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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글 모음

광야(曠野)를 지나면서(손승호)

by 금빛돌 2013. 4. 5.

 

                                                                  태국 손 승호 선교사

하나님의 훈련 장소인 광야

광야에는 물도 부족하고 생명체들이 거의 살아갈 수 없는 메마른 장소이다. 광야는 고독과 적막, 낮에 내리 쬐는 강한 햇빛, 밤의 달빛과 별빛 외에는 외로움과 황량함만이 지배하는 곳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광야를 하나님의 사람들의 훈련장소로 사용하셨다. 40년간 이집트 왕궁에서 그 당시로서 최고의 교육을 받았던 모세를 하나님께서는 광야로 불러내셔서 그 곳에서 40년간 훈련시키셨다. 하나님은 모세를 사용하시기 전 그가 지난 40년간 왕궁에서 쌓은 지식과 경험, 야망과 욕망 그리고 자신의 생각을 철저히 광야의 거친 땅 속에 다 묻게 하셨다. 2004 12 26일 일어났던 쓰나미가 인간의 과학과 기술을 조롱하였듯이 광야는 모세의 능력과 경험, 그의 의로움을 조롱하였다고 할 수 있다. 모세는 40년 광야생활을 끝낸 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되는데 그 때는 그가 처음 가졌던 자신감과 용맹, 자기 의로움은 다 사라지고 광야에서 양을 치는 평범한 목자로 변해있었다. 그렇게 자신감에 차 있던 그가 광야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그의 대답은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위대한 일을 해 낼 수 있습니까 라는 것이었다 (3:11).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은 그를 이 땅의 모든 사람보다 더 온유한 사람이라고 인정하여주신 것(12:3)은 그가 광야에서 자기의 것 즉 자신의 욕심과 야망과 교만과 자기의 의를 다 땅에 묻었기 때문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였던 세례요한도 광야에서 훈련 받았다. 광야에서의 훈련들을 통하여 그는 비로소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3:30)는 고백을 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도 세례를 받으시고 성령의 능력을 입으신 후 40일 동안 광야에서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셨다(1:13). 그 후 주님은 3년 공생애 사역 동안 어떤 상황가운데서도 주님 자신이 영광을 취하지 않으시고 전적으로 하나님 아버지에게만 영광을 돌리셨고 죽기까지 복종하실 수 있으셨다 (2:8).

태국선교지가 나에게 무엇을 의미하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태국선교지는 나에게 영적 광야라고!  어떤 이는 이런 말을 했다. 당신이 하나님을 만나려면 사막으로 들어가라. 만약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당신의 주위를 사막으로 만들라. 이 말은 자신의 생애에 하나님보다 높아진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오직 하나님 한 분만 구하는 것을 생의 우선 순위로 삼으라는 말일 것이다. 모든 만족을 하나님 한 분에게서만 찾고 삶의 목표가 하나님을 구하는 것이 되게 하고 하나님 외에 다른 비 본질적인 것들을 추구하지 말라는 의미라고 생각한다. 사막의 성자들이라 할 수 있는 교부들은 하나님 한 분만을 추구하기 위해 결혼과 세상의 모든 유혹을 물리치고 모포와 간단한 물품들을 가지고 기도와 묵상을 하기 위하여 사막의 동굴들로 들어갔다. 그러나 선교사로 부름 받은 나는 사막의 교부들처럼 세상과 단절 할 수는 없고 결혼하여 세상 가운데 살면서 그들처럼 하나님 한 분만을 추구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믿는다. 하나님이 나를 선교사로 부르신 후 나에게 있어서 태국선교지는 참으로 광야와 같았는데 여기서 어떻게 하나님만을 바라도록 인도하셨는지 지난 날의 번민과 실패, 고통과 좌절 그리고 하나님이 함께하신 기쁨들을 나누기를 원한다.

 

