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에 보면 34절에 보면 “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35절에 이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인 줄 알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방식대로 사랑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나는 분명히 그 사람을 사랑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온전한 사랑이 아닐 때가 많습니다. 요즘 정인이 사건 때문에 온 국민이 공분을 느끼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 양부모가 독실한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입니다. 학교도 유명한 기독교대학을 나왔습니다. 또 집안도 목회자의 자녀집안입니다. 또 입양을 한 것도 기독교인으로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과연 그분들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아이를 정말 사랑했느냐는 것입니다. 적어도 내 자녀만큼이라도 사랑해야하는데, 그렇게 했느냐는 것입니다. 아마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나는 그런대로 최선을 다해서 사랑했다고 할 것입니다. 또 훈육차원에서 그렇게 했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진정 여러분들은 예수님의 제자입니까? 정말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입니까? 정말 예수님을 여러분의 삶의 주로 섬기고 있습니까? 또 무엇보다 여러분들은 정말 예수님을 닮는 것이 여러분들의 인생의 목표입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한 것 같이 서로 사랑해야합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처럼 사랑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도무지 불가능합니다. 예수님처럼 사랑하는 것은 사랑의 기준이 너무 높지 않습니까? 어떻게 그렇게 사랑 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내 인간적인 기준대로 최선을 다해서 사랑하면 되지 않습니까? 라고 말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너희가 진정으로 내 제자라면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의 목표가 되어야합니다.
이것을 등산에 비유를 해보겠습니다. 등산을 할 때 제일 중요한 것은 목표입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정상을 목표로 하고 올라가야합니다. 그런데 만일 힘들다고 해서 정상이 아닌 다른 곳을 목표로 세우면 길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사랑의 기준을 어디에 두어야합니까?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한 것 같이”입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가 예수님처럼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처럼 사랑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고 용서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까? 어떻게 원수라도 사랑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까? 어떻게 원수를 위해서 축복하며 기도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처음부터 사랑의 기준을 나의 인간적인 기준에 둘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사랑했다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제가 분명히 말씀을 드립니다. 우리는 절대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한 것 같이 그렇게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사랑의 기준과 목표만큼은 잃어버리지 말아야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 사랑의 정상을 향해서 올라가다가 쓰러지고 미끄러지고 실패한다 할지라도 끝까지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그러면 그 언젠가는 우리도 예수님처럼 그렇게 완전한 사랑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인생의 난제를 풀 수 있는 해답은 오직 사랑밖에 없습니다. 사랑만이 해답입니다. 우리가 낙담과 절망에서 이길 수 있는 길도 오직 사랑밖에 없습니다. 또 그 교회가 참된 교회냐 아니냐를 판단 할 수 있는 기준은 오직 사랑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 사랑은 절대 내가 기준이 된 사랑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기준이 되고 목표가 되어야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서로 사랑해야합니까?
첫째,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은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사랑입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보시면 “요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곧 십자가에서 죽게 될 것을 아시고 남겨둔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몇 시간 뒤에 자신이 당할 고통을 미리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성만찬을 하시면서 그 포도주가 자신이 흘리게 될 피를 상징하는 것도 아셨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의 그 어떤 고통도 십자가의 고통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우리 같으면 곧 받게 될 십자가의 고통 때문에 제자들에 대한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이 당하는 십자가의 고통보다 이 세상에 있는 제자들에 대한 생각이 더 앞섰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보여주신 사랑입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내가 상처받은 것만 생각합니다. 내가 아픈 것만 생각합니다. 그래서 상처와 아픔이 많은 사람들은 오직 자기 자신만을 생각합니다. 내가 이렇게 힘들고 아픈데, 어떻게 내가 다른 사람들의 아픔과 상처를 돌아보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처가 많은 사람일수록 오직 자기 자신만을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은 그렇지 않습니다. 내게 아무리 큰 아픔과 고통이 있어도 다른 사람의 아픔과 고통을 더 생각해줄 수 있는 것이 예수님이 보여주신 사랑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이란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 하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세상 사람들이 우리의 무엇을 보고 예수님의 제자라고 합니까? 나보다 남을 더 생각하는 사랑을 할 때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예수님의 제자라고 합니다.
/가정으로 말하면 남편은 자신의 어려움보다 아내를 생각할 줄 아는 것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입니다. 또 아내는 자신의 어려움보다 남편을 더 생각할 줄 아는 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가운데 요즘에 힘들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나의 아픔 때문에 다른 사람의 아픔과 고통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목회자는 장로님들의 어려움을 더 생각하고, 또 장로님들은 목회자의 어려움을 더 생각하고, 또 성도님들도 나의 아픔보다 다른 성도님들의 아픔을 더 생각해줄 수 있는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두 번째,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은 그 사람아래 서 있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사랑하시니라고 하고 난 다음에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요13장 4절을 보면 “요13:4.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그 다음에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주이시지만 종으로 제자들을 섬기셨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발을 씻기기 위해서는 먼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발을 씻기기 위해서는 먼저 그 사람 아래 서 있어야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기 위해서 제자들 아래 서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은 그 사람 아래 서 있는 것입니다.
