땅을 파도 늘 결핍 속에 살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여섯째는 다 종합해서 영생을 잃어 버렸다, 이런 말이죠.종말에 구원의 시대에는 그 아담이 잃어 버렸던 것들이 다 회복이 된다 이말이예요. 지금 바울은 다맥시도상에서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영광의 빛으로 둘러싸인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을 때에 바로 그 유대 신학에서 기대 했던 종말에 아담이 잃어버렸던 영광의 빛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회복되는 것을 보았어요. 그래서 그리스도를 뭐라 그래요. 바울만 유독 그리스도를 종말의 아담이다, 아담이라 그러죠.
그래서 태초에 잃어 버렸던 그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을 회복한 자라. 그것을 이제 누구에게 주느냐.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 주 께로 향한 자,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하여 그리스도의 그 부활의 생명에 동참한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은 어떤 자들이냐, 그리스도의 형상을 바라 보면서, 영광스런 형상,하나님의 빛으로 찬란히 빛나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바라보면서, 그 그리스도의 영광의 형상을 반사 하는 자들이라. 그것이 바울이 그리스도인들의 성화의 과정을 그렇게 말하고 있어요. 성화의 과정.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뜻에, 그의 가르침에 따라 살려고 할 때에 우리가 거울이 되요. 거울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반사 해주는 거울.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그리스도를 보고, 형상과 그의 영광을 보여준다 이말이예요.
그래서 타락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지금까지 누구의 형상을 반사했어요, 땅에 속한자 아담,에 처한 형상을 반사했는데, 이제 마지막 아담, 그리스도에 속하므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그 영광스런 형상을 반사하게 된다 이말이예요.
그래서 바울은 창세기 1장 27절을 우선적으로 염두에 두고 있지만, 그것만 염두에 두고 있는 게 아니라, 지금 여기 남자는 누구를 두고 말하느냐 하면 교회의 남자를 말해요. 교회의 남자를.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 받음으로 말미암아 마지막 아담의 그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형상을 반사하는 그리스도인 남자를 두고 하는 말이예요.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하는 자들이예요. 그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기 위해서 모자를 쓰지 말라 그말이예요, 바울이 모자를 쓰지 말라.
지금 이게 놀라운 변화죠, 바울이 누구예요, 유대인 아니었습니까, 유대교 신학자, 유대 회당에서 열심히 모자 쓰고, 얼굴 가리고, 하나님께 예배 하러 나갔던 자죠. 그런데 하루 아침에 그리스도인이 된 뒤에 그거 옳지 않다, 이제 남자들은 머리 다 벗어, 얼굴이 상징적으로 무엇을 말해요, 얼굴이. 우리가 이제 더 이상 옛 아담의 추한 형상을 반영하는 게 아니고,마지막 아담,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으로 회복한 마지막 아담, 주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반사 하는 자들이니까 그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기 위해서 모자를 벗어라, 해요.
특히 예배 때 모자를 벗어라, 예배 때 우리는 하나님과 만나고,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를 통해서 더 환히 반사 됨으로 말미암아 영광은 뭐라고 그랬죠, 영광은 본질의 나타남이라 그랬죠, 본질의 나타남.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서 더 환히 나타나도록, 영광의 의미는 기본적으로 본질의 나타남, 하나님의 그 하나님 대신 본질이 나타남, 그 본질이 나타 날 때 어떻다고요, 찬란하다 이말이예요. 칭찬 받을 만하다 이말이예요. 그것이 영광의 두번째 의미예요. 그래서 다른 사람으로부터 좋은 의견을 듣는다는 뜻, 영광의 두번째 의미이다. 그런데 우리가 보통 두번째 의미로 많이 쓰는데 그게 아니예요. 먼저 첫번째 의미가 기본적인 의미이고, 화랑에 가면 미술가가 그림을 엄청나게 잘 그려 놓았어요, 그 그림은 이 미술가의 영광이다, 말할 수 있어요, 이 그림은 미술가의 마음, 미술가의 세계관, 미술가의 이해, 가치관, 그 미술가의 자신을 나타내는 것이죠. 그것이 아름답고, 고상하고, 고귀하고, 그 그림으로 미술가를 칭찬한다 이말이예요, 그러므로 이 그림이, 미술가의 창작품이 미술가의 영광이다. 영광스러운 작품이다, 라고 할 수 있듯이, 우리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창작품으로,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무엇을 나타내는 존재요, 하나님의 무한하신,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오묘하심을 다 나타내요, 우리가. 그런데 그게 하나님의 칭찬을 가져와요. 그래서 우리가 다 하나님의 영광이다, 하나님의 형상이다, 사실 형상과 영광은 신학적으로 서로 맞 바꿔 쓰는 언어예요. 구약과 유대교 문서에 보면은. 이런 관계에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네 더구나 구원 받은 인간은, 거기에 하나님의 창조자로서의 모습이 아니라 구원자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그런데 그것이 오묘하고, 권능있고, 사랑이 있고,놀라움을 나타내서 하나님에게 칭송을 가져 오니까, 구원 받은 자는 아담이 잃어 버렸던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을 드러내는 존재죠. 그것을 더 효과적이고 상징적으로 나타내기 위해서 특히 예배때에 남자들은 모자를 벗어라. 유대 관습과는 정반대로 가는 거예요.