영국에서 선교훈련 기간 동안의 광야 생활

             김 영진 선교사님이 총회선교부 총무로 재직하실 기간인 19902월 선교사 후보로 허입을 받고 5 24일 나는 태국선교지에 첫 고신 선교사로 들어가기 전 영국에서 선교훈련을 받기 위해 한국을 떠났다. 영국에서 1년간 선교학을 공부하며 훈련을 받는 기간 동안 처음에는 영국인들의 신앙생활 형태가 한국교회 교인들의 모습과는 판이하게 다른 것에 충격을 받았다. 그들의 기도하는 모습이나 성찬식에 참석하는 태도, 하나님을 섬긴다는 자세가 별로 심각하게 보이지 않았고 신앙생활이 열정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나 자신이 그들에게 표현하지는 않았으나 내심으로는 역시 당신들 영국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이 다 식어 외형만 남아있는데 이제는 한국교회로부터 배워야 할 때라고 말을 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내 자신의 신앙생활 모습과 그들의 신앙생활은 다른 데가 있음을 알았다. 지역교회에 다니면서 그들이 말로는 표현을 하지 않지만 내실 있는 신앙의 또 다른 모습을 발견하고 놀랐다. 예를 들면 그들은 사소한 일에도 정직이 몸에 배어 있었다. 신학교 도서관에 복사기가 설치되어 있어 스스로 알아서 정확하게 돈을 내고 혼자 마음대로 복사를 할 수 있게 해 놓았고 출판법을 어기면서까지 책의 전부를 복사 한다든지 하는 경우는 없었다. 그런데 나는 책의 전질 복사는 물론이고 어떤 때는 복사한 페이지만큼 현금 통에 돈을 넣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어느 날 하나님의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나의 부끄러운 모습을 전체 학생들 앞에 고백하고 회개할 기회가 주어져서 다행이었지만(물론 떼어 먹은 복사비는 다 지불하였다) 삶의 세세한 부분에 있어서 나 자신은 영국 학생들보다 별로 나은 부분이 없었다. 소위 말하는 뜨거운 신앙의 허구를 보게 되었고 삶의 전 분야가 하나님의 통치 가운데 있지 않은 것을 깨달은 후 나는 자신을 고독의 광야에 던져서 바른 신앙 자체에 대해 고민하며 나의 신앙체질을 바꾸는 기회로 삼았다.

             영국 일반 교인들은 교회에서 크게 요란하지는 않으나 평일에 우리가 생각지도 못했던 일들을 그들은 실천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이었다. 어느 여 집사님은 혼자 있으면서 움직일 수 없는 할머니에게 찾아가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성경을 읽어 주고 목욕을 시켜 주며 청소를 해주고 음식을 만들어주곤 하였다. 그 일들을 한두 번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하는 것이었다. 사실 나는 선교사로 나갈 사람이었으나 그 여 집사님처럼 타인에게 그런 식으로 헌신적인 사랑을 베푼 일은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비록 영국은 전체적으로 기독교인의 숫자가 많지는 않으나 우리와 다르게 그들의 삶에 배어 있는 그리스도의 사랑과 섬김의 정신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나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학생들과 교수들, 그리고 교인들과 교제할수록 그들의 외적 신앙의 모습은 나와 달랐으나 내적 모습은 훨씬 더 성숙된 그들을 대하면서 나의 허구적 신앙의 모습을 다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무()로 돌아가 나 자신의 신앙을 새롭게 하는 계기로 만들었다. 영국에서 선교훈련 기간 동안의 광야 생활을 통하여 나는 나 자신의 신앙의 허구를 땅에 묻었다. (사진 1번 삽입)

태국에서 언어훈련 기간 동안의 광야 생활

             1991 10월 목사 안수를 받고 그 해 12월에 파송 예배를 드린 뒤 1992 2월부터 싱가폴 오엠에프 국제본부에서 신임선교사 훈련을 받은 후 그 해 4월에 선교지 태국에 들어왔다. 선교지에 도착하고 보니 한국에 있을 때와는 전혀 다른 상황이 벌어졌는데 그것은 나를 감사하는 모든 체제가 없어진 것이었다. 물론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의 시각에서 벗어날 수야 없지만 어떻게 보면 마음대로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살판나는 세상이 된 것이었다. 새벽기도를 안하고 성경을 읽지 않고 전도를 하지 않아도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어진 것이다. 나의 영적 생활을 나 자신 외에 감시하거나 감독하는 사람이 없어진 것이었다. 처음에는 자유스러움을 만끽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한국교회라면 목사가 새벽기도를 하기 싫어도 교인들의 눈이 무서워서라도 해야 하고 또 눈치가 보여서 다른 교인들보다 더 왜 기도해야 하며 설교를 자주 해야 하다 보니 말씀을 본인에게 적용하든 안 하든 관계없이 무조건 성경을 읽고 연구를 해야 한다. 또한 아무리 전도를 하기 싫어도 심방해야 할 경우가 많아 교인들 가족 구성원 가운데 불신자들을 만나면 자동적으로 전도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아닌가.

             목사는 성도에게 도전을 주고 목사 또한 성도들로부터 도전을 받음으로 자신의 신앙이 견고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선교현지에 도착하고 보니 현지어도 안되고 도전을 줄 교인도 없고 나 자신이 도전을 받을 성도도 없게 되었다. 선교사들끼리 1주일에 한번씩 모여서 영어로 기도회를 하고 말씀을 나누지만 그것은 나의 영적 삶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날씨마저 더운데다가 말씀과 기도가 부족하니 평소에 숨어있었던 나의 못된 성격까지 나오는 것이었다. 한국에서는 나는 꽤 쓸 만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했었는데 선교지에서 내가 아내와 아들에게 하는 행동은 나 자신과 가족이 상상하지 못했던 유치하고 미성숙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었다. 내가 이런 형편없는 사람인데 어떻게 선교사로 통과되어 태국에까지 올 수 있었나라고 의심할 정도로 나 자신의 모습이 한심하였다. 드디어 본격적인 광야생활이 시작된 것이었다.