/만일 내가 그 사람 위에 서 있으면 교만입니다. 이렇게 교만하면 그 사람을 나보다 더 낮게 보고 깔보게 됩니다. 또 만일 내가 그 사람과 같은 위치에 서면 경쟁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잘되면 내가 배가 아파하고, 못되면 내가 이겼다고 우쭐거립니다. 이렇게 내가 누구위에 서 있거나 누구와 같은 위치에 서 있으면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이란 내가 누구의 아래 서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내가 누구의 아래 서 있는 것을 영어로 무엇이라고 하는 줄 아십니까?
"understand"라는 말입니다. “아래 서 있다”는 말로서 우리말로 이해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무엇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입니까? 그 사람 아래에 서서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발을 씻기시기 위해서 제자들 아래 서신 예수님은 식사를 하시다가 제자들의 발이 더러워져 있는 것을 보시고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발이 더러워진 제자들을 이해하셨습니다. “아 그래 밖에서 들어왔으니 너희들의 발이 더러워질 수밖에 없구나”라고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무엇이 진정한 사랑입니까? 그 사람 아래서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그 사람위에 있으면 “아니 그럴수가”라고 합니다.
또 그 사람과 같은 위치에 있으면 “네가 그럴 수가”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 아래 서 있으면 “아 그렇구나”라고 이해 할 수 있습니다.
/요즘 다시 깨달은 것은 “절대 사람들을 변화시키려고 하지 말아야겠다”는 것입니다. 나도 내가 원하는 대로 변하지 않는데 어떻게 내가 다른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할 일을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을 하나님께서 변화시켜주실 주실 것입니다.
/또 내가 그 사람 아래 서 있으면 그 사람의 필요가 무엇인줄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보다 낮은 자리에 서신 예수님은 지금 제자들에게 무엇이 필요한 줄 아셨습니다. 그것은 제자들의 더러워진 발을 씻어주는 것이었습니다.
/“라이프 오브 파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침몰한 배에서 한 소년이 구명보트에 탑니다. 그런데 그 보트에는 사람을 물어서 죽일 수 있는 뱅갈호랑이도 같이 타고 있습니다. 소년과 뱅갈호랑이는 한 보트에서 서로 공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처음에 그 소년은 힘으로 뱅갈호랑이를 제압하려고 합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소년과 호랑이는 서로 더 어렵게 됩니다. 그때 그 소년은 그 뱅갈호랑이의 눈을 보면서 그를 이해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가 무엇이 필요한가를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제 그에게 필요한 물고기를 잡아줍니다. 결국 나중에서 그 소년과 뱅갈호랑이는 친구가 된다는 내용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은 인간적으로는 서로 공존할 수 없는 사람들끼리 서로 한 배를 타고 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때 우리는 어떻게 서로 공존하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겸손하게 서로의 아래 서 있어야합니다. 그리고 서로를 있는 그대로 이해해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어야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함께 한 배를 타고 갈 수 있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셋째, 또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은 포기하지 않고 낙심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본문 1절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떤 신학자는 “사랑이란 사랑할 만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할만한 사람이 될 때까지 끝까지 사랑하는 것이다”고 했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입니다. 요13장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볼 때 얼마나 낙심이 되었겠습니까? 3년 동안 그렇게 서로 섬기라고 했는데 제자들은 끝까지 누가 서로 높으냐고 논쟁을 했습니다. 또 3년 동안 가르쳤던 제자들이 예수님을 배반하고 떠날 것을 예수님은 미리 아셨습니다. 심지어 제자들 중에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은30에 팔 것이라는 사실도 아셨습니다.
/아마 우리 같으면 낙심이 되어서 절대 이런 제자들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를 떠나가는 제자들을 보시면서 끝까지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나중에 그래도 안 되니까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그들에게 찾아오셨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예수님이 보실 때 사랑할만한 사람이 될 때까지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사랑이란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강도사 때 시골교회를 담임목회를 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정말 그 분들을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열심히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그 교회에 거지들이 찾아왔습니다. 저는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서 모두 가난한 자들이라고 하면서 그분들을 잘 맞이해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은 자기보다 못한 사람들이 교회에 오니까 모두 그 거지들을 좋지 않게 보았습니다. 그때 저는 그 성도님들에게 너무 실망하고 낙심했습니다. 그때 어떤 분이 제게 했던 말이 기억이 났습니다. “참된 사랑이란 그 사랑의 대상에게 절대 낙심하지 않는 것입니다”는 말이었습니다. “참된 사랑이란 낙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만일 부모가 자녀에 대해서 낙심한다면 어떻게 그 자녀를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다른 사람들은 모두 내 자녀에 대해서 낙심하고 포기하지만 부모는 절대 내 자녀에 대해서 낙심하고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비록 현재 내 자녀가 낙심이 되어서 포기하고 싶어도 예수님처럼 절대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자녀들이 정말 사랑할만한 자녀가 될 줄 믿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서로에 대해서 절대 낙심하지 마시고 포기하지 마시고 끝까지 사랑하시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넷째,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은 죽음보다 강한 사랑입니다(1).
