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우리 인생의 최고의 목적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입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모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인생의 최고의 목적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 우리가 모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목적으로 여기에 모였으면 우리 가운데 어떤 문제도 없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면서 왜 진정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합니까? 그 이유는 우리가 자신을 죽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그때 예수님은 네 신앙고백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를 지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절대 십자가를 지지 마십시오 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과연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십자가를 지지 말라고 하는 것은 누구를 위함입니까?
누구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까? 예수님을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에 대해서 예수님은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고 말씀하십니다(마16:23).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어떤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또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도 어떤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어떤 일을 해도 그 일이 사탄의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또 우리가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일도 주님의 영광을 가로 막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베드로가 주님을 위해서 한 말이 왜 주님의 영광을 가로막는 일이 되었습니까?
그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그러니까 우리가 아무리 주님을 위해서 일을 하더라도 자기를 부인하지 아니하면 우리는 절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이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20절에 보시면 유월절에 헬라인들이 찾아와서 예수님을 뵙기를 청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2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고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 예수님이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는 것을 무엇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까?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오셔서 높은 자리에 오르시는 것이겠습니까? 아니면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와 영광을 얻으시는 것이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고 말씀하시면 자신이 어떻게 영광을 얻으시는가를 다음 절에서 말씀하십니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여러분 예수님께서 어떻게 영광을 받으십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한 알의 밀로 죽어 지는 것이 자신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자신을 부인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다 고 하니까 하늘에서 어떤 소리가 들립니까? 28.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시니
하나님께서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는 것으로 영광을 받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막는 최대의 원수와 적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막는 최대의 원수와 적을 외부에서 찾으려 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 때문이고 합니다. 또 환경 때문이라고 합니다. 심지어 나를 넘어지게 하는 사탄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실 엄밀하게 따져보면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삶을 살지 못하는 최대의 원수는 바로 우리 "자아" 이라는 사실을 발견해야 합니다.
/아무리 우리에게 외부적인 유혹과 극심한 고난이 있어도 우리 자아가 그것에 끌리지 않으면 됩니다. 나의 자아가 죽고 없어지면 나의 모든 문제는 해결되어집니다. 교회 안에 모든 문제도 사라집니다. 그리고 우리는 오직 주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26.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신을 죽이는데,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우리가 주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온전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 수 있습니까? 내가 죽어야합니다.
여러분 어떻게 우리 가정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가정이 될 수 있습니까? 내가 죽어야합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가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교회가 될 수 있습니까? 그것도 우리 모두가 죽어야합니다.
그래서 2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25. 자기의 생명(자신)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자신)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내가 죽어야 가정이 살고 나라가 살고 교회가 삽니다.
/고등종교와 하등종교의 차이는 하등종교는 내가 죽지 않고 남을 죽이게 하는 종교입니다. 그러나 고등종교는 내가 죽어서 모든 사람을 살게 하는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고등종교를 뛰어넘은 살아있는 종교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신앙생활의 첫 걸음을 자기 부정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또 여기 문제가 하나 더 있습니다. 모든 문제가 내 속에 있으며, "자아"라는 것이 사라지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데, 자아가 쉽게 죽지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나의 자아가 죽일 수 있습니까? 우리는 나의 자아가 죽기 위해서 내가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가를 생각합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자아를 죽이기 위해서 도를 닦으려고 노력합니다. 오욕칠정(五慾七情)과 백팔번뇌(百八煩惱)가 모두 자아에서 시작되니 도를 닦음으로 자아를 죽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노력해서 나를 죽이려고 해도 “십년공부 도루아미 타불”입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자아를 죽일 수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어떻게 말씀합니까?
고린도후서5장 14절에 “고후5:14--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예수님이)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었은즉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의 자아)이(가) 죽은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그를 믿는 우리 자아도 그와 함께 죽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진정으로 예수님께서 여러분들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예
그러면 여러분들도 예수님의 십자가와 함께 옛 자아가 함께 죽었다는 사실도 믿으십니까?
만일 여러분들이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죽으신 것은 믿는데, 그와 함께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면 여러분들은 구원파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예수님만 십자가에 죽이시고, 나의 옛 자아가 더 고집스럽게 살아있게 하기 위함이 절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그와 함께 우리 모두를 죽이기 위함입니다.
이 사실을 온전히 믿을 수 있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이것은 십자가에서 이미 이루진 사실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날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믿고, 날마다 죽은 자로 여기고 살아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롬6: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자아)을 죄에 대하여는 (십자가에서)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여기서 너희가 십자가에서 너의 옛 자아가 죽은 자로 여긴다는 말이 중요합니다.
//이것을 쉽게 말씀을 드려보겠습니다.