             4월의 태국 날씨는 1년 중 가장 덥다. 우리가 처음 도착한 그 해는 별나게도 더워서 태국 중부지방 롭부리는 바람 한 점 없이 가만히 있기만 하여도 땀이 쫙 흐를 정도로 숨막히는 날씨가 계속되었다. 찌는 듯한 날씨 때문에 밤잠을 설치기가 예사였지만 그래도 새벽에 일어나 새벽기도를 시도하다가 엄청 졸기도 했다. 말씀을 읽으나 설교할 기회가 없으니 마음을 설레게 하는 부분도 없고, 언어 공부가 짐이 되다 보니 마음은 바쁘기만 하여 나 자신의 영적 생활은 점점 더 바닥을 향하고 있었다. 나는 이런 저런 훈련을 받을 만큼 받고 선교지에 왔으니 이제는 선교지의 사람들을 위하여 무엇인가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는데 진짜 상황은 선교를 시작하기 전 나 자신이 선교에 가장 장애물인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자주 마을 옆을 흐르는 작은 시냇가에 혼자 나가 나 자신을 향하여 한탄하였다. 한국에서는 안 그랬는데 태국에서는 내가 왜 이럴까?라고 마음 속으로 몇 번이나 부르짖었던가! 마치 군에서 고참들이 졸병들에게 복창시키는 말인 사회에서는 안 그랬는데 군에서는 내가 왜 이럴까?라는 말처럼. 영적으로 아무런 도움도 받을 수 없고 줄 상황도 되어있지 않는 광야와 같은 상황에서 발가벗겨진 나 자신의 신앙인격은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나는 하나님께 고백했다. 내가 선교사라는 직책을 가지고 태국선교지에 왔으나 태국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노라고. 언어는 그만두고라도 사람 자체가 이 모양이니 내가 이들에게 기여할 수 있는 선하고 훌륭한 것이 도무지 없다고. 이 영적 광야와 같은 곳에서 하나님이 먼저 나를 뜯어 고치시기 전에는 나를 통하여 아무것도 하실 수 없다고. 자신에 대해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이 아님이 드러났으니 나는 자신에 대하여 걸었던 모든 기대를 버릴 수 밖에 없었다. 하나님 나를 바꾸어 주십시오. 저는 전혀 쓸모 없는 사람입니다라고 부르짖었다. 영적 사막에서 벌겨 벗겨진 나의 모습은 전쟁터에서 전쟁도 해보기 전에 도망하는 패잔병의 모습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나 자신에 대해 절망할수록 하나님께 소망과 기대를 걸게 되었고 나 자신은 정말 기대할 만한 가치가 없고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내가 바라고 의지할 분임을 더 깊이 인식하게 되었다. (사진 2번 삽입)

 

어린 아들을 떠나 보내면서 겪은 광야 생활

             우리 가족은 총회선교부 선교사임과 동시에 효과적인 사역을 위해서 오엠에프 선교단체를 통하여 사역을 하게 되었다. 1992 10월초 태국중부지방 깽코이라는 지역에서 언어훈련과 함께 기존 교회를 돕는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 당시 선교단체의 규칙은 선교사 자녀는 무조건 태국 북쪽 치앙마이에 있는 치앙마이국제학교에 보냄과 동시에 선교단체에서 운영하는 선교사자녀 기숙사에 보내는 것이었다. 여러 규칙 중 아이가 가져갈 모든 옷에는 아이의 이름이 새겨진 이름표를 붙여야 했다. 아내는 하나 밖에 없는 어린 아들을 처음으로 700km나 되는 먼 곳으로 떠나 보내기 전 양말, 수건, 이불 그리고 모든 옷 하나 하나에 주은(Joo Eun)이란 이름표를 달면서 얼마나 자주 왈칵 왈칵 눈물을 쏟았는지 나는 그래도 남자라고 어릴 때부터 수도 없이 들어왔고 군에서 훈련 받은 대로 사나이는 자고로 어떤 일이 있어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 것이야라고 되 내이며 화장실에서 몰래 몰래 눈물을 삼켰다. 아들에게 아버지의 강건함을 보여야 되겠고 아내에게 남편으로서 든든함을 보이기 위해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남자는 군대생활도 해야 하고 결국 집을 다 떠나는 거야라고 말했으나 나는 속으로,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 더 쉬운 자녀교육의 길을 택할 수 없음을 괴로워하였다.