그래서 남자들은 모자를 쓰지 말라. 그래서 요새도 우리가 가령 신학교에서 졸업식때, 학위식 때 모자를 하나씩 쓰고 있다가, 학위식은 보통 예배의 형식으로 치뤄지는 데 모자를 쓰고 해야 되느냐, 말고 해야 되느냐, 그 문제를 가끔 논의 해요. 그래서 보통 때는 쓰고 있다가 이사장이나 학장이 연설 할 때는 쓰고 있다가,기도 할 때는 벗자, 기도는 하나님에 대해서 하니까 기도 할 때만 모자를 벗자. 그래서 기도 할 때는 모자를 벗어요, 남자들은. 그러면 여자들은 어떻게 하느냐.
5절에, 예언하는 자,예언은 꼭 미래에 대해서만 뜻하는 것이 아니고, 12장에서 보겠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행위 전체를 예언이라고 해요. 그래서 구약 성경을 해석해서 오늘에 적용해서 삶의 지침으로 만들어 주는 것도 예언이라 할 수 있고,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금 교회에서 하신 말씀을 주의 이름으로 성령의 영감에 따라 하는 것도 예언이라 할 수 있고. 설교 하는 자는 그 머리에 모자를 쓰고 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그 만큼 가려,그리스도의 영광을 가려요. 그래서 그리스도를 욕되게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모자를 벗고 하라.
그런데 여러분 가톨릭 교황은 항상 모자 쓰고 해, 그러면 성경을 몰라서 그래요? 교황은 항상 관을 쓰고 하죠.이건 옳지 않아요? 하여. 만일 그런데 여자가 머리에 쓰지 않거든 깎을 것이요, 거기 5절.
그런데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머리 민 것과 다름이 없음이니라. 거기 5절,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에 근거하여 그리스도인의 여자들은 유대 여자들과는 달리 공적 예배에 참석하여 성령의 영감에 따라 기도도 하고, 또 예언도 하게 된 것이예요. 여자들의 이와 같은 공적 예배의 참여는 당연히 받아들여진 관행이었음을 본 절은 전제해요, 그걸 잊지 말아야 해요. 원래 유대 회당에서는, 대개의 종교가 그래요, 이슬람도 마찬가지고. 여자들은 공적 예배에 참여하지 못하고 여자들 석에 앉자서 구경만 하는 거예요. 그런데 지금 교회에서는 일대 혁명이 벌어진 거예요. 남자가 모자 벗어 치운 것 이상이고,여자들이 같이 참여하고, 같이 설교하는 문제가 아니고, 기도도 하고, 설교도 하고, 예언도 하고, 그런데 다만 머리에 너울만 쓰고 하라. 여자들이 공적 예배에 참여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곳에서 기도하고 예언하면서,설교 하면서 참여하는 것을 본 절은 전제하고 있어요. 바울은 그러한 참여 자체에 대해서는 본절에서는 아무런 교정을 하지 않아요. 그런데 이따 보겠지만 14장 33절과 36절에서는 공적 예배에서는 여자들이 설교 하지 말라는 말을 해요. 그래서 이것이 어떻게 연결 되는가. 그건 그 때가서 또 토론 해야겠어요. 지금 이 교회에서 여자들이 잠대마라 그 말을 앞세우는 사람은 지금 우리가 공부하는 11장 본절은 까마득히 잊어 버리고, 14장 33절,36절 만 문자적으로 붙들고 여자들은 교회에서 듣기만 하고 가만히 앉아 있으라 하는 데, 이건 성경에 대한 올바른 태도가 아니예요. 다시 한번 본 절과 연결시켜서 14장 그 본분에 가면 근본적으로 한번 토론 해야 할 문제예요. 하여간 여기서는 넘어 갑시다.
바울이 여기서는 받아들이고 있어요. 당연히 기도도 하고, 설교도 하고, 다만 유대 사회와 헬라 사회에서 공히 교양있는 여자는 머리를 감추고 그렇게 하지 않는 여자들은 남자들을 유혹한다 하여, 상스럽게 간주되는 관습에 따라 그리스도인 여자들을 공적 예배에서 머리를 너울로 감추고 기도하고 예언한다는 것만 바울이 지금 여기서 교정하고 있는 거예요. 여자가 머리를 드러내고 기도하고 예언하는 것은, 설교하는 것은 그의 머리를 면도로 밀어 버린 것 만큼 수치스런 일이다. 바울이 6절,7절에서 그렇게 하죠. 7절에 그 수치를 알면은 너울을 쓰고 와라. 너울을 안 쓸려면 차라리 머리를 밀어 버려라.바울이 막말을 한마디 하죠, 거기.