우리가 서로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는 내가 사랑한다 하더라도 그 사람이 나에게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예수님께 제자들이 자신에게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했다면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한 결과가 무엇입니까? 배신입니다. 심지어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했습니다. 또 요13장 26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가롯 유다에게도 떡 한 조각을 주십니다(요13:.26). 그러니까 예수님은 마지막까지 가룟 유다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어떠합니까? 죽음이었습니다. 요13:2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적셔서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시니 27.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 가운데 예수님께서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고 하는데 그 일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죽이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신 결과는 배신이었고(-), 죽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랑의 결과가 배신이고 죽음이 되는 줄 아시고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사랑은 죽음을 각오한 사랑이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어머니가 자녀를 해산할 때 죽을 것 같은 고통에도 자녀를 낳는 것과 같습니다. 의사가 이렇게 말합니다. “자녀를 낳다가 죽을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하실 것입니까?” 라고 했을 때 산모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죽더라도 자녀를 낳겠습니다” 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은 죽음보다 더 강한 사랑입니다. 이 세상에서 죽음보다 더 강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죽음보다 더 강한 사랑을 하셨습니다.
/말세가 되면 사랑은 더 식어질 것이라고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람들은 사랑하면 할수록 나를 더 이용합니다. 사람들은 사랑하면 할수록 나를 더 배신합니다. 그래서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는 배신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또 사랑하면 나를 더 이용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또 사랑하다가 내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은 배신을 각오한 사랑입니다. 내게 있는 모든 것을 다 희생할 것을 각오한 사랑입니다. 심지어 죽음을 각오한 사랑입니다.
/초대 교회 어느 순교자의 기도가 있습니다.
나를 저주하십시오. 당신들이 나를 저주하면 할수록 더욱 나는 당신들을 사랑할 것입니다.
내게 침을 뱉어 보십시오. 그러면 나는 사랑의 숨결을 뿜어 낼 것입니다.
나를 때리십시오. 나는 신음 소리로 사랑을 고백할 것입니다.
나를 찌르십시오. 나는 사랑한다고 절규할 것입니다.
나를 짐승의 먹이로 던지십시오. 나는 사랑의 제물이 될 것입니다.
나를 불태우십시오. 그러면 나는 사랑의 열기로 당신의 증오의 가슴을 녹일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처럼 죽음을 각오한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이 사랑은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이길 수 있는 사랑입니다.
알프레드 D. 수자의 시가 있습니다.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춤추라, 아무도 바라보고 있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노래하라, 아무도 듣고 있지 않은 것처럼.
일하라, 돈이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살라,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여러분 진정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입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처럼 죽음을 각오한 사랑을 할 수 있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 부활의 영광이 있을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섯째,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은 모든 것은 덮어주는 사랑입니다.
요13장 17절에 “요13:17 너희가 이것을(발 씻겨주는 주는 영적인 의미를)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발을 씻겨 주라는 영적 의미는 예수님께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의 더러운 발을 씻어줌으로 서로 용서하라는 의미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전서 4장8절에 “벧전4:8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고 했습니다.
여러분 시은소라고 아십니까? 시은소란 법궤의 뚜껑을 말합니다. 법궤아래는 이스라엘백성들의 죄를 고발하는 십계명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궤위에는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가 있습니다. 십계명에 의해서 죄가 드러난 죄인들이 어떻게 무서운 진노의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습니까? 법궤위의 시은소에 어린양의 피가 뿌려집니다. 그래서 어린 양의 피가 인간의 모든 죄를 덮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위에 덮어진 그 피 때문에 우리의 죄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마치 우리가 죄가 없는 사람인 것처럼 우리를 만나 주십니다.
지금 저와 여러분이 어떻게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까? 그것은 이곳이 바로 시은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이곳에 예수님의 피가 덮여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의 덮여진 그 피 때문에 우리를 죄 없다 해주시고, 우리를 지금도 만나주십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덮여주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예수님처럼 우리의 모든 허물과 죄, 부족과 연약, 실수와 실패, 수치와 부끄러움을 서로 덮어줄 수 있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이 사랑이 넘치는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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