그곳 보모 선교사는 우리에게 처음 6주 동안은 전화도 못하게 했다. 자녀들이 집 생각을 자주하게 될 것을 염려하였기 때문이었다. 방학 때는 물론 집에 와서 부모와 지낼 수 있었으나 학기 중에는 1년에 두 번만 방문이 허락 되었다. 방문을 하여도 아이를 데리고 나가 잠자는 것은 금지되었다. 한국식으로 자라온 우리 방식과는 전혀 다른, 서양 선교사들이 옳다고 주장하는 그들 방식으로 아이를 교육시킬 수 밖에 없는 처지였다. 주은이는 여섯 살 반에 기숙사 생활을 시작 했는데 그 기숙사에는 다 서양 아이들이었고 동양 아이로서는 유일한데다 나이도 제일 어렸다. 기숙사 보모 선교사와 대화할 수 있는 언어가 마땅치 않았던 주은이는 치앙마이에 가기 전에 태국 유치원에서 몇 개월 배운 낮은 수준의 태국어가 보모 선교사와 통할 수 있는 유일한 언어였다. 

             서양선교사 자녀 기숙사에서 벌어지는 광경은 한국의 옛날 군대와 흡사한 모습이 많았다. 그것은 약육강식 이었다. 주은이가 가장 어린데다가 영어도 안되고 힘이 없으니 덩치가 큰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할 수 밖에 없었다. 상당한 시간이 지나서 보모 선교사로부터 급한 편지가 날아왔다. 그 내용은 자신이 보모로서 아무리 노력을 하여도 큰 아이들이 주은이를 괴롭히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보모가 보지 않을 때나 밤에 큰 아이들이 주은이를 괴롭혔기 때문에 감시할 수도 없었고 아무리 말을 해도 아이들이 주은이를 괴롭히는 일을 멈추게 할 수가 없었다고 했다. 두 달이 지난 후 우리가 치앙마이로 주은이를 찾아 갔을 때는 아이가 몽유병 증세와 더불어 약간은 돌아버린(?) 듯이 보였다. 이 일로 아내는 심장병을 얻어서 상당 기간 동안 고생을 하였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선교단체 책임자에게 이 문제를 해결해 주도록 부탁을 하였다. 그러나 주은이를 가장 많이 괴롭히는 그 아이는 나의 직속 고참 선교사의 아들이었는데 이 문제에 대한 그 선교사의 반응은 아이들의 문제는 아이들이 해결해야지 큰 문제도 아닌데 무슨 문제를 삼느냐는 것이었다. 우리 부부는 황당할 수 밖에 없었다. 당장 떠오르는 생각은 아이를 한국으로 보내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주은이에게 한국에 가서 공부하라고 했더니 주은이는 엄마 아빠는 어디에 있을 건데?라고 물었다. 엄마 아빠는 태국에서 선교를 해야 하니 태국에 있어야지라고 했더니 엄마 아빠가 있는 곳에 자기도 함께 있겠다고 대답했다. 지금도 어린 주은이의 그 대답에 나는 감사한다.

             선교사 훈련을 받으면서 예수 믿는 사람에게 주일 성수와 십일조가 기본이듯이 선교사에게는 자녀 교육을 위해 아이를 떠나 보내는 것은 선교사의 기본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실지로 그 상황에 부딪쳐 보니 장난이 아니었다. 아이에게 어려움이 계속 생기니 아예 선교를 집어치우고 싶은 마음도 일어났다. 치앙마이에 있는 학교가 개학이 되면 태국 남부로부터 방콕 그리고 중부지방에 이르기까지 각 지역 선교사들은 학교에 갈 아이들을 데리고 가까운 기차역에 모였다. 기차가 도착하면 보모 선교사의 지시에 따라 아이를 기차에 태웠다. 동서양선교사 할 것 없이 어른 아이 다 같이 우는 바람에 이별의 부산 정거장을 연상케 하였다. 아이를 기차에 태워 보내고 밤 늦게 집으로 돌아올 때 그 허탈감, 무엇인가 중요한 부분을 상실한 듯 가슴 한가운데가 텅 비어버린 느낌은 지금도 기억에 남아있다. 주은이를 처음 치앙마이로 보낼 때 어느 고참 선교사가 집으로 돌아가면 아이 때문에 마음이 너무 힘들 테니 그 날은 집으로 들어가지 말라는 충고를 했는데 그의 충고에 따라 바로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중부 지방에 위치한 마노롬병원으로 가서 그 동안 미루어왔던 나의 엄지발톱 제거 수술을 받고 며칠을 그곳에서 지냈다. 

