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에는 부활하신 주님이 왜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를 붙들지 말고 만지지 말라고 하셨는가를 말씀을 드렸습니다.
왜 부활하신 주님이 나를 붙들지 말고 만지지 말라고 하셨습니까?
그 이유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실 수 있습니다.
만일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의 주님을 붙잡고 있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수님은 마리아만의 예수님이 됩니다.
그런데 부활의 주님은 아버지께로 가셔야 합니다. 그래서 성령 하나님을 보내주셔야 합니다.
그러면 부활의 주님은 성령 하나님으로 다시 우리에게 오시게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우리 모두의 예수님이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부활의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지금은 육체를 입고 있는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는 성령으로 오시는 부활의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성령으로 오시는 부활의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까?
날마다 성령으로 오시는 부활의 주님을 우리 마음에 영접해야 합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을 보면 처음에는 일곱 교회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니라 고 합니다.
그런데 마지막에는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고 합니다.
그래서 계3장에서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 마음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마음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때도 예수님께서 육체로 우리에게 들어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우리 마음에 들어오십니다.
그래서 계3장 22절에 “계3:22.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는 날에는 육체를 입고 있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부활의 주님은 육체가 아니라 성령으로 여러분의 마음속에 들어오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날마다 성령으로 오시는 부활의 주님을 여러분의 마음에 모시고 살아가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19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9.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 날은 안식 후 첫날입니다. 안식 후 첫날은 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도 안식 후 첫날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처음 나타나신 날도 안식 후 첫날입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에 보면 사도요한이 계시록의 말씀을 받은 날을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계1장 10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계1:10.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주의 날 즉 주일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제자들을 처음 만나신 날이 안식 후 첫날인 주일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우리가 왜 안식일이 아니라 안식 후 첫날을 주의 날로 지키고 있습니까?
그 이유는 안식일은 예수님께서 무덤에 있는 날이었습니다. 그래서 19절에 보시면 제자들은 안식 후 첫날 저녁때까지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제자들은 언제부터 두려워 떨고 있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잡히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금요일 저녁부터 두려워 떨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은 안식일에도 두려워 떨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안식 후 첫날 부활의 주님을 만나기 전까지 제자들은 진정한 안식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안식 후 첫날 부활의 주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이때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두려워서 문을 꼭 잠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부활의 몸으로 잠긴 문으로 뚫고 들어오셨습니다.
그리고 부활의 주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고 하십니다.
그러면 여러분 왜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고 말씀하셨습니까?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이시고 부활하심으로 죄와 사망과 사탄의 모든 권세를 다 깨뜨리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에게 진정한 안식과 평강을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진정한 평강을 누리지 못합니까?
그 이유는 아직 죄의 권세 가운데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사망의 권세 가운데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탄의 권세 가운데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이 세상 사람으로 부활의 주님을 만나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활의 주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의 특징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무엇을 해도 불안합니다. 무엇을 해도 두렵습니다. 무엇을 해도 안식하지 못합니다. 무엇을 해도 행복하지 못합니다. 무엇을 해도 진정으로 기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부활의 주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저도 고3 때까지 교회에 열심히 다녔지만 불안했습니다. 진정한 평안이 없었습니다.
고 3때 예수님을 내 마음의 주님으로 모셨습니다. 그랬을 때 제 마음 가운데 ”평안“이라는 두 글자를 새겨주셨습니다. 저는 그 이후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지만 한 번도 주님이 주시는 평안이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주님이 주시는 평안을 더 풍성히 누릴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부활의 주님은 성령으로 여러분들에게 들어오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놀라운 사실은 오늘 본문에 있는 것처럼 부활의 주님은 우리가 마음의 문을 꼭 잠그고 있을 때에도 일방적으로 우리 마음을 뚫고 들어오고 계십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부활의 주님은 우리의 가장 자리가 아니라 우리 가운데 들오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또 더 놀라운 사실은 부활의 주님은 우리 가운데 잠자는 분으로 오시는 것이 아니라 서서 말씀하시는 분으로 들어오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부활의 주님은 우리 가운데 오셔서 ”평강이 있을지어다“고 지금도 성령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부활이 주님은 여러분들의 가정 가운데 오셔서 ”평강이 있을지어다“고 지금도 성령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부활의 주님은 우리 교회 가운데 주인으로 오셔서 ”평강이 있을지어다“고 지금도 성령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가운데 한 분이라도 이 부활의 주님을 거절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부활의 주님을 여러분의 삶 가운데 모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가정 가운데 모시기 바랍니다.
또 부활의 주님을 우리 교회 가운데 모실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부활의 주님이 주시는 참된 평강을 맛보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고 20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부활의 주님이 제자들 가운데 서서 평강이 있을지어다고 말씀하신 후에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십니다.