자 7절에서 9절까지, 7절에서 12절까지는 바울이 4절에서 6절까지 제시한 그의 충고에 대한 신학적인 근거를 대고 있어요. 창세기 2장 27절에 근거하여 바울은 남자는 하나님의 영광과 형상이라 그러고 남자가 머리를 가리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을 가리는 일이라, 해서 그렇게 하지 말라고 금하고 있어요. 그러나 창세기 2장 22절, 23절에 근거해서 여자는 남자에게서 남자를 위해 지음 받은 자이므로 남자의 영광이라. 그러고 여자도 하나님의 형상이니까, 여자는 남자의 형상이라 하지 않고 영광이라고만 해요. 그리고 머리에 너울을 써야 함을 말해요. 그런데 그것을 뒷받침 하는, 여자가 남자의 영광이니까 머리에 써야 한다,는 것을 뒷받침 하는 말이 10절 말씀인데 이 말이 이제 어려운 말이에요. 10절, 8절과 9절에 언급한 이유와 또 하나의 이유, 천사들 때문에 여자는 그의 머리에 권세를 가져야 한다, 그 말이예요. 원래 번역하면. 그러므로 여자들은 천사들로 인하여 권세 아래 있는 표를 그 머리에 둘 지니라, 권세 아래 있는 표를, 그 말은 본문에 권세라고 되어 있는 말을 굉장히 해석해서 그렇게 한거예요. 실제로는 제가 번역한 그대로예요. 천사들 때문에 여자들은 그의 머리에 권세를 가져야 한다. 첫째 천사들 때문에, 는 무슨 뜻이냐. 둘째 머리에 권세를 가진다,는 무슨 뜻이냐. 둘 다 아주 난해한 말이예요.한동안은 천사들 때문에 란 말은 창세기 6장 1절에서 4절까지를 근거해서, 창세기 6장을 보면은 천사들이 인간 여자들에게 유혹되어 성적 관계를 해서 괴물들을 낳은 이야기를 하죠. 그런 이야기가 아닌가, 그래서 예배 때에, 지상에서 성도들의 예배는 하늘에서 천사들의 하나님의 예배에 상응하는 것이고, 거기에 동참하는 것이예요. 그것은 요한계시록에 잘 나타나 있죠. 그래서 지상에서 성도들의 예배는, 하나님 자녀들의 예배는 천상에서의 하나님의 아들들 예배, 하나님 아들이 누구입니까, 성경에. 천사들이죠. 천사들의 예배와 상응하는 것이고 함께 이루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이 지상의 예배에 천사들이 동참한다. 또는 거꾸로 천사들의 하나님의 예배에 지상의 성도들이 동참한다, 이렇게 말 할 수 있는데 그 때에 여자들이 얼굴 다 내놓고, 요새 말로 하면 미니 스커트만 입고, 바울의 경우는 어느 상황이예요, 아주 짧은 미니 스커트만 입고 나온 경우예요. 그 정도로 상상을 해야 돼요. 그러면 천사들이 유혹을 받아 창세기 6장과 같은 경우가 날 수 있으므로, 그런 해석을 많이 했어요. 그런데 최근에 예배 때의 천사들은 여자의 유혹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예배가 잘 이루어 지는 지 감독한다 이말이예요. 예배의 질서를 확보하고 감독하는 것이 예배 때의 천사들의 역활이다, 이런 글이 나와요. 금강문서에 그렇게 나와요. 그래서 요사이 그렇게 많이 해석해요. 천사들 때문에, 그 말은 우리 지상에서의 교회의 예배에, 이건 하늘의 천사들의 예배에 상응하는 것인데, 그 때 천사들이 우리 지상에서의 예배가 자기들의 예배와 같이 하나님께 합당한, 하나님께 진짜 영광 돌리는, 질서 정연하고, 아름답고 올바르게 이루어 지는가. 그런데 여자가 머리에 벗고 하는 것은 질서에 어긋나요. 그래서 천사들이 감독권을 행사한다 말이예요. 그런 뜻으로 천사들 때문에 우리 예배에 같이 참석해서 질서를 바로 잡고, 온당한 예배가 들어지게 하는 그 천사들을 생각해서, 그런 뜻으로 해석을 많이 해요.
여자들이 권세를 가져야 한다, 무슨 권세냐. 아까 우리말 번역은 하나의 해석을 한 거예요. 자기 머리를 덮음으로써, 여자의 머리가 누구예요, 남자. 여자가 머리를 드러내면, 남자가 머리를 드러내서 누구의 영광을 반사한다고 했죠, 그리스도의 형상과 영광을 반사한다고 했죠. 마찬가지로 여자가 자기 머리를 드러내면 누구의 영광을 드러내요, 자기 남편의 영광을 드러낸다 이말이예요. 그건 하나님의 예배에 온당치 않다. 여자가 하나님께 예배 할 때는, 남자나 여자나 예배 할 때는 하나님께만 영광 돌려야 하는 데, 여자가 머리를 드러내는 것은 상징적으로 하나님 앞에 자기 남편 자랑하고 있어서야 되겠느냐 말이예요. 그러니까 자기 머리를 덮음으로써 자기가 남편의 권세 아래에 있다는 표를 삼아야 한다. 이런 뜻으로 지금 해석한 거예요.
긴 해석 방법이 있는데 가장 합당한 것은 이런 것 같애요. 방금 말씀드린대로 예배 때는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 되고,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야 되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야 돼요. 그런데 여자가 머리를 드러내는 행위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상황에서 자기 남편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옳지 않다. 그러므로 여자가 예배에 참석 할 수 있는 권리는 어느 때 갖게 돼요, 자기 머리를 덮어서 하나님께 온당한 예배를 드릴 수 있을 때만 예배에 참석 할 권리를 갖게 되죠. 그래서 이 권세란 말은 예배에 참석 할 권리, 그 말이예요. 그러니까 천사들이 감독을 해요. 예배가 온당히 이루어 지는가, 하나님의 영광이 더 온당히 드러나고 확실히 드러나는가, 감독을 한다구요. 천사들을 의식해서, 여자들이 예배에 너울을 벗으면 권리를 얻지 못해요. 그러므로 머리를 덮음으로 말미암아 자기 남편의 영광을 덮고, 그래서 오로지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릴 수 있음으로 말미암아 예배에 참석 할 권리를 얻어라.지금 그런 뜻으로 요새 주석가들은 많이 해석해요.
11절 12절, 여기서 바울은 남자와 여자의 기원을 지적함으로써 주 안에서, 곧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의 영역에서,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새창조에서, 남녀의 근본적인 동등성을 천명해요. 이것의 가장 예리한 표현은 갈라디아서 3장 28절에 있죠.