주은이를 보내면서 우리 부부가 자주 묵상하고 눈물을 흘렸던 말씀은 누구나가 다 아는 요한복음 3 16절 말씀이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나 같으면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절대로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남에게 내어주지 않겠는데 하나님께서는 왜 하나 밖에 없는 독생자를 죽음에까지 내어 주셨는가? 감히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보내셨다는 그 크신 사랑을 조금은 내 가슴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어린 아들을 멀리 보내놓고 하나님의 사랑을 가슴에 되새기면서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오로지 기도하며 하나님께 아이를 맡겨드릴 수 밖에 없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런 마음을 주셨다. 복음을 위해 아무런 대가도 지불하지 않고 태국 영혼을 구하기가 어찌 그리 쉬운 일인 줄 아느냐? 나는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 밖에 없는 독생자를 내어주었는데 너는 선교사로서 아이를 잠시 떠나 보내는 것을 그렇게 힘들어 하면서 어떻게 태국의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하느냐? 아이 때문에 낙심이 될 때마다 요한복음 3 16절을 생각하면 할 말이 없어졌다. 하나님에게 전적으로 아들을 의탁하는 광야의 생활을 통하여 복음의 본질을 조금이라도 더 이해할 수 있었고 하나님의 사랑을 손톱만큼이라도 짐작할 수 있었다.(사진 3번 삽입)

 

교회개척을 하면서 겪은 광야 생활

             태국중부지방 깽코이에서 언어훈련과 기존교회 사역을 약 2년간 마치고 1994 9월 교회개척을 위하여 방콕으로 이사를 하였다. 우리가 함께 일하는 선교단체의 원칙은 첫 텀 선교사에게는 지방은 몰라도 방콕 시내의 교회 개척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나의 마음에 언어가 되든 안되든 준비가 많이 되었던 안되었든 상관없이 교회를 개척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마음을 부어 주셨다. 그것도 다른 동역자들이 없이 우리 부부가 독단적으로 하겠다고 나섰다. 만약 교회개척을 허락해 주지 않으면 선교단체를 탈퇴하리라는 마음까지 먹었다.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교회개척이 허락이 되었다. 하루 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우리 속담이 있는데 나의 경우가 바로 그러하였다. 태국에서 그것도 태국 불교인들을 대상으로 교회개척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줄도 모르고 겁 없이 덤볐으니 고참 선교사들 눈에 비친 우리 부부는 그 용기는 가상하나 얼마나 무모한 일로 보여졌겠는가?

             아직 태국언어가 잘 되지 않으니 전도지와 얇은 신앙서적 배부에 온 힘을 기울였다. 마치 전도지 뿌리는 것이 사명인 것처럼 마을 안에 집집이 전도지를 나누어 줄 뿐만 아니라 버스 안에서 택시 안에서 길에서 공장 앞에서 인근 마을에서 대학 캠퍼스 안에서 그야말로 문자 그대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어쨌든 전도를 한 셈이었다. 1,300호가 되는 마을에 전도지를 종류대로 뿌렸고, 뿌린 전도지를 모두 연결하면 거짓말을 조금 보태어 서울에서 부산까지 연결될 정도였다. 컴퓨터 부품 생산 공장은 새벽 6, 오후 2, 오후 10시 하루 세 번 수천 명의 공원들이 교대 근무를 하는데 그 출퇴근 시간에 맞추어 수천 명의 공원들에게 엄청난 양의 전도지를 뿌렸다. 넓은 대학 캠퍼스에 지나 가는 수백 명의 학생들에게 전도지를 나누어주는 등 그야말로 죽어라고 복음을 전하였다. 마을 사람들에게는 찾아갈 건수를 만들기 위하여 명절이나 크리스마스가 되어 후원교회로부터 선물이 오면 조금이라도 우리 부부에게 눈길을 주는 사람을 기억해 두었다가 한국에서 온 것이니 한번 사용해 보시라고 하면서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그야말로 그들에게 필사적으로 거머리처럼 달라 붙었다. 하나님께서 아내보다도 특별히 나에게 거머리처럼 모르는 사람에게도 달라붙는 특별한 은사를 주셨다. 그러나 태국 불교인들의 마음은 돌과 같았다. 그 많은 전도지중에 수십 장은 예수를 믿겠다는 응답을 보내 왔으나 실지로 찾아 가면 두려워서 도무지 만나주지 않고 도망가고 엉뚱한 집 번지를 가르쳐주기도 하였다. 실컷 전도하여 제자화 훈련을 한다고 수주간 교육을 시키고 세례 줄 준비를 하는데 세례 받을 전 주일에 행방을 감춘 대학생하며 지방에서 예수 믿다가 방콕에 와서 만나게 되어 계속 예수 믿겠다고 약속해 놓고는 수십 번을 찾아 가도 한번만 교회에 나와 주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미친 듯이 태국 사람들을 짝사랑하고 있었으나 그들은 눈길 한번 주지도 않는데 내가 애걸 복걸하며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에게 달라 붙었으니 그들은 나를 조금은 정신이 나간 사람으로 알았을 것이다.

