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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규가 노래가 될 때까지(이덕재)

by 금빛돌 2016. 7. 27.

절규가 노래가 될 때까지



「하박국 고통을 노래하다」를 읽고

이덕재



2014년 4월 16일. 이 날을 잊을 수 없다. 수학여행을 떠난 고등학생들이 타고 있던 배가 바다로 가라앉았다. 구조를 할 수 있는 골든타임 72시간 동안 정부는 원칙과 절차를 따졌다.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걸 지켜만 보는 게 그들의 절차였다. 자식을 잃은 부모들은 항구 길바닥에 나앉아 눈물을 쏟았다.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나는 고등학교 1학년이었다. 그리고 기독교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친구들과 나는 질문했다. “신이 있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지?”

 

그러나 신은 침묵했다.


나는 나름 답을 찾는다고 신정론에 관련된 책들을 읽기 시작했다. C.S.루이스의「고통의 문제」나「헤아려본 슬픔」, 존 힉의 「신과 인간 그리고 악의 종교 철학적 이해」등. 책을 통해 신정론에 대한 지식을 얻기는 했다. 그러나 완전한 답을 얻지는 못했다. 게다가 현실에서 마주하는 고통은 이론과 달랐다. 신정론이라고 불리는 논리의 성은 피부에 파고드는 고통에 산산조각이 낫다. 나는 여전히 고통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지 못한다.

 

고통이 갑자기 삶에 들이닥쳐 마음을 폐허로 만들었을 때의 기분. 밤이 땅에 내리듯이 고통이 삶에 내려 컴컴하고 고요하게 숨을 옥죄어 올 때 다가오는 사고의 정지. 어쩐지 신이라는 게 어딘가 있어 나를 지켜보고 있을 것만 같은데, 끝 없는 허공에다 부질없는 언어를 채우는 것처럼 창자가 뒤틀리도록 부르짖음에도 아무런 응답이 없음. ‘면전에서 쾅하고 닫히는 문’.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


그러나 신은 여전히 침묵한다.


신은 왜 침묵하는 걸까? 내가 스스로 답을 찾기를 원하는 건가? 아니면 긴 시간을 두고 천천히 대답하는 중인가? 혹시 이미 대답을 해줬는데 내가 못들은 걸까? 설마 신은 존재하지 않는 건가? 나도 모르겠다.


저자도 나와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 중 한 명이다. 그는 하박국을 통해서 신에게 물었다. ‘왜 고난 가운데 침묵 하십니까? 고난의 원인이 대체 무엇입니까? 고난이 하나님의 뜻이 될 수 있단 말입니까? 고난 가운데 기적 같은 승리가 다른 사람들에게는 일어나는데 왜 내게는 없는 겁니까? 암담한 고난 속에서 무엇을 보고 희망을 품는단 말입니까?’ ‘끝도 없는 물음을 끝도 없이 물었다.’


C.S.루이스는 「고통의 문제」에서 논리를, 「헤아려본 슬픔」에서는 경험을 적었다.「하박국 고통을 노래하다」는 그 둘 사이에 차분히 내려앉아 균형을 잡고 솔직한 문체로 이야기를 진행한다. 이론과 실존 두 마리의 토끼를 잡았다.

신정론, 자신의 경험, 하박국의 노래, 이 세 가지가 동시에 울려 퍼져 하모니를 이룬다. 자신의 경험은 신정론을 관통해 성서 속 하박국이 내지르는 절규에 이른다. 그러나 그런 방식으로 맞닥뜨린 절규는 곧 노래가 되어 치유의 손가락으로 우리의 심연을 어루만진다.


우선 신정론. 에피쿠로스가 제기한 악의 문제를 C.S.루이스와 플랜팅가의 자유의지 신정론으로 답변한다. 그것으로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은 신학적인 바탕으로 설명한다. 왜 선하고 전능한 신이 있는데 세상에는 악이 있는가? 왜 신은 악을 보고만 있는가? 이에 대한 논리적인 답을 제공한다.


다음은 저자의 경험. 목회를 하면서 겪었던 아픔, 죽어도 용서하지 못할 사람들, 그 사무치는 기억들을 꾸역꾸역 어렵게 꺼내어 보여준다. 아픔들 앞에서 어찌할 줄 모르던 자신이 어떻게 지금의 상태에 이를 수 있었는지 천천히 삶으로 말한다. 고통에 대한 답은 수학 도식처럼 단답식으로 도출되지 않는다. 단지 삶으로서 은은하게 노래할 수 있을 뿐이다.


마지막으로 하박국. 하박국서의 흐름, 의심 - 항의 - 포용을 통해 고통을 대하는 법을 알려준다. 신에 대한 격렬한 저항에서 시작해서 신의 대답을 기다리고 결국 마지막에는 노래를 부르는 하박국, 말의 논리가 아니라 실천의 윤리로 고통 받는 자와 함께하는 하바국, 고통에서 도피하려는 부르짖음이 아니라 신의 뜻을 부르짖는 하박국, 그의 행적을 따라간다.

 더불어 그의 시대처럼 폭력이 난무하는 우리 시대를 나란히 보여준다. 책을 읽고 나면 하박국이 저기 먼 고대의 왕국에 묻힌 이방인이 아니라 우리와 똑같이 비참한 시대에 몸을 떠는 동시대인으로 느껴진다. ‘어찌하여’, ‘도대체 왜’ 라고 울분을 토하며 질문하고, 속에서 솟구쳐 올라오는 분노를 신에게 뿜어내며 고통을 부둥켜 앉고 눈물을 훔치는게 하박국이다. 동시에 그건 우리의 모습여서 우리가 하박국이고 하박국이 우리다.


저자는 서두에 밝힌다. 완전한 해답은 나도 모른다! ‘고난에 관한 한, 고난의 학교에는 입학생만 있을 뿐 졸업생은 없다.’ 이 책은 작가가 씨름했던 과정,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고통을 해석하고 고통을 조금씩 떨구어 낸 치료의 기록이다. 우리와 같이 고난의 학교에 다니는 선배, 혹은 친구의 글로 읽으면 좋다.


밤이 오면 사방이 어둠이듯 세상에는 악이 가득찻고 고통이 만연하다. 아직도 내가 넘어야할 셀 수 없는 고통의 언덕들이 저기 어렴풋이 보인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 (시편 10:1) ‘주님 언제까지입니까? 어찌하여 악을 그대로 보기만하십니까?’ (하박국 2:1) 고통이 닥칠 때마다 마다 나는 묻고 또 물으리라. 그러나 입으로만 묻지는 않으리라. 온 몸으로 온 삶으로 묻고 답하리라. 절규가 노래가 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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