갈라디아서 3장 28절.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그리스도의 재창조의 영역에서는 옛 창조 때의 그 구분들, 인종적인 구분, 구원사적인 구분, 성별적인 구분, 이런 게 다 해소가 돼 버리는 거예요.다 함께 구원 받은 한가지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 그 말이예요.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의 영역에서는 여자가 일방적인 남자의 종속이 아니라, 남녀 둘 다 하나님께서 기원하므로 하나님께 속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에 종속 된자들이예요. 이로써 바울이 여자가 그의 머리에 너울을 써야 함의 논증을 여자가 남자의 일방적으로 종속됨을 막고자 한 것 같애요, 11절, 12절의 의도는.
13절에서 15절 까지는 바울은 여자가 너울을 써야 한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논리를 대죠. 바울은 자연을 하나님의 창조로 보기 때문에 자연적인 것, 여자가 긴 머리 깎았죠, 보편적인 현상이죠, 그러나 머리가 길어야 아름답다고 하죠, 남자가 짧은 머리를 하는 것도 자연적인 현상인데 이것도 하나님적이다, 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셨으니까 자연이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반영한다고 보고, 그것에 근거해서 여자는 머리를 덮어야 함을 역설해요.
마지막으로 16절은 전 세계의 보편적인 관행에 호소해서 지금 최첨단 앞서 가는 고린도 교회에도 이점에 있어서는 교회 전체의 관행을 존중해야 된다,고 호소를 하고 있어요.
한번 생각해 봅시다.
여자들은 교회 예배 때 기도하거나 설교해서는 안된다. 이 문제는 아까 말씀 드린대로 14장 끝에 가서 다시 토론하고,
둘째 여자들은 오늘날에도 머리에 너울을 써야 하는가, 여러분들 머리에 너울을 써야 하는 것 아닙니까. 가톨릭 교회에서는 쓰고 하잖아요. 또 아주 보수적인 교회에는 다 써요. 여자들이 교회에서 입 벙긋 안하고 가만히 있단 말이예요, 이 가르침에 따라서. 그런데 왜 우리는 안해요? 진지하게 생각 해 봅시다.
세번째로 이 본문에 비추어서, 지난 70년대 부터 불어온 한 시대의 시대 정신, 곧 여성 해방, 이것을 우리가 한번 평가 해 볼 필요가 있어요. 바울 시대에 바울의 복음이 어떤 의미로 여성의 해방 운동이었으며, 어떤 의미로 어느 선에서 한계가 있었을까? 바울이 한계를 지우는가? 여기 본문에도 나타나요. 여자들이 예배에 기도하고 설교하고, 당시로서는 놀라운 해방이죠. 아까 갈라디아서 3장 28절 그런 언어가 고대 언어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죠. 그러나 여자들은 너울을 쓰고 다녀라, 그래서 우리가 한 시대를 살면서 ‘여성 해방 운동’ 을 많이 씹기도 했습니다만, 그것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평가해야 하고, 어떤 의미에서 그것을 추진해야 하고, 어떤 의미에서 한계를 지어야 하고, 이런 걸 한번 토론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39)고린도전서
오늘 우리가 같이 묵상 할 말씀은 고린도 전서 11장 17절에서 22절까지 입니다. 고린도 전서 11장 17절에서 22절까지 저와 여러분이 한 절씩 교독 하겠습니다.
내가 명하는 이일에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저희의 모임이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
첫째는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 함을 듣고 대강 믿노니
너희 중에 편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이는 먹을 때에 각자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이는 시장하고 어떤 이는 취함이라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

거기 11장 17절에서 22절까지는 바울이 올바른 성만찬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는데, 이렇게 하게 된 것은 방금 읽은 거와 같이 고린도 교회의 성만찬 때 마다 추태가 벌어졌기 때문에 그랬어요.
그러니까 지금 11장부터 14장 까지는 고린도 교회의 예배 때의 무질서함, 혼란, 추태 이런 것에 대한 문제를 다루는데, 지난번에 우리가 같이 생각 해 본 1절에서 16절 까지는 여자들이 갑자기 교회에서 기도하고 설교 할 권리를 얻게 되자 그것을 지나치게 자유롭게 행사함으로써 교회가 어지럽게 된 문제를 다루었죠.
오늘은 두번째 문제,성 만찬때 가난한자와 부자들간에 위화감이 생기고, 문제가 많이 생겨서 성만찬의 의도를 완전히 거꾸러 뜨리는 일을 다루는 것을 11장 17절부터 34절까지 다루고, 12장에서 14장 까지는 성령의 은사들을 예배 때에 어떻게 발휘해야 되는가. 성령의 은사들로 말미암은 공적 예배의 혼란,의 문제,를 다루면서 은사는 무엇이며, 무엇을 위해 주어졌으며, 어떻게 쓰여야 하며, 공적 예배에서는 어떻게 써야 하는 가를 다루죠
오늘은 성찬식때 고린도 교회에 어떤 문제가 있었는가.
68 페이지 끝에, 고린도인들은 성찬식을 포함하는 예배를 위해 모일 때 그 모임을 통해서 그들의 교제가 강화되기는 커녕 더욱 약화되고, 악화되었어요. 그것은 바울이 가르쳐준 대로 성찬식을 거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랬어요. 그러므로 앞서 2절에 바울이 고린도인들을 칭찬했죠. 11장 2절에.
‘너희가 모든 일에 나를 기억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전하여 준 그 유전대로 그 전통대로 너희가 지키므로 너희를 칭찬한다.’ 했는데 오늘 본문에서는 바울이 칭찬하지 않겠다는 말을 두번이나 하죠.