             대학생과 중산층을 중심으로 전도하기 위하여 중산층 마을에 들어갔는데 얼마 후에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세 명의 교인들은 중산층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다. 67세 된 할머니는 예수 믿는 며느리와 수년을 같이 살면서 권고를 받아 우리 부부가 개척한 교회에 나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47세 된 독신 아줌마는 초등학교 때부터 몸이 너무 아파 먼데 놀러 한번 가본 일이 없는데 어떤 때는 차로 집에 모시러 가도 몸이 너무 아파 차에 오르지를 못해 예배에 참석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라오스에서 건너온 아주머니 한 분은 태국 주민등록증도 없고 글도 모르고 주일이면 설교를 듣는 대신 어린 딸이 오줌을 싸든지 말든지 아내에게 맡겨 놓고 예배시간에는 졸다가 예배 후 점심 먹고 돌아가는 사람이었다. 한번은 미국에서 한국인 2세 대학생들이 와서 무언극을 했는데 그 때 교회에 앉아 있었던 사람들은 그 진짜 내용을 잘 알아듣지도 못하는 교인 세 명뿐이었다. 아내는 너무 기가 막혀 눈물로 예배를 드렸다. 하나님 이래도 되는 겁니까? 그래도 제대로 알아 들을 수 있는 사람 한 명 이라도 보내주셔야 하지 않습니까?라며 울부짖었다. 한번은 아무도 예배 드리러 올 사람이 없기에 오토바이 운전수 네 명을 한 시간 동안 벌 수 있는 돈을 주고 강제로 예배에 참석시킨 적도 있었다. 그 때 우리와 잠시 동역했던 태국인이 한 말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선교사님 하나님을 잘 도와주고 있네요.라는 말이었다. 쥐 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었다. 개혁주의 신학이니 하나님의 나라하나님의 예정 같은 고급스런 신학적 개념들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오로지 믿지 않는 자들에게 돈을 들여서라도 평생에 한번 이라도 불신자들에게 복음이 들려지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열매 없음에 대한 갈등과 그에 따른 좌절과 절망은 사람의 힘으로는 도무지 당해낼 수 없는 장애물이었다. 인간이 이렇게도 절망을 할 수 있나 싶을 정도로 그 절망의 깊이는 끝이 보이지를 않았다. 이렇게 계속 절망의 구렁텅이 속으로 들어갔다가는 태국선교를 한 텀 이상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더군다나 그 아픈 독신 아줌마에게 믿음으로 적어도 60번 이상 기도했는데도 치유되지 않고 그의 건강이 내리막길을 걷는 것을 보며 오히려 낫지 않는 것이 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천국에 가면 먼저 하나님께 그 독신 아줌마가 낫지 않은 것이 무엇 때문입니까?라고 묻고 싶다.

나는 드디어 성경 전체를 모든 신학적 고정 관념을 없애고 다시 읽기 시작하였다. 하나님의 능력은 오늘도 초대교회와 같이 동일한가라는 기본적인 질문으로부터 시작하여 성경과 나의 믿음을 다시 한번 점검하였다. 물론 온갖 은사들을 날마다 구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특히 시편을 묵상하며 시편 기자들의 울부짖음 들이 나의 울부짖음처럼 들려왔다. 하나님 왜 얼굴을 가리우시고 숨기시는 것입니까?(13:1) 그리고 능력의 하나님 엘리야의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 (왕하2:14)라고 울부짖었다. 너무 답답하니까 신자로서 너무나도 당연하고 기본적이고 쉬운 질문들을 하나님께 하고 있었다.