술을 끊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노력을 해도 술을 끊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술병을 감추었습니다. 그래도 끝까지 술을 찾아서 먹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겠습니까? 그 지방에 있는 모든 술 공장을 다 폭파시켜서 없앴습니다. 이렇게 술 공장을 없애도 여전히 이 사람은 술을 찾습니다. 완전히 끊지 못합니다. 계속해서 술을 찾습니다. 그때 이 사람은 이제 무엇을 생각해야합니다. “아 이제 술 공장은 없어졌다. 나는 이제 술을 먹을 수 없다. 그래서 술을 먹고 싶지만, 이제는 자신이 술을 먹지 못하는 사람으로 날마다 여기며 살아가야겠구나”라고 합니다. 이렇게 술 공장이 없어진 줄 알고 자신이 이제는 술을 먹지 못하는 사람으로 여기며 살아갈 때 언젠가 그 사람은 완전히 술을 끊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옛 자아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음을 믿는다고 해서 우리가 즉각적으로 옛 자아가 죽은 모습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내가 주님과 함께 죽었다고 믿지만, 여전히 누가 나에게 좋지 않은 이야기를 하면 속이 상합니다. 또 누구와 말다툼을 하다보면 여전히 나의 옛 자아가 살아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어떻게 보느냐 내가 이래 봐도 옛날에 이런 사람이었어”라고 큰 소리를 칩니다. 그래서 여전히 아직 살아있는 자아를 내세웁니다.
//이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순간적으로 나의 옛 자아가 살아 있고, 나타나려고 할 때 무엇을 생각해야 합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 그를 믿는 내가 그와 함께 죽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게 나의 자아가 주님과 함께 죽었음을 생각하고, 그 순간에 자신을 죽은 자로 여기며 살아가야합니다.
/여러분 교회의 제일 꼭대기에 십자가가 서 있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십자가가 아래 있는 모든 것은 무덤입니다. 우리 교회에 십자가가 서 있는 것은 “우리는 이제 세상에 대하여 죽은 자들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옛 자아에 대해서 죽은 자입니다” 라고 하는 뜻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자아가 죽은 자들의 무덤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죽은 자로 여기며 살아가시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이미 죽은 자로 여기며, 날마다 자아를 죽이며 살아갈 때 어떤 일을 우리가 경험할 수 있습니까?
첫째는, 죽을 때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명랑이라는 영화에서 우리나라의 수군이 완전히 전멸해서 배가 12척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일본군의 배는 330척이었습니다. 그리고 승리한 일본군이 수많은 양민을 학살하고 심지어 전리품으로 코까지 베어갔습니다. 또 거북선조차도 불타서 없었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일본군에 대해서 두려워 떨고 있을 때였습니다. 이때 이순신의 아들이 이순신에게 묻습니다. “아버지 물러서십시오, 과연 나라가 아버지를 위해서 해 준 일이 무엇입니까? 임금도 아버지를 믿지 않고 버렸습니다. 그러니 고향으로 돌아가십시오” 라고 말합니다. 그때 이순신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나라는 백성이고, 나의 충은 오직 백성을 향하는 것이다. 백성이 없는 나라가 어떻게 존재하겠는가?”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순신은 이렇게 말합니다. “330척을 가진 왜군들도 나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군사들의 두려움이다. 그런데 나는 군사들의 두려움을 이용하려고 한다. 군사들의 두려움을 잘 이용해서 극복하면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는 용기가 된다”고 했습니다. 그때 아들이 묻습니다. “아버지 어떻게 군사들의 두려움을 이용한다는 말입니까? 어떻게 두려움을 극복하고 용기를 가질 수 있습니까”라고 합니다. 그때 이순신이 이렇게 말합니다. “희생이다. 나의 희생이 군사들의 두려움을 극복하게 할 것이다”고 합니다.
/이 말을 아들은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먼 곳에서 330척과 싸우는 아버지를 보았습니다. 이순신은 혼자서 330척 앞에 나갔습니다. 그러니까 다른 11척의 배들은 모두 두려워서 물러섭니다. 그때 옆에 있던 장수가 그 나머지 11척을 어떻게 할까요 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순신은 가만히 두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순신장군이 제일 앞장서서 싸웁니다. 살고 자는 하는 자는 죽고 죽고자 하는 자는 살리라는 정신으로 앞선 자가 희생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그 모습을 보던 군사들이 두려움을 극복하고 이순신과 함께 용기 있게 나갑니다. 그리고 지켜보던 백성들도 이순신을 도와줍니다. 그 영화는 왜군 330척을 완전히 물리는 장면이 나오지 않습니다. 왜군들이 잠시 물러나고 난 다음에 두려움을 극복하고 이제 용기를 가진 군사들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영화는 끝이 납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제일 무서운 사람이 누구인 줄 아십니까? 죽기를 각오하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누가복음 14장에서 수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눅14: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잃어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예수님은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잃어버릴 각오를 하지 않으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어지는 비유에는 망대를 세우는 자가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않겠느냐고 합니다(눅14:29). 그리고 전쟁을 할 때도 군사의 숫자를 계산하지 않겠느냐고 하십니다.
그러면 여러분 우리가 주님의 제자로 주님을 따를 때 어떤 계산을 해야합니까? 목숨을 잃을 계산을 해야합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이 초대교회에나 적용되는 말씀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지금은 저 중동지방에나 적용되는 말씀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 추운 겨울에 어떻게 냉탕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한쪽 발은 냉탕에 한쪽 발은 밖에 놓고 아무리 생각해도 냉탕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죽었다고 생각하고 냉탕에 들어가면 됩니다. 그리고 조금만 지나면 시원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을 제일 쉽게 하는 방법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작은 일도 순교를 각오하면 쉽니다. 어떤 분들은 주일 예배에 참석하는 것도 힘들게 생각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순교를 각오하고 주일 예배 참석한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쉽습니다.