17절 ‘ 내가 명하는 이 일에 너희를 도무지 칭찬하지 않는다.’ 그 다음에 그것의 마지막 22절에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는다.’ 도리어 꾸짖고자 한다, 바울이 2절에 칭찬한 것을 번복하고 있어요.
그래서 사실은 지난번에도 제가 말씀 드렸지만, 2절에 이렇게 칭찬 한것은 여러가지 고린도인들의 신앙의 미숙함으로 인해서 혼을 낼려고 하는데, 그 혼냄이 잘 받아들여 지도록 하기 위해서 독자의, 고린도 독자의 마음 상태를 좀 열려진 마음으로, 기분 좋게,하기 위해서 칭찬 한 것이지, 교육적으로 칭찬 한것이지, 바울이 진짜 칭찬한 건 아니예요. 이렇게 자녀들을, 또는 학생들을 훈계 할 때에 칭찬부터 해서 자녀나 학생들이 훈계를 받아들일 상태로 만들어 놓고, 진짜 훈계 할 것을 훈계하는 것이 좋더라. 이게 아주 고대 사람들로 부터 얻은 교훈이었든가 봐요.
그래서 라틴 말로 ‘가바티오 베노벨런티에’ 라고 그래요. 보통 쓰이는 말이예요. 우리도 지난번에 말했지만 ‘가바티오 베네벨렌티에’를 아끼지 말고 자녀들에게 좀 쓰자. 금방 혼을 낼려는데 칭찬을 한마디 하는 것, 바울에게 배울 수 있어요.
18절에 보면은 칭찬하지 못하는 이유가 교회에서의 모임이 신도로서의 교제를 강화하고, 유익을 가져오기 위해서 모이는 데, 사실은 모임이 도리어 해를 가져 오기 때문에, 그런 모임이 되기 때문에, 칭찬하지 못한다. 그런데 이렇게 모일 때 마다 유익이 되지 못하고 해가 되는 이유가 뭐냐? 첫째, 18절에, 너희가 교회로 모일 때에 분쟁이 있다는 것, 그런데 본문을 쭉 읽어 내려 가면 첫째가 있으면 둘째가 나와야 할 텐데, 둘째, 세째가 나오지 않아요. 바울이 지금 비서에게 편지를 구술하고 있어요. 구술하고, 서기는 받아 쓰고, 가끔식 바울이 감박 잊고서 둘째, 세째 이렇게 안 할 때도 있어요.
고대의 편지 쓰는 상황을 늘 머리 속에 가지고 있어야 해요.
바울이 구술했다는 것, 편지가 쓰기가 굉장히 복잡했다는 것, 쓰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기도 하고, 며칠이 걸리기도 하고, 몇 주가 걸리기도 하고, 그래서 쓰다가 다른 일을 보다가 또 구술하기도 하고, 이렇게 해서 가끔씩 이렇게 첫째가 나왔으면 둘째가 나와야 되는데, 둘째가 안 나오고 그냥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쭉 하는 경우가 있어요.
그런데 34절에 보면은 34절 끝에 보면 성만찬을 잘 거행하지 못한 문제를 다루고는 그 나머지 것들에 대해서는 내가 언제든지 갈 때에 바로 잡겠노라, 이렇게 말해요. 직접 가서 잡겠노라, 그러니까 바울은 고린도에 곧 방문 할 계획을 가지고 있죠. 그래서 그 나머지 것들이 바울이 둘째, 세째, 편지로 바로 잡아 줄려고 원래 의도 했다가 그래서 쭉 써내려 가다가, 아 내가 직접 가서 얼굴을 대하고 직접하는 것이 좋겠다, 이렇게 생각하고 생략을 했던지,그게 하나 가능한 것이고, 또는 12절부터 14절 가지에 나오는 성령의 은사들에 대한 오해로 말미암은 교회의 시끄러움, 그 예배의 어지러움, 이것이 둘째에 해당 할 수도 있고, 여기에 바울이 둘째로는 그렇다, 라는 안했지 내용적으로는 이것이 둘째에 해당 할 수도 있죠.
우선 바울이 다루는 중요한 문제로 첫째, 성찬식 때의 추태 문제예요.바울은 고린도 인들의 교회, 교회라는 말은 하나님의 백성의 모인 상태, 모인 하나님의 백성을 교회라 해요. 그건 구약에서 나오는 전문언어예요. 하나님의 백성이 모여 있는 상태 그것이 교회예요. 이것은 지난번 우리가 1장 1절에서 본 거와 같이 어느 한 지역에 하나님의 백성이 모여 있으면, 그 지역이 교회예요. 또 전세계적으로 모든 하나님의 공동체를 하나님의 백성이라 그래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였을 때, 스스로가 하나님의 백성임을 확인 하는 때 인데 그 때 분열이 일어 났다 하는 것을 구두로 전해 들었어요. 앞에 7장 1절에 여러번 봤지만, 여러분들이 쓴 것에 대해서 내가 대답을 하겠다, 그랬죠, 바울이. 고린도 교회가 그들의 대표단을 바울에게 보내서 편지 하나를 바울에게 전했어요. 그 편지에 이러이러한 문제들에 대해서 좀 정확한 가르침을 주시오, 첫째는 남녀간의 문제를 7장에서 다뤘죠. 다음에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는 것이 옳습니까? 하는 문제를 물었죠, 그래서 8장에서 10장까지 바울이 길게 설명했죠. 아주 중요하기 때문에 설명했죠, 왜, 그리스도인들이 비기독교적 환경 속에서 비기독교적 문화와 어떻게 교류하면서 사는가? 의 중요한 원칙을 다루기 때문에 길게 답했어요.