             방콕에서 교회개척을 시작한지 약 2년이 지났을 때 선교사의 건강을 담당하는 의료선교사가 우리 부부를 면담하고 나서 살짝 돌아버린(?) 것을 발견하고 우리를 가능한 빠른 시간 안에 태국에서 내어 보내도록 최고 책임자에게 연락하는 바람에 부랴부랴 1996 9월 태국선교지 에서 쫓겨나다시피 하여 나왔다. 원래는 4년이 한 텀이나 교회 개척의 기반을 조성하기 위하여 5년을 채우려고 했으나 아내는 수개월 절망과 낙심으로 힘을 쓰지 못하고 누워 있는 날이 많았고 나 혼자 힘없이 헤매고 있었으니 그 의사의 눈에 우리 부부가 정상이 아닌 것으로 비친 것은 너무나 당연하였으리라. 태국을 떠나 오기 바로 전 선교단체 책임자가 하는 말이 당신들 부부는 태국인들 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안간힘을 쓰고 있었으나 실지는 하나님이 장기 선교사로 당신 부부를 쓰시기 위하여 훈련시키신 것이라고 하였다. 이어서 그는 비유로 말하기를 당신들은 조각도를 들고 나무를 깎기 위해 칼을 바로 쥐고 있었다고 생각이 되어도 실은 하나님은 당신들로 하여금 조각 칼을 거꾸로 들게 하셔서 당신 부부를 깎으신 것이라고 하였다. 과연 고참 선교사의 예리한 통찰력 이었다. 그의 눈에도 우리 부부가 언어도 잘 안되면서 태국인들을 전도하려고 동역자도 마다하고 발버둥치는 모습이 우리 스스로의 몸을 깎는 사람으로 비춰졌으리라. 비록 짧은 2년의 교회개척 생활이었으나 우리 부부에게는 마치 죽음의 터널을 통과한 듯한 느낌이 든다. 광야 치고는 물이 한 방울도 없는 바위와 거친 모래뿐인 죽음의 땅을 지나온 기분이었다.

그러나 첫 임기를 마치고 나는 다윗이 유다 광야에 있을 때 지은 시인 시편 63편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후원교회 선교보고 때마다 태국이나 태국선교를 이야기하지 않고 하나님이 그 마른 땅을 어떻게 통과하게 하셨는지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간증하였다. 하나님이 그의 크신 사랑으로 물 없이 마른 황야를 어떻게 통과시켜 주셨는가를! (사진 4번 삽입)

 

신학교육을 하면서 겪은 광야 생활

             하나님께서 신학교육 쪽으로 비젼을 주신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였다. 교회개척을 하면서 현지인 사역자들을 불러 사역을 하는 가운데 이들이 신학교는 졸업을 했으나 복음은 잘 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방콕의 우리 사역지에 오면 늘 새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해야 하니 3명의 전도사들이 모두 3개월을 채우지 못하고 다 떠나가는 것이었다. 선교사가 교회를 개척하면 적어도 10년 가까이 투자를 해야 겨우 자립도 안 되는 교회를 세울 수가 있다. 30년을 사역하면 3개의 교회를 개척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생각이 나기를 평생 3개 정도의 교회를 개척하여 태국교회에 유익을 끼치는 일도 필요하지만 그것보다도 나보다 훨씬 더 태국어를 잘 하고 태국 사람들을 더 잘 아는 현지인 지도자들에게 나 같은 열정만 불어넣어 준다면 그것이 더 효과적인 선교가 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3개의 개척교회대신 하나님의 교회를 위하여 목숨을 걸 수 있는 3명의 현지인만 길러내어도 태국선교를 위해서는 더 효과적이라는 마음이 생겼다. 그 후 하나님께서 선하게 인도해 주셔서 파야오신학교에서 사역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시고 끝까지 공부할 수 있는 기회도 주셨다.

             신학석사과정을 마치고 파야오신학교에서 신학교육을 시작하면서 박사과정을 마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확실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사역에 시간을 투자 해야 하는데 학위공부를 위해 그 엄청난 시간을 낼 수 있을 것인지가 의문스러웠다. 그러던 중 한번은 미국인의사와 대화하는 가운데 내가 묻기를 당신은 미국에 있는 친구들처럼 최근의 의학 잡지를 보거나 최신 의료기술을 계속 배워 나갈 수 없어서 미국에 있는 당신의 친구들보다 더 기술적으로 뒤떨어질 뿐만 아니라 의료 장비들도 없이 대부분 손으로 진찰을 해야 하니 그야말로 시대에 뒤진 실력 없는 의사가 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고 질문하였다. 그런데 그 의사 선교사의 대답은 전혀 예상 밖이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자기가 세계 최고의 권위 있는 의사라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미국에 있는 친구 의사들은 자기가 태국 사람들에게만 있는 특유의 병들에 대해서는 아예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 대신 자신은 태국인들 에게만 생기는 그 병들은 계속 치료를 하고 연구도 하므로 그 분야에 있어서는 세계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의사이며 하나님이 보시기에 본국의 어떤 의사들 보다 자신을 더 귀하게 보실 것이라고 했다. 아울러 자기는 태국인들의 병에 관해서는 세계 최고를 추구한다고 하였다.