그래서 저는 학생들에게 사소한 일에도 목숨을 걸으라고 합니다. 그 사소한 일이 무엇입니까? 교회에서 내게 맡기는 사소하게 보이는 일들입니다. 회계하는 일입니다. 서기하는 일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보면 그 모든 것이 사소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 모든 일들을 목숨 걸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도 사탄이 일본군의 330척과 같은 권세로 어떻게 우리를 위협하고 있습니까? 두려움으로 우리를 위협을 합니다.
/우리를 두렵게 하는 사탄의 권세를 어떻게 이길 수 있습니까? 죽으면 죽으리라고 하면 됩니다. 우리의 대장이신 예수님은 제일 먼저 우리를 위해서 죽으면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도 그 예수님의 모습을 본받아서 앞선 자부터 죽으면 죽으리라고 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두려움을 극복하고 믿음으로 인한 용기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때 나는 빠지고 나대신 누구만 죽으라고 해서는 되지 않습니다.
나는 죽지 않고 나 대신에 누구만 죽으라고 외친다면 그 사람은 바리새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은 죽지 않고 예수님만을 희생제물로 세우고 그만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했습니다. “목사가 죽어야 교회가 산다는 말이 있습니다. 장로가 죽어야 교회가 산다는 말이 있습니다. 교인이 죽어야 교회가 산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죽지 않고 누구만 죽어야한다고 말하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물론 제일 앞선 자가 죽음의 본을 먼저 보여 주어야합니다. 그러나 한 사람만 아닙니다. 누구만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님을 본받아서 죽어야합니다.
/그럴 때 사탄과의 영적인 전쟁에서 두려움을 극복하고 승리하게 될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 죽을 때 부활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빌3:10,11).
우리가 죽으려 할 때 제일 두려운 것은 내가 죽으면 나는 어떻게 되지 라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죽으면 내가 사람에게 무시를 당하지 않을까 라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내가 죽으면 나의 모든 자존심이 짓밟힐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내가 죽으면 나의 미래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죽어야 산다는 것을 아는데도 쉽게 죽지 못합니다.
이것에 대해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우리에게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빌3: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라고 합니다.
여기서 보면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을 알고자 하여 예수님의 죽으심을 본받아서 날마다 날마다 죽음으로 부활을 경험한다고 합니다
이 부활은 단순히 우리가 죽어서 경험하는 부활만 아닙니다. 이 땅에서도 경험할 수 있는 부활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그를 높여주신 부활입니다.
빌2장8절에 “빌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부활하게 하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살려주시고, 높여주신 것이 부활입니다.
사도바울이 어떻게 예수님을 본받아서 날마다 자신을 죽이는 삶을 살 수 있었습니까?
그것은 자신이 죽으면 하나님께서 그를 살려주시고 높여주실 것이라는 부활의 신앙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죽을 수 있습니까? 우리가 죽을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죽으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려주신다는 부활의 신앙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죽으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려주시고 높여 주신다는 부활의 신앙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죽어도 살 수 있음을 참으로 믿으십니까?
죽으면 도리어 하나님께서 높여주심을 참으로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이 부활의 하나님을 믿음으로 마음껏 죽으시기 바랍니다.
죽으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나를 살려주시고, 높여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날마다 나 지신을 죽임으로 날마다 살려주시고 높여주시는 부활을 경험하시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세째, 죽을 때 하늘나라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게 되는 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나라입니까? 우리의 육신만 죽고 부활한 나라가 아닙니다. 우리의 모든 옛 자아가 완전히 죽은 나라입니다. 그래서 저 영원한 하나님니라에서는 더 이상 아픔이 없습니다 상처가 없습니다. 왜 그런 줄 아십니까?
저 영원한 하나님나라에서는 우리의 자아가 완전히 죽었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는 자주 내가 상처를 받았다.” 라고 합니까?
그 이유는 내가 완전히 죽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이 땅에서도 어떻게 히늘나라를 경험할 수 있습니까?
내가 죽으면 이 땅에서도 하늘나라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서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더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날마다 나 자신을 죽은 자로 여기며 살아 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도 저 영원한 하늘나라를 경험하며 살아갈 수 있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죽을 때 생명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24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여러분 만일 한 알의 밀이 공중에서 썩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공중에서 썩으면 없어집니다.
그래서 밀알은 반드시 땅에서 죽어야 합니다. 그래야 생명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땅은 무엇이겠습니까? 땅은 사람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목숨을 내어놓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목숨을 내어놓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당신입니다. 여러분들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사랑하는 성도님들을 위해서 한 알을 밀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내가 전도할 영혼들을 위해서 한 알을 밀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내가 속한 기관에서 한 알을 밀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삶 가운데 생명의 열매들이 가득하게 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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