그래서 그들이 그들의 편지에 쓴 문제들에 답하면서, 동시에 그들이 고린도 교회의 일어난 문제들에 대해서 구두로 물었어요. 그 중의 하나가 뭐냐하면, 성찬식 때마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이 잘 융화하지 못하고 문제가 발생하는 데 이게 큰일입니다, 이렇게 말을 전한 거죠. 그래서 바울이 내가 듣는데 그러리라고 내가 믿는다, 사실인 것을 믿는다, 거기서 바울이 그렇게 말해요.
성찬식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하나됨을 상징하고 그것을 보장하는 것이다. 성찬식은 그리스도와 교회가 하나임을 표현하고 또 그 하나됨을 북돋는 성도들이 그리스도 몸안에서 하나됨의 의식을 더 강하게 갖도록 북돋는 것이 성찬식의 중요한 의미예요. 그런데 바로 이 성찬식이 교회의 분열을 조장하는 기회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문제입니까. 이 분열은 1장 10절 이하에서 4장 까지 바울이 다룬 패싸움과 같이 그리스도의 몸을 가르는 것이다. 1장에서 4장까지 바울이 다루는 것이 무엇입니까, 서로 나는 베드로파다, 나는 바울파다, 나는 아볼로파다, 나는 그리스도파다, 이렇게 파당을 정해서 서로 논쟁을 벌이고, 파를 자랑하고, 남의 파를 깎아 내리고 이런 분열이 있었죠.
그래서 그 문제를 바울이 1장에서 4 장까지 다뤘어요. 그 문제는 근본적으로 왜 발생했다고 했죠. 그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무슨 헬라의 철학의 일종으로 생각해서 바울식의 복음이 더 좋다. 베드로식의 복음이 더 좋다, 또는 아볼로식의 복음이 더 좋다, 이런식으로 헬라의 철학 학파들이 서로 갈라져서 지혜 논쟁, 수사학 논쟁을 벌이듯이 그렇게 함으로써 일어 났었죠. 그것도 그리스도의 몸을 갈기 갈기 가르는 행위인데, 이번에는 또 성격이 다른 분파예요. 부자들과 가난한자들의 사회적 계층적 차이에서 일어난 문제예요. 바울은 이런 추태가 교회에서 일어 날 수 있다는 것을 믿고 싶지가 않아요. 그러나 그 소식을 전달하는 전달자들이 믿음직 할 뿐만 아니라 그가 고린도인들을 아는 한 그들이 그런 추태를 벌일 만한 인품을 가진자들이다, 라는 생각이 들어서 자기가 믿는다, 그래요. 내가 대강 믿는다.그런데 파당이 있는 것은 꼭 나쁜 것은 아니다, 고 한마디 하죠. 19절에 ‘너희 중에 편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리라.’
18절에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
‘분쟁’이라는 말의 동의어로 ‘편당’ 이라는 말을 쓰고 있어요. 분쟁이라는 말은 교회가 신앙 논쟁 때문에 분열 할때 쓰는 전문언어예요. 교회사에 분열이 많았죠. 우리 한국 교회사에도 교단들이 많이 분열했죠. 그럴 때 쓰는 말이예요. 고린도 전서 11장 18절에 나오는 말이예요.
‘이단’ 이라고 하는 것은 전통 신앙을 따르지 않고 전통 신앙에서 떨어져 나와서 옳지 않은 다른 도리를 주장하는 것을 말해요. 그러나 지금 본문에서는 파당을 짓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어요.
바울은 교회에 편가름이 있어야 한다, 고 말해요. 그것은 이세대 내에서의 교회에 섞여 있는 예수님에 비유해서 밀과 가라지, 기억 나십니까, 밀과 가라지가 하나님의 심판 때 최종적으로 갈라지겠지만, 현재의 교회에서도 누가 진실도니 믿음을 가지고 참되게 살아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자인가, 다시 말하면 누가 밀인가, 알곡인가, 가 드러나는 것이 좋다, 이말이예요. 바로 분열이 밀과 가라지를 드러나게 하는 일을 하기 때문에 교회내에서 이런 신앙의 논쟁이 없을 수도 없고, 있어야 하고, 있어서 좋을 수도 있다, 이 말이예요. 여기서 우리가 뭘 배웁니까. 가끔씩 우리가 교회의 그리스도의 하나됨, 을 표현해야 된다, 이런 중요한 원칙에 비추어서 전혀 전통 신앙에 어긋나는 사람이 있어도 쉬쉬하고, 덮어버리고, 따지고, 교리 따지고 하면 자꾸 시끄러워지고, 성도의 교제가 망가지고, 교회가 시끄러워지고 세상에 부끄러우니, 될 수 있으면 덮어두고, 쉬쉬해버립시다, 이렇게 하는 경향이 가끔 있어요. 지금 바울이 뭐라고 합니까.
그건 옳지 않다. 교회가 물론 종말에 가서 알곡과 가라지가 분명히 갈라 질 것이고, 그 때 양과 염소의 정체가 드러 날 것이지만, 그러나 교회는 성화를 향해서 점진적으로 성장해 가야 하는 집합체이기 때문에 올바른 신앙, 올바른 삶을 유지 하는게 중요하다 이말이예요.