             그 미국인 의사선교사의 한 마디가 나의 신학교수 사역철학을 바꾸어 놓았다. 나는 대충 연구하여 적당히 학생들의 수준으로 가르치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 의사의 말을 듣는 순간 한국에는 실력 있는 신학교교수들이 차고 넘치지만 이 선교지 태국에는 태국인들 중에 신학에 관한 한 확실한 기준을 제시할 사람이 없는데 나는 그런 기준을 제시할 수 있는 실력 있는 선교사가 되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한국에 있는 신학자들만큼 실력은 없더라도 태국인들 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모양으로 신학을 요리하여 그들에게 도움을 주는 일에 관한 한 세계 최고를 지향해야 하겠다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신학교 사역을 하면서 태국인 주의 종들을 세우기 위해서 넘어야 할 산이 많다는 것을 신학교육을 시작한지 6년이 되어가면서 점점 더 알게 되었다. 태국인 교수들의 적당한 수준에서 가르치고 만족해 버리는 풍토를 나 혼자의 힘으로는 바꾸기에는 너무 힘에 겹다는 생각을 해본다. 학생들도 다른 교수들이 이 정도 선에서 가르치고 마는데 당신은 무엇 때문에 더 깊이 가르치는가?하며 늘 반발하고 있다. 태국인들이 원래 책 읽기를 좋아하지 않는데다 학생들이 깊이 있는 내용을 원하지 않아서 그들의 수준에 맞추어서 해마다 강의안을 더 쉽게 바꾸어야 하니 답답하기 그지 없다. 학생들은 많은 것을 주려고 해도 힘에 겹다고 받아 들이기를 싫어하고 태국인 교수들은 대충 대충 넘어가자 주의이니 그 사이에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고민하고 있다. 이런 상황가운데서 교회개척 때와는 또 다른 광야에서의 외로움을 느낀다. 공부를 많이 시켜도 반발하고 더 주려고 해도 싫다고 하니 내가 하나님 앞에서 바라는 이들에게 이해되는 최고 수준의 신학은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해야 줄 수 있겠는가?  의사는 훌륭한 의술로 그들의 병을 고쳐주니 거부할 이유가 없지만 신학은 머리를 쓰고 신경을 써야 하니 머리 쓰기를 싫어하고 책 읽기를 즐기지 않는 이들에게 먹혀 들어갈 수 있는 방법으로 성경과 신학을 깊이 있게 가르칠 수 있는 길은 어디에 있는가?

(사진 5번 삽입)

주님만을 바라며

태국선교지라는 광야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나를 깎으시고 또 깎으셔서 하나님께서 합당하게 쓰시고자 하는 신앙인격으로 다듬어 가시는 것을 느끼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 산 넘어 산이요 강 건너 강인데 하나님은 아내를 제외하고는 마땅히 같이 고민 할 수 있는 다른 동역자도 주지 않으시고 혼자 고민하게 하신다. 태국의 우상숭배를 뒤엎고 어두운 역사를 뒤바꾸어 하나님 앞에 전 민족을 올려 드릴 수 있는 사람들은 분명 태국인 주의 종들이다. 이들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일어서기만 하면 태국의 역사는 바뀔 수 있다. 강건한 주의 종들을 세우는 것이 이 땅의 교회들을 바꿀 수 있는 해답이며 성령에 충만한 믿음의 용기를 가진 능력 있는 하나님의 종들을 길러내는 것이 태국 전 민족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지름길인 것을 아는데 그것이 쉽지가 않다. 가슴에 뼈 속 깊이 하나님의 불을 가진 주의 종들이 생겨나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 이 우상과 죄악의 땅에 하나님의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헌신되고 능력 있는 주의 종들이 구름 떼와 같이 일어나 이 땅을 하나님께로 돌이킬 수 있는 날이 속히 오기를 기대해 본다. 앞으로 주의 종이 될 미래의 지도자들(파야오신학교의 학생들)을 바라 보면서 모든 소망을 그들에게 걸어 본다. 그리하여 1907년의 한국교회의 부흥과 같은 성령의 바람이 영적으로 사막과 같은 이 땅에도 불어오는 그 날을 기다려본다.

             태국의 영적 사막을 여행하면서 나 자신에게 다짐해 본다. 내 인생의 최고의 목표는 주위를 사막으로 만든 사도 바울과 같이 그리스도와 그 분의 십자가 외에 자랑할 거리를 남겨놓지 않는 온전한 헌신과 바쳐드림 이라고. 욕망과 야망, 욕심과 모든 인간적인 것을 광야의 거친 땅에 묻어버리고 하나님 한 분 만으로 만족하며 그 분의 얼굴만 구하는 종이 되기를 열망해본다. 나를 위해 독생자 예수를 보내신 그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다 이해할 수 없으나 그 사랑을 받은 자로서 그 사랑을 흉내라도 내면서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해본다. 나 자신의 아집과 야망, 욕망의 노예가 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노예가 되어 태국 선교지 광야를 여행하는 동안 다른 것을 구하지 아니하고 세상의 것으로 목을 축이지 않고 주의 얼굴과 그 뜻으로 만족하는 삶이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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