왜 보여주십니까? 혹시 제자들이 무슨 환상을 보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복음에서 보면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의 주님을 만났다고 제자들에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앞에서도 베드로와 사도 요한은 빈 무덤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아직 제자들은 이 사실을 완전히 믿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손과 옆구리를 보이십니다.
그래서 비로소 부활하신 주님을 보고 기뻐합니다.
왜 이렇게 기뻐합니까? 십자가에서 손이 못에 박혀 죽으시고, 죽으신 후에 옆구리에 창이 찔리신 예수님께서 정말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죽음인 것을 확실하게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도 왜 주님의 부활이 기쁨이 됩니까?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죽음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확실하게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또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의 부활이 되기 때문입니다.
또 예수님의 부활로 우리는 사망을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활의 주님으로 인해서 날마다 감사하며 기뻐하며 살아갈 수 있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또 2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21.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예수님께서 또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여기서는 왜 부활의 주님이 평강이 있을지어다고 하셨습니까?
앞에서의 평강은 집 안에서의 평강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은 집 안에 있어도 불안했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주님을 만남으로 기뻐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씀하시는 평강은 집 밖에서의 평강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집 밖인 세상으로 보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제자들에게 무슨 일이 있을지 모릅니다. 사실 제자들은 집 밖을 나가면 죽음의 위협이 그들을 기다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대부분의 제자들은 모두 순교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집 밖인 세상을 나가서 그 환난을 당하고 순교를 당할지 모르는 제자들에게 평강이 있을지어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평강은 단순히 죽음의 위협을 없애주는 평강이 아닙니다. 죽음의 위협이 있어도 가질 수 있는 평강입니다. 죽음의 위협이 있으면 있을수록 더 깊어지는 평강입니다. 환난이 있으면 있을수록 더 깊어지는 평강입니다.
그래서 이제 세상에 나가서 이 평강의 힘으로 승리하게 하기 위해서 평강이 있을지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삶 가운데서도 집안에서의 평강이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부활의 주님을 마음속으로 만남으로 여러분들에게 여러분들에게 평강이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여러분들에게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평강이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 어떤 고난도 이길 수 있는 평강이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이 주시는 평강의 힘으로 세상을 승리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찬송가 413장의 가사를 적었던 스패토드는 법리학 교수이자 교회의 회계집사로서 섬기며 아이들을 가르치는 주일학교 교사로서 뜨겁게 주님을 섬겼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1871년에 시카고 부동산에 투자를 하였는데 대화재가 일어나 전 재산을 잃어버려습니다. 또 그 직후에 급성 전염성 피부질환이 돌아 첫째 아들이 사망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이 엄청난 시련 앞에서 스패포드와 그의 가족들은 심적으로나 육적으로나 쉬기를 위해서 1873년 영국과 유럽을 여행하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아내와 나머지 네 딸과 함께 가기로 결정했는데, 무디 목사님의 전도집회를 도와줄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내와 네 딸이 먼저 배를 탔습니다. 그런데 가족들을 태운 배가 새벽 2시 대서양 한가운데서 철갑선과 충돌하여 모두 바닷속으로 가라앉았습니다. 안타깝게도 스패포드의 네 딸들은 모두 배와 함께 가라앉아 버렸고 아내만 겨우 물 위로 떠 구조되었습니다. 스패포드는 암담한 마음으로 아내에게 갈 배에 타고 가는 중 선장이 이 바다 밑에 당신의 딸들이 있다는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말에 바다 밑 어둡고 추운 곳에 잠들어 있을 딸들을 생각하니 처참한 마음을 주체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밤새 슬픔과 아픔을 가지고 밤이 새 가는 줄도 모르고 기도하며 울부짖었습니다 '주님 어떻게 신실히 주를 사랑하던 나에게 이런 일이 생깁니까' 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놀랍게도 그런 가운데서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의 평안이 마음 속에 치솟았습니다. 그래서 그도 모르게 그의 입술에서는 평생 경험하지 못했었던 마음의 고백이 나왔습니다. 그것이 이 찬송가의 가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413장 내 평생에 가는 길
1.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같든지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
[후렴]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
2.저 마귀는 우리를 삼키려고 입 벌리고 달려와도
주 예수는 우리의 대장 되니 끝내 싸워서 이기리라
3.내 지은 죄 주홍빛 같더라도 주 예수께 다 아뢰면
그 십자가 피로써 다 씻으사 흰눈보다 정하리라
4.저 공중에 구름이 일어나며 큰 나팔이 울릴 때에
주 오셔서 세상을 심판해도 나의 영혼은 겁 없으리
"It is well, It is well with my soul. God's will be done!" 평안해 평안해 내영혼 평안해 하나님뜻이 이루어질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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