교회내의 올바른 신앙과 올바른 삶은 정반대이다는 주장을 하거나, 그런 삶을 살거나 이런 사람들이 있으면, 그게 암세포 같이 퍼져서 교회의 많은 사람들의 신앙을 혜손하고, 그 삶에서 성하를 헤방하고, 이런일이 벌어 지면 안된다, 이말이예요. 그러기 때문에 교회내에서 신학적인 정당한 토론, 또 올바른 윤리에 대한 정당한 토론, 이 있어야 된다. 가끔씩 토론이 격렬해져서 편가름이 날 지언정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두 가지를 고려해야 해요. 하나는 교회의 그리스도의 몸으로써 하나됨을 늘 잊어서는 안된다.그러기 때문에 함부로 교회를 가르고, 우리 지역 교회를 서로 가르고, 또는 교단을 서로 가르고, 이런 짓하면 안되죠. 바울이 고린도 전서 1장에서 4장 까지 바울파라는 게 도대체 뭐고, 베드로파라는 게 뭐냐. 혼냈죠. 교회를 그렇게 가르면 안된다.어떻게 몸을 가르느냐. 다른 한편 그리스도의 몸을 가르면 안되니까, 교회에 파당이라는 게 있어서는 안되니까, 우리 속에 우리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을 약화시키고, 성하로의 부단한 노력을 자꾸 좌절 시키고 그런 물이 들어와 있는데 가만 있을 수 있느냐. 이상한 교리, 시한부 종말론이 우리 교회에 가령 몇명이 와서 있게 된다 합시다, 또는 무슨 이상한 주장을 가지고 왔다고 합시다, 그런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옳은 믿음, 옳은 윤리를 위해서 토론하고, 옳은 것은 옳은 것으로 옳지 않은 것은 옳지 않은 것으로 분명히 밝혀야 한다, 이말이예요. 그러니까 두 원칙들 속에서 그 때 그 때 가장 지혜롭게 생각을 해야 되죠.
우리의 신학적인 이견이 있거나 또는 기독교 윤리에 대한 이견이 있을 때에 토론을 해야 된다. 그 이견이라는 것이 어느 정도의 이견이냐. 그걸로 교회를 가를 정도의 이견이냐, 교회를 가를 정도의 이견이 아닌데도 상대방이, 우리는 이단이라는 말을 함부로 써요. 자기와 조금만 달라도 이단이라고 한국사람들이 그러는데 함부로 쓰면 안되죠. 이단이라면 갈라서야 되요. 진짜 상대방이 주장하는 교리나, 상대방이 표명하는 기독교적 삶, 기독교적 윤리가 이단 적이냐, 그러면 물론 갈라서야 되지요.또는 내보내야 되지요. 그러나 우리가 그전에 성경 말씀을 더 깊이 공부하고, 신학을 좀 더 깊이 알아서, 이런 문제에 있어서는 우리가 종말에 완전한 계시를 받을 때까지, 우리의 지식이 완성 될때까지는 부분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로서 내가 70%지식을 갖고 있다해도 저사람도 30% 지식을 갖고 있다, 내가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진지한 동기가 있는 만큼 저 사람도 그렇다. 그러면 서로 관용할 수도 있어야지요. 그러니까 그 때 그때 잘 판단해야 해요.
20절,21절, 문제가 뭐냐하면, 너희가 함께 주의 만찬을 먹을 수가 없으니,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으려 하는데 사실은 주의 만찬이 아니라, 각자 자기 만찬을 먹고있다. 21절에.
이는 먹을 때 각자 자기의 만찬을 갖다 먹으므로 어떤이는 취함이고 어떤이는 부족함이니라. 그게 문제의 본질이예요. 분열은 피할 수 없는 것인지는 몰라도 결코 좋은 것은 아니다. 고대 그리스도인들은 주일.주의 날이 무슨 날이냐 하면, 안식일 다음 날이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을 다시 식탁에로 초대해서 그들에게 떡을 나눠요. 요한복음 21장, 보시다시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안식일 다음날 제자들에게 나타나서 실망과 좌절에 빠진 그들을 다시 모아서 그들에게 식탁을 배설하시고 그들을 다시 교회로 모으시죠, 그것을 기념해서 안식일 다음날 이렇게 성도들이 꼭 모여서 떡을 뺐어요. 사도행전에 보면은 ‘떡을 뺀다’ 하는 게 하나의 ‘주의 만찬을 재현 한다’는 뜻의 숙어예요. 그들은 주일 저녁 무렵에 각자 자기의 음식을 가지고 모여서 함께 식사하고 그 끝에 예수의 최후의 만찬을 기념하여 떡을 떼어 먹고 포도주를 나누어 마시는 식으로 성찬식을 거행했던 것 같아요. 이 만찬식을 바울은 주에 관한 만찬이다, 라고 불러요. 이 만찬이 주께서 베푸시는 만찬이고 주를 기념하는 만찬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주의 만찬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희생으로 만들어진 형제적 교제, 또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써의 하나됨을 체험하고 또 표현하는 천명하는 것이었어요.
10장 16절을 한번 보시겠어요.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예함이라.
이렇게 그리스도의 몸의 상징인 떡을 떼어서 그리스도인들이 같이 먹음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그리스도의 몸의 시체됨, 그리스도의 대표적 죽음에 전부 내포되어서 한 그리스도의 대속의 제사에 덕을 본 자들로서 하나임을 그 때 그 때 체험하고, 천명하는 것이예요. 그것이 주의 만찬의 의미죠. 그런데 주의 만찬을 하러 모인 고린도인이 실제로는 주의 만찬과는 정반대의 광경을 연출하였어요.
그것은 부자 그리스도인들이 많은 음식을 가지고 와서는 자기들의 끝내고 늦게 도착 할 수 밖에 없고, 또 별로 음식을 준비해 올 것이 없었던 노예나 가난한 형제들을 기다리지 않고 곧장 먹어대기 시작하는 것이었죠. 초대 교회에 지난번에 1장 25절에 바울이 ‘너희들 중에 좋은 집안 출신이 별로 없고, 학벌 좋은 자가 별로 없다.’라 말하죠.‘너희들의 부르심을 보라, 육체적 관점에서 봤을 때에 지혜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력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머리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며, 좋은 집안에서 학벌 좋은 사람이 별로 없다.’ 무슨 말이냐 하면, 고린도 같은 부유한 도시에 교회의 다수는 하층에서 왔어요. 처음에. 노예들,부자집에 고용된 노예들, 또는 노예로서는 해방이 됐지만 아직 제정적인 독립이 없기 때문에 원래 섬겼던 상전집에서 이른바 자유한자라, 자유 얻은자로 계속 고용되어 일하는 자, 이런 사람들이 많았다구요. 그런데 게 중에 썩 잘사는 사람들이 있었던 모양이죠.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음식을 많이 가져와서 자랑하면서 먹었댔어요.
21절에, 취해서 곤드레 만드레 되었어요. 그런데 가난한 노예들이나 부자집에 고용된 자유인일지라도 그 사람들은 일과가 끝나고 늦게 올 수 밖에 없어요. 사실은 은근히 교회에 와서 뭘 좀 얻어 먹을까 생각하고 왔는데, 부자들이 다먹고 있었단 말이예요. 그래서 한쪽은 배 고파서 어쩔 줄 모르고 한쪽은 배 부르고, 이렇게 되었다 이말이예요.
이런 추태가 벌어지고 있었다, 말예요. 이것은 주의 만찬을 준비했지만 실제로는 각자 자신의 만찬을 먹은 거다. 21절에 바울이.
그런 행위로서 주님의 자기 희생을 기념하고 형제들의 교제를 이루는 만찬을 정면으로 부인하는 행위였어요. 이렇게 형제들간의 교제를 깨뜨리는 만찬,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됨을 다시 한번 체험하고, 그것을 표현하고,온 세상에 천명하는 그런 기회가 주의 만찬의 기회인데 도리어 갈등, 위화감과 갈등을 조장하고, 가난한 사람 심장에는 원한을 넣어 주고, 부자는 은근히 가난한 자들을 무시하고, 이런 상황이었다. 이건 주의 만찬을 정면으로 부인하는 행위였다.
이렇게 형제들간의 교제를 깨뜨리는 만찬의 끝에 ‘ 이것이 나의 몸이요, 이것이 나의 피라.’ 성만찬을 행했다고 합시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위선에 불과하지. 그래서 바울이 여기 22절에 호되게 꾸짖죠. 주로 누구에게 꾸짖느냐 하면 부자에게 꾸짖어요.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집에서 먹어라, 이말이예요.
그래서 거기 34절을 보세요. 결론적으로 바울이 실제적으로 가르침을 주고 있어요. 만일 누구든지 시장하거든 집에서 좀 먹고 오너라. 먹고 오너라는 말이예요. 미리 먹고 와라, 교회에 와서는 남들이 다 올 때까지 기다려라. 내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려라, 노예들 ,가난한 사람들이 늦게 오니까 기다려라, 그 때까지 못 기다릴 사람은 집에서 먹고 오라. 아주 실제적인 가르침이죠.
교회와서는 그런 추태 부리지 말라.
22절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이런 태도는 빈궁한 자들만 부끄럽게 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는, 무시하는, 도대체 하나님의 교회에 대한 경외심, 이런 게 전혀 없이 방자하게 구는 태도라, 라고 바울이 호되게 나무라고 있어요.
이것에 대해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전혀 너희를 칭찬하지 않는다. 이렇게 호디게 나무라고. 이제 22절부터 25절 까지는 예수께서 주신 성만찬의 말씀을, 바울이 옛날에 고린도 교회에 한번 가르쳤는데, 다시 한번 정확히 상기시켜요. 성만찬을 어떻게 거행해야 하나,를 말씀해 주죠. 그런데 요 부분은 한꺼번에 공부 해야 할 것이므로, 오늘 그 부분은 들어 가지 않겠어요. 다음에 23절부터 다시 하겠어요.
그래서 오늘 토론 해 볼 것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분열하는 것이 옳지 않다, 그러나 교회 내에 명백히 이단 사설을 유포하고, 명백히 성경에 게시된 기독교적 윤리를 거스러는 그런 삶을 하므로 말미암아 교회의 신앙을 어지럽히거나, 또는 성하를 방해 하거나 이런 때는 토론을 해야하고, 바로 잡아야 한다. 분열을 두려워 말고 그런 바로 잡음을 해야 한다. 그것에 대해서 하실 말씀이 있으면, 우리 한국 교회의 상황에 비추어서 한번 말씀하시던가 또는 교회내에서 사회 계층간의 위화감이 혹 우리 교회에는 없는가, 또는 우리 영동교회는 없다면 한국 교회 전체는 없는가, 또 지난번에 여자들이 교회에서 너울을 써야 하는가, 또 여자들이 예배 때 기도를 하거나 설교를 할 수 있는가, 없는가, 또는 70년대 부터 세계적으로 불기 시작한 여성해방운동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 하는가를 한번 생각 해 보라고 했죠. 그런 문제들에 대해서 한번 토론 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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